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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이 명치유신의 원동력이었다.” 신화는 거짓이다.
2020년 5월 13일
* 중국학자 등홍(鄧紅)이 2018년 1월에 『일본의 양명학과 중국 연구(日本的陽明學與中國硏究)』(廣西師範大學出版社, 332쪽, 55.00元) 저서를 출판하였고 2월 24일에는 광명일보 인터넷에 「“일본양명학(日本陽明學)”의 진실과 허구」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그는 “양명학이 일본 명치유신의 원동력이었다.”는 주장을 중국사람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믿고 자긍심을 가졌는지를 연구하여 이것이 거짓(虛構)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학술적 근거는 충분하다고 평가합니다.
사실상 일본학계에서 어느 누구도 이런 주장을 믿지 않으며, 중고교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싣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일부 한국 학자들은 일본 선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중국 정치가 양계초 등이 편찬한 잡지를 읽으면서 이런 주장을 믿었다고 합니다. 현재 한국의 양명학 연구자 가운데 일부는 지금도 이런 주장을 믿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상당히 잘 밝힌 학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현재 한국 정치의 일부 보수파들도 이런 주장을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학자들이 이 주장의 명확한 사실을 밝히지 못하였고 밝혔더라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등홍의 연구에 따르면 이 주장이 1890년대 일본의 “사회운동”에서 나왔고 다시 중국으로 역수입되면서 증폭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양명학”이라는 학술용어는 일본의 사회운동을 말하는 것이고 명나라 왕양명의 학술이나 현재 학술연구 용어와는 아주 다르다고 평론하였습니다.
등홍은 명치시기와 1890년대의 일본양명학에 대하여 손문의 19017년 평론을 인용하여 결론을 지었습니다. 손문은 1905년에 일본 도쿄에서 발표한 연설문에서는 명치유신에서 양명학의 역할을 찬양하였습니다.(출처 : 「在東京中國留學生歡迎大會上的演說」) 그러나 19017년에는 일본의 개혁개방과 왕양명의 지행합일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평론하였습니다.(손문, 「建國方略之一」, 1917년) 손문은 청나라를 뒤엎으려는 혁명가이고 양계초는 청나라 황실을 유지하려는 개량파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 말기에 혁명파의 정치사상이 조선 학계에 들어오기 쉽지 않았고 오히려 양계초의 선전물이 많이 유입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양명학”이라는 명칭이 동아시아 학계의 공통된 학술용어라고 보는 것은 제한적인 뜻에서 사용할 수 있지만 조심하지 않고 널리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1890년대 일본의 “사회운동”에서 비롯된 “일본 양명학의 정신”은 며칠 전에 카페에 올린 오카다 다케히코(岡田武彦, 1909-2004)의 『王陽明大傳:知行合一的心學智慧』(2002)의 「머리말」 번역(2020년 5월 10일)에서도 조금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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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학계의 양명학 연구에 관하여 제가 겪었던 경험을 조금 밝히려고 합니다.
저는 30대 후반에 대만대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동안에 양명 후학의 문집과 글을 많이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또한 당시 대만, 중국, 일본, 서양의 연구자들 논문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 읽었던 양명 후학들의 자료에서 얻은 이해와 느낌은 이들의 주장이나 이해와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저에게는 학술적 장애가 일어났고 그래서 특히 일본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를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양명학을 주창하거나 연구한 시기는 명치시기, 1890년대, 제2차대전 이후 시기 셋을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전후 시기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주장은 중국에서 양명학의 근대적 사유가 좌절되었거나 굴절되었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사유의 핵심은 양명학이 개인의 인욕을 긍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인욕 긍정이 개인의 자유를 말한다고 확대해석하였습니다. 이 점이 서양의 근대적 사유와 닮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양명은 언제 어떤 경우에도 송나라 성리학자와 마찬가지로 천리를 지키고 인욕을 버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어디에도 개인의 인욕을 긍정하였던 적은 없습니다.
좌절 또는 굴절이라는 말뜻을 보면 좌절은 중요한 줄기가 부러지고 꺾어져서 회생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굴절은 중심 줄기가 부러져서 곁가지가 삐뚤어지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웃 국가의 미래발전에 대하여 이토록 저주에 가까운 막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중국과 한국은 양명학의 근대적 사유가 좌절되거나 굴절되었기 때문에 현대화를 성취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일본 지식인의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 갖고 있던 생각이었고 지금도 일본 우파들의 생각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 일본을 용서할 방법을 찾아야할 시기가 왔습니다.
또한 1980년대와 90년대 경제성장이 급속하게 일어나고 있던 한국과 대만에서 근대화의 좌절과 굴절이라는 주장을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현재 한국과 중국의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을 보면 참으로 황당한 주장입니다.
둘째, 일본 명치시기 양명학자들에 관한 연구논문들을 보았습니다. 논문의 주석에서 인용된 글을 보니까 명치시기의 소위 양명학자들의 양명학 이해 수준이 아주 낮았고 오해도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들은 양명학을 학술적 관점에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신도, 조선의 퇴계학, 송명 성리학, 양명학, 서양 천주교, 네덜란드의 서양 지식 등 다양한 지식을 배우고 배워서 아는 것을 자기들 주장에 널리 이용하였을 뿐입니다. 이들은 이러한 학술들의 내부에는 대립되는 주장들이 있다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현재 학술적 관점에서 이들의 주장을 읽어보면 동어 반복과 논리 모순이 많은데, 이것은 이들이 양명학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 1890년대 일본의 근대화를 주장하였던 정치가 또는 사상가들이 양명학자이며 양명학이 일본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는 학술적 선입견입니다. 이들에 관한 연구논문들을 보니까 이들도 양명학을 학술적으로 연구한 것이 아니고 사회운동에 이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사회운동이라는 것은 학술연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양명학 주창은 소위 일본 국수주의의 국민도덕 재건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일본의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국민정신” 또는 “국민도덕”을 만들려는 목적 때문에 여러 가지 학술의 장점을 모았고 그 가운데 양명학의 몇 가지 구호도 자의적으로 이해하고 이용하였습니다. 결국에 이들도 국민정신과 국민도덕을 국가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 유도하였고 결과는 제국주의가 되어 동아시아의 재앙이 되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일본의 몇몇 연구자들은 “양명학”이란 학술은 일본학계가 세운 근대적 학술이며 일본의 학술이라고 주장하며, 중국과 한국에서 연구하는 양명학은 현대적 학술이 아니라고 폄하하고 있습니다.
1890년대 일본의 양명학 주창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하는 왕양명의 이미지를 만들어 존왕양이와 군국주의에 이용하였습니다. 왕양명이 학술과 전쟁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신비화시키고 왜곡시켜서 학술적 성인과 전쟁영웅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양명 학술의 강력한 요구는 인욕을 버리고 성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주자학을 타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양명이 전쟁을 싫어하였고 사람들 죽이는 것을 죄악이라고 여겨 정서적 부담이 아주 컸습니다. 왕양명이 몇몇 농민반란과 주신호 반란을 진압하였지만 중요한 전략은 모두 부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던 것이고 정작 자신은 전쟁에 소극적이고 상당히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왕양명의 실제 모습은 일본의 무사들이 기대하고 그려낸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 일어난 왕양명의 성인화 또는 신비화는 현재 양명학 연구자들이 버려야할 연구 태도입니다.
이밖에도 전후 시기 일본에서 양명학 연구자라고 자칭하는 연구자들도 양명학을 학술적으로 연구하지 못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큰 장애는 왕양명 또는 양명 후학의 서적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은 길은 양명학의 겉을 연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왕양명의 전집 또는 양명 후학들 저서에서 사실의 연도와 계승 관계를 고증하거나 글귀에 주석을 달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왕양명과 양명 후학이 주장한 학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명나라 말기부터 양명학의 학술 내용을 요약하거나 또는 학파의 분화를 정리하는 연구성과들이 나왔고 대표적인 것이 황종희(黃宗羲)의 『명유학안(明儒學案)』입니다. 전후 시기 일본 연구자들은 명나라 말기의 연구 서적들에 있는 관점과 요점을 인용하여 자신들이 연구하여 얻은 것처럼 학술적 성과라고 속였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은 최고의 연구를 다하여 마쳤다고 여겼습니다. 실제로는 양명학의 겉을 보는 것에 그쳤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연구는 사실상 양명학 문턱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에 저는 박사 논문에서 일본 연구자들의 연구 서적과 논문들의 주장과 관점을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귀국한 뒤에 하곡 정제두 선생의 심학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도 한국 양명학계에는 여전히 일본의 연구성과를 높이 평가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오해를 말하는 사람이나 연구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었으나 현재는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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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홍이 광명일보 인터넷에 올린 글을 번역하였고 필요한 것은 찾아서 보충하였습니다.
참고 논문 :
정지욱, 「나카에 토쥬(中江藤樹)의 성의설(誠意說) - 왕일암, 유종주 성의설과의 비교를 통하여-」, 2012년, 『철학논집』, 29집.
최재목, 「近代 韓國·日本의 「陽明先生肖像」에 나타난 思想 戰略 -崔南善의 『少年』誌와 東敬治의 『陽明學』誌를 중심으로-」, 『양명학』, 2008년, 21집, 233-260쪽.
신현승, 「日本의 近代 學術思潮와 陽明學」, 『일본사상』, 2008년, 14집.
吴震, 「再論“兩種陽明學”——近代日本陽明學的問題省思」, 『社會科學戰線』, 2018年 第7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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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양명학(日本陽明學)”의 진실과 허구 등홍(鄧紅)
등홍(鄧紅, 1958년생, 현재 일본 규슈시립대학 문학부 교수)
출처 : 광명망(光明網), 2018년 2월 24일
1896년 이후에 일본에서 양명학 붐이 일어나서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에 일본에 건너간 일부 중국사람들 양계초(梁啟超, 1873-1929), 장군매(張君勱, 1887-1969), 장태염(章太炎, 1869-1936) 등은 일본에서 양명학을 알았고 받아들여 다시 중국에 역수입하였다.
중국에서 발원한 양명학과 일본양명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일본양명학은 정말로 명치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던가? 광서사범대학출판사에서 최근에 『일본의 양명학과 중국 연구(日本的陽明學與中國研究)』(저자 등홍, 2018년 1월 출판)을 출판하였고 양명학이 일본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일본양명학과 중국의 진실한 관계가 무엇인지를 찾아 밝혔다.
“일본양명학”은 19세기 말에 몇몇 일본인들이 400년 전의 중국 명나라 사상가 왕수인의 호 “양명”을 빌어 일본에서 일으킨 사회운동이었다. 사회운동이 일어난 원인은 복잡하지만 학술에서는 허구적인 부분이 아주 많다. 사회운동이라는 “일본양명학”은 왕양명 철학사상을 연구하는 “양명학”과 명칭이 서로 닮았지만 서로 다르다. “일본양명학”은 사회운동이고 “양명학”은 학술연구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학계의 중국철학사 분야에서 왕양명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성과는 아주 풍성하며 “양명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은 사회운동이었던 “일본양명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야 한다.
1. “양명학”이라는 용어는 왜 일본어에서 생겼는가?
“양명(陽明)”은 중국 명나라 사상가 왕수인(王守仁, 1472-1529)의 호이다. 왕수인이 양명동에 작은 집을 짓고 강학하면서 유명하였고 스스로 “양명선생” 또는 “양명산인(陽明山人)”이라고 불렀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학설을 “양명의 학술(陽明之學)”, “양명의 주장(陽明之說)”이라고 불렀다.
『명사, 왕수인 전(明史, 王守仁 傳』 :
“왕수인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17살에 강서성 상요현(上饒縣)의 누량(婁諒, 1422-1491)을 찾아가서 주자의 격물에 관하여 토론하였다. 소흥부(紹興府) 집으로 돌아와서 날마다 정좌하고 오경을 읽고 함부로 웃거나 남들과 떠들지도 않았다. 구화산(九華山)을 유람하고 돌아와서 양명동에 작은 집을 지었다. 몇 년 동안 불교와 도교를 널리 배웠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용장역에 귀양 갔는데 아주 편벽하여 일반 서적도 없었기에 예전에 배웠던 것들을 날마다 기억하여 따져보았다. 갑자기 격물치지의 뜻을 깨달았는데, 자신의 마음에서 천리를 찾아야 하며 외부 사물에서 천리를 찾지 말아야 한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도리가 여기에 있었구나!’라고 탄식하였고 결국 자신의 깨달음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은 오로지 치양지를 핵심으로 삼았다. 왕양명의 주장을 보면, 송나라 주돈이(周敦頤, 1017-1073)와 정호(程顥, 1032-1085) 이후에 상산 육구연(陸九淵, 1139-1193)만이 간이(簡易)하고 직행(直捷)하는 공부방법을 주장하여 맹자의 정통을 계승하였고, 주자(朱熹, 1130-1200)가 편찬한 『사서집주(四書集註)』와 『사서혹문(四書或問)』 같은 서적들은 주자가 중년시기에 완성되지 못한 견해를 반영한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학자들을 기꺼이 왕양명 주장을 긍정하였기에 ‘양명학(陽明學)’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양명학(陽明學)”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났는데 “왕양명의 학술”이라는 뜻이다.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를 살았던 황종희(黃宗羲, 1610-1695)가 편찬한 『명유학안(明儒學案)』에서는 왕양명 본인의 학술을 “요강의 학술(姚江之學)”(권 10, 「姚江學案」)이라고 불렀고, 학생들의 학술도 “왕문의 학술(王門之學)”(권 11 이후의 「浙中王門學案」, 「江右王門學案」, 「南中王門學案」, 「北方王門學案」 등)이라고 불렀다. “양명학(陽明學)”이라는 호칭이 중국에서는 유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적 학문이라는 뜻의 명칭을 가진 “양명학(陽明學)”은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이며 1890년대 일본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전에는 일본에서도 왕양명 일파의 학술을 중국처럼 “요강(姚江)” 또는 “왕학(王學)”이라고 불렀다. 자료를 조사해보니 일본에서 “양명학(陽明學)”이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명치유신시기의 지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었다. 그는 “내가 왕양명 『전습록』을 읽어보니 정말로 재미있었다. 최근에는 이지(李贄, 1527-1602)의 『이씨분서(李氏焚書)』를 읽어보니 양명학파(陽明派)인데 말마다 내 마음에 들었고 오시오 츄사이(大鹽中齋, 1793-1837)의 『세심동 차기(洗心洞劄記)』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오시오 츄사이도 양명학파인데 읽어볼 만하다. 나는 양명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았지만 학술이 진짜이며 여기저기 나의 뜻에 정말로 잘 맞는다.”고 말하였다.
이 글에서 학파의 계승관계를 따져서 왕양명, 이지, 오시오를 “양명학파(陽明派)”라고 부르고 그들의 학문을 “양명학”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명나라시기에 불렀던 “왕양명의 학술(陽明之學)” 또는 “왕양명의 주장(陽明之說)”과 똑같은 뜻이었다. 그런데 오시오가 양명학 또는 양명학파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며 명치유신 이후에 유행한 “양명학” 명칭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에서는 일본주의(日本主義)를 고취하고 있던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구가 가쓰난(陸羯南) 등이 사회운동을 일으켰는데, 명치정부가 사교장 녹명관(鹿鳴館)을 중심으로 펼치는 전반적 서양화 정책을 반대하는 사회운동이었다. 이들은 사회운동 목적이 일본의 “국민도덕(國民道德)”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학술적 학파에 가까운 호칭 “양명학”을 사용하였고 이어서 『양명학(陽明學)』이라는 대중잡지를 창간하여 “양명학”운동의 중요한 본거지로 삼았다.
1896년 7월 5일 요시모토 조오(吉本襄)는 도쿄(東京)에서 대중 통속잡지 『양명학(陽明學)』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매월 5일과 20일에 출판하는 반월간이었고 반드시 날짜를 지키지는 못하였다. 잡지에는 양명학(陽明學), 논단(論壇), 강연(講筵), 문림(文林), 사전(史傳) 등 난을 두고 잡지사 사론이나 왕양명 행정과 학술이론에 관한 문장을 발표하였다. 1899년 5월 20일에 마지막 잡지를 내고 폐간되었다.
1903년 3월에 히가시 케이지(東敬治, 1860-1935), 이름 正堂, 강호시대의 저명한 학자 東澤瀉의 아들)가 『왕학잡지(王學雜誌)』를 창간하고 『양명학』 잡지의 정신을 계승하였다고 말하였다. 발행 주체는 양명학을 고취하였던 명선학사(明善學社)이었다. 이 뒤에 일본 국내에서는 몇 가지 “양명학” 잡지가 출간되었다.
1896년 『양명학』 잡지 창간호에서 “양명학”이라는 현대적 학술을 뜻하는 명칭이 정식으로 탄생하였다.
중국사람들은 반드시 물을 것이다. 현대적 학술을 뜻하는 “양명학” 명칭의 정식 탄생을 왜 일본어 “양명학”에서 나왔고 『명사, 왕수인 전(明史, 王守仁 傳』에 나오는 “양명학” 명칭이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먼저 양명학 세 글자를 보면, 『명사, 왕수인 전(明史, 王守仁 傳』의 “양명학” 명칭은 명나라 사람들이 “왕양명의 학술(陽明之學)” 또는 “왕양명의 주장(陽明之說)”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1860년대 일본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일본 학자들은 유럽의 현대학술을 한자어로 번역하면서 대다수는 “××學”이라는 단어 구성법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physics를 물리학, economics을 경제학 등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學”이라는 단어 구성법은 오해를 불러왔다. “××” 뒤에 “學” 글자를 붙이면 학술 분류가 되는 명칭이라고 오해하였다. 그래서 “양명학(陽明學)”이나 “주자학(朱子學)”이라는 명칭도 이런 오해에서 발명된 명칭이었다.
물리학이나 경제학 같은 사회과학 용어들은 19세기 말기에 일본으로 도망가거나 유학하였던 중국 학자들 양계초 등이 그대로 중국에 가져왔다. 물론 중국학자들도 용어를 창조하였는데 엄복(嚴復, 1854-1921)은 metaphysical을 “현학(玄學)” 또는 “이학(理學)”, sociology를 “군학(群學)”이라고 번역하였고 “×學”이라는 단어 구성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엄복의 “×學” 단어구성법은 현대 중국어에서 익숙한 두 글자 단어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도태되었다. “현학(玄學)” 단어는 “형이상학(形而上學)” 단어에, “군학(群學)” 단어는 “사회학(社會學)” 단어에 밀려 도태되었다.
2. “옛날 술병에 새로운 술을 담은(舊瓶裝新酒)” 근대사상
그렇다면 『양명학(陽明學)』 잡지에서 사용한 “양명학”이란 말의 성격은 무엇인가?
첫째, 일본학자 오구 시게히로(荻生茂博, 1954년생)는 “명치 20년이나 30년(1890) 이후에는 정부의 겉핥기식 서양화 정책을 비판하기 위하여 德富蘇峰, 三宅雪嶺, 陸羯南 등이 ‘국민도덕(國民道德)’으로 삼는 (근대) 양명학을 주창하였다. 이것은 그 이전의 양명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옛날 술병에 새로운 술을 담은 것과 같은 근대사상이었다.”고 말하였다.
오카다 다케히코(岡田武彥, 1909-2004)도 『양명학(陽明學)』 잡지의 창간 취지에 대하여 “세상을 아는 지식인들은 서양화 범람을 걱정하면서, 전통적 사상과 문화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사람들의 도덕심을 배양하지 못하고 도의적인 국가를 세우지 못한다면, 국체(國體)의 정화(精華)를 발휘하지 못하고 국위를 떨치지 못하여 세계열강 틈새에서 국가의 안전을 지킬 수 없다고 보았다.”고 말하였다.
위에서 잘 보여주듯이 “양명학”이라는 사회운동을 일으킨 취지는 일본 명치시기 완전한 서양화주의(全盤歐化主義, total europeanism)의 극단적 상황을 고치고, 전통문화로 일본인의 개인 정신을 재건하고 새로운 국수주의(國粹主義)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 사회운동의 대상은 일반적인 일본인이었다. 『양명학(陽明學)』 잡지의 창간사에서 말하길 “오늘날 우리나라는 동방에서 새로 일어난 대국(新興大國)이며 반드시 자신의 임무를 완성해야할 위치에 있다. 그런데 세상 사정이 날로 가볍게 됨에 따라 한 나라의 기상도 점점 비루하게 되고 있다. 문물은 날로 진보하고 있지만 한 나라의 풍속이 날로 경박해지고 있다. 각종 기관과 설비가 점점 완비되어가지만 한 나라의 사기는 점점 퇴락하고 있다.……우리가 오늘날 양명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심학을 수양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창간하려는 본뜻은 천하 사람들이 자신의 본연 임무를 잘 알고 이 시대의 풍속과 기율을 혁신하여 국가에 도움이 되라는 것이다.””고 나타냈다.
오카다 다케히코(岡田武彥)는 양명학 운동의 목적이 “양명학을 높이 들어 세상의 풍속과 기상을 혁신시키고 국체를 유지하고 국위를 떨치는 것이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명학”은 중국의 학술이 아니고 더구나 명나라 왕양명 개인의 학술도 아니며, 일본에서 일어난 일본 국가를 건설하려는 일본의 학술이었다. 그런데 “양명학”이라는 명칭이 학술연구 성격을 띤 명칭과 비슷하고 학술적 내용도 섞였기에 사람들을 혼동시킨다.
그래서 필자는 일본에서 일어난 사회운동을 말하는 “양명학” 글자 앞에 “일본(日本)” 두 글자를 덧붙였다. “일본양명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일어난 사회운동이며, 근대 일본에서 중국 명나라 왕양명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재발견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학술사상의 분야 또는 학파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몇몇 일본인들이 일으킨 사회운동에 “양명(陽明)”이라는 이름 달았고 왕양명 사상에서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치양지(치양지)” 등을 사회운동의 구호로 사용하였을 뿐이다.
둘째, “일본양명학”은 왕양명을 중심으로 삼은 철학 학파도 아니고 일본이나 중국철학사 연구 영역에서 말하는 왕양명 철학사상 연구도 아니다.
셋째, 1899년 5월 20일에 『양명학(陽明學)』 마지막 잡지 제5호를 내고 폐간된 뒤에는 “일본양명학”이라는 사회운동도 일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3. 중국에서 황당한 신화는 어떻게 생겼을까?
일본 사회운동이 “양명학은 명치유신의 원동력이었다.”고 내세웠던 주장은 일본보다 오히려 중국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양계초, 장태염, 장군매, 주겸지(朱謙之, 1899-1972)를 비롯하여 젊었던 손문(孫文, 1866-1925) 등이 이 주장을 아주 높이 찬양하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명치유신은 1867년에 끝났는데, “양명학” 명칭이 1896년 『양명학(陽明學)』 잡지 창간호에서 탄생하였다. 또한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의 저서 『왕양명(王陽明)』이 “일본양명학”의 창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소급하더라도 1883년에 처음 나온 말이다. 10-20년 뒤에 탄생한 “양명학”이 어떻게 그 이전의 명치유신 원동력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런 황당한 신화는 어떻게 생겼을까?
앞에서 말하였듯이 “양명학이 명치유신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은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의 저서 『왕양명(王陽明)』에서 처음 나온 말이다. 그런데 미야케는 양명학과 명치유신의 관계에 대하여 아무런 직접적인 논증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일본양명학자 계보에서 사이코 다카모리(西鄉隆盛, 1828-1877)가 양명학을 배웠고 명치유신의 삼걸 가운데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1839-1867)가 양명학자라고만 말하였다.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는 1891년 편찬한 『吉田松陰』 저서에서 명치유신의 원동력이 대외적 위기에서 “국민정신(國民精神)”을 발휘하고 “민족주의”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을 이탈리아 자산계급 혁명가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2)와 같은 “혁명가”로 묘사하였다. 그가 양명학자 사쿠마 조잔(佐久間象山, 1811-1864)의 제자라고 여겼다. 이렇게 하여 명치유신과 양명학을 처음으로 서로 고리를 걸어 연결지었다.
다카세 다케지로(高瀨武次郎, 1869-1950)는 “양명학이 명치유신의 원동력이었다.”는 주장이 왜 나왔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막부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영웅호걸 佐久間象山, 鍋島閑叟, 吉田松陰, 高杉東行, 雲井龍雄, 橫井小楠 등이 들고일어났다. 이들은 모두 양명학으로 마음과 담력을 길러 기상을 높이고 도리의 핵심을 꿰뚫었고 뼛속까지 충의(忠義)를 채웠고 죽음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천지를 진동시킬 큰 사업을 이루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글에서 의심이 가는 것은 그가 열거한 몇몇 사람들 모두 양명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吉田松陰는 스스로 “나는 양명학을 전문으로 연구하지 않았다.”고 밝혔고, 佐久間象山는 송나라 시기 육상산(陸象山)을 숭배하여 호를 상산(象山)이라고 지었다. 그는 양명학자가 아니고 기껏해야 심학을 연구하였다는 정도이다. 사실상 그는 강호시기 저명한 주자학자 사토 잇사이(佐藤一齋, 1772-1859)의 학생이었고 배운 것도 주자학이었다. 나베시마 칸소우(鍋島閑叟, 1815-1871)는 번정(藩政) 개혁에 힘썼고 난학(蘭學)을 열심히 배웠으며 양명학을 배운 흔적은 없다.
필자는 “양명학이 명치유신의 원동력이다.”를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좀 더 조사한 결과를 보면 三宅雪嶺, 德富蘇峰, 高瀨武次郎 등의 간접적인 논증 이외에는 일본학계에서는 아무도 정식으로 이 문제를 논의한 적이 없다. 일본의 대학교, 중고등학교, 소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도 유사한 설명은 없다.
종합하여 말하면, “양명학이 명치유신의 원동력이다.”는 주장은 “일본양명학”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자랑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려고 억측으로 지어낸 신화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말할 가치가 없다.
이 주장을 높이 신봉하였던 손문(孫文)도 평론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일본 유신 사업이 모두 양명 학설의 덕을 입었기에 일본사람들 모두 믿고 왕양명을 아주 높이 존숭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일본이 유신 이전에는 여전히 봉건시대이었고 풍속도 옛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진취적 무사 기상도 남아있었다. 갑자기 외국의 침략과 모멸을 받았지만 막부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뜻있는 지사들이 격분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워 국민을 고무시켰다. 이것은 의화단(義和團)이 청나라를 지키고 서양 침략자를 물리치자는 것과 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일본은 상황이 유리하였고 중국은 불리하였다는 것밖에 차이가 없다. 서양 침략자를 물리치지 못하자 오히려 침략자를 배우자고 태도를 바꾸었고 유신 사업은 서양 침략자를 배웠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의 유신은 행동하면서도 도리를 모르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사실상 왕양명의 ‘지행합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或曰:‘日本維新之業,全得陽明學說之功,而東邦人士咸信爲然,故推尊陽明極爲隆重。’不知日本維新之前,猶是封建時代,其俗去古未遠,朝氣尚存;忽遇外患憑淩,幕府無措,有志之士激於義憤,於是倡尊王攘夷之說以鼓動國人。是猶義和團之倡扶清滅洋,同一步調也。所異者,則時勢有幸有不幸耳。及其攘夷不就,則轉而師夷,而維新之業乃全得師夷之功。是日本之維新,皆成於行之而不知其道者,與陽明‘知行合一’之說實風馬牛不相及也。”) (출처 : 손문, 「建國方略之一」, 1917년)
위와 같이 살펴보니 양명학이 명치유신의 원동력이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중국사람들은 조금도 찬양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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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양계초(梁啟超, 1873-1929) :
1898년 무술변법이 실패한 뒤에 강유위(康有爲)는 프랑스, 양계초는 일본으로 도망갔고 담사동(譚嗣同) 등 6명은 잡혀 죽었다. 양계초는 14년 일본 생활을 마치고 1912년 귀국하여 정치에 참여하였다.
장군매(張君勱, 1887-1969) :
청나라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1906년 3월에 아우 張公權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가을에 와세다대학 경제학과 입학하고 1910년 졸업한 뒤 귀국하였다. 1913년 독일에 가서 베를린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였으나 포기하였고 다시 독일에 가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다가 포기하고 귀국하여 5.4운동에 참여하였다.
장태염(章太炎, 1869-1936) :
유신운동 참여로 수배되어 1899년 일본에 갔다가 곧 귀국하였다. 1902년 수배되어 다시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1903년 귀국하였다. 1906년 다시 일본에 갔다.
명치유신시기의 녹명관(鹿鳴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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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阳明学”的真实与虚构
作者:邓红 来源:光明网
发布时间:2018-02-24 12:51
1896年以后,在日本兴起了一个阳明学热,一直持续到20世纪初。此间东渡日本的一些中国人士,包括梁启超、张君劢、章太炎等都在日本发现并接受了阳明学,还将之返销中国。
发源于中国的阳明学和日本阳明学究竟是怎样的关系?日本阳明学是否真是日本明治维新的原动力?广西师范大学出版社最近推出的《日本的阳明学与中国研究》一书,探析了阳明学在日本的一个流变,以及其与中国阳明学说的真实关系。
“日本阳明学”是19世纪末一些日本人借用400年前中国明代思想家王守仁的号“阳明”,在日本发动的一场社会运动。这一社会运动的发生原因复杂,学术虚构颇多。这个运动和被简称为“阳明学”的王阳明哲学思想研究在名称上有着类似性,但前者是社会运动,后者是学术研究。战后日本的中国哲学史领域里的王阳明哲学思想研究成果丰盛,也简称“阳明学”,但是其和作为社会运动的“日本阳明学”有着本质上的区别。
为什么是日语词“阳明学”
“阳明”是中国明代思想家王守仁(1472—1529)的号。因王守仁筑室阳明洞讲学而名声大噪,自号“阳明先生”或“阳明山人”,世人称他的学说“阳明之学”“阳明之说”等。《明史·王守仁传》云:守仁天姿异敏。年十七谒上饶娄谅,与论朱子格物大指。还家,日端坐,讲读《五经》,不苟言笑。游九华归,筑室阳明洞中。泛滥二氏学,数年无所得。谪龙场,穷荒无书,日绎旧闻。忽悟格物致知,当自求诸心,不当求诸事物,喟然曰:“道在是矣。”遂笃信不疑。其为教,专以致良知为主。谓宋周、程二子后,惟象山陆氏简易直捷,有以接孟氏之传。而朱子《集注》《或问》之类,乃中年未定之说。学者翕然从之,世遂有“阳明学”云。
这一段应该是“阳明学”一词的原始出处,仍是“阳明之学”的意思。在《明儒学案》里,王阳明本人的学术被称为“姚江之学”(卷十《姚江学案》),弟子们被称为“王门之学”(卷十一以后有《浙中王门学案》《江右王门学案》《南中王门学案》《北方王门学案》等),可见“阳明学”这一称谓并没有在中国流传开来。
作为一门近代学科的名称,“阳明学”是个典型的“和制汉语”,出现于19世纪八九十年代的日本。在此之前,日本对王阳明一派的学问,也沿袭中国的学问传统,称“姚江”或“王学”。根据所查到的资料,最早在日本使用“阳明学”一词的,是明治维新的志士吉田松阴:“吾曾读王阳明《传习录》。甚觉有味。顷得《李氏焚书》。亦阳明派。言言当心。向借日孜。以《洗心洞札记》。大盐亦阳明派。取观为可。然吾非专修阳明学。但其学真。往往与吾真会耳。”
这一段文章,在学派承传上称王阳明、李贽、大盐平八郎为“阳明派”,称他们的学问为“阳明学”,和中国明代所说的“阳明之学”、“阳明之说”同义。不过,这只是一次偶然现象,和明治以后“阳明学”一词的流行没有直接联系。
19世纪末到20世纪初叶,日本出现了一场由三宅雪岭、德富苏峰、陆羯南等当时一些鼓吹日本主义的媒体人发动的,批判明治政府以“鹿鸣馆”为表象的全盘西化政策的社会运动。由于他们自称这场社会运动的目的是创造日本“国民道德”,于是为之取了一个类似于学术流派的名称——“阳明学”,为此还先后创刊了几本名叫《阳明学》的大众杂志,作为“阳明学”运动的主要阵地。
1896年7月5日,吉本襄在东京创办了大众通俗杂志《阳明学》。这本杂志号称半月刊,每月5号和20号出版,但有时也不准时。《阳明学》设阳明学、论坛、讲筵、文林、史传等栏目,发表一些社论和关于王阳明事迹与学理的文章。1899年5月20日,《阳明学》杂志刊出最后一期。
1906年3月,东敬治(1860—1935,名正堂,江户时代著名学者东泽泻之子)创办了一本《王学杂志》,号称要继承《阳明学》杂志的精神,发行主体为经常鼓吹阳明学的明善学社。此后,日本国内还陆续出过几本“阳明学”杂志。
1896年,第一本《阳明学》杂志的创刊,标志着“阳明学”这一近代学科名称术语的正式诞生。
人们不禁要问,为什么以一个日语词“阳明学”,而不是以《明史·王守仁传》中的那个“阳明学”,为“阳明学”这一近代学科名称术语的正式诞生呢?
首先,从字面上来看,《明史·王守仁传》使用的“阳明学”,还是明代人所谓“阳明之学”“阳明之说”的意思。
最重要的是,19世纪60年代日本近代化进程甫始,日本学者将欧洲近代学术门类翻译成汉字术语时,大多使用了“××学”的构词法,譬如将physics翻译成“物理学”、economics翻译成“经济学”等。反之,“××学”的构词法也能给人们这样一个错觉:凡是“××”后面加一个“学”字,似乎都可以构成一个学科门类的称谓,“阳明学”、“朱子学”就是利用这个错觉发明出来的。
物理学、经济学之类的社会科学词汇,在19世纪末被流亡、留学日本的中国学人如梁启超等原封不动地引进了中国。中国学者也有创造,譬如严复将metaphysical翻译成“玄学”或“理学”、sociology翻译成“群学”,使用的是“×学”的构词法。只是严复式的“×学”词法,不符合近代汉语二字熟语的发展趋势,因而大都以失败告终,如“玄学”输给了“形而上学”,“群学”输给了“社会学”。
“旧瓶装新酒”的近代思想
那么,以《阳明学》杂志为中心展开的“阳明学”的性质是什么呢?
首先,日本学者荻生茂博曾说:“明治二十至三十年(1890年)以后,为了批判政府的表皮式的欧化政策而由德富苏峰、三宅雪岭、陆羯南等人倡导的作为‘国民道德’的(近代)阳明学,和那个前近代阳明学完全两码事,是所谓旧瓶装新酒的近代思想。”
冈田武彦也曾这样论述创办《阳明学》杂志的初衷:有识之士忧虑(欧化主义的泛滥),认为不复活传统思想文化,养成人们的道德心,建设道义的国家,就不能发挥国体之精华,发扬国威,在世界列强中保持国家的安泰。
可见发起“阳明学”社会运动,旨在修正日本明治时代全盘欧化主义的极端状态,以传统思想文化来再造日本人的个人精神,建立新的国粹主义。从这场运动的对象来看,发起者是以一般的日本人为对象的。《阳明学》 杂志的 《发刊之辞》说:今天我国作为东邦新兴的一大雄国,处于必须完成自己的任务的位置。然随着世间事物日趋轻便,一国风气逐渐卑下。随着文物日益进步,一国风俗日陷轻浮。随着机关逐渐完整,一国士气逐渐萎靡……吾人在今日研究阳明学,不外乎为了心学修养、人才陶冶,但吾人发刊的本怀,却在于让天下的人们知道自己的本然任务,革新一代风纪,以裨益国家。
故而,冈田武彦认为,阳明学运动的目的在于:高举阳明学,以此来革新世间风气,维持国体,发扬国威。
所以,“阳明学”不是中国的学问,更不是明代王阳明个人的学问,而是负担建设日本国家建设的日本之学。但由于取了“阳明学”这样一个类似于学术研究的名字,并掺杂了一些学术内容,给人以鱼目混珠之感。
所以,笔者在文章中将这场在日本发起的取名为“阳明学”的社会运动前,特别冠以“日本”二字。这首先是要明确“日本阳明学”是在19世纪末20世纪初的日本发生的一场社会运动,既不是中国明代王阳明思想在近代日本的深化和再现,也并非学术思想流派。说穿了是几个日本人利用了“阳明”这个名号为自己发动的社会运动取的名字,把王阳明思想中的“心即理”、“知行合一”、“致良知”当作了运动的口号使用而已。
其次,“日本阳明学”既不是以王守仁为首的哲学流派,也不是日本以及中国的中国哲学史研究领域里的王阳明哲学思想研究。
再次,在上世纪20年代后期第五本 《阳明学》杂志废刊以后,“日本阳明学”这一社会运动在日本实际上已经寿终正寝。
这一荒诞神话是如何产生的
相比在日本来说,“日本阳明学”所主张的“阳明学是明治维新的原动力”论,在中国更有影响力。梁启超、章太炎、张君劢、朱谦之以及早年孙中山等对这一理论都倍加赞扬。
然而思考一下就会发现,明治维新成功于1867年。“阳明学”一词如果以阳明学杂志创刊标志其诞生的话,时间是1896年;如果以三宅雪岭著《王阳明》一书为“日本阳明学”原型的创立的话,时间是在1883年。一二十年后才诞生的“阳明学”怎么可能是一二十年前的明治维新的原动力?那么,这一荒诞神话是如何产生的呢?
如前所述,“阳明学是明治维新的原动力”,是三宅雪岭所著《王阳明》一书所创立的。然而,雪岭对阳明学和明治维新的关系没有加以直接的论证,只是说列于日本阳明学系谱的西乡隆盛学过阳明学,以及明治维新三杰之一的高杉晋作是阳明学者。
1891年,德富苏峰的《吉田松阴》一书将明治维新的原动力归结于发挥对外危机的“国民精神”和建立“民族主义”,把吉田松阴描写为意大利资产阶级革命家马志尼式的“革命家”,并认为松阴是阳明学者佐久间象山的弟子,于是明治维新初步和阳明学挂上了钩。
高濑武次郎对为何“阳明学是明治维新的原动力”作了如下说明:当幕府穷途末路时,英雄豪杰佐久间象山、锅岛闲叟、吉田松阴、高杉东行、云井龙雄、横井小楠等兴起。他们皆以阳明学练习其心胆,高其气格,贯穿道理心肝,填补忠义骨髓,死生谈笑间,能成就撼天动地大事业。
但这一段话的可疑之处,在于他列举的这几个人物都不是阳明学者。例如,前文就指出过,吉田松阴自称“吾非专修阳明学”;佐久间象山,本名修理,因崇拜宋代心学家陆象山而号象山,这也说明他不是阳明学者而最多只能算是心学者。事实上,他是江户时期著名朱子学者佐藤一斋的学生,学的是朱子学;锅岛闲叟致力藩政改革,热心于“兰学”,没有学习过阳明学的痕迹。
笔者曾想以批判“阳明学是明治维新的原动力”为题写一篇论文,但经过调查发现,除了三宅雪岭、德富苏峰、高濑武次郎等的一些间接性论证,日本学术界从来没有人正式论述过这个问题,日本的大中小学历史教科书上也没有类似说法。
总之,“阳明学是明治维新的原动力”是“日本阳明学”为了夸大自己的影响、提高自己的权威而臆造出来的神话,不值一提。对此早年信奉过此说的孙中山也曾说:“或曰:‘日本维新之业,全得阳明学说之功,而东邦人士咸信为然,故推尊阳明极为隆重。’不知日本维新之前,犹是封建时代,其俗去古未远,朝气尚存;忽遇外患凭凌,幕府无措,有志之士激于义愤,于是倡尊王攘夷之说以鼓动国人。是犹义和团之倡扶清灭洋,同一步调也。所异者,则时势有幸有不幸耳。及其攘夷不就,则转而师夷,而维新之业乃全得师夷之功。是日本之维新,皆成于行之而不知其道者,与阳明‘知行合一’之说实风马牛不相及也。”
既然如此,这一论调不值得中国人那么赞赏。(邓红)
【责任编辑:季元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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