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종교적 단상들 방에 있는 글을 옮겨 왔습니다!
선과 악의 양태들 -..
선은 악을 미워하지 않지만, 악은 본질적으로 선을 미워한다.
선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악은 선을 비판하거나, 공격하거나, 미워하면서 존재한다.
악이 주위에 없어도 선은 그 스스로 존재하고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선이 주변에 없을 때, 악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선과 악은 겉으로 보기엔 서로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선은 질서를 지니고 있지만, 악은 원칙적으로 질서가 없다.
그래서 선은 한결같지만, 악은 늘 그 모습을 바꾼다.
그래서 선은 믿음이 가지만, 악에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선은 항상 사실 혹은 진실에 기초하고 있지만
악은 항상 거짓에 기초하고 있다.
선은 가급적 사실이나 진실을 알고자 하고 드러내고자 하지만
악은 항상 조금씩 과장하거나, 거짓을 썪거나, 사실을 왜곡하려 한다.
그래서 선은 그 참모습을 드러낼 때, 진리가 드러나지만
악은 그 참모습을 드러낼 때, 거짓이 드러난다.
선은 항상 타인의 선을 생각하지만
악은 항상 타인의 악을 생각한다.
그래서 선은 타자를 살리고자 하지만
악은 타자를 파괴하고자 한다.
선은 타자의 행복을 보고 기뻐하지만
악은 타자의 불행을 보고 기뻐한다.
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과 신뢰만을 남기지만
악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짓과 불신만을 남긴다.
선과 악을 드러내는 것은 시간이다.
선도 악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 선도 악도 결국은 자신의 분명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간의 끝, 그곳은 선과 악이 전혀 가림막이 없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죽음이 어떤 의미로든지 심판의 날이라는 것은
선과 악은 오직 시간성 속에서만 가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변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죽음과 더불어
선과 악은 비로소 온전히 개별적인 사건이 된다.
어떤 이의 실존이 선한가 악한가 하는 문제는
시간성 안에서는 그것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달려 있다.
즉 시간성 안에서 선과 악의 문제는 상대적이다.
그래서 ‘필요악’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성이 멈추는 날, 그것은 더 이상 세상에 끼친 영향과는 무관하다.
죽음과 더불어 선과 악의 문제는
상대성의 범주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범주로 들어선다.
선과 악의 문제가 절대적인 범주로 들어선다는 것은
선과 악이 세상의 구조 속에서 영향을 끼친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나의 영혼이 선으로 물들어 있는가 악으로 물들어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가 비로소 심판의 날,
즉, 존재론적으로 선과 악이 에누리 없이 각자의 몫을 받게 되는 순간이다.
추수날 농부는 죽정이는 불에 태워 거름으로 쓰고
알곡은 거두어 양식으로 쓰듯이
이렇게 선과 악도 완전하게 운명이 갈리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성 속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선악의 운명을 보려하지 않는다.
스스로 이를 믿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스스로 자신은 선 보다 악을 더 많이 가졌다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