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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1호. 서울숭례문(서울崇禮門) 서울 중구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린다. 1395년 (태조 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이 건물의 지붕 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1962년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화재 이후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진행한 후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복구 작업을 시작하였다. 복구 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그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하였다. 전통 기와를 올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이로써 숭례문은 약 3년의 복구 공사를 거친 뒤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국보2호. 원각사지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 서울 종로구
높이 12m. 이 석탑은 전체를 대리석으로 건조하였는데, 형태가 특수하고, 의장(意匠)이 풍부하여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례를 다시 찾을 수 없는 최우수작이라 하겠다.
현재 10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고 그 위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는데, 상부의 3층 옥개석(屋蓋石)이 오랫동안 지상에 방치되었던 것을 1947년 원상태로 복원한 점으로 보아 상륜부재가 없어진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던 것 같다.
기단부는 3층으로 구성되었는데, 건축기단으로서 면석과 갑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평면은 亞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층마다 각 면석에는 여러 가지 조각으로 화사하게 장식되었는데, 초층에는 각 면에 용(龍), 혹은 사자(獅子)와 모란(牡丹)·연화문(蓮華文)이 조식되고, 2층에는 각종의 인물·조수(鳥獸)·초목·궁전을 표현하였으며, 3층에는 많은 나한과 선인들을 조각하였다.
각 층의 갑석은 하면에 웅건한 당초문이 조식되고, 측면은 굽을 돌출시켜 갑석형(甲石形)을 이루었다. 그리고 상층기단 갑석 상단에는 난간을 장식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도록 하여 주목되고 있다.
탑신부는 초층부터 3층까지 평면이 기단과 같이 亞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4층부터는 방형(方形)으로서 이 윗부분은 일반형 석탑의 탑신과 그 형태가 같다. 각 층의 옥신에는 하단부에 굄대를 높직하게 마련하고 측면에는 난간을 모각하였다.
각 면 중앙에 12회(十二會)의 불(佛)·보살(菩薩)·천인상(天人像) 등을 조각하였으며, 네 귀퉁이에는 원형의 석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층마다 팔작지붕을 하였고, 하면에 두공(枓栱)을 모각하였는데, 지붕의 기왓골 등 모두 목조건축의 옥개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특히, 2층 정면의 지붕은 전각지붕과도 같고, 더욱이 3층은 이중의 지붕모양으로 조성되어서 그 의장과 기교가 놀랍다. 이 석탑은 전면에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 석재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서 한층 더 우아한 맛이 있다.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의 구조, 그리고 표면 전면에 장식된 불상의 조각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국보 제86호)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사용된 석재가 대리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석탑의 소속 사원(寺院)이었던 원각사는 1465년(세조 11)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석탑도 사찰 창건 당시의 건조물로 추정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보다 앞서서 건립되었다고 하나, 이것은 이 석탑이 전대인 고려시대의 경천사십층석탑과 너무나 흡사한 데에서 오는 억측일 수도 있으며 수려하고도 기교적인 면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탑파사상(塔婆史上) 손꼽히는 걸작품이라 하겠다.
국보3호.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서울 종로구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 신라 진흥황 척경비(국보 33호)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는 모두 4개이다. 서울의 북한산 비봉 정상에 세워진 북한산비, 경상남도 화왕산에 있던 창녕비,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에 세워진 황초령비,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에 세워진 마운령비 등이다. 진흥왕 순수비 4개가 모두 높고 가파른 산이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세워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국보4호.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 경기 여주군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사찰이 없어진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이 사찰에 있던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국보5호. 법주사쌍사자석등(法住寺雙獅子石燈)충북 보은군
높이 3.3m. 간주(竿柱)에 변화를 주어 특색을 발휘한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8각석등이다.
지표에 놓인 넓은 팔각 지대석(地臺石)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우주형(隅柱形)을 표시하였으나 각 면에 조식(彫飾)은 없고 상면에는 각형(角形)과 반원형 2단의 뚜렷한 굄이 표현되었다.
하대석(下臺石)은 8각으로 꽃잎 속에 화형(花形)이 장식된 단판복련(單瓣覆蓮) 8엽이 조각되었다. 8각기둥을 대신한 쌍사자(雙獅子)는 뒷발을 하대석에 버티어 가슴을 대고 마주 서서 앞발로 상대석(上臺石)을 받쳤으며, 머리는 들어서 위를 향하였는데 머리에는 갈기가 있고 다리와 몸에는 근육까지 표현되었다.
상대석에는 서로 양식이 다른 단판의 앙련(仰蓮)을 이중으로 조각하였다.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8각으로 네 곳에 장방형 화창(火窓)을 내었는데, 화창 주위에 작은 구멍이 있는 것은 다른 사실이 있었던 듯하다.
개석(蓋石)은 크고 8각이며 처마 밑은 수평이나 추녀 끝이 약간 반전(反轉)되었으며, 정상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옥개 위에는 구형(球形)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석등 중에서도 간고한 조각수법과 넓은 지대석 및 옥개석 등의 비례에서 장중한 품격이 넘치고 있다. 법주사에 전하는 또하나의 사천왕석등과 함께 신라 석등의 걸작이며, 조성연대는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국보6호.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충북 충주시
높이 14.5m인 이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7층 탑신을 형성하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구성한 방형중층의 일반형이다. 기단부는 10여 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한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상층·하층의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이 모두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것은 이 석탑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하층기단 면석은 양쪽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받침기둥) 3주가 정연하고, 상층기단 면석에는 양쪽 우주와 탱주 2주가 모각(模刻)되었으며, 상층 갑석에는 하면에 부연(副椽: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마련되어 신라식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갑석 위에는 별개의 돌로 마련된 2단의 각형 받침대가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도 하층부에서는 수매의 석재로 구성하였고 상층부에 이르면서 1매의 석재로 건조하였다. 각 층의 탑신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는데 초층은 우주가 별석으로 조성되었고 면석도 별석이며, 2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우주가 모각된 4매의 판석을 엇물림식으로 조립하였거나 혹은 앞뒤 양면에만 양쪽 우주를 모각한 판석을 세우고 그 양쪽(좌우)에는 단순한 판석을 끼워서 면석을 삼았는데, 상층부인 6층과 7층의 탑신석은 1석으로 조성하였다.
옥개석은 초층이 낙수면부와 처마 밑의 옥개받침부가 도합 8석으로 조립되어 있는데, 상층부로 올라감에 따라 낙수면부와 옥개받침부가 1석으로 되어 전체가 2석으로 조립되었으며, 6층과 7층에 이르러서는 1석으로 되었다.
옥개받침은 각 층이 5단씩이고 옥개석 상면에는 각형 2단의 받침대를 만들어 그 위에 탑신을 받치고 있어 신라석탑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추녀가 수평이며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反轉)도 잘 표현되어서 대규모의 석탑으로서는 경쾌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전각부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창건 당시에는 웅장한 규모에 장엄도 잘 갖추었던 당대의 유수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상륜부에서 특이한 것은 노반석(露盤石: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을 이중으로 놓고 그 위에 복발(覆鉢)과 앙화(仰花)를 구성한 점이다.
복발 측면에 한 줄의 띠를 돌리고 앙련(仰蓮)을 조각한 앙화석을 얹은 것은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상륜양식이라 하겠으나, 노반석 2석을 겹친 것은 아직 그 유례를 보지 못한 특수한 형식이라 하겠다.
이 노반석은 일반형과 같이 상단이 갑석형으로 되고 그 밑에 1단의 받침이 마련되었으나 그것이 신라시대 석탑에서 보는 바와 같은 단면수직단층을 이루지 못하고 안으로 굽었는데, 이러한 점은 아마도 고려시대의 보수(補修)가 아닐까 짐작된다.
국보7호. 봉선홍경사사적갈비(奉先弘慶寺事蹟碣碑) 충남 천안시
1026년(현종 17) 건립. 화강암제로서 이수와 귀부를 모두 갖추어 일반 석비(石碑)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현종이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홍경사를 조성하였다는 뜻에서 전액(篆額)을 “봉선홍경사갈기(奉先弘慶寺碣記)”라 사명(賜名)하였다. 갈기(碣記: 비석의 기록)에 의하면, 절이 있는 곳에 인적이 끊겨 도적이 많았으므로 이러한 우환을 없애기 위하여 승려를 불러 불법을 전하고자 절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현종 7년에 기공하여 6년 여에 걸친 공사로 당전(堂殿) 등 200여 칸을 짓고, 또 절 서쪽에 객관(客館) 80칸을 세워 경연통화원(慶緣通化院)이라 불렀다 한다.
글은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최충(崔沖)이 지었으며, 글씨는 백현례(白玄禮)가 썼다. 글씨는 자경 3㎝의 해서로 용필과 짜임새가 엄정하다. 구양순(歐陽詢)의 「황보탄비(皇甫誕碑)」에 가까우며 고려시대 해서로는 제1급이다.
방비원갈(方碑圓碣: 네모난 비석은 ‘비’라하고 둥근 비석은 ‘갈’이라한다)이라 하여 본래 비와 갈은 구분되었으나 이 홍경사갈은 일반적인 비와 다름없다.
현존하는 사적비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으로 용두화(龍頭化)된 귀두(龜頭)는 오른쪽으로 돌려 생동감을 더하고 있으며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장식하였다. 귀갑(龜甲) 중앙에는 앙련과 복련을 새긴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웠다. 비신 상단에는 전액이 있으며, 비면 가장자리에는 당초문대(唐草文帶)를 두르고 비신 옆면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을 조각하였다. 이수에는 도식화된 운룡문을 조각하였다.
국보8호.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 충남 보령시
비신높이 263㎝, 너비 155㎝, 두께 43㎝, 전체 높이 4.55m에 달하는 거대한 외형에 듬직하고 아름다운 조각수법을 구사하여 신라시대 석비를 대표할 만하다.
귀부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상태로, 귀부의 구름무늬나 이수(螭首), 4면의 운룡문(雲龍文)은 생동감이 넘친다. 이수 앞면 중앙에 마련한 제액(題額)은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다.
비문에는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행적이 모두 5천여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는데, 찬자(撰者)는 최치원(崔致遠)이며 글씨는 그의 종제 집사시랑(執事侍郎) 인연(仁兗)이 썼다.
비문에는 건립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데, 낭혜화상이 입적한 2년 뒤에 부도(浮屠)를 쌓았다는 비문으로 보아 이 때 비문이 작성되고 비가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한편, 그 밖의 비문내용을 참고하여 효공왕대 초기에 비문이 작성되고 서자(書者)인 최인연이 909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집사시랑이 된 이후에 비문이 쓰였고 비가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다.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한 이 비문은 신라의 골품과 고어(古語)를 연구하는 자료로서도 귀중하다. 글씨는 자경 2.5㎝의 해서로 최치원의 필의(筆意)를 지닌 구양통(歐陽通)류에 속한다.
짜임새의 어색한 점 등이 최치원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나 필획의 크기에 변화를 주어 행서의 필의를 해서에 가미시킨 점은 독특하다.
국보9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충남 부여군
석탑은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962년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이 사지에 대한 전면발굴이 이루어져서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
석탑의 주변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가람배치의 전모가 밝혀졌고, 일찍이 석탑 주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태평8년무진정림사)’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에는 정림사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져, 그 뒤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던 해로 생각된다.
이 석탑의 높이는 8.33m이며,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地臺石)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하였다.
기단부는 8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8매의 낮은 돌을 놓은 다음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1탱주, 면석이 16매로 조립되어 있는 중석을 놓았다. 중석 위에 갑석(甲石)은 8매로 구성되었으며 두껍다. 상부면은 약간의 경사가 있도록 하여 낙수면을 이루게 하였으며 탑신부를 받는 받침 없이 평평한 갑석 위에 탑신을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108개나 되는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층의 조립형식은 같다. 초층탑신은 규격이 크기 때문에 12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있는 우주석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은 2매씩의 긴 판석을 끼웠다. 2층 이상의 탑신에 있어서는 2, 3층은 4매, 4층은 2매, 5층은 1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각 층의 양쪽 우주에는 역시 배흘림이 표현되었으나 초층에 비하여 2층 이상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체감되어 아주 낮아졌기 때문에 우주도 짧아서 배흘림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된 탑신석 전체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넓은 점이 눈에 띈다.
각 층 옥개석은 낙수면부와 받침부가 별개의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여러개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각 세부에서 목조가구의 변형수법을 볼 수 있다. 특히, 두공(枓栱 : 공포 부재의 총칭)을 변형시킨 받침이나 낙수면 네 귀퉁이에서의 기와지붕의 우동마루형 등은 목조가구의 수법을 잘 보여준다.
옥개석 하면의 받침부는 4매의 각형 판석을 아래에, 그 위에 다시 8매의 각을 죽인 모죽임형 판석을 얹은 2단으로 미륵사지석탑에서 보이는 창방, 평방, 포벽 등의 석재가 없고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모전석탑(模塼石塔)에서 시작된 신라의 석탑 역시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화하여 지붕 아래를 내어쌓기로 하여 옥개 받침을 표현하였고, 통일신라 감은사지삼층석탑에 이르면 각형의 5단 층급받침 형태로 옥개받침이 정형화되고 낙수면은 지붕모양으로 경사를 나타나게 하였다.
낙수면은 평박하면서도 넓어서 늘씬한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이 전체적으로 살짝 반전(反轉)되어 목조건축의 처마선처럼 경쾌하다. 옥개석 위에는 다른 돌을 놓아 높은 굄대를 만들어 그 위층의 탑신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높은 굄은 2층 이상의 탑신이 지나치게 체감되어 자칫하면 중후해질 것을 우려하여 취해진 구조로서, 이로 말미암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경쾌감을 더하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5층옥개석 위에 거의 원추형에 가까운 노반석(露盤石) 하나가 있을 뿐 다른 부재가 없으며, 찰주공(擦柱孔)은 노반을 관통하여 그 밑의 옥개석 중심부에까지 패어 있다.
1963년 조사에서 4층 탑신 남면에 두께 13cm의 판석으로 가린 사리공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사리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써 변형하여 표현하고 있는 탑으로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화시킨 옥개석 하면의 받침수법, 낙수면 네 귀의 우동마루형 등에서 그와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것에서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번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의 초층탑신에는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이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어서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세련되고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며,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탑 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자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석탑은 각부의 양식수법이 특이하고 본격적인 석탑으로 정착하고 있는 전이적인 규범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보10호.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實相寺百丈菴三層石塔) 전북 남원시
전체를 화강암으로 건조한 이 석탑은, 현재의 백장암 남쪽 아래 경작지에 남아 있어 석탑 바로 뒤에 서 있는 석등과 같이 원위치로 생각되며, 그 북쪽에 법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뚜렷한 점으로 보아 본래는 백장암이 이곳에 경영되었을 것이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구조와 각부의 장식적인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여주는, 이른바 공예적인 이형석탑(異形石塔)이라고 하겠다.
기단부는 네모난 지대석 위에 별개의 돌로 탑신 굄대를 조성하여 얹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굄대의 상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나 측면에는 사방에 난간형을 돋을새김하여 둘러서 흥미롭다.
탑신부에서는 초층옥신이 너비에 비하여 높으며 2·3층의 옥신도 감축도가 많지 않아 또한 특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옥개석은 각 층 모두 처마가 직선이고 네 귀 전각의 반전이 경쾌하며 낙수면(落水面)도 평박하여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법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 하면은 층급을 이루지 않고 있어 이것도 또한 특수한 점이라 하겠다.
상륜부는 약간 결손된 부분도 있으나 방형의 노반석 위에 복발(覆鉢)·보륜(寶輪)·보개(寶蓋)·수연(水煙: 탑의 구륜 윗부분에 불꽃 모양으로 만든 장식) 등 부재가 정연하게 완전한 찰주(擦柱: 탑의 중심기둥)에 차례로 꽂혀 있음은 희귀한 유례라 할 것이다.
이 석탑은 이와 같이 각 부의 구조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 밑에 섬세하고도 화려한 조각이 가득히 조식(彫飾)되어 더욱더 주목된다.
즉 초층옥신석 사면에는 보살입상과 신장상 2구씩을, 2층옥신 각 면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2구씩을, 3층의 사면에는 1구씩의 천인좌상(天人坐像)을 각각 돋을새김하고 있어 만면(滿面)에 조각이 화려하며, 2층과 3층 옥신석의 하단에는 난간을 둘렀다.
또 상단부에는 3층에 다같이 목조건축의 두공형(枓栱形)을 새겼다. 1층과 2층 옥개석 하면에는 앙련(仰蓮)을 조각하였고 3층 옥개석 밑에는 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이와 같이 각 부 구조에서 전형적인 양식에 구애되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볼 수 있고 각 부재의 표면조각에서도 특이한 의장을 찾을 수 있는 점이 신라시대 굴지의 아름답고도 특수한 형식의 탑이라 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南原實相寺百丈庵三層石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