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낙유원【登樂遊原】-낙유원에 올라서-이상은【李商隱】
向晩意不適【향만의부적】날은 저무는데 기분이 울적하여
驅車登高原【구거등고원】수레 몰고 높은 언덕에 올라본다.
夕陽無限好【석양무한호】석양은 한없이 좋기만 한데
只是黃昏近【지시황혼근】다만 아쉽나니 황혼이 가까워라.
1 구를 보자
向晩意不適【향만의부적】날은 저무는데 기분이 울적하여
사람이 살다보면 누군들 기분이 울적하지 않을까 그것이 살아있는 존재의 숙명이다.
사람은 변하는 자연 조건에 적응해야 하고 사람 사이의 생존 경쟁에 직면해있다.
늘 강할 수도 없고 언제나 약하지도 않다.
개인의 하루 사이의 기분도 일정하지 않다.
하물며 평생의 기분이 어찌 좋기만 하겠는가.
저녁은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이다
그러면 낮의 일도 마무리 되어 밤이면 완전한 휴식과 충전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가는데【向晩】 기분은 울적하다【意不適】는 것이다.
왜 그렇게 울적한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짐작만 할 뿐이다.
살아있는 사람이 사노라면 그럴 수도 있다.
더구나 남다른 삶의 의미를 가지고 뜻있는 일을 하려면 많은 노력과 희생이 뒤따르고, 갈등도 많으리라는 짐작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저녁이 되어도 무언가 마음에 울적한 것이 남아있다는 하나의 갈등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시상을 일으키고 있다.
제 2구를 보자
驅車登高原【구거등고원】수레 몰고 높은 언덕에 올라본다.
이러한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수레를 몰고【驅車】 높은 산에 오른다는 것이다【登高原】.
산에는 무엇이 있는가, 특히 저녁 산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일상인에게 있어서 저녁산은 차라리 스산한 기분마저 느낄 것이다.
먹을 것도 마땅찮고 쉴 곳도 없다. 두렵기 까지 할 것이다.
시적 자아는 사람 사는 마을로는 갈 곳이 없는가 보다.
자신의 갈등을 풀어줄 어떠한 것도, 집과 마을에는 없는가보다.
그의 마음속에 생긴 갈등은 어쩌면 집과 마을에서 생긴 것인 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갈등의 해결방법으로 수레를 몰고 산으로 가는 시적 자아의 방법을 보여준다.
제 3구를 보자
夕陽無限好【석양무한호】석양은 한없이 좋기만 한데
산에 올라보니 무엇보다도 석양【夕陽】은 한없이 아름다웠다【無限好】.
석양은 가릴 것은 가리고, 드러낼 것은 드러내 준다.
그 따갑지 않은 은은함은 관용과 통하고 그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들지 않는 잔잔함은 휴식과 통하는 것일까
낮의 햇볕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산에서 본 여러 가지 풍물 중에서 노을빛이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라는 감회를 보여준다.
제 4구를 보자
只是黃昏近【지시황혼근】다만 아쉽나니 황혼이 가까워라.
그런데 노을빛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어두워져 가는 것이었다.
어두워지면 곧 노을은 지고 캄캄한 밤이 곧 찾아들 것이라는 생각【黃昏近】이 들었다.
노을빛에서 느낀 아름다움은 밤이 가까워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밤이 되기 전의 잠깐 시간만 계속된다는 아쉬움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 인생이 아닐까
고생 끝에 일의 요령을 알게 되면 남은 시간이 얼마 없고 참다운 사랑을 느끼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떠나고 지독한 오해가 해소되면 이미 일은 비틀어져 있다.
삶의 진실을 깨달으면 머리털은 희어지고 삶의 보람을 찾으면, 몸은 이미 늙어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는 노을이 아름답지만 그 노을이 지속되는 시간은 짧다는 아쉬움을 드러낸다.
1,2,3,4구를 종합하면
사람의 삶이란, 갈등의 연속이고 연속되는 갈등의 상황을 사람들은 나름대로 해소하려한다.
놀이로 해결하기도 하고 물질로 해결하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해결하고, 정신적으로도 해결하려고도 한다.
그러한 것이 현실의 삶에서 불가능하면 사후의 세계로 미룬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세계다.
그러나 시적 자아가 찾아낸 갈등해소 방법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 아쉬움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보편적 인간의 삶이 갖는 한계인지도 모른다.
시적 자아는 이러한 한계에서 인간 본연의 우수를 느끼고 있다.
그는 아직 종교적 차원의 확장된 삶의 세계를 갖고 있지 못한 듯하다.
과거 현제 미래를 연결하는 삶의 의미 체계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삶에 있어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고 살고자 하는 사람이 현실적 삶에서 갈등에 부딪힐 때, 나름대로 찾아낸 방법이 영속적이지 못할 때 느끼는 우수가 묻어난다.
결론적으로 이 시는 <현실의 갈등적 삶에서 종교적 삶에 이르지 못한 지식인이 인간적 한계에서 느끼는 우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