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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고시 논문] 근∙현대 부흥운동과 성경적 부흥관 연구(2)
1960년대 한국교회 부흥운동
시대적 상황
1960년대는 정치적 혼란기라 할 수 있다.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항하는 4.19 의거가 일어났고, 이 후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혼란기에 접어든 것이다. 국민들은 사회적 불안을 느꼈고, 안정적인 정서를 제공할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사실, 사회의 불안요인이 증가하면, 그 구성원들은 종교적인 피난처를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대의 교회는 국민들로 하여금 그러한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교파간의 분쟁으로 인해 혼란만 가증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종교적 혼란기를 틈타 신흥 이단 종교가 독버섯처럼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1963년 통일교가 사회단체 등록을 필하고 재단법인 인가를 받아 국내 기성교회 뿐 아니라 해외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키기 시작했으며, 하늘의 권세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신앙촌에 재림예수가 오실 것이라 주장하는 박태선의 전도관은 1960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통해 교세 확장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세일교단이나 신권도학연구소, 세계일가공회는 각자 수도원과 연구소 등을 만들고 입지를 강화하려고 노력하던 형편이었다,
그러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분위기의 전환이 일어났다. 우선, 1968년 제2공화국의 출범과 동시에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국사회는 안정적 국면을 취하게 되었다. 군부독재 아래 있던 사회이지만, 오히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는 외면적인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가적 안정화가 이루어지자 한국교회의 성장도 더불어 일어나게 되었다.
부흥사, 부흥회 중심의 부흥운동
1960년대의 부흥운동은 개 교회 목회자의 노력과 함께, 부흥회를 인도했던 부흥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부흥운동의 성격은 교회의 양적 부흥과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심령부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의 모든 교회가 1년에 한 두 차례씩 심령부흥회를 가져 질과 양의 부흥을 성취했다.
대부분의 부흥회는 월요일 밤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새벽에 끝나는데 14회의 설교시간을 가졌다. 이 때 메시지는 많은 경우 비슷한 형식으로 흐르게 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회 설교에는 부흥회의 필요성과 계속 참석해야 할 필요성을 설교하고, 2-4회 설교에는 은혜 받는 조건으로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5-7회 설교에는 신도들의 윤리생활과 규범에 대해서 강조하고 어떤 부흥사는 신유를 통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하기도 한다. 8-10회 설교에는 교회 구성원으로서 성도의 의무에 대한 교훈을 강조하며, 11-13회 설교에는 부흥회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로써 영육의 평안을 가질 수 있는 성령 충만으로 오는 기쁨과 소망을 갖게 한다. 그리고 끝 회 설교에는 집회 끝난 후에 일어날 시험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메시지의 내용 면에서는 1950년 후반기에는 한국전쟁을 치룬 국민에게 내세의 소망을 강조하는 복음의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반면, 1960년대에는 한국민족의 소망과 사명의식 고취, 그리고 성령을 통한 신유, 성령 충만에 대한 메시지들이 강조되었다.
부흥회를 통해 한국교회는 에큐메니칼(ecumenical)한 범교회적 대중운동으로 변모해 가는 바탕을 삼았다. 초기 부흥사들이 부흥회를 인도할 때 교파의 선을 넘어 성도들이 피차 부담 없이 타교회로 가서 은혜를 받으므로 교파의 봉건성을 탈피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한국의 정서적 뿌리인 유교의 봉건주의는 계급이나 성별에 따른 분파적 성향이 강했고, 이러한 성향은 교단의 분파주의와 연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1960년대 부흥운동이 기여한 것 중의 하나는 각 교파, 개교회식의 분파주의적 시각을 일소하고 한국 성도들의 대중전도열을 일으켰다는 것에 의의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부흥운동의 형식은 여전히 부흥회 중심의 연속집회였고, 내용 또한 개인에 집중 되었고, 체험과 신비주의적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벗어나기는 커녕 이 시기에 인위적 부흥관이 오히려 더 고착화 되었다고 생각된다.
1970년대 한국교회 부흥운동
시대적 상황
1970년은 대한민국이 기형적인 성장을 이룬 시기이다. 정치적으로는 군부 독제체제 아래서 퇴보하고 있었으나, 경제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국가 재건의 성공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안정을 견고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군부독재에 대항해 학업을 중단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데모에 나서게 됨으로써 정부와 국민 간의 대치형국이 자리잡게 되었고, 세계적인 유류파동으로 인해 공동체적 어려움이 생기는 등, 한국사회에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사회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의 진통을 겪는 중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암울했고, 경제적으로는 발전의 그늘에 있던 서민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이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정통적 가치체계나 공동체 의식의 붕괴를 경험하게 되었다. 한국사회에 정서적 피난처가 필요했었고, 결국 그 역할을 각 종교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한국종교의 성장이 고르게 일어났던 것이다. 물론, 종교 각계의 성장의 이유는 사회적 이유 뿐 아니라 한국인의 종교성과 종교의 내적 요인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때 타종교에 비해 괄목할 만한 수적 증가나 활동을 보인 종교는 개신교였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급진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복음주의운동과 연관된 대규모 집회를 통한 부흥운동이 한국교회 성장의 견인차였다.
대중 집회를 통한 부흥운동
최초의 대중 집회는 한경직 목사가 주도한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소위 복음화 운동이었다. 예비모임은 1964년 10월 16일 이화여대에서 가졌다. 1965년 전국 복음화운동이 발족되어 위원장 홍현설, 총무 김활란이었으며, 그 후로 73년, 74년 77년에 계속하여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대성회를 가져 많은 성과를 얻었다. 73년의 주강사는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목사, 74년 주강사는 김준곤 목사, 77년의 주강사는 신현균 목사였다.
이 대중 집회 중심의 부흥운동의 결과는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로 뭉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분열하는 교회에서 연합할 수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당시 한국사회는 분열로 점철된 사회였다. 사상적인 분열, 정치적인 분열이 시대를 주도하고 있었다. 비단 사회상에서 뿐 아니라,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도, 한국교회는 해방이후 전개된 교단, 교파의 분열과 분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 왔다. 분열된 사회 앞에 일치와 단합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나누어야 할 때에 한국교회가 동일한 선상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1970-1980년대 부흥운동의 물결 속에서 분열은 줄어들고 연합으로 민족에게 봉사하자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형식과 내용은 찰스 피니의 인위적 부흥관에 머물러 있었다. 1960년대 부흥회 중심의 부흥운동이 실효를 거두자 시작된 1970-1980년대의 대중집회 형식의 부흥운동은 부흥관의 정석을 찰스 피니 이전의 바른 부흥관에서 찰스 피니 이후의 변질된 인위적 부흥관으로 바꾸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폭발적 부흥의 결과로 1980년대에 대형교회가 생겨났고 이들이 한국교계에 주도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면서, 그들의 부흥관이 성공적 부흥관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1980년-현재 한국교회 부흥운동
시대적 상황
60-70년대의 거국적인 대중집회 중심의 부흥운동의 결과로 교회는 대형화 되었다. 70년대 후반부터 그 성장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므로 이 현상을 교회의 인구의 폭발적 성장이라 해도 좋겠다. 한마디로 현 부흥운동의 실상은 대형교회 지향적 부흥운동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대형교회 중심의 부흥운동
광림교회
광림교회는 김선도 목사의 조직적인 목회와 교인 관리, 부흥회로 일어난 성령 운동의 열정, 재정적 신장 그리고 70년대에 급성장대에 급성장한 경제발전과 사회 심리의 불안에 그 성장 요인을 두고 있다. 부흥을 위한 구체적 활동은 1974년 ‘천명 운동 계획과 실천’, ‘70인 전도대 조직’ ‘교인총동원 전도주일 설치’ ‘새신자 수련회’ 등이 있다. 김목사의 성장 이론을 보면 그 당위성을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근거하여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장 이론을 적용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심리 역사 지역적 특성을 분석하고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 주변 지역에 용역조사를 실시, 지역의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주요사업은 교회 건물의 개방에서부터 매우 다양했다.
이 교회의 성장 요인을 더 구체적으로 살피면, 첫째 교회 성장학 도입과 한국적 상황에서 토착화, 둘째 성령역사의 강조, 셋째 목회자의 지도력, 넷째 유리한 지역 선정, 다섯째 성장 후 봉사와 분배 위주로의 방향 전환 등을 들 수 있다.
소망교회
1977년 8월 24일 설립한 소망교회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다. 설립 5년만인 1982년 10월 교회당 준공 시 이미 4,500명을 넘었고, 그리고 연간 1,000명 이상씩 계속 등록하여 성장하고 있다. 담임인 곽선희 목사는 예배를 통해 교인들을 만난다. 소망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예배와 말씀인 것이다.
이 교회의 성장요인은 매우 독특하다. 철저한 새벽기도회, 독특한 예배 분위기, 아파트 단지 내라는 지역 특징 외에 별다른 조직이나 활동은 없다. 다만 곽선희 목사의 말씀이 매우 독특하다. 말씀의 은혜를 끼칠 때 교회 성장은 필연적이며 말씀에 감화된 성도 하나 하나가 전도자가 되지 않을 수 없으며 전도 되어 나온 사람은 이 말씀으로 신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소망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소망교회의 특징인 동시에 부흥의 요인이라 하겠다. 그 다음 특징은 아파트 중류층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과 장년 70% 이상이 대학출신인 만큼 수준이 높아 교회의 포괄성 전체성에 문제가 있는 듯 하다.
영락교회
이 교회는 한경직 목사와 박조준 목사의 목회기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1945년 월남민들에 의해 시작된 영락교회는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합류되었고, 50년 이미 2,600명을 돌파하는 큰 교회로 자랐다. 1973년 한경직 목사의 은퇴 시에 이미 등록교인 수 15,895명이 되었다. 이 시기의 성장 요인은 피난민 구호 등의 사업으로 그들이 교회로 몰려 왔고 한목사의 탁월한 지도력과 특히 설교와 생활의 일치, 인격의 감화력, 사랑의 실천이 부흥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83년 박조준 목사의 부임 10년 만에 장년 6만명으로 급성장 했다. 이것은 초창기에 이미 설립한 지도자와 후임 목회자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박목사는 쉽고 강해적인 설교와 낡은 것과 잘 조화되는 행정력, 특히 강한 신앙운동과 성령의 생동감 넘치는 역사를 통한 삶의 변화가 성장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교회는 전통과 성장의 기운이 조화를 이룬 기틀이 잡혀진 교회라 할 수 있다.
충현교회
이 교회의 가장 큰 저력은 교육이다. 특히 교사학교의 창설 운영은 이 교회의 교육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밖에도 특별수련을 통한 교사 훈련, 농어촌 교사 초청훈련과 새신자 훈련 등의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그 다음 강조점은 선교에 대한 관심이다. 각 기관에서 선교부를 설치했고 일본, 인도네시아 등 10개국에 이미 선교사를 파견했다.
충현교회 성장의 요인은 올바른 신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 지도자의 성품과 성경 중심의 설교, 천국백성이 받을 축복, 기도 등이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 밖에 전도운동의 전개와 무엇보다도 교육에 중점을 둔 점이 그 성장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
설립 23년 만에 150,000명, 82년에는 200,0000명, 현재는 700,000명에 달하는 기적의 팽창을 기록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도를 가진 교회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이다. 1901년 미국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교회’라는 교파가 1953년 한국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이 교회는 교리적으로는 보수교단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나, 특이한 것은 성령세례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중생의 다른 영적 체험인데 그 최초의 증거는 방언이고 동시에 속죄받은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사인 신유를 믿는다. 이 교리를 바탕으로 거듭난 사고방식을 소유하여 승리하는 생활과 기적에 응답 받는다는 확고한 주체의식을 심어준다. 그래서 슐러(Robert H. Schller) 식의 적극적 사고를 도입하면 된다는 의식을 강조한다. 이것은 영혼 축복 뿐 아니라 육신의 안락과 건강 및 물질 축복을 얻는다는 현실론과 연결된다.
이와 같은 주체의식과 함께 주체의식과 함께 강조되는 것은 공동체 의식이다. 이 의식은 우리가 강조되고 우리 속에서 역할이 있음과 의존의식 그리고 소망의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의식적인 것 외에도 예배 분위기가 잔치에 참석하는 그런 분위기이고 설교자와 청중은 교감이 일어나고 성찬식을 통해 엄숙한 일체감을 조성한다. 그 밖에 설교 후 치유의 순서가 예배순서에 포함되고 있다. 이런 원리들이 교회 성장의 요인인 동시에 신자 관리를 위한 철벽 같은 구역조직이 매우 탁월함을 지적할 수 있다. 이 구역조직은 외국에 전파되었고 다시 셀교회, 가정교회 등으로 역수입 되고 있다.
1980-현재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대한 평가
1980년대 대형교회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는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 광림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대표되는 성령, 은사 중심의 부흥운동과 소망교회와 영락교회, 충신교회와 같은 장로교회의 말씀과 교육중심의 부흥운동으로 나눠 볼 수 있겠다. 광림교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운동은 완전히 찰스 피니의 인위적 부흥관대로 움직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장로교회들의 부흥운동은 말씀과 교육중심으로 일어났다. 이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이들 역시 매년 부흥회를 통한 인위적 부흥운동을 펼쳐왔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진정한 부흥에 동반되어야 할 사회변혁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있기에 여전히 찰스 피니의 인위적 부흥관에 매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장로교회의 부흥은 정체되는 반면, 감리교회와 순복음교회들의 부흥은 계속 이어지자, 현재 한국교회는 감리교회와 순복음교회의 부흥운동을 답습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웅장한 건물, 넓은 주차장, 최고의 서비스라는 예식장 광고에나 나올법한 것들을 동원해 인위적 부흥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실용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시킨 윌로우크릭교회나 새들백교회, 레이크우드교회, 노스포인트교회, 펠로십교회와 같은 미국의 이머징교회(emergence Church)의 부흥관이 한국대형교회 후발주자인 온누리교회와 사랑의교회 등을 통해 한국교회에 소개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부흥회와 성령체험으로 대표되는 찰스 피니의 인위적 부흥관과 미국의 신생교회들의 인위적 부흥관이 혼합되어 변질된 부흥관을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변질된 한국교회 부흥관
마케팅에 물든 한국교회 부흥관
마케팅이란?
마케팅이란 말은 딱히 무엇이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말이다. 사회에서 말하는 마케팅이란 무엇일까?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미국 ‘마케팅학회’(American Marketing Association)의 정의 위원회는 1985년에 마케팅을 ‘개인과 조직의 목표를 충족시킬 교환을 야기하기 위하여 아이디어 및 상품, 서비스의 개념화와 가격 결정, 촉진, 유통을 계획하고 수행하는 과정이다.’라고 정의 했다.
위의 정의를 분석해 보면, 마케팅의 기본이념은 첫째, 목표의 완수, 둘째 교환, 셋째 아이디어와 서비스라고 볼 수 있다. 구매자의 요구에 맞추어서 준비하여 구매자의 결정에 영향을 주어 교환을 하여 이윤을 창출한다는 것이 마케팅의 기본이념 인 것이다. 다시 말해 마케팅은 구매자 중심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마케팅이 교회부흥의 방법으로 도입되었다.
교회 마케팅
1970년대 신앙고백과 신학을 강조한 복음주의의 특징이 퇴색되면서 여과되지 않은 실용주의 앞에 교회가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탓에, 이 시기에 복음주의가 실용주의를 폭 넓게 수용하게 되었다. 신학은 복음주의 신앙의 중심에서 물러나 변두리에 방치됨에 따라 기교가 그 중심을 차지해 버렸다. 기교를 얻기 위해 신학을 희생한 셈이다. 문화에 훨씬 잘 순응하는 새로운 복음주의가 대두되면서, 경영자, 감독관, 관리자, 마케팅 전문가가 핵심인물로 각광 받았고 전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학자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들은 교회성장이나 교회 성장을 위한 모든 기독교 사역이 본질적으로 기업을 성장시키는 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교회와 기업 모두를 시장으로 이해하고 적절한 테크닉 사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성장에 기업의 마케팅을 도입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 마케팅이 시작되게 되었다.
교회 마케팅의 시작은 누구로 부터였을까? 조지 바나(George Barnaby)이다. 조지 바나는 마케팅을 중심으로 한 교회 컨설팅 전문회사인 ‘바나 컨설팅 그룹’을 설립해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약 10년 전 미국의 ABC방송은 당시 윌로우크릭 교회를 중심으로 미국 전역에 급속히 퍼지던 구도자예배를 심층 취재한 ‘In the Name of God’이라는 특집 프로를 방송했다. 이 프로에서 교회 마케팅의 이론을 대변하는 인물로 소개된 사람이 조지 바나였다. 그는 교회에 마케팅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를 미국 교회 성장의 둔화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래의 그의 글을 읽어 보자.
이러한 예(교회의 성장이 멈췄다는 사실)는 수 없이 들 수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이 나타내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가 사람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교회의 목회활동에 대한 심각한 연구결과에 근거를 두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논점은, 교회가 안고 있는 큰 문제는 점점 마케팅 방향으로 변해가는 환경 속에서 교회가 마케팅 지향적 방침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는 점이다.
조지 바나는 교회가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케팅으로 성공한 마케팅교회에는 어떤 교회가 있을까? 대표적으로 텍사스에 위치한 조엘 오스틴(Joel Osteen)목사의 레이크우드 커뮤니티 교회일 것이다. 이 교회는 2003년 하반기에 이미 출석하는 사람이 25,000명을 넘어섬으로 출석인 수로는 시카고의 윌로우 크릭 또는 캘리포니아의 새들백 교회와 같은 쟁쟁한 교회들을 제치고 미국 전체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2006년 초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이 교회는 2005년 한해 동안에만 무려 2,000명이 늘어남으로 미국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교회인 동시에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교회로 기록되었다.
마케팅 교회의 문제점
복음의 상품화
교회가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할 때 교회는 복음을 상품으로 파악하는 것과 같은 말인 것이다. 복음을 상품으로 파악한다는 사실은 복음의 가치에 대해 교회가 가진 생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상품은 고객 중심으로 잘 팔려야만 한다. 그러므로 복음이 상품이 되었다는 것은 고객이 원치 않는 것들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케팅 교회들은 복음에서 ‘너는 죄인이다.’ ‘지금 너는 무엇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등의 말을 제거해 버렸다. 그래서 마케팅 지향적인 미국교회에는 죄라는 단어를 설교 중에도 사용하기를 꺼려한다.
죄가 사라지면 무엇도 사라지게 될까? 성경의 다른 중요한 교리들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우선 죄의 결과로 우리를 기다리는 지옥이 사라진다. 이제 천국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재포장 될 이론적 준비가 끝난 것이다. 또한 죄가 사라지자 우리의 죄를 짊어지러 오신 예수님도 사실상 필요 없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라진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기에 죄와 관련되지 않은 친구와 같은 예수님, 위로자 되신 예수님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것이 복음이 상품화 될 때 나타나게 되는 문제들인 것이다.
이번엔 반대로 복음이 상품이 될 때 강조되는 것 또한 있을 것이다. 고난과 핍박이라는 부정적 용어들은 다 무시해 버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만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죄는 사라졌지만 나를 향한 죄는 강조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첫째로, 마케팅교회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 그것은 바로 상대를 지겹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지루하게 하는 것 이상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케팅교회에 지루한 교리적 설교나 공부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를 지루하게 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마케팅교회에서는 말하고 있다.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데,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사랑한 존재인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모독하는 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청중들은 죄에 대한 책망을 들었음에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게 듣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구화
마케팅 교회의 두 번째 문제점은 바른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매를 위해 약점이 제거되고 강점이 부각된 상품은 이제 철저하게 그 상품을 구입한 사람을 위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복음이라는 상품이 매력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속에 복을 주시는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거나 순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해야 할 대상, 상품이 되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내게 더 감동적이고, 내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드려져야 함으로 마케팅 교회에서 바른 예배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마케팅 교회를 향한 데이비드 웰스의 비판을 들어보자.
우리는 자신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 보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해 왔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모든 권리를 그 앞에서 포기해야 할 하나님보다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하나님을 의지해 왔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요, 우리의 만족을 위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배워서가 아니라 시장(마케팅)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탓에, 우리는 교회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바꾼다. 우리는 하나님이 다정다감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이 그분의 실재를 우롱하고 자신의 모험과 경력을 선전하는 데 그분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하나님이 잠자코 계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다. 하나님은 감정의 고조를 통해, 열광적인 몸부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알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마케팅교회는 청중의 열광과 공감에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신다고 오해하고 있는 듯 하다.
이야기가 되어버린 설교
마케팅 교회의 세 번째 문제점은 성경본문이 실종된 설교이다. 성경본문이 설교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순간 나타나는 설교의 가장 큰 특징은 ‘차고 넘치는 예화’이다. 19세기에도 나타났던 이런 설교의 경향들과 관련해서 스펄전 목사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설교 속에 이것저것 갖다 붙이지 말고 우리에 갇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자를 있는 그대로 풀어 놓으라고 했다. 왜 힘도 없는 당신이 힘이 센 사자를 대신해서 싸우려고 애를 쓰냐고 당시 설교자들을 책망했다.
설교에 예화를 쓰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교가 이야기모음 화 될 때 그 자리에 말씀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설교는 설득이 아니라 선포이다. 설교가 선포의 개념으로 이해될 때만 설교는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된다. 선포되어야 할 설교가 지나친 예화들로 차고 넘치는 설득의 설교로 변질되어 버린다면 그 설교는 무가치한 설교가 되고 말 것이다. 마케팅 교회에는 이러한 설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에 사람들이 몰려 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죄에 대한 고민, 영혼에 대한 고민이 선행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 문제를 충족 받고 싶은 1+1의 차원에서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총체적으로 병들게 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심리학에 물든 한국교회 부흥관
심리학이란?
일반적으로 심리학은 인간의 잘못된 행동을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익한 학문이라고 평가한다. 심리학은 세상 그 어떤 이론이나 사상보다 사람들에게 친숙한 사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모든 문제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하고, 심리학 역시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나날이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20-30년 전만해도 쓰지 않던 용어들을 지금은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사용하고 있다. 정신질환, 정신분열, 정서장애, 학습장애, 관음증, 과대망상증, 자폐증, 우울증, 조울증, 중독, 사회정체성 위기, 자아실현, 자기계발, 00콤플렉스, 00증후군 등, 예전에는 전문적으로만 쓰였던 용어들이 지금은 우리들의 생활 용어가 되었다. 심리학에 대해 특별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도 별 어려움 없이 이런 용어들을 듣고 쓴다.
심리학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정신 질환이 있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그저 정신적으로 조금 힘들거나 어떤 돌출된 행동을 잠깐 보이기만 해도 심리학적 치료를 권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신질환자의 수는 더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심리학의 한계
심리학은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치유목회’ ‘상처치유세미나’ 등의 명목으로 심리학을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심리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니고, 과학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심리학은 백화제 방식의 온갖 복잡한 사상과 이론의 집합체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론들 중의 일부는 그들끼리 상충되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 정서적 변화를 이뤄준다는 것이 입증된 바도 없다.
1979년 4월 2일자 뉴욕타임지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정신 의학’이라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의 주요 내용은, 정신과 의사들이 자신들을 찾아오는 일상적 신경증 환자들을 아마추어 심리치료사들에게 맡기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자신들이 배운 전문지식들이 그들을 치료하는데 확실한 해답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로, 정신질환은 정신분열증 같은 몇몇 뇌질환만 해당되는 것이지 현재 분류되어 있는 많은 정신질환들은 정신질환이라고 할 수도 없고, 확신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로, 대부분의 정신질환은 심리적 상담이 아닌, 내적처방으로도 손쉽게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과 치료는 전체 환자의 3분의 1은 결국 고쳐지고, 3분의 1은 약간 도움을 받지만, 3분의 1은 전혀 도움 받지 못한다고 이 기사에서 말하고 있다. 이처럼 정신과 치료나 심리학은 과학도 아니고,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며,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닌, 연금술과 같이 실체가 없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수많은 상충되는 이론들에 기초한 수백가지의 상담모형 및 상담기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심리치료가 마치 하나의 통합적이고 일관된 과학인 것처럼 말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도 심리학이라는 물탱크 속의 온갖 찌꺼기가 교회 안으로 여과 없이 새어 들어와 사람들을 돕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심리학의 교회 유입 배경
심리학은 1850년 이전까지는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만 관심을 보였지 보편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은 관심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1850년 이전의 교회는 전도에만 열심을 낼 뿐, 신자들의 사적인 문제나 정신적인 어려움에는 직접 나서서 상담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교회로부터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도움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당시 저변화되었던 심리학에 기대게 된 것이다. 1950년대에 이르자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져, 복음주의 교회들도, 신자들을 개인적으로 도울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심리학은 복음주의 교회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기독교 심리학 연구회’가 만들어졌고, 미국의 풀러신학교가 심리학 대학원을 설립했다. 기독교 신앙과 현대 심리학을 접목하는 이론을 만들고, 접목한 이론을 교회 안에 유입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양성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 사이에 기독교 심리학자들이 양산되어 나오게 되었고, 많은 복음주의 심리 치료단체들이 세워져 대중화의 길을 열게 되었다. 불과 30년의 짧은 시간에 심리학에 교회 안에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와 심리학을 통합한 이론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기도원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문제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고 있다가 그것의 대안으로 선택하게 된 것이 성도 개개인을 대상으로 한 제자훈련이었다. 그러면서 성도 개개인을 만나며 상담을 하다 보니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기독교 심리학을 한국교회도 도입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심리학의 문제점
반 하나님적인 시각
심리학은 반 하나님적인 시각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세상 정신이요 이론이다. 심리학은 18세기 계몽주의에서부터 출발한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로 돌리는 계기를 만든 사상풍조이다. 그 뒤에 더 자신에게 집중하는 낭만주의와 초월주의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더 자신에게 몰입하게 되었다. 이처럼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심리학이 어떻게 기독교와 결합될 수 있겠는가? 이는 심리학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인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물들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자기몰입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여 꾸준히 발전시키는 데서 시작된 심리학은 현재 치료기술로까지 확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아를 사랑하는 이 시대와 맞아 떨어져 심리학 자신도 예상치 못했고, 감당치 못할 정도로 커지고 말았다. 이런 심리학적 치료기술이 교회 내에도 들어와 하나님과 반하는 방법으로 성도들을 만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가르침
기독교 심리학자들은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하면 남도 사랑할 수 없다며, 먼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참된 신앙생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가는데 이것은 왜곡된 신앙을 조장하는 반성경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건강한 자기 사랑이 올바른 하나님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악 됨을 알고 회개하여 갖는 올바른 하나님 사랑이 건강한 자기 사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는 결코 건강한 자기 사랑을 할 수 없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라는 심리학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 기독교의 기본교리는 흔들리게 된다. 구원은 심리적 안위로, 중생은 자존감의 회복으로, 죄는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으로, 회개는 필요조건이 아닌 필요충분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사랑하라는 기독교 심리학의 잘못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성장의 장애물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이 만든 인간의 학문인 심리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심리학의 이론과 치료방법은 친인간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기독교 심리학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은 자연스레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적인 치료법인 기독교 심리학은 영적으로 연약한 이들, 천박하거나 성경적 진리에 대해 무지하며 영적 성숙과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이르는 고난의 길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 심리학에 의존하는 성도들은 영적 성장에 장애를 겪게 되고, 영적 미숙아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심리학을 선택한 성도들은 가장 완전하고 확실한 치료제인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관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계속 인간을 위로하면서 격려해 주는 달콤한 심리학의 메시지에만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과 준엄한 꾸중을 견디지 못하는 상황이 오고 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성도들의 개인적인 문제를 상담 해 주는 것으로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인위적 방법이 기독교 심리학이다. 그러나 그 결과 교회는 오히려 가짜 신자로 넘쳐나고 교회의 존립 자체가 위태해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음을 기억하고, 기독교 심리학으로 성도들을 돌볼 것이 아니라, 말씀과 중보기도로 성도들을 돌볼 때 성도들은 더 건강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비주의에 물든 한국교회 부흥관
신비주의의 뿌리
오늘날 ‘신사도운동’이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피터 와그너는 자신을 사도라고 칭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안수하여 사도들을 만들고 있다. 한국의 많은 교회도 신사도운동의 영향을 받아, 강남지역에서 예언자 운동, 오순절운동, 은사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고, ‘성시화 운동’ ‘땅 밝기 운동’도 선교단체들을 통해 일어나고 있다. 온누리 교회 손기철 장로와 같이 방언, 신유, 예언 등의 신사도집회 등도 많이 열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신사도운동의 배경에는 신비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신비주의의 뿌리는 B.C. 5세기 플라톤의 이원론에서부터 출발한다. 플라톤의 이원론을 간단히 말하면 이러하다. 이 세상은 두 세계로 나눠는데 바로 정신세계와 물질세계이다. 그런데 함께 존재하는 이 두 세계 중 정신세계가 물질세계보다 더 우월하다. 인간은 이 두 세계에 중첩되어 살아간다. 인간은 물질세계를 벗어나 정신세계로 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래서 하나님과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이루는 것이 플라톤의 사상인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상승사상이고, 이것이 A.D.200년 플라티누스를 통해 들어와 교회에 정착한 것이 신비주의인 것이다.
신비주의의 문제점
첫째로 하나님을 아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이나 궁극적인 실재를 직접적으로 아는 지식은 역사적 사실이나 객관적인 신적 계시와 관계없거나 심지어 반대로 개인적, 주관적 직관 또는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는 사상이다. 그 결과 신비주의는 정확한 교리와 건전한 성경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 신학적 풍토를 조성한다. 권위 있는 성경적 설교는 너무 독단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자신이 예언자라고 지칭하면서 자신의 말에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비주의자들인 것이다.
둘째로, 세상을 이원론적 시각으로 보게 한다. 성경은 물질을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물질은 악하다고 말하는 영지주의를 배격한다. 그런데 물질보다 정신을 강조하는 플라톤의 사상의 영향으로 신비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인 것은 배격하고 영적인 것에 집착하게 된다. 일상생활에는 소홀하면서, 기도와 은사에 매달린다. 사람을 봐도 영적인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아직 물질적인 일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으로 정죄한다. 결과적으로 신비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우월하고,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미성숙하다 못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로 폄하해 버리는 것이다. 즉 교만에 빠져 교회 내에 파당을 만들고, 교회를 혼란케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신비에 대한 잘못된 오해로 인한 최종목적에 문제가 있다. 성경에서도 신비를 말한다. 삼위일체가 신비이고, 성육신, 동정녀 탄생도 신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도 신비이다. 그러나 이 신비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의미의 신비이다. 플라톤의 상승사상은 물질을 버리고 정신, 즉 하나님과 실재적인 하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기독교의 신비와는 전혀 다른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실재적인 하나님과의 하나됨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은 침묵기도나 관상기도를 통해 결국 하나님과 근원적으로 합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신비주의 영성운동의 유입
우리는 보통 신비주의 하면, 예언, 신유, 방언 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보다 현대 한국교회를 더 위태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가톨릭 신비주의 영성운동의 유입이다.
첫 번째 인물은 가톨릭의 수도사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다. 1,2차 세계대전 이후 실존주의가 사상의 흐름을 주도하고 허무주의도 한 몫을 하던 당시, 토머스 머튼이 소개한 수도원 생활과 관상기도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관상기도란 ‘정화’, ‘조명’, ‘합일’로 이뤄진다. ‘정화’란 일련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죄악 된 성향과 욕구와 행위, 즉 자기에게 있는 물질세계를 비우는 것을 말한다. ‘조명’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에 마음의 초점을 두고 하나님을 묵상하여 정신세계를 채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합일’은 이 조명의 과정을 지나면서 하나님과 실재적으로 하나 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관상기도인 것이다. 이 관상기도는 개신교 목회자 리처드 포스터(Richard J. Foster)를 통해 개신교회 유입되어 현재 한국교회에서도 레노바레운동과 연결되어 시행되고 있으며 이 운동에 이동원, 이철신, 최일도, 이병삼, 김양재 목사 등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토머스 머튼의 관상기도가 위험한 이유는 신비주의 이슬람 수피즘(Sufism)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토머스 머튼은 이슬람의 영적교사이며 신비가인 수피들을 애호했고 그들과 영적 공감을 나누었다. 그리고 토머스 머튼이 한 수피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기도는 여러분의 파나(fana:신적 일체에 합일하는 행위)를 많이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태국에서 열린 종교 간의 대화에서 머튼은, 나는 불교 힌두교 그리고 이 위대한 아시아 신비 전통에 열려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독교 전통의 가능성을 좀 더 배울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얻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런 토머스 머튼의 관상기도가 한국교회에 유입된 것은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인물은 토머스 머튼에 버금갈 정도로 기독교 진영에 인기를 얻고 있는 가톨릭 신학자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이다. 나우웬의 묵상과 사색은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알든 모르든 하나님의 집 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대부분 모르고 있을 것이다. 헨리 나우웬의 구원관은 보편적 구원관이었던 것이다. 그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서 힌두교의 기도방법인 침묵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동적 임재를 경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나우웬은 보편적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고, 혼합영성주의자였음을 사람들은 모른 체, 그의 책을 통해 감동을 받고, 그의 사상에 거부감 없는 공감을 표시했다는 것은 가톨릭의 혼합주의적 신학과 영성이 이미 깊숙이 파고 들어와 한국교회를 오염시켰다고 생각되어진다.
이머징교회운동에 물든 한국교회 부흥관
이머징교회운동이란?
현재 한국교회는 이머징교회운동(Emerging Church movement) 논란으로 뜨겁다. 이머징교회란 ‘새로이 떠오르는 교회’ ‘신흥교회’ ‘신생교회’라는 뜻이다. 이 운동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교회의 시대적 한계를 타파하고자 2003년 샌디에고에서 첫 모임을 가짐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아직 정해진 틀이나 조직이 없다. 단지 교회부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표면적이든 이면적이든 찰스 피니로부터 시작된 인위적 부흥관에 동의하면서, 미국의 새들백교회, 윌로우크릭교회, 레이크우드교회, 노스포인트교회, 펠로십교회들이 보여주는 인위적 방법론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이머징교회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머징교회운동의 장점
이머징교회운동에 찬성하시는 분들은 이머징교회의 장점들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로, 시대정신을 잘 반영한 교회 부흥운동의 대안이라고 말한다. 이머징교회운동은 우리 주위를 둘러싼 문화를 읽어 내고 그런 해석이 우리의 복음 증거, 신학에 대한 이해, 목회자 직분, 심지어 우리의 자기 이해에 대해 갖는 함의를 충분히 생각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성도와 불신자의 적극적 참여와 경험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다고 말한다. 20세기 중반까지는 ‘국가의 시대’, 20세기 후반은 ‘기업의 시대’, 21세기는 ‘개인의 시대’라고 어떤 일간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현 시대는 ‘개인’의 가치가 어떤 이념과 기업의 이윤 창출 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의 철학, 누구의 이윤 창출의 이용도구나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더는 원치 않는다. 나의 개성, 나의 가치, 나의 개성, 나의 경험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의 자유로운 표출이 중요하다. 인터넷 상에서의 ‘싸이 월드’ ‘트위터’ ‘블로그’ 등에 적혀 있는 수많은 생각과 철학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참여와 체험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부흥운동이 이머징교회운동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예배를 보는 입장이 아니라 참여하는 입장으로 드리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예배를 보고 들을 뿐 아니라 맛보고 냄새 맡으며, 만지고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도입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노래, 침묵, 설교, 예술, 표현에 대한 훨씬 더 큰 스펙트럼으로의 이동을 포함할 수 있음을 말한다. 공연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무대장치와 뜨겁게 노래하며 박수치며 호흡하는 찬양, 토크쇼 연극 등을 접목한 설교 등은 참여에 목마른 청중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머징교회운동의 문제점
이머징교회운동은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위험한 운동이다. 첫째로 이머징교회운동은 예배의 주 대상을 구도자가 아닌 탈구도자 중심으로 맞췄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예배의 기본이념인데, 부흥에 목말라 있는 현대 목회자들이 탈구도자들의 구미에 맞춰 예배드림으로 예배의 본질 자체를 흐려 놓아 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설교를 우리의 인생이라도 걸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배 모임에서의 경험의 일부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현대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진리를 나눠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 취사선택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이머징교회의 큰 문제점이다.
셋째로, 교회를 예배와 성경교육의 공간이 아닌 극장과 쇼핑몰로 변질시켜 버렸다. 초대교회 이후 전통적으로 교회를 지을 때는 예수그리스도를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십자가 형태로 짓었다. 교회 내부는 항상 엄숙하고 경건했으며, 예배와 성경공부, 기도, 그리고 식사를 통한 친교 외에는 다른 세상적인 요소들은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머징교회운동을 하는 목사들의 실용적 사고는 탈구도자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 종교적 상징물들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 탈구도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물건들과 시설들을 설치하였다. 새로 지어지는 교회 중 십자가 형태의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쇼핑몰과 극장과 같은 형태의 교회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더 이상 신비감과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는 교회는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장사함으로 예수님께 책망 받은 예루살렘 성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성경적 부흥관
성경적 부흥관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경에 나타난 부흥사건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부흥사건인 사도행전 2장의 부흥사건을 통해 성경적 부흥관은 어떠해야 하는지 개괄적으로 소개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성경적 부흥관을 바탕으로 근, 현대에 실제로 바른 부흥을 체험하였고, 그것을 가지고 성경적 부흥관을 정립한 18세기의 조나단 에드워즈와 20세기의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관을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부흥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행 2:1-13)
사도행전 부흥사건의 시작은 2장 2절에 나타나는 성령강림사건에서부터 출발한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2절),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120여명(행1:15)의 사람들 머리 위에 임했다.(3절) 그리고 그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4절) 이 소리를 듣고 각국에서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무리들이 몰려들었는데(5~11절),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스러워 하다가(12절), 일부는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13절)
이 사건은 부흥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성령의 임재는 예정된 사건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단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이 임할 것을 말씀하셨을 뿐(행1:5)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 말에 순종하여 모인 무리들을 보시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초대교회의 부흥사건은 시작되게 된 것이다.
베드로의 성령충만한 설교 (2:14~36)
성령강림에 연이어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된다. 사도행전 2:15-18에서 베드로는 성령강림으로 인해 나타난 현상 중 하나인 방언으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 이유는 몰려든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의혹을 풀어 줌과 동시에, 복음전도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였다. 베드로는 몰려든 무리들에게 먼저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 접근한다. 때가 제 삼시니 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15절) 삼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오전 아홉시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나 오순절 같은 절기 때에는 오전10시까지 보통 금식하며 기도 하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도 유대인이니 취한 것이 아니라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가서 방언 받은 이유를 모인 무리들이 믿고 따르는 구약성경, 요엘2:28~32을 가지고 접근한다.(16절) ‘말세’(ejscavtai" hJmevrai")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보는 신약시대를말하고,‘모든육체’(pa'sansavrka)란민족과인종의구별이없음을말하며,‘예언’(profhteuvsousin)과 ‘환상’(oJravsei")과 ‘꿈’(ejnupnivoi")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을 뜻한다.(17절) 그리고, 남종과 여종은 하나님께 신실한 성도를 뜻한다.(18절) 이를 종합해 보면, 요엘서(2:28-32)에 신약시대에 모든 인류에게 구약의 계시의 방법들과 버금가는 성령의 역사가 임할 것인데, 특별히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성도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베드로가 말하고자 한 것은, 방언의 근거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너희 무리들이 믿고 따르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일의 성취로 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2:19-21에서 베드로는 계속해서 요엘서를 인용하여,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시면, ‘기사’와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19절) 그 기사(tevrata)와 징조(shmei'a)는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하나님이의 진노의 조짐들인데,(20절) 그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주(kurivou)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요엘서에 소개되어 있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21절) 이를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강림은 단순히 방언과 같은 신비한 일이나 긍정적인 일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징조가 되기도 한다는 요엘의 말을 베드로는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의 베드로의 숨은 의도는, 성령강림으로 인해 진노의 조짐이 나타났는데, 그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런데 그 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2:22~24에서 베드로는 요엘서의 인용을 통해, 집중된 무리들에게 본격적으로 자신의 설교 의도를 밝히고 있다. 모인 무리들도 잘 알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보여준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그가 메시야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22절) 그러한 나사렛 예수를 너희가 ‘법 없는 자들’로 표현된 로마 당국자들에게 넘겨져 죽게 했으나(23절)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셨다고 강하게 선포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메시야이기 때문이라고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24절) 이제 베드로는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임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23절에 “너희가 법 없는 자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라고 말한 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당사자가 여기에 모인 무리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에 모인 무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왜 이렇게 설교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는 개개인의 죄가 아니라 유대민족 전체의 죄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이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이유는 유대인들에게는 공동체적인 기질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한 이유는, 진정한 회심은 통회 자복 없이는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모인 무리들에게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직시하게 해 줘야 바른 회심이 일어나기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모인 무리라고 강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2:25~32에서 베드로는 요엘서에 이어 다윗의 시편 중 시편 16:8-11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되심을 밝히면서 예수의 죽음이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이미 천년 전에 다윗을 통해 예언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 뜻 가운데서 이뤄졌음을 논증하기 위해서이다. 즉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가장 존경 받는 왕인 다윗의 시편을 인용함으로써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에서 ‘그(aujtovn)’는 3인칭 단수 목적격으로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시편 16:8-11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한 다윗의 예언인 것이다. 시편 16:8에서 내가에서 ‘내’ 또한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편에 항상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요동치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25절)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 가운데 있을 때에도 기뻤고 즐거웠으며 희망가운데 거하였을 뿐 아니라,(26절)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도 성부께서 음부에 버려 썩지 않게 하실 것을 믿을 수 있으셨던 것이다.(27절) 결론적으로 성부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생명의 길을 알게 하셨다고 말하면서 다윗의 메시야 예언은 마무리되고 있다.(28절) 베드로는 다윗의 시편 16:8-11의 주인공이 다윗이 아닌 이유는 다윗은 묘가 있고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29절) 선지자와 같은 능력을 가진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그 자손 중에 한 사람이 메시야가 되어 그 위에 앉을 것을 뿐 아니라(30절) 썩지 않고 부활하실 것을 알게 하셨는데(31절),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베드로는 선포하면서 120여명의 무리가 그의 증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32절)
사도행전 2:33~36에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태와 성령의 출처를 설명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 승천하셔서 높임을 받고 계심을 말하면서, 하나님께 성령을 받아 보내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33절) 그리고 다윗의 시편 110:1을 인용하여, 다윗이 주(하나님)께서 내 주(예수 그리스도)께 말씀하시기를(34절)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예수님 앞에 굴복하실 때 까지 하나님의 우편, 즉 권위와 능력을 지니고 있으라고 예언했다고 말하고 있다.(35절) 이를 근거로 베드로는 너희가 못 박은 이 예수가 다윗이 예언한 심판주로 원수들을 굴복시키실 능력의 주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36절) 여기에서 베드로는 역사적 실제성을 강조하기 위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이라는 말과 ‘이 예수’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지금 언급되고 있는 심판주 되신 주가 바로 역사상 실존하셨고 너희들이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어서 이들의 심령에 찔림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설교를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부여 받은 심판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마무리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앞 요엘서에서 언급한 진노의 날에 불러야 될 주가 이들이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임을 말하면서, 통회 자복하기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충만을 받은 설교자의 설교가 무리들을 통회와 회심의 자리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는 들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롬10:14) 진정한 부흥은 성령의 주도적인 역할에 달려 있지만, 그 방편은 인간의 인위적인 수단이 아니라, 성령충만을 받은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무리의 회심 (행 2:37~42)
사도행전 2:37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에게 이상한 반응이 일어났다. 좀 전까지만 해도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던 그들이 찔려(katanuvssw)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동사는 ‘때리다’ ‘격하게 찔러 관통하다’ 심지어는 ‘실신시키다’는 의미까지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격심한 마음의 염려와 가책에 뒤엉켜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을 무리들이 겪고 있다는 뜻이다. 극심한 고통을 느낀 이들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우리가 어찌할꼬’였다. 어찌할꼬(Tiv poihvswmen)를 직역해 보면 “무엇을 실천해야 합니까?”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이 말은 우리에게 진정어린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령충만을 받은 설교자의 설교가 방금 전까지 조롱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자신의 삶과 행동을 건 회개의 말이 나오게 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흥 시 나타나는 통회 자복을 통한 회개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38~40에서 베드로는 도움을 청하는 무리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metanoevw)는 ‘마음을 바꾸다’는 의미이다. 베드로는 마음을 바꾸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고 그 표로 세례를 받으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러할 때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데, 여기서 성령의 선물은 회개한 자가 생활의 성화를 위해 더 받게 되는 성령의 능력을 가리킨다.(38절) 마음을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를 할 때 죄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로 표현된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먼데 사람 즉 이방인에게까지 해당되는 약속임을 베드로는 말한 후에(39절) ‘패역한 세대’라는 책망어린 말을 통해 다시 한번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40절) 베드로는 무리에게 회심을 촉구하고 있다. 이 모습이 인위적 부흥의 방법 중의 하나인 ‘믿음의 의사표시’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리들이 먼저 “우리가 무엇을 실천해야 합니까?”라고 적극적으로 요청해 왔다는 점이다. 이 요청에 대한 안내를 담아 베드로가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베드로의 행동은 찰스 피니 이후 등장한 믿음의 의사표시와는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회심은 인위적인 방법의 동원 없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스스로가 통회 자복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는 바이다.
사도행전 2:41에는 이렇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데 그 수가 3,000명이었다고 한다. 초대교회 예루살렘 인구는 30,000명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구의 1/10이 회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원근 각지로부터 수십 만의 사람들이 몰려 왔음을 감안할 때 3,000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3,000명이 한꺼번에 세례 받을 수 있는 곳은 요단강 뿐이기에 이 숫자는 과장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더하더라’(prosetevqhsan)는 동사는 미완료 과거형이다. 이는 3,000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설교의 결과로 점진적으로 3,000명의 회심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부흥의 숫자는 인구에 비례하여 어떤 부흥운동과 비교해 봐도 뒤지지 않을 놀라운 숫자였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 후,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한 후 남자만 5,000명이 회심한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행4:4)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인위적인 방법들이 아닌 설교라는 방편을 통해 무리들에게 표현될 때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오는지를 볼 수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진정한 부흥의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교회에서는 여전히 성경이 말하는 부흥이 아닌,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한 부흥을 꿈꾸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초대교회에 나타난 부흥의 결과 (행 2:42~46)
사도행전 2:42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회심하고 세례를 받아 성령을 받은 성도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체험이나 현상에 의존하지 않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집중했다.여기서중요한 점은 ‘사도들’(ajpostovlwn)은 복수이지만 ‘가르침’(didach'/)은 단수라는 점이다. 이는 3,000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회심하여 성도가 되었기에 한 사람이 모두를 가르칠 수 없어 사도들이 나눠 가르쳤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개인의 생각이나 철학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원, 복음만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순수성과 일치성을 유지시켜준 밑거름이 된 것이다. 바른 말씀을 배운 성도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교제와 떡을 뗌, 기도에 전념했다. 여기에서 ‘교제(koinwniva)’, ‘떡을 뗌(th'/ klavsei tou' a[rtou)’, ‘기도(proseucai'")’라는 단어들은 등위접속사(kai;)로 연결되어져 있다. 그리고 떡을 뗌은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애찬 혹은 성찬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경건생활에 있어서 교제, 성찬, 기도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모두가 중요한 요소들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42절) 이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회심 이후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배우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이처럼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통한 통회자복이 동반된 진정한 회심은 참된 성도를 만들고, 이들은 성도됨에 안주 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과 행동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현대교회가 인위적 방법들로 끌어들여 배우고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고 자그마한 실망과 문제에도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참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2:43에서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열정적인 배움과 행함과 아울러 성령충만 받은 사도들이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결과로 예루살렘 사회는 초대교회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 본문은 기사와 표적으로 인해 예루살렘 주민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앞뒤를 바꿔 해석하는 것이 옳다.(43절) 성령을 받은 사도들의 기사와 표적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되는데 그들의 두려움은 과연 어떤 두려움이었을까? ‘두려움’(fovbo")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불안, 공포, 경외심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이 육체적인 사람(a[uqrwpo")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는 영혼(yuch)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경건생활과 사도들의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경외심과 함께 극복할 수 없는, 영혼 깊은 곳의 두려움을 느껴 이들에게 어떤 위해(危害)도 가하지 못할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사회가 느낀 두려움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경건한 삶의 모습과 사도들의 기사와 표적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근, 현대 부흥운동을 살펴보면, 반드시 사회적 변혁이 동반됨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 어떤 사회적 변혁이 일어났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짐작할 수는 없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이 영혼의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회적 반응과 변혁이 일어났음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승리감이 도취되어 있던 유대 지도자들이 손쓰지 못하고 방관만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와 성도들이 예루살렘 사회에 미쳤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부흥에는 수적 증가도 증가이지만 반드시 사회적 반응과 변혁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마케팅과 인위적 방법으로 교회는 커 나가는데 그 주변과 한국사회는 별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서, 한국사회 속에 나타난 몇몇 대형교회들의 인위적 부흥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부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44~47a에서 경건생활에 열정적이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도 간에 서로를 돕는 일에도 열심이었음이 나타나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를 내 놓고 함께 공유했다.(44절) 그뿐 아니라,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한 만큼 나눠 주었다.(45절) 이 모습은 공산주의가 지향하는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공산주의는 자발적인 동의와 사랑이 동반되지 않은, 원시사회 공동체처럼 규칙에 의한 공동소유와 분배였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자발적인 기부와 분배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자발성과 사랑이 동반된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유를 팔아’에서 ‘팔아’(ejpivpraskon)는 계속되는 행동을 나타내는 미완료 동사이다. 이는 재산을 내어 놓는 것이 몇몇 사람의 단회적인 행위가 아닌, 많은 사람의 지속적인 동참으로 일어난 일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물건을 공유하고, 필요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소유를 팔아 나눠 주었으니 마음이 같아지고 자주 모여, 음식을 나누는 일은 당연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46절) 그런데 이들의 모임은 인간적인 교제의 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함께 모여 물건을 공유하고 소유를 나누며 음식을 나눌 때마다, 이러한 천국 공동체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찬미했다는 것이다.(47절a) 여기에서 ‘찬미했다.’에서 ‘찬미’(aijnou'nte")의 뜻에는 ‘찬송하다’ ‘칭찬하다’는 뜻 외에 ‘약속하다’ ‘맹세하다’는 의미가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항상 다짐하고 맹세했던 것이다. 이런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계속적인 부흥을 주시는 것은(행 4:4) 아마도 당연한 것이라 여겨진다. 지속적인 부흥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의 인위적인 관리와 재생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모든 인생 문제의 궁극적인 해답이듯이(잠 16:7)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할 때 하나님은 그 공동체에 끊임없는 부흥과 갱신의 역사를 부어 주시는 것이다.
끝으로 사도행전 2:47b에서는 위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종합되어 초대교회는 사람들에게 칭송 받을 뿐 아니라 날마다 사람이 더하는 모든 교회가 바라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었다.(47b절) 그런데 초대교회에 사람이 더하게 된 것의 주체는 누구인가? ‘주께서’(kuvrio") 더하셨다고 되어 있다. 이는 초대교회의 수적 증가는 결코 인간의 인위적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원리는 현대교회에도 동일하다. 인위적 수단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인위적 수단으로 부흥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됨을 명심하자.
성경적 부흥관의 다섯가지 특징
진정한 부흥은 어떤 것인가? 첫째로 성령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120여명의 무리에게 임하여 초대교회의 부흥이 시작되었듯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통해 이뤄진다.
둘째로 성령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담대하게 나아가 성령의 인도함 대로 설교하여 진정한 통회자복이 동반된 회심이 이뤄졌듯이, 진정한 부흥의 방편은 성령충만을 받은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통해 이뤄진다.
셋째로, 무리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후 앎과 행함에 열심을 내었듯이 진정한 부흥은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고 싶은 욕구가 동반된다는 것이다.
넷째로 초대교회 성도들의 경건생활과 사도들의 기사와 표적을 통해 예루살렘 사회가 영혼 깊은 곳에서 두려움을 느꼈듯이 진정한 성경적 부흥은 사회적 변혁이 동반하여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구제하고 모이기에 힘써 하나님을 찬미한 결과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하나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해 주신 것처럼,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이 더하게 해 주시는 부흥이라는 것이다.
현대교회는 찰스 피니 이후 지속된 부흥회와,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사회 이후 등장한 마케팅 교회, 21세기 이머징교회운동의 노예가 되어 인위적 부흥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믿고 성경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교회라면 성경이 말하는 부흥관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아무리 멀리 갔다 해도 다시 돌아와 바른 길로 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지금까지는 성경적 부흥관,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지 몰라 그동안 습관화 된 인위적 부흥관에 젖어 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부흥을 위해 성경적 부흥관으로 교회를 부흥시키는 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관
에드워즈는 미국 1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목사이다. 그의 부흥관은 그의 칼빈주의신학사상의 바탕 위에서, 실질적인 대부흥을 체험하고, 그 부흥을 폄하하는 사람들에 대응하면서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부흥관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신학사상을 먼저 알아보고, 그 신학사상에 바탕을 둔 부흥현상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1차 대각성 운동에서 나타난 부흥에 대해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는 내용에서 나타난 그의 부흥관을 살펴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위의 순서대로 에드워즈의 성경적 부흥관을 살펴 보고자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소개는 앞에서 했기 때문에, 넘어가고 그의 신학사상과 신학사상이 녹아 든 부흥관을 실제 현장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나님 주권사상
에드워즈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주권교리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권교리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택해서 영생을 주시고, 어떤 사람은 영원히 멸망 받도록 내버려 두어 지옥에서 끊임없는 고통을 받게 하는 끔찍한 교리로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과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사람들을 영원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그가 받아들이게 되고 완전히 만족하게 된 때가 있었다. 그 때는 회심 체험 이후였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신 후 그는 한 차원 높은 것들을 보게 되었고, 이성적으로 공의와 합리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어떠한 방법으로 확신을 갖게 되었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신령한 체험을 한 이후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실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무조건적 은혜의 교리,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인간이 절대 의존해야 한다는 교리가 에드워즈에게는 달콤하고 영광스러운 교리로 나타났던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의존사상은 에드워즈의 신앙관 전체를 지배하였고 그의 신학 전체의 지도 원리로 작용하였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주권자 되신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긍휼을 간구하는 것이 그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청교도 신앙’에서 에드워즈의 하나님 주권사상을 이렇게 피력한다.
유효한 은혜 안에서는 우리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는 하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산출하시고 우리 또한 모든 것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산출하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체시요 근원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합당한 행동자들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국면 속에 있습니다. 전적으로 수동적이면서도 전적으로 능동적인 사람들입니다.
에드워즈의 하나님 주권사상을 강하게 담고 있는 저서가 ‘의지와 자유’인데, 그는 거기서 인간의 본성과 구원의 원천에 대한 전통적인 칼빈주의적 견해를 강력하게 서술했다. 그는 그 책에서 자신의 탁월한 논증의 재능을 살려 인간 스스로 선택할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상의 모순을 잘 지적한다. 인간은 언제나 그의 내적 성격과 일치된 행동을 함으로 죄인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격을 변화시킬 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역사이다. 따라서 인간은 오로지 제한적 자유를 가지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아니고서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성적으로는 자유하나 전적인 부패로 인해 의를 선택할 도덕적 능력이 결여되었으므로 성령께서 도우실 때에만 선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 주권사상을 그의 부흥관에 그대로 접목한다. 에드워즈는 1차 대각성 운동에서 나타난 현상들은 모두가 놀랍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역사라고 고백하고 있다. 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가에 대해 여섯가지로 나눠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구속적인 측면에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다고 말하고 있다. 한 영혼의 회심에 있어 하나님의 역사는 그 원천, 기초, 가치, 혜택, 목적, 결과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으로 인해 회심을 경험하는 사람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소개하고 있다. 둘째로, 정도의 측면에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에드워즈는 말하고 있다. 1차대각성운동을 통해 변화된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께 반항하고 부패하여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었던 그들이 완전히 변화된 것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보스럽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라고 까지 표현하고 있다.셋째로, 범위의 측면에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에드워즈는 과거 어떠한 회중 속에서도 전 뉴잉글랜드를 뒤덮을 만한 각성과 은혜는 없었고, 적은 범위에서 있었지만 다시 식어져 버렸다고 지적하면서 뉴잉글랜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미친 부흥이야 말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 회심자의 양적 면에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명의 회심자가 생겨나도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데 이 땅에는 수천명의 회심자가 일어났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뉴잉글랜드 내에서 부흥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음에 대해 에드워즈는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능력 면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희귀한 방식으로, 놀라운 깨달음으로, 신속했지만 지속적으로 역사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임한 주권적 역사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특히 어린아이들, 인디언과 흑인들에게 까지 일어난 이 부흥의 역사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에드워즈는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 여섯째로, 성도의 체험 면에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부흥으로 인해 주권적으로 부어주신 하나님의 빛, 사랑, 영적 기쁨은 놀라운 것이고 자신의 아내 사라의 경험 외에도 많은 체험들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런 체험들을 에드워즈는 하늘의 영광을 지상에서 이토록 많이 체험할 수 있었던 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까지 말했다.
말씀을 통한 부흥
에드워즈 설교의 온전한 기초적 자료는 성경이었다. 그는 철저히 성경적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철학과 사변을 성경에 굴복시켰고, 그런 것들을 단순히 성경의 종으로 여겼다. 그는 성경에 대한 헌신에 있어서 진정으로 청교도였다. 그의 생애의 대부분은 성경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일이었다. 그의 생애의 온전한 목표는 양떼들을 성경으로 양육하는 일이었다. 그의 주해는 칼빈에 견줄 수 있는 정확한 주해였다. 그는 설교자가 강단에 서는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담겨 있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그는 성경해석의 원리는 이성이 아니라 성경자체라고 생각하였다. 에드워즈는 설교할 때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는 광범위한 적용을 하였다. 그는 설교 한편 당 20-50회에 걸쳐 성경을 인용하였는데, 그는 신약성경을 본문으로 사용할 때, 특히 구약성경을 예화로 많이 사용하였으나 흥미유발적인 예화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성경을 유일한 자료로 사용한 진정한 목회자요 학자였다.
에드워즈가 중심이 된 미국 1차 대각성 운동은 말씀을 통한 부흥운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드워즈의 강력한 설교사역으로 그의 교회에는 서서히 부흥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에드워즈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설교를 연속적으로 하였는데, 이 때부터 그의 교회는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서 5장 4절을 중심한 ‘이신칭의’에 관한 설교에서 이렇게 소리 높여 외쳤다.
인간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그 어떠한 인간의 선행이나 덕행이라도 인간을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만이 죄와 형벌에서 해방되며,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가 1741년에 행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는 대각성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성경 시대 이후로 이 제목만큼 널리 알려진 설교도 드물 것이다. 그의 이 설교로 깊은 잠에 빠졌던 청교도의 후예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고, 미국교회의 새로운 분기점을 형성했다. 이 설교에 대해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볼 때 에드워즈의 설교는 적절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회는 주류 거래가 활발히 이뤄졌고, 부정한 노예제도와 남녀 간의 부도덕한 성적 타락이 있었으며, 기독교에 대한 무관심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여행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잠자는 교인들의 영적 무관심을 일깨우기 위해 생활 속의 치부를 공격하는 설교를 했던 것이다.
아울러 그의 설교는 단순히 개인의 회개에 제한되지 않았고, 당시의 사회적 퇴폐현상을 지적하고 착취행위까지 비난하는 폭넓은 설교였다. 그는 복음적 교리의 바탕 위에서 사회윤리적인 색체를 강하게 띤 설교를 하였다.
그의 설교는 퇴색해지고 있던 청교도 정신을 새롭게 하였다. 결국 에드워즈의 설교의 영향으로 이민 2-3세대의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불순종 행위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계약사상
에드워즈의 기본적인 신학사상은 청교도적 계약사상이다. 청교도들은 개인의 구원을 이루는 동기는 하나의 계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이 계약의 본질은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으로 나타난다. 처음에 하나님은 아담과 행위 계약을 맺으셨는데, 아담은 이를 어기고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제2의 계약인 은혜계약을 맺으셨다. 첫 계약은 행위가 계약의 조건이었으나 두 번째 계약은 오직 믿음을 갖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은혜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계약신학을 도입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계약의 성취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인간의 믿음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구속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들을 위해 자신을 계약 속에 매어두셨으니, 여기에 성육신의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인간을 위해 당하시고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셨고, 십자가에서 완전한 순종으로 보이심으로 새로운 은총을 주셨는데, 이것이 은혜계약이라는 것이다. 은혜 계약의 조건은 선행이 아니고 인간의 원죄를 시인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이뤄진다. 그러므로 은혜계약이 동의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고난으로 완성된 의를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교도 계약은 상호결속으로서 인간 편에서는 믿음이 조건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구원이 조건이다 결국 은혜계약의 조건이 선행이 아니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뜻하게 된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은혜 계약을 신학적인 개념에서 사회 계약사상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신대륙으로 이주해 오면서, 이미 하나님과의 교제로 계약관계에 들어갔다. 아울러 그에 따른 신학적, 사회적 의무를 헌신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뉴잉글랜드에서 계약신학을 강조하며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런 청교도의 계약사상을 충실히 전수받았다. 에드워즈는 “사랑은 선을 행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한 것과 이 세상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외적인 일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선을 행할 때, 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를 행해야만 한다. 이것이 이 사회 안에서 진정한 박애와 자선을 베푸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부흥운동으로 인해 뉴잉글랜드 사회에는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에드워즈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이 통회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노예제도운동 역시 에드워즈의 1차 대각성 운동으로 생겨났다. 실제로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에 있는 뉴포트의 조합교회 목사인 사무엘 홉킨스(Somuel Hopkins)는 노스햄턴 부흥의 기수인 에드워즈의 제자로서 1800년 이전에 흑인 노예화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으며, 그 결과 노예를 소유하고 노예를 매매하는 교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이러한 영향이 노예매매 실황을 목격하고자 노예 매매선을 타고 그 고생을 함께 한 마콜레이(Macaulay)와 그의 아버지 자카리(Zachary), 그리고 영국 하원의원이었던 윌버포스로 이어지면서 노예제도 자체가 의회에서 폐지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도주의 정신과 박애주의 정신이 고양되어 많은 자선단체가 설립되었다. 병약자, 노약자, 불구자들을 돌보았다. 사소한 범죄에 대해 중형을 선고하던 가혹한 형벌이 완화되었다.
감정과 이성의 조화
에드워즈가 부흥의 불길을 당기자 많은 곳에서 부흥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이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회심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교리와 양립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순회전도자들의 지나친 행동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심을 성령의 충동이나 계시로 보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부흥운동에 부담감을 갖고 있던 신학자들이 부흥운동가들의 신학적 오류를 검증하기 시작했다.당시 미국의 회중교회는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신학의 정통을 부르짖던 구파들은 휫필드를 비롯한 미국의 신파 부흥사역자들이 미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키자 그들을 공격하였다. 이들 구파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주장했으나, 부흥을 싫어했고, 부흥 사역 중 감정적 요소를 질타하며, 부흥운동을 반지성주의라고 매도하였다.
구파들은 열광주의적인 부흥운동가들이 내적인 충동이 성령에 의한 것이고, 이것은 분명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표증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이 더 이상의 구원을 위한 증거를 찾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즉 구파신학자들은 죄인들의 영혼에 역사하는 것은 분명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이지만, 이러한 광적인 흥분은 성령의 역사와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이성적인 피조물로 다루시기 때문에 회심자들은 자신의 지성을 활용하여 항상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에드워즈가 답을 했다. 에드워즈는 천재적 지성을 가졌지만 감정을 발산하는 것을 정죄하지 않았다. 그의 위대한 점 중 하나가 아마 지성과 감정을 균형있게 조화하여 사역자의 본을 보였음일 것이다. 에드워즈는 반대세력에 맞서 부흥운동을 변호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비평에 근거 있음을 인정하고 극단적이며, 거친 부흥운동의 위험성을 자제하도록 신파 부흥 사역자들에게 경고하였다. 에드워즈는 편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비판하고, 중용의 관점에서 부흥운동을 보았다. 그는 부흥운동을 비판하는 구파들과 구원의 표징만을 찾는 열광주의적인 부흥운동가들을 모두 잘못된 것으로 동일시하였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신앙인은 진리에 대한 믿음과 마음의 책임성 있는 성향을 포함한다. 즉 단순한 감정주의나 지성주의도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성과 탁월성을 아는 지식과 감정의 잘 조화된 사람을 말한다. 그의 저술 ‘신앙과 정서’를 보면 그는 언제나 두 측면을 검토하며 양편에 경고했다. 종교적 감성이 구원과 회심의 부속물로써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이성의 각성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었음을 함께 강조했다.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가 전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며, 그의 마음에 역사하시어 감화시키고 강력하게 하시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모든 정서를 다 인정하는 것도 올바른 방식은 아니지만 인정하지 않는 것 또한 잘못이라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신앙의 주도적이고 본질적 좌소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설교, 그리고 의지의 결단이 이뤄지지 않은 채 끝나는 설교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제시하지 못하는 공허한 지적 전달로 결코 바람직한 성도의 삶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입장이다. 물론 에드워즈는 흔하게 일어나는 무분별한 인위적 감정의 문제점들을 강렬한 어조로 지적한다. 이러한 인위적 감정은 성령이 함께 하는 진정한 바람직한 정서와 구별된다고 한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부흥관은 감정주의나 지성주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서와 지성의 균형을 이루었다는데서 중요하다.
에드워즈의 부흥관 평가
에드워즈의 부흥관은 성경적 부흥관의 정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에드워즈는 하나님 절대 주권사상을 강력하게 품고 있었고, 이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은 시기에 대한 예측이나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의 흔적 없이 오직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둘째로 사도행전 2장의 부흥사건이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확산되었듯이, 에드워즈가 평소 성경중심의 설교를 해 왔고, 그의 강력한 설교가 1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부흥관이 성경적임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나는 부흥사건 이후 성도들의 회심과 변화가 에드워즈의 1차 대각성 운동 중에도 그대로 일어났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부흥관이 성경적임을 보여주는 세 번째 증거가 되겠다. 넷째로, 사도행전 2장에서의 부흥사건의 결과로 구제와 나눔이 활기를 띄고 유대인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을 두려워하게 된 것처럼, 에드워즈의 부흥운동 후에도 이러한 사회적 변혁이 뒤따랐다는 것이 또 하나의 증거가 되겠다. 마지막으로 수적 부흥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부흥의 결과로 파생된 것이지, 인간의 인위적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에드워즈의 1차 대각성 운동이 같이 보여주고 있으므로 에드워즈의 부흥관이 성경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관
로이드 존스의 생애
마틴 로이드 존스는 1899년 12월 20일 남웨일즈 카디프에서 출생했다. 1921년에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25년에는 왕립의과대학(Royal College of Physicians)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26년에 복음사역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927년에는 베단 필립스(Bethan Phillips)와 결혼하였으며, 38년동안이나 일해 온 의사경력을 포기하고 11년 반의 아베라본 샌드필즈에 있는 베들레헴 장로교회에서 목회 사역을 시작하였다. 1938년에 그는 버킹헴 게이트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유명한 켐벨 몰간(Cambell Morgan)의 동역자로서 초청을 받았다. 5년간의 동사사역 후, 1943년 단독 사역을 하게 되었다.
1949년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고 뒤이어 성령의 기름부음을 체험하였다. 1959년에 ‘부흥’과 ‘산상설교집’을 출판하였고, 1966년에는 영국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학적으로 혼잡한 교단을 떠나라고 촉구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36년간의 사역을 하였고, 1968년 은퇴하였다. 은퇴를 한 다음에는 순회 설교자로서, 저술가로서 남은 생을 보냈다. 1970년에 그 유명한 로마서 시리즈를 출판하게 되었고, 2년 후인 1972년에는 에베소서 시리즈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1981년 3월 일, 성 다윗의 날로 지켜지는 주일에 활짝 열린 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갔다.
로이드 존스의 신학적 배경
첫째로 로이드 존스는 자신을 칼빈주의 감리교도로 소개한다. 먼저 로이드 존스는 칼빈주의의 건전한 교리를 사랑했다. 그는 알미니안주의에서 말하는 행위 구원은 반대했다. 인간을 하나님의 전적 은혜가 필요한 전적 부패의 상태에 있는 피조물로 보았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없이는 구원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는 감리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샌즈필드에 정착한 이후부터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 선조들의 삶을 기술한 책을 즐겨 읽었다. 18세기 웨일즈 부흥운동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인 호웰 헤리스(Howell Harris)의 목회에 대한 소책자를 13세 때 읽었는데, 이것은 로이드 존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자라난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의 역사에 대한 이 첫 책은 역사에 대해서 평생 지속적인 관심을 일깨웠고 특히 부흥 시기의 교회사와 위대한 성도들과 설교자들의 전기에 관한 관심을 평생토록 갖게 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는 휫필드를 영국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꼽았고 그를 설교의 모델로 정했다. 로이드존 스는 청교도들에 대한 강의에서 존 칼빈에게는 항상 조지 휫필드가 필요하다고 의도적으로 말할 정도로 조지 휫필드를 높게 평가했다. 로이드 존스는 학문적인 칼빈주의가 남긴 것을 가리켜 ‘죽은 정통(ossified orthodoxy)이라고 명명했다. 로이드존스가 말하기를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없이는 죽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로이드존스는 칼빈의 건전한 교리와 감리교희 부흥정신을 결합시킨 ’칼빈주의 감리교도의 후예‘인 것이다.
둘째로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18세기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의 역사를 읽으면서,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예외 없이 청교도의 글을 읽은 것을 관찰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5년에 새로 출간된 리차드 백스터의 전기를 우연히 읽고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심을 더욱 분발시킨 요인은 1929년에 두 권으로 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발견하고부터이다. 그는 에드워즈에게서 청교도주의의 절정과 극치를 보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의 가슴이 부흥에 대한 열망으로 불붙어 있었다면, 로이드 존스의 머리는 청교도 신학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를 사랑했고, 잘 이해했으며, 청교도 정신을 20세기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복원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셋째로 로이드 존스는 개혁주의의 강해설교의 영향을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1932년 캐나다를 방문 했을 때, 워필드 전집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워필드의 신학에 심취했는데, 그것은 워필드의 신학이 성경에 기초했고, 주해적으로 정확했을 뿐 아니라 뜨거운 영성이 겸비되었기 때문이다. 워필드는 로이드 존스에게 구원의 위대성과 경이와 영광을 깊이 심어주었다. 즉 워필드를 만나기 전에는 중생에 대한 설교가 주를 이룬 반면, 칭의에 대한 가르침은 빈약했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관
부흥에 대한 정의
부흥에 대한 정의는 이안 머레이에 따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로 화란 개혁파의 입장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를 대표로 하는 ‘화란 개혁파’에서는 부흥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흥은 성령의 임재를 의미하며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므로, 성령의 부어주심이 이미 이뤄졌기에 부흥은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안 머레이는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성령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온전히 설명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교회가 성령의 부으심을 기대하지 않을 때 무기력해짐을 말하면서 지속적인 성령충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로 오순절파의 입장이다. 오순절파는 부흥은 영원하고 지속적인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부흥의 유무는 전적으로 교회와 성도들의 열정적 기도와 전도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찰스 피니의 인위적 부흥관이 그대로 녹아든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머레이는 우리의 순종적 행위가 부흥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오순절파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변질된 부흥관으로 인해 교회 안에는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수단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셋째로 ‘미국교회 구학파(old-school)’의 입장이다. 구학파는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오순절 사건은 일회적이고 영구적으로 지속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완성시키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수준과 분량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성령을 통한 부흥을 일으켜 주신다는 것이 구학파의 주장인 것이다. 이 주장의 대표는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에드워즈는 성령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특별한 시기에 부어 주시기도 하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대한 견해들 중, 누구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을까? 로이드 존스는 미국교회 구학파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관해서는 청교도들의 견해를 뛰어 넘어 에드워즈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화란 개혁주의와 찰스 피니의 부흥관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부흥관을 세워 나간다. 그리고 그 부흥관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진정한 부흥의 방편 ‘설교’
로이드 존스는 부흥을 열망했다. 그러나 부흥을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뤄지는 에드워즈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부흥을 위해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방편이 있다면 무엇인가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새로운 능력이 목사의 설교 속으로 들어와 교회 밖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게 되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고 말했다.
로이드 존스는 현대설교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그 사실을 증명하는 주요한 증거를, 성령의 제1차적 역사가 죄를 깨닫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단에 선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서 발견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의 긍휼을 구하는 지점까지 가지 아니한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즐겁게 하는 어느 설교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인정하시는 설교가 아님을 알았다. 다시 말해 사람이 회심하기 전에 먼저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데 현대 설교에는 그것이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의 신령한 설교를 통해 신자들이 각성하여 말씀대로 살아갈 때 세상은 교회에 매혹되어 몰려들게 될 것이고 그것이 성경적인 부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샌드필즈 베들레헴 장로교회에서 본격적인 설교사역을 시작한다. 샌드필즈는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을 합해 오천 명 가량의 인구를 가진 곳이었다. 그리고 90% 이상이 예배당에 오지도 않았다. 그들은 꽤 명망 있는 노동계층이었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냉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의 부패요소들이 도시를 사로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로이드 존스는 영혼의 중생에 대해 강하게 설교했고 진정한 부흥을 맞보게 되었다. 끊임없는 회심이 일어났고, 등록교인이 11년반 동안 그의 사역을 통해 93명에서 530명으로 성장했다. 당시 해마다 기독교의 세력이 크게 감소하는 영국 상황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사역하게 된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예배당에 폭탄이 투하되었고, 성도는 150명까지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인 1938년에 런던으로 왔고,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부흥에 대한 열망이 담긴 그의 설교는 웨스트민스터 교회는 13년 후인 1951년에 2,500명이 모이는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
부흥에 있어서 성실한 말씀 선포는 로이드 존스 스스로 늘 추구하던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늘 자신의 설교 위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 부흥을 주시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이렇듯 그의 부흥에 대한 기대는 설교의 중요성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최우선되는 응답이었다.
그릇된 부흥의 방편 ‘대중전도집회’
그는 부흥이란 성령이 찾아오는 사건으로서 복음전도 캠페인과 같은 대중전도집회는 잘못된 인위적 방법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로이드 존스는 1966년 빌리 그레엄의 베를린 전세계 전도대회에 협력하지 않은 유일한 목회자였다. 로이드 존스는 대중전도집회와 부흥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중전도집회는 성령의 권능만을 의지하는 성경적인 부흥과는 달리, 인간의 기교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연속집회와 결신자 초청제도를 들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빌리 그레엄에게 자유주의자들과 가톨릭 교도들의 후원을 받지 않고 결신자 초청순서를 뺀다면 베를린 전도집회의 회장직을 맡아 주겠다고 했으나 빌리 그레엄은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대중전도집회라는 인위적인 인간의 기교를 만든 찰스 피니를 비판했다. 로이드 존스는 피니의 성령체험은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피니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회의와 전도집회, 광고, 프로그램을 계획하게 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며, 인간의 행위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회심한 사람들의 숫자를 전혀 공포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그 숫자를 확인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일환으로 사람들에게 공중 앞에서 어떤 행위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로이드 존스의 성경적 부흥관이 인위적 부흥관에 물든 오늘 이 시대에 절실히 요청된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관 평가
로이드 존스는 감리교의 구령의 열정과 개혁주의 신학의 바탕이 잘 결합된 이상적 목회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이 일어날 것을 확신했고, 설교라는 방편 외에 그 어떤 인위적인 방법도 부흥을 낳을 수 없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은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영국사회에 큰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회심의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성도들의 진정한 회심과 회심으로 인한 성화 만에 관심을 기울인 그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기 까지 하다.
더욱이 20세기 중반은 빌리 그레엄과 같이 찰스 피니의 인위적 부흥관으로 많은 인기를 모으는 목회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처럼, 인위적 부흥관에 현혹되지 않고, 올곧게 하나님의 뜻인 성경적 부흥관을 고수한 로이드 존스의 모습이야 말로 말세지말의 시대에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선지자적인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로이드 존스를 끝으로 성경적 부흥관을 가지고 교회를 부흥시킨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모두들 대중집회 중심의 찰스 피니의 인위적 부흥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성경적 부흥관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바로 당신이 제2의 조나단 에드워즈, 제2의 로이든 존스가 되어 이 시대를 새롭게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들어 실행해야 할 것이다.
성경적 부흥관의 핵심
인위적 부흥관과 성경적 부흥관의 공통점과 차이점
공통점
성경적 부흥관과 인위족 부흥관 모두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 2장 47절에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위적 부흥관을 추구하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실재로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 예배당을 가득히 채웠고, 재정도 늘어났으며, 기독교 인구도 증가하였다. 확실히 인위적 부흥관을 가진 사람들이 인위적 방법을 동원해 전도한 결과, 사도행전 2장 47절은 이뤄진 것이다.
차이점
차이점은 무엇이 있을까? 앞에서 살펴본 차이점은, 성경적 부흥관의 주체는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는 것’에 충실하여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는 반면에, 인위적 부흥관의 주체는 인간의 간절한 기도와 치밀한 계획, 그리고 인위적 방법들이라고 소개했다.
이것 외에도 큰 관점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구원 받은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성경적 부흥관이든, 인위적 부흥관이든 구원 받은 사람의 상태가 같다면 두 방법을 다 인정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인위적 부흥관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과 성경적 부흥관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분명한 상태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이고, 거짓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진정 구원 받은 사람
죄에 대한 바른 이해
진정한 회심을 위해서는 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죄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핵심사항이다. 구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죄를 지었고 죄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현대 신학에서 이 본문은 사실적 기사로 이해하지 않고 무용담(saga) 정도로 이해된다. 이 본문을 사실로 받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 과거의 사건이며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은 그것이 사실인가를 따지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예증을 보여주기 때문에 거기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수용하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죄의 문제는 사실이 아니라 단지 현상을 설명하는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회심은 죄에 대한 분명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 성경에서 죄는 언약 관계의 파기를 의미한다. 죄는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므로 크게 불신앙, 불순종, 교만, 미움 등으로 나타난다, 이 때에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므로, 이것은 불순종이며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인 것이다. 현대교회가 지닌 죄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는 결국 참된 구원의 확신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배격 없이 신앙생활을 시작하기에 죄의 세력 아래에서 구원의 확신도 삶의 변화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
현대인들에게 있어 회개라는 단어는 죄에 대한 유감스러운 감정 정도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회개가 죄에 대해 섭섭함과 슬퍼하는 감정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회개가 없이도 죄에 대한 섭섭한 감정은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는 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죄를 인하여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곧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께 대한 범죄임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향해 방향전환 할 것을 명령 받는다. 그러므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을 깨닫고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방향전환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는 죄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가지는 정도가 아니라 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을 동반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회심
현대교회에 있어서 회심에 대한 이해는 전도 방식을 들여다 볼 때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을 많은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하며 믿을 것을 권유하는 대중전도집회이다. 이때에 예수님을 반드시 영접해야 한다는 절박성을 각각 만나는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이런 방식으로 현대교회는 많은 교인증가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간략한 복음 소개와 결단 촉구를 통해 불신자들이 회심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에 회심에 대한 빈약한 이해를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소개받고 진정한 신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기까지는 의외로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있는데도 대중 전도식 구원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회심 곧 돌이킴(conversion)은 성경에서 대개 세 가지 경우를 의미하고 있다. 먼저 이것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겨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이다. 다음으로 이것은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회심이란 말은 중생과 거듭남을 뜻하며, 이것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칼빈은 이때의 중생이란 말을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돌이킴과 성화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대부분의 17세기 신학자들도 중생을 돌이킴, 회심과 동일시하였다.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 후서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바울은 선포하고 있다. 진정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세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데, 첫째로 하나님의 주되심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고백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의 주되심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을 정도의 진심을 담아 장소를 가리지 않는 고백이 있어야 진정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로, 관심사에 있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외모, 돈, 학벌, 취미생활, 권세, 명예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면, 진정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말씀, 기도, 찬양, 성도와의 교제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진정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셋째로, 이기적이고, 욕망에 불타는 성품에서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까지 열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 진정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신사도 운동, 소위 성령사역을 하는 사람들처럼 팔이 길어지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신유와 입신을 경험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일까? 아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육체적, 물리적인 변화를 뜻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뜻하는 것이다. 즉, 과거 전혀 관계없던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는 삶의 전 영역의 주되심이 되는 것이 구체적 의미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삶의 주인이 과거에는 사탄이었고 우리 자신이었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진정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느끼시는대로 기뻐하고 슬퍼하고 기대하는 것이 진정한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인 것이다.
미국에서는 Yard sale을 자주 한다. 이 중고장터를 통해 물건들은 새 주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 주인의 의도와 쓰임새에 따라 다시 태어난다. 이 때 좋은 주인, 다시 말해 용도를 분명히 알고 있고 아껴 쓸 줄 아는 주인을 만난 물건들은 새로운 물건으로 탄생한다. 그러나 과거의 주인보다 더 못한 주인을 만나면 이제는 중고장터에도 나오지 못할 폐기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주인 중에서도 그 물건을 만들어 용도를 분명히 알고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주인을 만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용도와 관심에 집중하여 변화 될 때 진정 구원받은 신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우리는 진정 구원 받은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벅찬 감동과 날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증거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3:8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풍성’(plou'to")이라는 단어는 ‘어느 누구도 그 끝을 찾을 수 없는 부유함’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로마서와 에베소서 등 바울서신에서만 나타나는 단어이다. 이 말은 바울이 복음 증거자로 나서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이 먼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를 받았고, 은혜 받은 자는 반드시 그 은혜를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전해야 하는데, 자신은 은혜 받은 자로서 복음 증거를 구원 받은 자의 증거로 나타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 받은 증거를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구원받는 자의 증거는 무엇인가? 유아세례를 받았고, 영접기도를 따라 했고, 간헐적이지만 부활절과 성탄절에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증거인가? 아니면 매주 교회 출석하는 것만으로도 구원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큰 오산이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를 받은 자는, 반드시 그 증거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통해 구원받은 자가 나타내야할 증거는 무엇일까?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 사도는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약1:22) 성도가 아무리 신령한 일, 남을 돕는 일을 한다고 해도 말씀과 관련 없는 행위는 결코 구원받은 자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야고보 사도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약2:1)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에게만 좋은 자리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악한 생각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약2:2-4) 그리고, 말실수를 줄이기 위해 많이 선생되지 말 것과(약3:1) 세상과 벗하지 말고 하나님께 복종할 것(4:7)을 구원받은 자의 구체적인 행위의 예로 들고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어떤 동기에서 일어나야 하는가? 행위구원을 말하는 가톨릭처럼 구원이 동기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는 어떤 동기로 위와 같은 행위를 해야 하는가? 그것은 사도바울이 고백한대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에 근거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요한복음 14:23에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처럼 사랑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순교자들이 창에 찔려, 목이 베여, 불에 태워 죽으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정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기억하고, 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중보의 사랑을 항상 되새길 때 구원 받은 자의 증거로서의 구체적인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될 것이다.
이처럼 진정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이 동기가 되어 구체적인 증거들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거짓 구원 받은 사람
인위적 부흥관에 물든 교회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은, 죄의 문제를 경시하고 회개를 소홀히 취급하게 되어 참된 회심보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회심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성경의 토대에서 벗어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인위적 부흥관에 물든 교회를 통해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이 아닌, 인간차원의 지적 동의에 의해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에 헌신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성도들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구원을 위한 보증으로서의 신앙을 추가하려는 성향을 띄게 된다. 그 결과 교회는 헌신의 동력을 잃게 되고 무기력한 공동체가 되고 마는 것이다.
끝으로 인위적 부흥관에 물든 교회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은, 죄의 문제를 경시하기에 칭의와 칭의를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시하게 된다. 그 결과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을 기회를 잃게 되고 교회는 의롭지 못한 자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향해 권리 를 주장하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무의미한 공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
교회는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고, 구원받게 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에는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가야 한다. 그러나 주님의 방법대로 더해 가야만 한다. 비록 더디고 성과가 없어 보인다 하여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찾아오게 되는가? 거짓 구원을 받은 사람만 날마다 더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도 불행하게 하는 일이고, 교회도 불행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 속에서 통회 자복을 통해 회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사람만이 진정한 구원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더하기 위해 죄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진심어린 회개, 진지하고도 오랜 시간에 걸친 회심 없이 영적 악세사리를 추가하는 정도로 복음을 소개한다면, 그 복음에는 예수도 구원도 담겨 있지 않은 값싼 복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복음의 씨앗은 가슴에 떨어져 봐야 열매는 커녕 싹도 나지 않아 거짓 구원을 받은 사람만 교회에 가득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을 그래도 교회에 붙어 있게 하려다 보니까 교회는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무언가 보여 주어야 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면 그들은 순식간에 떠나 버린다. 문제를 일으켜 작은 충고라도 한 다음 주에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결국 인위적 부흥관을 통해 거짓 구원 받은 사람으로 교회를 채운 교회는 스스로의 올무에 걸려 고생을 자초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 교회의 사명을 회복해야 할 때임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근, 현대 부흥운동을 살펴보면서 인위적 부흥관의 탄생 배경과 현황, 그리고 성경 부흥관의 개념과 사례를 살펴보았다. 성경적 부흥관이란 무엇인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부흥 사건과 맥을 같이 하는 부흥관일 것이다. 성경적 부흥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과정은 어떠한가? 먼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아파하는 통회 자복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처절한 절망감 가운데서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래서 진심 어린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적 부흥관을 통해 탄생한 구원 받은 사람은 말씀과 기도로 대표되는 경건생활에 열심을 내게 되고, 교제와 나눔, 섬김의 행위도 동일하게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구원을 받고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은, 신앙생활 중에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이나 실망스러운 일에도, 교만하지 않고, 상대를 비난하지 않으며 묵묵히 자리를 지켜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치리에도 복종하게 된다. 이것이 성경적 부흥관을 통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인위적 부흥관은 무엇인가? 찰스 피니가 주축이 된 미국 2차 대각성 운동 이후 부흥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위적 방법에 의한 부흥을 말한다. 인위적 구원관을 통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은 어떠할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준비된 대중집회의 자리에서 죄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본인의 결단에 의해 거짓 회심을 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교만과 욕심이 가득 차 있다. 혹시 그 속에 성령이 임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마음 속의 주인은 교만과 욕심이라는 죄이기 때문에 변화된 삶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되거나 가려 듣게 되고, 기도를 해도 회개의 기도가 아닌 축복에 대한 응답을 촉구하는 기도만 하게 되며, 죄 된 습관은 여전히 자신의 삶 속에 남아 이도 저도 아닌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서 서성이게 된다. 그러다가 신앙생활 중에 불미스러운 일이나 실망스러운 일이 있을 때, 상대를 비난하고 자신을 옹호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게 된다. 교회의 치리에도 순종하기는 커녕 자신의 의를 드러내게 된다. 그 결과 갈등으로 인해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는 소위 가나안 성도, 떠돌이 신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인위적 부흥관이 양산하는 구원받는 자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적 부흥관에 한 가지 질문이 주어진다. 부흥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강림을 위해 기도했듯이, 성도 개개인의 영적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부흥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의 심령이 성령충만하여 질 때,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나누고 구제하고, 교제하면서 흩어져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 땅에도 부흥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 앞서서 교회를 가득 채울 욕심으로 인위적 부흥관을 계속 사용한다면, 성도들도 변화가 없고, 교회 안으로 들어 온 사람들도 거짓 구원을 받은 사람일 확률이 높고, 그들을 관리하느라 교회도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성경적 부흥관에 충실하여, 교회 안에 알곡 신자를 남기고 든든한 교회를 세워 나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반드시 부흥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부흥을 기대하며, 인위적 부흥관을 내려놓고 성경적 부흥관을 실천하는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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