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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 강 - 機緣品- 2
僧法達은 洪州人이라 七歲에 出家하야
常誦法華經이러니
來禮祖師하되 頭不至地어늘
師-
訶曰, 禮不投地인댄 何如不禮리오
汝心中에 必有一物하니
蘊習何事耶아 曰, 念法華經하야
已及三千部호이다
祖曰汝若念至萬部하야
得其經意라도 不以爲勝則
與吾偕行이어니와
汝今負此事業하고 都不知過하니
聽吾偈하라 曰
禮本折慢幢이어늘 頭奚不至地오
有我罪卽生이오 亡功福無比니라
師-
又曰, 汝名什麽오 曰法達이니이다
師曰,
汝名法達이라니 何曾達法고
復說偈曰,
汝今名法達하니 勤誦未休歇이로다
空誦은 但循聲이요
明心은 號菩薩이니라
汝今有緣故로 吾今爲汝說하노니
但信佛無言하면
蓮花從口發하리라
***
僧(승) 법달이라고 하는 스님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기연품이라는 내용에 대해서
조금 말씀을 드렸는데
機緣(기연)이라고 하는 것이 수행하겠다고
어느 회상에 들어와서 꾸준히 자기 나름대로
공부를 했지만 그 공부가 덜 됐을 뿐더러
또 성숙 됐다 하더라도 그 깨달음의 순간을
열어줄만한 조건들이 갖춰지지 아니하면,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지요.
여기에 지금 법달스님이라는 이는
법화경을 그 동안 3000번이나 3000부를 외웠다고
했는데, 3000讀(독)을 했다는 뜻이겠지요.
그 정도로 많이 읽었는데, 그 정도 읽었다면
첫째 신심이 장하고 그만치 또 망상이 없고,
청정한 어떤 정신세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깨달음을
이룰만한 계기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작은 계기가 되어서 비로소 깨달음을
이루게 된 것.
그런 것들을 기연이라. 그런 말을 하지요.
석가모니 같은 이들은 6년 고행 끝에 보리수
下에 앉아서 일주일간 선정에 들어 있는데
샛별을 보고, 납월 팔일 날 아침에 떠오르는
샛별을 보고, 그 샛별을 보는 그 순간 깨달음을 이뤘다.
흔히 그렇게 표현을 하는데 샛별은 매일 아침 떴을
것이고 매일 아침 봤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날, 부처님의 공부가 완전히 성숙한 그런
순간이었고, 그러다보니까 그 샛별 떠오르는
특별한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깨닫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하나의 기연이 됩니다.
전번에도 조금 말씀드렸지만 어떤 이들은 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는 이도 있고,
또 일하다가 돌이 경사진 길을 쭉 굴러가서
대나무가 서 있는데, 대나무를 툭 치면서
굴러가겠지요? 돌이 굴러서 대나무를 툭 치는
그 순간 그것을 보고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또 영운도사라고 해서, 영운스님 같은 이들은
매년 보는 복숭아꽃인데 그 복숭아꽃 피는
모습을 어느 봄날 보는 순간에 깨닫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다 기연입니다.
여기서는 법화경을 3000부나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소식이 없었는데,
육조스님의 말씀 몇 마디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든지, 그것을 言下(언하)에 大悟(대오)라.
그런 표현을 씁니다. 어떤 계기에,
一機一境(일기일경)이라.
어떤 경계위에서 깨닫는 수도 있고,
어떤 기회에 깨닫는 수도 있고,
또 언하에, 말씀을 듣고 그 말에
깨닫는 수도 있고요.
경허스님 같은 이들도 일꾼들이 가을에
소작을 해서 곡식을 갖다 바치러 왔다가,
자기들끼리 잡담하는 소리를 듣고 깨닫는다든지,
그 깨닫는 계기는 어떻게 보면 참 하찮은 일에
깨달아요. 그러나 그 순간 인연이 또 맞았고요.
또 그만치 그 사람의 공부가 성숙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잡담을 평생 들어도 못 깨닫는 것은 그 만치
공부가 성숙이 안 되어서 그럴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기연품을 보면 괜찮습니다.
傳燈錄(전등록)이라고 하는 선종
史書(사서)로서 제일로 치는 그런
책이 있는데요. 전통교육 기관인
강원에서 옛날에는 화엄경까지를
대교라고 하고 화엄경을 마치고 나면
隨意科(수의과)라는 과가 있어요.
그건 뭐라고 할까요?
박사과정이라고나 할까요?
그 과정에
傳燈(전등) ·
拈頌(염송) ·
法華經(법화경).
이 세 가지가 있다고요. 그 외에 또
다른 것을 보고 싶으면 그 과정에서
더 보기도 하는데요.
거기에 전등록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전등록은 거의가
이 기연품에 해당됩니다.
이 육조단경으로 치면...
어떤 수행자가 어떤 계기에 어떤 깨달음을 이뤘고
또 어떤 사람과 어떤 말을 주고받다가, 그 말에
문득 마음의 문이 열렸다는 것들을 쭉~~ 기록해
놓고 또 그 분의 법문을 소개를 간단간단하게...
어록의 내용이 상당히 많지만, 그 중에서 중심
되는 사상이라고 할 만한 그런 것들을 간추려서
쭉~~ 소개해 놓은 전등록이 있지요.
그것이 권수로 30권이라고 흔히 이야기를 하는
상당히 많은 량의
禪宗史書(선종사서)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 데에
보면 여기에 있었던 이런 계기들이 상당히 많이
소개되고 있어요. 거기에서 제가 가끔 떠 올리는
것이
馬祖(마조)스님의 제자 가운데
大株慧海(대주혜해)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요.
성철스님이 좋아하시는
頓悟入道要門(돈오입도요문)의 저자가
대주혜해스님인데요.
대주혜해스님이 마조스님이라는 아주
큰 선지식을 친견하고는,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니까 “어디로, 어디로 어디서 살다가
어떻게 해서 왔습니다.”
“여기 뭐 하러 왔느냐?”
“불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수행자는 의례히 대답을 그렇게 하지요.
“자기 보물창고는 버려둔 채 집을 버리고
집도 없이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찾고자
한단 말이냐?”그렇게 마조스님이 말하지요.
그런 말들이 참 아주 불법의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다.
“자기 보물창고는 버려둔 채 부질없이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찾고자 한단 말이냐?”
그러니까
“무엇이 저의 불법입니까?”
그렇게 대주스님이 다시 물었어요.
“그대가 나에게 묻는 그 사건. 그 일이 곧
그대의 보물창고다.” 그대가 나에게 이렇게
질문 할 수 있는 그 근원이겠지요?
그 근원 자리가
“바로 그대의 보물창고다.”
그런 말 한 마디에...
아주 재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그냥 깨달아 버려요.
(ㅎㅎㅎㅎㅎㅎㅎ)
뭐 오래 걸리지도 않고 첫날 인사하러 온날
그렇게 깨달아 버리는 겁니다.
그런 기록들 보면 참 통쾌하고, 아무리 읽어도,
읽어도 그런 대목은 스릴이 있고요.
정말 그런 분들이 그런 계기에 수생을 닦고
닦아온 그런 결실의 순간을 보는
그런 일이기 때문에 그것 참 봐도, 봐도
재미습니다. 그 순간에 깨닫고 나서는
그 다음 날 자기의 깨달음과 그 동안에
쌓은 불교적 지식을 쭉~~ 총정리해서...
그 깨달음의 안목이 있고서 저술이
이루어져야 그것이 제대로 후세에
오랫동안 남지요. 그래서 그 분이 쓴 것이
頓悟入道要門이라 해서,
禪宗史(선종사)에 아주 뛰어난 명저를 남겼지요.
그래서 뒷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는 아주 크게
도움을 많이 받고...
여기도 보면 영가스님하고 육조스님이 만나는
인연이 나와요.
육조스님 밑에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특출한
몇 분만 뽑아서 여기에 실었는데요.
영가스님과의 그 대화도 또 상당히 여러 입에
회자가 되는 그런 내용들이고요.
또 마조스님하고 대매법상이라고 하는 스님.
그것도 또 아주 통쾌한 대목입니다.
마조스님은 일찍이 그 위에 스승한테서
아주 큰 그릇으로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마조스님의 제자가 아주 큼직큼직한 제자들이
참 많아요.
그 당시는 또 도인들이 많이 쏟아질 때고요.
마조스님의 제자 중에
大梅法常(대매법상)이라는 이가 있어요.
그 대매법상이라는 이는 마조스님 회상에
가서 공부를 한참 하다가,
마조스님법문에
“卽心是佛(즉심시불)이라.” 그런 법문을 했거든요.
“마음이 곧 부처다.” 그 말 한 마디에 그만 자기
나름대로 어떤 확신이 있어서, 대매산에 가서
혼자 살았어요.
마조스님이 보니까 아주 꽤 괜찮은 그릇이 와서
공부를 하는 것 같더니, 어느 날 안보여서 딴
사람한테 물어보니까 “아 그 사람이 즉심시불이라는
법문을 듣고는 그만 됐다.
” 하면서 “저기 혼자 가서 산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네가 한번 가서 점검을 좀 해 봐라.”
점검을 할 만한 사람을 보내는 것이지요.
점검을 하러 제자가 가서 점검을 하는데...
“스님은 마조스님 회상에 있다가 여기 혼자
와서 뭐 하느냐?” 고, 그러니까 그 대매스님이
있다가 “나는 마조스님께서 즉심시불이라,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 듣고는 그 이상 더
바랄 것도 없고, 그 이상 더 공부할 것도 없고
해서 여기 와서 이렇게 사노라.” 고,
“아 내 마음이 부처인데
더 이상 뭐 바랄 것이 있느냐?” 고. 그리고는
하던 일을 또 하는데...
이 심부름 간 스님이 또 가당치 않은 스님이지요.
“스님! 그 전에는 마조스님이 즉심시불이라고
그렇게 법문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법문 벌써
유행이 지나가고 안 한다.”고, (ㅎㅎㅎㅎㅎ)
그러니까
“그럼 요즘은 무슨 법문 하느냐?”고 하니까
“非心非佛(비심비불)이라.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법문을 합니다.
” 심부름 간 사람도 도인이거든요.
안목이 아주 뛰어난 사람을 보내고,
마조스님을 대신할 만한 그런 사람을
보낸 것이지요.
그렇게 떡 하니까 이 대매스님이
“노장이 미쳤구만. 자기야 비심비불이라
하든 뭐라고 떠들던 간에 나는
卽心是佛이다.” 하고 하던 일을 그대로
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심부름 갔던 사람이 그 다음에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되돌아가서는
마조스님한테 그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더니,
“大梅가 어지간히 익었구나!”
그렇게 인가를 했다는 겁니다.
“매실이 어지간히 익었구나!”
그런 대목들도 참 아주 통쾌하지요.
서양 사람들이 선문답. 특히 선문을 좋아하는
그런 이유가 바로 그런 짤막한 대화 속에
온갖. 온갖 수 백 페이지. 수 천 페이지의
논리적인 전개를 그 속에 다 함축하고 있고,
그래서 그 속에서 많은 어떤 영감을 얻고요.
그래서
요즘 서양 사람들이 선문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보면 좋아할 만한 이유가 다 있지요.
라쥐니쉬 같은 사람도 마조스님 어록 같은 것.
또 벽암록 같은 것.
신심명. 이런 것을 전부 강의를 다 해 내고...
그 사람은 말이 좀 많지요.
말이 참 많지만, 그래도 정말 그럴듯한 강의를
많이 해 내고 그러는데, 그런 말 한 마디가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사람의 몇 생의
공력이 그 한 마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몇 생의 공력이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것이 생명이 있는 말이 되고,
그것은 그냥 말 배워서 나온 말이 아니지요.
한 마디 툭툭 내뱉는 그 말 속에는
그 스님의 수많은 생의 무게가.
인생의 무게가 그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에서 맛 볼 수없는 그런 것이지요.
다른 일을 하다가 그냥 심심해서 지은
저술이 아니라, 정말 자신의 인생을 다
쏟아 부어서 그것도 수 십 년을. 어떤
경우는 몇 생을 그냥 쏟아 부어서 비로소
터득한 깨달음의 경지를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이지요.
아마 여기의 우리가 지금 공부 하려고
하는 법달스님의 경우도 역시 그와
유사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전등록을 위시해서 그 외에 다른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든 짧은 대화 내지 짧은 순간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요.
僧 法達(승 법달)은 洪州人(홍주인)이라
七歲(칠세)에 出家(출가)하야
常誦法華經(상송법화경)이러니→
승 법달은 홍주사람인데
일곱 살에 출가를 해서
항상 법화경을 외웠다. 그런데
來禮祖師(내례조사)하되→
와서 조사에게 예배를 드리되.
頭不至地(두부지지)라→
머리가 땅에 이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배를 하려면 이마가 땅에 딱 닿아야
불교의 예배인데요. 가만 보니까 머리가
땅에 안 닿는 걸로 봐서는 이 사람이 뭔가
속에 상당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 나름대로 내 놓을만한 것이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師 訶曰(사 가왈)→ 스님이 꾸짖어 가로대,
禮不投地(예불투지)인댄→
예를 하는데 머리가 땅에 닿지 아니하니,
(예불투지인댄이라고 적었으나
예불투진댄이라고 읽어야...)
何如不禮(하여불례)리오→
어떻게 그런 예답지 않은 예를 그렇게 하느냐?
'예답지 않은 것을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그런 걸로 봐서
汝心中(여심중)에→ 그대의 마음 가운데
必有一物(필유일물)이라→
뭔가 하나 자랑꺼리가 있을거다 이겁니다.
반드시 일물이. 하나의 물건이
네 마음속에 뭔가 있다.
蘊習何事耶(온습하사야)아→
어떤 일을 쌓고 익혔느냐?
어떤 일을 익혀서 네가 그렇게 나한테 예배도
예배답지 않게 그저 마지못해서 할 정도로
네 가슴속에 그렇게 내놓을만한 자랑꺼리가
틀림없이 있어 보이는데 그런 거냐? 물으니까
曰, 念法華經(왈, 염법화경)하야→ 법화경외우기를
已及三千部(이급삼천부)호이다→
무려 삼천부. 3000번이나 외웠다. 이런 뜻입니다.
祖曰汝若念至萬部(조왈여약염지만부)하야→
설사만부를 외워서. 만 번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得其經意(득기경의)라도→
그 경의 뜻을 얻었다 하더라도,
不以爲勝則(불이위승즉)→
그 수승함을 여기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수승함을 여기지 아니할 것 같으면,
與吾偕行(여오해행)이어니와→
내가 그대와 더불어 같이 행할 수 있지만,
汝今負此事業(여금부차사업)하고→
그대가 지금 법화경 3000번 외운 것을 자부심을 갖고
都不知過(도부지과)하니→
도대체가 그것이 허물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聽吾偈(청오게)하라→
내 게송을 한번 들어봐라. 내 가르침을 들어라.
曰(왈)→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겁니다.
법화경공부를 했다손 치더라도,
만 번을 외웠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자기가 잘 난 것이라고
여기지 아니하면, 그것이 참 좋은 일인데...
與吾偕行(여오해행)이라→
나와 더불어 같이 행할 수 있다.
나하고 같이 놀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대는 지금 그 일을 가지고 상당히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이 허물인데도
불구하고 허물인줄을 도대체 알지 못한다.
그래가지고는 안 된다는 그런 의미가
또 포함되어 있지요.
그러면서 게송을 하나 소개를 합니다.
禮本折慢幢(예본절만당)이라→
예라고 하는 것은
본래 慢幢을 꺾고자 하는 것이다.
慢幢.
교만의 깃발을 꺾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한테 왜 예를 하느냐?
왜 절을 하느냐? 자기 없애고
자기 죽이기 위해서이지요.
그것을 慢幢 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참 좋은 표현이에요. 아만의 깃발이라
이것이지요. 대개 덜 익은 벼가 꼿꼿이
고개를 쳐들듯이...
제대로 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설된 사람들이 대개 뭐가 있으면
이렇게 남에게 고개를 안숙이고,
잘난 체하고, 그 잘난 체하는 것이
그냥 눈에 다 드러나지요. 그거 어떻게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없고, 어떻게 할 길이 없다고요.
그런 것은...
“禮”라는 것은,
상대에게 “예”를 한다는 것은
내 자신을 겸손하고 나를 꺾고자 하는 것인데...
頭奚不至地(두해부지지)오→
머리가 어찌하여 땅에 이르지 않는가?
有我罪卽生(유아죄즉생)이라→
我라고 하는 것이 있을 것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면
죄가 곧 거기서부터 생긴다.
亡功福無比(망공복무비)라→
亡功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자기가
공을 많이 쌓았다 하더라도 功을 잊어버리면,
功을 쌓아 놓고도 자기가 功을 쌓았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功을 잊어버릴 것 같으면,
그 복이 비교 할 데가 없을 것이다.
보통 우리가 뭘 공을 쌓고, “相 낸다.”
“상 낸다.”
하는 그런 말이 불교에 참 많이 있는데요.
그래요. 하고서 안한 것처럼 그렇게
겸손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 안낼 수 있으면 그것이 훨씬 복이 더
되는 것이지요.
亡功福無比라.
공을 아무리 쌓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잊어버리면 복이 훨씬
수승해서 비교 할 바가 없다.
제가 문득 생각이 나는데요.
그전에, 그때 신도님들도 얼마 안 될 때이고,
또 절에 와서 뭘 공을 쌓는 일이 흔치 않을 때였어요.
지금 저기 오백나한이 있는 거주암. 거기에
그전에 제가 아주 옛날에 은해사에 살 때,
나한님들 방석을 바꾸는 그런 일이 한번 있었어요.
그것도 그 당시로선 큰 불사예요.
500명. 작은 방석이지만 500개를 화주를 해서
방석을 바꾸는...
우리가 가서 며칠을 살면서 도왔어요.
돌이니까 상당히 무거워요. 그런데
주지스님하고 대 화주 보살이,
제가 지금 성도 기억합니다. 도 보살이라고...
도 씨인데요. 우리가 보기에 대 보살이에요.
그런데
주지스님하고 막 싸우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러면서 우리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말이,
“내가 상 낸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런 말이 나오는데...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내가 상 낸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고 조건을 딱. 붙이면서...
불사를 하는데 뭐가 잘, 의견이
잘 안 맞았던가 봐요.
지금도 그것이 귀에 쟁쟁해요.
그 소리를 몇 번 큰 소리로 하더라고요.
참 좋은 일은 했는데...
그 당시 우리가 보기엔 참 대 보살로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그런 소리가 기억에 남았어도
역시 그 보살에 대해서 제가 좋은 감정은
가지고 있습니다. 워낙 학인스님들한테 잘 하고...
그 당시
그 만한 사람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한 번은 그렇게 큰 소리 치는 것을 봤어요.
그것마저 안 냈으면 참 대단할 뻔 했는데,
그것이 어려운가 봐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가 봐요.
그래 본인은 상 낸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을 해서
하는 이야기인데 결국은 또 그렇게 되고 말더라고요.
※
亡功福無比라,
功을 잊어버리면,
복이 비교 할 데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스님이 일단은
법화경을 3000讀이나 했으니,
그 아만이 있겠지요?
그 정도 공부했으면 대단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일단은
육조스님의 눈에는 병으로 보인 것이지요.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師 又曰(사 우왈)→ 또 말씀하시기를,
汝名什麽(여명십마)오→ 그대 이름이 뭐냐?
曰法達(왈법달)입니다. 法達. 아주 이름이 좋지요?
師曰, 汝名法達(사왈, 여명법달)이라→
법을 통달했다 이런 뜻이겠지요?
何曾達法(하증달법)고→
어찌 일찍이 법을 통달했는가?
육조스님이 이럴 때 뭔가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게송이라도 하나씩 남겨서 깨우쳐주고자하는
그런 마음이 아주 열렬했던
그런 때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이렇게 이름을 하나 딱 들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또 하나의 게송이 생각이 나서 그걸로 해서
깨우쳐 주고자하는 것이지요.
復說偈曰(부설게왈)→
다시 또 게송을 설해 말하는데,
汝今名法達(여금명법달)하니→
그대가 지금 이름을 법달이라고 하니,
勤誦未休歇(근송미휴헐)이로다→
부지런히 법화경을 외우기는 했는데
쉬지를 못한다. 아직은 쉬지를 못한다.
空誦(공송)은→ 헛되게 외우는 것은,
但循聲(단순성)이요→
다만 그 소리를 쫓아 가는 것.
循聲 = 소리를 쫓아 가는 것이고,
明心(명심)은
號菩薩(호보살)이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을 외우는 것은
마음 밝히자고 하는데 있는 것인데,
괜히 소리만 헛되게 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밝힌다고 하면 이것이 진짜
보살이 된다는 것이지요.
汝今有緣故(여금유연고)로→
그대가 지금 인연이 있는고로,
吾今爲汝說(오금위여설)하노니→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해서 이야기를 하겠다.
但信佛無言(단신불무언)하면
蓮花從口發(연화종구발)하리라→
다만 부처님이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을 믿을 것 같으면,
부처님이 말씀이 없다는 그 도리를 믿을 것 같으면,
蓮花從口發이라. 연꽃이 입으로부터 피리라.
묘법연화경을 외웠다고 하는 사람과
또 연꽃이라고 하는 것. 이것을 잘
연관을 시켜서 좋은 게송을 남겼어요.
부처님이 말씀이 없다고 하는 여기에
우리가 좀 생각을 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경전이야 부처님이 다 설하신 것이고.
설사 보살이 설했다 하더라도, 역시
부처님을 대신해서 설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왜 육조스님은 부처님이 말이 없다고 했느냐?
부처님은 49년간 그렇게 많은 말씀. 많은 설법을
해서 팔만대장경이라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부처님의 그 본마음에 비춰보면.
부처님의 정말 그 오롯한 정신에 입각해서 보면
한 마디의 말씀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런 말이 있고요.
“나는 한 마디도 설한바가 없다.”
그런 말도 있고요.
이것은 어지간히 불교를 아는
사람으로서는 상식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어도 말한바 없이
말씀했다. 부처님의 본심에서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觀音菩薩無說說(관음보살무설설).
南巡童子不問問(남순동자불문문).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것 아주 기가 막힌 詩지요?
그것이 불교의 진수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가 있습니다.
觀音菩薩無說說
南巡童子不問問
불교의 좀 차원 높은 이야기를 할 때,
법사스님들이 저런 말을 잘 쓰는데요.
관세음보살도 설하는바 없이 설하고,
관세음보살을 시봉하는 남순동자의
그림에나 형상으로 이렇게 합장하고
뒤따르는 동자가 있어요.
그 동자는
남순동자라고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 동자를 南巡(남순)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는 선재동자가 아닐까?
왜냐하면, 선재동자도 南쪽을 향해서
선지식을 찾아갔으니까요. 연관이 있을 겁니다.
어쨌든 관음보살의 시봉이자 뒤따르는
남순동자는 不聞聞이라.
설함이 없이 설하니까
또 듣지 않고 듣는다.
듣는 흔적 없이 듣고,
설하는 흔적 없이 설하고...
진리는 말을 떠난 것이니까요.
眞理(진리)는 離言(이언)이라.
진리는 말을 떠난 것이고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몰라도 그 정도 상식은 가지고 있잖아요.
진리가 참으로 말을 떠났는지
안 떠났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런 줄 알잖아요. 그래서
관세음보살도 부처님도 설하는바 없이
설하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은 無言이라.
부처님은 말씀이 없다는 것을 믿을 것 같으면
但信佛無言.
부처님은 본래 말이 없다는 것을 믿을 것 같으면,
蓮花가 從口發이라.
입에서부터, 연꽃이 입에서부터 피리라는 말은,
연화가 뭡니까? 묘법연화경의 도리지요.
묘법연화경의 도리가 바로 그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올 수 가있다.
그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도리를,
말은 간단하지만 아주 깊은 뜻을 잘 나타냈습니다.
觀音菩薩無說說.
南巡童子不聞聞. 하는
그 도리하고 일맥상통 하지요.
이렇게 게송을 또 두 번째 소개를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