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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졸업 50주년 기념 제주행 부부 여행기(2/2)
2023. 8. 3
(1부에 이어 계속)
<4/5일 셋째 날과 또 발생한 강제숙박 사건>
제주에서의 공식행사 마지막 날이 밝았다. 어째 비가 어제보다 더 오는 듯 했고, 날씨도 봄날답지 않게 으스스 했다. 부산행 귀로 비행이 예정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을 때를 대비해 집행부는 비상대책을 논의하며 여러 문제해결책을 강구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일단 비가 계속 내리니 올레길 탐방은 비가 그칠 것 같은 오후로 미루고 오전에는 ’살아있는(Alive) 박물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이 플랜 B는 대성공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나는 첫날 개최행사장에서 짧게 만난 원익법사 부부와 서울에서 한번 더 만날 주말 날짜 확인하느라 법사에게 이른 아침부터 방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몇 번 시도 끝에 연결이 되어 일정을 맞추어 보니 서울에서의 추후 만남은 거의 불가능했다. 아쉬움을 잔뜩 품은 채 아침 식당에서의 같은 테이블 조식타임으로 그것을 달래야 했다.
<법사부부와 조식장에서>
식당에서 법사부부와 우리부부가 뷔페 식사를 같이하며 최근에 지내왔던 근황들을 서로 교환했다. 와이프들끼리는 금방 수다 모드로 들어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법사와 나는 그 단계까지는 가지 못한 채 어째 초장에는 조금 공식적인 모드에서 대화가 펼쳐짐을 감지했다.
법사 역시 그리 느꼈는지 나의 이 미세한 부자연스러움을 풀어주려 편안한 대화체로 시종일관 말을 걸어주었다. 한국에서의 일정을 묻고, 이번 제주여행에서의 소회를 교환하면서 남은 일정 잘 보내자고 격려하며 제주호텔 만남을 이 아침식사 동석으로 마칠 수 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만나 더 편안한 모임을 가질 수 없음을 서로 아쉬워하며 나는 한국 방문 다른 친구들과도 뜻깊고 알차게 보내고 가라고 진심으로 기원했다.
<셋째날 코스 바뀐 버스 안에서>
우리 부부는 호텔방을 나와 어제와는 다른 버스에 올라타 와이프가 원하던 탐방코스에 끼어들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 원래의 첫 방문지 탐방을 오후로 미루고 정회장이 소개한 ’Alive 박물관‘으로 첫 행선지로 정해 찾아갔다. 본 박물관은 국내 최초로 ‘착시미술’을 도입하여 미디어, 오브제 아트 등 다양한 영역을 접목시켜 탄생한 신개념 놀이의 체험 전시관이라 했다.
<얼라이브 박물관의 외관>
<박물관 내부의 고릴라 트릭>
<화폭 튀어나온 그림 속 인물>
트릭아트, 디지털아트, 오브제아트, 스컬쳐아트, 프로방스아트 등 다섯 개의 착시체험 테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각의 테마 속에 직접 들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펼쳐진 유명 오마쥬 작품 속에서 방문객은 각자 유머러스하거나 짐짓 근엄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코스를 따라갈수록 흥미가 고조되었다.
<공룡 아가리에 들이대다>
<조스 아가리 안에서도>
<허만 멜빌의 백경(흰고래) 같은 이미지의 거대 문어 옆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이미지의 그림 앞>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이미지의 그림 앞에서>
<같은 그림 앞에서 부창부수의 예를 다하는 박모>
나와 마누라는 각자의 관심폭에 따라 배경화한 작품들 앞에 서서 기념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는 고흐의 유명 그림들과 영화 쥬라기 공룡과 죠스 앞에서 포즈를 취했고 와이프 역시 자기 맘에 든 작품이나 공간에서 폼 잡고 사진을 찍게 했다. 고흐의 그림 중 ‘빔의 카페 테라스’와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작품의 분위기에 푹 빠져 우리 둘은 가장 오래 머물며 기록 사진을 많이 찍었다.
<마법의 성 앞에서>
<하얀 거울방에서 조신한 여인인 척>
<버거운 서양 인어 여인을 양 옆에 엉거주춤 끼고>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올레길 코스로 바로 접어들어 여기 오기가 불분명했을 수도 있었는데 비 때문에 이곳을 첫 방문지로 바꾼 것이 아주 멋진 선택지라고 할 수 있었다. 내게는 셋째날 방문의 하이라이트라 여겨졌다.
박물관을 나와서는 메뉴가 고등어 회라는 점심 식당으로 향했다. 빗살은 여전히 거셌다. 부산에서 단체비행으로 예약한 부산 팀들은 아무래도 오늘 예정대로 돌아가기는 글렀다고 체념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우리부부는 별 생각없이 하루 더 묵고 4/6일 12시 서울행 비행기로 예약해 놓았다. 추가 숙박비 6만원 정도를 지불하면 된다기에.. 그런데 단체로 예약하고 온 부산 친구들이 4/5일 저녁 비행기로 떠나지 못하면 이 날 저녁도 전날처럼 호텔 로비에서 화기애애한 방담 자리가 마련될 줄로 알았다.
<셋째날 점심 메뉴로 채택된 고등어회 정식>
아무튼 부슬부슬 비내리는 와중에 고등어 회집에 도착해 여러 친구들과 함께 별미를 만끽하며 시장기를 해소했다. 나는 작년 독일유학 친구들과 같이 간 욕지도 2차 방문 때 싱싱한 고등어회를 맛본 바 있어 이 메뉴가 낯설지 않았다. 내 앞에는 오랫동안 못 본 한상훈군 부부가 앉아 그동안의 안부를 교환했다. 이 친구는 90년 대 중반 독일에서 귀국하자마자 나를 재경동창회 총무로 추천하여 전후임의 포지션 속에 딱 1년 같이 일한 인연이 있었다.
당시 내가 현대경제연구원에 다니다 IMF 금융위기로 방출되어 울산 현대중공업으로만 가지 않았으면 더 함께 지내며 인연을 맺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해 항상 아쉬움을 품고 있었다. 상훈이도 그리 헤어졌던 나와 25년 만에 재회한 것이 반가왔던지 두 와이프들 앞에서 “일마 이거 또라이 변태 천재야!” 하며 분명 잘못 입력되었던게 틀림없었을 내 품평을 좀 고조된 목소리로 쏟아 내었다.
하도 정색을 하고 계속 밀어붙이듯이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전하자 ‘내 어디에서 또라이 변태적인 면을 봤느냐’ 하고 반문해도 으하하하 거리며 여러 경로를 통해 다 들은 바가 있다며 소스는 알려주지도 않고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하는 식이었다. 졸지에 초면의 상훈이 부인 앞에서 ‘또라이 변태지만 괜찮아!’ 하는 이미지로 낙인찍힐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무개성의 물에 물탄 듯한 인물은 아니라는 평가로 받아들여 한참 올라온 이 친구식 반가움의 표현을 그냥 허허 하며 방치하듯 받아들였다.
<송악산 올레길 출발지>
<송악산 표지석 앞>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타니 빗살은 좀 약해졌지만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다. 차는 달려 마누라가 그리도 가보고자 한 바다를 끼고 가는 송악산 올레 코스에 도달했다. 비는 그저 흩뿌리는 수준까지 내려와 우산을 끼고 가면 충분히 걸어다닐 수 있어 보였다. 나는 그냥 혼자 명상을 하며 걸어보고 싶어 와이프와 거리를 서너발치 두고 앞서 걸어나갔다.
<절경을 감상하며 가는 송악산 올레길 코스>
코스는 와이프가 탐내할 만큼 멋진 정경들로 꽉 차 있었다.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니 송악산 올레길은 시작과 끝이 같은 순환형 걷기 코스로써 약 2.8Km이고 주파하는데 총 1시간 40여분이 소요된다고 했다. 송악산 주차장을 출발해 얕은 언덕을 다 올랐을 때 눈 앞에 펼쳐진 풍경들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산방산을 지나가는 여객선>
<올레길 나무계단 위에서>
푸른 바다 뒤로 산방산, 한라산 그리고 형제섬이 두둥실 떠 있고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여객선까지 탄성을 지르게 했다. 그 풍경을 뒤로 하고 올레길로 들어서면 걷기 편한 나무 데크로 된 길이 나타났다. 나는 모처럼 맞이한 이런 순간을 누군가에게 감사해 하며 뒤에 따라오는 마누라의 존재도 잊은 양 나홀로 걷기를 계속했다. 말 그대로 일상의 때를 벗게 해주는 치유의 힐링길이 맞았다.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 데 저 앞에 나와 같은 마음을 품고 혼자서 느긋한 수행자처럼 걸어가던 이유근군을 발견했다. 이 친구와는 예나 지금이나 깊은 인연은 없었으나 한번씩 27 야구팀 시합 때 동료선수로 안면을 튼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은 같은 방랑자로써 바로 의기투합하여 서로 근황을 교환하며 경관이 좋은 곳에서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하는 타임을 가졌다. 나무 길이 없어지고 큰 길이 나타날 무렵 마누라가 따라와 뒤에서 부르기에 이 친구와 작별을 하고 박모와 남은 솔잎 깔린 푹신한 소나무길을 동행했다.
<송악산 외륜 소재 일제 동굴진지>
같이 오다보니 제주도 만의 독특한 지질 형태가 나타났고, 일제 때 만들어졌다는 450여개소의 동굴 진지가 나타나 아, 일제가 미군과의 2차대전 말미에 제주도 역시 유황도나 오키나와 옥쇄전 같은 무대로 삼으려고 이런 짓거리를 했구나 하고 처음 그 싸가지 없는 의도가 실감되어졌다. 지금까지 내게 제주도는 1948년 이승만 정부군에 의한 4.3 제주민 토벌전의 아픈 역사적 기억 밖에 없었는데 그 앞에 일제의 분탕 야욕이 숨겨져 있었다는 게 새롭게 일깨워졌다.
짧지만 바다 내음과 솔 향기가 뒤섞인 소나무 길이 끝날 무렵 저 아래 주차장이 보이고 처음에 떠난 출발 장소에 다시 도착했다. 비는 그 사이 많이 멎어있었다. 대합실 같은 크기의 커피샵이 보이기에 들어서니 먼저 온 일행들이 끈처에 앉은 사람들과 환담하며 커피를 주문해 마시고 있었다. 우리도 자리 난 데에 앉아 커피 한잔 하며 속속 들어오는 남은 일행을 기다리며 사흘 째 공식일정이 무사히 마쳐진 것에 안도감과 흐뭇함을 느꼈다.
<송악산 올레길 출발지에 있는 임브레쏘 커피하우스>
그런데 부산 동기들이 애타하던 부산행 비행기가 저녁 7시에 극적으로 떠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부산 집행진의 실날같은 희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행한 예약 노력이 마침내 빛을 발해 많은 동기들이 안써도 되는 강제숙박 비용을 내지않고 딱 맞춰 부산으로 귀가하게 만든 것이었다. 곳곳에서 환성을 지르며 귀가행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됐음을 자축했다. 알고 보니 이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행운을 기대하며 아침에 호텔에서 이미 체크인을 하고 나왔다 했다.
부산행 비행기가 뜨면 김포행 비행기도 뜨는 법, 서울행 동기들도 아침에 체크인 다 하고 나왔는지 버스에서 제주공항으로 가는데 별 거리낌이 없었다. 내일 골프 약속이 있는 소수의 친구들만 오늘 밤 하루 더 호텔에 묵는 모양이었다. 나는 골프 패에 끼일 것도 아니면서 그냥 별 생각없이 하루 더 묵는다고 체크인도 하지 않고 털래털래 아침에 나왔던 것이었다. 우리를 내려 줄 글로스터 호텔에 도달하자 우리 버스에서 내리는 이는 나와 마누라 둘 뿐이었다.
호텔방에 들어오자 갑자기 우리만 오늘 못간 고립감이 말도 할 수 없게 들이닥쳤다. 마누라는 칠칠치 못한 서방의 일처리 덕분에 자신이 하릴없이 제주에서 아무런 의미없이 하루 밤 더 묵게 된게 못내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 나는 왜 이리 세상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의사결정도 제대로 못하는 칠푼이란 말인가 하고 내가 한참 원망스러웠다. 저녁은 먹어야 했음으로 마누라가 맛집을 찾는다고 네이버 검색을 했고 한 두군데 후보지를 보여주었다.
<이 동네에서 명성이 있다는 한식전문점 화목원>
후기 평이 괜찮아 보이고 호텔에서 도보로도 갈 수 있는 한식 정식 전문집이 그럴 듯해 우리 둘은 갑갑한 마음도 떨칠 겸 네이버 위치정보 앱에 의존하며 낯설어 보이는 제주의 밤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해당 음식점 앞에 다다르자 외지에서 수학여행 온 듯한 여고생들이 단체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별 특징없는 인당 17,000원짜리 옥돔 정식>
어째 맛집 같지는 않다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는데 그 예감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주문해 나온 음식들은 드넓은 홀 공간처럼 대량생산으로 찍어낸 제품 같아 정성과 사람의 따사한 손맛 같은 것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그냥저냥한 맛이었다. 서로 갓떨어진 처지의 일진 속에 저녁 한끼 뭐 그리 큰 기대를 하는가 싶어 가성비 시원찮은 음식(기본 정식 인당 17,000원)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자조 속에 받아들였다.
돌아오는 길에 비가 제법 부슬거렸지만 나는 우산을 펴지 않고 마지막 제주의 밤거리를 서둘러 스캔하듯 둘러보며 성큼성큼 걸었다. 비 맞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마누라는 우산을 받친 채 쪼작쪼작 뒤에서 청나라 전족 여인처럼 걸어왔다. 한 20여분 걸어 우리 호텔 로비에 도착했지만 동기들로 북짝북짝 붐빈 어제 밤 같은 분위기는 썰물에 싹 실려간 듯 사라지고 낯선 숙박자들 만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호텔방에 들어오니 밤 9시가 조금 넘었지만 뭐 TV보고 시간 보내기도 싫어 화장실에서 샤워 한번 하고는 각자가 좋아하는 유튜브 방송 약간 챙겨보다 쓸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마누라는 평생 꾀스럽고 야물딱진 캐릭터와는 거리가 먼 서방이 벌여놓은 이 어름한 상황에 ‘과연 김재미이 답다. 장사 한두번 하나..’ 하는 체념적 달관 속에 어쩌면 속으로 즐기는 척 자중자애하는 듯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불면증 타령 같은 것은 없이 우리 둘이 금방 잠이 잘 드는 수면 모드를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아침에 기상해서 이제야 떠난다는 안도감 속에 샤워 하고는 같이 식당에 내려가 어제그제의 북적거렸던 분위기와는 달리 떨거지 숙박객들만의 조촐한 식사타임을 가졌다. 올라와서 짐도 이곳을 빠져나간다는 기분이 들어 비로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싸게 되었다. 시간이 남아 침대정돈도 해주고는 청소 메이드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한 삼천원을 팁으로 올려놓고는 첵아웃을 하려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숙박비는 도착한 날 미리 6만원을 카드결제했기에 따로 드는 비용은 없었다. 우리는 제주공항까지 버스로 가려 했지만 잘 오지 않아 택시로 가려만 했다. 그런데 호텔 앞인데도 택시가 잘 오지 않는 게 아닌가.. 지나가던 택시 잡으러 용 좀 썼지만 여의치 않았다. 할 수 없어 로비 카운터에 한 대 불러달라고 하니 그때서야 예약택시 한 대 잡아 겨우 공항까지 갈 수가 있었다. 김포행 비행기에 올라타니 3박4일의 제주 행사가 주마등처럼 떠올라졌다. 박모 역시 마지막 날 어리버리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가성비 슈퍼 갑으로 모처럼 제주 다녀온 것에 그제서야 흐뭇해 했다.
<이번 여행에 대한 느낌 소견>
지난 30주년 홈카밍데이부터 참석해 40주년을 거쳐 이번에 가진 50주년은 이제 우리 군번들에게 온전하게 다녀올 수 있는 그 어떤 변곡점 같은 타이밍임을 일깨워주었다. 이번에 함께 참여한 우리 동기들도 같은 생각을 많이 가졌지 싶었다.
지난 40주년 때의 대마도 여행도 멋있었지만, 이번 제주여행은 10년 후에도 같은 감흥을 갖는 여행으로 이어질까에 대해 큰 회의감이 들기에 더 귀하고 마지막 기념비적인 여행으로 우뚝 설 것이라 느껴졌다. 경부 양쪽 집행부의 긴밀한 조율 협조 속에 집단지성을 담아 발굴한 여행 프로그램도 알찼다. 첫 날 오프닝 행사도 대단했지만 이틀 간에 걸친 올레길 코스들은 멋들어진 기획의 소산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제 돌아오는 60주년 행사를 타성적으로 기다리기보다는 한해 한해 보내기가 점점 불확실해져 가는 우리네 삶에서 최소 격년제의 단체행사 모임을 개최하는 것은 어떨지 싶다. 대규모 비용이 드는 오프닝 행사는 축소하고, 제주 올레 여행같은 중국이나 일본, 대만, 베트남 코스들을 많이 개발해 참가자 부담액을 좀 더 늘려 가는 방안들을 모색하는 것에 중지를 모아 실행했으면 한다.
(끝)
첫댓글
제주를 몇번 다녀 봤지만,
내가 남쪽 바닷가 섬놈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오래된 시절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홀로 여행 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제대로 즐기지 못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즐기는 방법을 몰라서 그랬는지
별시리 별다른 큰 감흥이 없었는 것 같았는 데,
김박사의 섬세한 여행기를 읽으니
저번에 연골문제로
한다리와 목발로 세다리로 걷는 신세 땜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새삼스레 아쉬워 지내요
우짜든지 오래도록 건강하소
수년전 서토거사한테 받은
노가리 빚 갚아야 될 낀데...
옥자가 강변으로 다시 이사가기 전까지는 필히 다시금
회동의 기회가 생기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슴미다.^^
옥도사, 연골이 안좋다니 걱정이 많이 되외다. 나도 무르팍에 그런 조짐이 있어 비비고에서 나오는 포장 도가니탕 구해 치료약이라 생각하고 먹고 있네요.
제주도 틈나면 부인과 함께 다녀와 보소.. 일정코스 짜는 데 이력이 있는 양반으로 알고 있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살펴보고 올 것임다.
현장 취재를 방불케하는 현장감이 生生합니다.
수십 년 회포를 풀기에는 너무나 짦았던 만남
길영공과 환담했던 허니문하우스의 커피카페집이 다시 떠오름다. 와이프에게 계속 봉사하며 뿌듯한 부부지정 많이 누리기를 기원하네요.
읽는 중, 한상훈 동기와의 재회 장면 서술이 아주 눈에 띄는군요.^^
그와는 한 반으로 있은 적이 있고..언젠가 그가 동기회를 맡아 일을 한 적이 있으며
또한 잘못된 기억인지는 몰라도..건축 설계관련 전문가로..지금도 기억에 명확한 동기인 바..
얼굴이 훤하게 잘 생긴데다.. 평소 아주 젊잖고 식견높은 친구로 알고 있기에
언제라도 늘 만나보곺은 동기-
서토도 한상훈이를 쫌 아는 모양이구료.. 가만히 생각하니 3학년6반에서 같이 다녔을거란 추측을 하외다. 나는 앞줄에서 법사와 눈을 맞추며 보냈는데 서토는 뒷줄에서 한소장과 놀았던갑소.
말마따나 전공도 건축학으로 했던지 90년 후반 당시 설계사무소 소장하고 있습디다. 당시 르네상스 건축양식 답사한다고 이태리 여행도 제법 했다고 하데요. 이 아재도 수년전 나처럼 암투병을 했지만 무사히 헤쳐나와 많이 유쾌하고 감정고조가 일상화된 호쾌한으로 변모된 듯 여겨집디다.
한상훈이 아마도 김박사를.. 잠시 다른 인물과 혼동한 것이 아닐까 상상됩니다만..
하여튼간 아래와 같은 내용의 서술 속에서..자신의 유연한 내면 심리를 세련된 묘사로
적어내는 김박사의 표현력에 큰 존경심을 다시금 표하게 되는군요.^^
"졸지에 초면의 상훈이 부인 앞에서 ‘또라이 변태지만 괜찮아!’ 하는 이미지로 낙인찍힐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무개성의 물에 물탄 듯한 인물은 아니라는 평가로 받아들여 한참 올라온 이 친구식 반가움의 표현을
그냥 허허 하며 방치하듯 받아들였다"
서토가 어줍찮게 쓴 내 묘사 문장들을 한번씩 무슨 특별한 문장처럼 난데없이 띄워주니 그저 민망하면서도 고맙기만 하요. 글 자체보다 나에 대한 브로맨스적 애정이 넘쳐 한번씩 요런 헷까닥함이 드러나는 듯 하외다. 그럼에도 순정파 애독자 서토를 위해 가짜 감정의 묘사는 결코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헤봄다..
제주도 다녀온 게 벌써 옛일이 돼 가네요.
재민공과 함께 시간 많이 못 보낸 것하며 몇 가지가 아직도 좀 아쉽네요.
언제 학업(?) 마치면 어부인 손 잡고 미국 함 오소. 여기도 한 번 쯤은 와 볼만 하오이다.
미국 한번 들릴 꿈은 오랜전부터 꾸어왔으나 여건이 그리 쉽게 다다르지 않네요. 마누라와 한번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소망을 품고 계속 그 기회를 엿보겠심다. 계속 살다보면 언젠가는 올거라고 믿네요.
사실 나는 2003년 4월 현대중공업 시절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래학회 참석이라는 건수를 사내 동료 조박사와 만들어 한 일주일 간 다녀온 적이 있네요. 한국 돌아가는 길에 LA공항에서도 4시간 머물렀으니 여기에도 잠깐 들린거라 혼자서 여김미다.
마누라는 서부보다 자기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많이 접했던 뉴욕 등 동부를 간다면 먼저 선택하겠다고 방방 뜨네요. 아무튼 양쪽을 다 둘러볼 방안을 천천히 강구해 보겠심다. 빠른 시일 내는 아니겠지만..
제주에서의 2박 3일간 있었던 일들이 새롬새롬 합니다
김작가는 오프라인에서 만날 때는 과묵하고 성실한 생활인 같은 분위기만 풍기던데 어찌 그리 내면에는 치열한 예술혼을 구비하고 있는지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참말로 대단하다 여겨집디다. 언제부터 사진예술에 그리 천착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가 궁금함다.
15년 전에 떠나신 우리 부친도 공무원 생활로 가족을 부양했지만 중요 취미로 있어보이는 사진찍기에도 열중했었네요. 그 덕분에 일본 글로 된 사진전문 잡지들을 많이 소장해 내 중고교 시절 거기에 수록되어있는 누드모델들을 한참 꼴려가며 많이 감상했심다. 마치 플레이보이지 대하듯.. 하지만 체모들은 용케도 안보이게 처리해 그 안타까움에 벌벌 떨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름다.
풍경전문인 김작가는 벗은 여체를 대상으로 한 사진찍기에는 한때라도 몰두한 적이 없능교?..
@김재민 김박사님
나는 사실 예술적인 소질이 없다고 평소에 나를 자평하고 있심다.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부터 내 그림이 벽에 붙어 본 적도 없고 내 노래를 두 번 들을려고 친구들은 안합디다. ㅎㅎㅎ
사진은 내가 직장 생활을 할 때에 우리 직원중에 사진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조언을 듣고 카메라에 관련된 장비를 마련하고 퇴직후 여유 시간에 촬영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절대로 내 사진이 칭찬을 많이 들을 만큼 잘 찍는 것은 없다오.
그러나 다른 사람 사진은 누구보다도 많이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 그게 조금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누드 사진은 나와 사진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누드도 해보자고 합디다.
또 사진가 협회에 가입을 할 때 공모정에 응모를 해야하는데 누드사진으로 많이 응모를 했었지요.
그래서 시작은 했는데 찍다가 보니 망구 사용할 때가 없는 사진이 누드입디다.
내사진을 인화를 해서 어디에 줄 수도 없고
애들이나 마누라에게 누드 사진을 보여주면 나는 그날부로 카메라에서 손을 놓아야 할 것이 뻐언 합디다.
그래서 1~2년 정도 하다가 그 쪽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지요.
일본 사진 잡지의 누드 사진을 보고 꼴린다고 하면 플레이 보이지
@김재섭 너무 겸손한 발언임다. 내재된 예술혼이 없다면 일반인과는 다른 명작 사진들이 연속해서 나오기가 힘들지요.. 친구 따라 강남갔다 대배우나 아티스트로 발돋움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교? 사진찍기에 몰두하는 예술적 열정도 남달라 보임다. 세상 하직하는 날까지 이 열정 세상사람들을 위해 베풀어주기 바람다.
누드 사진은 하다 말았다 하니 아쉽네요. 뭐 그쪽은 여건이 되는 독신자들에게 맡기고 김작가는 우리를 아득히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특별한 정경사진 제작에 여생을 바쳐도 태어난 큰 보람을 느끼고 가겠다 확신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