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역 밖의 지역 일대는 죽산 안씨(竹山安氏) 집안의 묘역으로서, 남편인 안맹담의 분묘와 나란히 묻혀 있다.
세종이 방언(동방지언의 준말)이 문자(한자)와 뜻이 서로 통하지 못함을 어여삐 여겨 비로소 훈민정음을 창제할 제, 변음과 토착을 다 연구하지 못하여 제 대군들로 하여금 풀게 하였으나 다 풀지 못하여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었다.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은 크게 기뻐하여 상을 주고 특히 노비 수백구를 하사하였다.
(世宗憫 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 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水百口)《죽산안씨대동보》원문 중에서
안맹담에게 출가한 정의공주에게 대군들이 풀어내지 못한 변음과 토착어를 풀도록 하였던 바 정의공주가 한글의 변음과 토착음을 풀어 올리니 세종대왕께서 극찬하시었고 상으로 노비 수 백구를 내렸다’ 라는 기록이다.
그리고 왕자들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직동해자습」 이라는 책에는 성삼문이 ‘한글을 만든 것은 세종과 문종’ 이라고 언급했다. 충분한 사료적 근거는 없지만 세종이 한글을 가족들과 비밀리에 연구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은 한글 창제 후 운해를 만드는 사업에서 세종은 왕자들을 동원했고 훈민정음 사업에서 세자와 왕자를 총 책임자로 임명하는데 이는 세종의 가족들이 한글 창제에 참여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추정할 수 있다.
정인지 서문이 쓰여진《훈민정음 해례본》과 신숙주 서문이 쓰인 《동국정운(東國正韻)》에는 세종이 만들었다고 하였고,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문집인 ‘보한재집(保閒齋集신숙주의 호)’의 부록인 강희맹이 지은 신숙주의 행장에는 한글은 세종이 쓴 글이라고 되어 있다.
반면에 단종 때 기록되어진 성삼문의 서문이 쓰여진《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신숙주의 서문이 쓰인《홍무정운 역훈(洪武正韻譯訓)》에는 문종이 한글창제에 세종을 도왔다고 하였다.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성삼문 서문
우리 세종 문종께서 이를 개연(慨然)히 여기시어 이미 훈민정음을 만드시니, 천하의 모든 소리가 비로소 다 기록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 지금의 우부승지 신숙주와 겸 승문원 교리 조변안, 행 예조좌랑 김증, 행 사성 손수산들에게 명하시어 훈민정음으로 한자의 훈訓을 번역하여 가는 글씨로 각 글자마다 아래에 써 넣게 하시고, 또 方言(우리말)을 써서 그 뜻을 풀이하도록 하시었다.
그리고 이어서 화의군 이영과 계양군 이증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장케 하시고 동지중추부사 김하와 경창부윤 이변에게는 그 의심나는 곳을 증명하여 이를 두 가지로 표기하도록 하시었는데, 음과 뜻이 밝고 분명하여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았으나 쓰리고 한탄스러운 바는 책이 겨우 다 이루어지매, 궁검(弓劒)을 이어서 버리신 일이다.(세종이 승하하고 이어 문종도 승하하셨다). (중략) 두 성인(세종, 문종)께서 제작하신 묘함이 높이 백대에 뛰어나시며, 이 책의 번역이 외천보국 (畏天保國)을 위한 지극한 계획이 아님이 아닌 것을 볼 수 있거니와, 우리 성상의 선계(善繼) 선술(善述)의 아름다우심도 또한 극진하시다고 말할 수 있다
《홍무정운 역훈(洪武正韻譯訓)》신숙주 서문
문종(文宗) 공순대왕(恭順大王)께서 동궁에 계실 적부터 성인으로 성인을 보좌하여 성운(聲韻)을 참정(參定)하셨고, 대위를 계승하게 되자 신 등 및 전 판관 신 노삼(魯參)ㆍ현 감찰 신 권인(權引)ㆍ부사직 신 임원준(任元濬)에게 명하여 거듭 교정을 가하게 하였다.
<신숙주(申叔舟): 보한재집(保閒齋集) 권 11 부록 행장(진산 강희맹 지음)>
임금(세종)께서 우리나라 음운이 화어(중국어)와 비록 다르나 그 ‘아/설/순/치/후, 청/탁, 고/하’가 중국과 마찬가지로 다 갖추고 있어야 되고, 그리고 여러 나라가 모두 제 나라 언어음을 나타낼 글자를 가지고 있어서 제 언어를 기록하고 있으나 홀로 우리나라만이 글자가 없다고 하셔서 언문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궁중 안에 기관을 설치하여 문신을 뽑아 언문관계 서적을 편찬할 때, 공이 실지로 임금의 재가를 받들었다.
우리나라 어음이 그릇되어 정운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는데, 때마침 한림학사 황찬이 죄를 지어 요동에 귀양을 와 있었으므로 을축(세종 27년) 봄에 공에게 중국에 가는 사신을 따라 요동에 가서 황찬을 만나 음운을 물어 보라고 명하시어, 공이 한글로 화음을 옮겨서 묻는 대로 척척(빨리) 깨달아 조금도 틀리지 않으니 황찬이 크게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요동에 다녀오기 무릇 열 세번이었다. (중략) 공이 한어·왜어·몽고어·여진어 등에 모두 통하여 때때로 혹시 통역의 힘을 비는 일이 있어도 역시 스스로 뜻을 통했다. 나중에 공이 손수 외국어를 번역하여 나라에 바치니 통역들이 이에 힘입어 밝게 통하여 스승한테 배우지 않았다.
《왕조실록》에서는 제종 25년에 《훈민정음》을 완성하였으며 이를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서를 만들라는 것으로 이는 만들어진《훈민정음》의 언해본을 만들라는 기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종 당시 기록에 의하면 세종조 때 신숙주와 성삼문 등을 보내어서 황찬에게 어음과 자훈을 질정하여 《홍무정운》과 《사성통고》를 지었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한글을 사용하여 풀이한 운서들이다.
세종 27년(1445년) 1월 7일 기사
집현전 부수사 신숙주 등에게 요동에 가서 운서를 질문해 오게 하다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와 성균관 주부(注簿) 성삼문(成三問)과 행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
성종 18년(1487년) 2월 2일 기사
시강관 이창신이 젊은 문신으로 하여금 요동의 소규에게 질정하도록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강관(侍講官) 이창신(李昌臣)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들으니, 전 진사(進士) 소규(邵奎)는 어버이가 늙어서 요동(遼東)에 산다 하여 돌아올 때에 방문하였는데,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자훈(字訓)에 정밀하였습니다. 세종조(世宗朝)에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을 보내어 요동에 가서 황찬(黃瓚)에게 어음(語音)과 자훈(字訓)을 질정(質正)하게 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과 《사성통고(四聲通考)》 등의 책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서 한훈(漢訓)을 대강 알게 되었습니다.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언해본》을 편찬한 정인지와 요동에 있었던 황찬을 방문하였던 신숙주와 성삼문 두 사람이 모두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창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집현전학자들이 만들었다고는 할 수가 없고 다른 곳에서 들고 있는 정의공주를 비롯한 문종 등이 한글창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높다고 할 것이다.
《죽산안씨 대동보》에 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어’를 풀어서 바쳤다고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언급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정의공주가 관여한 것이 아니라면 이같은 전문적인 용어를 임의적으로 지적하여 언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종 때 기록되어진 성삼문이《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서문에서, 신숙주가《홍무정운 역훈(洪武正韻譯訓)》서문에서 문종이 한글창제에 세종을 도왔다고 하였던 점을 본다면 세종의 가족인 문종과 정의공주 등의 세종의 가족들이 《훈민정음》창제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