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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6 강 - 坐禪品- 1
五. 坐禪品
師-
示衆云, 此門坐禪은 元不着心이며 亦不着淨이며
亦不是不動이니 若言着心인댄 心元是妄이라
知心如幻故로 無所着也니라 若言着淨인댄
人性이 本淨이언만 由妄念故로 盖覆眞如니
但無妄想하면 性自淸淨이라 起心着淨하면
却生淨妄하나니 妄無處所라 着者是妄이며
淨無形相이라 却立淨相하야 言是工夫인댄
作此見者는 障自本性하야 却被淨縛하리라
***
날씨가 그렇게 덥더니 아무래도 한풀 꺾인 것 같지요?
해가질 때는 좀 선선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더위 같은
이런 문제가 개인에게 일어나더라도,
가만히 기다려보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돼요.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나부대는데,
나부대봐야 해결 되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것도 큰 지혜입니다.
보통 지혜가 아니라고요.
기다리면 해결 된다고 하는 것.
이것 하나만 알아도
거의 부처님의 지혜하고 맞먹어요.
거의 부처님의 지혜하고 맞먹는다고요.
이 세상에 어떤 드러난 일들은,
없던 것이 생겼기 때문에
생긴 것은 또 없어지게 마련 이예요.
쉬임없이 변하는 과정에서 다
空(공)으로 돌아가고,
無(무)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해결 안 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요는 시간이 문제이고,
그 시간을 어떻게 슬기롭고 현명하게
기다릴 줄 아느냐 하는 것. 그것이 관건이지요.
오늘은 좌선품 인데,
이 坐禪(좌선)이라고 하는 것은, 앉아서
참선을 한다는 뜻인데
禪을 하는 방법 중에 앉아서 하는 것이
제일 편하고, 유리하다고 해서 그래서
우리가 좌선을 하지요. 그렇지만
行禪(행선)이라고 해서 걸어 다니면서
禪을 할 수도 있고,
禪을 하는 방법은 꼭 앉는 것만 가지고
제일로 치진 않습니다.
어떤 스님들은 3년간 한 번도 앉지 않고
도량을 거닐기만 하면서 참선을
마친 사람도 있고 그래요.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앉아서 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고 편하다고 해서 그래서
좌선을 참선의 어떤 정형으로 그렇게
생각 합니다. 그러나 앉느냐 서느냐
하는 것은 사실 별 문제가 아니고,
마음으로부터 어떤 상태를 유지 하는가?
우리 마음을 어떤 상태로 유지 하는가
하는 이것이 제일 관건이지 사실은,
이 몸뚱이야 앉든 서든 눕든, 전혀
상관없습니다. 사실 전혀 상관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을 두고,
앉는다거나 섰다거나 걸어간다거나 온다거나
이렇게 어떤 외형에 끄달려서 부처님을 판단하면
그것은 부처님을 잘 모르는 것이고,
부처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선의 진정한 의미도
앉는다. 선다. 하는 데는 전혀 의미가 없지요.
요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일반적인 이야기이고,
여기서
육조스님께서 좌선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더 다른 차원의 이야기예요.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을 앉는다는 것이고,
또 이러한 상태를 禪이라고 한다.
그래서 坐와 禪을 아주 당신의 수준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그런 고차원적인 좌선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또 이러한
고차원적인 좌선도 우리가 높은
도력을 가진 육조스님에게 들어둘 필요가 있지요.
師(사)
示衆云(시중운)하대→
스님께서 대중들에게 보이다.
이 示衆이라는 것이 법문의 형식 가운데 하나인데,
보통법문을 우리가 시중이라고 한다고 그랬지요?
그 다음에 그 보다 상위에 해당 되는 것을
上堂(상당). 이라고 하고,
또는 勘辨(감변) 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勘辨.
그거는 사람들의 공부가 어느 정도 됐는가?
그것은 개인을 상대로 해서 하는 것인데,
그 사람의 공부가 어느 정도 됐는가?
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을 감정 해보는 것을 “감변”그래요.
그런 것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대중들에게 보여서 말하되,
此門坐禪(차문좌선)은→ 이 문중에,
우리
曹宗門下(조종문하). 다시 말해서 수행하는
이 문에 있어서 좌선은 앉아서
禪한다고 하는 것은,
元不着心
(원불착심)이며→
여기 着자를 썼는데, 집착할 착 자.
아주 직접적인 표현이긴 해요.
그러나 看(간)자. 볼 看자로 되어있는
本(본)도 있어요.
看話禪(간화선) 할 때 看자.
‘원래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着(착)자 를 그대로 두고
해석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좌선한다는 것은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대개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 일반적인
미혹한 사람의 좌선이지요.
그러면 청정한 것에 집착하느냐?
亦不着淨(역불착정)이며→
그것도 아니다 이겁니다.
禪한다 하면,
우리가 미리 들어야 할 것은,
禪에 대해서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看話禪(간화선).
黙照禪(묵조선).
그런 말이 있어요.
黙照禪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묵묵할 黙 字. 비출 照 字.
묵조선은 마음을 어떤 다른 경계에
빼앗기지 아니하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 것이 묵묵하다는 뜻이예요.
말 안 하는 것이 黙이거든요.
그럼 마음이 말 안 하는 것.
마음이 다른 어떤 경계를 쫓아가지 않는 것.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것이 마음이 묵묵한겁니다.
黙자는
본래 말[言(언)]의 반대 뜻으로서 묵이라고 하지만,
마음에다가 이끌었을 때는 마음이 사물을 분별하거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어떤 분별의 생각을 내지
않을 때, 그것을 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비춘다.
무엇을 비추느냐?
자기 내면의 세계.
내면의 세계는 결국 마음을 비춘다. 하는 것이지요.
“마음이 마음을 본다.”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는데,
‘마음이 마음을 본다.’
라고 하지 않고 그냥 黙照(묵조)라고 했다고요.
‘마음이 마음을 본다.’ 하면, 마음은 엇잡히 하나인데
둘로 나누어져서, 보는 자와 보여 지는 대상.
그것이 나눠지게 된다고요.
사실은 우리 정신 상태로는 그것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얼마든지 나눠질 수도 있습니다.
또 비파사나(위빠사나)라고 하는 것.
지금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있는데
그거는 정말 나눠서 봐요.
마음을 두 쪽으로 나눠서,
내 행동하는 것을 예의주시 하는 거예요.
또 하나의 내 마음이 내가 행동하는 것을
예의주시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하고
앉아 있는 것. 이것을 또 하나의 나를 세워
가지고 내가 행동하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거예요.
그것이 비파사나입니다.
우리나라 참선하는 이들도 그런 수행에
많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특징이 있어요.
이 看話禪(간화선)을 통해서 깨닫는 것하고는
상당히 좀 거리가 있고,
그 대신에 사람이 아주 침착해지고, 점잖아지고
차분해지고, 그거는 사실 이예요.
그거는 금방 그렇게 돼요. 얼마 안 하면
사람이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동하는 것을 자기 자신이 또 관찰하니까요.
그러니까 말을 함부로 못하겠지요?
함부로 하는 내 자신을 내가 그것을 보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스스로 창피함을 느끼니까
말을 함부로 못해요. 행동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행동을 함부로 하면 자기를 예의주시 하는 것이
흩어져 버려요, 놓치게 된다고요.
예의 주시 하려면 내가 행동을 천천히 하고,
아주 침착하게 하게 해야 내가 나를 주시 하면서
나는 나대로, 밥을 먹든지 행동을 하든지
책을 보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다고요.
그러기 때문에 얼마 아니해서
사람이 아주 침착 해지고 차분해지고,
또 행동이 점잖아지고 그래요.
남방스님들은 대개 점잖습니다. 아주 점잖아요.
전번에도 언뜻 말씀을 드렸는데요.
점잖으고 침착하고 얼른 보기에 아주 수행이
상당히 된 것같이 보입니다.
이 간화선을 하는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간화선을 하는 사람들은
선을 할 때는 완전히 無心境地(무심경지)에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안 할 때, 화두를
놓아 버리면 보통 사람보다 더 경망하고,
자기의 보통 업이 더 아주 노골적으로
들어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보면,
도력은 정작 마음의 세계에 들어갔든지,
아니면 어떤 선정의 힘을 볼 때는 훨씬
더 그 쪽이 강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간화선은
그것이 원숙해 지면, 깨달음에 이르게 되지요.
그런데 비파사나는
그런 것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한 행동을 예의주시 하는 것.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시피
그렇게 되었고, 또
數息觀(수식관)이라 해서 경전에도 다 나오는 것을
남방선에서는 ‘비파사나’라 그렇게 하고,
여기서는
묵조선은 그 뒤에
그런 관법이 발달해서 묵조 하는 것인데, ‘
마음이 마음을 본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이면서, 묵조라고
표현 하는 ‘묵묵히 내 자신을 비춰본다.’
라고 하는 것이, 말속의 어떤 허물을
좀 없애기 위해서 그래서 ‘마음이 마음을 본다.’
하면,
主(주)와
客(객)이 나눠지는데
이것은, 가능 하면 나눠지는 표현 보다는
그냥 묵조 한다. 묵묵히 비춘다.
이렇게만 표현을 해요.
그래서 달마스님 당시,
여기 육조스님 말씀도 보면
着心(착심)이렇게 했지요. 또
着淨(착정)이렇게도 했어요.
元不着心(원불착심)이며
亦不着淨(역불착정)이며→
또한 청정한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랬는데
“淸淨(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텅 빈 마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음에 집착한다.’ 하는 것도
결국은 마음을 본다. 어떤 본에는
볼 看(간)자로 되어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마음을 본다.’라고 하는 것.
다시 말해서 마음을 관찰 하는 것.
마음을
觀(관)하는 것. 달마스님이
‘唯觀心一法(유관심일법)이
摠攝諸行(총섭제행)이라.
마음을 관찰 하는 한 가지 수행법이
모든 육바라밀 수행하는 것을 전부 다
포섭하고 있다.’ 이런 표현을 했듯이,
주로 화두선이 생기기 전에는 전부
거의 묵조입니다.
묵조인데
정작 마음을 이렇게 지긋이
觀 하는 것 이예요.
묵조 하는 것 이예요.
묵묵히 비추는 것 이예요.
그래서 제대로 들어간 사람은
마음의 세계를 확연히 깨닫기도 하고,
옛날 사람들의 근기는 그래서 깨닫는 경우가
아주 많았어요.
그런데 세월이 자꾸 흐르니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깨닫기가 어렵고,
오히려 진공체조기라 해서 아주 아무 것도 아닌
無記(무기)라고 해서
善(선)도 아니고
惡(악)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어라고 표기할 수 없는 그런 정신 상태.
그것을
無記라고 그래요.
無記
상태에 떨어지는 그런 경우가 많이 생기니까
‘아,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대혜스님!
서장에서
看話禪(간화선)의 공부 방법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간화선의 아주 지침서지요.
그 스님이 송나라 때인데, 그런 것을 막 부정하고
배척하고, 뚜드려 부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그 방법 가지고는
근기가 수승한 사람이나 되지,
근기가 하열한 사람은 안 된다.
그 방법은 이제 어렵다.’ 고 하면서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화두
라고 하는, 어떤 문제를 하나
딱 머리에 떠올려서 그 문제를
골똘히 파고 들어감으로 해서
정신이 집중 되고, 정신이 집중됨으로 해서
일념이 되고 일념이 오래가면 결국은 깨닫게 된다.’
하는 이 길을 택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생긴 것이
看話禪(간화선)이 생겼다고요.
옛날에 초기에는, 초기
禪은
觀法(관법)입니다.
비파사나 같은 것.
숨을 예의주시 한다던지,
내 행동을 예의주시 한다던지,
아니면 또 물을 관한다든지,
불을 관한다든지,
능엄경 같은 데 보면
觀法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러다가 그 다음에 생긴 것이
黙照(묵조). 묵조라는 말은
쓰지는 않았지만, 지금 우리가
정리를 하면 묵조라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송나라 때 묵조라는 말을 썼어요.
그러면서 묵조선은
‘근기가 수승한 사람은 가능 하지만,
근기가 하열한 사람에게는 어렵다.’
고 본것이고,
그래서 새로운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내놓은 것이
看話禪(간화선).
그래 그 후 부터는 전부 간화선을 했어요.
그래서
임제스님이라든지,
달마스님이라든지,
육조스님이라든지
이런 이들은 화두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송나라 때 대혜스님 이전에는
화두 이야기가 거의 없어요.
그대로 마음을 관찰하는 거예요.
그런데 대혜스님 이후부터
화두선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가 이런데서는 화두를 떠올리면
안되는 것이지요.
좌선이라 하더라도 화두를 떠올리면
이야기가 안 돌아가는 것이고,
화두를 떠올리지 말고 그저
看心(간심). 아니면
觀심. 아니면
着心(착심).
또 여기서
着淨(착정)했는데, 마음이 텅 빈 상태를 보는 것.
또는 봄으로 해서 집착 하는 것.
집착할 때 벌써 그것은
病(병)이 돼버리니까 그래서 이것은 보는
단계에서, 더 병 쪽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
집착하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어요.
그래서 집착할
着(착)자. 다른 본에는 볼
看(간)자로 되어 있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간단히
黙照禪(묵조선)과
看話禪(간화선). 그리고
數息觀(수식관).
비파사나를 요즘 표현은 ‘위빠사나’ 그러지요?
그놈의 V자가 우리나라에선 발음이 왔다 갔다
해서 참 곤란해요. ‘비파사나’ 그래도 맞고,
‘위빠사나’그래도 맞는 것 같고, 표기가 통일이
아직 안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元不着心(원불착심)이며
亦不着淨(역불착정)이며→
원래 좌선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집착 하는 것도 아니고,
청정한 텅 빈 것에 집착 하는 것도 아니며,
亦不是不動(역불시부동)이니→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不動도 아니다. 이겁니다.
부동한 자세가 좌선인 것같이
얼른 생각하기가 쉽지만
不動도 아니다 이겁니다.
그렇다고
動이냐?
動은 더욱 아니다.
若言着心(약언착심)인댄→
만약 마음에 집착한다고 말할진댄,
좌선은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할진댄,
心元是妄(심원시망)이라→
그런 우리가 보통 마음, 마음 하는 마음은
본래 망령된 마음이다 이겁니다.
그런 마음은 금방 일어났다가 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고,
정말 변화무쌍한 그런 마음은 幻(환)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아서 금방 있다가 사라지는
환상과 같은 줄 아는 고로,
知心幻故(지심환고)로→
마음이 환과 같은 줄 아는 고로,
無所着也(무소착야)니라→
집착할 바가 없느니라.
집착할 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着心이다.
좌선은 마음에 집착한다.”
라고 하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또
若言着淨(약언착정)인댄→
만약에 着淨. 텅 빈 마음의 세계.
마음을 표현할 때 흔히 ‘청정하다.’
또는 ‘공적하다.’ 이런 표현을 해요.
‘공적하다.’고 하는 것은 텅 비어서 고요하다.
이런 뜻인데, 청정도 그런 뜻입니다.
마음의 상태는 텅 비어서 고요하다고
이런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한다.
若言着淨→
만약에 말하기를 청정한데,
텅 빈데 집착했다고 할진댄,
人性(인성)이
本淨(본정)이언만→
사람의 성품이란 것이 본래 청정해.
본래 텅 비었건만.
性品(성품). 성품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에요.
찾아보면 없어요. 본래
空(공)한 거예요.
本淨이나
本空이나 같습니다.
인간의 성품이라는 것이
부단히 성품에서 생각이 일어나서 활동을 하지만,
한순간도 쉬지 않고 활동을 하지만,
그 실체를 찾아보면 텅 비었어요. 공적해요.
그렇다고
영 없는 거냐? 하면
영 없는 것도 또 아니지요.
그래서
中道(중도)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데,
인간의 본성이 본래 청정 하건만. 텅 비었건만,
由妄念故(유망념고)로→
망념을 말미암은 고로,
盖覆眞如(개부진여)니→
이것은 망념도 아닌, 망념의 그 母體(모체).
정말 깨끗한 우리의 마음자리만을
지칭할 때 “진여”그래요. 참답다.
[如如하다:
시간적으로]
[眞:공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이지만,
표현을 하자니까 그래서 진여를 개부.
眞如를 덮어 씌워 버렸다 이말 입니다.
이불이나 거적 떼기로 덮어 씌워서
드러나지를 못하게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망념을 말미암은 고로, 眞如를 덮어 씌웠으니,
但無妄想(단무망상)하면→
다만 망상만 없으면,
妄念(망념)이나
妄想이나 같지요. 다만 망상만 없으면,
性自淸淨(성자청정)이라→
성품이 저절로 청정한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그 망념 때문에
청정한 마음을 제대로 못쓰고 있는 거다.
본래 우리 마음은 청정하다.
이렇게도 표현을 하고,
또 경에서는 망념이 덮어씌우고 있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처음에는 同時(동시)에 같이 있다.
비유컨대
뭐와 같은가 하니,
금광에 진금과 잡철. 내지 돌이나 이런 것이,
금광에서 막 캐낸 금은 그렇게 섞여 있거든요.
그 금 가지고는 쓸모가 없다고요.
물론 그 속에 진금이 있어요. 그렇지만
진금은 다른 잡철하고 섞여 있기 때문에,
그것을 녹여서 진금만 뽑아내야 돼요.
진금만 뽑아내야 금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요.
경전에 보면 우리 본래의 마음을 그렇게
이해를 하고 설명하는 데가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잡철하고 진금하고 뒤섞여 있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 용광로에다
광석의 금을 넣어 가지고서,
진금만 뽑아내는 그런 일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그 진금은 한 번 진금이 되면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렇지요.
다시 잡철과 섞일 까닭이 없지요.
그와 같이 한 번 성불하면,
영원히 성불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중생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은 없지만 끝은 있다.’ 그래요.
중생이 끝나는 시간이 있다.
부처의 삶이 시작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잡철을 골라냈을 그 순간이, 말하자면
번뇌가 다 사라지고,
眞心(진심)만 있는 그 순간을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 번 진금이 되면 영원히
진금이듯이, 한 번 성불하면
영원히 부처의 삶을 산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도 그와 유사하지요.
다만 망념만 없으면. 망상만 없으면.
잡철만 없으면
性自淸淨(성자청정)이라→
성품이 그대로 진금뿐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起心着淨(기심착정)하면→
그런데 괜히 마음을 일으켜 가지고
청정한 것에 집착할 것 같으면,
却生淨妄(각생정망)하나니→
도리어 청정하다고 하는데 붙은 망상.
청정하다고 하는데 대한 관념.
그것이
淨妄입니다.
淨에 대한
妄想(망상).
淸淨하다고 하는 그
妄想을 내게 되나니,
괜히 마음을 일으켜 가지고
청정에 집착 하며는,
淸淨의
妄이 생기게 된다. 이말이지요.
妄無處所(망무처소)라→
妄이라고 하는 것은
處所가 없는 것이다.
着者是妄(착자시망)이며→
집착하는 그것이 곧 妄이다.
이것 참, 아주 차원 높은 소리면서 아주
妙(묘)한 말이예요.
妄想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處所가 없는 것이다. 집착하는 그 순간
그것이
妄이 된다. 이겁니다.
본래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없거든요.
어둠이 없어요.
어둠이 없는데 어둠이 있다고
우리가 생각을 하고 보는 거기에
비로소 그 순간에 벌써 어둠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집착하는 그것이 곧
妄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 전에 제가 송광사 관음전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간혹 하는데,
송광사 문수전에서 참선 한다고
閑(한) 철이예요. 결제철도 아니고
보통 해제 철인데 문수전에서 열심히
며칠 참선을 하고 있다가, 그 때는
문수전 바로 옆에 관음전 법당이 있는데,
관음전 법당 부전을 제가 봤어요.
아침저녁 예불을 제가 해야 돼요.
그 때는 송광사에 전기가 안 들어올 때인데,
3시에 일어나니까 너무 캄캄한 거예요.
목탁소리를 듣고는 일어나서 세수를
더듬더듬해서 하고는 찾아 가는데,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익숙한 길이고
가까우니까 법당까지는 그런대로
더듬더듬 가서 모서리 문으로 딱 들어갔는데
정말 어두워요.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겁니다.
그 전에는 하늘에 구름이 설사 끼었어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빛이 있거든요.
그런데 법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정말 아무 것도 안 보여요.
아예 눈감는 것이 좋다 싶더라고요.
그래 눈 딱 감고 그냥 갔어요.
눈을 딱 감고 문을 열고,
제가 눈을 감는 것이 좋다고 할 때는
얼마나 어두웠다고 하는 것을
제 속으로 굉장히 깊이 느꼈겠지요.
아예 눈을 감고 늘 걸어가는 방향으로,
저쪽 문에서 부처님 있는 데 까지 몸을
어느 각도로 틀어서 몇 걸음 걸으면 된다는
느낌이, 항상 같은 동작이었으니까 느낌이 딱 있어요.
평소에 세어놓은 것은 아닌데,
그 날도 세어가면서 간 것은 아닙니다.
이 정도 걸으면 틀림없이 탁자가 있고
성냥이 놓여져 있다는 감각대로 딱
그 자리에 있어요. 더듬거릴 필요 없이,
그래 불을 탁 켜는 순간에 방이 밝아질 것 아닙니까.
촛불 딱 밝히는 그 순간에 그렇게 어둡던
어둠이 도대체 어디 갔느냐?
내가 들어올 때 문도 닫고 들어왔어요.
문 열려있는 곳은 아무 곳도 없어요.
문에 틈도 없어요. 불을 켜는 그 순간
그 어둠이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 이거예요.
문틈이 있으면 문틈으로 빠져 나가겠거나,
문을 열어 놨으면 문 열어놓은 곳으로 빠져
나갔다고 억지를 쓸 수도 있겠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이 어둠이라고 하는 것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주 여실히 깨달았어요.
아!
이 어둠이라는 것이 우리착각이구나!
妄念(망념).
妄想(망상)이라고 하는 것도
순전히 착각이구나!
어둠은 실체가 없어요.
그래
“無明(무명)”
이러지요? “밝음이 없다.”이런 표현을 써요.
“어둡다”
고 표현을 하지 않고,
“밝음이 없다.”
이렇게
無明行識(무명행식).
인간의 시초의 삶의 순간을,
중생의 어떤 삶의 시작을
“無明”이라고 보지 않습니까?
“煩惱無明(번뇌무명)” 이런 말도 하고요.
“밝음이 없다.”
고 했지
“어둡다”
고는 표현 안 했어요. 그런데 편의상
어둡다고 하는 말을 쓰기는 쓰는데...
그 때 그 순간
煩惱라고 하는 것도,
옛날 조사스님이나 부처님이 제대로 된
설명. 뭐 방편으로 이야기한 것 말고,
제대로 당신의 소견을 이야기하는
대목에 보면, 번뇌 같은 것 인정 안 해요.
번뇌가 어디 있어요?
‘煩惱卽是菩提(번뇌즉시보리)다.’
이겁니다. 생사 곧 열반 이다.
‘生死涅槃相共和(생사열반상공화)
생사 곧 열반이다’ 이겁니다.
열반 따로 있고 생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법신 그대로 육신이고,
육신 그대로가 법신이다 이겁니다.
육신과 법신이 둘이 아니다.
하나다 이겁니다.
그런 이야기가 그냥 부지기수거든요.
그야말로 조사어록 같은 거, 펼치면
그냥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와 닿지요.
그런데 그 순간 정말 맞는 이야기구나!
조사스님들이 그냥 한 소리가 아니구나!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어둠과 밝음이 둘이 아니다.
보리와 번뇌가 둘이 아니다.
라고 하는 평소에 많이 보아왔던
그런 말씀이 새삼 정말 살아서 제 가슴에
와 닿는 것을 그때 사 느꼈어요.
그래 그 순간 제가 참 큰 경험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것을
“小見性(소견성)이다.”
이런 말을 해요. 작은
見性이다. ㅎㅎㅎ
小見性인지
大見性(대견성)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그런 표현을 제 나름대로 하는데,
그렇습니다. 이게
妄이라고 하는 것이
處所가 없지요.
妄無處所라. 어디 있는 장소가 없어요.
집착하는 것.
妄이라고 집착하는 그것이 곧 妄이다.
그러면
淸淨(청정)한 것은
形相(형상)이냐?
밝음은 있느냐 이거요.
밝음도 형상이 없어요.
淨無形相(정무형상)이라→
정도 형상이 없다.
却立淨相(각립정상)하야→
도리어 ‘청정하다.’ 아니면 ‘텅 비었다.’고 하는
그 나름의 관념을 세워 가지고서,
言是工夫(언시공부)인댄→
‘공부다.’
그것이 ‘공부다.’라고 생각 한다면,
作此見者(작차견자)는→
이러한 소견을 짓는 사람은,
障自本性(장자본성)하야→
스스로의 본성을 장애해서,
却被淨縛(각피정박)하리라→
도리어 청정의 속박을 입게 될 것이다.
그 해탈.
해탈해서 해탈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해탈에 집착 하면 해탈의 속박을 입게 된다고요.
해탈은 그냥 자유로운 것인데,
“해탈” “해탈”해서 해탈에 집착하면
해탈의 속박을 입게 된다.
어떤 조사스님에게
頓悟入道要門論(돈오입도요문론)을 쓴
大株慧海(대주혜해)에게
[돈오요문]에 보면,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라고 하니까,
그 스님 대답이
“누가 너를 속박하고 있느냐?
누가 너를 속박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느냐?
그런데 뭘 해탈을 묻느냐?”
그 해탈에 집착해서
해탈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지요.
자기의 본성을 향해서
도리어 청정이라고 하는 속박을 입게 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