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에 그을린 그을음은 단지 타버린 흔적만은 아니었음을"
"다시 그 나비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비를 짓밟고 한참 뛰어가다가 어느 골목에 주저앉았지. 상업고등학교 밴드부가 연주하는 군가가 아련하게 울려퍼지고 있었어. 나는 오른쪽 신발을 벗어 조심스레 밑창을 봤어. 진물 같은 게 묻어 있더군. 몇 번 바닥에 문질렀지만, 웬일인지 쉽게 지워지지 않았어. 난감해진 나는 신발을 손에 들고 한참 서 있다가 맞은편 담장 너머로 던져버렸어. 밴드부가 이끄는 시가행진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신발 한 짝을 버렸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지. 살아가면서 가끔 내가 던져버린 그 신발이 생각나. 그 신발을 지금 어떻게 됐을까? 이튿날 남대천에 뿌려버린 죽은 반딧불이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혜지누나는 어디서 무엇을 할까?
어제 아침 일찍, 나는 도피생활 동안 지내던 달동네의 가톨릭 계통 고아원 사람들에게 고향에 내려가겠노라며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어. 전날 밤에는 그럴싸한 송별식도 있었지. 같이 봉사활동을 하던 사람들도, 고아원의 아이들도 내가 수배자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어. 심지어는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좋은 사람들이었지. 짐을 넣은 가방을 메고 나오는데 지난 일 년간의 일들이 생각나면서 눈물이 맺혔어. 우여곡절 끝에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서울 하늘로 12월의 새로운 바람이 스쳐지나갔지. 젋음을 바쳐 우리가 꿈꿨던 세상을 반쯤은 이룬 것일까? 아니면 모든 게 이제 다시 시작되는 것일까?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대신 꿈결 속을 걷듯이 아침 준비로 분주한 산동네 꼬불꼬불한 골목을 지나 근처의 산으로 올라갔어. 주머니에 반짝이는 유리판을 하나 넣은 채.
여덟시 무렵 나는 신문지에 불을 붙여 유리판을 그을렸어. 육 년 만에 돌아온 일식이었어. 오래 전부터 기다려왔던 일식이었지. 시커멓게 그을린 유리판을 들어 눈앞에 대고 태양을 바라봤어. 검은 그을림에 그 세기가 약해진 노란빛이 내 눈 안으로 들어왔어. 까닭 없는 슬픔과 한없는 기쁨과 막연한 불안감이 하늘을 떠도는 먼지 알갱이처럼 내 안에서 서로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바뀌는 동안, 조금씩 둥근 원이 태양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지. 눈물 방울처럼 검은 유리판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노란빛. 언젠가 보았던 너의, 또 혜지누나의 눈물 맺힌 눈동자처럼 한쪽 부분부터 흔들리는 그 둥근 빛. 그러나 결코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그 소중한 동그라미. 무한히 수축됐다가 다시 온 우주로 퍼져나가는 그 노란 물결. 그제야 알 것 같았어. 혜지 누나가 동생과 나란히 서서 그을린 유리로 바라보려던 게 일식이 아니었음을. 그 순간부터 나는 새였고 물이었고 혹시는 바람이었어. 푸른빛이었고 바다였고 바다의 한때나마 꿈이었어. 내 안을 충만하게 메운 그 따뜻한 느낌. 나는 그게 사랑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어. 나는 비로소 사랑에 빠진 거야. 알겠니? 그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첫사랑에 빠진 거야."
소유와 쟁취를 위해 거친 폭력으로 아름다움과 소중함, 정의로움을 까부순 자리에는 찌꺼기 같이 조잡한 더러움과 추악함만이 있을 따름이다. 노란 나비가 짓이겨진 자리에는 더러운 휴지 쪼가리 같은 것만이 남았고, 반딧불이 사그라진 유리병 속에는 끔찍한 벌레만이 남았고, 짝사랑이 끝나던 과거의 한 장면 속엔 수치심만이 남았고, 어머니의 말벗인 누나를 보잘 것 없는 술집작부로 내몰았을 때에는 죄의식만이 남았다. 아름다움이 추악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과정에는 나비를 소유하고 싶고, 반딧불을 보고 싶고, 사랑을 쟁취하고 싶고, 술집작부 위에 군림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파생되는 폭력이 개입해 있다. 그렇게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아름다웠던 자리에는 '구겨진 더러운 휴지 조각'과 '끔찍하게 생긴 곤충'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망울'과 '겁에 질려 나를 바라보던 그 눈'만이 남아 있다. 아름다움이란 그저 찰나에만 존재하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내재되어 있던 나의 폭력으로 인해 추악하게 변해버린 아름다웠던 과거를 향하여 '나'는 편지를 쓴다. 그 편지는 '정인'에게 쓰는 편지이지만 그것은 곧, 죽어버린 '나비'와 '반딧불이', 연락이 닿을 길 없는 '혜지누나'에게 쓰는 편지이기도 하다. 즉, 나로 인해 파괴된 과거를 향해 쓰는 편지인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레 잊혀져 갈 과거에게 뜬금없이 펜을 들어 반성과 참회의 편지를 쓰는 이유는, '내'가 사회의 폭력으로 인해 '죄인'으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사회의 부당한 폭력으로 인해 처참히 부서져 버리자, 그때서야 '나'의 폭력으로 산산이 부서져버린 과거의 아름다움이 생각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폭력으로 인해 무너진 '나' 또한 언젠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질 것임을 예감한다. '내'가 그동안 아름다웠던, 그러나 추악하게 변질되어 버렸던 과거를 잊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남겨야 한다는 초조한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 그러니, 그 편지는 다름 아니라 '나'의 폭력으로 부서진 아름다운 과거에 대해 용서를 비는 편지인 것이다.
이제 곧 사회의 폭력에 굴복하고 '죄인'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없노라고 과거를 향해 이야기한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서를 비는 편지를 써 내려가며 과거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음을 느낀다. '나비'는 노란 나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반딧불이'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정인'은 '나'의 사랑이 아니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혜지누나'는 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라는 것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선을 다한 아름다움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거기에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너의, 또 혜지누나의 눈물 맺힌 눈동자처럼 한쪽 부분부터 흔들리는 그 둥근 빛, 그러나 결코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그 소중한 동그라미, 무한히 수축됐다가 다시 온 우주로 퍼져나가는 그 노란 물결'은 다만 내재된 '나'의 폭력으로 인해 잠시 아프게 일그러져 보였던 것일 뿐, 본질은 아름다움인 채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의 첫사랑임을 알게 된다. 과거, 다시 말하면, '내'가 살아온 유년시절, 그 시절이 바로 '나'의 첫사랑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살아가게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많은 불빛들은 언젠가 그 빛을 꺼뜨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면 알 수 있다. 그 빛은 찰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안에 그대로 살아 반짝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식어버린 나뭇등걸의 잿더미 곳곳에 살아있던 그 불빛, 그 불씨들은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언제든 다시 지펴질 수 있는 것임을. 첫사랑의 황금빛 찬란한 그 빛은,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다.
내가 만약 이 소설의 알레고리 부분을 시대적 소재를 통해 변형한다면, 00년대에는 타임캡슐, 10년대에는 길고양이, 20년대에는 향후 미래도라는 소재를 사용할 것이다.
필자는 2001년생이라 00년대 초반에 대한 기억이 없다. 따라서 기억이 나는 건 5-6살, 어린이집을 다닐 시기의 기억 정도이다. 이때는 경기도 부천에 살 때였는데, 어릴 적의 모래 놀이터는 어딘가쯤을 파헤치면 누군가 묻어놓은 추억, 보물, 상처, 그런 것들이 숨겨져 있는 미지의 땅이었다. 떡볶이를 사 먹을 수 있는 500원짜리 동전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호미를 들고 놀러 다니며 매일 놀이터에 구덩이를 팠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구덩이를 매일 파다가, 7살 유치원을 졸업하게 될 즈음, 서로 다른 초등학교를 배정받으며 타임캡슐에 가장 소중한 물건과 20살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써 보고, 친구들과 한 구덩이에 그 타임캡슐을 몰아넣고 묻어둔 기억이 난다.
나 같은 경우에는 팽이 하나와 딱지를 넣었고, 다른 친구들은 여행에서 얻은 외화를 넣거나, 정말 재밌게 본 만화책을 넣기도 했다. 그리 잘 사는 동네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징징대며 수도 없이 많은 장난감과 만화책을 사 달라고 하며,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나중엔 결국 쓰레기가 될 고가의 장난감을 마트에 갈 때마다 사 달라고 조르며 부모님의 노동의 수고로움과 아름다움을 수도 없이 까내렸을 뿐이다. 비록 그게 부모가 자식에게 행하는 사랑의 표현 방식이라고 할지라도.
2012년부터 서울에서 쭉 살면서, 정작 20살이 되고 나니 이 기억은 이미 한참 퇴색된 뒤였다. 그리고 나서는 서울에 돌아다니는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기 시작했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고, 함께 놀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길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밥을 챙겨주며, 어느새 사람들은 고양이를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너무나도 쉬웠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네 발 달린 동물의 귀여움에 취해서든, 본인의 결핍을 동물로 채우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심이든, 하나의 생명을 구한다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하며 자유로운 존재인 고양이를 구속하려고 한 것이다. 그 고양이가 따뜻한 집에서 편하게 살기를 원하는지, 차가운 골목을 누비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쓰레기를 뒤지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그 중 무엇이 고양이의 행복인지 인간으로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2020년이 되고, 필자가 20살이 된 올해.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신입생이 되었다. 대학교를 입학하기 전에는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잘 몰랐고, 일본어를 잘 했기 때문에 대학교 생활을 편하게 할 생각으로 일본언어문화학부를 지원했다. 그리고 막상 대학생이 되고 나니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갈피도 잘 잡히지를 않고,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 따위는 코로나19라는 질병에 의해 하나도 없었다. 예전에 책으로 독학하거나 인터넷 강의로 듣던 일본어나 일본문화보다 한참 재미없는 수업들을 사이버강의로 들으며 무력감만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인간관계는 친구들이 대부분 재수를 하고, 전 여자친구는 삼수생 생활이 힘들다며 이별을 고한 덕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대학생활을 하지 못하니 새로운 인간관계도 생길 겨를이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고통스러운 시기는 내 미래도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에 충분했다. 마치 소설 속에서 태양을 볼 수 있게 해준, 유리에 그을린 그을음처럼.
00년대에 내가 소유하고 싶던 장난감, 10년도에 내가 소유하고 싶던 길고양이, 이 모든 소재들은 빛나지만 내가 소유와 쟁취를 위해 거친 폭력으로 아름다움과 소중함, 정의로움을 깨부수고 조잡한 더러움과 추악함만이 남아있도록 만든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들을 제시한다. 새롭게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유지하도록 할 수 있게 해주고, 나의 폭력으로 인한 더러움과 추악함은 적어도 옛날에 비해 덜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앞으로를 살아가면서 이전까지 깨달은 모든 것들을 지켜나갈 자신은 없다. 무너진 나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져갈테니까. 하지만 그 때의 찰나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면서 그걸 유지하고자 노력한다면, 나의 폭력으로 인해 부서진 아름다운 과거에 대해 수없이 반성하고 용서를 빌며, 미래도에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도록 설계할테니 말이다. 그리고 20년 후에 어느 정도 더 그려진 미래도에는 20년 전엔 일그러졌지만 그때에는 본질적으로 최선을 다한 아름다움으로 남은 지도가 그려져 있길 바란다.
첫댓글 "내 안을 충만하게 메운 그 따뜻한 느낌. 나는 그게 사랑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어", "부서진 아름다운 과거에 대한 용서 ", "용서를 비는 편지를 써 내려가며 과거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음을 느낀다", "20년 후에 어느 정도 더 그려진 미래도에는 20년 전엔 일그러졌지만 그때에는 본질적으로 최선을 다한 아름다움으로 남은 지도가 그려져 있길 바란다."
부서진 과거도 때묻지 않으면 아름다운 자연과 같을 것 입니다. 용서가 더 큰 저력으로 용솟아서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게 피워나가길 기원합니다.
고운 글 개천절開天節 날에 감사히 열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