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처럼 고결한 삶을 사신 충무공의 혼이 서린 곳 노량(露梁)
임진왜란 마지막싸움 ‘노량해전’이 있기 전 1597년 제1대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은 부산으로 가서 재침하는 왜구의 수장 가토의 목을 베어오라는 선조임금의 교지를 받고도 그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산도에서 압송되었고 한양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고 육군이었던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한다. 당시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된 원균장군은 부산포로 가라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부산으로 갔다가 적들의 ‘수륙병진작전’에 밀리고 밀려 거제와 칠천도 사이의 바다에서 궤멸을 당한다. 그때 사 조선 조정은 놀라서 어찌 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데 충무공 이순신께서 권율장군에게,
‘내가 직접 연해 지방에 가서 듣고 본 뒤에 결정하겠다.’고 말하니 ’권율장수가 매우 기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정유년(1597)년 7월21일의 난중일기를 보면,
‘맑다. 곤양군에 이르니 어떤 백성들은 이른 수확을 하고, 어떤 백성들은 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오후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 영등포만호 조계종 등 십 여 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난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이 있기 전 백의종군하던 그 시기 이미 남해노량을 다녀가셨고 다음날 일기에는 남해현령인 박대남이 있는 곳에 가니 병세가 거의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 해 명량해전을 치루고 다음해 인 1598년 11월에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고 전사하셨다. 그런 충무공 이순신의 유해가 잠시 안치되었다가 떠난 곳 노량은 이슬 노(露),교량 량(梁)이란 한자를 쓰는 마을이다. 이슬다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관음포만에서 순국하시고 그 유해가 아산으로 가시기 전 잠시 머물렀던 충렬사에 가면 그분의 가묘가 있다. 충렬사사당의 탄생배경은 그분이 가시고 남해사람 김여빈과 고 승후가 초가로 집을 지어 놓고 충무공 이순신의 혼을 모셨는데 장군님이 가시고 45년 뒤 인조 때 나라에서 ‘충무공’이란 시호를 내리고 기와를 얹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에 잠시 훼손되었다가 1922년 다시 고승후의 후손이 현재의 사당으로 복원을 했다고 하니 남해사람들의 충무공 이순신을 향한 마음이 짐작된다.
충렬사에는 조선 예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이 쓴 묘비가 있다.
일부내용을 인용해 보면 ‘산을 박차고 바닷물을 내뿜고, 성난 바람이 구름을 휘몰아가는 기개로 항상 대마도를 짓밟고 왜국을 쳐부수었던 충무공! 이곳은 공의 넋을 모신 곳이도다...’ 전문를 옮기지는 못 하지만 충무공 이순신이 나라에 바친 공이 충분히 짐작되어진다.
그래서 그런지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 중에는 정3품 당상관이상을 지낸 후손들이 55명이 된다고 하니 모두가 선대인 충무공이순신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음덕으로 그리 되었다고 보여 진다. 그런 충무공의 혼이 서리서리 감긴 충렬사아래 노량파출소 자리에는 서원 철폐령을 내렸던 흥선대원군의 척화비가 서 있고, 그 위에는 ‘화전별곡’이란 시를 쓴 자암 김구의 비도 서 있다.
자암 김구의 6세손인 김만상이 남해현령으로 와서 세운 비에는,
‘일찍이 선생은 정암 조광조, 충암 김정과 더불어 인과 의로 요순시절 같은 새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시운이 닿지 아니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상의 일이 험악하게 돌아가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하고 겁을 내었지만 선생은 앞날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대밭에 작은 집을 지어 시가와 술을 즐기며 한가로이 지내셨다.‘고 적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는 한사람의 희생, 한 사람의 용기, 한 사람의 정의로움, 한사람의 창의성으로 변화하고 발전을 거듭하여 빛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 같다.
우리남해의 관문 노량에는 앞 서 언급한 귀인들의 역사가 숨어 우리를 유혹하는 곳이라고 늘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나룻배를 타고 남해로 유배 와서 또 다른 흔적을 남긴 영조 때 사람 후송 류의량은 ‘남해문견록’에서 노량의 물결을 순한 물결이라고 했다.
이번 휴일에는 아이들과 충렬사에서 고결한 인격을 겸비한 충무공 이순신을 만나보고, 13년 유배생활을 낭만적으로 승화시킨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을 감상하고, 흥선대원군의 척화비를 보면서 개방하지 않고 문호를 닫고 쇄국을 하는 나라의 끝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의미심장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있고, 세계최초로 배에 지붕을 덮었던 창의성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거북선이 떠 있는 남해노량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품고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아! 이슬처럼 고결한 삶을 사신 충무공의 혼이 서린 노량이 우리 남해에 있다. 우리남해의 자랑이다. 하여 이번 지방선거에 당선되신 분들이 공직에 나아가지 전 이곳에 들려서 충무공 이순신 그분의 리더십을 한 번 더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분들도 장군님같이 고결한 인격을 겸비한 리더가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