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초안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이동과 전파'
1)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교리는 어떻고 어떻기 때문에 배척되었는가?
2) 언제 어떻게 실크로드를 통해서 이동 할 수 있었는가?
유물로 알아보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전파 1) 중국에 있는 비문에 나타나는 것.
우리나라에 경교로써 전해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1) 발해의 유물 -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불상에 대해서 종교의 교류란 인간들의 초인간적인 실재와의 신앙적 관계인 종교와 그에 수반된 종교문화의 상호 전파 및 무용을 말하는데, 이러한 교류는 정신문명 교류의 중요한 한 분야이다. 종교는 인간의 주관적인 심적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초인간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나 기원을 표백하기 위한 객관적인 사회공동체 형태와 표현수단으로서도 나타나는바, 이러한 형태와 수단을 종교분화라고 한다. 따라서 종교의 교류에는 주관적인 심적 현상과 객관적인 사회공동체 형태 및 표현 수단이 포함된다. 종교는 그 본질적인 교류는 신앙적인 것만이 아니라 종교철학, 종교윤리, 종교예술(미술 음악 등), 종교건축, 교단 등으로 문화전반에 걸쳐서 교류한다. 이러한 내용을 포함한 종교의 교류는 여타의 교류와 뚜렷이 구별되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첫째 특징은 강력한 문화접변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세계3대 종교(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를 비롯한 종교의 전파사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의 교류는 정신문명뿐만 아니라 물질문명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의 동정에 의한 서기수용은 일종의 순기능적 수용이 결과한 큰 문화접변이다. 그런가 하면 종교의 교류사에는 가끔 타종교의 전입으로 전통 종교나 가치관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역기능적 융화나 동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때로는 민족구성원 전체가 외래종교에 귀의함으로써 구래의 종교에는 물론, 사회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같이 종교의 교류는 종종 여타의 정신문명이나 물질문명의 교류에서 볼 수 없는 강력한 문화접변을 가져온다.
둘째 특징은 교류의 다양성이다. 종교와 종교문화의 내용이 다종다양한 만큼 종교의 교류 내용도 그러하다. 신앙의 대상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사회공동체적 표현 형태도 상이한데,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파활동은 이러한 다양성을 가증시킨다. 종교의 교류 수단과 양상도 내용만큼이나 다양하다. 마지막으로 비한계성(무한성)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문학이나 학문, 예술의 교류는 그 수단이나 담당자의 자질이나 능력 면에서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교의 교류만은 초지역적, 초국가적, 초민족적, 초계급적으로 거의 무한계, 무한대로 진행된다. 종교의 교류 대상에는 인간집단의 하층으로부터 상층에 이르기까지, 식자건 문맹자거건 할 것 없이 민족이나 사회구성원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종교의 교류는 선택적이 아니라 무소불위로 시·공간을 초월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런 이유들로 종교는 계속적으로 다른 곳으로 전파가 된다.
역사를 바라보면 특히 그런 종교의 이동이 실크로드를 통해서 가장 빈번히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기독교가 조선시대에 사신들이 들여온 것으로 알고 있다.(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국사책에 우리나라만이 자생적으로 서학이 발달한 유일한 국가라고 했으니.) 하지만 실크로드를 통해서 이미 훨씬 과거에부터 있었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게다가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보여주신 비디오와 다른 종교의 전래 과정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다가 정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비디오에서 보여준 서양에서 불상의 미소가 전래되고, 그것이 신라까지 와서 불상의 미소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로부터 미소 이외에는 또 무엇이 그러한 경로를 통해서 전달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물론 이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조사를 하다보니 통일 신라에 「경교」라고 해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들어오고 어떤 부처 조각의 목에 십자가가 걸려있었다는 문헌을 읽게 되어서 특별히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에 대해서 쓰기를 마음먹었다.
그래서 종교와 실크로드의 관계를 알아본 결과. 많은 수의 종교들이 실크로드를 타고 우리민족에게 전해져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대륙의 끝으로써 일본까지 문화가 전해지는 문화의 통로로써의 역할을 해왔기에, 일반적인 종교들은 우리나라를 한번쯤은 거쳤다. 대부분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각각이 유지되고 있지만, 유독 내가 관심이 가는 것은 경교였다. 즉,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이후, 네스토리우스교)라고 명명되어 있는 종교가 관심이 갔다. 우리나라에서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가 전래 된 것은 발해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발해는 국가 구성이 고위층의 몇 안 되는 고구려인과 피지배층인 다수의 말갈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유목민들이었던 말갈인들에 의한 중앙아시아와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에 따라서 실크로드를 통해서 발해로 유입된 네스토리우스교가 발해에서 유행했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사료로 전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에 의거해서 추측할 수 있다. 연해주 아브리코스 사원에서 발견된 점토제의 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와 중국 길림성 훈춘현 팔련성지에서 발견된 삼존불 중에서 왼쪽 협시 보살이 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를 걸고 잇다. 즉, 불교와 네스토리우스교가 결합된 형태로 되어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 실크로드로 유입된 네스토리우스교에 대해서 알아본다. 또한, 현대의 우리 사회에서 종교계는 다원 사회에서 원래 기능인 사람들의 안식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투기만 한다. 하지만 과거의 우리 선조들은 다른 종교도 포용할 수 있었고, 결합까지 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타문화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네스토리우스교와 묶어서 알아보자.
페르시아에 근거을 둔 네스토리우스파는 7세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네스토리우스 교회 총회는 496년 독립을 결의하였고 498년에는 완전히 독립된 교회가 되었다.
그 결과 중앙아시아 전역에 6세기까지 네스토리우스파가 전해졌다.
당 나라 태종은 네스토리우스파에게 장안에 정착하도록 해주었고638년 경교를 조정이 인정하는 종교의 하나로 선포하였고 장안 의령방에 사원을 건축하여 대진사라 칭하였으며 승려21명을 두어 포교하도록 하였다. 경교는 중국의 문화적 전통에 맞추어 선교하려고 노력했는데 경교라는 이름도 유교, 불교, 도교, 등의 명칭과 맥이 통하도록 했다. 성령을 현풍, 기도를 수공덕, 교당을 사, 수도사를 승, 주교를 대덕, 사도를 승가, 죄악을 악업, 삼위를 삼신, 천부를 천존 등으로 번역하여 기존 동양 종교와 연결성을 추구하였다 태종 이후 덕종에 이르는 150년 동안 경교의 신앙 상태를 보면 목탁을 두드리며 예배를 드렸고 동방을 향애 경배하였고 경승들은 수염을 깍지 않고 머리털도 정수리만 밀어 동방 종교의 전통을 따랐다. 노비를 금하고 재물 축적을 금하였고 수도원과 같은 수도제도를 갖고 있었고 안식일과 매일 일과 기도를 하였다. 경교는 나름대로 불교식 신앙 형태를 사용하면서 중국 문화에 접근하려 했으나 외래 종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민중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국인 고위관리들 가운데 경교를 숭배한 인물들도 여럿 나오게 되었는데 처음 알로펜을 영접했던 방현령을 비롯하여 현종 때 명장으로 이름 높았던 고력사(高力士)숙종, 대종, 덕종 3대를 섬긴 명장 곽자의(郭子義)와 그 밑에 있던 이사(伊斯)등이 대표 인물이다. 경교는 중국 무종 회창 5년 845년에 실시된 회창멸법 조치에 의해 경교는 쇠퇴하게 되었다.
회창멸법은 본래 불교를 멸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탄압의 범위가 불교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외래 종교에 까지 확대되었다 그 이후에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위상은 계속 바뀌었다. 11세기 이래 계속적으로 일어난 이슬람교의 강압과 박해는 페르시아 온 지역의 기독교를 거의 소멸상태로 몰아넣었다. 13세기 중반 북방에 출현한 몽고족은 아시아 대륙을 석권한 여세로 페르시아로 침입하여 이슬람 군대에게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1253년 10월 19일 징기스칸 (Genghis-khan, 成考思汗)의 손자인 후라크(Hulaku, 旭烈元)가 지휘하는 몽고족의 대군은 서방 원정의 장도에 오르면서 3년에 걸쳐 도중에 있는 알마릭. 파키스탄. 사마르칸드. 케슈. 칼샨. 레마밴드. 라이. 맨문디쯔. 아람하마단 등지를 모두 침략하고 1257년 9월 21일에는 바그다드 (Baghdad) 이르렀다. 그는 사절을 보내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왕국의 칼리프는 이 요구를 거절했고 결국 바그다드 성을 향한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후라크는 대군을 인솔하여 티그리스강을 건너 바그다드성에 육박하였으며 밀고 밀리는 접전을 거듭한 끝에 이듬해 2월 10일 바그다드 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칼리프는 체포되어 세 아들과 함께 처형 되었으며 이때 약 1만명에 달하는 이슬람 군대와 약 1백만명의 주민이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 후라크는 너무나 심한 시체의 악취를 견디지 못하여 근처에 있는 나카프 성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이러한 큰 전쟁으로 모든 이슬람교의 서적과 예술품이 소각되는 큰 변을 만났으며 학자들은 살해되는 불행을 겪었다. 최고도에 달했던 이슬람의 문화는 이슬람국 건설 이래 6세기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후라크는 승세를 몰아 다메섹과 예루살렘을 연달아 격파했으며 또 이집트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마침 몽고의 황제 망구 (Mangu, 憲系)가 세상 떠났다는 부보가 전달되자 후라크가 회군하여 귀로에 오르게 됨으로써 이집트를 향한 침략은 중단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에 이집트는 몽고족의 침략을 벗어나게 되었으며. 이슬람 문화는 이곳에서만은 어느정도 잔존의 자취를 남겨놓게 되었다. 후라크는 페르시아만으로부터 지중해에 미치는 넓은 판도에 이루칸왕국 (伊兒汗王國)을 건설하였으며 스스로 군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 이루칸왕국은 1335년까지 존속했다.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몽고족의 후라크왕은 이슬람교도에게 학살을 감행하면서도 기독교인에게는 보호정책을 썼다. 이것은 후라크의 측근 중에 기독교인이 여럿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즉 왕의 어머니와 왕비가 네스토리우스 교도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당시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법주인 마키카2세 (Machika Ⅱ)가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와같이 후라크가 기독교인을 보호한 결과 네스토리우스교회는 그동안 심하게 눌렸던 이슬람교의 박해에서 일단 벗어나 그후 얼마동안은 안도의 숨을 내 쉴 수 있었고 약간의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이루칸 왕국의 제2대 왕인 후라크의 장자 아바가(呵八哈. Abaga, 1265-1282)는 자신이 네스토리우스교를 신봉했으므로 기독교의 형편은 더욱 유리하였다. 특기할만한 일은 이 아바가 왕 때에 동서간의 교섭의 날이 열려 마르코 폴로 (Masco Polo)가 그의 숙부와 함께 1271년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 대륙에 이르는 긴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이다. 1284년 아바가왕의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아르건 (Argun, 1284-1291)은 부왕의 기독교 보호정책을 계승하였을 뿐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서방의 기독교국가에 대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표시하였다. 그는 1287년 네스토리우스교회 법주에게 서방 국가에 보낼 친선 사절을 물색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며 그리하여 위글루족의 소마법사 (掃馬法俟)가 유럽으로 가게되었으며. 또한 같은 시기에 유럽으로부터 몬테 콜비노 (Monte Corvino)의 내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아르건왕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을 이슬람교도로부터 탈환할 목적을 가지고 수차에 걸쳐 유럽의 기독교 국가를 향하여 파병을 요청했으며 남북으로 협공하여 이슬람 군대를 격파하자고 제의하였다. 즉 1289년에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 (Eward Ⅰ)에게 친서를 전달하였다. 에드워드 왕은 십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까지 하였으나. 얼마 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일어나 이 일은 좌절되고 말았다. 아르건왕은 1285년과 1285년과 1291년에 두 차례에 걸쳐 로마 교황에게도 사절을 보내어 우의를 표명하였다. 1291년 아르건 왕의 뒤를 이은 가이카투 (該哈圖. Gaikhatu, 1291-1295)는 기독교를 돕는데 보다 더 적극적이었으며 자신이 직접 교회에 출석하면서 금품을 바쳐 교회당 건축을 추진하는 등으로 기독교 보호에 크게 협력하였다. 드디어 밀월 관계의 끝이 왔다. 이루칸 국내에서 내란이 일어나서 몽고족 자신들의 힘의 소모를 가져왔을 뿐아니라. 그 영향이 기독교인을 향하여도 박해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295년 가이카투 왕과 그의 사촌 동생 바이투 (海都. Baitu)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이 내분의 틈을 타서 아라비아인 이슬람교도가 대거 침략하게 되었으며 왕은 체포되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뒤를 이은 바이투 왕은 이슬람교로 전향할 의사를 표명. 일시적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불과 몇달 후 살해되고 말았다. 이슬람 교도들은 난폭하게 기독교도들을 학살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도처에서 교회당을 불살라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혼란시기에 아르건 왕의 아들 가잔 (合贊. Ghahzan, 1295-1304)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참모인 나우르즈 (Nauruz)는 성품이 간교한데다가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나우르즈는 가잔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가 왕위에 오르면 이슬람교를 신봉하겠다고 하는 서약을 받아놓았을 정도로 집요한 인물이었다. 나우르즈는 그가 지닌 권세를 총동원하여 기독교 박해에 온갖 잔학성을 발휘 하였다. 교회당을 파괴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직자와 신도들을 구타. 학살하였으며 기독교인의 어린 자녀를 체포하여 노예로 팔아버리기까지 하였다. 1296년과 이듬 해의 2년 동안에 이슬람교도와 네스토리우스교도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전국적인 대립으로 확대되었으며 국가적인 위기마저 조성하는데 이르렀다. 가잔왕은 이 일을 크게 염려하여 중신들과 수습책을 협의하여 강포한 나우르즈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1297년 8월 나우르즈는 처형되었으며 내란은 수습되었고 두 교도 사이에는 휴전이 성립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번 권력을 장악한 이슬람교도의 압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가잔왕은 외교에 있어서 이집트와의 대립 관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유럽의 기독교 국가와 친선을 도모하는 정책을 썼다. 영국의 에드워드 1세가 랑그레이 (Langley) 사절로 이루칸 왕국에 보내왔을 때 가잔 왕은 랑그레이 일행에게 후한 선물을 주면서 극진히 대우하였다. 이것을 보면 가잔 왕의 기독교도 박해는 본의가 아닌 나우르즈와 같은 이교도 신하의 책통이었음을 파악하게 된다. 가잔왕은 1304년 5월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아르건 왕의 셋째 아들인 우르자이토 (鳥拉齊台. Uljaito, 1304-1316)가 계승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신앙적 감화를 받으면서 성장하였고 니콜라스 (Nicholas)라는 세례명까지 받고 있어 기독교인들은 그의 즉위를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면서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교회를 향한 세금을 면제하고 각종의 특혜를 베푸는 등 친기독교 정책을 폈다. 그러자 이러한 시책에 불만을 품은 이슬람 교도들은 온갖 음모와 계략을 다하여 그를 유인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왕후 쿤저스캅 (Kunjuskab)이 영향을 미쳐 마침내 왕으로 하여금 이슬람교를 전향하게 하였다. 이슬람 교인이 된 우르자이토 왕은 기독교를 향한 박해를 개시하였다. 그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마락카의 수도원을 이슬람교도에게 넘겨 주기도 했다. 사태가 이쯤되자 용기를 회복한 이슬람 교도들은 기독교인에 대해 심하게 공박을 가하면서. 알비누성에서는 기독교인 남자를 대량으로 살해하였고 여자와 아이들을 붙들어 노예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박해의 여파는 전국적으로 파급되었으며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우르자이토 왕의 뒤를 이어 1316년 아들인 아브사이드 (阿不. Abusaid, 1316-1335년)가 왕이 되었다. 그는 13세의 너무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부하 장군과 고관들을 전혀 통솔하지 못하였으며 정 치는 극단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상은 그가 죽은 후 더 수습할 수 없게 확대되어 이루칸왕국은 드디어 무정부상태로 빠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고 말았다. 그동안 국왕이 없는 페르시아 땅에는 1336년으로부터 1338년까지 무하메드 (Muhammed)가 지배하였고 1338년으로부터 1351년까지는 자할, 티므르 (Jahar Jimur)와 사티 (Sati Beg)과 수레멘 (Sulemen)의 3인이. 그 다음 1344년부터는 누실완 (Nushirwan) 등이 각각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며 잠시 정권을 쥐었다가는 사라지곤 하였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교의 강력한 영향하에 있었으므로 이 혼란한 시기에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받은 타격이란 막심하였다. 교회당은 모두 이슬람교 사원으로 바뀌었으며 기독교인은 사유 재산마저 몰수 당하였다.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은 자는 살해돼야 할 사정이므로 기독교인들은 표면상으로라도 개종한 모습으로 있어야 겨우 그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티무르 (帖木兒. Timur, 1336-1405)는 징기스칸의 후계자라고 자칭하고 있기는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닌 듯 하며. 그는 1336년 4월 11일 사마르칸드의 남쪽 케슈 (Kesh)란 곳에서 한 영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슬람교를 신봉하였으며 그의 일생의 목표는 징기스칸의 위업을 계승하여 위대한 몽고제국을 재건하는 것과 또한 이슬람교를 크게 부흥케 하는데 있었다. 티무르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370년경부터이며 점차 사방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마침내 1393년에 이르러는 이루칸왕국을 완전히 차지하고 바그다드 성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공략 작전의 준비와 그리고 인도 델리 (Delhi) 진군을 계획하여 일단 이곳에서 회군하였다가 1401년 다시 바그다드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 티무르의 바그다드 성 공략의 잔학상은 후라크의 공격 당시에 못지않게 참혹한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때에는 권세자가 기독교를 보호하였지마는 이번에는 반대로 이슬람교가 보호되고 기독교가 박해되었다고 하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이로 인하여 학살 당한 자의 대부분이 네스토리우스 교도였으며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파멸을 면할 길이 없었다. 동로마제국은 터어키의 장군 바야지드 (Bayazid) 공격을 가하여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티무르를 향하여 원군을 요청하였다. 티무르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바야지드를 무찌르기 위해 대군을 보냈다. 1402년 6월 16일 드디어 두 군대는 앙골라 (Angola)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티무르의 군대가 80만이었고 터어키군은 40만의 병력이었다. 전쟁의 결과는 티무르가 승리를 거두고 바야지드는 생포되었다. 이 전쟁의 큰 승리로 티무르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제는 몽고인의 대적인 명(明) 나라를 타도하고 중국 대륙을 이슬람교로 교화할 야망만 달성하면 그외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는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원정군을 편성하였으며 동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1405년 티무르는 카시칼 부근의 오트랄 (Otral)에서 70세 고령으로 별세하여 이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막강한 세력의 소유자 티무르가 죽자 곧 그의 제국은 분열을 면할 길이 없었다. 터어키국 바야지드 왕의 손자인 무라드 2세 (Murahd Ⅱ. 1421-1451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어나 단번에 티무르 군을 격파하였고 또한 무라드 왕의 아들인 무하메드 2세 (Muhammed Ⅱ. 1451-1481년)는 서방으로 진출하여 콘스탄티노풀을 함락하였다. 이리하여 과거 약 1천년 동안 유럽을 위한 병풍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아시아로부터의 침공을 막아오던 동(東)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티무르의 바그다드 공략 시기에. 그 참해를 피한 네스로리우스 교회의 신도들은 모슬 (Mosul) 산간 지방으로 들어가 1580년에 이르기가지 약 180년동안 그곳을 본거지로 하여 생활하였다.
티무르의 박해는 1393년 바그다드 공격시에 법주(法主)로 말, 시몬(Mar Simon)을 살해하면서 개시되었다. 그러기에 1401년 티무르가 다시 이 성을 치게되자 시몬2세 (Mar Simon Ⅱ)는 재빨리 쿠르디스탄 (Kurudistan) 산악지대의 코챠네스 (Kotchanes)로 몸을 피하였다. 그리하여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이곳 산간에서 1402년으로부터 1437년까지 약 35년간을 이르기까지 시몬3세를 거쳐 시몬4세에 이르기까지 법위를 지켜 내려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큰 문제가 네스토리우스교회 안에 발생하였다.
그것은 시몬4세 (Mar Simon Ⅳ. 1437-1477년)가 네스로리우스교회의 중흥을 위한다는 한 방책으로 모슬 지방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법주 세습제를 제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평지풍파를 일으켜 네스토리우스교회 일부로부터 강한 반발이 일어나게 됐고 결과적으로는 법주의 지위를 둘러싼 쟁탈전을 일으키게 작용하였다.
1551년. 시몬7세가 별세하자 시몬8세(Mar Simon Ⅸ. 1552-1559년)와 수락카 (Johu Sulaka) 사이에는 법주 계승을 위한 쟁투가 심하게 벌어졌다. 약세에 몰린 수락카는 로마의 교황청을 찾아가 교황인 줄리어스3세 (Julius Ⅲ)에게 간청하여 1553년에 교황이 써준 임명장을 가지고 돌아와 자기가 정당한 법주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를 반대하는 시몬 8세는 수락카를 향하여 로마교황에게 굴복한 비겁한 배신자라고 하면서 전혀 인정하려 않았다. 시몬9세 (Mar Simon Ⅷ. 1560-1600년) 이하 여러 법주들은 계속하여 로마교황과는 절연한 상태로 본래의 정통을 고수하여 나아갔다. 로마교황에게 귀속한 측은 자신들을 이름하여 갈데아교회 (Chaldeans)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반대 측에서는 마그로빈 (Maghlobeen)이라고 불렀다. 이는 정복된 자라고 하는 아주 멸시하는 호칭이었다. 이 계통의 네스토리우스교회는 법주 엘리아스 (Mar Elias)의 관할 하에 있으면서 티그리스강 동쪽인 엘쿠슈 (Elkoosh) 지방에서 교세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갈데아교회를 부인하고 정통을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시몬9세 때. 즉 1580년에 본거지를 모슬로부터 우르미야 (Urmiyah)로 옮겨 침체된 교회 기풍을 쇄신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뒤를 이은 시몬10세. 시몬11세 그리고 시몬12세에 관하여는 기록을 찾을 길이 없다. 시몬13세에 관하여는 그가 1662년에 법위에 올라 38년간 자리를 지켰으나. 로마교황청의 세력을 업은 갈데아교회 측의 엘리아 요하네스 (Elia Johannes, 1662-1700년)로부터 강력한 압박을 받으면서 적지않은 고통을 겪었다는 사정을 알려주고 있다. 그의 사후에는 1700년에 시몬14세가 법주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쿠르지스탄 산간지방에 가 있으면서도 그곳 주민들로부터는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네스토리우스 교도 중에는 지덕이 우수한 학자가 여럿이 있어 상공업과 농업 분야에 있어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제공하여 원주민을 위한 공헌이 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피난민 네스토리우스 교도와 원주민 쿠르트인과 사이에는 서로 돕는 원만한 생활이 이루어졌으며. 네스토리우스교회 법주의 지위도 원주민으로부터 숭앙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근세에 네스토리우스교는 19세기 초엽. 터어키가 쿠르디스탄 지방을 점유하게 두자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터어키인들은 이곳의 네스토리우스 교도를 학대하였다. 시몬15세의 뒤를 이어 1810년 법주의 자리에 오른 시몬16세는 1842년에 터어키 장군인 바드 베그 (Badr khan Beg)에 의하여 교인 3천명과 함께 학살되는 참변을 만났다. 뿐만 아니라 그 후 얼마 안가서 발생한 터어키군의 공격으로 티야리(Tiyari) 부근의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은 절멸될 정도로 살해 당하였다. 1843년에는 이러한 진상을 살피기 위하여 아시다 (Ashitha) 지방을 방문한 미국 선교사단 일행을 터어키인 지닐, 베그(Zinir Beg)가 습격하는 불상사를 일으켰으며. 이 때에도 터어키군이 약 3천명 교인을 살륙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티야리(Tiyari)와 데스(Des) 지방의 교회당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시몬17세 (1844-1880년)가 법주로 있는 동안에도 포학행위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1846년대는 테호마 (Tehoma)에서 약 5천명 교인이 살해되었으며 교회당은 소각되고 부녀자들은 능욕 당한 후에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의 보고를 듣고 분개한 유럽의 여러 나라가 터어키 정부를 향하여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였다. 터어키 정부에서는 항의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시하면서 군대를 파송하여 만행을 진압한다고 말은 하였지마는 이것은 체면 유지 뿐이었고 전혀 시행의 효과를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반발하면서 터어키 국내에는 전국적으로 민족주의적 국민운동이 팽배하게 일어났다. 이 운동은 네스토리우스 교도를 향해 더 심하게 박해를 가하는 명분을 제공한 결과가 되었으며 남자는 살해당하였고 여자는 도처에서 정조를 유린 당하였다. 시몬18세 (1880-1903)년의 뒤를 이어 시몬19세가 1903년 법주가 되기는 하였으나 너무나 박해가 심하여 간신히 견디어 나가다가 1917년에는 마침내 터어키군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시몬20세는 겨우 1년간 법주로 있다가 병사하였고. 그뒤로 시몬21세가 12세의 어린 나이로 법주를 계승하였으나 이슬람교도로부터의 억압을 견디어낼 방도가 없어 1925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영국으로 피신하여 갔다. 이 때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의 특별한 배려로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 덴마크 등지의 각국의 기독교 단체에서도 불우한 처지에 놓여있는 네스토리우스 교도를 구출하기 위하여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었다.
이와같은 상황 하에 네스토리우스 교도의 총수는 19세기까지는 약 20만을 헤아리고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급격히 감소하여 4만명 정도의 적은 수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 현상으로 되어 있다 (Mingana : Bulletin of the John Rylards dihrary, Vol, ⅩⅣ, P. 314) 현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법주인 시몬20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California) 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일리노이 (Illinois) 두에브 약간의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신도가 존재하고 있다 (Frank S. MeadHandlook of Denominations in the United States, P. 87).
애석하게도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현재에 있어서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 존재가 미미하며 거의 세인들로부터 잊혀진 사실로 돼버리고 말았다. 비석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장안성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781)이 있다. 중국에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가 전래한 635년부터 약 150년간 있었던 선교활동 및 교세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석비이다. 명(明)나라 말기 1625년에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서쪽에 있는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의 대진사(大秦寺)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이 석비는 당대(唐代)인 781년에 경교도 사즈드보제드가 건립한 것으로, 845년의 ‘박해령(迫害令)’ 후에 매몰된 것으로 추측된다. ‘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9자를 3행으로 새긴 전액(篆額)을 포함한 이수부분과 비문을 새긴 부분으로 되어 있다. 1800여 자의 한자와 50여 어의 시리아문자로 되어 있고, 한자는 대진사의 승려 경정(景淨)의 찬(撰)에 여수암(呂秀巖)의 서(書)로써 경교의 주요 교리와 성쇠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대진(大秦:로마제국 또는 페르시아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으로부터 전래된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는 638년 당의 태종(太宗:재위 626∼649)에 의하여 수도원설립이 허가된 이후 발전하여, 699년 및 713년의 불교도에 의한 박해를 거쳐 현종(玄宗:재위 712∼756) 때에 재흥되었다. 비문의 마지막에는 황제에 대한 상찬(賞讚)과 사제(司祭) ·수도사의 이름 및 지위 등이 열기되어 있어, 당대의 종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경교란 이름으로 당나라에 들어와 크게 성했던 시기와 (635-845년) 그리고 몽고족을 따라 들어와서 야리가온이란 명칭으로 활동하던 시기가 1234-1367년 으로 볼 때 중국과 가까웠던 우리나라도 경교가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경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올 때 우리 나라는 삼국이 통일되던 해(668년) 였다. 삼국을 통일 할 때 당나라의 군사력 도움을 받았던 것과 사회, 경제, 문화, 분야에서 당의 영향을 깊이 받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불교승들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불교는 전성기를 이루게 된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이런 점을 살펴볼 때 경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은 아주 크다.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제일 먼저 언급한 학자는 영국인 여류 고고학자 고든 (E.A gordon) 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무렵에 4년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불교 사찰을 돌아보고 한국 불교와 경교의 연결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특히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신장, 관음상, 나한상, 제석천성 등에서 페르시아의 경교적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통일 신라시대 능묘에 나타나는 십이지상 부조나 능 앞의 무인상에도 경교적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고든의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이 1956년 김양선에 의해 경주 불국사에서 십자가 형태의 석제물이 발견 되었고 전남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는 동제 십자가 그리고 마리아 상과 동일한 관음상을 볼 때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뒷받침 했다. 또한 과거 발해가 있던 곳에서 발견되는 유물 또한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중앙 아시아와 교류의 폭이 커지면서 발해에도 네스토리우스교가 유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료에는 전하지 않으나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로 추측할 수 있다.연해주 아브리코스 사원에서 발견된 점토제의 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와 중국 길림성 훈춘현 팔련성지에서 발견된 삼존불 중, 왼쪽 협시 보살이 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을 걸고 있다. 즉, 불교와 네스토리우스교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런 유물로 인하여 발해에도 네스토리우스교가 유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지역의 네스토리우스교의 유입 경로에 대해서 세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미 발해 지역에 정착한 소그드인의 영향, 위구르의 멸망으로 유입된 경우, 당에서 전수된 것으로 추정 된다. 결과적으로 실크로드는 환지구적(還地球的)문명의 통로로써 그 역할이 매우 컸다.
특히 여기서 다루고 있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경교)의 경우는 원래 있던 곳에서 발붙이지 못하고 실크로드를 타고 전이해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미리 동방에 기독교라는 존재를 미리 알려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나중에 들어오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나 의혹을 줄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여타 동방독립교회들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끈다. 일단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일명 네스토리아니즘, 네스토리아 교회) 는 에티오피아 기독교와 함께 여타 동방기독교 교회와는 다른 패턴으로 발전하고, 포교 또한 비잔틴제국 밖에서 되었다. 이 파는 앞서도 설명했지만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파문된 후 활로를 찾아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7세기에 ‘경교’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전파되었으며, 그 여파는 한반도까지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는 경교의 경전으로 대진경교선원본경(大秦景敎宣元本經)이 남아있고, 장안에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아직까지 남아있고, 그 당시 장안에는 사원까지 있을 정도로 포교가 많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당시 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곳이 중국이었고, 그 곳과 맞닿아 있던 발해와 황해만 건너면 되던 신라에서는 그 문화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발해와 신라를 이용해서 교린정책을 사용했던 당나라로써는 그 두 국가를 자주 수도로 부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각 국가에서 경교에 대한 존재와 그것의 교리에 대해서 알아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내가 평가하고 싶은 부분은 단지 신라인의 미소나 백제인의 미소처럼 우리 문화에 있는 모습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경교의 유물은 한결같이 불교의 불상과 결합되어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특히나 발해에서 발견된 불상은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다. 이런 점이 나는 우리나라의 전통사상인 화쟁사상과 원융회통사상이 발현되어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조상들의 다른 문화에 대한 관대함으로 보인다. 현대 사회는 세계화가 되어 간다고 말들 한다. 하지만 국적 불명의 문화가 단지 타문화를 잠식해 나가는 과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과거 조상들이 경교를 받아들이듯, 현재 우리들도 의식 있게 타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또한 과거의 종교는 종교간에 융합이 가능할 정도로 서로간의 유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의 종교계는(특히 우리나라에서) 다원 사회에서 원래 기능인 사람들의 안식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투기만 한다. 하지만 과거의 우리 선조들은 다른 종교도 포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쓴이: 死無靈(동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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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목련꽃이 질 때 원문보기 글쓴이: 어린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