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누리길 두 번째길 김포 두 번째 길 - 조강철책길
종점
시작점
2022년 3월 6일 일요일 흐림
글쓴이와 아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한강 하류 끝의 한강 물줄기를 조강(祖江) 즉 할아버지 강이라 했다. 영양분이 풍부해 많은 생명이 살아 넘쳐 그 넉넘함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의미에서 그렇게 이름했다. 분단 이전에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앞에 조강나루터가 있었다. 이곳을 기념하여 조강 철책길이라 이름했다.
문수산성 동문에서 시작한다.
문수산성은 강화 갑곶진(甲串鎭)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이다. 1694년(숙종 20년)에 세웠고 명칭은 이미 신라 혜공왕 때부터 전해져 내려 왔다고 한다. 산성은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길은 꾸준하게 문수산성 성곽을 따라 이어진다. 원래 난 길을 멀리하고 일부러 우측에 이어지는 성곽을 따라 걷는다. 산줄기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성곽은 문수산을 수호하는 용같다
곧이어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팔각정에 도착했다.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보임과 트임은 압권이다. 강화대교도 보이고 강화를 포함해 강화도 북쪽의 산과 들판이 손에 잡히고, 임진강과 예성강이 합쳐진 조강과 강화해협이 지천이다.
북쪽 바다 건너 북한 땅도 선명하게 다가온다.
문수산성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 외세의 침략에 맞서 격전을 치렀던 곳 중 하나였다.
문수산성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잘 보존되어 있다.
성벽 위에서 바라보면 한강이 물줄기도 감탄을 자아낸다.
드디어 홍예문이다.
옛 지도에 따르면 문수산성에는 성문이 7개 있었다. 문루(門樓)를 갖춘 남문,서문,북문이 있었고 아문(亞門)이 4개 있었다.
암문(暗門)이라고도 부르는 아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해 적의 눈을 피해 사람과 가축이 드나들며 양식을 나르던 곳이다. 4개의 아문 중에서 현재는 동아문(東亞門)과 이곳 남아문(南亞門)만 남아 있다. 남아문은 1993년 복원되었는데 안쪽은 사각형이고, 바깥쪽에 무지개 모양이다 그래서 무지개를 뜻하는 한자어를 차용해 홍예(虹霓)문이라 했다.
원래 평화누리길은 홍예문에서 우측으로 나가 곧바로 산 아래로 떨어지지만, 우리는 왕복 800m 전방에 있는 문수산 마루에 올랐다가 되돌아 오기로 했다.
문수산(文殊山) 마루(376m)에 올라서니 복원된 장대(將臺)가 우람하게 서 있다.
문수산성 장대는 산성을 만들 때 같이 세워졌으나, 병인양요 때 불타버린 것을 2017년 5월 복원했다. 장대는 지휘관이 적의 동태를 살피고, 병사들을 지휘하던 곳으로 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강 건너편으로 북한 땅 황해도 개풍군의 산과 들판, 마을들이 손에 잡힐 듯 어른거린다.
임진강을 합류시킨 조강도 발 아래에 지천이고 조강리마을과 조강저수지도 산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오늘의 종점인 애기봉도 있다.
문수산 정상 북쪽 100m 지점에도 데크 전망대를 한 번 더 둘러본다.
이곳 전망대에서도 수려한 경관이 펼쳐진다. 한강, 임진강 하류와 북한 땅은 물론 김포의 산과 들, 강화도, 고양시와 파주시까지 아우른 풍광은 ‘김포의 금강’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다시 홍예문으로 돌아와 성문 밖 즉 이정표상 김포대학 방면으로 간다. 헬기장과 함께 하여 찾기가 쉽다.
숲길을 따라 걷다가 고막리 마을길로 접어든다. 이곳은 서울에서 가까워 기존의 마을주택보다 전원주택들이 더 많다. 산자락에는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평화누리길은 갈림길마다 안내 표지판이나 띠지가 있어 길찾기는 어렵지 않다. 포장된 길을 걷다가 임도를 따라 걷기도 한다. 문수산빌리지라한 곳을 왼쪽으로 버린다.
22번 도로를 가로질러 한남정맥을 지나는 고개 쌍용대로 고갯마루인 이른바 쌍용고개를 넘는다.
김포의 원래 이름은 검포(黔浦)였다 검포의 黔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의 儉과 같은 의미의 고대어로,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 신군(神君)이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조강리 마을앞을 지난다.
조강리 평화 쉼터를 지나서
우측으로 꺾인 농로를 따라 걸으니 조강저수지가 나온다.
김포군 양서면 땅이었던 지금의 양천구 공암진에서 회자되던 이야기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한 일화다. 고려 공민왕 때 김포군 양서면 양서리 살던 형제가 길을 가다가 황금 두덩어리를 얻어서 나누어 가지고 공암진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개곡리에 도착했다.
동생이 갑자기 형을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나자 황금이 이로운 물건이 아니라 판단하여 강에 던졌다. 형이 그 연유를 묻고 자신 또한 황금을 강에 던졌다는 이야기다.이른바 투금포(投金浦) 일화다. 길게 이어지는 농로를 한참 지난다.
오전에 흐리던 날씨는 어느덧 화창해졌다. 조강저수지를 지나 들판 가운데로 난 농로를 따라 걷는데, 철조망 너머로 북한 땅이 가깝다. 조강리 들판 옆 철책선 옆으로 한강하류가 흐르고, 강 너머가 바로 북한 땅이다. 평화누리길 중에서도 북한 땅과 가장 가깝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들판을 지나 외딴 곳 민가 앞마당을 지난다 조금은 미안하다. 젊은 주인이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기 앞마당을 남들이 지나가는 것이 싫을 법도 한데 ,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인생을 초월한 눈치다.
고구려 시대에는 검포현, 통진현, 양천현 3개 현이 있었으나,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검포현에서 김포현으로 개칭했다. 전국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지명이다.산길을 따라 묘지를 우로하고 높지 않는 애기봉 옆 개곡고개를 넘으니
평화누리길 두 번째 길 끝에 닿는다.
버스타러 가는 길에 한재당(漢齎堂)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평화롭게 서 있다. 느티나무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새들은 날마다 한강을 건너 북한 땅을 오고 가는데 우리는 언제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까? 철조망을 조만 간 걷어냈으면 좋겠다.
참고로 쇠 금(金)이 지명으로 불릴 때는 한강 이하는 김으로 발음하고
cf: 김천(金泉), 김포(金浦), 김해(金海)
한강 이북은 금으로 발음한다
cf: 금촌(金村), 금화(金化), 금주(金州)
2코스 종점에서 하성가는 마을 버스 24번을 타도 되지만 시간이 안 맞아, 여기서 조금 걸어서 한재당을 지나 축사를 건너
개곡 보건소 앞에서 7번 버스를 타고 김포까지가서 차량회수를 한다. .
10.6km (문수산 왕복 0.8km 포함 )
걸은시간 3시간 26분 14초
걸음수 21,313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