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민족의 공부. 2019 ~ 2020 기해년(己亥年) 동안거(冬安居) 해제
아침은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산뜻하게 맞이한 첫 인연으로부터 시작된 하루는 활기로 넘쳐난다.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은 거기에 그대로 머문 것이라 하루를 마무리 짓는 저녁에 가족과 함께하는지 되돌아 볼일이다. 가정은 에너지 충전소요 사회는 행의 현장이다. 새 하루는 가정에서 시작되듯이 새 일주일은 치유를 위해 야외에서 시작하기보다 정신량을 심어줄 법이 있는 곳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법당(法堂)이든 성당(聖堂)이든 신당(神堂)이든 경(鏡)이 없고 법(法)이 없겠느냐만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우월주의(優越主義) 가르침보다 아우르고 보듬어 나가는 공평주의(公平主義) 법이 있어야 하는 데 있는지 모르겠다. 변화 없는 일상도 찾는 인연이 없어서요, 무료한 일상도 찾는 인연이 없어서고, 활기를 잃은 일상도 찾는 인연이 없어서다. 왜! 찾는 인연이 없는 것인가. 선천적인 인덕, 붙임성, 사교성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롭지 않으면 되레 짐이 될 뿐이라 덕(德)이 되고 득(得)이 되는 후천적 인성을 배양하기 위한 것에 있다. 이로운 데 천리타향 마다할까. 이롭지 않아 가까운 이웃도 멀리하는 것이라 날마다 신명나는 삶을 살아가려거든 이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하루의 스트레스 이롭지 않은 데에서 받는 것이고, 일주일의 스트레스 쌓이는 데에서 오는 것이며, 한 달간의 스트레스 누적된 것에 시달리는 것이므로 녹여내지 못하면 날마다 새로울 수도 없고, 활기찰 수도 없으며, 기쁨으로 충만 될 수도 없다.
저녁이라 음양합의 0의 수를 이룬 가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운용주체 부인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주말이라 웰빙이든 힐링이든 자연을 찾아 떠나는 그곳에 법을 가진 운용주체가 기다리고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으며, 막힌 곳을 뚫는다면 더 할 나위 없다. 제아무리 좋은 곳이라 해도 일상에 막힌 곳을 뚫을 법도와 언친 곳을 따줄 운용주체가 없다면 육생살이 1안의 웰빙과 힐링에 불과할 따름이라 정체된 생활의 욕구불만 되레 쌓인다. 그저 자유롭고 싶다고 자연인을 동경한 나머지 자연에 빠져 일탈만 일삼다가 태반이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 하나 해결치 못하여 실패의 나락에 빠진다. 주말은 지나온 일주일을 되돌아보기 위해 주어진 시간이요, 한 달은 4주간의 검진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며, 일 년은 12달의 공적을 헤아리기 위해 주어진 시간으로서 하루, 주일, 월말, 연말의 뜻을 되살려야 한다. 물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기도 하겠지만 다채롭지 못하며 조화롭지 못한 것이라 인연의 소중함을 배우는 시간을 한 뜸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음(陰)의 동지(冬至)와 양(陽)의 하지(夏至)로부터 1년 12달 24절기 한 바퀴 돈다는 것은 사방(四方)과 사계(四季)의 다채로운 조화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뜻하는 바라 봄(春)가을(春)의 동서(東西)는 활동주체 생장수장 질량으로, 여름(夏)겨울(冬)의 남북(南北)은 운용주체 생사여탈 중심잡이 질량으로 자리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하동(夏冬) 남북(南北)이 동서(東西) 춘추(春秋)의 중심을 잡아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남북 중심잡이 생사여탈 질량은 동서 생장수장 질량을 관장하여 하동(夏冬)음양(陰陽) 질서에 따른 일월(日月)음양(陰陽)의 교차를 일게 하였고,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 변화에 따른 흥망성쇠와 생로병사는 육생 너머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특별히 내려진 화두다. 풀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죽고 사는 문제뿐아니라 ‘운용주체와 활동주체의 관계’, ‘이로움과 아쉬움의 만남’, ‘마시고 뱉고 호흡’, ‘바르고 바르지 않다는 정(正)과 사(邪)’ 등으로 다양하고 조화롭게 음양이 나뉜 것도 하나 되어 살기 위한 것에 있다. 내 앞에 인연은 나하기 나름이라는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적대보완적 상대성 원리가 인간생활 깊숙이 배인 것도 먼저주고 후에 받는 선(先)순환 행위를 하고자 한 것에 있다. 어려워지는 것도 운용주체 행위를 다하지 못할 때이고, 힘들어지는 것도 운용주체 행위를 다하지 못할 때이며, 고통스러운 것도 운용주체 행위를 다하지 못할 때이다. 태어나서 21세 성인이 되기까지 맞이한 어려움은 부모하기 나름이라는 데 있고, 이후부터 나하기 나름에 따른 것이라 기실 육생의 기본 자리에 올라서기 까지가 단지 궁색한 것뿐이지 어렵거나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기본의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겪게 되는데 이유는 이로운 운용주체라는 데 있다. 누구나 경우에 따라 운용주체일수도 있고, 장소에 따라 활동주체일수도 있으며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할 때 받는 압박의 농도는 근기에 따라 다르다.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상대성 원리는 발전의 원동력으로 자리하여 중심잡이 운용주체가 없으면 생장수장 활동주체 행위를 다하지 못한다. 물론, 육생량은 활동주체가 쌓고 정신량은 운용주체가 쌓지만 공적의 질량은 대동소이하다.
하루보다는 일주일이, 일주일보다는 월말이, 월말보다는 연말에 이룰수록 후회와 희망이 크게 교차하고, 하루와 어린 시절 시간흐름의 상관관계는 보행이라 더디기만 하다. 21세 성인이 된 이후부터 세월의 흐름은 덧없어 일주일과 30세 입지는 통일호 열차와도 같다. 한 달은 40세 불혹으로 무궁화 열차이고, 열두 달은 50세 지천명과 같아 새마을 열차와 다르지 않고, 연말은 60세 이순 60갑자 한 바퀴로서 KTX이고, 돌고나면 초음속이라 왕년을 읊조린다. 봄이다 싶으면 여름이고, 여름이다 싶으면 가을이며, 가을이다 싶으면 겨울이라 백발이 성성하면 때는 늦으리라고 말한다. 하루의 정리는 퇴근 후에, 일주일의 정리는 주말에, 한 달의 정리는 월말에, 일 년의 결산은 연말에 하는 것은 새 하루, 새 일주일, 새 한 달, 새 한해를 맞이하기 위한 것에 있다. 기계화된 문명사회에 어울리지 못한 고달픈 육생살이 이들뿐이라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허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라도 한 달의 한 번 정도 뒤돌아보는 시간 반드시 필요한 데도 스트레스로 인한 타박이 일상화되어 전혀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고달픈 것은 그 무언가 고프기 때문이고, 허탈한 것은 그 무언가 채우지 못해 허한 것이라 입으로 먹고 눈으로 보는 육생량에서 찾으려드니 채워도 채우지 못한 것이라 어느 날 갑자기 절박함의 표적을 받는다. 물론, 갑자기는 시나브로 티끌이 쌓여 폭발한 것이므로 이때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 그런데 문제가 아주 먼 곳에서 발생한 것으로 인식하여 절실함을 먼 곳에서부터 찾아 메우려 든다. 항시 문제는 내 앞의 인연과 소통치 못한 티끌의 때가 쌓여 폭발한 것이므로 흔적을 되짚어본다는 것은 앞에 옆에 뒤에 있는 인연과 소원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에 있어야 한다.
하루를 돌아보는 것도, 일주일을 돌아보는 것도, 한 달을 돌아보는 것도, 한 해를 돌아보는 것도 쌓은 공덕 널리 베푸는 회향(廻向)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다면 이롭게 쓰는 일만 남았다. 돌아본다는 것은 부족함을 찾아보기 위한 것이고, 찾았다는 것은 알았다는 것이며, 알았다면 깨친 것이라 깨우친 만큼 행위의 이로움이 묻어나면 부딪쳐 충돌하여 싸울 일도 없고, 어려워져 고통스럽게 살 일도 없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비록 삶이 육 건사 육생량에 머물렀을지언정 회향한 것이므로 생전의 집착을 놓으면 저승의 본줄 찾아 본연을 다할 수 있다. 지식을 쌓는 것도 쓰기 위함이듯 지혜를 찾는 것도 쓰기 위함이라 쌓기만 하고 쓰지 못하면, 벌기만 하고 소비하지 못하면, 찾기만 하고 존재의 뜻 헤아리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아는 게 병이요, 쌓아둔 게 병이며, 풀지 못한 게 병이라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다. 뜻대로 안 되는 울화병, 통하지 못한 불통병, 믿지 못하는 의심병으로 한(恨) 맺힌 육생살이 죽어서 구천을 떠돌 것인 데 이승의 집착(회향)을 풀지 못하면 저승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죽어서 죽은 것도 아니요 살아서 산 것도 아니다. 놓고, 버리고, 넘어야 하는 것도 산 자가 할 일이지 죽은 자가 할 일일까. 뒤돌아보는 일도 살아있을 때 하는 것처럼, 부족함을 찾는 일도 살아있을 때 하는 것이며, 깨우침도 살아있을 때 깨칠 수 있는 것이라 생전에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생전이든, 동안거든, 연말이든, 월말이든, 회향하는 데 있어서 말이다.
경자년(庚子年) 정월(正月) 대보름, 어느덧 동안거 해제일이 다가왔다. 기해년(己亥年) 봄(春), 그토록 염원하던 도량자리를 마련하여 컨테이너하우스 한방 찻집 1동과 컨테이너에 비닐하우스를 3동을 덮고 뿌리민족의 혼, 대화소통치유센터 인성교육원을 임시 개관하였다. 산속 수행생활 20여년 만이다. 인간스승 두지 말라 일렀거늘, 어리석어 회수로 7년여의 세월을 수하에 있었고, 짧지 않은 세월동안 숫한 모순을 보았던 관계로 떠나야 했다. 모진세월 새롭게 태어나 10년 만에 터전을 마련했을 때에는 대천명(大天命) 이어갈 천지법도(天地法道) 손에 쥐고 있었다. 거룩한 대자연의 가르침으로부터 ‘나를 찾았고’ ‘나가야할 바’를 밝혔으니 하늘의 큰 뜻 저버리지 않으려 부끄럽지 않은 상좌(上佐)로 거듭날 것을 맹세하였다. 놓으려 해서 놓은 것이 아니다. 버리려 해서 버린 것도 아니다. 넘으려 해서 넘은 것도 아니다. 나를 찾아 나가야 할 바를 밝히고자 했을 뿐이다. 주어진 소임을 위해 늦으나마 시작하였으니 머뭇거려 지체한 시간이 없다. 단 한 명뿐이 제자와 거룩한 뜻 받들고자 뿌리민족의 혼 도량에서 기해년에 동안거를 결제하였고, 천지대자연 뿌리의 법도를 몸통에서 가지로 뻗칠 때까지 한 뜸도 흔들리지 않는 상좌가 되기 위해, 일말의 모순도 빚지 않는 상좌가 되기 위한 서원(誓願)을 올렸다. 찾는 이 없어 외로운 것일까. 천지법도 알아주는 이 없어 외로우냐는 것이다. 때가되면 찾아오게 되어 있거늘, 널리 이로움 묻어나게 이끌면 되는 것이거늘, 충만한 기쁨으로 이끌어 나가면 되는 것이거늘, 마침내 사랑으로 행복을 영위하도록 이끌어 나가라 하시기에 2019 ~ 2020 기해년 동안거 해제와 더불어 천부진리(天符眞理) 전(傳)하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상좌 오경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