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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중학교 교가
1. 봉화산(烽火山)
전라남도 보성군의 보성읍 봉산리와 득량면 정흥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고도:476m).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야산(伽倻山)은 보성군의 동북쪽 13리에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흥사 동봉 봉수(正興寺東峯烽燧)는 보성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서쪽으로 장흥부(長興府) 전일현(全日峴)에 응하고 동쪽으로 흥양현(興陽縣, 고흥) 장기산(帳機山) 북쪽에 응해서 다만 관문(官門)에 보고하기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보성)에는 보성읍과 도촌면 사이에 봉대가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이 봉화산으로 보인다. 지명은 봉화를 올린 산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 정상에는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다. 보성군의 각종 행사시 이곳에서 성화를 채화하고 가뭄 때 기우제를 올린다. 봉수대는 고려 시대 공민왕 때에 축조되어 군사적 통신수단으로 사용되다가 1895년(고종 32)에 폐지된 것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정흥사의 동쪽에 위치한다. 산 밑에 가야사가 있다가 폐사되고, 유물로 7층 석탑이 봉산리에 있다.
2. 골육수(骨肉水)
무덤이 있는 산 밑에서 흐르는 물. 풍수지리에서, 물의 세 가지 기본적인 형세 중 하나인 득수(得水)에 이르게 하는 물. 산속에서 흐르다가 혈(穴)과 만나서 명당을 이루게 된다.
3. 정자강(亭子江)
보성군 웅치면 대산리 제암산에서 발원하여 장흥군 장동면을 북류하다 동류하여 보성군 노동면 광곡리를 지나서 미력면 도개리, 복내면 당촌리를 지나서 북류하는 보성강은 곡성군 오곡면 압록리에서 섬진강으로 합쳐지는데, 보성의 북쪽을 흘러가는 하천으로 대내 또는 죽천(竹川)이라 불렸다. 정자천(程子川)이라고도 하며, 현재는 보성군 노동면 광천리의 광탄천(廣灘川)을 말함.
4. 인산지수(仁山智水)
공자(孔子)의 말에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 知者樂水]“ 한 데서 온 말로 산과 물을 뜻함.
5. 인의예지(仁義禮智)
맹자의 사단설(四端說)에 나오는 내용으로 《맹자(孟子)》〈공손추편(公孫丑篇)〉에 있는 말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짊(仁)의 시작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義)의 시작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禮)의 시작이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智)의 시작이다.[無惻隱之心非人也 / 無羞惡之心非人也 / / 無辭讓之心非人也 / 無是非之心非人也 / 惻隱之心仁之端也 / 羞惡之心義之端也 / 辭讓之心禮之端也 / 是非之心智之端也]”
맹자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내세우며 네 가지 마음씨(性)를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고 하는 사단(四端)이라고 보았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어질고(仁), 옳으며(義), 예의바르고(禮), 지혜롭다(智)고 주장한 것이다.
6. 효제충순(孝悌忠順)
관례(冠禮)는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전통사회에서의 성년의식(成年儀式)으로 15세에서 20세 사이에 상투를 틀어 갓을 씌우는 의식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아들로서, 아우로서, 또한 신하로서, 젊은이로서 효제충순(孝悌忠順)을 실천할 것’을 요구받는 것으로, 성인으로서의 책임을 강조하고 예를 수행하기 위한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다. 어버이에 대한 효도, 형제끼리의 우애, 임금에 대한 충성과 벗 사이의 온순(溫順)함을 통틀어 이르는 말.
7. 격치성정(格致誠正)
《대학(大學)》의 ‘격물치지 성의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에서 나온 말로, 격치(格致)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줄임말로 곧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여 나의 지식이 극진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며, 성정(誠正)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줄임말로 곧 마음의 발로(發露)인 생각(意)을 진실하게 가져 스스로를 속임이 없고, 치우치기 쉬운 마음을 항상 중정(中正, 곧고 올바름)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大學章句 經一章》
《대학(大學)》은 공자(孔子)의 손자 자사(子思)가 《예기(禮記)》49편 중에서 42편을 별책으로 엮어 만든 것이다. 이후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새로운 유학(性理學)의 체계를 세우면서 《예기》에서 《중용》과 《대학》의 두 편을 독립시켰고, 이 때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만들어 경 1장, 전 10장으로 구별 지어 주석을 가하면서부터 널리 세상에 퍼졌다. 그는 전체를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경’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그의 제자 증자(曾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생각을 그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경(經)에서는 명명덕(明明德: 배우는 사람은 맑고 밝은 덕을 밝혀야 한다)ㆍ신민(新民: 덕을 밝힌 후 이웃도 새로운 곳에 이르게 한다)ㆍ지지선(止至善: 한 치의 사욕도 없는 선의 경지에 머무른다)을 대학의 3강령(三綱領)이라 한다. 또 격물(格物, 사물에 대하여 바르게 안다)ㆍ치지(致知: 앎을 끝까지 한다)ㆍ성의(誠意: 뜻을 성실히 하여 자신을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한다)ㆍ정심(正心: 뜻을 성실히 하면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ㆍ수신(修身: 마음이 바른 뒤에 내 몸을 닦는다)ㆍ제가(齊家: 내 몸을 닦은 후 집안을 편안하게 잘 다스릴 수 있다)ㆍ치국(治國: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사람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ㆍ평천하(平天下: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천하를 화평하게 할 수 있다)라는 8조목(八條目)으로 정리해 유교의 윤곽을 제시했다.
8. 수제치평(修齊治平)
《대학장구(大學章句)》경1장(經一章) 8조목(八條目)의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줄임말로 마음이 바른 뒤에 내 몸을 닦고, 내 몸을 닦은 후 집안을 편안하게 잘 다스릴 수 있으며,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사람은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천하를 화평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9. 인일기백(人一己百)
《중용(中庸)》의 “남이 한 번에 잘하게 되면 자기는 백 번을 할 것이며, 남이 열 번에 잘하게 되면 자기는 천 번을 해야 한다.(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에서 나온 말이다. 인일기백(人一己百)은 인일능지기백지(人一能之己百之)의 줄임말로, 남이 한 번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자기는 백 번을 한다. ‘남보다 백 배, 천 배의 노력을 함’을 이르는 말.[有弗學, 學之弗能弗措也。有弗問, 問之弗知弗措也。有弗思, 思之弗得弗措也。有弗辨, 辨之弗明弗措也。有弗行, 行之弗篤弗措也。人一能之, 己百之。人十能之, 己千之。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워도 능하지 못한다고 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어도 알지 못했다고 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했어도 결말을 얻지 못했다고 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분변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변했어도 분명하지 못한다고 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했지만 독실하지 못하다고 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남이 한 번에 잘하게 되면 자기는 백 번을 할 것이며, 남이 열 번에 잘하게 되면 자기는 천 번을 해야 한다.]
10. 삼사교양(三斯敎養)
힘써서 해야 할 세 가지 일로 ‘몸을 움직이는 것ㆍ말을 하는 것ㆍ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1803년 1월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유배지에서 고향에 남겨진 두 아들을 어떻게 교육 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보낸 편지글 중에 두 아들이 공부하는 서재의 당호를 ‘삼사재(三斯齋)’라 지어주면서 학문하는 자세에 대해 가르치려 하였는데, 여기에서 나온 말로 생각된다. 다음은 다산의 편지글 번역문이다. “요즈음 학문가운데서 예전과는 달리 오로지 반관이라 이름 붙이고서 외모를 단정히 하여 행실을 바르게 하는 것을 허식이라고 지목하는 경향이 있다. 약삭빠르며, 방탕하게, 그리고 마음을 풀어놓고 살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은 이러한 학문풍조를 듣고 제 세상 만난 듯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결국은 처신하는 예절에 있어 제멋대로 해버리고 만다. 나도 전에 이런 풍조에 물들어 늙어서도 몸에 예절이 익지 않아 비록 후회하여 고치고자 해도 어려우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전에 너희들에게서는 옷깃을 여미고, 무릎 꿇고 앉으며, 단정 장중하고 엄숙한 얼굴빛을 가꾸려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 내 습관이 한 번 더 심해져 너희들 꼴이 된 것이리라. 이점은 성인들이 먼저 외모부터 단정히 해야만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원리를 전혀 모르는 탓이다. 세상에 비스듬히 드러눕고 옆으로 삐딱하게 서고,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것, 말을 하는 것, 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 이 세 가지가 학문을 하는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할 곳인데, 이 세 가지도 못하면서 다른 일에 힘쓴다면, 비록 하늘의 이치에 통달하고 재주가 있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 할지라도 결국은 발꿈치를 땅에 붙이고 바로 설 수 없게 되어 어긋난 말씨, 잘못된 행동, 도적질, 대악, 이단이나 잡술 등으로 흘러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로써 서재의 이름으로 삼고 싶었다.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는 난폭하고 거만한 것을 멀리하고 어긋난 것을 멀리하고 미더움을 가까이한다는 의미니라. 이제 너희의 덕성의 발전을 소원하여 삼사재(三斯齋)라는 것을 선물하니 당호로 삼고 삼사재기(三斯齋記)를 지어 다음 오는 편에 부쳐 보내라. 나도 또한 너희를 위해 기(記)를 하나 짓겠다. 또 너희들이 하나 할일은 이 세 가지에 대한 잠언을 짓되 삼사잠(三斯潛)이라 이름 하면 될 것이다. 이것은 정부자(程夫子)의 사물잠(四勿箴)의 아름다운 뜻을 계승하는 일이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큰 복이 될 것이다. 간절히 바란다.”
11. 지인용(智仁勇)
《중용(中庸)》에서 나온 말로 슬기(智)ㆍ어짐(仁)ㆍ용기(勇)을 뜻하는 삼덕(三德). "지·인·용(智仁勇)의 세 가지는 다 인간의 달덕(達德)이다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지(智)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仁)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勇)에 가깝다. 지·인·용이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학문을 좋아하고 힘써 행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언젠가는 이 삼덕(三德)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12. 오달도(五達道)
《중용(中庸)》에서 나온 말로 “천하 사람들이 도달해야할 공통되는 길이 다섯이 있다. 그 길을 행하게 만드는 인간 내면의 덕성은 셋이 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친구 간의 길이다. 이 다섯가지야 말로 천하사람들 모두의 달도(達道, the way to achieve)이다. 그리고 지, 인, 용 이 세가지야 말로 천하 사람 모두의 달덕(達德)이니, 이것을 행하게 하는 것은 하나(誠)이다.[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也。五者, 天下之達道也。知仁勇, 三者。天下之達德也。所以行之者, 一也。]” 유교에서 말하는 5가지 기본적 실천덕목(實踐德目)으로, ‘세상 어디에나 통하는 5가지 길’이란 뜻. 오륜(五倫)ㆍ오교(五敎)ㆍ오전(五典)라고도 함.
안태시(安泰時)
아호 : 안왕재(安往哉)
생존시대 : 1895∼1985
출생지 : 보성읍 택촌마을
유적지 : 보성중학교 기념비
묘소 ; 가인정(佳麟亭)
안태시는 1895년 8월 20일 보성읍 택촌마을에서 조선 선조, 인조, 효종 때의 성리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제11대손인 안종록(安鍾祿)과 함양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조부에게 한문과 가정지학(家庭之學)을 배웠고, 조금 커서는 보성향교 양사재에서 춘사 박의현 선생에게 경전과 사기 및 사례문(四禮文)을 수학했다. 그는 세상이 변하므로 시대의 학문을 익혀 민족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을 다짐하며 보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24세)에 졸업하고, 1921년(27세)에는 전남 도립 교원양성소를 졸업하였다. 여기에서 교육학 과정을 전수(專修)받고 졸업하자마자 보성공립보통학교의 훈도(訓導)에 임명되었고 이후 해룡공립보통학교(1927), 완도공립보통학교(1927), 이노공립보통학교(1929), 나주공립보통학교(1930), 광주제일공립보통학교(1930), 전남도립사범학교(1931),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1931), 목포제일공립보통학교(1933), 득량공립소학교(1937), 광주사범학교(1938) 교유(敎諭)를 거쳐 잠시 공직에서 사퇴했다가 해방 이후 다시 순천사범학교 교감(1946), 보성공립중학교 교장(1947), 보성농업고등학교 교장(1951), 조성중학교 교장(1961)을 끝으로 정년퇴직(1962)을 할 때까지 수많은 학교를 거치면서 자신의 교육이념과 지도방침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정년퇴직할 때까지 '홍익인간 교육이념'으로 자라나는 청년학생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밝혀주는데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9년 12월 '교장안공태시기념비(校長安公泰時紀念碑)'가 보성중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안태시는 1985년 2월26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작고하여 보성읍 우산리 택촌의 가인정(佳麟亭)에 묻혔다.
첫댓글 우리들의 교가에 이런 깊은뜻이 있는지 모르고 불럿던것 같아
정말 좋은자료에 감사드리며 역시 남곡은 달라 일일회의 발전을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