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법’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가정하에 ‘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며 국민들이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한 기본적이고 중요한 장치입니다. 즉,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법이 없는 무법천지이거나 법의 집행이 그때그때 다르다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군사정권시절 ‘법’을 권력의 도구로 활용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을 보면 그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당시는 권력자에 의해 무고한 사람이 죄인이 되고, 심지어는 남파 간첩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잘 구축되어 시행되는 법이 이런 억울한 일을 방지하는 것이죠.
마찬가지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율법’을 속박이나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이라 보는 개념에서 물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 기본적인 장치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요 8:32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요" 라는 말씀 중에 진리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에 적용한다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또한 진리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알고 하나님의 법이 잘 지켜지면, 그 법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법의 준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날 법을 세우신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면 성경 안에서 서로 대치되는 듯 보이는 말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9장 5-6절 말씀과 오늘 본문 말씀은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9장 5-6절을 보면
5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살인은 반드시 그 핏 값을 목숨으로 찾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만들어진 제도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동해보상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살인한 자가 도망하여 보복자들의 손에 죽지 않도록 보호하는 장치가 등장합니다.
살인을 하였다면, 동해보상법에 의해 당연히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살인자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왜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나누며 이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고의로 살인한 사람과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사람의 죄의 무게가 같을까요?
예를 들어 빗길에 차가 이끌어졌습니다. 스스로 차량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지나가는 사람을 쳐서 심각한 중상을 입혔고 결국 숨졌습니다.
이 운전자를 고의적인 살인자와 같은 취급을 해야 할까요?
현재 우리나라의 형법에 살인에 관한 법률은 살인죄와 과실치사로 분리되어 선고하고 있습니다.
살인죄의 법정형은‘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지만, 상해치사죄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입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법 감정은, 고의적인 살인죄와 과실치사는 그 죄의 무게가 다르다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과실치사에 대한 법률 적용은 성서에서도 등장합니다.
바로 도피성법입니다.
도피성은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도 신속히 하루 만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동쪽에 3곳, 서쪽에 3곳에 위치하여 있고 도피성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14M 이상 넓이로 개설되어 이동하기 용이하게 하였고, 곳곳에 안내 푯말을 설치하여 도피성을 찾기 쉽게 하였습니다.
도피성들은 레위지파에 기업으로 받은 48개의 성읍 중에서 지정되었기 때문에 레위지파의 영향으로 종교적-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성읍이었습니다. 도피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레위지파에서 운용하는 것으로 치외법권지역과 같은 기능을 하였는데, 도피성으로 도피할 수 있는 경우는 민수기35:22-2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무심코 사람을 밀쳐서 죽임,
② 무심코 물건을 던져서 죽임,
③ 무심코 돌을 던져서 죽임.
이상 세 가지 경우는 고의적인 의도 없이 예기치 않게 갑자기 발생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세 가지에 한해 과실치사로 인정되지만, 이러한 점을 인정받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민35장, 신19장).
먼저 과실치사범은 도피성으로가 성문 입구에 있는 장로들에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입성을 허락받아야 합니다.
만일 이 과정에서 그가 고의적인 살인으로 수배중인 범인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시 체포되어 보복자에게 넘겨집니다.
그러나 과실치사범으로 인정되면 그 성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 절차는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과 관련된 피의자와 보복자가 함께 회중들 앞에 서서 재판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재판이 도피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민 35:34에 따르면 이 재판은 사건이 일어난 성읍으로 가서 진행됩니다.
이 재판 과정을 살피게 되면 억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신중하고 정확한 법 집행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범죄를 증언하는 증인에 관한 법률에서는 굉장히 앞서있는 인권의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증인이 한 사람만 세워진다면 그 증언만으로는 신빙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증언은 언제든지 왜곡될 수 있고 거짓 증언 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증인을 세울 때 반드시 두세 사람으로 하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두 사람의 증언이 모호할 경우 다른 한 사람이 더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에 두세 사람의 증인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 생명이라도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생명 사랑의 원리에서 발생한 것입니다.(동해보상법도 그 이상 보복하지 말라는 생명 보호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법 집행 절차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참석하여 회중들의 재판을 통해 과실치사 여부가 결정되게 됩니다. 만약 가해자의 행위가 과실치사로 인정이 되면 그는 도피성으로 돌아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정되지 못할 경우 보복자에게 넘겨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보복자는 누구일까요?
당시 피해자 가족이나 친족 중에 누구나 그 살인자를 즉각 보복 살해 할 수 있었는데 그를 ‘피의 보복자’라 불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보복자’의 의미로 쓰인 히브리어 단어 ‘고엘’은 ‘갚아주다’, ‘무르는 자’, ‘구속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고엘’은 빚을 대신 탕감해 주거나 저당 잡힌 땅을 물러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룻기에서 나오미의 권면에 순종했던 룻이 보아스를 ‘고엘’로 지정하는 모습에서 접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도 빚을 대신 갚아주는 ‘고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보복자’는 누군가 자신의 가족의 생명을 해쳤을 때 가족이나 친족 중에서 누군가 나서서 ‘고엘’역할을 담당하여 그 생명의 빚을 대신 갚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수성과 문화 때문에 가해자와 보복자가 함께 참여한 재판이 정의롭고 공정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공의롭지 못하다면, 재판의 결과가 과실치사로 나왔다 하더라도 보복자가 인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법’집행으로 가해자가 보복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살인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 도피성 안에서만 생활해야 합니다. 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그가 도피성 밖으로 무단 외출했다가 혹시라도 보복자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평생 도피성 안에 거주해야합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도피성 안에서는 과실치사범은 사람을 죽였더라도 법으로 보호 받으며 평생 동안 제한적이지만 자유롭게 생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 도피성에서 연금된 생활을 해야 하는 과실치사범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없지는 않습니다.
바로 당시 대제사장이 죽었을 때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대 제사장이 죽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과실치사범의 사면과 대제사장의 죽음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대 제사장의 죽음을 대속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해 보면, 대 제사장의 죽음으로 살인자의 죄가 사해지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모형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미 구약 시대부터 대속의 모형이 주어져 있었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올해 3월 민중신학자였던 문동환 목사의 장례식이 서울 한신대학교 캠퍼스에서 학교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장례예배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집례를 맞았던 한신대 신대원장 김주환 목사가 이런 광고를 합니다.
“문동환 목사님은 생명 사랑의 정신으로 평소 화초 가꾸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죽어가던 화초도 문 목사님의 손길이 닿으면 파릇파릇 살아났습니다.
생전에 문목사님의 생명 사랑 정신을 생각하며 화초를 준비했으니 참석하신 분들은 선물로 하나씩 가져가십시오.”
당시 장례식장에서 선물로 싱싱한 화분을 하나씩 받아들고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 사랑의 정신이 매우 인상 깊게 남았을 것입니다.
돌아가신 문 목사님의 손에만 오면, 죽어가는 화초들이 살아났듯이 교회에 오면 죽어가는 영혼들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교회는 불의에 의해 억압당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들을 보호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사랑의 정신을 생각하며 우리 삶에 적용한다면,
오늘 본문의 도피성의 정신은 이 시대 교회의 역할 중의 하나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가 아니라면 지금 이 시대에 누가 도피성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누가 억울한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 약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내야 할까요?
누가 연약한 자들의 생명을 보호를 위해 힘을 써야 할까요?
하나님의 생명사랑의 정신을 이어받은 교회가 이 시대의 도피성이 되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자들이 없도록 약자를 보호하고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해야 되지 않을까요? 문론 도피성의 이용절차처럼 검증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제도의 오용을 걱정하여 생명을 버려야 겠습니까?
군사정권 시절, 명동성당이 치외법권지역으로서 독재정권의 칼날을 피해 숨어든 자들을 공평하게 품었던 것처럼, 이 시대의 모든 교회들은 세상을 향하여 생명을 품는 생명싸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도피성 법을 통해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대 제사장의 죽음으로 살인자의 죄가 사해지는 대속의 사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건과 연계해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악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죽이는 살인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그 죄 값을 마땅히 치러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살인자의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행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완전하여 그 어떤 추가 조치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죄 씻음을 받았고, 죄의 사슬에서 놓임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습관, 죄의 쓴 뿌리가 남아 옛 사람의 모습을 버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모습은 도피성에서 대 제사장의 대속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죄의 무게를 벗지 못하는 살인자와 무엇이 다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세심한 사랑과 배려를 헤아려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 사랑의 원리를 우리 삶에 투사하여 부당한 대우와 불법적인 폭력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웃과 약자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앞장서기를 권면합니다.
죽어가는 생명이 살아나는 교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진리 안에서 자유 함을 얻는 교회, 이 땅에 공의와 정의,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꽃피고 열매 맺도록 안내하는 교회, 우리 공동체가 도피성과 같이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또한 그렇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