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소망은 세상에서 우리나라의 부모들이 최고일 것이다. 새벽부터 하루종일 흙투성이가 되어 논밭에서 자신의 평생을 소모시키면서도 자식이 좋은 학교에 다니고 있기만 하면 늘 가슴이 뿌듯하다. 도회의 시장 바닥에서나 막노동 판에서 사람같지도 않은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탕진하면서도 그것이 좋은학교에 다니는 뒷바라지일 때는 늘 만족스러운 것이 우리나라의 부모들이다. 이러한 우리 부모들의 희생적인 삶은 나라와 겨레의 장래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든든한 바탕이요 밑천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유례가 없는 희생적 교육열이 어디서 연유하는가를 알고나면 우리는 우리 겨레의 지난 역사에 대하여 일말의 비애를 금할 수 없다. 자식의 글공부에 부모의 이런 초이성적 희생정신은 적어도 지난 천수백년의 우리 역사에 뿌리박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영토가 한반도 안으로 쪼그라든 통일신라 이후부터 오늘까지 이 사회는 인간의 순수한 지혜와 능력에 의해서 지배되기 보다는 글 잘하는 괴물의 구사능력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하늘 아래에서 가장 어려운 중국글자를 들여와서는 그 글자의 구사능력만으로 사람을 뽑아 사람의 지배자가 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라때에는「국학」、고려때에는「국자감」과 이른바「십이공도」라는 사립학교、조선때에는「성균관」과「서당」등의 학교에서 오직 한문 글공부만 낭자하게 벌어진 것이고、다른 능력이야 어떠하든 거기 출신으로 글만 잘하면 권력과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한문글 학교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늘 국민의 1% 미만인 높은 양반의 자제들만 입학하게 되어 있었으니까 나머지 99%의 절대 다수 국민들은 일천 수백년의 세월 동안 그런 좋은 학교에 입학하여 글공부를 마치고 입신양명해 보는 일에 포원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만민평등의 민주사회가 되었고、누구나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으나、그 핏속에 녹아 있는 포원을 자식을 통해서라도 한번 풀어 보겠다는 것이 바로 우리 부모들이 자녀의 교육에 대하여 거의 본능적으로 발휘하는 그 희생의 근원이다.
그러니 이 희생 정신에는 일종의 역사적 원한이 맺힌 것이고、그래서 당분간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폭발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힘은 마치 홍수와 같아서 슬기롭게 관리하면 수력발전처럼 유용한 에너지로 쓰일수도 있고、잘못 관리하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 앞에 엄청나게 노출되는 학교교육의 문제점들은 이 홍수와 같은 교육열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보다나은 장래를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은 누구나 홍수같은 이 힘을 유용하게 관리할 방도를 찾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특히 절대적이고 완전하신 분에게로 모든 사람들이 나아가게 함으로써 그 어떤 교육보다도 더 근원적으로 인간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참 종교의 지도자들은 특별한 관심으로 우리 교육의 바른 길을 밝혀주어야 하겠다.
나는 서양에서、각급 학교의 학급당 학생수가 평균 20명 미만인 것을 보고、또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과 뒷받침하는 사회의 놀라운 정성을 보고、교육내용이 글보다는 말과 행동과 능력과 인간성의 가치인 것을 보고、교육 방법이 주입식 수업에 피동적인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토의식 수업에 능동적인 성장을 위한 것임을 보고、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사회의 미래에 대하여 너무나 무책임하게 지낸다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 13명을 교사 2명(1명은 지진아를 위한 보조교사)이 가르치고 있는 이탈리아의 어느 국민학교 4학년 교실에서 한국에서는 한 학급의 학생이 몇명이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일과 60명 정도라고 대답한 뒤에 학생들의 휘둥그래진 눈도 눈이려니와 두교사와 옆에 섰던 교장의 불가사의해하면서 계속하는 질문에 땀을 빼면서 변명을 하던 기억은 영 잊을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