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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나오는 고가古家가 보였다.
거기 -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 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 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가자면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은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망향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 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아이들이 하눌타리 따는 길 머리론
학림사鶴林寺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잔나비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굴레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꾹채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을 뜯던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 살을 가며 소년들은
금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길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던 촌
그 마을이 문득 그리워
아라비아서 온 반마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 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 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草笠에 쾌자快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 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촌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道具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작별
어머니가 떠나시던 날 눈보라가 날렸다.
언니는 흰 족두리를 쓰고
오라버니는 굴관을 차고
나는 흰 댕기 늘인 삼 또아리를 쓰고
상여가 동리를 보고 하직하는
마지막 절하는 걸 봐도
나는 도무지 어머니가
아주 가시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자그마한 키를 하고
산엘 갔다 해가 지기 전
돌아오실 것만 같았다.
다음 날도 다음 날도 나는
어머니가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푸른 오월
청잣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당 창포 잎에
여인네 행주치마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같이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 밀려드는 것을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진 길을 걸으면
생각은 무지개로 핀다.
풀냄새가 물쿤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나던 길섶
어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홑잎나물 젓갈나물 참나물 고사리를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구나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아니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이 모양 내 맘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첫눈
은빛 장옷을 길게 끌어
왼 마을을 희게 덮으며
나의 신부가
이 아침에 왔습니다.
사뿐사뿐 걸어
내 비위에 맞게 조용히 들어왔습니다.
오랜만에
내 마음은
오늘 노래를 부릅니다.
잊어버렸던 노래를 부릅니다.
자 - 잔들을 높이 드시오.
빨간 포도주를
내가 철철 넘게 치겠소.
이 좋은 아침
우리들은 다 같이 아름다운 생각을 합시다.
종도 꾸짖지 맙시다.
애기들도 울리지 맙시다.
장미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지끈 꺾어 보내놓고
그 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나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 보며 나무 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소녀
뺨이 능금 같을 뿐 아니라
다리가 씨름꾼 같애
내가 슬그머니
질투를 느낌은
그 청춘이 내게 도전을 하는 까닭이다.
새날
고운 아침입니다.
파아란 하늘 아래
기와들이 유난히 빛나고 -
마음속엔 한아름 장미가 피어 오릅니다.
오랜만에
부드러운 정과 웃음과 흥분 속에 다시
사람들은 안에서 ‘희망’이
포기 포기 무성하고
나 이제 호수 같은 마음자리를 하고
조용히 남창을 열어 수선水仙과 함께
‘새날’의 다사로운 날빛을 함뿍 받으렵니다.
묘지
이른 아침 황국黃菊을 안고
산소를 찾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는 너
슬프다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여
흰 패목들이
서러운 악보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牛車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젓한 곳
황혼이 무서운 어두움을 뿌리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저녁
나이 갓 마흔에도 장가를 못 간 칠성이가
엄백이 짚신을 삼는 사랑 웃구들에선
저녁마다 몰꾼들이 뫼고
고담책古談冊 읽는 소리가 들리고
밤이 이슥해 찹쌀개가 짖어서 보면
국수들을 시켰다.
한증寒蒸
헌 털베로 벌거숭이 몸을 가린 내인들이
지친 인어처럼 늘어졌다.
하나같이 낡은 한증 두께가
거렁뱅이들을 만들어놨다.
용로鎔爐같이 뻘겋게 단 한증 안은
불지옥엘 온 것 같다.
무덤 속도 같다.
숨이 턱턱 막히는데
어느 구석에선
‘감내기’를 명주실처럼 뽑아낸다.
나는
뻘건 천정天井이 대자꾸
무서워진다.
수수 깜부기
깜부기는 비가 온 뒤라야 잘 팼다.
아이들이 깜부기를 찌러
참새 떼처럼 수수밭으로들 밀려갔다.
밭고랑에 가 들어서
꼭대기를 쳐다보다
희끗 깜부기를 찾아내는 때는
수숫대는 사정없이 휘며 숙여졌다.
깜부기를 먹고 난 입은
까아매 자랑스러웠다.
촌경村景
구릿빛 팔에 쇠스랑을 잡고
밭에 들어 검은 흙을 다듬는 낮
보기 좋게 낡은 초가집 영마루엔
봄이 나른히 기고
울파주* 밖으론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웃는다.
*울바자의 황해도 사투리
잔치
호랑 담요를 쓰고 가마가
웃동리서 아랫몰로 내려왔다.
차일을 친 마당 멍석 위엔
잔치 국수상이 벌어지고
상을 받은 아주마니들은
이차떡에 절편에 대추랑 밤을 수건에 쌌다.
대례를 지내는 마당에선
장옷을 입은 색시보다도 나는
그 머리에 쓴 칠보족두리가 더 맘에 있었다.
추성秋聲
플라타너스의 표정이 어느 틈에 이렇게 달라졌나
하늘을 쳐다본다.
청징한 바닷가에 다시 은하가 맑다.
눈을 땅으로 떨어트리며
내가 당황하다.
여인부女人賦
미용사에게
결발結髮을 익히는 대신
무릇 여인이여
‘온달’에게서 ‘바보’를 배워라.
총명한 데에 여인은
가끔 불행을 지녔다.
진실로 아리따운 여인아
네 생각이 높고 맑기
저 구월의 하늘 같고
가슴에 지닌 향낭보다
너는 언제고 마음이 더 향기로워라.
여인 중에
학처럼 몸을 갖는 이가 있어 보라
물가 그림자를 보고
외로워도 좋다.
해연海燕은 어디다
집을 짓는지 아느냐.
향수
오월의 낮 차가
배추꽃이 노오란 마을을 지나면
문득
싱아를 캐던 고향이 그리워
타관의 산을 보며
마음은
서쪽 하늘의 구름을 따른다.
돌잡이
수수경단에 백설기, 대추송편에 꿀떡
인절미를 색색이로 차려 놓고
책에 붓에 쌀에 은전 금전
갖은 보화를 그득 쌓은 돌상 뒤에
할머니는 살이살이 국수 놓며 명복命福을 빌고
할아버지는 청실홍실 늘인 활을 놔주셨다.
온 집안사람들의 웃는 눈을 받으며
전복에 복건을 쓴 애기가 돌을 잡는다.
고사리 같은 손은 문장이 된다는 책가를 스쳐
장군이 된다는 활을 꽉 잡는다.
춘향
검은 머리채에 동양여인의 ‘별’이 깃들이다.
“도련님 인제 가면 언제나 오실라우, 벽에 그린 황계 짧은 목, 길게 늘여 두 날개 탁탁 치고 꼬꼬하면 오실라우. 계집의 높은 절개 이 옥지환과 같을 것이오. 천만 년이 지나간들 옥빛이야 변할납디여.”
옥가락지 위에 아름다운 전설을 걸어놓고
춘향은
사랑을 위해 형틀을 썼다.
옥 안에서 그는 춘꽃*보다 더 짙었다.
밤이면 삼경을 타 초롱불을 들고 향단이가 찾았다.
춘향 “야야 향단아 서울서 뭔 기별 업디야?”
향단 “기별이라우? 동냥치 중에 상동냥치 돼 오셨어라우.”
춘향 “야야 그것이 뭔 소리라냐 -
행여 나 없다 괄세 말고 도련님께 부디 잘해 드려라.”
무릇 여인 중
너는
사랑을 할 줄 안
오직 하나의 여인이었다.
눈 속의 매화 같은 계집이여
칼을 쓰고도 너는 붉은 사랑을 뱉어버리지 않았다.
한양 낭군 이도령은 쑥스럽게
‘사또’가 되어 오지 않아도 좋았을 게다.
*참죽나무꽃
창변窓邊
서리 내린
지붕 지붕엔 밤이 있고
그 안엔 꽃다운 꿈이 뒹굴고
뉘 집인가 창이 불빛을 한입 물었다.
눈 비탈이
하늘가는 길처럼 밝구나.
그 속에 숱한 얘기들을 줍고 있으면
어려서 잊어버린 집이 살아났다.
창으로 불빛이 나오는 집은 다정해
볼수록 정다워
저 안엔 엄마가 있고
아버지도 살고
그리하여 형제들은 다행多幸하고
마음이 가난한 이는 눈을 모아
고운 정경을 한참 마시다
아늑한 집이 온갖 시간에 빌려졌다.
친정엘 간다는 새댁과 마주앉은
급행열차 밤찻간에서도
중년 신사는 나비넥타이를 찾고
유복한 부인은 물건을 온종일 고르고
백화점 소녀는 피곤이 밀린 잡담 속에서도
또 어느 조고만 집 명절 떡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댈 데 없는 외로움이 박쥐처럼 퍼덕이면
눈 감고
가다가
슬프면 하늘을 본다.
춘분
한 고방 재어놨던 석탄이 큉하니 나간 자리
숨었던 봄이 드러났다.
얼래 시골은 지금 밤 나왔갔네.
남쪽 계집아이는 제 집이 생각났고
나는 고양이처럼 노곤하다.
동기同氣
언니와
밤을 밝히던 새벽은
‘성사聖赦’를 받는 것 같아
내 야윈 뺨엔 눈물이 비 오듯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이 뜨거워 -
언니가 보고 지워 떠나가는 날은
천릿길을 주름잡아 먼 줄을 몰라
감나무 집집이 빠알간 남쪽
말들이 거세어 이방異邦도 같건만
언니가 산 데서
그곳은 늘상 마음이 그리운 곳 -
오늘도 남쪽에서 온 기인 편지
읽고 읽으면 구슬픈 사연들
‘불이나 뜨뜻이 때고 있는지
외따로 너를 혼자 두고
바람에 유리문들이 우는 밤엔 잠이 안 온다.’
두루마지를 잡은 채
눈물이 피잉 돌았다.
감사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대기를 마시며
내가 자유롭게 산보를 할 수 있는 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것만으로 나는 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늬도 몰래
멀리멀리 가버리고 싶은 날이 있어
메에 올라 낯익은 마슬을 굽어보다
빨간 고추가 타는 듯 널린 지붕이
쨍이*를 잡는 아이들의 모습이
차마 눈에선 안 떨어져
한나절을 혼자 산 위에 앉아 보다.
*짱아 = 잠자리
녹원鹿苑
눈보라를 맞으며 공원을 걷는다.
눈보라를 맞으며 공원을 걷는다.
붉은 산다화 꽃술을 따 들고
서투르게 사슴을 불러본다.
사슴과 놀다 보니
괜히 슬퍼
사슴을 데리고 사진을 찍다.
나라奈良 공원에서
새해 맞이
구름장을 찢고 화살처럼 퍼지는
새 날빛의 눈부심이여
‘설’상을 차리는 다경多慶한 집 뜰안에도
나무판지에 불을 지르고 둘러앉은
걸인들의 남루위에도
자비로운 빛이여
새해 늬는
숱한 기막힌 역사를 삼켰고
위대한 역사를 복중腹重에 뱄다.
이제 우리 늬게
푸른 희망을 건다.
아름다운 꿈을 건다.
저녁 별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두울 나 두울
논 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밤도 멀어져
물방아소리 들은 지 오래
고향 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하일산중夏日山中
보리 이삭들이 바람에 물결칠 때마다
어느 밭고랑에서 종다리가 포루룽 하늘로 오를 것 같다.
논도랑을 건너고 밭머리를 휘돌아
동구릉東九陵 가는 길을 물으며 물으며 차츰
산속으로 드는 낮은 그림 속의 선인仙人처럼
내가 맑고 한가하다.
낮이 기운 산중에서 꿩소리를 듣는다.
다홍댕기를 칠칠 끄는 처녀 같은 맵시의 꿩을 찾다보면 철쭉꽃이 불그레하게 펴 있다.
초록물이 뚝뚝 듣는 나무들이 그늘진 곳에
활나물 대나물 미일대를 보며
- 나는 배암이 무서워 칡순을 따 머리에 꽂던 일이며
파아란 가랑잎에 무릇을 받아먹던 일이며
도토리에 콩가루를
발라먹던 산골얘기를 생각해낸다.
어디서 꿩알을 얻을 것 같은 산속
‘숙淑’은 산나물 꺾는 게 좋고 난 ‘송충’이가 무섭고 -
한 치도 못 되는 벌레에게 다닥뜨릴 때마다
이처럼 질겁을 해 번번이 못난이 짓을 함은
진정 병신성스러우렷다.
솔밭을 헤어나 첫째 능에 절하고 들어 잔디 위에 다리를 쉰다.
천년 묵은 여우라도 나올 성부른 태고적 조용한 낮
내가 잠깐 현기眩氣를 느낀다.
[출처] 두번째 시집 <창변>의 시 1945년 발행 (서울시인협회) |작성자 풀과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