제천 일대에서는 구석기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 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송학면의 점말동굴의 구석기유적, 청풍면에서 발견된 유물과 고인돌등, 청동기유적, 신월동에 위치한 신석기시대 유적등이 그 증거입니다.
송학면에 있는 점말동굴에서는 그 당시의 꼬뿔소, 원숭이, 호랑이, 하이애나 등, 다양한 동물들의 유골과 뗀석기, 등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의림지역사 박물관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습니다. 4세기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이름은 '큰 둑'을 뜻하는 '내토'였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큰 둑'을 뜻하는 의림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5세기에는 고구려의 영역으로 이름은 '내제'였습니다. 고려의 땅이었을 때는 '제주'로 불리다 조선에 들어서서 전국의 '주'자가 들어간 고을이름 상당수를 '천'이나 '산'으로 개칭하면서 '제천'이라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습니다.
청풍은 군이었다가 17세기에 '도호부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청풍김씨인 명성왕후가 조선 18대왕인 현종비가 되면서 지금으로 치면 광역시에 해당하는 도호부로 승격이 된것입니다.
제천은 총 3차에 걸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는 되요, 1907년에 일어난 3차 의병활동을 빌미로 일본은 제천을 초토화 시켜버립니다. 이 일은 영국의 데일리 기자였던 메켄지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고 책이 발행이 되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대한제국의 비극'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메켄지 기자가 제천에 도착했을 때 제천시내에는 항아리 하나 성한것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방후 태백선이 개통 됩니다. 영월, 정선군, 태백시, 삼척시 등지에서의 광산붐으로 광물들을 서울로 수송하는 중추적인 역활을 맡게 됨으로써 도시가 크게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도시의 발달동기가 이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른 도시에 비해 이권을 둘러싼 다툼이 많았고, 80년대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전까지 치안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제천의 인구는 130000 명 조금 넘습니다. 면적은 880 제곱킬로미터로 서울의 1.4배정도 됩니다. 하지만 74%가 산으로 되어있고, 택지는 14제곱킬로미터정도뿐이 되지않습니다.
제천지역은 석회암지대로 물이 잘 빠지는 흙으로 되어있고,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많아서 약초가 잘 자라는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일제강점기 때부터 제천은 약령시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특화된 한약재 시장이 있고, 2010 국제한방바이오엑스포를 시작으로 해년마다 한방바이오 박람회를 10월에 개최하고 있습니다.전통의학의 소중한 가치를 체험 할수 있고, 한방명의촌에서는 전문한의사에게 진료받을수도 있습니다.
1,2월에는 겨울축제가 열리고 4월에는 벚꽃제, 8월에는 국제음악영화제, 9월에는 박달가요제, 10월에는 한방바이오엑스포 등 많은 축제가 개최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