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즘과 중세철학 : 중세철학에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던가?
중세철학에 대해서 안 좋은 선입견을 가진 사람은 대개 중세에는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다”라는 말을 언급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가끔 중세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조차도 그렇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도 완전히 사실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안에는 “중세에는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철학, 즉 진정한 의미의 철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하나의 관점에 매우 치우쳐진 좁은 생각이다. 중세는 무려 천년 이상 지속된 시기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철학들이 있었고 오캄과 같은 철학자는 근대정신을 가졌던 철학자이기도 했다. 만일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그것은 교부철학일 것이다. 최소한 교부들의 철학에서는 철학의 역할이 신학에 봉사하는 것이 사실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콜라(Scola)철학 이후에는 철학이 자신만의 고유한 분야와 고유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자율적인 영역과 방법론을 가진 독자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스콜라철학 이후에는 “철학은 신학의 동반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힐쉬베르거는 《서양철학사》에서 중세철학에 대한 편견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시대를 특징짓기 위해 거듭거듭 인용되는 말은 페트루스 다미아니의 「철학은 신학의 하녀」라고 하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철학은 ‘전제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세기에 진정한 철학이 있었느냐 하는 것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피상적인 판단이요, 피상적인 물음이다. (...) 철학사마저도 이러한 시대에 관해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해 줄 줄을 몰랐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그, 『서양철학사』, 상권,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1983, p. 381.
페트루스 다미아니는 1007년에 탄생하여 1035년에 베네딕도 수도자가 된 교부철학자이다. 따라서 교부철학자로서 그는 당연히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콜라철학이 시작되면서 철학은 더 이상 신학의 시녀가 아니라, 신학의 동반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시기에서 철학을 자율적인 학문으로 철학만의 고유한 영역과 방법에 대해서 정립하고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철학’이라는 것을 형성했던 첫 사상가는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볼 수가 있다. 비록 스콜라철학 즉 대학철학이 지칭하는 의미 안에 이미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겠지만, 순수한 철학 혹은 진정한 철학을 면모를 제시하였던 철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에서부터였다. 아래 내용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신학적인 것과 철학적인 것, 그리고 그 통일성」이라는 논문의 결론 부분이다. 여기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이 신학과 동반자의 관계를 형성함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상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신학적인 것과 철학적인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으며, 또한 이 두 학문이 가진 고유한 위치나 대상 그리고 역할들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이러한 고찰에서 드러난 그 몇 가지 핵심을 요약하면 첫째 신학은 계시된 진리를 근거로 출발하며, 철학은 자연적인 이성에 의해 밝혀진 사물들의 본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신학은 확실한 진리 즉 최종적인 결론을 소유한 것으로 철학에게 진리의 방향성을 지시하는 역할을 하며, 철학은 확실하지만 앎으로서는 분명하지 않는 신학의 진리들에게 분명한 앎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철학은 신학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셋째, 신학은 비록 세계와 자연을 그 대상으로 다룰 때에도 이들이 가진 신과의 관계성을 문제 삼고 있기에, 신학은 본질적으로 신을 그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반면 철학은 우선적으로 세계와 자연을 그 대상으로 하며, 그들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원리들(본성, 본질, 속성 등)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철학이 신에 대해서 다룰 때라도 철학의 근본적인 목적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보다 참된 앎을 가지기 위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신학은 진리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가지고 세계와 인간을 신과의 관계성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이며, 철학은 진리 안에 내포된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분명한 앎을 산출하기 위해서 ‘논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철학과 신학은 서로 상호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동반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이러한 두 학문이 하나의 유기적인 방식으로 조화롭게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 곧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대전』은 그 이전의 신학들에 비해 보다 학문적으로(혹은 과학적으로) 완성된 연구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오늘날 여전히 가장 보편적으로 선호하는 ‘신학연구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동서인문》, 제8호,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2017, 10. 맺음말 중에서)
만일 누군가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서 “그는 신학자인가 철학자인가?”라고 묻는다면, 질송의 말을 빌어서 “그는 철학을 공부한 성인(聖人)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이 철학을 할 때 그 장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리를 통찰하고 있는 사람이 철학을 하고 있다는 그 장점에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여전히 ‘토미즘’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철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유럽에는 많은 토미스트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유를 기초로 하여 자신들의 철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래 논문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철학적인 것과 신학적인 것을 구별한 논문입니다.
동서인문(8호,2017) 01 이명곤(기획고전).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