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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되 신명(神明)의 경지를 통하고 사물(事物)의 자연법칙을 꿰뚫은 것으로서 《역경(易經)》과 《춘추(春秋)》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역경》은 미묘하고 《춘추》는 드러내었으니, 미묘란 주로 진리를 논한 것으로서, 그것이 흘러서는 우언(寓言)이 되는 것이요, 드러냄이란 주로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것이 변해서 외전(外傳)이 이룩되는 것이다. 저서(著書)하는 데는 이러한 두 갈래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주-D001] 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 다른 여러 본에는 모두 이 서(序)가 보이지 않고, 다만 최근에 발견된 ‘연암산방본(燕巖山房本)’에 실려 있으므로 이에 추가하였다.
[주-D002] 우언(寓言) : 말이나 글에 실제가 아닌 뜻을 의탁한 것이니, 장주(莊周)의 《남화경(南華經)》 중에 우언편(寓言篇)이 있다.
[주-D003] 외전(外傳) : 정사(正史)에 싣지 않은 전기를 내전(內傳)과 구별하기 위한 서술이니, 《방경각외전(放瓊閣外傳)》이 이에 해당한다.
내 일찍이 시험삼아 논하여 보았노라. 《역경》의 육십사괘(六十四卦) 중에서 언급한 물건으로서 용이니, 말이니, 사슴이니, 돼지니, 소니, 양이니, 범이니, 여우니, 또는 쥐니, 꿩이니, 독수리니, 거북이니, 붕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다 참으로 있었던 물건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하진 못할 것이다. 또 인간에 있어서는 저 웃는 자, 우는 자, 부르짖는 자, 노래부르는 자나, 또는 눈먼 자, 발 저는 자, 엉덩이에 살이 없는 자, 그 척추의 고기가 벌어진 자 들을 언급하였는데, 그런 인간이 참으로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초(蓍草)를 뽑아서 괘(卦)를 벌이면, 그 참된 상(象)이 곧 나타나고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미묘한 곳으로부터 드러내는 경지로 지향하는 까닭이었으니, 우언(寓言)을 쓰는 이가 이러한 방법을 쓴 것이다.
[주-D004] 시초(蓍草) : 괘(卦)를 뽑는 데 쓰는 영초(靈草).
[주-D005] 회린(悔吝) : 회(悔)는 괘(卦)의 상체(上體)요, 린(吝)은 인색(吝嗇)함이니, 곤괘(坤卦)에서 나타난 효상(爻象)의 하나.
《춘추》중에 기록된 2백 42년 사이의 일에는, 온갖 제사와 수렵(狩獵)과 조회와 회합과 정벌(征伐)과 침입이, 실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좌구명(左丘明)ㆍ공양고(公羊高)ㆍ곡량적(穀梁赤)ㆍ추덕보(鄒德溥)ㆍ협씨(夾氏) 등의 전(傳)이 제각기 같지 않을 뿐더러, 이를 논하는 자들이 남이 반박하면 나는 지키기로 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이는 드러난 곳에서부터 미묘한 곳으로 드는 까닭이었으니, 외전(外傳)을 쓰는 이가 이러한 방법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 기록에, “장주(莊周)가 저서에 능하다.”고 일렀던 것이다.
[주-D006] 좌구명(左丘明) : 춘추 때 노(魯)의 태사(太史). 《춘추전(春秋傳)》을 지었다.
[주-D007] 공양고(公羊高) : 춘추 때 자하(子夏)의 제자. 역시 《춘추전》을 지었다.
[주-D008] 곡량적(穀梁赤) : 역시 자하의 제자로서 《춘추전》을 지었다.
[주-D009] 추덕보(鄒德溥) : 명(明)의 학자. 덕함(德涵)의 아우. 《춘추광해(春秋匡解)》를 지었다.
[주-D010] 장주(莊周) : 춘추 시대의 철학가(哲學家). 저서에는 《남화경(南華經)》이 있다.
장주의 저서 중에 나타난 제왕(帝王)과 성현(聖賢)이나, 임금과 정승, 처사(處士)와 변객(辯客) 들에 대한 일도, 더러는 정사(正史)에서 빠뜨린 일을 보충할 수 없지 않을 것이다. 장(匠) 석(石)이나 윤(輪) 편(扁)이 반드시 그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심지어는 부묵자(副墨子)니 낙송손(洛誦孫)이니 하는 자는 어떤 인물들이었던가. 또 망량(罔兩 물귀신)이니 하백(河伯 물귀신)이니 하는 귀신이 과연 말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외전이라면 참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겠고, 우언이라 하더라도 미묘함과 드러냄이 잇따라 변해지곤 하여, 사람으로서는 그 원인을 측량할 수 없으므로 이를 조궤(弔詭 궤변(詭辯))라 불러 왔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학설을 결국 폐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논평을 잘 전개하였기 때문이니, 그를 저서가(著書家)로서의 웅(雄)이 아니라 이르진 못할 것이다.
[주-D011] 장(匠) 석(石) : 옛 장인(匠人). 석(石)은 그의 이름.
[주-D012] 윤(輪) 편(扁) : 옛 수레바퀴를 만드는 공인. 편(扁)은 그의 이름.
[주-D013] 부묵자(副墨子)니 …… 하는 자 : 문자(文字)에 대한 의인칭(擬人稱)이니, 《남화경》 대종사(大宗師)에, “나는 부묵자에게 들었고, 부묵자는 또 낙송손(洛誦孫)에게 들었노라.” 하였다. 낙송은 반복(反復)하여 외는 것을 이름이니, 역시 의인칭이다.
이제 대체로 연암씨(燕巖氏)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알지 못하겠다. 그 어떠한 글이었던고. 저 요동(遼東) 들을 건너서 유관(渝關)으로 들어 황금대(黃金臺) 옛 터에 서성이고, 밀운성(密雲城 하북성에 있다)으로부터 고북구(古北口)를 나서 난수(灤水) 가[邊]와 백단(白檀 밀운성의 현(縣))의 북녘을 마음껏 구경하였는바 진실로 그런 땅이 있었으며, 또 그 나라의 석학(碩學)ㆍ운사(韻士)와 함께 교제하였는바 진실로 그런 인물이 있었으며, 사이(四夷)가 모두 이상한 모양과 기괴한 옷에 칼도 머금고 불도 마시며, 황교(黃敎) 반선(班禪)의 난쟁이가 비록 괴이한 듯하지마는 그가 반드시 망량이나 하백은 아닐 것이요, 진귀한 새나 기이한 짐승, 아름다운 꽃이나 이상한 나무의 그 정태(情態)를 곡진히 묘사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어찌 일찍이 그 등마루의 길이가 천 리라느니, 그 나이가 8천 세라느니 하는 따위가 있었단 말인가.
[주-D014] 연암씨(燕巖氏) : 저자 연암을 일컫는 말.
[주-D015] 유관(渝關) :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지명.
[주-D016] 황금대(黃金臺) : 하북성(河北省)에 있는데, 춘추 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세웠다.
[주-D017] 고북구(古北口) : 하북성에 있는 관(關) 이름. 곧 호북구(虎北口).
[주-D018] 난수(灤水) : 찰합이(察哈爾)에서 발원하여 열하성(熱河省)을 거쳐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주-D019] 사이(四夷) :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동이(東夷)ㆍ남만(南蠻)ㆍ서융(西戎)ㆍ북적(北狄)을 말한다.
[주-D020] 황교(黃敎) : 서장(西藏) 라마교(喇嘛敎)의 한 파. 그 교의 중들이 누른 빛깔의 옷을 입었으므로 이름하였다.
[주-D021] 반선(班禪) : 황교 즉 라마교의 교주(敎主). 반(班)은 박학(博學)이요, 선(禪)은 광대(廣大)의 뜻을 가졌다.
[주-D022] 그 …… 천 리라느니 : 《남화경》에 새 위나 대붕(大鵬)의 등마루가 천 리나 된다 하였다.
[주-D023] 그 …… 8천 세라느니 : 《남화경》에 이른바 영춘(靈椿)이 8천 년을 묵었다 하였다.
나는 이에서 비로소 장주의 외전에는 참됨도 있고 거짓됨도 없음이 아닌 반면, 연암씨의 외전에는 참됨은 있으나 거짓됨이 없음을 알았노라. 그리하여 이에는 실로 우언을 겸해서 이치를 논함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패자(覇者)에 비한다면, 진 문공(晉文公)은 허황하고 제 환공(齊桓公)은 올바르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하물며 그 이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어찌 황홀히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에 그쳤을 뿐이겠는가. 그리고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城郭)이나 건물, 경목(耕牧)이나 도야(陶冶)의 일체 이용(利用)ㆍ후생(厚生)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리라.
[주-D024] 진 문공(晉文公) : 춘추 시대 진의 임금. 문공은 시호요, 이름은 중이(重耳)니, 당시 오패(五覇)의 하나.
[주-D025] 제 환공(齊桓公) : 춘추 시대 제의 임금. 환공은 시호요, 이름은 소백(小白)이니, 역시 오패의 하나.
[주-D026] 이용(利用)ㆍ후생(厚生) : 정덕(正德)과 함께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서 이른바 삼사(三事)가 된다. 산업을 잘 다스려서 민생의 일용에 이롭게 하며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모든 일.
도강록(渡江錄) 6월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월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도강록 서(渡江錄序)
무엇 때문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는 말을 이 글 첫 머리에 썼을까. 행정(行程)과 음(陰)ㆍ청(晴)을 적으면서 해를 표준삼고 따라서 달수와 날짜를 밝힌 것이다. 무엇 때문에 ‘후’란 말을 썼을까. 숭정(崇禎) 기원(紀元)의 뒤를 말함이다. 무엇 때문에 ‘삼경자’라 하였을까. 숭정 기원 뒤 세 돌을 맞이한 경자년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숭정’을 바로 쓰지 않았을까. 장차 강을 건너려니 이를 잠깐 피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를 피했을까. 강을 건너면 곧 청인(淸人)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가 모두 청의 연호(年號)를 썼으매 감히 숭정을 일컫지 못함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대로 ‘숭정’을 쓰고 있을까. 황명(皇明)은 중화인데 우리나라가 애초에 승인을 받은 상국인 까닭이다. 숭정 17년에 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가 나라를 위하여 죽은 뒤 명이 망한 지 벌써 1백 30여 년이 경과되었거늘 어째서 지금까지 숭정의 연호를 쓰고 있을까. 청이 들어와 중국을 차지한 뒤에 선왕의 제도가 변해서 오랑캐가 되었으되 우리 동녘 수천 리는 강을 경계로 나라를 이룩하여 홀로 선왕의 제도를 지켰으니, 이는 명의 황실이 아직도 압록강 동쪽에 존재함을 말함이다. 우리의 힘이 비록 저 오랑캐를 쳐 몰아내고 중원(中原)을 숙청하여, 선왕의 옛 것을 광복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마다 모두 숭정의 연호(年號)라도 높여 중국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숭정 156년 계묘에 열상외사(洌上外史)는 쓰다. ‘후삼경자(後三庚子)’는 곧 우리 성상(聖上 정조(正祖)) 4년(1780) 청 건륭(淸乾隆) 45년 이다.
[주-D001] 도강록 서(渡江錄序) : 연암의 ‘수택본(手澤本)’에는 《열하일기 (熱河日記)》 서(序)라 하여 《열하일기》 첫머리에 두었으나 그릇되었다.
[주-D002] 의종열황제(毅宗烈皇帝) : 명의 최후 황제로서, 1635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에 북경이 함락되자 자살하였다.
[주-D003] 열상외사(洌上外史) : 연암의 별호(別號). ‘수택본’에는 열상외수(洌上外叟)로 되었다.
6월 24일 신미(辛未)
아침에 보슬비가 온종일 뿌리다 말다 하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30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에서 한둔하다. 밤에 소나기가 퍼붓더니 이내 개다.
앞서 용만(龍灣)의주관(義州館) 에서 묵은 지 열흘 동안에 방물(方物 선물용 지방 산물)도 다 들어왔고 떠날 날짜가 매우 촉박하였는데, 장마가 져서 두 강물이 몹시 불었다. 그동안 쾌청한 지도 벌써 나흘이나 되었는데, 물살은 더욱 거세어 나무와 돌이 함께 굴러 내리며, 탁류가 하늘과 맞닿았다. 이는 대체로 압록강의 발원(發源)이 먼 까닭이다.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주-D001] 당서(唐書) : 후진(後晉) 유후(劉煦)가 지은 당의 역사.
“고려(高麗)의 마자수(馬訾水)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마치 오리머리처럼 푸르르매 ‘압록강’이라 불렀다.”
[주-D002] 말갈(靺鞨) : 당에서 부르던 만주(滿洲)의 별칭. 거기에 말갈족 즉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백산은 곧 장백산(長白山)을 말함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이를 ‘불함산(不咸山)’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 일컫는다. 백두산은 모든 강이 발원되는 곳인데, 그 서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곧 압록강이다. 또 《황여고(皇輿考)》에는,
[주-D003] 산해경(山海經) : 일명씨(逸名氏)의 중국 고대의 지리서(地理書).
[주-D004] 황여고(皇輿考) : 명 장천복(張天復)이 지은 지리서.
“천하에 큰 물 셋이 있으니, 황하(黃河)와 장강(長江)과 압록강이다.”
하였고, 《양산묵담(兩山墨談)》 진정(陳霆)이 지었다. 에는,
“회수(淮水) 이북은 북조(北條 북쪽 가닥)라 일컬어서 모든 물이 황하로 모여들므로 강으로 이름지은 것이 없는데, 다만 북으로 고려에 있는 것을 압록강이라 부른다.”
하였으니, 대체 이 강은 천하에 큰 물로서 그 발원하는 곳이 시방 한창 가무는지 장마인지 천 리 밖에서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이제 이 강물이 이렇듯 넘쳐흐름을 보아 저 백두산의 장마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하물며 이곳은 예사의 나루가 아님에랴. 그럼에도 마침 한창 장마철이어서 나룻가 배 대는 곳은 찾을 수도 없거니와, 중류(中流)의 모래톱마저 흔적 없어서 사공이 조금만 실수한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정도이다. 그리하여 일행 중 역원(譯員)들은 다투어 옛 일을 끌어대어 날짜 늦추기를 굳이 청하고 의주 부윤[灣尹]이재학(李在學) 역시 비장(裨將 사신에게 시중드는 관원)을 보내어 며칠만 더 묵도록 만류했으나, 정사(正使)는 기어이 이날 강을 건너기로 하여 장계(狀啓)에 벌써 날짜를 써 넣었다.
[주-D005] 역원(譯員) : 통역관. 중국에 사행할 때에는 한학상통사(漢學上通事)와 청학상통사(淸學上通事) 이하 많은 역관이 따랐다.
[주-D006] 정사(正使) : 사행의 수석. 당시의 정사는 곧 연암의 사종형(四從兄)으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고 보니, 짙은 구름이 꽉 덮였고 빗기운이 산에 가득했다. 소쇄(梳灑)가 끝나자 행장을 정돈하고, 가서(家書)와 모든 곳의 답장을 손수 봉하여 파발(把撥) 편에 부치고 나서, 아침 죽을 조금 마시고, 천천히 관(館)에 이르렀다. 모든 비장들은 벌써 군복과 전립(戰笠)을 갖추었는데, 머리에는 은화(銀花)ㆍ운월(雲月)을 달고 공작(孔雀)의 깃을 꽂았으며, 허리에는 남방사주(藍紡紗紬) 전대(纏帶)를 두르고 환도(環刀)를 찼으며, 손에는 짧은 채찍을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면서,
[주-D007] 파발(把撥) : 공문서를 급히 전하기 위하여 설치한 역참(驛站).
[주-D008] 은화(銀花) : 정월 대보름날 밤에 등불을 다는 것. 여기에서는 그 모양을 형용하였다.
[주-D009] 운월(雲月) : 물건 변두리를 구름ㆍ달 모양으로 곱게 꾸민 것.
“모양이 어떻소.”
하며 떠든다. 그 중에 노 참봉(盧參奉) 이름은 이점(以漸), 상방(上房) 비장 은 첩리(帖裏) 첩리는 방언(方言)으로 철릭[天翼]이라 한다. 비장은 우리 국경 안에서는 철릭을 입다가, 강을 건너면 협수(狹袖)로 바꿔 입는다. 를 입었을 때보다 훨씬 우람스러워 보인다. 정 진사(鄭進士) 이름은 각(珏), 상방 비장 가 웃음으로 맞으면서,
“오늘이야 정말 강을 건너게 되겠죠.”
하자, 노 참봉은 옆에서,
“이제 곧 강을 건너갈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 둘에게,
“옳지 옳아.”
했다. 거의 열흘 동안이나 관(館)에 묵어서 모두들 지루한 생각을 품어 훌쩍 날고 싶은 기분이다. 가뜩이나 장마에 강이 불어서 더욱 조급하던 참에 떠날 날짜가 닥치고 보니, 이제는 비록 건너지 않으려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멀리 앞 길을 바라보니, 무더위가 사람을 찌는 듯하다. 돌이켜 고향을 생각하매 운산(雲山)이 아득하여 인정이 여기에 이르자 서글퍼서 후퇴할 의사가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평생의 장유(壯遊)라고 하여 툭하면,
“꼭 한번 구경을 해야지.”
하고, 평소에 벼르던 것도 이제는 실로 둘째에 속할 것이고, 그들의,
“오늘에야 강을 건넌다.”
하면서 떠드는 것도 결코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고, 곧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일 뿐이다.
역관 김진하(金震夏)2품 당상관 는 늙고 병이 위중하여 여기서 떨어져 되돌아가게 되자, 정중하게 하직하니 서글픔을 금하지 못하였다.
조반을 먹은 뒤에, 나는 혼자서 먼저 말을 타고 떠났다. 말은 자줏빛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더구나 두 귀가 쭝긋한 품이 참으로 만리를 달릴 듯싶다. 창대(昌大 연암의 마부(馬夫) 이름)는 앞에서 견마를 잡고 장복(張福 연암의 하인 이름)은 뒤에 따른다. 안장에는 주머니 한 쌍을 달되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里程錄) 한 축을 넣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짐 수색이 아무리 엄하단들 근심할 것 없었다.
성문(城門)에 못 미쳐 소나기 한 줄기가 동에서 몰려든다. 이에 말을 급히 달려 성 문턱에서 내렸다. 홀로 걸어서 문루(門樓)에 올라 성 밑을 굽어보니, 창대가 혼자 말을 잡고 섰고, 장복은 뵈지 않는다. 조금 뒤에 장복이 길 옆 한 작은 일각문(一角門)에 버티고 서서 위아래를 기웃기웃 바라보더니 이윽고 둘은 삿갓으로 비를 가리며 손에는 조그만 오지병을 들고 바람나게 걸어온다.
알고 보니 둘이서 저희들 주머니를 털어서 돈 스물 여섯 푼이 나왔는데, 우리 돈을 갖고는 국경을 넘지 못하는 터에 그렇다고 길에 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술을 샀다 한다. 나는,
“너희들 술을 얼마나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둘은,
“입에다 대지도 못하옵죠.”
하고 대답했다. 나는,
“네놈들이 어찌 술을 할 줄 알겠니.”
하고 한바탕 꾸짖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론 스스로 위안하는 말로,
“이도 먼 길 나그네에겐 한 도움이 되겠구나.”
하고, 혼자서 잠자코 잔 부어 마실 제 동쪽으로 용만(龍灣)ㆍ철산(鐵山)의 모든 메를 바라보니 만첩의 구름 속에 들어 있었다. 이에 술 한 잔을 가득 부어 문루 첫 기둥에 뿌려서 스스로 이번 길에 아무 탈 없기를 빌고, 다시금 한 잔을 부어 다음 기둥에 뿌려서 장복과 창대를 위하여 빌었다. 그러고도 병을 흔들어 본즉, 오히려 몇 잔 더 남았기에 창대를 시켜 술을 땅에 뿌려서 말을 위하여 빌었다.
담에 기대어 동쪽을 바라보니, 무더운 구름이 잠깐 피어오르고 백마산성(白馬山城) 서쪽 한 봉우리가 갑자기 그 반쪽을 드러냈는데, 그 빛이 하도 푸르러서 흡사 우리 연암서당(燕巖書堂)에서 불일산(佛日山) 뒷봉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싶었다.
홍분루 높은 다락 막수 아씨 여의고는 / 紅粉樓中別莫愁두어 기마 가을 바람에 변방을 달리었네 / 秋風數騎出邊頭그림배에 실은 퉁소 장고 어이하여 소식 없나 / 畵船簫鼓無消息애끊고 추억할 제 우리 청남 첫째 골을 / 腸斷淸南第一州
[주-D010] 막수(莫愁) : 당(唐)의 석성(石城)에 살던 여인인데, 노래를 잘 불렀다.
[주-D011] 청남(淸南) : 청천강(淸川江)의 남쪽 평양(平壤)을 이름.
이 시는 유혜풍(柳惠風) 영재(泠齋)가 일찍이 심양(瀋陽봉천(奉天))으로 들어갈 때 지은 것이다. 내 이제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읊고 나서,
[주-D012] 유혜풍(柳惠風) 영재(泠齋) : 연암의 일계(一系)에 속하는 학자 유득공(柳得恭). 혜풍은 자요, 영재는 호이다. 다른 본에는 영재(泠齋)라는 두 글자가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연암의 ‘수택본’에 의거하였다.
“이건 국경을 넘는 이가 부질없이 무료한 정서를 읊은 것이겠지. 제 이곳에서 무슨 그림배ㆍ퉁소ㆍ장고 따위를 얻어서 놀이를 했단 말인가.”
하고, 홀로 크게 웃었다. 옛날에 형경(荊卿)이 바야흐로 역수(易水)를 건너려 할 제 머뭇머뭇 떠나지 않는지라, 태자(太子)는 그의 마음이 변하지나 않았나 의심하고, 진무양(秦舞陽)을 먼저 떠나 보내고자 하였다. 형경은 이에 노하여 태자에게 꾸짖기를,
[주-D013] 형경(荊卿) : 중국 전국(戰國) 시대의 자객(刺客)인 형가(荆軻)를 말한다. 연(燕)나라에서는 '형경'으로 불렸으며, 연나라 태자 단(丹)의 식객(食客)이 되어 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진왕(秦王)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
[주-D014] 태자(太子) : 전국 때 연(燕)의 태자 단(丹). 진시황(秦始皇)을 죽이려 형가를 파견했으나 실패하였다.
[주-D015] 진무양(秦舞陽) : 형가가 진에 들어갈 때에, 지도(地圖)를 갖고 따르던 젊은 협사의 이름.
“내 이제 머뭇거리는 까닭은 나의 동지(同志) 한 분을 기다려 함께 떠나려 함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형경이 부질없이 무료한 말을 한 듯싶다. 태자가 만일 형경의 마음을 의심할진대 이는 그를 깊이 알지 못하였다고 말할 것이리라. 그러나 형경의 기다리는 사람이란 또한 진정코 한 개의 성명을 가진 실재 인물은 아닐 것이다. 대체 한 자루 비수(匕首)를 끼고 불칙한 진(秦)에 들어가려면 저 진무양 한 사람이면 족할지니 어찌 별도로 동지를 구하리오. 다만 차디찬 바람에 노래와 축(筑)으로 애오라지 오늘의 즐거움을 다했을 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글을 지은이는 그 사람이 길이 먼 탓으로 오지 못할 것이라고 변명하였으니, 그 ‘멀리’라는 말이 참 교묘한 칭탁이다.
[주-D016] 축(筑) : 형가가 역수(易水)를 건널 때, 그의 친구 고점리(高漸離)는 축(筑)을 치고, 형가는 박자 맞추어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이라는 비장한 노래를 불렀다.
[주-D017] 그 사람 : 형가가 기다렸다는 그 사람.
그 사람이란 천하에 둘도 없는 절친한 벗일 것이요, 그 약속이란 천하에 다시 변하지 못할 일일 것이다. 천하에 둘도 없는 벗으로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떠남을 당하여 어찌 날이 저물었다고 오지 않았으리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반드시 초(楚)ㆍ오(吳)ㆍ삼진(三晉)의 먼 곳이 아닐 것이요, 또 반드시 이 날로써 진으로 들어가기를 기약하여 손잡고 맹세한 일도 없는 듯싶다.
[주-D018] 초(楚) : 지금 중국의 호북성(湖北省) 지방.
[주-D019] 오(吳) : 지금 중국의 강소(江蘇)ㆍ호남(湖南)ㆍ절강성(浙江省) 등지.
[주-D020] 삼진(三晉) : 당시의 한(韓)ㆍ위(魏)ㆍ조(趙). 지금의 산서(山西)ㆍ하남성(河南省) 서남부.
다만 형경이 의중(意中)에 문득 생각나는 어떤 벗을 기다린다 하였을 따름이어늘, 이 글을 적은 이는 또한 형경의 의중(意中)의 벗을 이끌어다가 그 사람하고는 부연 설명하였으나, 그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함을 말함이니, 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서 막연히 먼 곳에 살고 있는 이라 하여 형경을 위로함이요, 또한 그 사람이 혹시 오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릴까 저어하여 그가 오지 못할 것임을 밝혔으니, 이는 형경을 위하여 그 사람이 오지 못한 것을 다행히 여긴 것이다. 정말 천하에 그 사람이 있다 하면, 나는 이미 그를 보았을 것이다. 응당 그 사람의 키는 일곱 자 두 치, 짙은 눈썹에 검은 수염, 볼이 처지고 이마가 날카로웠을 것이다. 어째서 그럴 줄 알리오마는 이제 내 혜풍(惠風)의 이 시를 읽고 나서 안 것이다. 혜풍(惠風)의 이름은 득공(得恭)이요, 호는 영재(泠齋)다.
정사(正使)의 전배(前排)기치(旗幟)와 곤봉(棍棒) 따위를 앞에 세웠으므로 전배라 한다. 가 설렁이면서 성을 나서니, 내원(來源)과 주 주부(周主簿) 내원(來源)은 나의 삼종제(三從弟)요, 주 주부(周主簿)의 이름은 명신(命新)인데, 모두 상방의 비장이다. 가 두 줄로 서서 간다. 채찍을 옆에 끼고 몸을 솟구어 안장에 올라 앉으매 어깨가 으쓱하고 머리가 꼿꼿한 품이 미상불 날쌔고 용맹스럽긴 하나, 부대 차림이 너무 너털거리고, 구종들의 짚신이 안장 뒤에 주렁주렁 매어달렸으며, 내원의 군복은 푸른 모시로 헌 것을 자주 빨아 입어서 몹시 더부룩하고 버석거리는 것이 가히 지나치게 검소를 숭상함이라고 말하겠다.
조금 뒤에, 부사(副使)의 행차가 성에 나감을 기다려서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행하여 가장 뒤떨어져 구룡정(九龍亭)에 이르니, 여기가 곧 배 떠나는 곳이다. 이때, 만윤(灣尹)은 벌써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서장관(書狀官)이 맑은 새벽에 먼저 나가서 만윤과 함께 합동 수사함이 전례이다. 방금 사람과 말을 사열(査閱)하는데, 사람은 성명ㆍ거주ㆍ연령 또는 수염이나 흉터 같은 것이 있나 없나, 키가 작은가 큰가를 적고, 말은 그 털빛을 적는다. 깃대 셋을 세워서 문을 삼고 금물을 뒤지니, 중요품으로 황금(黃金)ㆍ진주(眞珠)ㆍ인삼(人蔘)ㆍ초피(貂皮 수달피)와 포(包) 이외에 남은(濫銀)이었고, 영세품(零細品)은 새 것이나 옛 것을 통틀어 수십 종에 달하므로 이루 다 헤일 수 없었다.
[주-D021] 부사(副使) : 차석 사신. 당시의 부사는 이조 판서 정원시(鄭元始).
[주-D022] 서장관(書狀官) : 일행의 행정(行程)에 관한 통계 책임을 맡은 관원. 당시의 서장관은 장령(掌令) 조정진(趙鼎鎭).
구종들에는 웃옷을 풀어 헤치기도 하고 바지 가랑이도 내리 훑어보며 비장이나 역관에게는 행장을 끌러 본다. 이불 보퉁이와 옷 꾸러미가 강 언덕에 너울거리고 가죽 상자와 종이곽이 풀밭에 어지러이 뒹군다. 사람들은 제각기 주워 담으면서 흘깃흘깃 서로 돌아다보곤 한다. 대체 수색을 아니하면 나쁜 짓을 막을 수 없고 수색하자면 이렇듯 체모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용만의 장수들은 이 수색보다 앞서 가만히 강을 건너가는 걸 누구로서 금할 재간이 있으리오. 금물이 발견된 경우에 첫째 문에 걸린 자는 중곤(重棍)을 맞히는 한편 물건을 몰수하고 다음 문이면 귀양 보내고 마지막 문에는 목을 베어 달아서 뭇사람에게 보이게 되어 있다. 그 법의 마련인즉 엄하기 짝이 없다. 이번 길에는 원포(原包)조차 반도 차지 못하고 빈 포도 많으니 남은의 있고 없음이야 따질 것도 없었다.
[주-D023] 남은(濫銀) : 팔포(八包) 곧 2천 냥, 3천 냥의 한도를 넘은 은자(銀子).
[주-D024] 중곤(重棍) : 대곤(大棍)보다 더 큰 곤장.
다담상(茶啖床 교자상)은 초라하고 그나마 들어오자 곧 물려 내니 대체 강 건너기에 바빠서 젓갈을 드는 이가 없다. 배는 다섯 척뿐인데 마치 한강(漢江)의 나룻배와 비슷하되 조금 클 뿐이다. 먼저 방물(方物)과 인마를 건네고 정사의 배에는 표자문(表咨文 국서(國書))과 수역(首譯역관 중의 수석)을 비롯하여 상사의 하인들이 함께 타고 부사와 서장관과 그 하인들이 또 한 배에 탔다.
이에 용만의 이교(吏校)ㆍ방기(房妓)ㆍ통인(通引)과 평양에서 모시고 온 영리(營吏)ㆍ계서(啓書)들이 모두 뱃머리에서 차례로 하직 인사를 한다. 상사 마두(馬頭) 순안(順安)의 종으로 이름은 시대(時大)다. 의 창알(唱謁) 소리가 채 마치지 못해서 사공이 삿대를 들어 선뜻 물에 넣는다.
물살은 매우 빠른데 뱃노래가 터져 나왔다. 사공이 노력한 보람으로 살별과 번개처럼 배가 달린다. 생각이 잠시 아찔하여 하룻밤이 격한 듯싶었다. 저 통군정(統軍亭)의 기둥과 난간과 헌함이 팔면으로 빙빙 도는 것 같고, 전송 나온 이들이 오히려 모랫벌에 섰는데 마치 팥알같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내가 홍군(洪君) 명복(命福)수역(首譯) 더러,
“자네, 길을 잘 아는가.”
하니, 홍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아,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하고, 공손히 반문한다. 나는 또,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을.”
했다. 홍은,
“이른바,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말을 지적한 말씀입니까.”
[주-D025] 먼저 …… 오른다 : 《시경(詩經)》 대아(大雅) 황의(皇矣)에서 나온 말이다.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와 우리와의 경계로서 응당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일 것일세. 무릇 세상 사람의 윤리(倫理)와 만물의 법칙(法則)이 마치 이 물가나 언덕이 있음과 같으니 길이란 다른 데 찾을 게 아니라, 곧 이 물과 언덕 가에 있는 것이란 말야.”
하고 답했다. 홍은 또,
“외람히 다시 여쭈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이른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또 답했다.
“옛 글에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해지고 도심(道心)은 오직 가늘어질 뿐’이라고 하였는데, 저 서양 사람들은 일찍이 기하학(幾何學)에 있어서 한 획의 선(線)들을 변증할 때도 선이라고만 해서는 오히려 그 세밀한 부분을 표시하지 못하였은즉 곧 빛이 있고 없음의 가늠이라고 표현하였고, 이에 불씨(佛氏)는 다만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말로 설명하였지. 그러므로 그 즈음에 선처함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 능할 수 있을 테니 옛날 정(鄭)의 자산(子産) 같은 이면 능히 그러할 수 있겠지.”
[주-D026] 정(鄭)의 자산(子産) : 자산은 전국 시대 정 나라 대부 공손교(公孫僑)의 자.
이렇게 수작하는 사이에 배는 벌써 언덕에 닿았다. 갈대가 마치 짜놓은 듯 빽빽이 들어서서 땅바닥이 뵈지 않는다. 하인들이 다투어 언덕에 내려가서 갈대를 꺾고 빨리 배 위에 깔았던 자리를 걷어서 펴고자 하나, 갈대 한 그루가 칼날 같고, 또 검은 진흙이 질어서 어찌할 수 없었다. 정사 이하 모두가 우두커니 갈밭에 서 있을 뿐이다.
“앞서 건너간 사람과 말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어도, 다들,
“모릅니다.”
하고 대답한다. 또,
“방물은 어디 있어.”
해도 역시,
“모르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한편으로 멀리 구룡정 모래톱을 가리키면서,
“우리 일행의 인마가 아직도 거지반 건너지 못하고 저기 개미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곧 그들인 것 같습니다.”
한다. 멀리 용만쪽을 바라보매 한 조각으로는 성이 마치 한 필의 베를 펼쳐 놓은 듯 성문은 흡사 바늘구멍처럼 빤히 뚫려서, 그리로 쬐는 햇살이 마치 한 점 샛별 같아 뵌다.
이때 커다란 뗏목이 거센 물살에 떠내려온다. 시대(時大 상사 마두(馬頭)의 이름)가 멀리서,
“웨이.”
하고 고함친다. 이는 대체 남을 부르는 소리인데, 저들을 높이는 말이다. 한 사람이 뗏목 위에 일어서서,
“당신들은 어찌 철 아닌 때에 조공(朝貢)을 바치려 중국을 가시나요. 이 더위에 먼 길을 가시려면 오죽이나 고생되겠소.”
한다. 시대는 또,
“너희들은 어느 골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어디 가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거냐.”
하고 묻는다. 그는 답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봉황성(鳳凰城)에 사는데, 시방 장백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거요.”
하고,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뗏목은 어느 새 까마득히 가버렸다.
이 즈음에 두 갈래 강물이 한데 어울려서 중간에 한 섬이 이룩되었다. 먼저 건너간 사람과 말들은 잘못 여기에 내렸으니, 그 거리는 비록 5리밖에 되지 않으나 배가 없어서 다시 건너지 못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이에 사공에게 엄명을 내려서 배 두 척을 불러 재빨리 사람과 말을 건너게 하였으나, 사공은,
“저 거센 물살을 거슬러 배로 올라감은 아마 하루 이틀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고, 여쭙는다. 사신들이 모두 홧증을 내어 배 일을 맡은 용만의 군교(軍校)를 벌하고자 하였으나 딱하게도 군뢰(軍牢 군대에서 죄인을 다루는 병졸)가 없다. 알아본 즉 군뢰 역시 먼저 건너 잘못 중간 섬에 내렸기 때문이다. 부사의 비장 이서귀(李瑞龜)가 분함을 참지 못하여 마두(馬頭)를 호통하여 용만 군교를 잡아들였으나, 그 놈을 엎을 자리가 없으므로 볼기를 반만 까고 말 채찍으로 네댓 번 때리며 끌어내어서 빨리 거행하라고 호통한다. 용만 군교가 한 손으로 전립을 쥐고 또 한 손으론 고의춤을 잡으면서 연방,
“예에, 예이”
하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배 두 척을 내어 사공이 물에 들어서서 배를 끌었으나, 워낙 물살이 세어서 한 치만큼 전진하면 한 자 가량 후퇴하고 만다. 아무리 호통한들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다.
이윽고 배 한 척이 강 기슭을 타고 나는 듯이 빨리 내려오니 이는 군뢰가 서장관의 가마와 말을 거느리고 오는 건데, 장복이 창대를 보고,
“너도 오는구나.”
하니, 기뻐하는 말이다. 이에 두 놈을 시켜서 행장을 점검해 보니 모두 탈이 없으나, 다만 비장과 역관이 타던 말이 혹은 오고 더러는 오지 않았으므로, 이에 정사가 먼저 떠나기로 했다. 군뢰 한 쌍이 말 타고 나팔 불며 길을 인도하고 또 한 쌍은 보행으로 앞을 인도하되 버스럭거리면서 갈숲을 헤치고 나아간다.
내가 말 위에서 칼을 뽑아 갈대 하나를 베어 보니, 껍질이 단단하고 속이 두꺼워서 화살을 만들 수는 없으나 붓자루를 만들기에는 알맞을 것 같았다. 이때 놀란 사슴 한 마리가 마치 보리밭 머리를 나는 새처럼 빠르게 갈대를 뛰어넘어가니 일행이 모두 놀랐다.
10리를 가서 삼강(三江)에 이르니, 강물이 비단결같이 잔잔하다. 이름은 애랄하(愛剌河)이다. 어디서 발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압록강과의 거리는 불과 십 리 가량에 불과한데도 강물이 넘쳐흐르지 않음을 보아 서로 근원이 다른 줄을 알겠다. 배 두 척이 보이는데, 꼴이 마치 우리나라 놀잇배와 비슷하나 길이나 넓이는 그만 못하되 제도는 퍽 튼튼하고도 치밀한 편이다. 배 부리는 이는 모두 봉황성 사람으로 사흘 동안을 여기서 기다리노라고 식량이 다하여 굶주렸다고 말한다. 대체 이 강은 너나없이 서로 나다니지 못하는 곳이나, 우리나라의 역학(譯學 역관들의 관계 사업)이나 중국 외교 문서가 불시에 교환할 일이 생기므로 봉성 장군(鳳城將軍 봉황성에 주둔한 중국측 장수)이 이에 배를 준비해 둔 것이라 한다. 배 닿는 곳이 몹시 질척질척하다. 나는,
“웨이.”
하고는 한 되놈을 불렀다. 이는 아까 시대한테서 겨우 배운 말이다. 그 자가 냉큼 상앗대를 놓고 이리로 오므로 나는 얼른 몸을 솟구쳐 그 등에 업히니, 그 자는 히히거리고 웃으면서 배에 들여다 놓고 후유하고 긴 숨을 내뿜으면서,
“흑선풍(黑旋風) 어머니가 이토록 무거웠다면 아마도 기풍령(沂風嶺)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주-D027] 흑선풍(黑旋風) : 《수호지(水滸誌)》에 나오는 역사 이규(李逵)의 별명.
한다. 주부(主簿) 조명회(趙明會)가 이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는다. 내가,
“저 무식한 놈이 강혁(江革)은 몰라도 이규(李逵)는 어찌 알았던고.”
[주-D028] 강혁(江革) : 후한(後漢) 때 효자. 어려서 난리를 만나 홀어머니를 업고 갖은 곤란을 겪고서 마침내 어머니를 보전하였다.
했더니, 조군(趙君)이,
“그 말 가운데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애초에 이규의 어머니가 이렇게 무겁다면 비록 이규의 신력(神力)으로도 등에 업은 채 높은 재를 넘지 못했으리라는 의미였고, 또 이규의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는데, 그는 이렇게 살집이 좋은 분을 만일 저 주린 호랑이에게 주었다면 오죽 좋으랴 하는 의미죠.”
하고, 설명해 준다. 나는
“제 따위들이 어찌 이처럼 유식한 문자를 쓸 줄 안단 말이오.”
[주-D029] 말이오 : ‘조군(趙君)이 …… 말이오’ 이 부분은 다른 본에 없고, 다만 ‘일재본’과 ‘유당본(綏堂本)’에 있을 뿐이다.
했다. 조군은,
“옛 말에 눈을 부릅떠도 고무래정(丁) 자도 모른다는 것은 정말 저런 놈 따위를 두고 이름이었건마는, 그는 패관(稗官) 기서(奇書)를 입에 담아둔 상용어(常用語)로 쓰는 것이니, 그들의 이른바 관화(官話)란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고, 답한다. 이 애랄하의 너비는 우리 임진강(臨津江)과 비슷하다. 여기서 곧 구련성(九連城)으로 향한다. 우거진 숲은 푸른 장막을 둘렀고, 군데군데 호랑이 잡는 그물을 쳐 놓았다. 의주의 창군(鎗軍)이 가는 곳마다 나무를 찍어서 소리가 온 들판에 울려온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산은 곱고 물은 맑은데 판국이 툭 트이고, 나무가 하늘에 닿을 듯 그 속에 은은히 큰 부락들이 자리 잡고 개와 닭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며 땅이 기름져 개간하기에도 알맞을 것 같다. 패강(浿江) 서쪽과 압록강 동편에는 이와 비교할 만한 곳이 없으니, 의당히 이곳이 거진(巨鎭)이나 웅부(雄府)를 설치함직하거늘, 너나없이 이를 버려두어 아직까지 공지로 남아있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고구려 때에 이곳에 도읍한 일이 있었다.”
하니, 이는 이른바 국내성(國內城)이다. 명(明) 때에 진강부(鎭江府)를 두었더니, 청이 요동(遼東)을 함락시키매 진강 사람들이 머리 깎기를 싫어하여 혹은 모문룡(毛文龍)에게 가고 혹은 우리나라에도 귀화하였는데, 그 뒤에 우리나라로 온 사람은 모조리 청의 요구에 의하여 돌려보냈고, 모문룡에게 간 사람들은 많이 유해(劉海 명(明)을 저버린 장수)의 난리에 죽었다. 이리하여 공지가 된 지도 벌써 백여 년에 쓸쓸하게도 산 높고 물 맑은 것만 눈에 띌 따름이다.
[주-D030] 모문룡(毛文龍) : 명의 장수로, 청병에게 패하여 우리나라 서해 가도(椵島)에 일시 주둔하고서 조선에 원조를 청하였다.
모든 노둔(露屯) 친 곳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한다. 역관은 혹 세 사람씩 한 막에, 또는 다섯 사람씩 장(帳) 하나를 쳤고, 역졸(驛卒)과 마부(馬夫)들은 다섯씩 또는 열씩 어울려 시냇가에 나무를 얽어매고 그 속에 들었다. 밥 짓는 연기가 자욱히 서리고, 인마소리 소란한 품이 의젓한 한 마을을 이룩하였다. 용만서 온 장수들 한 패가 저희들끼리 한 곳에 모였는데, 시냇가에 닭 수십 마리를 잡아서 씻고, 한편에서는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아 국을 끓이며 나물을 볶고, 밥은 낱낱이 기름기가 번지르르하니 그들의 살림이 매우 푸짐하다.
이윽고 부사와 서장관이 차례로 이르렀는데 해가 이미 황혼이다. 30여 군데에 횃불을 놓되, 모두 아름드리 큰 나무를 톱으로 찍어다 먼동이 틀 때까지 환하게 밝힌다. 군뢰가 나팔을 한 마디 불면 3백여 명이 일제히 소리를 맞추어 고함치는데 이는 호랑이를 경비함이다.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군뢰란 만부(灣府)에서 가장 기운 센 자를 뽑아온 것인데, 이 일행 하인들 중에서 특히 일도 많이 하고 먹음새도 제일 세다고 한다. 그 자들 차림차림이란 몹시 우스워서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남색 운문단(雲紋緞)을 받쳐 댄 전립(氈笠)에 털상투의 높은 정수리에는 운월(雲月)이나 다홍빛 상모(象毛)를 걸고, 벙거지 이마에는 날랠용(勇) 자를 붙였으며, 쇠붙이로 오려낸 아청(鴉靑)빛 삼베로 만든 소매 좁은 군복에 다홍빛 무명 배자(褙子)를 입고, 허리엔 남방사주(藍方絲紬) 전대(纏帶)를 띠고, 어깨엔 주홍빛 무명실 대융(大絨 웃옷 위에 걸치는 겉옷)을 걸고, 발에는 미투리를 신었다. 그 꼴이야 말로 어엿한 한 쌍의 사내다. 다만 그 말 탄 꼴을 보면 이른바 반부담(半駙擔)이어서 안장 없이 짐을 실었는가 하면, 타는 것도 탄다기보다는 오히려 걸터앉은 셈이다. 등에는 남빛 조그마한 영기(令旗 영(令) 자를 쓴, 군령을 전하는 기(旗))를 꽂고, 한 손엔 군령판(軍令版 군령을 적은 널빤지)을, 또 한 손에는 붓ㆍ벼루ㆍ파리채와 팔뚝만한 마가목(馬家木) 짧은 채찍을 잡고, 입으로는 나팔을 불고, 앉은 자리 밑엔 비스듬히 여남은 개의 붉게 칠한 곤장(棍杖)을 꽂았다. 각방(各房)에서 약간 호령이 있을 때 문득 군를 부르면, 군뢰. 일부러 못 들은 체하다가 연거푸 10여 차례 불러야 무어라 중얼거리며 혀를 차고 하다가는, 금시에 처음 들은 듯이 커다란 소리로 ‘예이’ 하고 곧 말에서 뛰어내려, 마치 돼지처럼 비틀걸음에 소처럼 식식거리면서 나팔ㆍ군령판ㆍ붓ㆍ벼루 등속을 모두 한 쪽 어깨에 메고 막대 하나를 끌며 나간다.
한밤중 못 되어서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어 위로 장막이 새고 밑에선 습기가 치밀어 피할 곳이 없더니, 이내 날이 개고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드리워 손으로 어루만지기라도 할 수 있을 듯싶었다.
25일 임신(壬申)
아침에 가랑비 내리더니 낮에 개다.
각방(各房)과 역관들이 모든 노둔(露屯)한 곳에서 이곳저곳 옷과 이불들을 내어 말린다. 간밤 비에 젖었기 때문이다. 쇄마(刷馬 관용으로 세 낸 말) 마부 중에 술을 갖고 온 자가 있어서 대종(戴宗)선천(宣川)의 종으로 어의(御醫) 변 주부(卞主簿)의 마두이다. 이 한 병을 사서 바치기에 서로 이끌고 시냇가에서 잔을 기울인다. 강을 건넌 뒤로 우리 술은 아주 단념하다가, 이제 갑자기 이 술을 얻어 마시게 되니 술맛이 몹시 좋을 뿐더러 한가히 시냇가에 앉아 마시는 그 멋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두들이 서로 다투어 낚시질을 하기에, 나도 취한 김에 낚싯줄 하나를 빌려 던지자 곧 조그만 고기 두 마리가 걸리니, 아마 이 시냇고기는 낚시에 단련되지 못한 까닭이리라.
방물이 미처 대어 오지 못하였으므로 또 구련성에서 노숙하다.
26일 계유(癸酉)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야 개다.
구련성을 떠나 삼십 리를 가서 금석산(金石山) 밑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다시 삼십 리를 가서 총수(葱秀)에서 노숙하다.
날이 새자 새벽 일찍 안개를 헤치고 길을 떠났다. 상판사(上判事)의 마두 득룡(得龍)이 쇄마 구종들과 함께 강세작(康世爵)의 옛 일을 이야기한다. 안개 속으로 어슴푸레 보이는 금석산을 가리키면서,
[주-D001] 상판사(上判事) : 사행이 있을 때, 임시로 잡무의 처리를 맡은 직명.
“저기가 형주(荊州) 사람 강세작이 숨었던 곳이오.”
하고 말한다. 그 이야기가 퍽 재미있어 들을 만하다. 대략 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러하다.
“세작의 조부 임(霖)이 양호(楊鎬)를 따라 우리나라를 구원하다가 평산(平山) 싸움에 죽고, 그 아버지 국태(國泰)는 청주 통판(淸州通判)을 지내다가 만력(萬曆) 정사년(丁巳年)에 죄를 지어 요양(遼陽)으로 귀양오게 되었다. 그때 세작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요양에 와 있었다. 그 이듬해에 청이 무순(撫順)을 함락하자 유격장군(游擊將軍) 이영방(李永芳)이 항복하고 말았다. 경략(經略) 양호가 여러 장수를 나눠서 파견할 제 총병(揔兵) 두송(杜松)은 개원(開原)으로, 왕상건(王尙乾)은 무순으로, 이여백(李如栢)은 청하(淸河)로 각각 나오고, 도독(都督) 유정(劉綎)은 모령(毛嶺)으로 나왔다. 이때 국태 부자는 유정의 진중에 있었는데, 청의 복병이 산골짜기에서 몰려나오자, 명의 군사 앞뒤가 연락되지 못하여 유정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국태도 화살을 맞은 채 쓰러졌다.
세작이 해 저문 뒤에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산골에 묻고 돌을 모아 표를 했다. 이때(1619) 조선의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는 산 위에 진을 쳤고, 조선의 좌ㆍ우 영장(營將)은 산 밑에 진을 쳤었다. 이에 세작이 원수(元帥)의 진에 투신했다. 그 이튿날 청병(淸兵)이 조선의 좌영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으니, 산 위에 있던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그러자 홍립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청병이 홍립의 군사를 두어 겹이나 에워싸고 도망쳐 온 명병(明兵)을 샅샅이 뒤져내어 모조리 목을 베어 죽였다. 세작도 역시 청병에게 붙들려서 묶인 채 바위 아래 앉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를 맡은 자가 잊어버리고 가버렸다. 그러자 세작이 조선 군사에게 눈짓하여 묶인 것을 풀어 달라고 애걸했으나, 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서로 기웃기웃 보기만 하고 손 하나도 까딱하는 이가 없었다. 세작이 할 수 없어 스스로 등을 돌 모서리에 부비적거려 줄을 끊고 죽은 조선 군사의 옷을 바꾸어 입고 조선 군대 가운데 들어가 죽음을 면했다. 이에 요양으로 돌아갔더니, 웅정필(熊廷弼)이 요양을 지키면서, 세작을 불러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였다. 이해에 청이 잇달아 개원과 철령(鐵嶺)을 함락하니 정필이 갈리고 설국용(薛國用)이 대신 요양을 지키게 되자, 세작이 곧 설(薛)의 군중에 머물러 있었더니 심양마저 함락되매, 세작이 낮에는 숨고 밤에 걸어서 봉황성에 닿아, 광녕(廣寧) 사람 유광한(劉光漢)과 함께 요양의 패잔병을 소집하여 거기를 지켰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광한은 전사하고 세작도 십여 군데 상처를 입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고향길이 이미 끊어졌으니 차라리 동쪽나라 조선으로 나가서 저 치발(薙髮)ㆍ좌임(左衽)의 되놈을 면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고, 드디어 싸움터를 탈출하여 금석산 속에 숨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양구(羊裘)를 불에 구워 나뭇잎에 싸서 먹고 두어 달 동안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에 압록강을 건너 관서(關西)의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회령(會寧)까지 굴러 들어가서, 조선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고 나이 팔십이 넘어서 죽었다. 그 자손이 퍼져서 백여 명이나 되었으나 오히려 한 집에서 살림하고 있다.”
득룡(得龍)은 가산(嘉山) 사람인데, 열네 살부터 북경(北京)에 드나들어 이번이면 삼십여 차례에 이른다. 화어(華語)에 가장 능통하여 일행의 모든 일에 득룡이 아니면 그 책임 있게 해낼 자가 없다. 그는 이미 가산과 용천(龍川), 철산(鐵山) 등 부(府)의 중군(中軍)을 지내고 품계가 가선(嘉善 종2품 문관 품계)에까지 이르렀다. 사행이 있을 때마다 미리 가산에 통첩하여 그 차지(次知)가속(家屬)을 차지라 한다. 를 감금(監禁)하여 그의 도피함을 막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 위인의 재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겠다. 세작이 처음 나왔을 때, 득룡의 집에 묵고 득룡의 조부와 친하여 서로 중국 말과 조선 말을 배웠으며, 득룡이 화어를 그토록 잘함도 그의 가전(家傳)의 학문이라 한다.
날이 저물어 총수에 이르다. 여기는 우리나라 평산(平山)의 총수와 흡사하다. 그제야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명 짓는 예가 생각된다. 이로 미루어서 평산의 총수도 이곳과 유사하다 해서 이름을 지은 것이나 아닐까.
[주-D002] 평산(平山) : ‘수택본’에는 서흥(瑞興)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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