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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뒤로 걷기, 시간을 거슬러 읽어나가는 소설 독법
황현희 (문학평론가)
―이홍사의 소설세계―
1. 소설의 출구를 찾아서
며칠 전 아들애의 병 문안차 길을 나섰다. 홈페이지를 검색하니, 서현역 2번 출구 · 1번과 4번 출구를 나가서 15번 버스를 타라고 되어있다. 2번이란 번호에는 괄호가 쳐져있다. 이게 뭐야, 대체 몇 번으로 나가야 한다는 거야. 정말 요상하네 하는 생각을 했다. 역사가 백화점의 한 층처럼 되어있는 구조라 나는 더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리 저리 오가며 헤매다가 기어이 백화점 안내원에게 물었다. 나의 예상대로 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럼 그렇지. 내가 틀릴 리가 없지. 출구를 나서니 잔뜩 찌뿌린 날씨다. 비가 오려나. 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나올 때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서울 날씨도 흐렸었던가. 버스 승강장에 서 있은 지 오 분 여 정도 됐을까, 비가 흩뿌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바람까지 불고 으슬으슬 춥기까지 하다. 버스 도착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에 각 노선의 버스가 언제 오는지 계속 찍히고 수많은 버스노선의 번호가 연이어 바뀌고 있지만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는다. 버스 승강장 외에는 맞은편에는 주상복합아파트와 다른 아파트 건물만 보이는 삭막한 풍경에 눈 둘 곳이 그다지 없는데 비까지 흩뿌리니 마음이 오종종해진다. 버스가 연방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것을 보며 내가 탈 버스를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삼심여분, 드디어 15번 버스가 왔다.
국군수도병원 앞까지 가는 버스는 15번뿐이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올라탔다. 열 정거장 정도가면 되니 길어야 이십 여분이면 도착할 게다. 남편과 함께 몇 번인가를 들렀는데, 버스를 타고 가기는 처음이라 약간 불안했지만 아무런 의심 없이 버스를 타고 갔다. 그런데 한 십여 분 가까이 달렸을까. 버스는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듯하다. 버스노선도 대로 가는데도 이상하게 내가 가야 할 목적지와는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다. 이런 길은 아니었는데, 왜 분당 아닌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 같지. 가만히 있으면 아예 고속도로 톨게이트로 진입하는 것은 아닐까. 기어이 버스기사에게 물었다. 아저씨, 이 버스 국군수도병원으로 가는 게 아닙니까. 물어보고 타시죠. 반대방향에서 타셔야 하는데, 오십분 정도는 더 걸리겠네요. 어차피 그쪽 방향으로 가니까, 계속 타고 계세요. 이런 황당할 데가, 부드러운 인상의 버스기사가 그다지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아이가 기다릴텐데, 어쩔 수 없지.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고, 참 긴 여행이네.
비가 조금씩 흩뿌리지만, 내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참아준다는 듯 빗줄기가 가늘다. 차창 밖으로 보니, 약간 변두리인 듯 상가 건물 뒤로 야트막한 산이 둘러쳐져 있다. 무덤도 꽤 있다. 때로는 동무처럼 어깨를 겪고 있거나 때로는 홀로 있기도 하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이렇게 이웃하며 있는 거야. 죽는 거 별거 아니야. 그냥 삶의 어느 순간에 찾아온 손님 같은 게 죽음 아니겠어.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앉는 게 죽음이야. 낮게 엎드린 무덤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거 같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어언 십여년, 나는 더 더욱 죽음이 두렵지 않다. 부른다면 주저 없이 손잡고 가자. 미련없이 훌훌, 훨훨 날아가자. 어머니가 늘 나를 곁에 두기를 원하셨는데, 어머니 심심하지 않게 잘 놀아드리자.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나는 죽은 자의 집들을 정겹게 바라보았다. 마치 한 그릇 고봉밥을 얹어놓은 것처럼 무덤은 참 익숙한 풍경처럼 보인다. 무슨 이물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도 언젠가 돌아 갈 곳인데, 무에 두렵거나 낯설겠는가.
그나마 드문드문 있던 건물들도 시야 속에서 거의 지워지는 듯하다가 외진 빌라촌의 입구 로 들어선다. 차가 한 대 다닐 듯 말 듯 한 좁다란 길로 버스가 들어서는데 왼편으로 보니, 바로 눈 아래 단풍잎이 떠다니는 맑은 냇물이 흐른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참 예쁘구나. 거꾸로 탄 버스도 나쁘지가 않네. 약간 불안해하며 두리번거리는데, 판자촌이 얼기설기 모여있는 길의 끝까지 왔다. 버스를 돌려서 기사는 차를 세운 뒤, 내려서 담배 한 대를 문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고 기사는 출발시동을 건다. 버스를 돌려서 나오는데, 서서히 빗줄기가 굵어지다가 차창을 거세게 할퀴듯 사나워진다. 언제쯤 도착할까. 이제 제대로 가는 건가. 점점 승객들이 많아진다. 추레하고 후줄근한 차림새의 아주머니들이 올라타기도 한다. 차림새만으로 고단한 삶의 이면이 읽혀지는 듯하다. 풍요로운 도시의 속내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버스는 정확히 내가 탔던 곳의 반대 방향에 도착했다. 휴 다행이다. 아직도 이십 여분을 가야한다. 드디어 국군병원 입구에 도착했다. 도착하자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푸른 하늘이 간간이 보이고, 햇빛마저 비친다. 나는 이제껏 버스 안에서 비를 그었다.
2. 이홍사의 소설세계 속으로
이홍사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그의 소설의 출구가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했다. 마치 출구를 잘 알면 잘 도망갈 수 있으리라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아니다. 출구를 모르면 작가의 소설세계의 향방이 보이지 않아서이다. 거꾸로 탄 버스는 그러니까 내 불안의 일단을 보여준 아포리즘 같은 것. 이홍사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보다 앞을 보면서도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소설 속 서사의 맥락을 따른다는게 서정성의 뒤꼭지를 자꾸 따라가버리는 느낌이었다. 글의 리듬에 빠져들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가는 형색이 되어버렸다. 사유의 꼭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하는 강박관념이 나를 끈질기게 물고서 놓지 않으니 읽기가 버거워진다. 몸은 앞으로 가고자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당기는 느낌. 소설의 서사성을 찾아간다면서 서정성의 한 자락을 부여잡고서 빙빙 돈다는 느낌을 떨 칠 수 없었다. 링반데룽. 어쩌면 나는 출구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출구를 찾아간다는 것이 출구와 멀어지는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도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내 짐작대로 출구를 가정하고 망설임 없이 걸어가 보지만 기실 출구와는 점점 멀어져 소설의 향방과는 전혀 다른 길을 헤매는 것은 아닐까. 거꾸로 탄 버스는 결국 행복한 결말을 맞았지만 나의 소설읽기도 이런 결론에 도달할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읽어나갈 밖에.
이홍사의 소설이 지닌 모든 것을 더듬어 훑기란 역부족이니, 소설 속 아버지들을 뒤따르며 소설세계를 천착하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하다. 아버지란 삶의 좌표같은 존재니까.
내 생에는 좌표가 없다. 아버지의 부재로 좌표를 잃어버린 것이다. 나이는 들어가지만 아버지의 빈자리가 점점 더 크게 가슴에 부각되고 있었다. (『그 놈의 명령』)
아버지의 부재는 비단 가슴에 빈자리만 남기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메울 수 없는 삶의 빈자리가 되기도 한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세계의 중심같은 존재이기도 하기에,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기도 한다. 아버지의 부재는 중심의 부재이기도 하기에 과녁 잃은 활처럼 한 존재가 나아갈 삶의 지평을 깡그리 무너뜨리기도 한다. 삶의 한가운데 찍는 아주 뚜렷한 방점인 아버지를 잃은 모든 아들은 그러므로 불행하다. 물론 자신이 삶의 중심, 세계의 중심이 되면 별 문제이지만. 이 자리에 서정이 꽃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서사는 아버지의 존재를 불러들이는데서 시작된다. 아버지가 서있는 자리는 사유가 시작되는 자리이며, 존재에 대한 물음이 발화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만약 아버지의 부재를 방치하면 삶의 좌표가 흔들려 자신의 삶이 온전할 수가 없다. 작품집으로 엮어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최신작에 꼽히는 이 작품을 출구로 삼아 작가의 소설세계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홍사는 1997년 『잘난 배꼽』, 2000년 『高』 , 2003년 『아버지는 맞아도 싸요』, 2008년 『달빛여인숙』이란 작품들을 발표했다. 첫 작품집은 읽지 못해서 세 작품집에 실린 글을 중심으로 ‘아버지’란 좌표의 위치를 읽어보고자 한다. 「그 놈의 명령」이란 작품은 아직 책으로 묶여지지 않은 따끈따끈한 최신작이다. 카페에 실린 글들은 시간적 순서로는 사실 가장 뒤에 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출구 찾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앞으로 불러냈다. 우선 『高』에 실린 「高」를 살펴보자. 모름지기 작품집의 제목으로 삼는 작품들은 대부분 의미심장한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이야기는 내가 ‘서른이 채 못 되어 혼자가 된’ 고모할머니를 찾아가서 오랜만에 깊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다는 데서 시작된다. 할머니는 절집 아래 공양주 보살이 살던 집을 개조해서 살고 계신다. 할머니가 사신다는 중궁암은 내가 ‘각박한 인심에 부대끼고 신물이 나면 돌아갈 자리’로 생각하는 공간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이지만, 어쩌면 심처(心處)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자꾸만 그리로 쏠리는 공간이니, 많이 억지스런 비유는 아닐터.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나는 ‘마흔이라는 나이를 생의 반환점, 혹은 중간지점’으로 생각한다. 그 마흔을 맞으면서 나는 우울증 비슷한 것에 걸려, 월차까지 내서 쉬고 있다. 그러다가 나의 우울증을 염려한 C와 같이 영화관에 간다. 영화를 보던 중 나는 나와 버린다. ‘오줌이 마려우면’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진짜 방광이 터질 것 같아서다. 하여 변기 앞에 섰지만, 전혀 요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극장이라는 공간의 갑갑함이 싫어서, 자신의 마음 속이 한없이 갑갑하게 여겨져서 나와 버린다. 생업에 매달린 자신의 삶이 마치 상자 속에 꽉 끼인 존재처럼 여겨져서일까. 문득 ‘꿈에도 그리던 중궁암?’ ‘나를 벗고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름 간의 휴가를 받아 나는 ‘스스로가 원했던 고립’ ‘스스로가 원했던 해방감’을 찾아서 고모할머니가 계신 청국사를 찾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안절부절’ ‘전전긍긍’이다. 어디 섬으로라도 떠나야 할 것 같다.
저.... 지금 가야할 거 같아요.
지금? 아이구 이 풀숲에 앉은 새겉은 사람아. 자네 각시한테 들어서 알고 있네. 곧장 날고 싶쟈? 앉어있으면 곧장 불안헌가?(중략) 그래도 할매 옆에 하룻밤은 자고 가야지. 이 밤중에 보내놓고 내가 잠을 자겠는가?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빨리 날아서 이 골짜기를 빠져나가고 싶’다. ‘대설주의보를 빙자해서 족쇄처럼 채워진 할머니의 마음을 풀고자 했’으나 기어이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데 있다. ‘여자가 있다’는 것. ‘나만 알고 아내는 모르는 여자’가 있다. 당연히 결별은 정해진 것이었으나, 내 마음은 ‘B가 떠나간 쪽으로 바라보고 있다’. ‘다리’를 건넜는데도 나는 아직 마음은 다리 건너에 두고 왔다. 두 시간이나 걸었으나, ‘길 끝에 매달린 건 집’이다. 집은 길을 걷는 이유이자 집을 나서는 목적이지도 하다. 영원히 길에서 살아갈 듯 하지만 길을 떠나는 것은 다른 집을 마련하기 위한 몸짓이다.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이 갑갑해서 떠났으나, 또 다시 한 채의 집을 갖는다. 하여 길 끝에는 집이 없다. 비약하면 모든 집들은 길 위에 있다. 떠나간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딛고 선 현재의 시간은 나를 앞으로 밀어가는데, 고개를 뒤로 돌리면 영원히 집에 도달할 수 없다. 하여, ‘회귀본능’은 집을 가진 자의 비애다.
나는 하룻밤 고모할머니의 집에서 자다가 재래식 변소에 들른다. 변소에 들른 나는 ‘무심코’ 담배를 ‘붓삼아’ ‘허공에 대고’ 高라는 ‘글씨를’ 쓴다. 나는 소스라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오래된 습성 가운데 하나가 담배를 피시다가 무심결에 글씨를 쓰시는 것이었다. 옆에서 보고있던 어린 나는 손놀림으로 봐서 그게 무슨 글씨인지 짐작할 수도 없지만 아버진 획의 끝에 힘을 주고 또 어떤 부분은 유연하게 돌리는 모양새로 보아 분명히 한자였다. 생각에 잠길 때마다 아버진 버릇처럼 담배를 붓 삼아 글씨를 쓰시는 것이다. 논일을 하시다가 논둑의 쟁기에 걸터앉아서도, 긴 겨울밤 아랫목 비스듬히 이불을 베고 누워서도 글씨를 쓰시는 것이었다. 금세 연기처럼 날아가는 글씨를, 그리곤 이윽고 눈길로 당신이 쓰신 글씨를 감상하시는 것이다. / 나는 담배로 다시 高자를 쓰고 그 글씨를 감상한다. 高 자는 갓머리를 조금 누이고 사다리를 길게 해야 모양새가 난다./ 니는 하는 짓도 영판 너그 아부지다. /낮에 들었던 고모할머니의 말이 귀에서 풀어짐과 동시에 앉은 자리가 편안하게 여겨졌다. 천정이 낮은 변소 안이 푸근해지는 것이었다. 마흔, 나는 아버지를 닮고 있었다.
아버지는 회귀본능의 끝에서 나를 당기는 존재였던 것. ‘가벼움 속에 깃든 무거움’(「소설사냥, 그 퇴로」)이 아버지였던 것이다. 하여 아버지라는 존재는 ‘상상의 영역마저도 공유하는 부분’이 되고 ‘생각의 끝자락마저도 일치하는 데가 있는’ ‘내 가슴 속에 끊임없이 흐르는 강’이다. 때론 ‘유순하게 구비치며 흘러야 할 그 강은 내 가슴속에서 경화되어 멈추었다가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류하며 시시때때로 상처를 일구곤’ 하지만, ‘틈만 나면’ ‘내가 어루만지던 강’이 아버지다. 물론 아버지에게도 아들은 ‘그리움의 좌향’이자 ‘사고의 나침’(「흰 강」)이 가리키는 방향이기도 하다. 이 때의 아버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길고 깊은 강이다. 눈을 뜨고 있을 때나 눈을 감고 있을 때도 늘 나와 함께 하는 마르지 않는 강이 아버지라는 존재다. 아버지라는 강은 때론 추임새를 넣는 선생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언젠가, 월남에서 돌아와 작은 방에만 뒹굴던 큰형에게 아버지께서 쥐어주시던 손때에 닳아 매끈한 소고삐’와도 닮은 북채를 물려주던 추임새 선생. K교장이 제자에게 사기를 당해 자살했다는 소식에 추임새를 강조하던 선생을 회상한다. ‘아이들의 호흡(창자)을 제대로 못 읽으면 추임을 받게’된다는 선생이 ‘창자의 호흡을 제대로 읽지 못’(「삐걱거림에 대하여」)한 것일까. 나 역시도 목덜미를 맞은 아이가 고소하자, 발끈하며 ‘추임새를 오독’하는 실수를 하지만.
왜 나는 좌불안석(坐不安席), 쫓기듯 자꾸만 달아나고 싶은 걸까. 어딘가로 날아가고 싶은 걸까. 아마도 현실이란 무거움을 떨치기 위한 몸부림은 아닐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이 있다’ 가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탑의 깊이를 알면 가끔 탑이 말하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어. 높이 솟고 싶다고, 탑은 분명 상승 욕구를 지니고 있는 거야. 나는 생각했어. 탑에 날개를 달 수 없을까? 그러나 곧 그만두었지. 생각을 해 봐. 탑에 날개를 단다면 얼마나 우습겠어.(「태옥이가 탑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
탑의 깊이를 알면 탑의 높이까지 알 수 있을 터. 삶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상승의 욕구는 그만큼 강해지고 집요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무욕의 경지’를 위해 ‘무욕의 자궁’같은 ‘목관’(「너희가 부처의 보폭을 아느냐」) 속에 누워 열반을 꿈꾸지만 욕심으로 무거운 삶을 놓을 수 있을까. 아니지. 삶은 집착의 연쇄 속에 놓인 환이거늘. 모두 놓아버릴 수 있을까.
아빠라는 호칭은 어쩐지 부자간의 계단이 없는 수평적인 관계 같아 싫다. 아비는 아들을 내려다보고 아들은 제 아비를 올려다보는 계단, 참으로 적당하고 편안한 거리감, 아비와 아들 간의 거리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 삼지례라고 했던가? 비둘기는 나무에 앉을 때에 제 어미가 앉은 가지에서 세 가지 아래에 앉는다는 얘기를 떠올리며 내 아들에게 계단을 만들어 나를 두고 아버지라고 불러줄 것을 결정적으로 종용한 것은 삼사 년 전의 여름이었다.
‘네 살배기 준이 녀석에게 ‘아빠’ 대신에 ‘아버지’라고 불’리기 위해 ‘배달된 통닭을 빼앗아 냉장고 위에 얹어두고’ 아들에게 따라하게 한다. ‘통닭 한 마리보다 못한 아빠의 존재가치를’ 각인시키기 위해 ‘시위’한다. ‘저는 통닭보다 아버지가 더 좋습니다’를 복창하기를 요구하는 웃지 못할 희극을 연출하는 아비인 내가 어떻게 날개를 달고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겠는가. ‘아버지’라는 호칭 대신에 ‘아부지’로 불려지면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지만 아들은 기어이 한 마디 내뱉는다. ‘아부지는 맞아도 싸요! / 뭐, 뭐라구? 야, 이 새끼야, 너 뭐라구 그랬어? / 아버지는 맨날 맨날 술이 취하잖아요?’(「아버지는 맞아도 싸요」)라며 지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다 하는 아들. 아내의 바가지가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 쓴 아버지에게 일곱 살짜리 아들 녀석이 할 소린가 말이다. ‘아부지’라는 호칭만으로도 ‘어릴 적 석양빛 가득한 들길 가운데로 지고 돌아오던, 꼴망태로부터 흘러나오는 싱그런 풀내음이 물씬 풍’겨서 ‘모든 시름을 잠시 잊’을 정도의 포옹까지 예상했는데 완전 엇나간 것. 달콤한 상상은 늘 비참한 현실로 끝을 맺게 마련인가.
통닭과의 시위에서 아이와 가까스로 만들어놓은 계단, 그 계단은 모래로 만든 것만큼이나 부실했단 말인가? 내 안에서 이미 와르르 무너진 계단을 허무하게 내려다보며 다짐했다. 더욱 실하고 견고한 계단을 만들 것이라고.
그러나 ‘내 기억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친’ ‘길의 무늬’같은 아버지는 이런 수직적 위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 길의 무늬를 따라 다니며 ‘〈한 역마살〉’하는 트럭 운전수인 그는 국도변, ‘새벽 안개 속에서’ 한 ‘사내’를 태운다. ‘말을 시작할 때마다’ ‘〈아따〉’를 ‘감탄사인지 버릇인지’ 꼭 이 말을 ‘추임새’처럼 넣어서 말머리를 시작한다. 이 사내를 다시 만난 날 그는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를 이 사내의 입을 통해 듣는다. ‘나비야 너도 가자. 청산가자 범나비야 너도 가자’ 라는 노래를 부르며 ‘길의 무늬를 따라 나비처럼’ 날아다녔던 아버지. 아버지는 ‘국도를 따라 다니’며 ‘벌을’ 쳤다.
아버지는 벌의 날개를 지녔다. 벌이 잘 날 수 있는 맑은 날에는 아버지의 날개도 힘이 실렸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이면 아버지 또한 처진 날개를 접었다. 날개를 지닌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는 싸리골 꽃미남이라 불렀다. -너그 꽃미남이 요새 조석이나 챙겨 자시는지 모르겠다. 그런 말을 하는 날이면 어머니의 입에서 노란 꽃가루가 날렸고 먼 산, 아지랑이를 보는 눈에는 진하게 아버지가 묻어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어김없이 새소리가 들렸다. 비비추, 비비추.
그 역시 구불거리는 국도를 따라 길 위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다. 내 트럭을 얻어 탄 사내가 뱉은 말은 그러므로 그에게도 해당된다.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 ‘떠나는 자와 남는 놈’이라는 것. 이 사내의 삶도 전자에 해당한다.
마누라가 죽고 나서 칠 년을 내처 이렇게 살았어. 나에게 목적지는 애당초 없어, 다만 행선지만 있을 뿐이지. 움직이지 않는 별이 있나? 모든 별은 행성이지. 행성은 목적지가 없어 그냥 떠도는 거야. 내가 보름마다 옮겨 다녀도 몇 번 옮겨 앉을 수 있을 것 같우? 일 년이면 겨우 스무 번 정도? 드러눕기 전까지 앞으로 십 년이래도 이백 군데 밖엘 못가. 세상은 넓은데, 이거 억울하잖어?
그래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십년이면 이백 군데, 존재의 유한성을 저렇게 보상받을 수도 있겠구나. 가정이라는 둥지로 날고 들어야한다는 나의 보편정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은근히 그의 자유, 행선지는 있되 목적지가 없는 행보가 부러웠다.
‘아리랑을 찾아다니는 별’처럼 아리랑을 구성지게 부르는 이 사내처럼 그의 아버지 역시 아들에게는 위계 따위를 읊조리면서 아들을 길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남는 놈’이 아니라 ‘떠나는 자’(「나비야 청산가자」)였다. 인류 태초부터 아버지 혹은 사내들이란 늘 수렵을 하러 길을 나서는 자였기에, ‘떠나는 자’일 수밖에 없다. 떠나면서도 자신의 좌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자식을 만들고 자식에게 자신이 가진 유전인자의 한 부분을 물려주고 떠났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 자식 속에 자신의 자리를 각인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절모를 쓴 아버지가 가끔씩 집으로 왔다. 내가 자는 사이에 왔다가 내가 깨기 전에 떠나시곤 했다. 잠결에 내 이마를 쓰다듬는 꺼칠한 손길을 느끼면 나는 아버지의 무릎을 끌어다가 베었다. 아따! 이 놈은 흥부네 둘째 아들 같구먼, 꺼칠한 게 컬려구 그러나? 아카시아 꽃 냄새가 물씬 풍기는 무릎을 베고 잠들지 않겠다고 버티며 눈늘 비비지만 이내 잠이 든다. 아버지의 몸 어디엔가 늘 새소리가 들렸다. 비비추, 비비추. 아침에 일어나면 새소리만 남겨두고 아버진 없었다. 비비추, 비비추. 흥부네 집에 새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아버진 온 집안에 꿀물을 뿌려놓고 가신 날이다.
‘범나비라는 노랫말 부분에서’ ‘검지로 나를 가리’킨 ‘손가락에 의해서 범나비로 변’한 나는 ‘남는 놈’과 ‘떠나는 자’ 사이의 갈등을 해소한 것일까. ‘나비가 되어 너울거리는 날개를 펼치자 달리는 국도가 청산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너울너울, 화물차는 길의 무늬를 따라 나비처럼 날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는 새 그의 노랫말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이제 나도 떠나는 자의 대열에 합류한 것일까. 아니다, 여전히 나는 떠나는 자와 남는 놈 사이에서 갈등한다. 『달빛여인숙』에 등장하는 탑리시인도 예외는 아니다.
탑리시인의 연고는 탑리가 아니다. 약국을 개업하기 전에 자전거로 전국여행을 하다가 탑리가 아니, 탑리의 오층석탑이 그의 자전거 바퀴를 눌러 앉히는 바람에 마지못해 주저앉아 약국을 열고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일테면, 그가 탑에 의해 유배된 것이다. 그 유배가 벌써 이십년을 넘었다는 것이다. (「탑리에는 숨 쉬는 비아그라가 있다」)
작가의 작품 곳곳에는 떠남과 남아있음 사이에서 길을 찾지 못한 인물들이 많이 보인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나는 삶이란 머뭄의 자리를 집착한다. 「쟈르갈의 아리랑」에서 나는 ‘십구 년간 같이 살아온 아내를 주’고 영원히 떠날 준비를 한다. 암으로 남은 삶은 육 개월 여, 중국집을 운영하던 나는 ‘우리 집에 온지 칠년’된 ‘덕용’씨에게 아내와 아이들을 부탁하고 떠나려한다. 몽고의 홉스굴로 가는 여정은 그러므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여행이며 ‘가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도록 이미지 관리’를 하는 차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홈스굴 가운데에서 ‘생의 연장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아리랑을 부른다.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나는 커다란 나비가 되’어 ‘너울너울 나도 모르게 날개짓을, 아니, 춤을’ 춘다. 생을 벗어던지기가 그토록 무거운 것일까. 「달빛여인숙」의 나는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밴쿠버로 날아가고 원룸’에 홀로 사는 기러기 아빠다. 아내와 간 신혼여행에서 들르게 된 ‘달빛여인숙’은 아내가 돌아와 머물 ‘둥지’를 지키는 사내의 마음이 가 닿은 ‘자궁’이다. 고단한 사내가 가 닿은 여정의 끝이자 시발점인 여인숙. 사내에게 모든 집은 달빛여인숙이다. ‘둥지’이자 ‘자궁’이면서 멀리 떠나기 위해 예비된 한 척의 배다. 하여 집은 지상에 붙박혀있지 않고 공중으로 흘러다닌다. 집은 없다. 달빛이 자고 가는 여인숙에 누우면 나도 달빛과 같이 정처없다. ‘그 곳에 누워 파도소리에 귀 기울이면 목조건물은 삐걱삐걱, 달빛을 타고 허공으로 흘러간다.’ 하여 나는 그 여인숙에서 ‘달빛을 품고 잠이 들’ 밖에.
「페가수스자리」의 나도 실직한 기러기아빠다. ‘퇴직금과 명퇴 위로금’ ‘아파트를 처분한 금액’으로 사업을 해보기 위해 나는 몽고에 ‘시장조사’차 들른다. 그러나 나는 ‘애당초 계획과는 달리 몽고의 초원과 별, 자연에 얼이 빠져 일 년을 싸돌아다닌’다. ‘몽고초원은 길이 없으면서도 길이 있다. 모든 초원이 길이 아니면서도 또 길이다.’ 라고 하지만 그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달빛이 강이 되어 흐’르는 초원을 ‘별자리를 보고 좌표를 읽으면서 달’리는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천마가 되어 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백마(白馬) 생식기는 흰색이 아니다」의 장인도 역시 떠남과 머뭄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이 아닐까. 죽기 직전, ‘주워온 아이’라 생각했던 아들이 사실은 ‘밖에서 보아온 자식’이라 실토하면서 이제까지의 삶이 역전된다. ‘유별나게 청렴한 공직자였고 늘 남에게 공맹(孔孟) 같은 말만 하며 또 그 말씀을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서 ‘고결한 한 마리의 학이 연상되’는 장인, 그래서 삶의 ‘전범’으로 여겼거늘. ‘깨끗한 늙은이, 기품 있는 백마, 그러나 뒤집어보면 장인어른 또한 희지 않은 생식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
『달빛여인숙』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거의 대부분 초라하고 왜소하며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아버지들이다. 곧 죽어 갈 존재이거나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기러기아빠이다. 아버지라는 상징은 설 자리를 잃고 존경할 만한 아버지라는 전범은 깨어져버렸다. 모두 길 위의 존재들이다. 기어이 아버지는 모두 사라지는가. 길 없는 길, 길 아닌 길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도 잡지 못하고 영원히 헤매기만 할 것인가.
이 시대의 아버지란 존재는 무엇인가? 식구들의 밥을 만드는 견고한 기계? 그러나 경제력에 힘줄이 풀리면 그 기계도늙은 고철덩이가 되어 세상살이의 뒷전에 방치된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그도 그렇게 퇴물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에 조금 서글퍼졌다. 결국은 요양시설이나 그런 형편도 안 되면 갖다버려야 할 존재로 퇴락하는 것이 이 시대의 아버지다. 중절모를 쓰고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헛기침으로 집안을 호령하던 가부장의 시대는 찍 소리도 못하고 소멸되고 자연스레 돈을 못 버는 아버지란 위치는 빨지 않은 걸레짝이나 고장 난 기계로 추락하는 시대가 도래 하였다. 아버지의 위상은 이제 없다. 걸레짝을 넘어서 치매현상을 보이면 아버지란 존재는 고물상에 폐기처분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아버지의 도돌이표」에 등장하는 나는 치매 걸린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 아버지를 잃은 지 근 열흘이나 되었는데, 이상한 꿈만 꾼다.
꿈속에서 그는 포클레인 기사가 되어 옛날에 살던 집을 마구 부수었다. 그 집은 바로 그가 나서 자란 고향집이었다. 방안에는 가구와 살림살이가 들어있는데 기와지붕을 포클레인으로 내려 앉히고 대들보와 서까래를 마구 부수는 꿈이었다. (중략)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그의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젊었을 때의 정정한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포클레인에 뛰어 올라와 그렇게 집을 부수고 있는 그의 멱살을 잡아 포클레인에서 끌어내렸다. 그는 아버지의 손에 멱살이 잡혀 완강하게 버티다가 결국은 포클레인에서 떨어졌다. 포클레인 밖은 이상하게 천길만길 낭떠러지였다. 그는 갑자기 생긴 낭떠러지로 아버지를 껴안고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 추락은 끝이 없었다. 아아악~ 고함을 지르며 끝없이 낭떠러지로 빨려 들어가다가 벌떡 잠에서 깨었다.
아버지들의 추락을 보여주는 꿈은 미래의 아버지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실직으로 이미 한 번 추락한 아버지인 나의 손에 끌려 내려오는 나의 아버지. 이 이중의 추락은 참 음울한 전주곡일 수밖에 없다. 진정 아버지는 다시 부활할 수 없는 것인가. 존경과 권위의 상징, 삶의 좌표와 시대의 좌표는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인가.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길이 이어질 것이란 확신을 갖는다. 더 젊고 건강한 아버지에게로 길들이 이어져 점점 작아지는 아버지의 자리가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죽은 나를 이어서 ‘덕용’씨에게 아버지의 바통이 이어지고 죽음 이후에 아버지의 아들이 젊고 건강한 아버지로 되살아올 것이라는 것을 근작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다시 ‘쾌지나 칭칭 나하네~’라며 돌아오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라 영락없는 아버지의 목소리’(「쾌지나칭칭나네」)다.
난데없이 아버지께서 흥이 나면 즐겨 부르시던 이 가락이 왜 불쑥 내 입에서 나왔을까?
그것도 아버지의 음성으로.
그야말로 환장하도록 미적 감각과 감수성을 지닌 가락! 끝자락을 한껏 늘어뜨리고 살짝 올리며 누군가 후렴을 붙여주기 좋도록 아버지의 목청으로 여백을 남겼다. 후렴을 붙여줄 이는 나 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어떤 말로 후렴을 붙여야할지 당혹감을 느끼고, 바로 중절모에 정갈한 흰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그 가락을 부르시며 골목을 들어서시던 아버지의 옛날 모습을 떠올렸다.
기분이 한껏 고조되었을 때의 모습이고, 골목에서 내 왔노라고 식구들에게 알리는 아버지의 기별 수단이었다. 누이와 나는 방에서 제각각 호작질을 하다가도 그 가락이 들리면 얼른 책상에 책을 펴고 앉았다. 쾌지나칭칭나네는 당신께서 가장 유쾌할 때 흥얼거리시는 가락이다. 삽짝을 들어오시는 모습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척하다가 나가서 인사를 올리면 아버지께선 우리 남매를 마루에 앉히시고 일장 훈시를 하시는 게 묵계다. 한참 이어지는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을 듣고서야 우리 남매는 꿇어앉아서 저린 다리에, 약속이나 한 듯이 코끝에 침을 찍어 발라 종아리를 풀며 방으로 들어가 책상머리에 앉는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는 내 아버지에 대한 회상으로 일순 휘청거린다. 겹치면서도 겹치지 않는 부분들. 내 아버지는 ‘내가 자는 사이에 왔다가 내가 깨기 전에 떠나시’는 느낌이 들 정도로 두어 달에 한번 집에 들르시던 분이었다. 삼지례를 자식들에게 지키게 하느라, 내 나이 마흔이 넘도록 꿇어앉아서 저린 다리에도 불구하고 편히 앉으라는 말씀을 않으시던 아버지. 이런 아버지가 어른거려서 나는 이 구절에서 시선과 생각이 딱 멈춰버렸다. 내 아버지는 ‘쾌지나 칭칭 나하네’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유별나게 청렴한 공직자’의 표상으로 사셨으니. 내 기억 속에서는 흥겨운 가락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와 자식 사이는 곧잘 풀리지 않는 매듭이 지어졌다. 가락을 모르니 갈등을 푸는 과정은 너무도 힘겹고 오래 걸렸다. 가락으로 물처럼 흐르는 관계를 자식들은 아무도 꿈꾸지 않는다. 자식들은 삼지례의 예로서 아버지에게 순응한다. 이 글의 나도 ‘정갈한 흰 모시 두루마기’ 같은 아버지를 두었지만, 이 아버지는 ‘쾌지나 칭칭나아네~’ 라는 가락을 구성지게 넣을 줄 안다. 이 가락이 작품들마다 유장하게 살아서 흐르는 것을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느낀다. 비록 ‘어릴 적에 듣던 그 가락을 잊고 살았’지만 나는 이제 ‘아버지의 음성으로 아버지의 가락이 주문처럼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 내가 아버지가 되어 추임새를 넣어야한다. 때론 ‘후렴을 붙여야 하는데 붙일만한 그럴 듯한 서사가 생각나지 않’아 애를 먹지만, 내가 붙이지 않으면 또 나의 아들이 붙일 수도 있을 터.
3. 소설의 입구를 찾아서
아들에게 삶의 좌표를 세워주기 위해 고민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실린 최근작을 보며 이제 아들의 아버지 되기라는 주제로 넘어가보자. 이 시련을 통과한다면 아들은 아버지가 넣는 추임새와 잘 맞아떨어지는 한 사람의 청자로 잘 자랄 것이며, 때로는 아버지의 가락에 그럴 듯한 후렴을 붙일 줄 아는 어엿한 아버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이 건너야 할 강」에는 지독히 애를 먹이는 아들 녀석을 캄보디아의 씨엠립에 ‘유기’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기한 뒤에도, 나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가슴이 쓰린, 나약한 아비로 둔갑해 있었다.’ 그러나,
녀석에게는 건너야할 강이 있다. 남들은 다들 건너는데 녀석은 발을 담그지 못하는 것이다. 공황장애라는 병명으로 강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녀석에게 강을 건너는 법을, 생을 헤엄쳐 갈 수 있는 수영을 가르쳐야 한다. 질곡 없는 생이 있으랴. 다음날부터 녀석에게 험난한 물살이 흐르는 인생의 강을 건너는 방법을 가르쳐야한다고 다짐하고는 잠을 청했다.
결국 나는 아들과 함께 떠난다. 터미널에서는 ‘엄마! 강을 건너는 법을 배워서 돌아올게. 그 동안 속 썩여 미안해.’라고 마치 소풍가듯 떠나는 아들. 나는 아들과 헤어지면서 다시 반복한다. ‘자, 이제 약속대로 헤어지자. 절대로 관광객의 전화로 국제전화를 해서 어디로 돈을 부치라고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전화를 하더라도 절대 부치지 않겠다. 네겐 건너야할 강이 있다. 그 강에 너를 방생한다. 험난한 파도를 타는 수영을 배울 때다. 어디를 가던 건강하게 내 힘으로 벌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좀 바뀌어서 돌아와라. 시대는 드디어 글로벌 시대에 도래했다. 네가 사나이라면 큰물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워야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출국하는 순간까지 행여 아들을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아들은 공항에 나타나서 외친다. ‘ 아버지~ 강 건너는 법을 배워서 갈게~요. 걱정 말~고 가세요.’라고.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내 아들이 겹쳐졌다. 눈물이 절로 났다. 내 아들 역시 자원하여 해병대 복무를 한다. 군대에 가서 보내온 편지에 그동안 키워줘서 고마웠다고, 속 썩여서 미안하다고, 잘 견디고 돌아오겠노라고 씌어 있었다. 입대하느라 공항에 배웅해주러 갔다가 나를 꼭 껴안고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마치 원시부족이 성인식에서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룬 뒤엣야 어엿한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접받듯이, 아들도 제가 선택한 통과의례를 무사히 잘 치러내리나는 것을 믿으면서도 나는 눈물이 났다. 마치 아들이 딛고 선 시공간과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공간이동을 해 버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 주 주말에도 남편과 딸애와 함께 군 병원에 병문안을 갔다 오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들어간 줄 알았는데, 아들 녀석은 우리 주변을 계속 맴돌면서 제 눈에서 우리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얇은 환자복을 입고 떨면서 손을 흔들었다. 얼마나 바깥으로 나오고 싶었으면, 저토록 이별하지 못할까. 그러나 제가 선택한 길이다. 누가 등 떠밀어 간 해병대 복무도 아니거늘, 어쩌랴. 아직도 저 놈은 통과의례의 시험을 치러내는 중이다. 참 애틋한 아들이지만, 나는 늘 아들애를 먼 나라로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천방지축인 네가 다듬어지기 위해서는 더 부서져야 한다고.
이홍사의 소설세계를 살피면서 나는 그의 소설이 어디로 빠져나갈지 궁금해 하면서 읽었다. 진작부터 입구가 아닌 출구가 궁금했다. 출구로 나가야만 그의 소설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한 버릇 같은 것일 수도 있는데, 나는 일상의 단기기억상실증을 치유하는데도 이런 경로를 통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내가 뭘 가지러 왔었지, 뭘 하려고 여기 왔지 하는 것들이 기억이 안 나면 나는 기억의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면 대개는 기억을 되찾는다. 도돌이표를 그리지 않으면 기억은 그냥 가버린다. 기억을 되새기는 방법이 내게는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우선 나가보는 것이다. 나간 기억을 따라 다시 돌아오기, 사유란 늘 이곳에서 한 발 떨어지면서 시작되는 엇갈림인지도 모른다. 하여 이홍사의 소설과 엇갈리는 내 경험을 소설의 출구로 삼아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형식을 시도했다. 어쩌면 이 출구도 회전문처럼 빙글빙글 돌아 안팎이 전도되는 황당한 출구 찾기일 수도 있지만. 작가에게서 『아버지는 맞아도 싸요』라는 작품집을 받는 순간 혹시 계기가 된다면 ‘아버지’라는 화두로 작품론을 써 보야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이 제목은 인상깊게 내 뇌리에 각인되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아들놈이 길래 아버지에게 저 따우 말을, 고 놈 참 벌써부터 싹수가 보이누만, 하는 생각을 문득 했었다.
그렇다면 작품을 누구의 시점에서 볼 것인가. 아들의 입장에서 일인칭 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볼 것인가,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을 보는 이인칭 시점으로 볼 것인가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소설의 화법은 판소리의 청자처럼 일인칭을 구사하고 있으나 소설의 서사는 이인칭 추임새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홀로 창을 하는데 누군가 자꾸만 추임새를 넣어 소설의 서사를 끌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소설집은 그러나 세 번째 작품집에 해당되니, 뒤로 갈수록 아버지의 추임새가 아니라 아들의 창이 이 서사마당을 휘감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여 작품집으로 아직 묶어내지 못한 근작들을 더 유심히 읽어보았다. 아직 지면으로 나오지 못한 자식들을 너무 많이 선보이면 작가에게 누가 될 것 같아 몇 작품만 슬쩍 건드려 보았다. 여하튼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그리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그리움이 뒤의 작품들로 올수록 진해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터.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는 사골국물을 한 일주일 곤 것 같은 진한 것들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소쿠리에 담긴 끌과 연장은’ 훌륭한데 ‘그것을 다루는 솜씨는’(「달콤한 잠」) 영 엉망이더라는 핀잔이나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나올 작품집에는 아버지의 추임새와 아들의 창이 기막히게 잘 어우러진 작품들이 술술 터질 거라는 기대를 해본다. 만약 아들이 강을 잘 건너왔다면 아버지의 추임새는 더 신이 날 것이고, 아들의 창은 더 풍성하고 웅숭깊어질 것이다. 자, 세상의 모든 아들을 위해 한번 추임새를 넣어 볼까나.
아따, 고 놈 강을 잘도 건넜구나. 아따 고 놈, 참 기특해 부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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