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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묘지명 행장 등 자료
양명학 강좌 자료 (2018-2회, 3월 21일)
1、왕양명 묘지명 (담약수 지음)
2、왕양명 행장 (황관 지음)
3、師服問 (錢德洪 지음)
4、訃告同門 (錢德洪 지음)
5、遇喪於貴溪書哀感 (錢德洪 지음)
* 왕양명 가계표
王綱---王彦達---王與準---王傑---王倫---王華
王華---王守仁,王守儉,王守文,王守章,딸 1명
王守仁---王正億---王承勳,王承學,王承恩,王承式,王承忠
└--王正憲---王承光
* 참고자료
유기 (劉基, 1311-1375)
누량 (婁諒, 1422-1491)
진헌장 (陳獻章, 1428-1500)
왕화 (王華, 1446-1522)
대선 (戴铣, 1464-1506)
담약수 (湛若水, 1466年 11月20日-1560년 5月16日)
서목 (徐穆, 1467-1511)
왕양명 (王守仁, 1472年 10月31日-1529年 1月9日)
황관 (黃綰, 1477—1551),字宗賢、叔賢,號久庵、石龍。浙江省 黃岩縣 洞黃。
왕정억 (王正億, 1526-1577)
유근 (劉瑾, 1451-1510)
양명 선생 묘지명 (담약수 지음)
나(湛若水, 1466-1560)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 광동성 남해현 서초산 연하 마을(廣東省 南海縣 西樵山 煙霞)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세상을 떠난 벗 신건백(新建伯) 양명 왕선생의 아들 왕정억(王正億, 1526-1577)이 장인 예부상서 구암(久庵) 황관(黃綰, 1477—1551) 선생이 지은 행장과 서신을 갖고 찾아와서 아버지 왕양명 선생의 묘지명을 써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정억이 장인 황관의 부탁을 전하여 “당신께서는 양명공을 잘 아시는 분이신데 당신이 아니시면 어느 분이 묘지명을 지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나는 “내가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당신께서는 양명공을 잘 아시는 분이다.’고 말씀하셨는데, 황관 선생이 아니면 어느 분이 양명공의 행장을 짓겠습니까? 황관 선생이 양명공의 행장을 지으면 제가 묘지명을 쓰겠습니다. 황관 선생이 지은 양명공의 행장이 상세하니 저는 양명공의 큰 업적을 묘지명에 쓰겠습니다. 묘지명을 제가 무슨 까닭에 사양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황관 선생이 지은 행장을 펼쳐서 보면서 조심스럽게 묘지명을 짓습니다.
행장에서 양명공의 윗대 조상님들에 관한 글을 읽어보니, 양명공은 용산공 장원 대종백 왕화(王華, 1446-1522) 선생이 나으셨고, 대종백 왕화 선생은 예부시랑에 추증되신 죽헌공 왕윤(王倫) 선생이 나으셨고, 죽헌공 왕윤 선생은 태학생이며 예부시랑에 추증되신 괴리공 왕걸(王傑) 선생이 나으셨고 왕걸 선생은 왕언준(王與準) 선생이 나으셨고 왕여준 선생은 예학과 역학을 공부하셨고, 왕여준 선생은 미도호(秘圖湖)에서 물고기 잡으며 은거하셨던 왕언달(王彦達) 선생이 나으셨고, 왕언달 선생은 왕강(王綱) 선생이 나으셨고 왕강 선생은 문무(文武)가 뛰어나셨고 명나라 건국에 공을 세운 유기(劉基, 1311-1375) 선생과 가깝게 지내셨으며 광동성 참의(參議)을 지내시다가 난리에 돌아가셨습니다. 가문을 멀리까지 따져보면 옛날 진(晉)나라 훌륭하신 선비 왕희지(王羲之, 303, 321-361, 379年) 선생과 광록대부 왕람(王覽, 206-278, 24명 효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왕희지의 증조부) 선생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양명공은 이렇게 훌륭하신 조상님들을 본받으셨구나.”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쌓여진 흙이 두텁고 물도 많아야 생물들이 번성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까닭인가 봅니다.
행장에서 양명공이 태어난 것에 관한 글을 읽어보니, 할머니 잠(岑)씨 숙인께서 꿈을 꾸셨는데 어린아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데 세상 사람들이 잘살게 하려는 하늘의 성인께서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꿈에서 깨어나자 양명공이 태어났고, 그래서 이름을 구름(雲)이라고 지었다고 하니 이름을 지은 증거가 있습니다. 5살을 먹도록 말을 잘 못하였는데, 신통한 스님이 이름을 고치라고 말하여 할아버지께서 현재 이름 수인(守仁)으로 고치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러므로 양명공은 하늘이 내려주신 사람입니다, 특별한 사람입니다!”라고 생각합니다. 6살에 말하기 시작하더니, 11살에는 할아버지와 금산(金山)에 놀러갔다가 여러 어른들 앞에서 시를 지었고, 17살에는 대학자 누량(婁諒, 1422-1491) 선생을 뵙고 “성인은 배워서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하니, 저는 “양명공에게 깨우쳐주신 분이 계시구나!”라고 감탄하였습니다.
행장에서 양명공의 학술에 관한 글을 읽어보니, 처음에는 의협심이 강한 의협(義俠)이 되려고 하였고, 둘째로는 말 타고 활 쏘는 것에 빠지고, 셋째로는 글 짓는 문학에 빠졌고, 넷째로는 신선 공부에 빠졌고, 다섯째로는 불교에 빠졌다가 정덕 병인년(1506, 35살)에야 겨우 유가의 성인 학술로 돌아왔다고 합니다.(※담약수는 왕양명이 이렇게 많이 헤맸다는 것을 지적하여 왕양명이 결코 담약수 자신처럼 똑똑하지 않았다고 폄하한 것입니다.) 이때(1505) 저도 북경에 있었는데, 양명공이 사람들에게 “내가 북경에서 지낸지 30년 동안에 담약수 같은 학자를 본 적이 없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저도 사람들에게 “내가 사방 천지를 많이 돌아다녔지만 왕수인 같은 학자를 본 적이 없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결국에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사귀면서 학술을 함께 공부하자고 약속하고, 우리들의 공부는 송나라 정명도 선생이 「정성서(定性書」에서 주장한 “인(仁)은 내 마음의 본체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을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단계의 본체까지 올라가는 것이다.(萬物一體之仁)”는 학술종지를 지키자고 약속하였습니다.(※왕양명은 북경에서 일찍부터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었고 담약수가 새로 참여한 것이며, 담약수가 함께 공부하자고 제의하여 둘이 함께 공부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담약수는 북경에 오기 앞서 스승 陳獻章한테서 배우고 정명도의 ‘체인천리(體認天理)’를 주장하였습니다. 이 글은 담약수 자신이 왕양명을 가르쳤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명공이 처음에는 격물(格物)을 주장하였고 나중에는 양지를 주장하여 앞뒤에 바뀜이 있었습니다. 저는 줄곧 “때와 곳을 가리지 말고 언제 어떻게 닥친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놓고 천리를 깨우치자.(隨處體認天理)”를 주장하였습니다. 양명공이나 저 모두 성현이 되겠다는 학술종지를 주장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둘은 상대방의 올바르고 깊은 뜻을 무시하고 글자 표현이 다른 것에 얽매여 다투었으니까 서로 잘못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찍이 “양명공이 주장한 양지에는 제가 주장한 천리의 뜻을 반드시 넣어야한다. 넣었을 경우에 제가 주장한 천리는 당신이 주장한 양지를 포함하므로 천리와 양지 둘을 섞어서 사용하더라도 둘의 뜻이 같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왕양명은 살아생전에 담약수의 ‘수처체인천리’ 종지가 마음을 직접 깨닫는 것이 아니고 주자학처럼 간접적인 방법이라고 비판하였기 때문에 이제 또다시 담약수가 반박한 것입니다.)
행장에서 양명공의 관원 생활에 관한 글을 읽어보니, 기미년(1499, 28살)에 남경 진사시험에서 일등을 하였으나 고시관 서목(徐穆, 1467-1511)이 반대하여 2등으로 합격하였지만 당시에 명성이 더욱 높았습니다.(※왕양명은 남경 진사시험에서 2등하였고 북경 회시에서는 2甲 6등하였습니다. 성적이 아주 뛰어난 것도 아니고 중상 정도입니다.) 이듬해 29살에 공부(工部)에서 일을 배우는 초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위녕백(威寧伯) 왕월(王越, 동한 말기)의 무덤을 보수하는 일을 감독하도록 파견되었을 때, 왕월 집안에서 돈을 주자 사양하였고 왕월이 찼던 칼을 주자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 꿈속에서 왕월이 활과 칼을 주는 꿈에 맞아 칼을 받았다고 하니 아마도 꿈에 미리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에 앞서 몇 달 전에는 변경지역에 파견 나가서 군대 둔전(屯田)을 점검하였고 돌아와서는 조정에 「변경지역 사무에 관한 상소(陳言邊務疎)」를 올렸는데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30살 8월에는 형부 주사(刑部 主事)로 진급하여 남직례(南直隷)와 회안부(淮安府)의 죄수를 심사하였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31살 8월에는 병 때문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치료하고 여러 명승지를 찾아다니고 도사와 스님들을 만나면서 요양하였습니다. 33살에 병부(兵部) 주사로 임용 받고 남경에 잡혀온 간관(諫官) 대선(戴铣, 1464-1506) 등을 관대하게 처리하고, 멀리 귀양 보내서 죽게 되면 조정에서 간관을 죽였다는 불명예를 짓지 말도록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실세였던 환관 유근 (劉瑾, 1451-1510)이 황제의 조서를 꾸며서 궁정에서 곤장을 때리는 정장(廷杖)으로 처벌하였다. 곤장 40대를 맞고도 죽지 않자 귀주성 용장역 역승(驛丞)으로 강등시키고 귀양 보냈다. 귀주성이 북경에서 만리 떨어진 곳이지만 양명공은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참고자료
天樂:『莊子』:“吾師乎,吾師乎!齏萬物而不爲戾;澤及萬世而不爲仁;長於上古而不爲壽;覆載天地、刻雕眾形而不爲巧。”
陽明先生墓志銘,湛若水
甘泉子挈家閉關于西樵煙霞之洞,故友新建伯陽明王先生之子正億,以其岳舅禮部尚書久庵黃公之狀及書來請墓銘。曰:“公知陽明公者也,非公莫能銘。”甘泉子曰:“吾又何辭焉?公知陽明公者也,非公莫能狀。公狀之,吾銘之。公狀其詳,吾銘其大,吾又何義之辭焉?”乃發狀而謹按之:
讀世系狀云云,曰:
公出於龍山狀元大宗伯公華;大宗伯公出於贈禮部侍郎竹軒公天敘;竹軒公出於太學生贈禮部侍郎槐里公傑;槐里公出於遁石公與準,厥有《禮》、《易》之傳;遁石公出於秘湖漁隱公彥達;秘湖出於性常公綱,有文武長才,與括蒼劉伯溫友善,仕為廣東參議,死難也。推其華胄遙遙,遠派於晉高士羲之,光祿大夫覽焉。曰:“公其有所本之矣!”夫水土之積也厚,其生物必蕃,有以也夫。
讀誕生狀云云,曰:
祖妣岑太淑人,有赤子乘雲下畀,天樂導之之夢,公乃誕焉。是名曰雲,蓋徵之矣。神僧言之,遂改今名。曰:“然則陽明公殆神授歟,其異人矣!”六年乃言,十一年有金山之詩,十七年聞一齋“聖人可學”之語。曰:“其有所啟之矣!”
讀學術狀云云,曰:
初溺於任俠之習;再溺於騎射之習;三溺於辭章之習;四溺於神仙之習;五溺於佛氏之習。正德丙寅,始歸正於聖賢之學。會甘泉子於京師,語人曰:“守仁從宦三十年,未見此人。”甘泉子語人亦曰:“若水泛觀於四方,未見此人。”遂相與定交講學,一宗程氏“仁者渾然與天地萬物同體”之指。故陽明公初主“格物”之說,後主“良知”之說;甘泉子一主“隨處體認天理”之說,然皆聖賢宗指也。而人或舍其精義,各滯執於彼此言語,蓋失之矣!故甘泉子嘗為之語曰:“良知必用天理,天理莫非良知,以言其交用則同也。”
讀仕進狀云云,曰:
初舉己未禮闈第一,徐穆爭之,落第二,然益有聲。登進士,試工部,差督造王威寧墳,辭卻金幣,獨受軍中佩劍之贈,適符少時夢,蓋兆之矣!疏邊務朝政之失,有聲。授刑部主事,審囚淮甸,有聲。告病歸養,起補兵部主事,上疏乞宥南京所執諫官戴銑等,毋使遠道致死,朝廷有殺諫官之名。劉瑾怒,矯詔廷杖之。不死,謫貴州龍場驛。萬里矣,而公不少怵。甘泉子贈之九章,其七章云:“皇天常無私,日月常盈虧,聖人常無為,萬物常往來。何名為無為?自然無安排,勿忘與勿助,此中有天機。”其九章云:“天地我一體,宇宙本同家。與君心已通,別離何怨嗟?浮雲去不停,遊子路轉賒。願言崇明德,浩浩同無涯。”及居夷,端居默坐,而夷人化惡為善,有聲。人或告曰:“陽明公至浙,沉於江矣,至福建始起矣。登鼓山之詩曰:‘海上曾為滄水使,山中又拜武夷君。’有徵矣。”甘泉子聞之笑曰:“此佯狂避世也。”故為之作詩,有云:“佯狂欲浮海,說夢癡人前。”及後數年,會於滁,乃吐實。彼誇虛執有以為神奇者,烏足以知公者哉!復起尹廬陵,臥治六月而百務具理,有聲。取入南京刑部主事,留為吏部驗封主事,有聲。陽明公謂甘泉子曰:“乃今可卜鄰矣。”遂就甘泉子長安灰廠右鄰居之。時講於大興隆寺,而久庵黃公宗賢會焉。三人相歡語合意。久庵曰:“他日天台,雁蕩,當為二公作兩草亭矣。後合兩為一焉,明道一也。”明年,甘泉子使安南。後二年,陽明公遷貳南太仆,聚徒講學,有聲。甘泉子還,期會於滁陽之間。夜論儒、釋之道。又明年,甘泉子丁憂,扶母柩南歸。陽明公時為南大鴻臚,逆吊子龍江關。尋遷南贛都憲矣。
讀平贛之狀云云,曰:
夫倡三廣夾攻之策,收橫水、左溪、桶岡、浰頭之功,用兵如神矣!甘泉子曰:“雖有大司馬王晉溪之知,請授之便宜旗牌以備他用,亦以陽明公素養銳士於營,以待不時之出也;迅雷呼吸之間也,又以身先士卒以作軍氣也。”
讀平江西之狀云云,曰:
“甘泉子先是在憂,致書於公,幸因閩行之使以去也。”蓋公前有宰相之隙,後有江西未萌之禍,不去必為楚人所鈐,兩不報。未幾,有寧府之變,公幾陷於虎口。然而贛兵素振,既足為之牽制,而倡義檄諸府縣興兵,會豐城誓師,分攻七門,七門大開,遂除留守之黨,封府庫之財,收劫取之印,安協從之民,釋被報之囚,表死難之忠。據省城,絕其歸路,直趣樵舍,因成擒賊之功。是水也以淺見測淵謀也。然始而翕然稱為掀天揭地之功矣,既而大吏妒焉,內幸爭功者附焉,輾轉殫力竭精矣,僅乃得免,或未嘗不思前慮也,所以危而不死者,內臣張永護之也,於大吏門列,不亦愧乎?由是遂流為先與後擒之言,上下騰沸,是不足辯也。
夫陽明逆知宸濠有異志,劉養正來說:“必得公乃發。”公應之曰“時非桀、紂,世無湯、武,臣有仗節死義耳。”其猶使冀生元亨往與之語者,實欲誘其善,不動幹戈,潛消莫大之禍也。使陽明公而實許養正,則宸濠殺孫都憲、許副使,必待陽明至乃發。陽明未至而發者,知絕意於陽明之與己矣。使陽明實許之,必乘風直抵南昌,必不與豐城,聞顧泌告變,即謀南奔以倡大義,奪漁艇,使如漁人然以奔吉安矣。其宸濠兵校追公者,非迎公也,將脅公也。且宸濠之上不能直趨中原以北,中不能攻陷金陵以據者,以陽明為之制其尾,兵威足以累之,使不前也;又取據省城,絕其資重與歸路也;功莫大焉。若夫百年之後,忌妒者盡死,天理在人心者復明,則公論定矣。
已而,該部果題賜敕錫勞,封新建伯,奉天翊衛推誠宣力守正文臣,特進光祿大夫柱國兼南京兵部尚書,參贊機務,歲支米一千石,於時天其將定矣,而置之南者有人焉以參乎其間矣。公丁父憂,而四方從學者日眾。有迎忌者意,致有偽學之劾者,人其勝天乎!或以浮語沮公,六年不召。尋以論薦,命為兩廣總制軍務,平岑猛之亂。或曰:“其且進且沮,使公不得入輔乎?”
讀思、田之狀云云,曰:
公奏行剿之患十,行撫之善十,乃撤防兵,解戰甲,諭威信,受來降,杖土目,復岑後,設流守,而思、田平。夫陽明公不革岑猛之後之土官,以夷治夷也。盧蘇等杖之百而釋之,置流守以制焉,仁義之術也。人知殺伐之為功,而不知神武不殺者,功之上也,仁義兩全之道也。
讀八寨之狀云云,曰:
檄參將會守巡,命指揮馬文瑞,永順宣慰彭明輔,保靖宣慰彭九霄,分兵布哨,擒斬賊酋黨與,遂破諸巢,移衛所制諸蠻,貫八寨之中,扼道路之沖,設縣治,增城堡,皆保治安民之要。或曰:“八峒掩襲村落以為功,無破巢之功也,無功以為有功也,何則?”辯之曰:“夫陽明之貪功,當取岑猛、盧蘇之大功而不取焉,不宜舍其大者,取其小者,其亦不智不武也。謂陽明公為之乎?夫宣慰諸哨之兵,可襲則襲,出其不意,兵法之奇,不可預授者也。而以病陽明焉,將使為宋襄、陳儒之愚已耶?非馭戎不測之威矣。”
事竣而請歸告病危矣,不待報而遽行,且行且候命。其卒於南安途次而不及命下,亦命也。江西輔臣進帖以譖公,上革之恤典,人眾之勝天也,亦命也。百年之後,天定將不勝人矣乎?甘泉子始召人禮部,面叩輔臣曰:“外人皆云陽明之事乃公為之乎?”輔臣默然,然亦不以作怒加禍,猶為有君子度量焉,可尚也。
公卒之日,兩廣、江西之民相與吊於途曰:“哲人其痿矣!”士夫之知者,相與語於朝曰:“忠良其逝矣!”四方同志者且與吊於家曰:“斯文其喪矣!”久庵公為之狀,六年而後就,慎重也。甘泉子曰:“吾志其大義,銘諸墓,將使觀厥詳於狀也。”
銘曰:
南鎮嶙嶙,在浙之濱;奇氣鬱積,是生異人。生而氣靈,乘雲降精。十一金山,詩成鬼驚。
志學逾二,廣信館次,婁公一言,聖學可至。長而任俠,未脫舊習,馳馬試劍,古人出入。
變化屢遷,逃仙逃禪;一變至道,丙寅之年。邂逅語契,相期共詣:天地為體,物莫非己。
抗疏廷杖,龍場煙瘴;居夷何陋,諸蠻歸向。起尹盧陵,臥治不庭;六月之間,百廢具興。
入司驗封,眾志皆通,孚於同朝,執經相從。轉南太仆,鴻臚太畜;遂巡南贛,乃展驥足。
浰頭、桶岡,三廣夾攻,身先士卒,屢收奇功。蓄勇養銳,隱然有待,雲胡養正,陰謀來說。
詐言尊師,公明灼知;冀子往化,消變無為。閩道豐城,及變未萌;聞變遄返,心事以明。
旌旗蔽空,聲義下江,尾兵累之,北趨不從。乃擒巨賊,乃親獻馘;爭功欲殺,永也護翊。
彼同袍者,反戈不怩,隱之於心,以莫不戚。憂居六年,起治思、田,撫而不戮,夷情晏然。
武文兼資,仁義並行,神武不殺,是稱天兵。凡厥操縱,聖學妙用,一以貫之,同靜異動。
陽明先生行狀,黃綰
陽明先生,王公,諱守仁,字伯安,其先瑯琊人,晉光祿大夫覽之後。
覽曾孫羲之少隨父曠渡江,家建康,不樂,徙會稽。其後復徙剡之華塘,自華塘徙石堰,又徙達溪。有曰壽者,仕至迪功郎,乃徙居餘姚。
六世祖諱綱,字性常,博學善識鑒,有文武長才,與永嘉高則誠宗人高元章、括蒼劉伯溫友善。仕國朝,為廣東參議,死苗難。五世祖諱彥達,號秘湖漁隱,有孝行。高祖諱與准,號遁石翁,精究《禮》、《易》,著《易微》數千言。曾祖諱傑,號槐里子,以明經貢為太學生,贈禮部右侍郎。曾祖妣孟氏,贈淑人。祖諱天敘,號竹軒,封翰林院編修,贈禮部右侍郎。祖妣岑氏,封太淑人。父諱華,成化辛醜狀元及第,仁至南京吏部尚書,封新建伯。妣鄭氏,封孺人,贈夫人。繼母趙氏,封夫人。鄭氏孕十四月而生公。
誕夕,岑太淑人夢天神抱一赤子乘雲而來,導以鼓樂,與岑。岑寤而公生,名曰雲。六歲不言。一日,有僧過之,摩其頂曰:“有此寧馨兒,卻叫壞了。”龍山公悟,改今名,遂言,穎異頓發。
年十一,竹軒翁攜之上京,過金山,作詩曰:“金山一點大如拳,打破維揚水底天。醉倚妙高台上月,玉簫吹徹洞龍眠。”有相者謂塾師曰:“此子他日官至極品,當立異等功名。”
年十三,侍龍山公為考官,入場評卷,高下皆當。性豪邁不羈,喜任俠。畿內石英、王勇,湖廣石和尚之亂,為書將獻於朝,請往徵之。龍山公力止之。
年十七,至江西,成婚於外舅養和諸公官舍。
明年,還廣信,謁一齋婁先生。異其質,語以所當學,而又期以聖人,為可學而至,遂深契之。
領弘治壬子年鄉薦。己未登進士,觀政工部。與太原喬宇,廣信汪俊,河南李夢陽、何景明,姑蘇顧璘、徐禎卿,山東邊貢諸公以才名爭馳騁,學古詩文。欽差督造威寧伯王公墳於河間,馭役夫以十五之法,暇即演八陣圖,識者已知其有遠志。少日嘗夢威寧伯授以寶劍,既竣事,威寧家以金幣為謝,辭不受,乃出威寧軍中佩劍贈之,適符其夢,受焉。時有彗星及靼虜猖獗,上疏論邊務,因言朝政之失,辭極剴切。
明年,授刑部主事,差往淮甸審囚,多所平反,復命。日事案牘,夜歸必燃燈讀《五經》及先秦、兩漢書,為文字益工。龍山公恐過勞成疾,禁家人不許置鐙書室。俟龍山公寢,復燃,必至夜分,因得嘔血疾。
養病歸越,辟陽明書院,究極仙經秘旨,靜坐,為長生久視之道,久能預知。其友王思裕等四人欲訪公,方出五雲門,即命仆要於路,歷語其故。四人驚以為神。
甲子,聘為山東鄉試考官,至今海內所稱重者,皆所取士也。改兵部武庫司主事。明年,白沙陳先生高第甘泉湛公若水,一會而定交,共明聖學。
明年丙寅,正德改元,宦官劉瑾竊國柄,作威福,差官校至南京,拿給事中戴銑等下獄。公上疏乞宥之。瑾怒,矯詔廷杖五十,斃而復蘇,謫貴州龍場驛丞。瑾怒未釋。公行至錢塘,度或不免,乃托為投江,潛入武夷山中,決意遠遁。夜至一山庵投宿,不納。行半里許,見一古廟,遂據香案臥。黎明,道士特往視之,方熟睡。乃推醒曰:“此虎狼穴也,何得無恙?”因詰公出處,公乃吐實。道士曰:“如公所志,將來必有赤族之禍。”公問:“何以至此?”道士曰:“公既有名朝野,若果由此匿跡,將來之徒假名以鼓舞人心,朝廷尋究汝家,豈不致赤族之禍?”公然其言。嘗有詩云:“海上曾為滄水使,山中又拜武夷君。”遂由武夷至廣信,溯彭蠡,歷沅、湘,至龍場。
始至,無屋可居。茇於叢棘間,遷於東峰,就石穴而居。夷俗於中土人至,必盅殺之。及卜公於盅神,不協,於是日來親附。以所居陰濕,乃相與伐木為何陋軒、君子亭、賓陽堂、玩易窩以居之。三仆歷險冒瘴,皆病,公日夕躬為湯糜調護之。
瑾欲害公之意未已。公於一切得失榮辱皆能超脫,惟生死一念,尚不能遣於心,乃為石廓,自誓曰:“吾今惟俟死而已,他復何計?”日夜端居默坐,澄心精慮,以求諸靜一之中。一夕,忽大悟,踴躍若狂者。以所記憶《五經》之言證之,一一相契,獨與晦庵注疏若相抵牾,恒往來於心,因著《五經臆說》。時元山席公官貴陽,聞其言論,謂為聖學復睹。公因取《朱子大全》閱之,見其晚年論議,自知其所學之非,至有誑己誑人之說,曰:“晦翁亦已自悔矣。”日與學者講究體察,愈益精明,而從遊者眾。
時思州守遣人至龍場,稍侮慢公,諸役夫鹹憤惋,輒相與毆辱之。守大怒,曰憲副毛公科,令公請謝,且喻以禍福。公致書於守,遂釋然,愈敬重公。安宣慰聞公名,使人饋米肉,給使令,辭不受。既又重以金帛鞍馬,復固辭不受。及議減驛事,則力折之,且申說朝廷威信令甲,其議遂寢。已而,僮酋有阿買、阿劄者,摽掠為地方患,公復以書詆諷之。安悚然,操切所部,民賴以寧。
庚午,升廬陵知縣。比至,稽國初舊制,慎選里正三老,委以詞訟,公坐視其成,囹圄清虛。是歲冬,以朝觀入京,調南京刑部主事,館於大興隆寺。予時為後軍都事,少嘗有志聖學,求之紫陽、濂、洛、象山之書,日事靜坐;雖與公有通家之舊,實未嘗深知其學。執友柴墟儲公巏與予書曰:“近日士夫如王君伯安,趨向正,造詣深,不專文字之學,足下肯出與之遊,麗澤之益,未必不多。”予因而慕公,即夕趨見。適湛公共坐室中,公出與語,喜曰:“此學久絕,子何所聞而遽至此也?”予曰:“雖粗有志,實未用功。”公曰:“人惟患無志,不患無功。”即問:“曾識湛原明否?來日請會,以訂我三人終身共學之盟。”明日,公令人邀予至公館中,會湛公,共拜而盟。又數日,湛公與予語,欲謀白岩喬公轉告塚宰邃庵楊公,留公北曹。楊公乃擢公為吏部驗封主事。予三人者自職事之外,稍暇,必會講;飲食起居,日必共之;各相砥勵。
未幾,升文選員外郎,升考功郎中,而學益不懈。士大夫之有志者,皆相率從遊。如此二年,而湛公使安南,予與公又居一年。壬申冬,予以疾告歸,公為文及詩送予,且托予結廬天台、雁蕩之間而共老焉。湛公又欲買地蕭山、湘湖之間,結廬,與予三人共之。明年癸酉,升南京太仆寺少卿,從遊者日益眾。甲戌,升南京鴻臚寺卿,始專以良知之旨訓學者。乙亥,朝廷舉考察之典,為疏自劾,力乞休致,以踐前言。不允。八月,又上疏力以疾甚,乞養病。又不允。
明年,丙子十月,升都察院左僉都禦史,撫鎮南、贛、汀、漳等處。先是南、贛撫鎮,屢用非人,山穀凶民初為攘竊,漸至劫掠州縣,肆無忌憚,遠近視效。凡在虔、楚、閩、廣接壤山穀,無非賊巢。小大有司束手無策,皆謂終不可除。兵部尚書王公瓊獨知公,特薦而用之。又懇疏以辭,亦不允,督旨益嚴。公遂受命。
既至南、贛,先嚴戰禦之法。時龍南賊二千餘突至信豐,又糾合廣東龍川、浰頭諸賊酋分隊以進,勢甚猖獗。公於未戰之先,令兵備官調兵斷賊歸路,又委官統領,前後夾擊。又曰:“此賊既離巢穴,利在速戰。”又令乘險設伏,厚集以待,及各鄉村往來路徑,多張疑兵,使進無所獲,退無所據,不過旬日,可以坐擒。一違節制,以軍法從事。先時,在官吏書門皂及在門軍民陰陽占卜,皆與賊通,日在官府左右詗覘,不惟言出於口,賊必先知,凡意向顏色之間,賊亦知之。公知其然,在此則示以彼,在彼則示以此;每令陰陽擇日,日者占卜,或已吉而不用,或欲用而中止;每勵兵蓐食,令俟期而發,兵竟不出。賊各依險自固,四路設伏,公潛令三省兵備官各率兵從徑道與賊交鋒,前後大戰數合,擒斬首俘獲無算。餘黨奔聚象湖山拒守。諭令佯言犒軍退師,俟秋再舉,密探虛實,乘賊懈弛,以護送廣東布政使邵賁為名,選精兵一千五百當先,重兵四千二百繼後,夜半,自率數十騎至,密招前軍來,令分三路,各銜枚直趨象湖山,搗其巢穴。我兵奪據隘口,賊猶不知。賊雖失險,其間驍悍猶能淩絕穀超距如飛,復據上層峻險,四面飛打滾木壘石,以死拒敵。我兵奮勇鏖戰,自辰至午,三省所發奇兵復從間道鼓噪突登,始驚潰大敗。我兵乘勝追殺,擒斬俘獲無算,墮崖壑而死者不可勝計。餘黨復入流恩、山岡等巢,與諸賊合勢。明日復戰,賊又不利,遁入廣東界上。黃蠟、樟溪、大山賊酋詹師富等恃居可塘洞山寨,聚糧守險,勢甚強固。公命分兵五路攻擊,與賊連戰。令知府鍾湘破長富村等巢三十餘處,擒斬俘獲益多。其脅從餘黨悉願攜家以聽撫安。公委官招撫,復業者四千餘人。又令僉事顧應祥等委官統領軍兵,會同福建克期進剿,揚言班師,出其不意,從牛皮、石嶺腳等處分為三哨,鼓噪並進。賊瞻顧不暇,望風瓦解。攻破古村、柘林、白土村、赤石岩等巢,直搗箭灌。及攻破水竹、大重玩、苦宅溪、清泉溪、曰羅、南山等巢,直搗洋竹洞、三角湖等處。前後大戰十餘,俘獲四千人有奇,牛馬貨物無算。
嘗上疏申明賞罰,以勵人心,因請教便宜行事,及請令旗、令牌,不報。及是大庚、南康、上猶三縣畬賊虜掠居民,廣東浰頭等處強池大鬢等三千餘徒突圍南康縣,殺損官兵,與湖廣桂陽、廣東樂昌等巢相聯,盤據流劫三省。時兵備等官請調三省狼達等兵,與官兵夾剿。又上疏論狼兵所過,不減於盜,轉輸之苦,重困於民。仍請便宜行事,期於成功,不限以時,則兵眾既練,號令既明,人知激勸,事無掣肘,可以伸縮自由,相機而動,日剪月削,可使澌盡。復請添設清平縣治,通鹽法,以足兵食。會湖廣巡撫都禦史秦公金奏請夾剿疏下,復上疏議處兵糧事宜。六月,召知府季_,縣丞舒富等密授方略,領兵分剿,生擒賊酋陳曰能等,搗其巢,俘獲賊黨無算。又上疏論三省交剿方略。先是屢請敕便宜行事,眾皆笑公為迂,惟尚書王公慨然曰:“朝廷此等權柄,不與此等人用,又與誰用?我必與之。”故因公疏覆議,奉旨改公提督南、贛、汀、漳等處軍務,賜敕書及前所請旗牌,便宜行事。廷議以公前攻破長富村、象湖山,可塘洞諸處,擒斬首從賊級數多,降敕獎勵,升俸一級,賞銀二十兩,紵絲二表里。
時汀、漳、左溪賊酋藍天鳳與贛、南、上新、穩下等硐賊酋雷鳴聰、高文輝等相結,盤據千里,荼毒三省。公與諸從事議曰:“諸巢為患雖同,事勢各異。以湖廣言之,則桶岡諸巢為賊之咽喉,而橫水、左溪諸巢為之腹心。以江西言之,則橫水、左溪諸巢為賊之腹心,而桶岡諸巢為之羽翼。今不先去橫水、左溪腹心之患,而欲與湖廣夾攻桶岡,進兵兩寇之間,腹背受敵,勢必不利。今我出其不意;進兵速擊,可以得志。已破橫水、左溪,移兵而臨桶岡,勢如破竹矣。”議既決,命指揮鄧文帥兵千餘,自大庚縣義安入;知府唐淳帥兵千餘,自大庚縣聶都入;知府季_帥兵千餘,自大庚縣穩下入;縣丞舒富帥兵千餘,自上猶縣金坑入;親帥兵千餘,自南康進屯至坪,期直搗橫水,與諸軍會;命副使楊樟,參議黃宏,監督各營官兵往來給餉,以促其後。是月初七日,各哨齊發。初十日,進兵至坪。會間諜詗知,各險隘皆設滾木壘石。公度此時賊已據險,勢未可近,乃自率兵乘夜遂進。未至賊巢三十里止舍,使人伐木立柵,開塹設堠,示以久屯之形。復遣官分帥鄉兵及樵豎善登山者四百人,各與一旗,齎銳炮鉤鐮,使由間道攀崖壁而上,分列遠近極高山頂以覘賊,張立旗幟,熱茅為數千灶,度我兵至險,則舉炮燃火相應。十二日黎明,公進兵至十八面隘。賊方據險迎敵,驟聞遠近山頂炮聲如雷,煙焰四起,我兵復呼哨分逼,銃箭齊放,賊皆驚潰失措,以為官兵盡破其巢,遂棄險退走。公預遣千戶陳偉、高睿分帥壯士數十緣崖上,奪賊險,盡發其滾木壘石。我兵乘勝驟進,指揮謝昹、馬廷瑞兵由間道先入,悉焚賊巢。賊退無所據,乃大敗奔潰。橫水既破,遂乘勝進攻左溪,擒斬首級無算,俘獲男婦牛馬什物不可勝算。會霧雨連日,公令休兵犒勞。
是月二十七日,官兵乘勝進攻桶岡。公復議:桶岡天險,四山壁立萬仞,中盤百餘里,連峰參天,深林絕穀,不睹日月。因詢訪鄉導,賊所由入惟鎖匙龍、葫蘿洞、茶坑、十八磊、新地五處,皆假棧梯壑,夤懸絕壁而上;惟上章一路稍平,然深入湖廣,迂回取道,半月始至。令移屯近地,休兵養銳,振揚威聲,使人諭以禍福,彼必懼而請服。其或不從,乘其猶豫,襲而擊之,乃可以逞。縱所獲桶岡賊鍾景縋入賊營,期以翼日早,使人於鎖匙龍受降。賊方恐,集眾會議。又遣縣丞舒富帥數百人屯鎖匙龍,促使出降。遣知府邢珣入茶坑,伍文定入西山界,唐淳入十八磊,知縣張戩入葫蘿洞,皆於是月晦日乘夜各至分地。遇大雨,不得進。明早,冒雨疾登。賊酋藍天鳳方就鎖匙龍聚議,聞各兵已入險,皆驚愕散亂。猶驅其男婦千餘人據內隘,絕險隔水為陣以拒。我兵渡水前擊,復分部左右夾攻,賊不能支,且戰且卻。及午,雨霽,各兵鼓奮而前,賊乃敗走。桶岡諸巢悉平。
親行相視形勢,據險之隘,議以其地請建縣治,控制三省諸瑤,斷其往來之路。又進兵攻穩下、朱坑等巢,悉平。又以湖、廣二省之兵方合,雖近境之賊悉以掃蕩,而四遠奔突之虞難保必無,乃留兵二千餘,分屯茶、寮諸隘,餘兵令回近縣休息,候二省夾攻盡絕,然後班師。驅卒不過萬餘,用費不滿三萬,兩月之間,俘斬六千有奇,破巢八十有四,渠魁授首,_類無遺。又疏請三縣適中之處立崇義縣,移置小溪驛於大庾縣城內,使督兵防遏。
浰頭賊酋池大鬢等聞橫水諸巢皆破,始懼加兵,乃遣其弟池仲安等率老弱二百餘,徒赴軍門投降,隨眾立效,意在緩兵,因窺虛實,乘間內應。公逆知其謀,乃陽許之。及進攻桶岡,使領其眾截路於上新地以遠其歸途。十一月,池大鬢等聞復破桶岡,益懼,為戰守備。公使人賜各酋長牛酒,以察其變。賊度不可隱,詐稱龍川新民盧珂等將掩襲之,是密為之防,非虞官兵也。亦陽信其言,因復陽怒盧珂等擅兵仇殺,移檄龍川,使廉其實;且趣伐木開道,將回兵浰頭,取道往征之。賊聞之,且喜且懼。盧珂、鄭志高、陳英者,皆龍川舊招新民,有眾三千餘,為池大鬢所脅,而三人者獨深忌之,乃來告變。雲池大鬢僭號設官,及以偽授廬珂等金龍霸王官爵印信來首。公先已諜知其事,乃復陽怒,不信,遂械系盧珂,而使人密諭其意。珂遂遣人歸集其眾,待時而發。又使人往諭池大鬢,且密購其所親信頭目二十人,陰說之同部下百八十人使自來投訴。還贛,乃張樂大享將士,下令城中散兵,使各歸農,示不復用。賊眾皆喜,遂弛其備。池大鬢等乃謂其眾曰:“若要伸,先用屈。贛州伎倆,亦須親往勘破。”率其麾下四十人自詣贛。公使人探知池大鬢已就道,密遣人先行屬縣,勒兵分哨,候報而發。又使人督集盧珂等兵,俱至,令所屬官寮以次設羊酒,日犒池大鬢等,以緩其歸。會正旦之明日,復設犒於庭,先伏甲士,引池大鬢入,並其黨悉擒之。出盧珂等所告狀,訊鞫皆伏,置於獄斬之。夜使人趨發屬縣兵,期以初七日入巢。諸哨兵皆從各徑道以入;自率帳下官兵,從龍南縣令水直揭下浰大巢,與各哨兵會於三浰。先是賊徒得池大鬢報,謂贛州兵已罷歸,皆已弛備,散處各巢。至是驟聞官兵四路並進,皆驚懼,分投出禦;悉其精銳千餘據險設伏,並勢迎敵於龍子嶺。我兵聚為三沖,犄角而前,大戰良久,賊敗。復奮擊數十合,遂克上、中、下三浰。各哨官兵遙聞三浰大巢已破,皆奮勇齊進,各賊潰敗。
遂進攻九連山。於是選精銳七百餘人,皆衣所得賊衣,佯若奔潰者,乘暮直沖賊所,據崖下澗道而過。賊以為各巢敗散之黨,皆從崖下招呼。我兵亦佯應之。賊疑,不敢擊。已度險,遂斷其後路。次日,賊始知為我兵,並勢沖敵。我兵已據險,從上下擊,賊不能支。公度其必潰,預令各哨官兵四路設伏以待。賊果潛遁,邀擊而悉俘之,前後擒斬首級無算,俘獲男婦牛馬器仗什物不可勝計。餘黨張仲全等二百餘人,及遠近村寨,一時為賊所驅,從惡未久者,勢窮計迫,聚於九連穀口呼號痛哭,誠心投降。遣邢珣驗實,量加責治,籍其名數,悉安插於白沙。相視險易,經理立縣設隘可以久安長治之策,留兵防守而歸。贛人皆戴香遮道而迎,為立生祠,又家肖其像,而歲時祭禱。
上疏乞休致,不允。又以龍川諸處系山林險阻之所,盜賊屯聚之鄉,當四縣交界之隙,乃三省閏餘之地,政教不及,人跡罕到。其間接連閩、廣,反覆賊巢,動以百數。據而守之,真足控諸賊之往來,杜奸宄之潛匿。遂疏請於和平地方建設和平縣治,以扼其要害。又以大賊酋龔福全、高仲仁、李斌、吳[王凡]等邀路劫殺軍民,攻掠郡縣,命三省將官剿平。上三省夾剿捷音疏。朝廷論功行賞,升右副都禦史,蔭子一人錦衣衛,世襲百戶,寫敕獎勵。懇疏辭免,乞原職致仕。溫旨慰留。因奏平定廣東韶州府樂昌縣等賊捷音,查例加升子本衛,世襲副千戶。
在贛雖軍旅擾擾,四方從遊日眾,而講學不廢。褒崇象山陸子之後以扶正學。贛人初與賊通,俗多鄙野。為立保甲十家牌法,於是作業出入皆有紀。又行鄉約,教勸禮讓。又親書教試四章,使之家喻戶曉。而贛俗丕變,贛人多為良善,而問學君子亦多矣。
十四年正月,再疏乞放歸田里。當路忌公,欲從其請。王公瓊逆知宸濠必將為變,一日,召其屬主事應典曰:“我置王某於江西,與之便宜行事者,不但為溪洞諸賊而已,或有他變,若無便宜行事敕書旗牌,將何施用?”時福建有軍人進貢等之變,王公曰:“此小事,不足煩王某。但假此以牽便宜敕書在彼手中,以待他變。爾可為我做一題稿來看。”稿成,具題。降敕與公曰:“福州三衛軍人進貢等協眾謀反,特命爾暫去彼處地方會同查議處置,參奏定奪。”
時濠陰謀不軌,亦已有年。一日,命安福舉人劉養正往說公云:“寧王尊師重道,有湯、武之資。欲從公講明正學。”公笑曰:“殿下能舍去王爵否?”既而令門人冀元亨先往,與濠講學,以探其誠否。元亨與語矛盾;濠怒,遣還,密使人殺於途,不果。公以六月初九日自贛往福建勘事。十五日至豐城縣界,典史鄧人報濠反狀。繼而知縣顧佖具言之。公度單旅倉猝,兵力未集,難即勤王,亟欲溯流趨吉安。南風方盛,舟人聞宸濠發千餘人來劫公,畏不敢發,乃以逆流無風為辭。公密禱於舟中,誓死報國。無何,北風大作。舟人猶不肯行;拔劍馘其耳,遂發舟。薄暮,度勢不可前,潛覓漁舟,以微服行;留麾下一人服己冠服在舟中。濠兵果犯舟,而公不在。欲殺其代者,一人曰:“何益?”遂舍之。故追不及。是夜至臨江。知府戴德孺喜甚,留公入城調度。曰:“臨江居大江之濱,與省城相近,且當道路之沖,莫若吉安為宜。”又以三策籌之曰:“濠若出上策,直趨京師,出其不意,則宗社危矣。若出中策,則趨南都,大江南北亦被其害。若出下策,但據江西省城,則勤王之事尚易為也。”
行至中途,恐其速出,乃為間諜,假奉朝廷密旨先知寧府將反,行令兩廣、湖、襄都禦史楊旦、秦金及兩京兵部各命將出師,暗伏要害地方,以俟寧府兵至襲殺。復取優人數輩,各與數百金以全其家,令至伏兵處所飛報竊發日期,將公文各縫置袷衣絮中。將發間,又捕捉偽太師李士實家屬至舟尾,令其覘知。公即佯怒,牽之上岸處斬,已而故縱之,令其奔報。宸濠邏獲優人,果於袷衣絮中搜得公文,遂疑不發。
十八日至吉安。知府伍文定甚喜,軍民皆遮道呼號。公入城撫慰,兩上疏告變,請命將征討,以解東南倒懸。奏至,王公瓊揚言於朝曰:“王某在南贛,必能擒之。不久當有捷報至。但朝廷不命將出師,則無以壯其軍威。”
時濠畜養死士二萬,招誘四方盜賊渠魁亦萬數,舉事之日,復驅其護衛黨與並脅從之人又六七萬,虐焰張熾。公以百數從卒,退保吉安,遙為牽制之圖。遠近軍民劫於濠積威,道路以目,莫敢出聲。公率知府伍文定、戴德孺、邢珣、徐璉等調集軍民兵快,石募四方報效義勇,會計應解留錢糧,支給糧賞,造作軍器戰船,奏留公差回任禦史謝源、伍希儒分職任事,約會鄉官致仕右副都禦史王懋忠,養病編修鄒守益,郎中曾直,評事羅僑,丁憂禦史張鰲山,赴部調用僉事劉藍,依親進士郭持平,致仕副使劉遜,參政黃繡,閒住知府劉昭等,相與激勸忠義,曉諭禍福。調度已定,移檄遠近,宣布朝廷仁德,暴濠罪惡。濠始覺為公所欺,亟欲引兵而出。公謂:急沖其鋒,攻其有備,皆非計之得也;始示以自守不出之形,必俟其出,然後尾而圖之。先復省城以搗其巢穴,彼聞必回兵來援。我則出兵邀而擊之。此全勝之策也。濠果使人探公未出,先發兵出次南康、九江,自居省城以禦公。
七月初二日,濠又使人探公兵果不出,乃留兵萬餘,屬其腹心宗室及儀賓內官並偽部都督都指揮等官使守省城,自引兵向安慶。公知其出,遂急促各府兵,期以本月十五日會於臨江樟樹鎮;身督伍文定等兵徑下。於是知府戴德孺引兵自臨江來,知府徐璉引兵自袁州來,知府邢珣引兵自贛州來,通判胡堯元、童琦引兵自瑞州來,通判談儲,推官王暐、徐文英,新淦知縣李美,太和知縣李楫,寧都知縣王天與,萬安知縣王冕,亦各以兵來赴。十八日遂至豐城,分布哨道。使伍文定攻廣潤門,邢珣攻順化門,徐璉攻惠民門,戴德孺攻永和門,胡堯元、童琦攻章江門,李美攻德勝門,都指揮餘恩攻進賢門。談儲、王暐、李楫、王天與、王冕等各以其兵乘七門之釁,從旁夾擊,以佐其勢。又探得濠伏兵千餘於新舊墳廠,以備省城之援。乃遣奉新知縣劉守緒,典史徐誠,領兵四百,從間道夜襲破之,以搖城中。
十九日,登市汊誓師,且申布朝廷之威,再暴濠惡。約諸將一鼓而附城,再鼓而登城,三鼓不克誅其伍,四鼓不克斬其將。誓已,莫不切齒痛心,踴躍激奮。薄暮徐發。
二十日黎明,各至信地。城中為備甚嚴,滾木、灰瓶、火炮、石弩、機毒之械,無不畢具。及我兵已破新舊墳廠,敗潰之卒皆奔告城中。城中聞我師四面驟集,莫不震駭。我師呼噪並進,梯_而登。城中倒戈而奔。遂破擒其居守宜春王栱_及偽太監萬銳等千餘人。宮眷縱火自焚,延燒居民房屋。公令各官分道救火,撫定居民,釋其脅從,封其府庫。搜出原收大小衙門印信九十六顆。其脅從布政使胡廉、參政劉斐、參議許效廉、副使唐錦、僉事賴鳳、都指揮王_,皆自上江西捷音疏,仍分兵四路追躡。
是時濠攻安慶未下,親自督兵運土填塹,期在必克。及聞我兵至豐城,大恐,即欲回舟。李士實阻勸,以為必須徑往南京,既登大寶,則江西自服。濠不應。次日,遂解安慶之圍,移兵泊阮子江,會議歸援。
先是兵至豐城,眾議安慶被圍,宜引兵直趨安慶。公以九江、南康皆以為賊所據,而南昌城中數萬之眾,精悍亦且萬餘,食貨充積。我兵若抵安慶,賊必回軍死鬥。安慶之兵僅僅自守,必不能援我於湖中。南昌之兵絕我糧道,而九江、南康之賊合勢撓躡,而四方之援又不可望,事難圖矣。今我師驟集,先聲所加,城中必已震懾,因而並力急攻,其勢必下。已破南昌,賊先破膽奪氣,失其本根,勢必歸救。則安慶之圍可解,濠亦可以坐擒。果如公料。及議所以禦之之策,眾謂宜斂兵入城,堅壁自守,以待四方援兵。公獨謂宜先出銳卒,乘其惰歸,要迎掩擊,一挫其鋒,眾將不戰自潰,所謂“先人有奪人之氣,攻瑕則堅者瑕”矣。是日撫州知府陳槐引兵亦至。公遣伍文定、邢暐、徐璉、戴德孺共領精兵五百分道並進,擊其不意。濠亦先使精悍千餘人從間道欲出公不意攻收省城,偶遇於某處,遂交戰。我兵失利。報至。公怒甚,欲以軍法斬取伍文定、邢珣、戴德孺、徐璉等首。乃自帥兵親戰。或以敵鋒方交,若即斬其首,兵無統領而亂,俟各奮勵以圖後效。明日各帥兵奮死以戰,大敗之。又遣餘恩以兵四百往來湖上,誘致賊兵。陳槐、胡堯元、童琦、談儲、王暐、徐文英、李美、李楫、王冕、王軾、劉守緒、劉源清等各領百餘,四面張疑設伏,候伍文定等兵交,然後四起合擊。
分布既定,大賑城中軍民。慮宗室郡王將軍或為內應生變,親慰諭之,以安其心。出給告示,凡脅從皆不問,雖嘗受賊官爵,能逃歸者皆免死,能斬賊徒歸降者皆給賞。使內外居民及鄉導人等四路傳布,以解散其黨。
二十三日,濠先鋒已至樵舍,風帆蔽江,前後數十里。公乃分督各兵乘夜趨進:使伍文定以正兵當其前,餘恩繼其後,邢珣引兵繞出賊背,徐璉、戴德孺張兩翼以分其勢。
二十四日早,賊兵鼓噪乘風而前,逼黃家渡,其氣驕甚。伍文定、餘恩之兵佯北以致之。賊爭進趨利,前後不相及。邢珣之兵從後橫擊,直貫其中,賊敗走。伍文定、餘恩督兵乘之。徐璉、戴德孺合勢夾攻,呼噪並起。賊不知所為,遂大潰,奔走十餘里。擒斬二千餘級,落水死者以萬數。賊勢大沮,引兵退保八字腦,眾稍遁散。濠震懼,身自激勵將士,賞其當先者以千金,被傷者銀百兩。盡發九江、南康守城之兵以益師。是日,建昌知府曾璵引兵至。公以九江不破則湖兵終不敢越九江以援我;南康不復則我兵亦不能逾南康以躡賊。及遣知府陳槐領兵四百,合饒州知府林城之兵乘間以攻九江;知府曾璵領兵四百,合廣信知府周朝佐之兵乘間以取南康。
二十五日,賊復並力盛氣挑戰。時風勢不便,我兵少卻,死者數十人。公急令人斬取先卻者。知府伍文定等立於銃炮之間。火燎其須,不敢退,奮督各兵,殊死並進。炮及寧王舟。寧王退走,遂大敗。擒斬二千餘級,溺水死者不計其數。賊復退兵保樵舍,連舟為方陣,盡出其金銀以賞士。公乃夜督伍文定等為火攻之具。邢珣擊其左,徐璉、戴德孺出其右,餘恩等各官兵分兵四伏,期火發而合。
二十六日,寧王方朝,群臣拘集所執三司各官,責其間以不致死力,坐觀成敗者,將引出斬之。爭論未決,而我兵已奮擊四面而集,火及寧王副舟,眾遂奔散。寧王與妃嬪泣別,妃嬪宮人皆赴水死。我兵遂執寧王,並其世子、郡王、將軍、儀賓及偽太師、國師李士實、劉養正、元帥、參贊、尚書、都督、指揮、千百戶等官數百餘人,被執脅從官太監王宏,禦史王金,主事金山,按察使楊璋,僉事王疇、潘鵬,參政程果,布政使梁辰,都指揮鄧文、馬驥、白昂等,擒斬賊黨三千餘級,落水死者約三萬餘。棄其衣甲器仗財物,與浮屍積聚,橫亙若洲。餘賊數百艘,四散逃潰。公復遣官分路追剿,毋令逸入他境為患。二十七日,及之於樵舍,大破之;於吳城又破之,擒斬復千餘級,落水死者殆盡。濠既擒,眾執見公,呼曰:“王先生,我欲盡削護衛所有,請降為庶民,可乎?”對曰:“有國法在。”遂令送至囚所。
公既擒濠,欲令人獻俘,慮有餘黨沿途竊發,欲親解赴闕,因在吉安上疏乞命將出師。朝廷差安邊伯許泰為總督軍務,充總兵官,平虜伯江彬為指督等官,左都督劉翬為總兵官,太監張忠為提督軍務,張永為提督,贊畫機密軍務,並體勘濠反逆事情,及查理庫藏宮眷等事,太監魏彬為提督等官,兵部侍郎王憲為督理糧餉,往江西征討。至中途,聞捷報,計欲奪功,乃密請上親征。上遂自稱為總督軍務威武大將軍總兵官後軍都督府太師鎮國公,往江西親征。廷臣力諫不聽,有被杖而死者。
江彬、許泰、劉翬、張忠、張永、魏彬等先領兵由大江至,入居城中,人馬填溢衢巷,至不可行。乃倡言誣公始同濠謀反,因見天兵俯臨征討,始擒濠以脫罪,欲並擒公為己功。公於官軍慰勞有加,病者為之醫藥,死者為之棺斂,間自行撫,眾心皆悅。初見彬輩,皆設席於傍,令公坐。公乃佯為不知,遂坐上席;轉傍席於下,以坐彬輩。彬輩銜之,出語誚公。公以常行交際事體諭之,左右皆為公解,遂無言。公非爭一坐也,恐一受節制,則事機皆將聽彼而不可為矣。
又欲置濠湖中,待駕至列陣擒之,然後奏凱論功。公竟發南昌,數遣人追至廣信,不聽。戴星趨玉山,度草萍,上疏力止。以為:
濠睥睨神器,陰謀久蓄,招納叛亡,探輦轂之動靜,日無停跡。廣置奸細,臣下之奏白,百不一通。發謀之始,逆料大駕必將親征,先於沿途伏有奸黨,為博浪、荊軻之謀。今逆不旋踵,遂以成擒,法宜解赴闕下,式昭天討。欲付部下各官押解,恐舊所潛布乘隙竊發,或致意外之虞,臣死有餘憾。況平賊獻俘,固國家常典,亦臣子職分。臣謹於九月十一日親自量帶官軍,將濠並宮眷逆賊情重人犯督解赴闕。
行至廣信,聞報,疏上不聽。既抵杭,謂張永曰:“西民久遭濠毒,經大亂,繼旱災,困苦既極,必逃聚山穀為亂。奸黨群應,土崩之勢成矣。然後興兵平之,不已難乎?”永深然之,徐曰:“吾此出為君側群小,欲調護而默輔之,非掩功也。但將順天意,猶可挽回。萬一苟逆之徒激群小之怒,何救於大事?”公始深信,以濠付之。復上捷音,以為宸濠不軌之謀已逾一紀,今旬月之間遂克堅城,俘擒元惡,是皆欽差總督威德指示方略所致。以此歸功總督軍門,以止上江西之行。稱病淨慈寺。
張永在上前備言公盡心為國之忠之功,及彬等欲加害之意。既而彬等果誣公無君欲叛,上不信。又言此既不信,試召之,必不來,則可知其無君矣。上乃召公。公即奔南京龍江關,將進見。忠等皆失意,又從中阻之,使不見。公乃以綸巾野服入九華山。永聞知,又力言於上曰:“王守仁實忠臣,今聞眾欲爭功,欲並棄其官,入山修道。”由是上益信公之忠。
公復還江西視事。西人皆家肖公像,歲時報祀,猶夫贛焉。
十五年閏八月,四乞省葬,節奉旨:“王守仁奉命巡視福建,行至豐城,一聞宸濠反叛,忠憤激烈,即便倡率所在官司,起集義兵,合謀剿殺,氣節可嘉。已有旨著督兵討賊,兼巡撫江西地方。所奏省親事情,待賊平之日來說。”故復領巡撫事。江西兵殘之餘,宗室人民凋敝之甚,官府衙門居民房屋燒毀殆盡。公為之賑恤,綏勞撫定,奏免租稅。又將城中沒官房屋,及濠違制宮室,與革毀一應衙門,皆修改為公廨。濠占奪民間田地山塘房屋,遵奉詔書給還原主管業。其餘照依時估變賣,價銀入官,先盡撥補南、新二縣兌軍,淮安京庫折銀糧米,及王府祿米;餘羨收貯布政司,用備緩急。
是年囗月,上晏駕。今上皇帝登極。特降璽書曰:“爾昔能剿平亂賊,安靖地方。朝廷新政之初,特茲召用。敕至,爾可馳驛來京,毋或稽遲。”於二十日,公馳驛起程。為輔臣所忌,潛諷科道建言,以為朝廷新政,武宗國喪,資費浩繁,不宜行晏賞之事。行至中途而返。道經錢塘,上疏懇乞便道歸省。制曰:可。
升南京兵部尚書,參贊機務。又具疏辭免,慰旨益勤。本年十二月內,該部題為捷音事,議封公伯爵,給與誥券,子孫世世承襲,賜敕遣官獎勞慰諭,錫以銀幣,犒以羊酒。乃封公新建伯,奉天翊衛推誠宣力守正文臣,特進光祿大夫柱國,兼南京兵部尚書。參贊機務,歲支祿米一千石,三代並妻一體追封。累疏辭免,欲朝廷普恩賞於報效諸臣。又極言舉人冀元亨因說宸濠,反為奸黨構陷獄中,以忠受禍,為賊報仇,抱冤齎恨,願盡削己官,移報元亨,以贖此痛。先是元亨在獄,又為移咨六部申理其冤。及元亨死,又為移文湖廣兩司,優恤其家屬。
元年,丁父海日翁憂,四方來遊其門益眾。科道官迎當路意,以偽學舉劾。服闋,輔臣忌公才高望重,六載不召。禦史石金等交章論薦。禮部尚書席公書為疏特薦公及石淙楊公曰:“生在臣前見一人,曰楊一清;生在臣後見一人,曰王守仁。”皆不報。
丁亥,田州土知府岑猛之亂,提督都禦史姚鏌不克成功。張公孚敬拉桂公萼同薦,桂公不得已,勉從薦公。得俞旨,兵部奉欽依,差官持檄,授公總制軍務,督同都禦史姚鏌勘處彼中事情。上疏辭免,舉尚書胡世寧、李承勳自代,不允。上與楊公一清曰:“若姚鏌不去,王守仁決不肯來。”遂令鏌致仕。又降旨督趨赴任。旨云:“卿識敏才高,忠誠體國。今兩廣多事,方藉卿威望,撫定地方,用舒朕南顧之懷。姚鏌已致仕了,卿宜星夜前去,節制諸司,調度軍馬,撫剿賊寇,安戢兵民,勿再遲疑推諉,以負朕望。還差官鋪馬裹齎文前去敦取赴任行事,該部知道。”
予時為光祿寺少卿,具疏論江西軍功,及薦公才德,堪任輔弼。上喜,親書禦紮,並疏付內閣議。楊公一清忌公入閣,與之同列,乃與張公孚敬具揭帖對曰:“王守仁才固可用,但好服古衣冠,喜談新學,人頗以此異之。不宜入閣,但可用為兵部尚書。”桂公知,遂大怒詈予,潛進揭帖毀公,上意遂止。公遂扶病蒞任,沿途涉歷訪諸士夫,詢諸行旅,皆云岑猛父子固有可誅之罪;然所以為亂者,皆當事諸人不能推誠撫安以致之。上疏謝恩,極言致亂之由,平復之策,
十二月,楊公一清與桂公萼謀,恐事完回京,復命見上,予與張公又薦之,上必留用。又題命公兼理巡撫。奉聖旨“王守仁暫令兼理巡撫兩廣等處地方,寫敕與他。”咨到,又力疏辭免,舉致仕都禦史伍文定、刑部左侍郎梁才自代,不允。建議大約以為進兵行剿之患十,罷兵行撫之善十,與夫二幸四毀之弊。時布政使林富,紀功禦史石金,皆以為然。
至南寧府,乃下令盡撤調集防守之兵,數日之內,解散而歸者,數萬有餘。湖兵數千,道阻且遠,不易即歸,仍使分留南寧、賓州,解甲休養,待間而發。
初,思、田二府目民盧蘇、王受等聞公來,知無必殺之心,皆有投生之念,日夜懸望,惟恐公至之不速。既至,又見防守之兵盡撤,投生之念益堅,乃遣其頭目黃富等十餘人先赴軍門訴苦。公諭以朝廷威信,及開示更生之路。明日,蘇、受等畢囚首自縛,各與其頭目數百人投見,號哀控訴。公復諭以朝廷恩德,下蘇、受於軍門,各杖一百。眾皆合辭別扣首,為之請命。乃解其縛曰:“今日宥爾一死者,是朝廷好生之仁;杖爾一百者,乃吾等人臣執法之義。”於是眾皆扣首悅服。公隨至其營,撫定餘眾,莫不感泣,歡呼感恩。誓以死報,殺賊立功,以贖前罪。公復諭以朝廷惟願生全爾等,今爾方來投生,豈忍又驅之兵刃之下。爾等逃竄日久,家業破蕩,且宜速歸,完爾室家,及時耕種,修復生理。至於各處盜賊,軍門自有區處,不須爾等剿除。待爾等家事稍定,徐當調發。於是又皆感泣歡呼。遂委布政林富,總兵官張祐,分投安插,督令各歸復業。
既而上疏,處置平復地方以圖久安,宜仍立土官以順其情,分土目以散其黨,設流官以制其勢。猶以土夷之心未必盡得,而窮山僻壤或有隱情,則又備歷田州、思恩村落而經理其城堡。因以所以處之之道詢諸其長目。率皆以為善。又詢諸父老子弟,又皆以為善。然後信其可以久行,而反覆其辭,更互其說。請田州仍立岑氏後為土官知州以順土夷之情;特設流官知府以制土官之勢;分設土官巡檢以散各夷之黨。又以田州既設流官,宜更其府名為田寧,蓋取“田石傾,田州兵;田石平,田州寧”之謠。至於思恩,則岑浚之後已絕,不必復有土官之設矣。
又按視斷藤峽諸處瑤賊,上連八寨,下通仙台、花相諸峒,連絡數十餘巢,盤亙三百餘里,彼此犄角,結聚憑險,流劫郡縣,檄參將張經會同守巡各官集議。於是命潯州衛指揮馬文瑞,永順統兵宣慰彭明輔男彭宗舜,保靖統兵宣慰彭九霄,辰州等衛指揮彭飛等,分兵布哨。以永順土兵進剿牛腸等賊巢,保靖土兵進剿六寺等賊巢。先是賊酋詗知公住紮南寧,寂無征剿消息,又不見調兵集糧,遂皆怠弛,不以為意。至是突遇官兵,四面攻圍,愴惶失錯。擒斬賊酋及黨與頗多。餘賊退敗,復據仙女大山。我兵追圍,拔大緣崖,仰攻,復大破之。乘勝攻破油榨,石壁、大陂等巢。餘賊奔至斷藤峽、橫石江邊,我兵追急,爭度溺死者無算,斬獲首從,俘獲男婦牛畜器械等項不可勝計。
還兵潯州府住紮,復進剿仙台諸賊巢。諸軍吏各率永順、保靖壯兵爭先陷陣。賊又大敗,奔入永安邊界立山將險結寨。乃摘調指揮王良輔並目兵彭愷等分路並進,四面仰攻。賊敗散。命林富、張祐分投密調各目兵盧蘇、王受等分道進剿,前後生擒斬獲並俘獲男婦頭畜器械殆盡。
以八寨之地據其要害,欲移設衛所,控制諸蠻。復於三里設縣,迭相引帶。親臨視思恩府基景定衛縣規則。蓋南舟衛僻在廣西極邊之地,非中土之人所可居者,於是移築於周安堡。當八寨之中,以阻扼其道路之沖,則柳慶諸賊不必征剿,皆將效順服化。思恩舊在寨城山內,尚歷高山數十餘里,令移於荒田地方,四野寬衍之處,開圖立里,用漢法以治武緣之眾,夷夏交和,公私兩便。移鳳化縣治於虞鄉,為立廨宇,屬之思恩。於宣化、思龍地方添設流官縣治。是皆保治安民之要。增築守鎮城堡於五屯,以壯威設險。仍選取協守諸兵及附近土寨目兵,智略忠勇官一員,重任而專責之,使之訓練撫摩,令參將兵備等宮時至其地經理而振作之,則賊勢自摧。將思、田分設九土巡檢司,各立土目眾所信服者管之,節疏奏請定奪。奉旨:“王守仁受命提督軍務,蒞任未久,乃能開誠宣恩,處置得宜,致令叛夷畏服,率眾歸降,罷兵息民,奇功可加。寫敕差行人齎去獎勵,還賞銀五十兩,紵絲四表里,布政司買辦羊酒送用。”九月八日,行人馮恩齎至廣城。是時公已臥病月餘,扶病疏謝。
而病勢日篤,猶力憊視事。年十五歲時,夢中嘗得句云:“卷甲歸來馬伏波,早年兵法鬢毛皤”,莫知其謂。至是舟至烏蠻灘,舟人指曰:“此伏波廟前灘也。”公呀然登拜,如夢中所見,因誦夢中詩,嘆人生行止之不偶云。
十月初十日,復上疏乞骸骨,就醫養病。因薦林富自代。又一月,乃班師。至大庾嶺,謂布政使王公大用曰:“爾知孔明之所以付托薑維乎?”大用遂領兵擁護,為敦匠事。廿九日至南康縣,將屬纊,家童問何所囑。公曰:“他無所念,平生學問方才見得數分,未能與吾黨共成之,為可恨耳!”遂逝。舁至南安府公館而斂。柩經南、贛,雖深山窮穀,男女老弱皆縞素,匍匐哀迎,若喪考妣。凡所過江西地方,行道之人無不流涕者。
訃至,桂公萼欲因公乞養病疏參駁害公,令該司匿不舉,乃參其擅離職役,及處置廣西思、田、八寨恩威倒置,又詆其擒濠軍功冒濫,乞命多官會議。先此張公孚敬見公所處岑猛諸子及盧蘇、王受得宜,征剿八寨有方,奏至甚喜,極口稱嘆,謂予知人之明。又述在南京時與言惓惓欲公之意,曰:“我今日方知王公之不可及!”即薦於朝,取來作輔,共成天下之治。桂公、楊公聞之皆不樂,及嗾錦衣衛都指揮聶能遷誣奏公用金銀百萬,托餘送與張公,故薦公於兩廣。餘疏辨其誣。奉旨:“黃綰學行才識,眾所共知,王守仁功高望隆,與論推重。聶能遷這廝捏詞妄奏,傷害正類,都察院便照前旨嚴加審問。務要追究與他代做奏詞並幫助奸惡人犯來說。黃綰安心供職,不必引嫌辭避。”下能遷於獄,杖之死。時予為詹事,桂公、楊公計欲害公,恐予在朝,適南禮侍缺,即推予補之。明年春,上將出郊,桂公密具揭帖奏云云。上遂允命多官會議,削公世襲公爵,並朝廷常行卹典贈謚,至今人以為恨。
公生而天資絕倫,讀書過目成誦。少喜任俠,長好詞章、仙、釋,既而以斯道為己任,以聖人為必可學而至。實心改過,以去己之疵;奮不顧身,以當天下之難。上欲以其學輔吾君,下以其學淑吾民,惓惓欲人同歸於善,欲以仁覆天下蒼生。人有宿怨深仇,皆置不較。雖處富貴,常有煙霞物表之思。視棄千金,猶如土芥,藜羹珍鼎,錦衣縕袍,大廈窮廬,視之如一。真所謂天生豪傑,挺然特立於世,求之近古,誠所未有者也。
配諸氏,參議養和公諱某女,不育。撫養族子曰正憲。諸氏卒,繼張氏,舉一子正億。適予女僅二周而公卒,遂鞠於余。以恩蔭授國子生。孫男曰承勳、承學囗囗;孫女五。
所著有《陽明集》、《居夷集》、《撫夷節略》、《五經臆說》、《大學古本旁注》及門人所記《傳習錄》,所纂則言誦而習者可知其造詣矣。
濠之變蓋非一日,其蒸淫奸暴,腥穢彰聞,賊殺善類,剝害細民,招亡納叛,誘致劇賊,召募四方驍勇,力能拔樹排關者,萬有餘徒。又使其黨王春等分齎金銀數百萬,造奇巧器玩,賄結內外大小臣僚。至有奏保其仁孝者,有復其護衛者,有備其官僚者,有為潛布腹心於各鎮及幾內各要地,復陰置奸徒於滄州、淮揚、山東、河南之間。起事之日,號稱一十八萬,從之東下者實八九萬。非公忠義智勇,誓不與賊俱生,奚旬月之間,遂得克復堅城,俘擒元惡,以成宗社無疆之休哉?不特此也,南、贛等處賊巢蟠居三省,積數十年,如池大鬢之儔,皆勇力機智絕人者,非先計除之,則宸濠一呼,風從烏合,其為天下禍當何如也?且八寨為害積幾百年,思、田擾攘亦既數年,一旦除而安之,文武並用,處置經畫,皆久遠之圖。惜當路忌之既深,而南北臣又皆承望風旨,反肆彈劾。雖平日雅好公者,方公成功時,亦心害其能,考察之歲,承輔臣意。有功如邢珣、徐璉、陳槐、謝源等皆黜之。則國典之所以議功議能者安在哉!
予以女許公之子,蓋憫其孤而撫之。汪公鋐因予諍張公大同之征,當別其善惡,不當玉石俱焚,張公怒,汪迎其意,劾予回護屬官鄒守益,難居大臣,調予邊方參政。賴聖明復職。汪又為疏論公偽學,及指予皆為黨邪不忠。予又為疏明諍大同之心,又明公學術之忠國,及予所以憫子許婚攜撫,皆非得已。疏上,亦賴聖明拔之陷阱,因察公與守益之無辜。於乎!公既困屈,沒齒尚尤不免,則公與予平生所期何如,而皆僅止此者,豈非天與命也,悲夫!
子正憲、正億將以是年仲冬十一日奉公柩葬於洪溪之高村,為次其世行功爵,及所以致謗者,乞銘於宗工。幸憐而屬筆焉,以備他日太史氏之擇。謹狀。
師服問,錢德洪
夫子既沒於南安,寬、畿奔喪廣信,擬所服於竹峰邵子。邵子曰:“昔者孔子沒,子貢若喪父而無服制也。”寬、畿曰:“然。然則今日若有間也。夫子沒於道路,執喪者弗從。寬也父母在,麻衣布絰弗敢有加焉;畿請服斬以從,至越則釋,麻衣布絰,終葬則釋;寬居越則絰,歸姚則否,何如?”邵子曰:“亦宜。”於是畿也服斬以行。
訃告同門,錢德洪
去年季冬十九日,寬、畿西渡錢塘,將北趨殿封。二十二日,有人自廣來,傳夫子以病告,將還庾嶺。聞之且喜且疑,即日舟迎至蘭溪。傳言夫子已逝,相顧駭怖,不知所出。且相慰曰:“天為吾道,必無此事。”兼程夜抵龍遊驛,吏曰:“信矣,於十一月二十九日午時終於江西之南安。”聞之昏殞憒絕,不知所答。及旦,反風,且雨,舟弗能前,望南而哭。天乎!何至此極邪!吾生如偃草棘薪,何益於世,胡不使我百身以贖,而顧萎吾夫子邪!日夜痛哭,病不能興。除夕至常山,又相與自解曰:“命也已矣,天實為之,奈之何哉!”
斯道晦冥幾千百年,而昭明靈覺之體終古不磨,至吾夫子始盡發其秘。同志相承日孚以博,乃有今日,亦云兆矣。天子聖明,注眷日殷,在朝諸老又更相引汲,使其得遂同心,則其未盡之志當更展矣。今若此,天意若將何哉!或者三代以降氣數薄蝕,天道之秘既以其人而發泄之,又旋而撲滅之乎?溯觀孔、孟,已莫不然。夫孔、孟之不得身行其學者,上無君也。今有君矣,而夫子又若此,果何謂邪?
前年秋,夫子將有廣行,寬、畿各以所見未一,懼遠離之無正也,因夜侍天泉橋而請質焉。夫子兩是之,且進之以相益之義。冬初,追送於嚴灘請益,夫子又為究極之說。由是退與四方同志更相切磨,一年之別,頗得所省,冀是見復得遂請益也,何遽有是邪!嗚呼!別次嚴灘,逾年而聞訃復於是焉,云何一日判手,遂為終身永訣已乎!
夫子勤勞王家,殉身以道,古固有勤事而野死者,則亦何憾,特吾二三子不能以為生耳。向使吾人懵然無聞,如夢如醉以生於世,則亦已矣;聞道及此而遽使我止此焉,吾何以生為哉?人生不聞道,猶不生也;聞道而未見其止,猶不聞也。夫子教我發我,引我翼我,循循拳拳而不倦者幾十年,而吾所聞止此,是夫子之沒,亦吾沒也,吾何以生為哉?嗚呼!命也已矣,天實為之,奈之何哉!
所幸四方同志信道日眾,夫子遺書之存,《五經》有刪正,《四書》有傍注,傳習有錄,文有文錄,詩有詩錄,政事有政事錄,亦足恃矣。是夫子雖沒,其心在宇宙,其言在遺書,百世以俟聖人,斷斷乎知其不可易也。明發逾玉山,水陸兼程,以尋吾夫子遊魂,收其遺書。歸襄大事於稽山之麓,與其弟侄子姓及我書院同志築室於場,相勉不懈,以冀成吾夫子之志。尚望我四方同志爰念根本之地,勿為遐遺,乃大慰也。
昔者孔子之道不能身見於行,沒乃光於萬世者,亦以其門人子弟相守不變耳。三年之外,門人治任將歸,人揖子貢,相向失聲,是非兒女之情也。三年之聚,亦以精其學也。子貢反,築室獨居三年,則益粹於進矣。凡我同志,遠者、仕者,雖不必居三年,其亦肯間相一聚,以庶幾相期於成乎?
逾月之外,喪事少舒,將遣人遍采夫子遺言及朋友私錄以續成書,凡我同志,幸於夫子片紙只語備錄以示。嗣是而後,每三年則復遣人,一以裒吾夫子之教言,不至漫逸,一以驗朋友之進足,為吾不肖者私淑也。
荒悖恍惚,不知所云。水陸茫茫,預以陳告,惟吾同志,憐念憐念!
遇喪於貴溪書哀感,錢德洪
嘉靖戊子八月,夫子既定思、田、賓、潯之亂,疾作。二十六日,旋師廣州。十一月己亥,疾亟,乃疏請骸骨。二十一日逾大庾嶺,方伯王君大用密遣人備棺後載。二十九日疾將革,問侍者曰:“至南康幾何?”對曰:“距三郵”曰:“恐不及矣。”侍者曰:“王方伯以壽木隨,弗敢告。”夫子時尚衣冠倚童子危坐,乃張目曰:“渠能是念邪!”須臾氣息,次南安之青田,實十一月二十九日丁卯午時也。是日,贛州兵備張君思聰,太守王君世芳,節推陸君府奔自贛;節推周君積奔自南安,皆弗及訣,哭之慟。明日,張敦匠事,飾附設披積,請沐浴於南野驛,親進含玉;陸同殮襚。又明日,南贛巡撫汪公鈜來蒞喪紀,士民擁途哀號,汪為之揮涕慰勞。十二月二十日,喪至南昌,有司分道而迎,巡按禦史儲君良材,提學副使趙君淵哭,士民皆哭,聲載於道。乃挽喪留於南浦,請改歲而行,以盡士民之哀。趙日至三踴哭。有問之,曰:“吾豈為乃公哭邪?”己醜改歲六日,將發舟,北風厲甚。儲焚香虔祝於柩曰:“公弗行,豈為士民留邪?公黨有子嗣,門人亦望公久矣。”即時反風,不四日,直抵信州。
嗚呼!夫子沒而諸大夫之周旋者至矣。是固夫子盛德所感,亦諸大夫好德之誠也。二三子弗身承其勞,聞其事能弗以為思乎?詳述之,用以告吾同門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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