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67리이고, 진해현(鎭海縣) 경계까지 79리이고, 남쪽으로 사천현(泗川縣) 경계까지 28리이고, 고성현(固城縣) 경계까지 66리이고, 서쪽으로 단성현(丹城縣) 경계까지 38리이고, 곤양군(昆陽郡) 경계까지 27리이고, 하동현(河東縣) 경계까지 67리이고, 전라도 광양현(光陽縣) 경계까지 94리이고, 북쪽으로 삼가현(三嘉縣) 경계까지 45리이고, 의령현 경계까지는 40리이고, 단성현 경계까지 4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8백 6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거타주를 분할하여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은 강주(康州)라 고쳤다.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청주(菁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는 또 강주라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는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에 진주라 고쳐서 절도사를 설치하고, 정해군(定海軍)이라 칭하며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이 안무사(安撫使)로 고쳤고, 뒤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태종(太宗)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목으로 만들었다. 세조조(世祖朝)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반성현(班城縣) 주의 동쪽 52리에 있다. 고려 현종 때 본주에 내속시켰다. 일명 편월(片月)이고, 창름(倉廩)이 있다. 영선현(永善縣) 주의 동남쪽 48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일선현(一善縣)인데 경덕왕이 상선(尙善)이라 고쳐서 고성군(固城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악양현(岳陽縣) 주 서쪽 1백 2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하동군에 예속시켰던 것인데 고려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신증』 정덕(正德) 무인년에 악양현과 화개현(花開縣)은 진주와 거리가 멀어서, 백성들이 관곡(官穀) 출납에 노고가 많다 하여 여기에다 창(倉)을 설치하였다. 살천부곡(薩川部曲) 주 서쪽 81리에 있다. 부곡의 장(長)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僧首)라 부른다. 화개부곡(花開部曲) 합포(陜浦)라 하기도 한다. 주 서쪽 1백 26리에 있다. 부곡의 장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라 부른다.
【진관】 군 다섯 합천(陜川)ㆍ초계(草溪)ㆍ함양(咸陽)ㆍ곤양(昆陽)ㆍ거창(居昌)이다.
『신증』 거창은 현으로 강등되었다. 현(縣) 여덟 사천(泗川)ㆍ남해(南海)ㆍ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하동ㆍ산음(山陰)ㆍ안음(安陰)ㆍ단성이다.
『신증』 거창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한 사람이다.【군명】 거열성ㆍ거타ㆍ청주(菁州)ㆍ강주ㆍ진양ㆍ청천(菁川)ㆍ진산(晉山)ㆍ진강(晉康)ㆍ정해군(定海軍).
【성씨】 본주 정(鄭)ㆍ하(河)ㆍ강(姜)ㆍ유(柳)ㆍ소(蘇)ㆍ임(任)ㆍ강(康), 김ㆍ박 모두 내성(來姓)이다.반성(班城) 형(荊) 형(邢)이라 한 데도 있다. 주(周)ㆍ옥(玉)ㆍ현(玄)ㆍ성(成), 김 속성(續姓)이다.영선(永善) 양(楊)ㆍ한(韓)ㆍ임(林)ㆍ임(任). 복산(福山) 문(文) 송자(松慈)와 같다.악양(岳陽) 도(陶)ㆍ오(吳)ㆍ임(任)ㆍ손(孫)ㆍ박, 김 속성(續姓)이다.화개(花開) 김. 살천(薩川) 박.
【풍속】 습속이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넉넉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 모두 《지리지(地理志)》에 있다. 여염이 태평하여 밥짓는 연기가 서로 잇따랐다 하륜(河崙)의 〈촉석루기(矗石樓記)〉에 있다. 학문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하연(河演)의 〈사교당기(四敎堂記)〉에 있다.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이 일에 부지런하고 아들과 손자가 효도에 힘을 다한다 하륜의 〈촉석루기〉에 있다.
【형승】 영남 제일이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진양의 시내와 산의 훌륭한 경치는 영남에서 제일이다.” 하였다. 큰 산과 큰 강 이첨(李詹)의 서문에, “인물이 나서 국가에 도움 되게 하는 이는, 큰 산과 큰 강의 성하고 맑은 정기로 된 것이 많다.” 하였다. 동방의 육해(陸海)이다. 예전 사람이 진양을 평하기를, “진양은 동방의 육해이다. 수산물과 토산물을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것이 영남 여러 주의 반이다.” 하였다. 비봉산(飛鳳山)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望晉山)이 남쪽에서 읍한다. 하륜의 〈봉명루기(鳳鳴樓記)〉에, “비봉산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한다. 긴 강이 그 사이에 흐르는데 동쪽과 서쪽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렀다.” 하였다.
【산천】 비봉산 주 북쪽 1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지리산(智異山) 주 서쪽 1백 리에 있다. 상봉(上峯)을 천왕봉(天王峯)이라 하는데, 남원부(南原府)편에 자세히 적었다. 산 북쪽은 함양군 경계이다.
○ 고려 때에 명사가 이 산에 숨어 살았는데, 지조가 높고 행실이 깨끗하여 세상 일을 간섭하지 않았다. 그때 임금이 듣고 사신을 보내 맞아오려 하니, 사례하기를, “외신(外臣)이 아는 것이 없사오니 왕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 다음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사신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보니 벽에다가, “한 마디 임금의 말씀 골에 들어오니, 이름이 인간에 떨어진 줄 비로소 알았네.”라는 한 구를 적어두고 북쪽 바라지를 통해 도망쳐 버렸다. 후세 사람들은 한유한(韓惟漢)이 아니었던가 의심한다. 《고려사》에, “유한이 여러 대로 서울에 살았으나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최충헌(崔忠獻)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여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고, 처자를 이끌고 지리산에 들어가 버렸다. 맑은 수양과 굳은 절조로써 외인과 교제하지 아니하니, 세상에서 그의 풍치를 높게 여겼다. 나라에서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고 깊은 골짜기로 옮겨가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 고려 김부의(金富儀)의 시에, “험한 곳을 지나 태화봉(太華峯)에 오를까 의심되더니, 돌아오는 길에 도리어 석양이 붉음을 겁내네. 우연히 왕사(王事)로 인해 세상밖에 노닐지만, 도리어 당년의 양차공(楊次公)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 고려 김돈중(金敦中)의 시에, “오르고 올라 최상봉에 이르러, 진세를 돌아보니 한 조각만하구나. 노을 속에 배회하여 그윽한 정취를 얻었으니, 풍류는 진(晉) 나라 양공(羊公)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네.” 하였다.
○ 고려 중 정명(靜明)이 벗을 전송하는 시에, “그대는 곧 바로 천 봉우리 속에 들어갔다 하니, 몇 겹의 연기와 노을속에 있겠네.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에 가신 길 아득하니, 다른 해 어느 곳에서 그대 자취 찾을고.”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두류산(頭流山)이 가장 크다. 신선이 표피자리 깔았네. 나무 끝에 두 다리가 날고, 구름 속에 반신(半身)만 내놓네. 사람들은 삼무(三武)에게 곤란 당했음을 기롱하고, 혹은 진(秦) 나라를 피했다고 말하네. 어찌 그윽하게 살 곳이 없어, 풍진 속에 백발이 새로워졌나.”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내 들으니, 백두산이 남으로 와서 바다에 닿아 뿌리가 서리었다네. 멀고 멀리 3천 리에 멧부리가 연했는데, 험한 곳은 모두 관문(關門)으로 되었다네. 구불거리다가 정기가 모여 갑자기 솟아났는데, 천궁(天宮)이 정상에 있어 제사를 누리네. 천궁이 하늘과 한 자도 안 되는 거리여서, 뭇 산을 당기고 뭇 물 삼킨다네. 바람과 구름이 부벼대서 나무가 못 크고, 응달엔 6월에야 눈이 처음 녹는다네. 천태산(天台山)이 4만 8천 장이라지만, 이 산과 견주면 하늘과 땅이로세. 유인(幽人)이 은거하여 이 속을 다니면서 만 구렁 솔바람 소리 모두 다 겪었네. 문득 선부(仙府)를 찾아 옥피리를 부노라니, 그 소리 완연히 봉황 울음 같아라.” 하였다.
○ 이륙(李陸)의 〈유산기(遊山記)〉에, “지리산은 또 두류산이라 칭한다. 영남ㆍ호남 사이에 웅거하여서 높이와 넓이가 몇 백 리인지를 모른다. 목 하나, 부 하나, 군 둘, 현 다섯, 속읍 넷이 산을 둘러 있는데, 동쪽은 진주ㆍ단성이고, 남쪽은 곤양ㆍ하동ㆍ살천ㆍ적량(赤良)ㆍ화개ㆍ악양이며, 서쪽은 남원ㆍ구례ㆍ광양이고, 북쪽은 함양ㆍ산음이다. 높은 봉우리가 둘이 있는데, 동쪽은 천왕봉이고,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으로서 서로 거리가 백여 리나 되는데, 항상 구름에 가려 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와서 서쪽에 향적사(香積寺)가 있고, 또 서쪽으로 50리쯤에 가섭대(迦葉臺)가 있다. 대의 남쪽에 영신사(靈神寺)가 있으며, 서쪽으로 20여 리를 내려오면 넓게 트인 땅이 있는데, 편평하고 비옥하여 가로 세로의 넓이가 모두 6ㆍ7리 됨직하다. 간간히 하습(下濕)하여서 곡식 심기에 알맞다. 늙은 잣나무가 하늘에 치솟았으며, 낙엽이 쌓여서 정갱이까지 빠진다. 복판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끝이 없어 완전히 하나의 평야(平野)이다. 빙빙 둘러 남으로 내려오면, 시내를 따라 의신(義神)ㆍ신흥(新興)ㆍ쌍계(雙溪)의 세 절이 있고,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여서 20리 지점에 칠불사(七佛寺)가 있다. 쌍계사에서 동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불일암(佛日菴)이 있고, 그 나머지 이름난 사찰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널판지로 덮었고, 거주하는 중이 없다. 오직 영신사만이 기와를 사용했으나 거주하는 중은 한두 명에 불과하니, 산세가 아주 험준하여 사람 사는 마을과 서로 닿지 않았으므로, 높은 선사가 아니면 안주하는 자가 드문 것이다. 물의 근원은 영신사 작은 샘물로부터 이 신흥사 앞에 와서는, 벌써 큰 냇물이 되어 섬진강(蟾津江)에 흘러드는데, 여기를 화개동천(花開洞天)이라 한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천불암(千佛庵)ㆍ법계사(法戒寺)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자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임했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져서 매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 또 두 물이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하나는 법계사 밑에서 나오며, 살천(薩川)에서 합쳐져 하나로 되어 소남진(召南津) 아래쪽으로 흘러 들어서 진주를 둘러 동쪽으로 가는데, 이것을 정천강(菁川江)이라 한다. 소남진이란 것은 산 북쪽 물이 동쪽을 돌아 오다가 단성현(丹城縣)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인 것이다. 살천촌(薩川村)에서 20여 리를 가면 보암사(普庵寺)가 있다. 살천촌 앞쪽을 내산이라 하고, 바깥쪽을 외산이라 한다. 보암사에서 바로 올라가 빠른 걸음으로 하루 반이면 천왕봉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돌 벼랑이 가파르고 험하여 길을 찾을 수 없고, 또 느티나무와 노송나무가 하늘을 가렸으며, 밑에는 가는 대가 촘촘하고, 간혹 말라 죽은 나무가 천 길 벼랑에 걸쳐 있는데 껍질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또 폭포가 멀리 구름 끝으로부터 그 사이에 내리쏟아 길이를 측량할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발길을 돌리지 못하겠고, 돌아보면 뒤를 볼 수 없다. 수십 개 나무를 베어야 비로소 한 자 넓이의 하늘을 볼 수 있다.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가끔 돌을 주워, 바위 위에 두고 길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벼랑과 골짜기 사이에는 얼음과 눈이 여름을 지나도 녹지 않는다. 6월에 서리가 처음 내리고 7월이면 눈이 오고 8월이면 얼음이 크게 언다. 첫 겨울이 되면 눈이 몹시 와서 골과 구렁이 모두 편평하여지므로 사람이 왕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산에 사는 사람들이 가을에 들어갔다가 늦은 봄이라야 비로소 산에서 내려온다. 혹 산 아래에는 뇌성과 번개가 크게 치면서 비가 와도, 산 위에는 날씨가 청명하여 한 점 구름도 없기도 하니, 대개 산이 높아서 하늘에 가까우므로 기후가 평지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대체로 산 밑에는 감과 밤나무가 많고, 조금 위에는 모두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 지대를 지나면 삼나무와 노송나무이다. 절반은 말라 죽어서 푸른 것과 흰 것이 서로 섞여져 있으며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맨 위에는 철쭉꽃만 있을 뿐인데, 나무 높이가 한 자 길이가 채 못 된다. 맛있는 나물과 진귀한 과실이 딴 산보다 많아서 산에 가까운 수십 고을이 모두 그 이익을 입는다.”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이 김종직(金宗直)의 〈두류록(頭流錄)〉 끝에 쓴 시에, “위태롭게 높도다. 산이 둥그스름하며 넓게 퍼졌음이여.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 하늘에 닿았네. 뿌리가 몇 천 백 리나 서리었는지 내 모르거니와, 우뚝하게 하늘 동남쪽에 중진(重鎭)이로다. 원기가 발설되고 천기가 뱉었다 머금었다 한다. 구름과 연기가 침침하게 중턱을 감췄고, 그윽한 골짜기엔 아름다운 나무가 많다. 처음 숲 기슭을 좇아 참 취미를 찾아서 선경을 샅샅이 깊이 더듬었네. 벼랑에 달린 나는 폭포가 비같이 쏟아지며, 우레처럼 아래로 깊은 못을 진동시킨다. 산이 깊을수록 물이 맑으니, 맑은 그림자가 쪽빛보다 푸르다. 몸이 최고봉에 오르니 뭇 멧부리가 쇠못을 꽂은 것 같구나. 손으로 은하수를 만질 듯 하늘과 가까운데, 하늘 바람이 머리털을 불어 차게 흩날린다. 부상(扶桑)과 약목(若木)은 어디쯤인가. 푸른 바다 만리에 맑은 이내 뜨고 큰 물결이 어지럽게 부딪쳐 신기루 빛이 서로 잠기네. 퇴계(椎髻)와 훼복(卉服)이 바다를 건너 잇따라오니, 성군의 덕화가 멀리 미쳤음을 볼 수 있네. 아래로 보니 수십 주(州)의 인간들이 아득하게 굼틀거리는 어린 누에 같다. 산의 높음은 더할 수 없고, 산 속은 즐겁기도 하다. 흔들거리는 패다(貝多) 잎이고, 펄럭거리는 우발담(優鉢曇) 꽃이라. 아름다운 꽃과 이상한 나무 다투어 피는데, 봄바람이 일렁거리니 향기가 그윽하다. 진기하고 이상한 이름 모를 새가 푸른 날개로 너울너울 춤춘다. 푸른 이끼가 길에 가득하니 속인(俗人)의 발자취 없어지고, 그윽한 바위 끊어진 벼랑에 붙여 감실(龕室) 열렸네. 은은한 절을 우러러보니, 찬란한 단청이 눈부셔라. 당간의 깃발은 아득하게 비치고 종과 북소리 은은하게 들린다. 이 속에 마땅히 은거한 군자 있어, 검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털의 팽조(彭祖)ㆍ노자가 많으리라. 구절장(九節杖) 짚고, 부용관(芙蓉冠) 쓰고, 쌍성(雙成 서왕모의 시녀)이 말고삐 끌고 왕모(王母)가 말을 몰리라. 구하(九霞)의 푸른 술을 마시고, 동정(洞庭)의 누런 감자로 안주한다. 영지와 요초가 나날이 자라고, 푸른 이무기 검은 사슴의 잠이 한창이라. 달밤 숲이 침침한데 신령스러운 바람소리는 헌원(軒轅)이 풍악을 벌여서 관함(官函)을 두드리는 듯, 고운(孤雲)이 도를 듣고 그 지경에 웅경(熊輕) 조신(鳥伸)의 묘한 법 배운 지 오래였다. 커다란 필적이 푸른 절벽에 비치니, 천재에 미담을 남겼네. 세상 사람은 무엇 때문에 부귀만 생각하고 술에 빠지는가. 그대는 거기에 돌아가 누웠으니, 구름 숲은 본성이 달게 여기던 바이네. 내 지금 속세의 그물에 떨어졌으니, 허덕거림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마음으로는 그대와 함께 소원대로 좋은 땅 가리어 띠 암자 얽고 싶었네. 작은 관록을 탐내어 능히 가지 못하고, 고생스럽게 파리처럼 구하며, 동어(鮦魚)처럼 탐낸다. 한 몸의 마음과 일이 서로 어긋나니, 둥근 자루를 모난 구멍에 끼움과 무엇이 다르랴. 그대는 하늘 위에 학이요, 나는 언덕에 메추라기라. 몸을 기울여 남쪽을 바라보니, 조심하는 마음에 속이 타는 듯하네. 어찌하면 칡덩굴 부여잡고 새삼 덩굴 넘어뜨리며, 상상 꼭대기에서 긴 휘파람 불어 호연한 기운이 천지와 아울러 셋이 될꼬.” 하였다. 청학동(靑鶴洞) 지리산 속에 있다. 주에서는 서쪽으로 1백 47리의 거리이다.
○ 이인로의 《파한집》에, “지리산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하게 잇따라서 대방군(帶方郡)에 와서는 수천 리를 서리어 맺히었는데, 산을 둘러 있는 것이 10여 주이다. 한 달이 넘게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늙은이들이 서로 전해 오는 말에, ‘그 안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여, 엎드려서 몇리를 지나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된다. 사방이 모두 옥토여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푸른 학이 그 안에 서식하는 까닭에 이렇게 청학동이라 부른다. 옛날 속세를 피한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 한다. 지난날 나는 최상국(崔相國) 아무와 함께 이 속세를 떠나 길이 숨을 뜻이 있어서 청학동을 찾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장차 대롱[竹籠]에 송아지 두세 마리씩을 담아가지고 들어만 가면, 속세와 서로 상관하지 않아도 되리라.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서 유숙하니, 지나는 곳마다 선경 아닌 데가 없었다. 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났고 만 구렁 물이 다투어 흐른다. 대 울타리 초가 지붕에 복숭아꽃이 가렸다 비쳤다 하니,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른바 청학동이란 것은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나는 바위에다가 시를 적기를, ‘두류산 멀고 저녁 구름 낮으막한데, 만 구렁 천 바위가 회계(會稽)와 같네. 지팡이 끌며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을 격해서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린다. 누대는 아득히 삼신산이 멀고, 이끼 끼어 네 글자가 쓰인 것이 희미하네. 신선이 있는 곳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했다.” 하였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둥그런 지리산을 바라다 보니 만겹 구름에 항상 침침하여라. 뿌리가 백여 리 서리어 산세가 절로 빼어나니, 뭇 구렁이 감히 겨루지 못한다네. 층층한 멧부리와 가파른 돌벽은 기세가 뒤섞였고, 성긴 소나무와 푸른 잣나무는 차갑게 우거졌다. 시내가 감돌고 골이 굴러 별천지 되었는데, 한 구역 좋은 경치는 참으로 별천지로세. 사람 없어지고 세상 변해도 물은 제대로 흐르며, 초목이 우거져서 동서가 아득하다. 지금도 푸른 학은 홀로 깃드니, 벼랑에 붙은 한 가닥 길이 겨우 통하리. 좋은 밭 비옥한 땅이 편평하기 상과 같은데, 넘어진 담과 무너진 길이 쑥대 속에 묻혔구나. 숲이 깊으니 닭과 개 다니는 것 안 보이고, 해 지니 원숭이 울음만 들린다. 아마도 옛날에 은자가 살던 곳, 사람은 신선되고 산은 비었는가. 신선이 있고 없음은 논할 것 없고, 다만 높은 사람이 속세 벗어났음을 사랑한다. 나도 여기에 집 짓고 숨어서 해마다 요초 캐며 생을 마치고 싶다. 천태산(天台山) 지나간 일은 참으로 허황하고, 무릉도원 유적도 다시 몽롱하다. 장부의 출처를 어찌 구차하게 하랴. 제 몸만 맑게 하고 인륜을 어지럽힘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내 지금 노래 지으매 뜻이 무궁하니, 그날에 시 남긴 늙은이 우습기도 하여라.” 하였다.
옥산(玉山) 주 서쪽 55리에 있다. 우산(牛山) 주 서쪽 65리에 있다. 지리산의 남쪽 기슭인데, 형상이 소가 엎드린 것과 같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고려 때에 장군 강민첨(姜民瞻)이 이 산에다가 우방(牛房)ㆍ모방(茅房)의 두 절을 창건하였는데, 모방에는 민첨의 화상이 남아있다. 망진산(望晉山) 주 남쪽 6리에 있다. 영봉산(靈鳳山) 반성현(班城縣) 동쪽에 있다. 집현산(集賢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단성현(丹城縣) 편에도 나왔다. 월아산(月牙山 달엄산) 월아 부곡에 있다. 와룡산(臥龍山) 주 남쪽 60리에 있다. 사천현(泗川縣) 편에도 나왔다. 송대산(松臺山) 주 동쪽 42리에 있다. 바다 주 남쪽 60리에 있다. 흥선도(興善島) 주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남강(南江) 주 남쪽 1리에 있다. 강의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지리산 운봉현(雲峯縣) 경계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주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의령현(宜寧縣) 경계에서 정암진(鼎巖津)이 된다.
○ 최함일(崔咸一)의 시에, “오리들이 쌍쌍으로 물 차고 날며, 영산홍(暎山紅)이 유리 같은 푸른 물에 거꾸로 비친다. 화공이 그려내기 어려운 가지가지 의미는, 서생의 한 수 시에 다 들어가네.” 하였다.
섬진(蟾津) 악양현(岳陽縣) 서쪽에 있는데 주에서는 93리이다. 지리산 서남쪽 물이 구례현 용왕연(龍王淵)과 합쳐서 여기에 와서 섬진이 되며, 동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운당진(雲堂津) 주의 동쪽 15리에 있으니, 남강 하류이다. 소남진(召南津) 주 서쪽 29리에 있으며 단성현 신안진(新安津)의 하류이다. 반룡포(盤龍浦) 주 남쪽 79리에 있으며, 바다 개펄이다. 정천(菁川) 주 서쪽 3리에 있으니, 곧 남강 상류이다. 구라량(仇羅梁) 주 남쪽 60리에 있으며 바닷가 개펄이다. 흥선도에 들어가는 자는 여기를 경유하여야 한다. 금산지(金山池) 주 동쪽 20리에 있다. 부지(釜池) 주 북쪽 3리에 있다. 가차례지(加次禮池) 가차례 부곡에 있다.
『신증』 방어산(防禦山) 반성현 북쪽 15리에 있다. 방아산[帖山]이라고도 하는데, 속음이 비슷하다. 삽암(鈒巖) 악양현 강변에 있다. 어선이 항상 여기에 정박한다.
촉석강(矗石江) 누선이 있다.
○ 조위(曺偉)의 시에, “누 밑에 긴 강 백길이 맑은데, 채색 배 비스듬히 끌며 거울 속에 흐른다. 해는 모든 집의 발 그림자를 흔들고, 바람은 10리 피리소리를 전한다. 산 아지랑이는 아른아른 절벽에서 나고, 물빛이 일렁거려 높은 성을 움직이네. 지척의 홍진길에 머리 돌리니, 갈매기 한 마리 가벼이 뜨는 것 부러워라.” 하였다.
강주포(江州浦) 사천현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김양포(金陽浦) 곤양군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토산】 닥종이[楮]ㆍ감ㆍ차 신라 흥덕왕(興德王) 때에 대렴(大廉)이 당(唐) 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면서 차 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에 심게 하였더니, 성덕왕(聖德王) 때에 비로소 무성하였다. ○ 하연(河演)의 신다(新茶) 시에, “진지(晉池) 풍미(風味)는 섣달 앞의 봄인데, 지리산 가에 초목이 새롭다. 금가루ㆍ옥 싸라기 달일수록 더욱 좋아, 깨끗한 빛깔과 빼어난 향기 맛이 더욱 진기하다.” 하였다. 대구(大口)ㆍ미역ㆍ잣[海松子]ㆍ청각(靑角)ㆍ해삼ㆍ꿀[蜂蜜]ㆍ전복[鰒]ㆍ생강ㆍ송이[松蕈]ㆍ석류ㆍ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옻ㆍ죽전(竹箭) 망진산ㆍ적량(赤良)ㆍ청암(靑巖)ㆍ삽암ㆍ영선(永善) 등에서 산출한다. 매실. 『신증』 웅담ㆍ녹용ㆍ오미자ㆍ대ㆍ문어ㆍ낙지[絡締]ㆍ조기[石首魚].
【성곽】 촉석성(矗石城) 주 남쪽 1리에 있다. 석축인데 둘레가 4천 3백 59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셋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옛날부터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돌고 도는 것은, 운수의 성하고 쇠함과 인사의 잘하고 못함이 서로 관계되어 그런 것이다. 옛날 사람은 인사를 닦아서 천운에 응하는 까닭에, 혹 도적의 난이 일어나도 마침내 근심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내가 우리 고을의 성에 대해서 느낌이 있다. 내가 총각 적에 여기에서 유학하면서, 매양 허물어진 성의 옛터를 보았으나 그 연대를 알수 없고, 늙은이들에게 물어도 또한 증빙할 수 없었다. 이때에는 여염이 태평하여 밥짓는 연기가 연이었었다. 쥐새끼 같은 해구(海寇)가 가끔 일어났으나, 강주(康州) 길안(吉岸)의 토벌만으로도 족히 꺾어 부술 수 있었고, 합포진(合浦鎭)에서 군사를 나누어 구원하여서 우레처럼 엄하게 바람처럼 날려버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 수리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았다. 내가 장성하여 벼슬에 종사한 지 10여 년 이래로, 바다 도적으로서 육지에 올라오는 것이 해마다 심하여 갔다. 정사년 가을에 조정 논의도 변방을 방비하는 것을 중히 여겨,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어 주ㆍ현의 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고을 사람이 옛터에다가 흙으로 쌓았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무너졌다. 사명을 받든 자가 그 책임을 어찌 면하리오. 기미년에 지금 지밀직 배공(裵公)이 강주에 진장(鎭將)으로 와 있으면서, 목사에게 공문을 보내 다시 수축하게 하고, 참좌(參佐)를 보내 공사를 감독하였다. 흙덩이던 것을 돌로 바꿔서 쌓게 하였으나, 공사가 반도 되기 전에 해구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강성군 산성(江城郡山城)이 있어서 한 고을 사람이 의거할 곳이 있었고, 해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이 좁고 지세가 높아서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고, 또 주의 치소(治所)에서 거리가 멀므로 갑작스러운 사태에 능히 미칠 수 없었다.
해구가 물러간 뒤에 목사 김공이 백성의 뜻에 따라 영을 내리기를, ‘주의 성을 이제는 수축해야겠다.’ 하니, 듣는 자가 다 일을 하기를 원하였다. 장정들이 일을 고르게 하고 몸소 감독하여 며칠 안 되어 일을 끝마쳤다. 성 둘레는 8백 보이고, 높이는 세 길이 넘었다. 성문 셋을 설치하였는데, 서쪽은 의정(義正), 북쪽은 지제(智濟), 남쪽은 예화(禮化)이며, 문 위에는 모두 누를 지었다. 올라서 사면을 돌아보니 정천(菁川)이 서쪽을 둘렀고, 긴 강이 남쪽에 흐르며, 품자(品字)가 동쪽에 벌였고, 세 곳의 못물이 북쪽에 돌아 모인다. 또 성과 못 사이에 참호를 파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와서 꺾이어 또 남쪽으로 가서 강에 이르는데, 형세의 장함이 진실로 성위의 한 사람이 성밖의 백 사람을 당할 만하였다. 성이 완성되자 해적이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여 온 경내가 편안하였다.
아, 처음 시작하는 어려움이 다시 일으키는 어려움보다 못하고, 처음이 있게 하는 어려움이 마침이 있게 하는 어려움만 같지 못한데, 일은 반절이면서 공은 곱절인 것을 내가 김공한테서 보았다. 공의 이름은 중광(仲光)이다. 정사하는 데에 대체를 힘써서 어른의 풍모가 있다. 일찍이 제주 목사로 있었는데 반복하여 복종하지 않던 토속(土俗)이 그의 의(義)에 감복되었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재상이 되었는데 다스리기 어려운 지방을 잘 다스렸다 하여 이 임명이 있었다. 판관 이군 사충(仕忠)도 단정한 사람으로서 공을 도와 이 성을 완성하였다.” 하였다.
【관방】 적량(赤梁) 주 남쪽 백 13리에 있다.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 1백 82척이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사람이다.
삼천진(三千鎭) 남쪽 74리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50척이다. 권관(權管)을 두어 방비한다.
【봉수】 대방산 봉수(臺方山烽燧) 주 남쪽 1백 14리에 있다. 남쪽으로 남해현(南海縣) 금산(錦山) 북쪽에 응하고, 북쪽으로 각산(角山)에 응한다. 망진산 봉수(望晉山烽燧) 남쪽으로 사천(泗川) 안점(鞍帖)에 응하고, 북쪽으로 광제산(廣濟山)에 응한다. 각산 봉수(角山烽燧) 주 남쪽 76리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 대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곤양(昆陽) 우산(牛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사천 안점에 응한다. 광제산 봉수(廣濟山烽燧) 주 북쪽 31리에 있다. 남쪽으로 망진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단성 입암산(笠巖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하륜의 서문에, “고을 객사가 두 번이나 화재를 만나, 다시 짓지 못한 지가 여러 해였다. 계미년에 지금 판서 광주(廣州) 안공(安公)이 좌사간대부로 있다가 목사가 되어 나갔다. 이에 옛터를 찾아 그전보다 제도를 조금 넓혀서 신축하였는데, 지금 목사 최공과 판관 은군(殷君)이 계승하여 더 수축하였다. 안공의 이름은 노생(魯生)이요, 최공의 이름은 이(迤)이며, 은군의 이름은 여림(汝霖)인데, 무두 훌륭한 관리로서 세상에 명성이 있다.” 하였다.
【누정】 봉명루(鳳鳴樓) 객관 남쪽에 있다. ○ 하륜의 기문에, “객사 남쪽에 예전 누(樓) 3칸이 있는데, 그 밑을 비게 하여 왕래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누문이라 하는데 이름이 없다. 그 곁에는 노목 수십 그루가 벌여 서서 바람을 머금고 햇볕을 가려서 서늘한 기운이 저절로 난다. 관가와 민가와 대숲과 꽃나무가 가렸다 비쳤다 서로 연접하였다. 산빛과 물빛이 그 밖에 비치고 유람하기에 알맞은 것이 실로 깊숙하고 넓게 트인 중간에 있다. 영목사 정헌대부 최공(崔公)이 이 주에 부임하여서는 모든 황폐한 것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기를, ‘주는 땅이 아주 남쪽이어서 여름 더위가 더욱 심하다. 사신과 빈객이 왕래할 때에 시원한 곳이 있어야 할 터인데, 촉석루는 허물어진 지가 이미 오래이고 또 공해(公廨)에 막혔다. 이 누를 수리하면 공역은 덜하고 일은 편리하겠다.’ 하고, 마침내 공인(工人)을 모아서 농사 여가에 일을 시켰다. 기울어진 것을 바루고 썩은 것을 갈아 넣었으며, 작고 비좁은 것은 더 보태어 늘리고, 단청을 칠하고, 봉명(鳳鳴)이라는 현판을 걸고, 주 사람 전 상주 목사(前尙州牧使)였던 전군(全君) 제(悌)에게 부탁하여 나에게 기문 짓기를 청하였다. 내 적이 생각하니, 봉(鳳)이란 것은 왕자(王者)의 상서이다. 옛날 주(周) 나라가 한창일 때에 봉황이 높은 뫼에서 울었다 한다. 지금 밝은 임금이 위에 계셔 몸소 인의를 행하고,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한 자를 부리는데, 백성과 가까운 관직(지방관)을 더욱 중하게 여긴다. 최공은 자애하고 인후한 자질로, 외방에 나가 한 주를 맡아서 왕화(王化)를 펴매, 이에 봉명(鳳鳴)으로써 누 이름을 하였으니, 이는 문왕과 무왕의 덕으로써 우리 임금에게 기대하여 행여 봉이 우는 상서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일찍이 들으니, 한(漢) 나라 황패(黃霸)가 영천(穎川)에 태수로 있을 때에, 봉황이 관사에 오고 다스림이 천하 제일이 되었으므로, 조정에 불려들어가 승상이 되어, 공이 당시에 빛나고 명예가 후세에 전해 온다. 이것은 진주 사람이 최공에게 기대하는 것이며, 최공도 또한 스스로 힘씀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푸른 산이 둘러 물가에 임했는데, 우리 고을 좋은 경치 참으로 맑고 기이하네. 영천(穎川)의 치적을 오늘에 기대하고, 아각(阿閣)에 화하게 울던 것은 성한 시대를 상상하네. 대나무가 인가를 가려 보일락말락, 나무는 관도에 깊어 꾸불꾸불. 농옥(弄玉)을 불러 함께 타고 갈까나, 어찌하면 퉁소를 얻어 달 아래에 불까.” 하였다. ○ 박욱(朴彧)의 시에, “산에는 연이은 봉우리 있고 물에는 물가 있네. 진양의 좋은 경치 바라보매 기이하네. 옛 친구 서로 만나 흉금을 터는 곳, 걸각(傑閣)에 함께 올라 술잔 잡을 때로세. 누수(漏水)는 다했는데 시는 못 이루었고, 촛불은 다 타도 흥은 남았네. 우습다. 후령(緱嶺)에서 신선된 이여. 부질없이 퉁소 배워 세상 밖에서 불었네.” 하였다.
촉석루(矗石樓) 촉석성 안에 있다. ○ 하륜의 기문에, “누정(樓亭)을 짓는 것은 정사하는 자의 여사(餘事)이다. 그러나 한 누의 일어남과 황폐한 것으로서 한 고을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 인심을 인해서 한 시대의 세도를 알 수 있다. 그러하니 어찌 여사라 하여 하찮게 여길 것인가. 내가 이런 말을 한 지 오래였더니, 지금 우리 고을의 촉석루에서 더욱 믿게 되었다. 누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 벼랑 위에 있는데, 내가 소년 시절 여러 번 올랐던 곳이다. 누 제도가 크고 높으며 확 트여서, 굽어 보면 긴 강이 밑에 흐르고, 여러 봉우리가 그 바깥에 벌여 있다. 여염집이 뽕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보일락 말락하며, 푸른 석벽과 긴 모래밭이 그 곁에 연하여 있다. 농부와 잠부(蠶婦)가 그 일에 힘을 다하며, 아들과 손자는 효도에 그 힘을 다한다. 새들이 울고 날며, 물고기와 자라가 헤엄치며 자맥질하는 것 같은 것도, 한 구역의 동물로써 제자리를 얻은 것이 모두 볼 만하다. 또 누를 이름한 뜻은, 담암(淡庵) 백 선생(白先生)이 말하기를, ‘강 가운데에 뾰족뾰족한 돌이 있는 까닭으로 누 이름을 촉석이라 한다.’ 하였다. 이 누는 김공이 짓기 시작하였고 안상헌(安常軒)이 두 번째로 완성하였는데, 모두 과거에 장원한 분들인 까닭에 또 장원루(壯元樓)라는 명칭이 있기도 하다. 아름다운 제영(題詠)으로는 면재(勉齋) 정 선생(鄭先生)의 배율(排律) 육운(六韻)과, 상헌(常軒) 안 선생(安先生)의 장구(長句) 사운(四韻)이 있고, 또 운은(耘隱) 걸 선생(傑先生)의 여섯 수 절구가 있으며, 이분들의 운을 화답하여 계승한 이는 급암(及菴) 민 선생(閔先生), 우곡(愚谷) 정 선생(鄭先生), 이재(彝齋) 허선생(許先生) 같은 분이 있다. 모두 아름다운 작품으로서 선배의 풍류와 문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려 말기에 온갖 법도가 무너지매, 변방 수비 또한 해이해져서 왜적이 침입하니, 백성이 도탄에 빠졌고 누도 또한 잿더미로 되어 버렸다. 하늘이 성조(聖朝)를 열어 성신(聖神)이 계승하니, 정치 교화가 이미 밝아져서 은택이 나라 안에 젖고 위엄이 해외에 떨치니, 전일에 도둑질하던 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여 연달아 공물을 바쳤다. 바닷가 지역에 인구가 다시 빽빽하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이가 술을 잔질하며 서로 경사하기를, ‘오늘날 우리 눈으로 태평세월을 볼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은, ‘나의 다스림이 아직도 흡족하지 못하다.’ 하시어, 매양 교지를 내려 백성의 힘을 부리는 것을 엄금하여, 수령으로서 농사와 학교에 관계되는 일 외에는 감히 한 가지 역사도 마음대로 일으키지 못하였다. 고을 부로(父老) 전 판사 강순(姜順), 전 사간 최복린(崔卜麟) 등이 의논하기를, ‘용두사(龍頭寺)는 이 읍을 설치할 때에 함께 된 것이고, 촉석루는 한 지방 훌륭한 경치였는데 황폐한 지 오래 되었으나 다시 새롭게 하지 못하니, 이것은 우리 고을 사람들의 책임이다.’ 하고, 이에 각자 재물을 추렴하고, 고을 중으로서 용두사에 향을 올리는 단영(端永)에게 그 일을 주간하도록 하였다. 계사년에 판목사 권공충(權公衷)이 판관 박시결(朴施潔)과 함께, 부로의 말을 받아들여 강둑을 수축하되, 백성을 나누어 대(隊)를 만들고 대마다 한 무더기씩 맡겨서 농촌의 여러 해 걱정을 제거하게 하였더니, 열흘이 못 되어서 공역을 마쳤다. 다음에 누를 짓는 역사에 부족한 것을 도와주고, 놀고 있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그 힘을 다하게 하니 가을 9월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높은 누가 비로소 새로워져서 훌륭한 경치가 예전과 같았다. 내 이미 인심과 세도를 오르는 자가 물가에 풀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의 불인(不仁)함으로써 백성의 삶을 해롭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밭에 모종이 한창 자라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자라게 하는 것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급하지 않은 일로써 백성의 농사 때를 빼앗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동산 숲에 열매 맺는 것을 보면 천지가 물을 성숙시키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의(義) 아닌 욕심으로 백성의 이로움을 침노하지 아니하기를 생각하고, 마당에 노적가리가 한창 쌓이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기르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법 아닌 생각으로써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 아니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이 마음을 미루어서 범위를 넓혀서 감히 제몸만이 홀로 즐기지 않고 반드시 백성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사람들도 모두 세도의 화함과 인심의 즐김이 실로 임금의 덕이 깊고 두터운 데에서 근원했다는 것을 알아서, 모두 화봉인(華封人)의 축수를 올리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로들이 간절히 마음 써서 이 누를 다시 일으킨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나도 치사할 날이 이미 가까우니, 필마(匹馬)로 시골에 돌아와서, 여러 부로와 함께 좋은 시절 좋은 날에 이 누에서 술잔을 들며 시를 읊조려 즐거운 바를 함께 즐기면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나니, 부로들은 기다릴지어다.” 하였다.
○ 고려 정을보(鄭乙輔)의 시에, “황학(黃鶴)이라는 이름난 누, 그도 한때이었네. 최공이 일 좋아하여 시를 남겼다. 올라와 놀매 경치는 변함이 없건마는, 시 짓고 읊조리는 풍류는 성쇠가 있어라. 소 먹이는 두덕과 낚시터에는 가을 풀이 얕고, 거위 노니는 돌다리와 해오라기 섰는 물가엔 석양이 더디다. 푸른 산은 사방으로 모두 새그림인데, 분바른 계집 세 줄 서서 옛 노래를 부른다. 옥잔을 주고 받으니 산달이 오르고, 구슬 발을 걷으니 고개에 구름이 드리웠다. 난간에 기대어 머리 돌리니 건곤도 작은 듯, 이제야 우리 고을이 특별히 기이함을 믿노라.”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시에, “누에 올라 옛날 놀던 때 생각하며, 억지로 강산에 답해 다시 시구를 찾는다. 나라에 어찌 난세를 평정할 현인이 없으리. 술은 나를 흔들어 노쇠한 나이를 비감케 하네. 지경이 맑으니 세속의 자취가 끊기기 쉽고, 좌석이 넓으니 춤추는 소매 휘두르기 어찌 방해되리. 붓에 먹찍어 속절없이 춘초구(春草句)를 짓고, 술잔 멈추며 또 죽지사(竹枝詞)를 부른다. 기생은 다가 앉아서 즐거움이 친밀하고, 사람은 시절과 함께 가기 싫어하네. 이 땅의 높은 정취는 참으로 속세가 아닌 듯, 적성(赤城)과 현포(玄圃)도 기이함을 독차지하지 못하리.” 하였다. ○ 백미견(百彌堅)의 시에, “유람하는 것은 시대 못 만남과는 관계없다. 호수와 산 좋은 경치가 시 읊기를 요구하네. 누구의 눈으로 일찍이 여기 터보아 집 지었나. 내 몸이 평안하여 쇠하지 않았음을 자랑한다. 기둥에 기대니 건곤은 끝난 곳이 없고, 물결을 짜놓은 듯한 발과 장막 반공에 드리웠다. 풍류의 가을 달을 이태백이 읊조렸고, 뱃노래 소리 저문 강에 어부가 노래한다. 얘기하고 웃으며 술 한 잔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갔다가 오는데 사흘 동안을 더디다고 하던가. 무성한 숲, 긴 대나무는 서남쪽 언덕에 있는데, 내 정자가 분수 밖에 기이함을 도리어 두려워하네.” 하였다.
○ 김구경(金久冏)의 시에, “촉석루에 올라서 한참 동안 머무니, 풍경이 나를 흔들어 시 짓고 싶어진다. 영운(靈運)의 뛰어난 재주 내 어찌 미치랴마는, 원룡(元龍)의 호기 온전히 쇠하지 않았다. 맑은 강, 낭떠러지엔 고기가 자주 뛰고, 큰 들판 긴 숲엔 바람이 더디 분다. 금술잔을 대해서 묵은 한을 삭이고, 은필(銀筆)을 가져 새 글을 쓴다. 처음으로 눈을 만나 찬 매화 맹동 같더니, 또 봄을 보니 고운 버들이 드리웠다. 떠나려다 멈칫거리며 다시 바라보니, 눈앞에 보이는 풍경 다 기이하여라.” 하였다. ○ 정이오의 시에, “인간을 굽어보니 고금이 되었건만, 기이한 경치는 올라도 다하지 않네. 서쪽에서 오는 두 줄기 물은 쪽빛이 합쳤고, 남쪽으로 가는 뭇 봉우리는 파란빛이 짙다. 세상 따라 행하고 멈춤은 두공부(杜工部)의 탄식이요, 백성보다 먼저 걱정하고 뒤에 즐김은 범문정(范文正)의 마음이로다. 강을 격한 옛 마을엔 바람과 연기 그대로인데, 서울서는 당년에 몇번이나 월 나라 노래를 읊었던고.” 하였다. ○ “흥했다 폐함이 돌고 돌아 바로 지금을 기다렸음인가. 산 꼭대기에 높은 누각이 반공에 임했네. 산은 들 밖에서 연했다 끊어졌다, 강은 누 앞에서 넓기도 깊기도 하네. 백설양춘곡(白雪陽春曲)은 선녀 같은 기녀의 노래요,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사또의 심사여라. 당시의 옛 일을 아는 이 없어, 고달픈 객이 돌아오며 홀로 읊조린다.” 하였다. 『신증』 허침(許琛)의 시에, “10년의 유람길 세상에 두루 돌았더니, 늦게야 선궁(仙宮) 몇 째 누(樓)에 기댔는고. 술을 많이 마셔 미쳤지 속물이 아니니, 높은 데 올라서 시 짓는 것 곧 맑은 놀음이네. 산에 가득한 소나무 숲엔 피리소리 움직이고, 한밤중 물결 위엔 흰 달이 떴어라. 햇살이 붉은 발에 비치니 봄 잠이 족하여, 제몸이 남쪽 고을에 체류하는 줄 모른다.” 하였다. ○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창망한 호해(湖海)에 가장 명승이라, 하늘이 사신(詞臣)을 보내 이 누에 이르렀네. 막막한 강 언덕 꽃은 밝기가 비단 같고, 겹겹으로 연기 낀 나무 푸름이 흐르는 듯하다. 백년 풍물은 그 누가 구사(驅使)하랴. 한 돛대 술 실은 배는 제대로 남쪽으로 떠다닌다. 지는 해에 유하주(流霞酒) 취해 잠이 달게 든 곳, 일부러 이 몸을 고을에 머물게 한 듯.” 하였다. ○ 이우(李堣)의 시에, “서쪽으로 지리산을 연해 참으로 선경이라, 기이한 경치는 동쪽으로 강북(江北)의 누에 다 있네. 풍경은 영원히 봉악(鳳岳)에 머물러 있고, 번화함도 정천(菁川) 따라 흐르지 않는다. 3년 동안 풍월 두고 시 천 수 지었고, 한 번 웃으니 신세와 이름이 다 헛것인 것을, 대궐 향할 한쌍의 오리가 그리 멀진 않지만, 꿈속에도 묘연하니 중주(中州)가 아득해라.” 하였다.
쌍청당(雙淸堂) 촉석루 서편에 있다.
『신증』 능허당(凌虛堂) 곧 촉석루의 동쪽 누각이다. 조양관(朝陽館) 곧 봉명루의 동쪽 누각인데, 목사 정백붕(鄭百朋)이 건축한 것이다. 청심헌(淸心軒) 능허당 동쪽에 있다. 임경헌(臨鏡軒) 곧 촉석루의 서쪽 누각이다. 목사 이원간(李元幹)이 건축하였다.
【학교】 향교 주 동쪽 3리에 있으며, 사교당(四敎堂)이 있다. ○ 하연(河演)의 기문의 대략에, “우리 고을 학교에는 본래 강당이 없었다. 전 교관 조보인(趙寶仁)이 주 목사에게 의논하여 재목을 준비하였고, 지금 교관 강원량(姜元亮)이 부지런히 감독하여 완성하였다. 이에 당 이름을 사교라 하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청하는 것이었다. 진주 고을은 지리산의 영기와 남해의 정기가 빚고 화합한 것으로서, 토지의 비옥함과 인물의 번화함이 딴 고을과 견줄 바가 아니다. 내 일찍이 들으니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이 이 향교에서 배워서 공업이 빛났고, 그 뒤에 인재가 더욱 성하였다 한다. 근래에 문경공(文敬公) 강보(姜寶)군과, 나의 선조 원정공(元正公) 휘(諱) 즙(楫), 어사대부 휘 윤원(允源) 및 정천군(菁川君) 하을지(河乙沚), 참찬 정을보(鄭乙輔)와, 조선 초기 이래로는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 문정공(文正公) 정이오(鄭以吾), 양정공(養正公) 하공복(河敬復)이, 모두 이 향교에서 공부한 뛰어난 분들로서 문과 무로서 모두 당시에 날렸다. 우리 고을의 지기의 신령함과 인물의 걸출한 아름다움은 세상에서 일컫는 바이다. 그러나 반드시 교양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지금 여러 학생에게는 평상시 강독하는 데에도 편리함이 있고, 봄 가을 좋은 철을 당하면 성균관에서 과시(課試)하는 방법과 같이하여, 주목(州牧)과 교관(敎官)이 여가 있는 날에 여기에 놀러와서, 혹 책을 펴서 강문(講問)하며, 혹 제목을 내어 시 짓게 하여,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읊조리며 돌아오던 운취와 비슷하며,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즐거움을 즐기며, 역복(棫樸)과 한록(旱麓)의 흥기함이 있다. 비록 그러나 사교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 어찌 이것만을 위한 것이리오. 학문하는 데에는 두 길이 있다. 실제를 힘쓰는 학문이 있고, 명예를 힘쓰는 학문이 있다. 실제를 힘쓰고 외면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爲己] 학문이고, 명예를 힘써서 이름을 따르는 습속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남을 위한[爲人] 학문이다.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모두 소학(小學)에 들어가서, 나아가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받기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먹는 음식과 행동과 언어에 학문 아님이 없다. 근본을 북돋우고 성정을 함양하여 차례를 따라 진보하며, 공부가 성취하기에 미쳐서는 덕성을 높이고 경학을 연마하면, 문장에 뜻을 두지 않아도 그 글이 의리의 근원에서 나오고, 정사에 뜻을 두지 않아도 정사하는 것이 도덕의 작용에서 발하게 된다. 이것은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하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공자의 4교(四敎)라는 것은, 사람을 가르치되, 글을 배우고 행실을 닦으며, 충신(忠信)을 마음에 간직하게 한 것이니, 이 중에 충신이 근본이다. 당(堂)을 이름한 뜻이 깊고 간절하다. 학문하는 길에 무엇이 이보다 더하랴. 여러 학생이 마땅히 마음에 지녀서 나날이 새롭게 할 바이다. 하물며 성조(聖朝)에서 문을 숭상하는 교화로서 하늘이 선비를 많이 내어 편안하게 되는 때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 강석덕(姜碩德)의 시에, “10년의 풍속과 교화가 민정에 흡족하니, 봉이 우는 높은 산이 정기를 모았네. 새로 전당(鱣堂 강당)을 여니 학문의 바다가 맑고, 항상 필진(筆陣)을 열어 시성(詩城)을 움직이게 한다. 가을이 깊으니 푸른 대는 바람을 머금어 맑고, 봄이 따뜻하니 청아(菁莪)가 비를 맞아 향기롭다. 성대한 교화로 오늘날에 길한 선비가 많으니,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경서를 궁구하네.” 하였다. ○ 이첨(李詹)이 성진(聖眞 공자의 화상)을 배알하는 시에, “공해(公廨)의 단청이 한 횃불에 없어졌으나, 완악한 도적들도 오히려 문방(文坊)을 보호할 줄 알았네. 10년 동안 교남(嶠南 영남) 풍진 속에, 홀로 의관 갖추고 소왕(素王 공자)을 배알한다.” 하였다.
【역원】 소촌역(召村驛) 주 동쪽 24리에 있으며 역승(驛丞)이 있다. 본도에 속한 역이 열 다섯이 있는데, 상령(常令)ㆍ평거(平居)ㆍ부다(富多)ㆍ지남(知南)ㆍ배둔(背屯)ㆍ송도(松道)ㆍ구허(丘虛)ㆍ관율(官栗)ㆍ문화(文和)ㆍ영창(永昌)ㆍ동계(東溪)ㆍ양포(良浦)ㆍ완사(浣沙)ㆍ오양(烏壤)ㆍ덕신(德新)이다. ○ 승(丞) 1명이다. ○ 정이오의 시에, “역에 나무 그늘 짙고 시냇물 흐르는데, 오랜 나그네 몸 고달파 잠깐 머문다. 말 발굽 남북으로 어느 때나 쉴까나. 강 위 인가에 죽루(竹樓)가 있네.” 하였다. 『신증』 금상(今上) 5년에 승을 없애고 찰방을 두었다.
영창역(永昌驛) 주 남쪽 52리에 있다. 문화역(文和驛) 주 남쪽 60리에 있다. 평거역(平居驛) 주 서쪽 10리에 있다. 정수역(正守驛) 주 서쪽 54리에 있다. 평사역(平沙驛) 주 서쪽 1백 19리에 있다. 소남역(召南驛) 소남진 서쪽에 있다. 안간역(安間驛) 주 북쪽 42리에 있다.
부다역(富多驛) 주 동쪽 59리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바람과 햇빛 맑고 고와서 가을 기운 높은데, 역정(驛程)의 단풍잎이 말 머리에 나부낀다. 전송하고 맞이하는 것은 오직 소나무인데, 길을 끼고 우뚝 서서 허리 굽히기를 부끄러워한다.” 하였다.
개경원(開慶院) 주 동쪽 2리에 있다. ○ 정이오의 기문에, “진주의 진산(鎭山)이 높직하게 구름 위에 솟았으며, 양 기슭이 길게 울퉁불퉁 옆으로 동서로 뻗었다가 다시 서로 감쌌다. 감싼 복판이 널찍하여 사방이 편평한데, 거기에 진주가 위치하였다. 두류산 동남쪽 산 골짜기 물이 모여서 강이 되어 남쪽으로 가로질렀다. 왼쪽으로 감싼 복판에 긴 두덕이 북에서 남으로 와서, 강에서 백 보 되는 곳에서 멈췄는데, 《군지(郡誌)》에서 이른바 옥봉(玉峯)이라 하는 것이다. 그 봉우리가 마치 나그네가 되어 절제를 받지 않는 것 같은 기상이 있으므로, 그곳에다가 원(院)을 짓고 개경(開慶)이라 하였는데, 이는 지기(地氣)를 누르려는 것이었다. 그 남쪽에 강물이 돌아 결(玦) 같고 띠 같으며, 멧부리들은 착잡하게 솟아서 병풍과 장자(障子) 같고, 석벽에 불상 같은 무늬의 그림이 있는데, 고을 사람이 불영암(佛影巖)이라 한다.
원이 처음에는 겹으로 된 누각이 층층으로 솟아나서, 맑은 물결과 푸른 석벽에 빛났던 것이나, 고려 말기에 왜구에게 진주가 함락되니 백성이 텅 비었고, 원에도 화가 미쳤다. 지금 경산 부사(京山府使) 하공(河公) 유종(有宗) 호보(浩甫)는 우리 고을의 효성스럽고 우애있는 군자이다. 일찍이 옛 제택 곁에다가 원 하나를 개설하고, 오가면서 올라다 보며 사정(思亭)의 뜻을 본받고, 또 혜택이 나그네에게도 미쳐서 유숙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였는데, 지금 장자원(長者院)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재목과 기와를 모으고 공역을 헤아려 날을 정하는데, 마침 목백(牧伯) 박공 자안(子安)이 부임하여 하공에게 청하기를, ‘개경원이 이 고을에 도움 됨이 가장 크다. 사신이 왕래할 때에 경유하는 곳이고, 수령을 맞이할 때에 휴식하는 곳이다. 또 요충 지대에 해당되므로 나그네들이 잇따라서, 어깨가 맞닿고 소매가 부닥치니, 어찌 다른 역관과 견줄 것이겠는가. 그러니 원을 수리하지 않음은 수령의 허물이다. 그러나 공사(公舍)를 수선하느라고 딴 곳은 돌볼 여가가 없으니, 청컨대 먼저 개경(開慶)에 착수하여, 우리 고을 백성의 힘을 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호보가 의롭게 여겨서 허락하고 재목과 기와를 실어 나르며, 옛 제도보다 줄여서 달을 넘겨 완성하였으니, 홍무(洪武) 갑자년이었다. 장엄하고 화려함은 비록 예보다 못하나, 아래위 당과 행랑이 질서 정연하며 산뜻하여 볼 만하였다. 5년 뒤 무진년에 다시 재목과 재력을 갖추어서 장자원을 완성하였으니, 이것은 하공의 본뜻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선양공(單襄公)이 초(楚) 나라에 사신 가면서 진(陳) 나라를 지나다가 그 나라 냇물과 못에 제방과 돌다리가 없어서 길이 막힌 것 같으며, 나그네가 묵을 곳이 없음을 보고, 마침내 그 나라가 반드시 망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대개 성곽ㆍ도로ㆍ여사(旅舍) 등은 모두 삼대(三代) 시대부터 정사를 하는 요체이며, 주관(周官)에는 더욱 여기에 삼가하였다. 인인(仁人)과 군자가 그것이 황폐한 것을 보고는 모두 차마 그대로 두지 못하는 바이다. 이번에 개경원을 중건한 것을 호보는 자신의 공으로 하지 아니하고 목백(牧伯)에게 돌리니, 또한 착한 것을 남과 함께 하는 마음이다. 우리 고을 산수의 아름다움과 산에 오르고 물가에 임하는 즐거움은, 내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허락된다면 마땅히 가서 눈으로 보고 마음에 얻게 될 것이니, 호보는 기다려 주오.” 하였다.
장박지원(長朴只院) 주 동쪽 49리에 있다. 축현원(杻峴院) 주 북쪽 30리에 있다. 분현현(盆峴縣) 주 동쪽 20리에 있다. 가수개원(可樹介院) 주 동쪽 59리에 있다. 섬진원(蟾津院) 섬진 언덕에 있다. 영창원(永昌院) 영창역 곁에 있다. 남제원(南濟院) 주 남쪽 4리에 있다. 어속원(於束院) 주 동쪽 62리에 있다. 추모원(楸母院) 주 서쪽 15리에 있다. 철소원(鐵所院) 주 북쪽 30리에 있다. 서정자원(西亭子院) 주 서쪽 5리에 있다. 소남원(召南院) 소남역 곁에 있다. 구라량원(仇羅梁院) 구라량에 있다. 신원(新院) 주 북쪽 40리에 있다. 차의원(車衣院) 주 북쪽 13리에 있으며 낙빈루(樂賓樓)가 있다. 응제원(應濟院) 주 서쪽 11리에 있다.
『신증』 【교량】 십수교(十水橋) 주 남쪽 28리에 있다. 사천(泗川) 경계이다.
【불우】 단속사(斷俗寺) 지리산 동쪽에 있다. 골 입구에 최치원(崔致遠)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다. 또 치원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는데, 뒤에는 중 대감(大鑑)의 영당으로 되었다. 또 신라 병부령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중 신행(神行)의 비명과, 고려 평장사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중 대감의 비명과, 한림학사 김은주(金殷舟)가 지은 진정대사(眞定大師)의 비문이 있다.
○ 강회백(姜淮伯)이 과거하기 전에 이 절에서 글을 읽으면서 매화 한 그루를 손수 심었다. 그 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므로, 그 매화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 하였다.
불일암(佛日庵) 서쪽으로 쌍계사(雙溪寺)와 10여 리 거리이다. 벼랑과 골짜기가 아주 가파라서 길을 낼 만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절벽 중간을 한 사람이 갈 수 있게 파서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가는 자로서 놀라 땀이 나며 머리 끝이 쭈뼛하지 않는 자가 없다. 암자는 벼랑에 달아 맨 듯한데, 밑이 수백 길이나 된다. 못이 두 곳인데 깊이를 알 수 없으며, 하나는 용추(龍湫), 하나는 학연(鶴淵)이라 한다.
천불암(千佛庵) 천왕봉 밑에 있다. 돌이 집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수십 명을 들일 만하다. 안양사(安養寺) 섬진에서 동쪽으로 고개 셋을 넘어 60리에 이 절이 있다. 오대사(五臺寺)와 함께 훌륭한 절이라 일컫는다. 묵계사(黙契寺) 안양사 앞 냇물을 따라서 북쪽으로 가면 계곡 사이가 매우 험하고 좁은데, 40여 리를 지나 물의 근원까지 이르면 지역이 조금 트이고 토지도 또한 비옥하며 평평하다. 절이 지리산에서 가장 훌륭한 곳에 있다.
영신사(靈神寺) 지리산에 있다. 절 뒤 봉우리에 깎은 듯한 돌이 섰고, 그 꼭대기에 작은 돌이 평상처럼 놓여 있는데 좌고대(坐高臺)라 부른다. 속담에, “능히 그 위에 올라가서 절을 네 번하는 자는 불성을 깨친다.” 한다.
응석사(凝石寺) 집현산(集賢寺)에 있다. 하연(河演)의 조부의 진영(眞影)이 있다. 청곡사(淸谷寺) 달엄산[月牙山] 서쪽에 있다. 법륜사(法輪寺) 달엄산 동쪽에 있다. 향적사(香積寺) 천왕봉 밑에 있는데, 성모묘(聖母廟)의 향화(香火)를 위해서 세운 것이다. 와룡사(臥龍寺) 와룡산에 있다. 고려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놀고 간 곳이다.
오대사(五臺寺) 살천현(薩川縣) 남쪽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다섯 봉우리가 벌여 서서 그 모양이 대 같은데, 절이 그 복판에 있으므로 절 이름으로 되었다. 또 수정사(水精寺)라 하기도 한다. 따오기알 만한 수정주(水精珠)가 있는데, 여의주(如意珠)라 부르며, 은으로 된 끈으로 얽어서 보배로 전해 온다. 절 중의 말에는, “구슬을 반 동이 물에다가 담그면 물이 곧 넘친다.” 한다.
○ 권적(權適)의 기문의 대략에, “절 주지 진억(津億)이 일찍이 동문승(同門僧) 혜약(慧約) 등과 더불어 탄식하기를, ‘출가한 자는 오직 한 가지 해탈만을 기약할 뿐인데, 진실로 이것을 빙자하여 높은 명예와 후한 이를 구한다면, 이것이 어찌 출가한 본심이리오.’ 하고, 이로부터 깊이 숨으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이름난 산에 정사(淨社)를 지어서 동림(東林) 서호(西湖)의 유풍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알맞은 곳이 없었는데, 지리산 오대라는 황폐한 절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지리산은 해동의 큰 진산(鎭山)으로서 높고 깊고 넓고 큰 것이 천하에 견줄 데가 없으며, 오대사는 또 그 산의 남쪽에 있다. 그 산이 일어났다 낮아졌다 한 것이 다섯 겹이어서, 은은하게 대를 쌓아 놓은 듯한 까닭에 그것을 절 이름으로 한 것이다. 천 봉우리가 고리처럼 호위했고, 백 골짜기가 모여들어 현성(賢聖)이 그 속에 숨어 살고 있는 듯하여, 보는 자는 눈이 부시고 마음이 취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일찍이 남쪽에 갔다가 이곳에 와서 배회하며 두루 돌아보고, ‘여기가 큰 법이 머물 곳이다.’ 하였다. 진억선사(津億禪師)는 이 얘기를 듣고 용기를 내어 가서는 그곳을 발견하였다. 인하여 머물 터를 닦아, 시주를 모집하고, 몸소 목공을 거느리고 도끼를 잡고 빨리 지었는데, 집이 86칸이다. 선사는 수정 하나를 얻어서 아미타불상에 걸어서, 신심을 표명하고, 인하여 수정사(水精社)라 이름하였다. 송 나라 선화(宣和) 5년 계묘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 기유(己酉) 10월에 마쳤다. 3일동안 낙성법회를 베풀고, 엄천사(嚴川寺)의 수좌 성선(性宣)을 청해서 경을 설하였다. 임금께서 동남해 안찰 부사 기거사인 지제고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향을 올리고, 이어 은 2백 냥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신심이 쏠리어 와서 속인이 폭주하였다.” 하였다.
우방사(牛房寺) 우산에 있다.
지거사(智居寺) 지리산에 있다.
○ 정몽주(鄭夢周)가 주지 각경(覺冏)에게 부친 시에, “남으로 놀아 어느 곳에 시냇소리 듣는고. 지리산이 높고 높아 만 길이나 푸르네. 봄 원(院)에 해 길고 일 없으니, 사미가 와서 묘법연화경 배우리.” 하였다.
화엄사(華嚴寺)ㆍ신흥사(神興寺) 모두 지리산에 있다.
쌍계사(雙溪寺) 지리산에 있다. ○ 세상에 전하기로는, 최치원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뜰에 늙은 괴목(槐木)이 있는데, 거의 백 아름이나 된다.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냇물을 가로질러 서리서리 얽히어 다리 같으므로 절 중이 인해서 다리로 만들었다. 치원이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고을 입구에 돌 두 개가 마주 있어 문 같은데, 동쪽 돌에는 쌍계, 서쪽 돌에는 석문(石門)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또 옛 비가 있는데 비문은 치원이 지은 것이다. ○ 최치원이 이 절에 있으면서 호원상인(顥源上人)에게 부친 시에, “종일토록 머리 숙이고 붓끝을 희롱하니, 사람마다 입 다물어 맘속 말하기 어려워라. 진세를 멀리 떠난 건 비록 즐거우나, 풍정(風情)이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할꼬. 개인 놀 단풍 길에 그림자를 다투고, 비 오는 밤 흰 구름 여울에 소리 연했다. 읊조리는 마음 경치를 대해 얽매임 없으니, 사해의 깊은 기틀 도안(道安)을 생각노라.” 하였다.
영대사(靈臺寺) 지리산에 있다. ○ 정추(鄭樞)의 시에, “이끼 낀 길 지팡이 짚고 굽이굽이 내를 따라 가니, 대숲이 잠겼는데 시냇물 시끄러워 길이 더욱 아득하다. 지는 해 창자 끊어지는 곳, 구름에 연한 높은 나무에 소쩍새 운다.” 하였다.
용암사(龍巖寺) 반성현(班城縣) 영봉산(靈鳳山) 속에 있다. 고려 중 무외(無畏)가 거처하던 곳이다.
○ 고려 박전지(朴全之)의 기문에, “옛날에 도선(道詵)이 말하기를, ‘만약 세 암사(巖寺)를 창립하면 삼한이 통일되어 전쟁은 저절로 그치게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선암(仙巖)ㆍ운암(雲巖)과 이 절을 창건하였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 주 남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성모사(聖母祠) 지리산 천왕봉 꼭대기에 있다. 성모상(聖母像)이 있는데, 이마에 칼 흔적이 있다. 속설에는, “왜구가 우리 태조에게 격파 당해서 궁하게 되자, 천왕이 도우지 않은 탓이라 하며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로 찍고 갔다.” 한다.
강민첨 사(姜民瞻祠) 주 관청 안에 있다. 천희(天禧) 2년에 민첨이 거란 군사와 싸워서 공이 있었으므로, 본주(本州)를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그리하여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사지낸다.
『신증』 【총묘】 하륜(河崙)묘 주 북쪽 오이방(梧耳方)에 있다.
【고적】 흥선폐현(興善廢縣) 곧 흥선도이다. 본래 고려 유질부곡(有疾部曲)인데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본 주에 와서 속하였고, 충선왕(忠宣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왜구 때문에 인물이 모두 없어졌다. 지금은 직촌(直村)이다.
○ 원종 10년에 일본이 우리 변경을 침략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여기에 간직하였던 국사(國史)를 진도(珍島)에 옮겼다.
굴촌폐현(屈村廢縣) 주 서쪽 50리에 있다. 신라 때에 본주에 예속되었다. 가차례부곡(加次禮部曲)ㆍ어아부곡(於牙部曲) 모두 주 남쪽 10리에 있다. 침곡부곡(針谷部曲) 주 서쪽 15리에 있다. 율곡부곡(栗谷部曲) 주 서쪽 30리에 있다. 부곡부곡(釜谷部曲) 주 북쪽 5리에 있다. 인담부곡(鱗潭部曲) 영선현에 있으며 주와 30리 거리이다. 송자부곡(松慈部曲) 영선현에 있다. 월아부곡(月牙部曲) 주 동쪽 15리에 있다.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선천(鐥川)이라는 명칭도 있으며, 주 서쪽 40리에 있다. 송곡향(松谷鄕) 주 남쪽 30리에 있다. 복산향(福山鄕) 영선현에 있다. 벌대소(伐大所) 주 서쪽 40리에 있다. 수곡소(水曲所) 주 서쪽 30리에 있다. 화곡소(火谷所)ㆍ대곡소(大谷所) 모두 주 동쪽 30리에 있다. 수대곡소(水大谷所) 주 남쪽 40리에 있다. 갈곡소(葛谷所) 주 동쪽 20리에 있다.
시중백(侍中柏) 정이오의 시중백 시의 서문에, “시중백이란 것은 개국공신 좌시중(開國功臣左侍中) 배극렴(裵克廉)이 심은 것이다. 지정(至正) 계묘년에 공이 진주에 목사로 와서 일으키고 세운 것이 많았다. 고을에 온 다음 해에 산중에서 어린 잣나무를 옮겨다가 관아 북헌(北軒)에다가 심었다. 그가 임기가 차서 갈려 간 뒤에 진주 백성은 공의 덕을 사모하여 그 나무를 사랑하는 것이 소공(召公)의 감당(甘棠)과 같았다. 대개 잣나무는 절개가 있어 사시를 통하고 천년을 지나도록 지엽이 변하지 않으니, 보통 초목과는 아주 다르다. 누구가 사랑하지 않으랴.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하셨는데, 이는 그 절개를 사랑한 것이다. 공의 사랑하는 바가 성인의 뜻과 같으니, 그의 공이 개국의 으뜸으로 벼슬이 총재(冢宰)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음이 마땅하다. 지금 공이 간 지 48년이다. 조그마하던 잣나무가 푸르름이 하늘을 떨치고 뇌우(雷雨)를 밀칠 만큼 되었으니, 그 천연 그대로의 본성을 온전히 한 것이요, 공의 당시 정사 또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절공 이후로 이 고을을 다스린 자가 또 몇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영목사 최공이(崔公迤)가 처음으로 이것을 읊조렸으니, 정절공에게 가만히 합함이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덥고 싸늘함을 반백 년 겪었으니, 세한(歲寒)의 재목이 제세(濟世)의 현인과 합치되네. 손수 영재(鈴齋) 가에 심은 뜻 알고자 할진대, 맑은 바람을 남겨 후세에 전하세.’ 하였다.” 한다.
암석이서(巖石異書) 우리 태조(太祖)가 잠저에 있을 때에, 중이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지리산 바윗돌 사이에서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 글에는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삼한(三韓)을 바로잡는다.’는 글귀가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아 들이려 한즉, 벌써 가버려서 찾지 못하였다.
남지이조(南池異鳥) 신라 헌덕왕(憲德王) 13년에 헌창(憲昌)이 청주 도독(菁州都督)으로서 웅천(熊川)의 진장(鎭將)으로 옮겨 가서 배반하였다. 이보다 먼저 청주 태수의 청사(廳事) 남쪽 못 가운데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몸 길이는 5척이나 되며 빛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쯤 되는 아이 같았다. 주둥이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이고, 눈은 사람 같으며, 목구멍은 다섯 되들이 그릇만 하였는데 3일 만에 죽었다. 당시 사람이, “헌창이 패망할 조짐이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구라량폐영(仇羅梁廢營) 각산(角山)에 있다. 예전에는 수군만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고성현(固城縣) 사량(蛇梁)으로 옮겼다. 송대산성(松臺山城) 토축(土築)으로 둘레가 4천 73척이었는데 지금은 무너졌다. 성산성(城山城) 하나는 주 동쪽 44리에 있는데 토축이며, 둘레는 2천 8백 14척이고, 하나는 주 서쪽 48리에 있는데 석축이며, 둘레는 9백 77척인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신증』 명진부곡(溟珍部曲) 영선(永善) 동쪽 15리에 있다. 고려 말기에 거제현(巨濟縣) 명진포(溟珍浦) 사람들이 여기에 우거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그들이 본토에 돌아갔으나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진성부곡(晉城部曲) 주 동서쪽 15리에 있으며 산 꼭대기에 성터가 있다.
【명환】 신라 향영(向榮) 헌덕왕 때에 청주 도독이었는데, 헌창이 자기에게 붙으라고 협박하였으나, 향영은 몸을 빼어 달아나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지 않았다. 김흔(金昕) 헌덕왕 때에 강주 도독(康州都督)이 되었다. 복세(福世) 신문왕(神文王) 5년에 청주 총관이 되었다. 김암(金巖) 강주 태수였다. 왕봉규(王逢規) 경애왕 때에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였다. 당(唐) 나라 명종(明宗)이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고려 왕해(王諧) 부사로 있었는데,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감복하였다. 동도 유수로 옮기게 되자 진주 백성은 눈물을 흘리며 유임되기를 원하고, 드디어 간절하게 조정에 청하기를, “우리 왕 사또를 1년 동안만 빌려 주소서.” 하여, 다시 재임되었다. 사람됨이 굳세고 정직하며 청백하여, 모든 계획한 바가 백성을 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김준(金晙) 사록(司錄)으로 왔다가 청백하므로 여러 번 벼슬이 옮겨져서 좌습유 지제고가 되었다. 임민비(林民庇) 의종조(毅宗朝)에 원이 되었다. 채정(蔡靖) 신종조(神宗朝)에 목사였다. 이행검(李行儉) 고종조(高宗朝)에 사록이었다. 전광재(全光宰) 고종조에 부사였다. 안진(安震) 통판이었다. 이우(李瑀) 재간이 있으므로 나와서 목사가 되었는데 유애(遺愛)가 있었다. 배극렴(裵克廉) 목사였다. 설장수(偰長壽).
본조 최이(崔迤) 영목사로 있었다. 안노생(安魯生)ㆍ조세안(趙世安)ㆍ임인산(林仁山)ㆍ정사(鄭賜)ㆍ안지귀(安知歸)ㆍ이영견(李永肩) 모두 목사였다.
『신증』 손소(孫昭) 목사였으며, 옥사를 잘 처결하고 정사가 너그러워서 백성이 애모하였다. 이우(李堣) 목사였다. 청렴하고 간결함으로 다스렸다.
【인물】 고려 하공진(河拱辰) 현종이 거란군(契丹軍)을 피해서 남쪽으로 간 다음, 공진이 표문을 받들고 거란 진영에 가서 군사를 돌리도록 청하였다. 거란 임금이 허락하고 드디어 공진을 억류하였다. 억류되어서는 내심으로 환국하려고 꾀하면서 겉으로 충성을 표시하니, 거란 임금이 매우 총애하였다. 공진이 좋은 말을 많이 사서 동쪽으로 나오는 길에다 두고서 돌아올 계책을 꾸몄다. 사람이 그의 계책을 고발하여 거란 임금이 공진을 국문하니, 공진이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신이 본국에 대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갖지 못하옵는바, 살아서 대국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거란 임금이 의롭게 여겨서 용서하고, 절개를 고쳐 자기에게 충성하라 하였으나, 공진의 언사가 더욱 공손하지 않으니, 마침내 죽였다.
강민첨(姜民瞻) 목종조(穆宗朝)에 과거에 올랐다. 현종(顯宗) 때에는 대장군으로서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이 되어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응양 상장군 주국(鷹揚上將軍柱國)으로 발탁되었다가,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로 전임되었고, 추성치리 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의 호를 받았고, 병부상서로 죽으니,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추증되었다.
강창서(姜彰瑞) 어려서 본주 향교 소속의 생도로서 학업에 힘써서 글을 잘 지으니, 강 남쪽 학자로서는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희왕(熙王) 8년 봄에 성시(省試)에 가려는데, 아버지 사호(司戶)가 마침 죄에 걸려 옥에 갇혔다. 고을에 나아가서 방면하기를 청했으나 관원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네가 만약 장원 급제하면 방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옥사를 연기하고 기다렸더니, 과연 장원이 되었다. 금의환향하니, 목백이 막료와 주 아전들을 거느리고 성 밖에 나와서 맞이하고, 그의 집에 가서 크게 잔치를 베풀고 부모에게 술을 권해서 경축하니, 온 경내가 영화롭게 여겼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강인문(姜引文) 박사 계용(啓庸)의 아들이다. 부자가 모두 유학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계용이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간 일이 있었는데, 원(元) 나라 조정에서 일본을 정벌하면서 계용이 길을 안다는 것으로 또 서장관으로 천거되었다. 풍파가 험난하였고 또 교전하던 때이므로 여러 번이나 죽을 뻔하였다. 돌아와서는 다시 벼슬하지 아니하고 자손에게도 선비노릇은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까닭에 아들 감찰어사 사첨(師瞻)과 손자 문하시중 창귀(昌貴)가 모두 아전으로서 벼슬길에 나아갔다. 증손 성민(性敏)이 학문을 좋아하여, 다시 선비로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재보(宰輔)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하을지(河乙沚) 충혜왕조(忠惠王朝)에 장원 급제하였고, 벼슬이 계림원수(鷄林元師)에 이르렀다. 하즙(河楫)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러서 진천군(晉川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시호는 원정(元正)이다. 하윤원(河允源) 즙의 아들이다. 충혜왕 말년에 과거에 올랐다. 공민왕조에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서 여러 장수를 따라 경성을 회복하여서 2등 공신이 되었다. 신돈(辛旽)이 정사를 마음대로 할 적에 홀로 아첨하지 않았다. 신우(辛禑) 초년에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그른 줄 알면서 그릇 판결하면 황천이 벌을 내린다.[知非誤斷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목판에 써서 헌대(憲臺) 위에 걸어 놓고 일을 보았다. 상주가 되어 시묘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불렀으나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정을보(鄭乙輔) 상서 공부시랑으로 증직되고, 정천군(菁川君)으로 봉함을 받았으며 글을 잘 지었다. 강기(姜蓍) 나이 19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판도판서 문하찬성사를 지냈고,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의 호를 받았고,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함을 받았으며, 시호는 공목(恭穆)이다. 강회백(姜淮伯) 강기의 아들이다. 신우 초년에 과거에 올라 밀직제학을 지냈고, 본조에 들어와서 동북면 도순문사가 되었다. 《통정집(通亭集)》이 있어서 세상에 전한다.
본조 하륜(河崙) 고려 말기 과거에 올라 조정과 외방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경세제민의 재질이 있었다. 우리 태종(太宗)을 도와서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이 되어,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하연(河演) 윤원(允源)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하경복(河敬復)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하한(河漢) 경복의 아들인데, 또한 무용(武勇)으로써 일컬었다. 벼슬이 중추에 이르렀고, 시호는 강장(剛莊)이다.
정이오(鄭以吾)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도총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시를 잘하여 《교은집(郊隱集)》이 있다. 정척(鄭陟) 향공(鄕貢)으로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원사 수문전 대제학(知中樞院事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대(恭戴)이다. 성품이 부지런하고 공손하며 청렴개결로 스스로 지켰으며, 조정의 의례에 건의한 바가 많았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말하기를, “세종(世宗)께서 ‘청직(淸直)’ 두 자로써 경을 칭찬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았다.” 하고, 의복과 말을 하사하였다.
강석덕(姜碩德) 회백의 아들이다. 벼슬이 지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대민(戴愍)이다. 《완역재집(玩易齋集)》이 있다. 강희안(姜希顔) 석덕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인순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다. 글을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고, 전서ㆍ예서ㆍ해서ㆍ초서 글씨가 그림과 함께 묘하였다. 강맹경(姜孟卿) 회백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랐으며, 지낸 벼슬은 모두 청요한 관직이었다. 세조조에 좌익(佐翼) 공신으로써 진산 부원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강희맹(姜希孟) 희안의 아우이다. 정묘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으로써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시와 문이 정묘하였고,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이 있다.
하숙산(河叔山) 세조조(世祖朝) 친시에 장원하였다. 벼슬이 낙안 군수(樂安郡守)에 이르렀으며, 뒤에 병으로 인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강자평(姜子平) 정축년 과거에 장원하였다. 두 번이나 승지가 되었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아우 자순(子順)은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어 반성위(班城尉)가 되었다.
『신증』 정성근(鄭誠謹) 정척의 아들이며, 사람됨이 충효 정직하였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고, 일찍이 성종(成宗)을 위해 3년 동안을 심상(心喪)하였다. 연산조(燕山朝)에 죽음을 당했다. 아들 주신(舟臣)도 과거에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하숙부(河叔溥) 경복의 손자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청렴하고 간결함으로써 일컬었고,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강귀손(姜龜孫) 희맹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유순정(柳順汀) 문무(文武)의 재질이 있었다. 정미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조정과 지방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말기에 성희안(成希顔)ㆍ박원종(朴元宗) 등과 함께 계책을 결단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강혼(姜渾) 일찍 과거에 올랐고, 문장을 잘하였다. 연산조에 승지가 되었다가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진천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강형(姜詗) 자평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가 연산조 갑자년에 죽음을 당했고, 금상(今上) 초년에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신증』 【우거】 본조 조숙기(曺淑沂) 과거에 올라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효자】 신라 성각(聖覺) 스스로 거사(居士)라 호하고, 일리현(一利縣) 법정사(法定寺)에 의탁하였다. 뒤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늙어서 병이 들자 다리 살을 베어 먹였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장사를 지성껏 지냈다. 혜공왕(惠恭王)이 벼 3백 섬을 하사하였다.
고려 정유(鄭愈)ㆍ정손(鄭愻) 모두 지선주사(知善州事) 임덕(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에 아버지를 따라서 하동군(河東郡)에 수자리 사는데, 왜적이 밤에 갑자기 닥쳐 군사들이 다 도망치는데, 임덕은 병들어서 말을 타지 못하였다. 형제가 부축하여 달아나는데 왜적이 뒤쫓아 왔다. 정유가 말을 타고서 두어 놈을 쏘아 죽이니, 왜적이 감히 달려 들지 못하였다. 그 중 한 놈이 칼을 뽑아 들고 돌진하여서 임덕의 뺨을 찌르므로 정손(愻)이 제 몸으로 가로 막으면서 또 네 놈을 베어 죽여, 임덕은 화를 면하였으나 정손은 마침내 적에게 죽었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유에게 종부승(宗簿丞)을 제수하였다.
강안명(姜安命)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부모가 매양 이웃 늙은이와 술을 마시고 즐거워하였으므로 안명은 아내와 함께 힘껏 준비하고 어려운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버이가 죽자 예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죽은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하였다. 홍무(洪武) 경오년에 정문을 세웠다.
하현부(河玄夫) 벼슬은 사직(司直)이다. 90세 된 어머니가 병이 들자, 똥을 맛보고 종기를 빨았다. 전후에 부모상을 6년 동안 입었다.
여효제(余孝悌)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힘껏 섬겼고, 어머니가 죽은 뒤에 3년 동안을 시묘하였다. 하루는 까마귀가 향안(香案) 위에 있던 사배(砂杯)를 물고 가버렸다. 효제는, “까마귀는 비록 미물이나 반포(反哺)하는 덕이 있는데, 나의 효성이 까마귀와 같지 못하므로 이것을 물고 가게 된 것이다.” 하면서, 깊이 탄식하였다. 꿈에 한 늙은이가, “슬퍼하지 말라. 3일이면 잔을 반드시 찾을 것이다.” 하였다. 기일이 되자 까마귀가 다시 물어다가 향안 위에다 두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자는 모두, “지성스러운 효도가 미물을 감동시킨 것이다.” 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본조 모순(牟恂) 세종조에 과거에 올라 좌사간대부를 지냈다. 일찍이 어머니의 종기를 빨아서 낫게 하였고, 뒤에 또 어머니가 병들자 똥을 맛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군만(君萬) 광대이다. 그 아버지가 밤에 범에게 물려갔다. 군만은 하늘에 통곡하면서 아침 되기를 기다려서 활과 살을 가지고 산에 들어갔다. 범이 다 먹고 양지 바른 곳에 있다가 군만을 보자 울부짖으면서 앞에 와서 먹었던 사지(四肢)를 토하였다. 군만은 살 한 개로 쏘아 죽이고, 칼을 뽑아 범의 배를 갈라서 남은 뼈를 다 거두어서 화장하였다. 득비(得妃) 그 아버지 김계남(金繼南)이 간질을 얻어 4년 동안을 낫지 않았다. 득비는 산 사람 고기를 먹이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제 왼쪽손 넷째 손가락을 잘라서 먹였더니, 그 병이 드디어 나았다. 성화(成火) 8년에 정문을 세웠다.
『신증』 김백산(金白山) 16세 때에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가므로 백산이 낫을 휘두르면서 범을 쳐서 아버지는 죽음을 면하였다. 성종(成宗) 9년에 정문을 세웠다. 박인(朴氤) 아버지가 죽었는데, 마침 연산군 때여서 상복의 기간을 짧게 하는 법이 엄하였다. 그러나 인은 최복(衰服)으로서 시묘살이 3년을 마쳤다. 금상(今上) 4년에 정문을 세웠다. 강응태(姜應台)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렸으므로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먹게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 금상 11년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 고려 최씨(崔氏) 영암(靈巖) 사인(士人) 인우(仁祐)의 딸인데, 본주 호장(戶長) 정만(鄭滿)에게 시집왔다. 홍무(洪武) 기미년에 왜적이 진주에 침입하여 온 경내가 달아나 숨었다. 이때에 정만은 일이 있어 서울에 갔는데, 왜적이 마을에 마구 쳐들어왔다. 최씨는 30여 세로 자색이 있었다. 네 아들을 안고 산중에 숨었더니, 왜적이 사방으로 나와서 노략질하다가 최씨를 만나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였다. 최씨는 나무를 안고 항거하며 소리질러 꾸짖기를, “나는 죽을 뿐이다. 도적에게 더럽힘을 받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의롭게 죽겠다.” 하며, 꾸짖기를 말지 않으니, 왜적이 마침내 해쳐서 나무 밑에서 죽었다. 왜적이 두 아들을 포로로 잡아 갔고, 셋째 아들 습(習)은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 시체 곁에서 울부짖고, 젖먹이 아이는 기어가서 젖을 빨아 피가 흥건하게 입으로 들어갔는데 잇따라 죽었다. 10년 뒤 기사년에 도관찰사 장하(張夏)가 조정에 알려서 정문을 세우고, 정습에게는 이역(吏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신증』 본조 정씨(鄭氏) 조지서(趙之瑞)의 아내이다. 연산군 을축년에 지서는 죽음을 당하고, 재산은 몰수되고 집에는 못을 팠다. 정씨는 그 곁에다가 초막을 얽고, 지서의 입던 옷을 설치하고, 제전(祭奠)을 드리면서 3년을 마쳤다. 금상 2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유맹상피진(遺氓尙避秦) 이색(李穡)이 융막(戎幕)에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에, “두류산(頭流山)이 좋다는 말 들었다. 정천(菁川)이 막부 이웃이라지. 다만 공무가 적어지게 되면, 자주 나가서 유람함이 무슨 방해되랴. 괴상한 얘기는 진(晉) 나라 적 일을 듣는 것 같으려니, 남은 백성이 오히려 진 나라를 피하였으리. 그대는 능히 그들의 종적을 알겠는가, 사해는 아직도 한창 풍진이로다.” 하였다.
명성천하희(名城天下稀) 이색의 시에, “기실(記室)은 망년의 벗이요, 이름난 성으로 천하에 드물다. 강루(江樓)엔 서늘함이 좌석에 가득하고, 대숲 속 집에는 푸른 빛이 옷을 적시네. 홍시에 서리가 처음으로 무겁고, 뱅어는 가을이라 한창 살쪘겠네. 맑은 늪이라 응당 아직 끝남이 없으리니, 남쪽으로 바라보며 돌아가는 사람 전송한다.” 하였다. 영대사원운매곡(靈臺寺遠雲埋谷) 이색의 시에, “영대사 머니, 구름이 골을 묻었고, 촉석루 높으니, 나무가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수점청산침벽호(數點靑山枕碧湖) 정여령(鄭與齡)의 시에, “두어 점 푸른 산이 푸른 호수 베개했는데, 공(公)은 이것이 진양도(晉陽圖)라 말하네. 물가에 초옥이 그 얼마인가. 그 중에 내 집 있는데 기울었는지 않았는지.” 하였다.
시원우과금단취(柹園雨過今丹脆) 최해(崔瀣)의 시에, “감나무 동산에 비 지나니 금단이 물러졌고, 밤나무 언덕에 서리 내리니 옥 껍질이 얼룩졌다.” 하였다. 진양가려증경처(晉陽佳麗曾經處)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아름다운 진양은 일찍이 지난 곳, 노래하며 피리불던 누대를 꿈속에 자주 드네. 묻노라, 지금엔 지주(地主)가 없다 하는데, 강에 가득한 가을달을 누구에게 맡겼는가.” 하였다. 문무영재생락토(文武英材生樂土) 하연의 시에, “문무의 영재는 낙토에서 나고, 산천 맑은 기운은 이름난 성에 자욱하다.” 하였다. 장천평초풍연호(長川平楚風煙好) 정이오의 시에, “긴 냇물 질펀한 풀밭에 풍연이 좋고, 호탕한 피리와 애절한 거문고 소리에, 세월이 더디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치고, 관찰영(觀察營)을 두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보】 적량진(赤梁鎭) 흥선도(興善島) 가운데에 있는데, 거리는 주에서 1백 10리, 서쪽 남해로 30리이며, 성의 둘레는 1천 2백 82척이며, 옛날 만호가 있었다. 숙종 14년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 수군동첨절제사 겸 좌조창영운차사(水軍同僉節制使兼左漕倉領運差使)가 있었다.
혁폐 삼천포보(三千浦堡) 남쪽으로 74리, 말문면성(末文面城)이다. 둘레가 2천 50척이며, 권관(權管)을 두었다가 뒤에 사천으로 옮겼고 또 고성(固城)으로 옮겼다. 우수영(右水營) 서남쪽의 남해 가에 옮겼다. 옛날에 만호가 있었고, 뒤에 고성의 사량(蛇梁)에 옮겼다. 각산수(角山戍).
【영아】 우병영(右兵營) 본조 태종 때 창원(昌原)에 설치하여 선조 36년에 촉석산성(矗石山城)에 옮겼는데, 앞은 장강(長江)에 임하였으며, 명승지로 삼았다. 속영(屬營) 진주 우영(右營)ㆍ상주 좌영ㆍ김해 별중영(別中營)이다.
○ 우영 인조 때 설치하였다.
○ 우영장 겸 토포사 1명이다.
○ 속읍은 진주ㆍ거창ㆍ하동ㆍ함양ㆍ곤양(昆陽)ㆍ합천(陜川)ㆍ초계(草溪)ㆍ남해ㆍ사천ㆍ단성(丹城)ㆍ산청(山淸)ㆍ안의(安義)ㆍ의령(宜寧)ㆍ삼가(三嘉)이다.
【관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ㆍ중군(中軍) 곧 병마우후(兵馬虞侯)이다. 심약(審藥)이 각 1인.
【토산】 대나무[竹]ㆍ석이버섯[石蕈]ㆍ오미자ㆍ웅담ㆍ녹용ㆍ백토(白土)ㆍ김ㆍ문어.
【성지】 송대산성(松臺山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73척이다. 영선고현성(永善古縣城) 동쪽으로 44리이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8백 14척이다. 굴촌고현성(屈村古縣城) 서쪽으로 48리이며, 둘레가 9백 77척이다. 진성부곡성(晉城部曲城) 동쪽으로 45리이며, 산위에 옛 터가 있다. 월아산목책(月牙山木柵) 동쪽으로 15리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설치하였는데, 옛 터가 있다. 척산성(尺山城)ㆍ당산성(堂山城)ㆍ신령산성(神靈山城) 이상 세 곳은 왜인이 쌓은 것이다.
【방면】 주내(州內) 군 안에 있다. 조곡(槽谷) 동쪽으로 처음이 2리, 끝이 25리이다. 금산(金山)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대여(大如)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갈곡(葛谷) 위와 같은데 본래 갈곡의 소재지이다. 가주(加住) 위와 같다. 가수개(加樹介)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가좌촌(加佐村)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상사(上寺)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반성(班城) 위와 같다. 오동(於東)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용봉(龍鳳) 위와 같다. 양전(良田) 위와 같다. 영이(永爾) 동남쪽으로 끝이 70리이다. 내진(內晉) 동남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외진(外晉) 위와 같다. 말문(末文) 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90리이다.
창선도(昌善島) 곧 흥선도(興善島), 남쪽으로 처음이 1백리, 끝이 1백 20리이다. 적량(赤梁) 흥선도 가운데 있는데, 처음이 1백 10리, 끝이 1백 30리이다. 영이곡(永耳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오읍곡(五邑谷) 위와 같다. 영현(永縣)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성을산(省乙山)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금동오(金洞於)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송곡(松谷) 위와 같다. 소촌(召村)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이곡(耳谷) 위와 같다. 지곡(枝谷)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정촌(鼎村)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섭천(涉川)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나동(奈洞)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가차(加次) 본래 가차례(加次禮) 부곡인데, 서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평거(平居)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4리이다. 신풍(新豐)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부화곡(夫火谷) 위와 같다. 동곡(桐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45리이다. 모태곡(毛台谷)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사죽(沙竹)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동물곡(冬勿谷)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성태(省台)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50리이다. 집현(集賢)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명석(鳴石) 북쪽으로 40리이다. 대곡(大谷) 본래 대곡의 소재지였는데,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설매곡(雪梅谷)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비라(非羅)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침곡(針谷) 본래 침곡 부곡이었는데,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40리이다. 원당(元堂) 위와 같다. 이하(籬下)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수곡(水谷) 위와 같다. 단속(斷俗) 서쪽으로 처음이 55리, 끝이 60리이다. 서남(西南) 서쪽으로 35리이다. 정수(正守)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45리이다. 북평(北坪) 위와 같다. 운곡(雲谷)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55리이다. 종화(宗花)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대야(大也) 위와 같다. 본래 대야천(大也川)의 부곡이었는데, 일명 선천(鐥川)이라고도 한다. 청암(靑巖)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1백 30리이다. 가서(加西)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살천(薩川)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1백 20리인데, 일명 시천(矢川)이라고도 한다. 삼장(三壯) 위와 같다. 백곡(柏谷)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금만(金萬) 서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사월(沙月)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진성(晉城)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파지(巴只)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오산(吾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대평(大坪)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 오아(於牙) 부곡은 남쪽으로 10리, 율곡(栗谷) 부곡은 서쪽으로 30리, 부곡(釜谷) 부곡은 북쪽으로 5리, 인담(鱗潭) 부곡은 영선(永善)에 있는데, 주에서 30리 거리이다. 송자(松慈) 부곡은 영선에 있으며, 월아(月牙) 부곡은 동쪽으로 15리이다. 명진(溟珍) 부곡은 영선에 있으며 동쪽으로 15리인데, 고려 말에 거제(巨濟) 명진포(溟珍浦) 사람이 여기에 와서 붙어 살다가 본군에 와서 거제로 돌아갔다. 진성(晉城) 부곡은 동쪽으로 45리, 지금의 진성면(晉城面)이며, 송곡향(松谷鄕)은 남쪽으로 30리인데, 지금의 송곡면이다. 복산향(福山鄕)은 영선에 있고, 벌대(伐大)의 소재지는 서쪽으로 40리이며, 수곡(水曲)의 소재지는 서쪽으로 30리인데 지금의 수곡면이다. 화곡(火谷)의 소재지는 동쪽으로 30리이며, 수대곡(水大谷)의 소재지는 남쪽으로 40리이다.
○ 대야천(大也川) 부곡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7년에 남해의 왜인들이 토지를 잃고 임시로 붙어 살던 곳이다.
【진도】 남강진(南江津)ㆍ황류진(黃柳津) 주의 동쪽이다. 운당진(雲堂津) 동쪽으로 10리, 남강진 하류이다. 정천진(菁川津) 서쪽으로 3리, 남강 상류이다. 소남진(召南津) 서쪽으로 29리 단성(丹城) 신안진(新安津) 하류이다. 구라량진(仇羅梁津) 흥선도에 들어가는 자는 이 곳을 경유한다.
【교량】 십수교(十水橋) 남쪽으로 28리, 사천(泗川) 경계이다.
【창고】 읍창ㆍ군향창(軍餉倉)ㆍ제민창(濟民倉) 모두 읍내이다. 가산창(駕山倉) 우조창(右漕倉)이라고 하는데, 남쪽으로 40리 바닷가에 있다. 영조 경진년에 관찰사 조엄(趙曮)이 조정에 아뢰어 설치하여, 진주ㆍ곤양(昆陽)ㆍ하동ㆍ단성ㆍ남해ㆍ사천 및 고성 서북면, 의령 서남면의 전세(田稅)ㆍ대동(大同)을 거두어 수로로 서울에 이르렀다.
○ 진주목사 감봉 적량첨사(晉州牧使監捧赤梁僉使)가 거두어 바쳤다. 별향창(別餉倉)ㆍ통창(統倉) 모두 말문면에 있다. 장암창(場巖倉) 가차례면에 있다. 영현창(永縣倉) 영선 고현에 있다. 반성창(班成倉) 반성 고현에 있다. 북창(北倉) 사상면(寺上面)에 있다. 강창 대산여면(代山如面)에 있다. 서창(西倉) 수곡면(水谷面)에 있다. 별회창(別會倉)ㆍ보군창(補軍倉)ㆍ양무창(養武倉)ㆍ조음포창(助音浦倉)ㆍ유황고(硫黃庫)ㆍ영고(營庫).
【목장】 진주장
흥선도 가운데 있다.
○ 감목관(監牧官) 1명 있다.【사원】 덕천서원(德川書院)
선조 병자년에 세우고 광해주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조식(曺植)
자는 건중(建中), 호는 남명(南溟)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전첨 증 영의정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최영경(崔永慶)
자는 효원,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벼슬은 지평 증 대사헌이다. ○ 신당서원(新唐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우고,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조지서(趙之瑞)
자는 백부(伯符), 호는 지족당(知足堂)이며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연산주 갑자년에 화를 입었으며 벼슬은 응교 증 도승지이다. ○ 은열사(殷烈祠)
고려 현종 신유년에 세우고, 광해주 때 사액하였다. 강민첨(姜民瞻)
본관은 진주인데, 벼슬은 병부상서 증 태자태보 상주국이며, 시호는 은열(殷烈)이다. ○ 창렬사(彰烈祠)
선조조에 세우고 뒤에 사액하였다. 김천일(金千鎰)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이며 본관은 언양이다. 벼슬은 판결사 창의사 증 영의정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황진(黃進)
자는 명보(明甫)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벼슬은 충청 병사 증 좌찬성이며,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최경회(崔慶會)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이며 본관은 해주이다. 벼슬은 경상우병사 증 좌찬성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장윤(張潤)
자는 명보(明甫)이며, 본관은 목천(木川)이다. 벼슬은 진주 목사 증 병조판서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이의정(李義精)
벼슬은 현감이다. 이상 5현(賢)은 선조 계사년 6월에 본주에서 전사하였다. ○ 충민사(忠愍祠)
효종 임진년에 세우고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김시민(金時敏)
자는 면오(勉吾)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벼슬은 우병사 증 영의정 상락부원군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양산도(梁山濤)
자는 회원(會元)이며, 벼슬은 공조 좌랑 증 좌부승지이다. 김상건(金象乾)
김천일의 법관인데 벼슬은 사포별좌 증 좌부승지이다. 이준민(李俊民)
벼슬은 거제 현령 증 병조 판서이다. 강희열(姜熙說)
의병장이다. 조경향(曺慶享)
벼슬은 진해 현감이다. 최기필(崔琦弼)
벼슬은 판관 증 호조 참의이다. 유사(兪

)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의병장인데, 주부에 추증되었다. 이욱(李郁)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생원인데,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강희복(姜熙復)
의병장이다. 장윤형(張胤賢)
벼슬은 수문장 증 호조 좌랑이다. 박승남(朴承男)
벼슬은 판관이다. 하계선(河繼先)
유생인데,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최언량(崔彦亮)
본관은 삭녕(朔寧)이며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고종후(高從厚)
고경명(高敬命)의 아들로 의병 복수장이다. 벼슬은 임피 현령 증 이조 판서이며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이잠(李潛)
무과 출신으로, 적개의병장이다. 이숭인(李崇仁)
본관은 송경(松京)이며 무과 출신으로, 벼슬은 김해 부사 증 호조 판서이다. 성영달(成穎達)
본관은 창녕이며 무과 출신으로 벼슬은 경상 우병사이다. 윤사복(尹思復)
본주의 군관인데 벼슬은 첨정 증 호조 참의이다. 이인민(李仁民)
자는 자원(子元)이며 이준민의 아우이다.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정유경(鄭惟敬)
벼슬은 주부이다. 김태백(金太白)
벼슬은 수문장이다. 박안도(朴安道)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양제(梁齊)
선무랑이었다. 이상은 선조 계사 6월에 본주에서 전사하였다. 【고읍】 굴촌(屈村) 서쪽으로 50리, 본래 신라 현의 땅인데, 경덕왕 16년에 굴촌이라 고쳐 강주(康州)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와서 소속되었다. 문화(文和) 동남쪽으로 60리, 본래 신라의 교화량(蛟火良)이었는데, 경덕왕 16년에 문화라 고쳐 고성군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에 와서 소속되었다. 흥선(興善) 흥선도 가운데 있으며, 남쪽으로 70리이다. 본래 고려 유질(有疾)의 부곡이었는데, 현종 때 창선(彰善)이라 고치고 내속되었다. 충선왕(忠宣王)이 흥선이라 고친 뒤에 왜구로 인하여 인물이 흩어져 죽자 인하여 폐해버렸다. 살천(薩川) 서쪽으로 80리, 그 설치를 혁폐하여 마치지 않았다. 뒤에 강등시켜 부곡으로 삼았다. 그 우두머리가 머리를 깎았으므로 중대가리[僧首]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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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초계군(草溪郡)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쪽으로는 거창군(居昌郡) 경계까지 50리이며, 남쪽으로는 삼가현(三嘉縣) 경계까지 24리이고, 북쪽으로 고령현(高靈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대량주(大良州)이며 양(良)을 어떤 데는 야(耶)라 하였다. 본군을 경덕왕(景德王)이 강양군(江陽郡)이라 고쳤다. 고려 현종이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서 왕위에 올랐고, 또 황비 효숙왕후(皇妣孝肅王后)의 고향이라 하여 지합주사(知陜州事)로 승격하였다. 본조 태종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군으로 만들었다. 【속현】 야로현(冶爐縣) 군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신라 적화현(赤火縣)인데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던 것이나 현종 때 본군에 내속되었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대량(大良)ㆍ강양(江陽)ㆍ합주(陜州)ㆍ대야(大耶).
【성씨】 본군 이ㆍ방(方)ㆍ송. 야로 송ㆍ박ㆍ윤ㆍ정(鄭). 말곡(末谷) 고 좌이(坐伊)와 같다.
【풍속】 검소하고 소탈함을 숭상한다.
【형승】 안팎이 시내와 산이다. 하륜이 지은 징심루 기문에, “안팎이 시내와 산으로서 등림하여 관람하는 아름다움을 구비했다.” 하였다. 북쪽으로 성산(星山)과 통했고 남쪽으로 진산(晉山)과 닿았다. 안노생(安魯生)의 기문에 있다. 여러 산이 읍하는 듯, 푸른 병풍이 빙 둘렀다. 강희맹의 기문에 있다.
【산천】 북산(北山) 군 북쪽 1리 길에 있으며 진산이다. 사두산(蛇頭山) 군 서쪽 5리에 있는데 송악(松岳)이라 하기도 한다. 옥산(玉山) 객관 서쪽 모퉁이에 있는 작은 산이다. 속설에, 고려 현종(顯宗)이 거처하던 곳이라 하여 지금도 궁터라고 부른다. 지을현(知乙峴) 군 동쪽 35리에 있다. 고령현 경계이며 아주 험하다. 두리현(頭里峴) 군 서북쪽 30리에 있다. 아현(阿峴) 군 남쪽 25리인 삼가현 경계에 있다. 마현(馬峴) 군 북쪽 26리에 있다. 가점산(可岾山) 군 북쪽 15리에 있다. 산 동쪽은 고령현 경계이다.
가야산(伽倻山) 일명 우두산(牛頭山)이며, 야로현 북쪽 30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뻗어서 월류봉(月留峯)이 되었다.
○ 고려 태조가 일어날 무렵에 최치원(崔致遠)이 글을 올렸는데, “계림(鷄林)의 누런 잎사귀, 곡령(鵠嶺)의 푸른 솔이다.”는 말이 있었다. 신라 왕이 미워하므로 치원은 곧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숨었다.
○ 이색이 권 사관(權史官)을 전송하는 시에, “가야산이 가장 빼어나니 천재(千載)에 고운(孤雲)은 짝할 이 없네. 내 따르고 싶어도 끝내 되지 않아, 남긴 글 계원필경(桂苑筆耕)만 읽었다오. 그대 고운의 자취를 자세히 찾아서 돌아오거든, 나의 티끌 가슴을 씻어주오. 아, 천재의 학이라, 그대 가는 것 보느라고 높은 누각에 기대네.” 하였다.
미숭산(美崇山) 야로현 동쪽에 있다. 고령현 편에도 나왔다. 두모산(豆毛山) 오두산(烏頭山) 북쪽에 있다. 견천(犬遷 개벽루) 군 동쪽 13리에 있다. 벼랑을 따라 잔도(棧道)를 내었는데, 위에는 절벽이고 아래에는 깊은 못이며 꼬불꼬불한 것이 2ㆍ3리쯤 된다. 항간에 전해 오는 말에, “이 고을 개가 초계군 개와 서로 통해 다녀서 길이 되었다.” 한다. 갈점(葛岾) 군 동쪽 27리에 있다. 오두산(烏頭山) 야로현 남쪽 18리에 있다.
남강(南江) 군 남쪽 5리에 있다. 곧 둔덕탄(屯德灘) 하류인데 동쪽으로 흘러 초계군 경계에 들어가서 황둔진(黃芚津)이 된다. 야천(倻川) 야로현에 있다.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곧 무릉교(武陵橋) 물이고, 하나는 거창군 우두산(牛頭山) 동쪽에서 나오는데, 월광사(月光寺) 앞에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고령현 경계에 들어가서 용담천(龍潭川)이 된다. 징심천(澄心川) 징심루(澄心樓) 앞에 있다.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군 북쪽 상상곡(上上谷)에서 나오고, 하나는 두리현(頭里峴)에서 나와서 군 서쪽 10리에서 합류하여, 군 서남쪽을 안고 동쪽으로 흘러 남강 하류에 들어간다.
둔덕탄(屯德灘) 군 서쪽 15리에 있으니 곧 부자연(父子淵)의 하류이다. 부자연(父子淵) 군 서쪽 45리 권빈역(勸賓驛) 앞에 있는데 곧 둔덕탄 상류이며, 물 근원이 넷이니, 하나는 거창군 삼봉산(三峯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소조산(所鳥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적계산(赤界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안음현(安陰縣) 월성산(月星山)에서 나오는데, 합류하여 군 경계에 들어와서 이 못이 되었다. 속설에는 “신라의 장성(長城) 역사에 군졸 한 사람이 오랜 역사 끝에 돌아왔는데, 그 아버지를 못 위에서 만나서 서로 붙들고 울다가 함께 빠져 죽었으므로 그대로 이름하였다.” 한다.
음풍뢰(吟風瀨)ㆍ자필암(泚筆巖) 모두 해인사 골 안에 있다. 이 지역의 봉우리가 사방에 우뚝하고 급한 물결이 바람을 뿜어서, 소리가 전쟁터의 말소리와 같다. 커다란 돌이 시내를 임했는데 이끼가 끼지 않고 미끄럽기가 갈아 놓은 것같아 붓으로 글씨를 쓸 만하다. 찬성 강희맹이 일찍이 남쪽 지방에 유람하다가 여기에 와서, “이와 같이 훌륭한 곳이 아직도 이름이 없다 하니 어찌 문인묵객(文人墨客)의 부끄러움이 아니겠나.” 하고, 이에 물은 음풍뢰, 돌은 자필암이라 하였다. 음풍뢰 시에, “뿜는 물방울은 뛰는 구슬이 급하고, 놀란 물결은 주름진 비단이 깊다. 바람맞이에서 볼수록 부족한데, 웅덩이 밑에는 용이 있어 읊조리네.” 하였고, 자필암 시에, “쇠를 깎은 듯 천길이 웅장하고 구름이 피어나니 일만 구멍이 서늘하네. 완악하고 어두워 끝내 깨닫지 못하는데, 우뚝히 솟은 것은 창창한 바위뿐.” 하였다.
『신증』 황계폭포(黃溪瀑布) 군 서쪽 30리에 있다. 밑에 깊은 못이 있다. 홍류동(紅流洞)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아홉 굽이 흐르는 물 우레처럼 부딪치니, 붉은 낙화 수없이 물결 따라 오누나. 반생 동안에 도원(桃源) 길을 올랐으니, 오늘에 응당 물색의 시기함을 만나리.” 하였다.
【토산】 철 야로현 심묘리(深妙里)에서 산출된다. 감ㆍ닥종이[楮]ㆍ송이[松蕈]ㆍ먹ㆍ은어[銀口魚]ㆍ꿀[蜂蜜]ㆍ잣ㆍ인삼ㆍ복령ㆍ산무애뱀[白花蛇]ㆍ오미자ㆍ석이버섯[石蕈].
【봉수】 미숭산 봉수 남쪽으로 초계군 미타산(彌陀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고령현 망산에 응한다. 소현 봉수(所峴烽燧) 군 서쪽 49리에 있다. 남쪽으로 삼가현 금성산(金城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거창군 금귀산(金貴山)에 응한다.
【누정】 징심루(澄心樓) 객관 남쪽에 있는데 지군(知郡) 윤목(尹穆)이 세웠다. ○ 안노생(安魯生)의 기문에, “영락(永樂) 갑신년 봄 정월에 내가 간직(諫職)에 있다가 견책을 받고 나가서 진주 목사가 되었다. 그 다음 병술년 7월에 예조 우참의로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가는 길에 강양(江陽)을 지나면서 징심루에 올랐다. 방황하면서 산천의 아름다움과 누관(樓觀)의 아름다움을 관람하였다. 누를 지은 제도와 누를 이름한 뜻을 생각하니, 자못 전날에 보던 바와는 차이가 있다. 누를 지은 자가 누구냐 하면 나의 벗 영평군(鈴平君) 윤공(尹公)이고, 누를 이름한 자가 누구냐 하면 지금 총재 호정(浩亭) 하 선생(河先生)이다. 누가 이루어지자 호정의 행차가 마침 왔으니, 이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고 사람이 한 것이 아니었다. 영평군이 아니었더면 이 누를 짓지 못하였을 것이고, 호정이 아니었더면 이 누를 이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높은 산은 푸르러 북쪽에 우뚝 섰고, 흐르는 물은 잔잔하여 남쪽을 빙 둘렀는데, 이 복판에다가 층루를 세운 것은 반드시 뜻한 바가 있을 것이다. 강양 고을이 북쪽으로는 청산과 통했고, 남쪽은 진주에 닿으며, 서쪽은 허주(許州)로부터 동쪽은 팔계(八溪)로부터 귀양 온 손과 글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오가는 사람이 많다. 그들로 하여금 이 누에 오르게 하면, 산의 높음을 본받고 그 뜻을 고상하게 하여 사물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물의 맑음을 본받고 그 마음을 씻어 물욕의 더러움에 얽매이지 않게 함이 있을 것이다. 호정 대선생이 한 번 올라서 보고 이름하기를 징심이라 하였으니, 그의 명명한 뜻은 실로 다른 것과 같지 않다. 지금 사또 조곡(照谷) 이독지(李篤之)는 유림의 인걸이다. 공무를 보는 여가에 이 누에 올라보고 산과 물, 두 가지만으로는 누를 이름한 본뜻에 부족하다 하여, 이에 무성한 숲을 베어내고 모난 못을 파서 안에다가 연을 심은 다음 군자지(君子池)라 이름하였다. 인해서 스스로 말하기를, ‘물은 얼굴을 비쳐 볼 수 있고, 향기는 마음을 맑게 하기에 족하다.’ 하였다. 나도 또한 말하기를, ‘이와 같이한 연후에라야 누를 이름한 뜻이 갖추어져서 모자람이 없다.’ 하였다.
마음이란 것은 일신의 주장이요, 만사의 근본이다. 체(體)는 본래 허명(虛明)하여 온갖 이치가 갖추어져 있으니, 사지의 동정과 온갖 조화의 유행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누관(樓觀)을 짓는 것은 유람하는 즐거움을 위하여 짓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므로 누관의 지음이 그 제도를 잃어 사치가 심하고, 유람하는 즐거움이 도수에 지나쳐서 잇달아 황음하여, 따라서 몸을 망치기까지 하는 자가 흔히 있다. 호정 선생은 경천위지의 문장으로써 훌륭한 문장을 엮어, 한 시대의 풍속과 교화를 새롭게 하는 이이다. 옛일을 증거하여 오늘날의 경계가 되게 하여, 반드시 이것(징심(澄心))으로써 누를 이름하였으니, 이 또한 백성을 교화(敎化)시키고 풍속을 이루는 한 가지 일이다. 만약 여기에 오르는 자가 노래하고 춤추며 기녀와 함께 거문고와 피리의 오락에 취하고, 성색(聲色)의 욕심을 방자히 하여 그 본심을 잃는다면 누를 이름한 본뜻이 아니다. 밤이 고요하고 온갖 동물이 휴식하는데, 밝은 달이 때마침 이르고 맑은 바람이 서서히 불 적에, 푸른산과 마주하고 맑은 물에 임해서 강산 밖에서 세상 생각을 풀고, 우주 사이에서 육신을 잊어 가슴속이 맑고 시원하기가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이 된다면 누를 이름한 뜻을 거의 얻으리라.” 하였다. ○ 이원(李原)의 시에, “남방에서 무더위를 피하려면, 여기를 두고 다시 어디를 찾으랴. 바람과 달 한가한 가운데의 땅이요, 시내와 산 세상 밖의 마음이어라. 아름다운 나무 빽빽한데 매미 울고, 푸른 못 깊으니 물고기가 희롱하네. 시 짓고 흥취에 시달림 받아, 난간에 기대어 종일토록 읊조린다.” 하였다. ○ 윤상(尹祥)의 시에, “누 이름을 들은 지 벌써 오래더니, 오늘에야 한번 찾아왔네. 시냇소리는 사람의 귀를 맑게 하고, 산 모습은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모래 밭을 띤 대 밭은 얕고, 물을 나눈 논누렁은 깊다. 오랫동안 앉아서 그윽함을 찾는 흥취, 도연(陶然)히 저도 모르게 읊조리네.” 하였다. 『신증』 서거정의 시에, “관하(關河)에는 길이 아득히 멀고, 세월은 나날이 지나간다. 누에 오르니 그지없는 눈이요, 기둥에 기대니 유유한 마음일세. 산이 돌아 푸른 멧부리 합하고, 골이 좁아 흰 구름이 깊다. 다시 마음 맑게 하는 곳 있으니, 찬 시냇물이 돌에 부딪쳐 읊조린다.” 하였다.
함벽루(涵碧樓) 남강 돌벼랑 위에 있다.
○ 안진(安震)의 기문에, “내가 15세부터 초가집에서 글을 읽으면서 세상을 모른 지가 10년이었다. 정사년 가을에 중국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면서 평양을 지나다가, 처음으로 영명사(永明寺)와 부벽루(浮碧樓)를 보았다. 5년 뒤에 진주 목사로 나와서 또 용두사(龍頭寺)의 장원루(壯元樓 진석루)에 올랐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평생에 본 바에 남북의 뛰어난 경치는 이 두 누(樓)보다 나은 것이 없으리라 하였다. 그저께 나라의 일로 인해서 강양에 가다가 도중에서 한 누를 바라보니,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듯 하고 단청이 현란하여 봉(鳳)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객을 돌아보며, ‘저 누는 어느 때에 지었는가.’ 하니, 객이 답하기를, 지금 태수가 신축한 것이다.’ 하였다. 나는 듣고 기뻐하여 곧 배를 띄워 강을 건넜다. 난간에 올라 4방을 바라보니, 그 강산의 형세가 거의 전일의 두 누보다 못하지 않고, 단청이 빼어난 것은 더 나은 듯하였다. 아, 이 고을이 생긴 이래로 이 강산이 있었고, 옛날 영웅 호걸로써 이 고을에 수령으로 온 자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도 푸른 석벽을 파고 맑은 흐름을 임해서 누를 지은 자는 없었다. 그런데 오직 군이 비로소 발견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만든 것을 땅이 감추었다가 지을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닌가. 이에 잔을 들고 노래하기를, ‘흰 구름이 나는데 산이 푸르르네. 밝은 달 돋는데 물이 출렁출렁. 노 위에서 사시로 보아도 부족하고, 아득할손 나의 회포 하늘 저쪽이네. 산이 무너지고 물이 말라도 사또의 덕은 잊을 수 없으리.’ 하였다. 객이 나에게, ‘이 노래를 써서 이 누의 기문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므로 나는 곧 붓을 잡아 쓰노라. 누를 짓는데 제도의 보태고 줄인 것과, 관람하는 경치의 큰 것 작은 것은, 시에 능한 자가 드러내는 것을 기다려도 또한 늦지 않다. 누를 함벽(涵碧)이라 한 이는 누구인가, 태수 자신이 이름 지은 것이다. 태수는 누구인가, 여러 대로 공신인 상락공(上洛公)의 아들 김군(金君)이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중신기(重新記)〉에, “족형 무송 윤담수(族兄茂松尹淡叟)씨는 박식하고 고상한 군자이다. 기축년 가을 종부 정(宗簿正)으로 있을 때, 경산도 단성현(丹城縣)에 모친을 뵈오려 갈 제 길이 합천을 경유하였는데, 합천 태수 유후(柳侯)의 편지와 그 고을의 함벽루의 기문을 아울러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였다. 담수의 말은, ‘함벽루는 군 남쪽 4리에 있는데 절벽에 의지하여 긴 강을 굽어보는데, 남으로 바라보면 여러 산이 읍하는 듯 푸른 병풍이 빙 둘러 있다. 돌아서 조금 서쪽으로 오면 바위 언덕에 옛 절이 있어서 새벽 종과 저녁 북소리가 은은하게 구름 가에서 울려 온다. 누 바로 동쪽 30보쯤에 한길과 나루터가 있어서 나그네가 오가는 자, 옷을 벗고 건너는 자, 옷을 걷고 건너는 자들을 굽어보면 고물고물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 이것이 함벽루 경치의 대체이다. 누를 지은 시초는 안 선생 진(震)의 기문에 자세하고 잇달아서 시 지은 사람도 모두 예전에 이름나 선비들이다. 그렇다면 이 누가 한 지방 형승을 차지한 것을 알 수 있다. 황폐하고 무너진지 40년이 되어도 부흥시키는 자가 없다가 정해년에 유후가 이 고을을 다스리면서 정사가 은혜스럽고 간략하니, 백성이 즐거워하고 번성하였다. 오래된 민폐를 없애고 새로운 정사를 일으켰다. 공무의 여가에 빈터를 돌아보고 개연히 탄식하며 다시 새롭게 하기를 꾀하고, 이에 중 성소(性昭)에게 일을 맡겼다. 전 군사(前郡事) 문여충(文汝忠)이 의논하지 않아도 뜻이 같아서 고을 부로(父老)들을 격동시켜 권하니, 역사에 달려오기를 서로 뒤질까 하였다. 목재를 모으고 기와를 굽는데 관가 재물에서 사용하고, 백성에게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높은 데를 깎고 좁은 데를 넓히며, 옛모습 그대로 하되 제도를 보탰다. 두어 달이 못 되어서 완성되었는데, 이른바 함벽루라는 뜻이 더욱 드러나고 맞았다. 유후가 예전 기문과 시를 다시 새겨서 꾸미고자 하는데, 다시 지은 전말을 기록하는 것은 오직 그대에세 바란다.’ 하여 굳이 청하였다.
나는 마침 병이 조금 뜸하여 창 앞에 나돌아다닐 정도로서, 남쪽 지방의 누각과 대사(臺榭)의 명승은 도적(圖籍)을 상고하여 상상하며 바라던 참이었다. 그런데 안공의 기문을 보고는 황홀하게 내 자신이 함벽루 위에 앉아서 구름을 굽어보고 넓은 공중을 흘겨 보는 듯하니 참으로 장쾌한 느낌이다. 내 어찌 군말을 하랴. 그러나 백성의 이익을 일이키고 백성의 힘을 아끼면서 능히 일을 해낸 것은 당연히 써야겠다. 일찍이 《춘추》를 상고하니 공역(工役)을 일으킨 것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썼으니, 그것은 토공을 삼가고 백성의 힘을 중하게 여긴 것이었다. 쓰는 말을 보아 아름다움과 나쁜 것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라일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한 고을의 일에 있어서이겠는가. 한 고을에도 백성이 있으며 사직이 있으니, 곧 옛 제후와 같은 제도이다. 거기에 장이 된 자의 한 번 호령의 정당함과 정당하지 아니함과, 한 정교의 아름다움과 나쁨에 은혜와 원망이 따르게 되니 어찌 속일 수 있으랴. 지금 유후가 정사를 하매 백성이 편하여지고 유후가 공역을 하여도 백성이 폐가 없이, 수십 년이나 황폐하였던 곳에 층층의 뛰어난 누각이 하루아침에 등장하고, 아름답게 나타나도 백성은 힘들이지 않았으니, 어찌 쓰지 않으리오. 후일 이 누에 오르는 자가 그 집의 우뚝함과 단청의 화려함을 보고 혹 마음에 의심하기를, ‘이런 공역을 일으킨 자가 능히 백성에게 괴롭히지 않았을까.’ 한다면 나의 기문이 그것이 아님을 증거 하기에 족한 것이다. 유후는 문성(文城)의 훈벌 세가(勳閥世家)로서 이름은 윤(綸)이며, 일찍부터 아름다운 명망이 있었다.” 하였다.
○ 조준(趙俊)의 시에, “말을 몰아 멀리 와서 홀로 누에 오르니, 풍진 세상 십년의 시름이라. 제갈(諸葛)의 계책 없음이 한스러워, 창을 비껴잡고 우거진 모래톱에서 높게 읊조린다.” 하였다. ○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한벽(寒碧)이 서로 엉켜 협구(峽口)가 밝은데, 누에 오르는 가느다란 길 구름속에 비꼈네. 올라 구경할 줄 아는 것은 누구의 안력인가. 모름지기 푸른 벼랑을 쓸고 성명 적으리.”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사군이 객과 함게 강루에 오르니, 누 위에 가인(佳人) 막수(莫愁)가 있다. 다시 옥선(玉仙)을 불러 옥피리 불며, 맑은 달 함께 휘어잡고 꽃다운 물가를 굽어본다.” 하였다.
매월루(梅月樓) 객관 동쪽에 있다. 군수 김영추(金永錘)가 세웠다. 『신증』 김일손(金馹孫)의 기문에, “영(嶺) 남쪽에 산수의 빼어남과 고을의 웅대함과 누관의 아름다움이 진실로 성하다. 합천 또한 큰 군이라 이 땅에 이름난 산과 큰 냇물과 기이한 유적이 있다. 신라 때에는 대량주(大良州)였는데, 고려 현종이 태어난 유래가 좋지 못하고 또 꺼려하는 이가 있어서, 오랫동안 산야에 피해 있다가, 마침내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서 왕위에 올랐는데 전해오는 유적이 지금도 있다. 또 죽죽(竹竹)이 나라를 위해 죽은 절개와 거인(巨仁)이 세상을 피해 숨어서 살던 것과, 최고운(崔孤雲)이 신선되어 간 것이 모두 이 땅이다. 그러므로 옛것을 좋아하는 군자가 한 번 유람하고자 하는 곳이다. 기유년 봄에 영가(永嘉) 김영추(金永錘), 자형(子衡)이 의영고영(義盈庫令)으로서 외방에 나와, 이 고을 원이 되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내가 바야흐로 벼슬을 내놓고 도주(道州)의 집에 와 있었으므로 김후의 고을 잘 다스림을 한 번 보고, 겸해서 고금의 기이한 산천을 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고, 잇따라 뜻하지 않은 재앙으로 형옥에 곤욕 당했더니, 다행하게도 성은을 입어 놓여서 서울 집에 돌아왔으나 인사를 끊고 지냈다. 이때에 봉원(蓬原) 정괄(鄭佸) 공이 절도사가 되었는데, 내가 공에게 인척이 되고 또 문생의 뒷 반열에 참여하였다. 정공이 관내순시하는 길에 여가가 많으므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청하기를 간곡히 하였다. 나는 억지로 게으른 몸을 일으켜 수일 동안 따라다니다가 작별하고자 하니, 공이 말하기를, ‘합천 고을이 지역이 궁벽하고 사무가 간략하니, 자네와 함께 밤새도록 맑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요, 또 고을 주인은 내가 서해 관찰사였을 때 막료였던 사람으로서 역시 좋은 사람이니 가보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보다 먼저 김후는 객관 동쪽에 새 누각을 지었는데, 모두 3칸이고 누 앞에는 모난 못을 파서 연을 심었다. 아직 단청을 반도 못했는데 상공이 갑자기 오르고 보니 나의 걸음도 잇달아 이르렀다. 공이 난간에 기대어 나에게 말하기를 ‘이 누가 사치스럽지도 아니하고 누추하지도 않고 좁지도 아니하여 사신이 쉬어 머물기에 매우 적당하다. 이 누를 지은 사람의 명자를 후일에 없어지게 할 수 없으니, 자네는 마땅히 기문을 짓게.’ 하였다. 그때 도사(都事) 김 선생(金先生) 윤신(潤身)도 좌석에 있다가 그 말에 찬성하였다.
나는 문사가 졸렬하여 상공의 영광스러운 명령을 드날리어 김후의 제작에 문채를 꾸미기에 부족하다고 사양하였으나, 공이 굳이 명하고 김후도 또한 나를 위해 말하여 성의가 지극하였다. 그러하니 천박하나마 바치지 않을 수 없어 공에게 누 이름을 짓기를 굳이 청하니, 공이 오래 뒤에, ‘나의 본대로 하는 것이 가하다. 내가 처음 이 누에 오를 때에 묵은 매화 두어 그루가 뜰에 마주 섰는 것을 보았고, 밤이 되어 자려는데 처마끝에 스며드는 달빛이 가느다란 갈퀴와 같았다. 이것을 합쳐서 매월(梅月)이라 한다.’ 하였다. 나는 일어나서 ‘공께서 이름한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 하였다. 매화가 달빛을 띤 것은 시인들의 맑은 시의 재료이고, 일반인의 고아한 감상거리요, 또 이 누에 꼭 맞는다. 이 누에다가 이 이름으로써 빛나게 하였으니, 이른바 이름을 헛되게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의 크고 넓은 것이 산하를 띠고 성곽을 웅거하여 경치가 풍부하고 수려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제도는 사치와 검소한 절도에 합당하고, 검은 칠 흰 칠이 꾸밈과 바탕이 잘 조화되었다. 영롱한 창문과 구불구불한 난간이 말쑥하고 서늘하여 주변 경치와 서로 어울리고, 그 단정하고 아담한 것은 비유하면 상을 눈썹과 같은 높이로 받드는 어진 부인과 학을 짝한 처사와 같아서, 가히 오래도록 사귈 수 있고 부귀에 빠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은 영남에서 이 누가 첫째이니, 이는 목공들도 다 잘했지만 김후가 지휘한 것이 또한 묘하였던 것이다. 김후의 사람됨은 맑고 시원하며 정밀하여 이 누와 같다. 후일 후는 가더라도 이 누는 남아 있을 것이니, 이 누를 보면 또한 김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의 이름은 이 누를 인해서 이 땅에 영원할 것이다. 상공이 이 누를 굳이 매월로써 이름한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소금과 매실은 국을 조미하는 것이므로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한 바이고, 달은 경사(卿士)와 비유한 것이므로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고한 것이다. 공이 여기에 보는 바에 감촉되어 생각을 일으킴이 없었을까. 공은 매월의 흉금이다. 맑고 깨끗한 명망이 평소부터 나타났음은 진실로 공의 집안의 한 가지 일이거니와, 지금 묘당의 그릇으로써 방백의 직책을 맡아서 장차 정승으로 조정에 들어갈 것이니, 국을 조미시키는 솜씨를 발휘하여 달고 신맛을 솥에서 조미하고, 상서와 재앙이 몸과 집에 응함을 삼가 조정에 이를 것이니, 이것은 달이 징험하는 것이다. 진실로 여기에 생각을 두어서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밖의 희고 고운 꽃을 희롱하고, 맑게 빛나는 달을 즐겨 구경하는 것은 시인의 일이요, 상공의 일은 아니다. 하물며 때는 한 여름이어서 매실이 노랗고, 달도 기망(旣望)이어서 둥근 것이 이지러지려 한다. 매화도 때가 아니며 달도 도(度)가 지났으니 상공의 생각함이 있을 것이다. 후일에 공을 계승하여 이 누에 오르는 자도 또한 그 이름한 것을 보고 그 실상을 생각하여, 매화와 달을 다만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한 가지 물건으로만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나는 하나의 외로운 선비로서 세상 밖에서 스스로 방랑하니, 어찌하면 해가 저물녁에 다시 김후를 찾아 누 위에서 술마시며 ‘성긴 그림자와 그윽한 향기’라는 옛 사람의 시구를 읊조리며 한 차례 시상을 불러 일으켜 볼까.” 하였다.
○ 조위(曺偉)의 시에, “단청한 누각 동편에 붉은 담 둘렀는데, 부용을 심어 작은 못 수면에 점 찍었도다. 지척에 아름다운 경치 있음을 뉘 알리, 주인의 묘한 경영이 파천황(破天荒)이네.” 하였다. ○ 또 “밤이 늦으매 금압(金鴨)에 푸른 연기 가느니, 바로 누 위에서 술마시다가 흩어질 때일세. 밝은 달은 하늘에 가득하고 매화는 눈 같은데, 난간에 기대어 옥피리 불지 마소.” 하였다. ○ 또 “강과 산이 그림 속에 펼쳐진 듯, 굽은 난간 아로새긴 난간엔 티끌 한 점 없어라. 달을 향해 둥근가 이지러졌는가를 묻지 마라. 이미 긴긴 그림자 그윽한 향기를 가져왔네.” 하였다. ○ 강혼(姜渾)의 시에, “담담한 푸른 산이 성가퀴에 가깝고, 비온 뒤 봄 물이 못에 넘친다. 마을 동산 곳곳에 사립문 닫혔으니, 도리(桃李)의 그늘 속에 한 가닥 길 거치네.” 하였다. ○ 또 “맑은 꿈 처음 깼는데 술기운이 약하니, 다락에 올라 늦은 봄 풍경을 바라보네. 잎사귀 밑 쇠잔한 붉은 꽃만 남았는데, 동풍이 낭자하게 부는 것 금할 수 없어라.” 하였다. ○ 또 “문서 무더기 속에서 눈을 겨우 뜨자, 바람 난간에 기대어 낯에 낀 먼지를 떨치네. 꽃다운 풀과 떨어지는 꽃잎, 석양 밖에 어느 누가 화교(畫橋)를 건너오는고.” 하였다.
【학교】 향교 진산(鎭山) 기슭 1리쯤에 있다. 옛날에는 군의 북쪽 3리에 있었는데 군수 황린(黃璘)이 여기에 옮겼다.
【역원】 김양역(金陽驛) 군 북쪽 7리에 있다. 권빈역(勸賓驛) 군 서쪽 35리에 있다. 남강원(南江院) 남강 북쪽 언덕에 있다. 정양원(正陽院) 남강 남쪽 언덕에 있다. 지현원(知峴院) 군 북쪽 19리에 있다. 아현원(阿峴院) 군 남쪽 22리에 있다. 두현원(頭峴院) 군 서쪽 22리에 있다.
『신증』 【교량】 무릉교(武陵橋) 김종직의 시에, “그림 같은 무지개다리 급한 물결에 비치는데, 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 발을 조심한다. 나의 옷 걷고 물 건너려는 것 그대는 웃지 마소. 고운(孤雲)이 어찌 위태로운 길 밟았던가.” 하였다.
【불우】 용계사(龍溪寺) 가점산(可岾山)에 있다. 안계사(安溪寺) 사두산(蛇頭山) 북쪽에 있다.
해인사(海印寺) 가야산 서쪽에 있다. ○ 신라 애장왕(哀莊王)이 창건하였다. 수행이 높은 중 순응(順應)ㆍ이정(利貞)ㆍ희랑(希朗)의 화상이 있다. 고려 때 판각한 《대장경》과 역대의 《실록》을 모두 이 절에다가 간직하였다. 고기(古記)에, “가야산은 형승이 천하에 뛰어났고, 땅 기운이 해동에는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 하였다. 절에 최치원의 서암(書巖) 기각(棋閣)이 있다. ○ 홍간(洪侃)이 《실록》을 말리러 가는 추옥섬(秋玉蟾)을 전송하는 시에, “내 들으니 가야산 해인사는, 유선(儒仙) 최고운이 일찍이 놀던 땅. 인간의 풍월(風月)은 이르지 못하고, 보서(寶書)와 옥첩(玉牒)이 구름처럼 쌓였다네. 이 속에 가는 사신도 반드시 신선의 무리이리라. 3년 만에 학 타고 하늘에서 내리는구나. 그대 금년에 이런 걸음하게 되니, 가을 풍경이 사람과 함께 맑으리라. 푸른 산 석양에 영가(永嘉) 길이고, 붉은 단풍에 맑은 강 진양성이라. 역마는 훨훨 나는 기러기 같은데, 몸은 시원한 바람 탄 것보다 상쾌하리. 삼한(三韓) 23대의 보록(寶錄) 하나하나를 구름낀 산 속에서 뒤적거리리.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 일 없으리니, 풍요(風謠)를 채집하여 남정기(南征記)를 지으리.” 하였다. ○ 염정수(廉廷秀)의 시에, “산사에 봄날이 개자 한 점 티끌도 없으니, 도정(道情)과 시 생각을 제어하기 어렵다. 골 안에 꽃빛은 비단을 편 듯하고, 다리 아래 시내 소리는 우레가 구르는 듯, 기각(棋閣)에 이끼 꼈는데 옛 글자 남았고, 월봉(月峯)에 솔 늙은데 거친 대(臺)가 있구나. 최고운이 간 지 지금 천 년인데, 선인의 자취를 대해 술마시기 부끄럽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바위 구렁 돌고 돌아 한 가닥 길 통했는데, 만겹의 산이 절을 감쌌네.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춰서 구역이 깊숙하고, 불전(佛殿)이 오래되고 행랑이 둘렸는데 제도가 웅장하다. 서암(書巖)은 흐르는 폭포 위에 우뚝하고, 기각은 저녁볕 속에 황량하다. 고운의 높은 자취를 이을 사람 없어, 천년 동안 나는 새 공중에 사라지듯.” 하였다. ○ 배중부(裵仲孚)가 해인사에 사신 가는 김덕유(金德儒)를 전송하는 시에, “내 일찍이 남으로 해인사에 놀았더니, 산 구역 별천지 참 선경이었네. 무릉(武陵) 시냇물은 서로 돌고돌고, 고운의 기각은 매우 아득하네. 바람 바위 물 구멍이 참으로 빼어나니, 뛰어난 경치는 반드시 여항(餘杭)을 논할 것 없네. 봄 바람이 숲에 불면 아름다운 꽃이 피고, 진기하고 기이한 새는 서로 날아 다니네. 6월에도 나는 눈발이 절벽에서 뿌리니, 소나무 아래 누대가 맑고도 서늘해라. 가을이 오면 흰 국화가 단풍에 비치니, 홍류동(紅流洞) 그림 펼친 듯하구나. 겨울에는 얼음과 눈이 교묘하게 조각한 듯, 시내 옆 매화가 그윽한 향기 풍기네. 사시사철 행락하기에 이만한 땅 없으니, 선옹(仙翁)과 중들이 함께 노닌다.”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이 문 장로(文長老)를 전송하는 시에, “조계(曺溪)의 일미(一味)를 어찌 말로 전하랴. 연꽃 뽑아 미소 지음도 또한 우연이리. 무릉 다리 위를 향해 보소. 산 경치 물빛이 울람천(蔚藍天)이리.”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가야산이 좋단 말, 십년 동안 듣기만 했네. 내가 오니 구름이 짝이 되고, 중이 누웠으니 사슴이 벗하네. 손의 베갯머리엔 차가운 시내 소리 맑고, 향반(香盤)엔 고요한 밤 깊었구나. 많은 생을 고화(膏火) 속에서, 괴로워하던 것 부끄러워라.”하였다. ○ 또 “맑고 맑은 문창후(文昌侯), 꽃다운 남긴 자취 오랫동안 들었네. 고운이 동방에서 태어났으니, 독수리가 닭 무리에서 빼어나는 듯. 학문은 마음과 함께 넓고, 문장은 손수 나누었다네. 주지가 아름다운 옛일 더듬어, 손이 오면 부지런히 얘기하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세 선사 유적이 있으니, 찾아 보매 듣던 바와 같도다. 도의 운치는 참으로 짝할 이 없었고, 신통은 무리에서 뛰어났었다. 지원(祗園)엔 꽃이 비오듯 했을 것, 향적(香積)엔 밤을 응당 나누었으리. 허다한 방포(方袍) 입은 사람들, 누구라 그렇게 공부 부지런함 알리.” 하였다.
○ 또 “고운은 아름다운 은둔의 나그네, 백일(白日)에 큰 이름이 들렸네. 건구(巾屨 의복과 신발)는 매미가 껍질 벗듯 하였고, 풍채는 학무리에 섞였었네. 바둑판은 속절없이 부서졌고, 시 썼던 돌도 반은 갈라졌다. 거닐던 지경을 자세히 밝으니, 추모하는 생각 다만 간절하여라.” 하였다. ○ 또 “재판(梓板)을 간직한 천 칸 시렁, 먼 지방에도 소문 또한 높았다. 거미는 아침에 줄을 치고, 박쥐는 저물녁에 떼를 짓네. 안개가 자욱하니 글자가 흐려지고, 바람이 두드려서 나무 결이 갈라졌네. 모름지기 귀신을 시켜 보호하여라. 후세의 임금이 다시 판각하지 않도록.” 하였다. 절에 대장경 판목이 있는 까닭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청량사(淸涼寺) 월유봉 밑에 있으며 최치원이 여기에 놀았다. 월광사(月光寺) 야로현 북쪽 5리에 있다. 대가야(大伽倻) 태자(太子) 월광이 창건한 것이다. ○ 이숭인의 시에, “경치 좋은 곳 만날 때마다 이름을 쓰고, 또 쌍계(雙溪)를 향해 지팡이를 돌린다. 들 다리에 객을 보내니 앞뒤의 그림자요, 소나무 탑에서 불경 외니 길고 짧은 음성이네. 산천은 경치 좋아 그림 같은데, 수목도 해가 깊어 절로 늙었네. 북으로 가니 언제 또 남으로 오나, 이곳 풍경이 잊히지 않은 것 미리 알겠네.” 하였다.
내원사(內院寺) 해인사 북쪽 5리에 있다. 절에 조현당(釣賢堂)ㆍ나월헌(蘿月軒)ㆍ득검지(得劍池)가 있다. 절 중 옥명(玉明)이 절을 지을 때에 못을 파다가 옛 칼이 나왔으므로 그것을 인해서 이름하였다. 『신증』 김일손의 조현당(釣賢堂)의 기문에, “내가 어릴 때부터 산수를 좋아하는 성벽(性癖)이 있어, 장성하여서는 영남에 유람하였다. 최 문창(崔文昌)이 당(唐) 나라에서 돌아왔으나, 신라 말기여서 뜻을 얻지 못하였다. 그가 찾아다닌 아름다운 산천은 한 군데가 아니었으나, 그가 생애를 마친 곳은 이 가야산이었다. 그렇다면 이 산에는 반드시 경치가 빼어나서 신선이 머물렀던 것이리라. 문창이 간 뒤에도 반드시 높은 사람과 은사(隱士)가 그 산중에 살았을 것인데, 혹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음인가. 한번 유람하여 그 사람을 탐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속의 윤리가 사람을 얽매어 티끌 속에 분주하며 평소의 바람을 저버린 지 이미 세월이 오래였다. 금년 봄에 김대유(金大猷)가 야성(冶城)에서 오산(鰲山)의 내 집을 방문하고 가야산을 유람하기로 언약하였다. 두어달 있다가 김대유를 찾아 지팡이를 짚고 가야산으로 함께 떠났는데, 이수재(李秀才) 형(泂)이 따라 나섰다. 무릉교를 지나 홍류동에 들어가서 치원대(致遠臺)를 지나 해인사에 도착하였다. 그때 조법사(祖法師)가 한창 절을 중수하는 중이었다. 문창의 독서당(讀書堂)을 물었으나 그것은 모른다 한다. 조법사의 대우는 후하였으나 집 짓노라고 시끄러워서 머무를 수 없었다. 돌아서 두어 마장을 가니 산이 더욱 가파르고 골짝이 더욱 구불구불하였다. 일찍이 사대부들 사이에서 들으니, 명(明)이라는 장로가 산 꼭대기에다 못을 파고 집을 지어서 여생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명이 시를 읊조릴 줄 알고 나팔 불기를 좋아하여 점필공(佔畢公 김종직)이 매양 나화상(螺和尙)이라 일컬었다. 이날 들길을 돌고 돌아 바라보니, 푸르른 산 속에 절이 보일락말락하므로 걸음을 재촉하여 올라갔다. 집 밑에 못이 있는데 득검지(得劍池)라는 팻말이 있었다. 못 복판에는 작은 섬이 있고 솔ㆍ국화ㆍ매화ㆍ대ㆍ구절창포 따위가 심겨 있는데, 못 위에는 연잎이 너풀너풀 못에 가득하고, 작은 다리가 걸쳐져 있고, 허수아비가 작은 배를 타고 돛을 올리고 낚싯줄을 드리우고 바람 따라 작은 다리 밑으로 들락날락하였다. 집을 둘러 칡이 나서 벽에 기어오른 줄기와 꽃이 창틈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지팡이를 세우고 좌우를 돌아보았다. 조금 있다가 노승 한 사람이 그 집에서 나왔다. 내가 갑자기, ‘나화상이 어디 있느냐.’ 하였더니, 중은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대답하지 아니하고 바로 나를 인도해 들이었다. 그런데 왼쪽에는 나월헌[蘿月軒]이라는 현판이 걸렸고 오른편에는 조현당(釣賢堂)이었다. 벽에는 옛날 칼 한 자루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나화상이 못을 팔 때에 못 가운데에서 발견한 것인데 천년간 땅속에 묻혔으니, 매우 기이한 물건이다. 난간에 기대어 눈을 들면 멀고먼 수백 리 밖에 두류산 중첩한 푸른 빛을 볼 수 있으니, 이것 또한 하나의 기이한 경치였다. 얼마 안 되어 대유가 잇따라 오니, 중이 대유에게 물어서 비로소 나의 성명을 알고 손바닥을 치면서, ‘노승이 여기에 머물면서 걸음이 문 밖에 나가지 않았으나, 그대 이름은 귀에 익은 지 오래였소.’ 하며 서로 쳐다보고 한바탕 웃었다. 내 희롱하기를 ‘내가 정 선생(程先生)이 동오경(董五經)을 방문하던 것을 흉내 냈으나, 그대가 나를 알지 못하니, 동오경보다 훨씬 못하다.’ 하였다. 인하여 벽을 두루 보니, 사가(四佳) 상국(相國) 서거정(徐居正), 파징(波澄) 김맹성(金孟性) 선생, 고양(高陽) 유호인(兪好仁) 선생, 신창(新昌) 표연말(表沿沫) 선생, 숭선(嵩善) 김종유(金宗裕) 군이 써둔 시판(詩板)이 있었다. 모두 당세의 현인으로서 국가의 성운을 읊조리고, 대아(大雅)의 높은 바람을 떨치는 이들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점필공이 나화상과 오간 시통(詩筒)이 있었으니 더욱 기뻤다. 이튿날 방태화(方太和)ㆍ송구보(宋懼甫)ㆍ이호원(李浩源)이 왔고, 또 다음날에는 안시숙(安時叔)ㆍ하응기(河應期)가 왔다. 내가 대유에게 말하기를, ‘다시는 기이한 경치를 탐방하지 말라.’ 하고, 여기에서 달이 넘도록 머물렀다. 네모난 못이 활수(活水)의 근원이며, 마르지 않고 거울 같은 수면에 물건의 형상이 비치면 곱고 추한 것이 문득 나타난다. 달은 반 바퀴요, 산들바람이 가늘게 분다. 두견새 한 소리에 산천이 모두 적적하다. 비온 뒤 흰 구름은 무심하게 바위 구멍에서 나와서 한가로우니, 나화상은 여기에서 얻음이 있었을진저. 인간에서는 무서운 더위가 쇠와 돌을 녹일 것이언만, 이 당(堂) 위에서는 갖옷을 입어도 추워서 6월인 줄 모르게 되니, 이것은 산중 사람의 특별한 조화이다. 문득 속세를 헌신짝처럼 벗어버리고 길이 머물 뜻이 있었다. 나화상이 일찍이 〈나월독락가(蘿月獨樂歌)〉를 지었는데, 모두 속세를 우습게 보고 세상 밖에서 스스로 즐기는 것이엇다. 저녁에는 나화상이 노래를 부르는데 메아리가 부딪쳐 바위를 진동하고, 잇달아서 춤을 추는데 까까머리와 넓은 소맷자락이 달 그림자에 너울거렸다. 나화상은 참으로 호걸스러운 중이었으니, 드디어 세상 밖의 사귐을 맺었다.
하루는 산에서 내려오려는데 나화상이 산중에 남겨둘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나화상이여, 이 못이 있고 이 난간이 있어, 귀를 씻고 발을 씻으며 칡덩굴을 뒤집어쓰고 달빛을 잡으니, 홀로 즐길 만하여 세상과 접촉하지 않는데, 또 조현(釣賢)이란 것으로 더 부치기는 웬일인가.’ 하니, 나화상이 말하기를, ‘이른바 현(賢)이라는 것은 지금 세상에 이른바 현이 아니요, 옛날 현이다. 번화스러운 곳에 명성을 날리는 현이 아니고, 청운에서 도를 사모하는 현이다. 멀게 말하면 호계(虎溪)에서 셋이 웃는데 도연명이 참여하였으니, 도연명이 진(晉) 나라의 현이 아닌가. 가깝게 말하면 해인 세 절[海印三寺]에 고운이 놀았는데 고운은 신라 시대의 현이 아닌가. 이른바 현이란 것이 지금 세상에 소위 현이란 것이 아니다. 30년을 홀로 즐기면서 세상에서 도연명과 고운 같은 현인이 없음이 한스럽다. 그러하니 나의 즐김은 궁벽한 산중에서 영원히 홀로 즐길 뿐이고 함께 할 아무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다행하게도 여러 벗이 와서 머물렀으니, 곧 우리들의 한 좋은 만남이다. 여러 벗은 어찌 이름 한 번 기록하는 것을 아끼는가.’ 한다. 나는 한참동안 탄식하다가. ‘나화상이 이미 이 당으로써 군자의 시를 낚아서 산중의 빛남으로 하고, 또 이 당으로써 나의 기문을 낚고자 하니 나화상이 문아(文雅)에 돈독하기도 하다. 그러나 반드시 현을 낚으려는 실상에 맞게 하려면 능히 마음을 천고에 노닐게 하며, 홀로 가서 산림에 숨어 사는 자이라야 가하다. 그 사이에 반드시 다만 도연명이 되고 최 문창이 될 뿐이 아닌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어진이를 등용하는 길이 크게 열려서 바위 굴에 숨어 사는 빠뜨려진 선비가 없는데, 누구가 우리 나화상을 적막한 땅에서 따르기를 즐겨하겠소. 나는 나화상의 당(堂)이 필경 헛되게 만든 것이 될까 저어한다. 우리들의 글 같은 것은 이미 시 잘하는 여러 군자에게 양보하였고, 도 또한 옛 현인보다 못하다. 세상에 버림받은 재질로써 여가를 만들어 허튼 걸음을 한 것이다. 내 들으니, 나화상은 어버이를 매우 효성스럽게 섬겼으며, 젊었을 때는 당세의 인자에게 재물을 구해서 형제의 고아 일곱 사람을 시집보내고, 가정을 꾸미지 못하는 세 사람에게 집을 마련해 주어서 은애를 다했다 하니, 이것이 기록할 만하다. 아, 나화상이 출가했으면서 인륜에 돈독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나화상의 도는 근본이 있다 하겠다. 세상의 더러움을 미워하여 불도에 의탁하고 속세를 도망쳐 숨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앞서 국가에서 나화상의 명성을 듣고 억지로 회암사(檜巖寺) 주지를 맡겼으나, 1년 있다가 문득 사퇴하고 이 산에 돌아와서 마침내 영리로써 몸을 위하지 않았다. 나화상이 능히 이와 같이 하니, 이 때문에 공자께서 ‘오랑캐에 임금이 있는 것이 중국에 없는 것보다 낫다.’는 탄식을 일으켰던 것이다. 나화상이여, 벽에 걸린 칼이 용으로 화하지 않고 칡 덩굴의 달이 그대로 있으면, 우리들 오는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으리라.” 하였다. 소리암(蘇利菴) 가야산에 있다. ○ 서거정의 중창기에, “합천의 명산은 가야산이다. 이 산을 우두(牛頭)ㆍ설산(雪山)ㆍ상왕(象王)ㆍ중향(衆香)ㆍ지달(只怛)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산 하나에 여섯 가지 이름이 있는 것이다. 산의 빼어남이 동방에 알려져서 신라《수이전(殊異傳)》에 기록된 바로는, ‘동방에 옛적에 소리암이라는 큰 절이 있었다.’ 하였다. 이미 천수백 년 전 기록이니, 그 절이 어느 때에 폐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빈터가 역력히 남아 있다. 아, 인간 세상에 있는 명산과 보배로운 땅 가운데 기록에 나타난 이와 같은 절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황폐하고 매몰되어 오래도록 복구하지 못하니, 또한 산문(山門)으로서 하나의 한스러운 일이다. 지금 인순 부윤(仁順府尹) 영가(永嘉) 권 상국 총(權相國聰)은 선원 귀족(璿源貴族)이요, 현달한 집안으로 명망이 높은 분이다. 그러나 기름진 음식과 비단 옷 입는 습관을 물리치고, 선을 닦으며 복을 심는 일에 마음 두어서, 재물을 많이 보시하여 비용을 제공하니, 여러 시주들이 또 따라서 이루었다. 기사년 봄 3월에 짓기 시작하여 다음 해 겨울 10월에 손을 떼었다. 이해부터 법회를 개설하니 중들이 구름 모이듯 하여서 이 암자가 다시 중흥하였다. 후(侯)는 대대로 문장가의 집안 출신이니, 어찌 구구하게 불도에 빠진 것이리오. 여기에 애쓴 바는 위로 임금의 복을 축원하고 아래로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충과 효의 지극한 뜻을 붙인 것이다. 어찌 후세 사람에게 권장하는 바 되지 않으리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군 동쪽 8리에 있다. 여단(厲壇) 군 북쪽에 있다.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 해인사 안에 있다. 속설에는, “대가야국 왕후 정견이 죽어서 산신이 되었다.” 한다. 미숭신사(美崇神祠) 미숭산 꼭대기에 있다.
【고적】 좌이부곡(坐伊部曲)ㆍ말곡향(末谷鄕) 모두 야로현에 있다. 박산소(樸山所) 군 동쪽 10리에 있다. 제시석(題詩石) 해인사 골을 속칭 홍류동이라 한다. 동구(洞口)에 무릉교(武陵橋)가 있고, 다리를 건너서 절을 향해 5ㆍ6리쯤 가면 최치원이 시를 쓴 돌이 있다. 그 시에, “첩첩한 돌 사이로 미친 듯 내뿜으며 겹겹한 산을 두드리니, 사람의 말소리는 지척 사이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항상 시비의 소리가 귀에 들릴까 두려워서, 일부러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모두 둘렀네.”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돌을 ‘치원대’라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맑은 시의 광채가 푸른 멧부리를 쏘는데, 먹 흔적은 닳아서 희미하다. 세상에선 다만 신선 되어 갔다 하나, 무덤이 공산(空山)에 있는 줄이 어찌 알리오.” 하였다.
반야사(般若寺) 가야산 밑에 있으나 폐사된 지 오래이다. 고려 추밀원지주사 김부일(金富佾)이 지은 원경화상(元景和尙)의 비문이 있다.
독서당(讀書堂)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는, “최치원이 가야산에 숨어 살았는데,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문을 나갔다. 갓과 신을 숲 속에 버려두고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치원이 간 그날이 오면 절의 중이 명복을 빌고 유상(遺像)은 독서당에 남겨 두었다.” 한다. 당터는 절 서쪽에 있다.
거덕사(擧德寺) 절터는 해인사 서쪽 5리에 있다.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釋順應傳)〉에, “그 서쪽 산 두 시냇물이 합치는 곳에 거덕사라는 절이 있는데, 옛 대가야국(大伽倻國) 태자 월광(月光)이 결연(結緣)한 곳이다.” 하였다.
미숭산성(美崇山城) 석축으로 된 옛 성이 있다. 둘레는 천 6백 43척이고 성 안에 못 하나와 우물 여섯이 있다. 갈점성(葛岾城) 석축으로 된 옛 성이 있다. 둘레는 2천 2백 39척이고 높이는 7척이다.
【명환】 신라 종정(宗貞) 태종왕(太宗王) 8년에 압독주(押督州)를 대야(大耶)에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宗貞)을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고려 임원후(任元厚) 인종조(仁宗朝)에 원이 되어 왔다. 전원균(田元均) 지군(知郡)으로 와서 청렴하여서 뇌물을 받지 않았으며, 백성을 불쌍히 여겨 어루만졌고, 간악한 아전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매우 위엄스러워서 간악한 것을 적발함이 귀신 같아 온 고을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옥사를 결정하는 데에는 더구나 자세히 심리하여서, 비록 회초리 맞은 자라도 원망하지 않고 모두, “전군(田君)이 판결한 것이다.” 하였다. 이조년(李兆年) 충렬왕조에 예빈시 내급사로서 나와서 지주(知州)가 되었다.
본조 권진(權軫) 일찍이 군수로 와서 아름다운 치적이 있었다.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권진이 오기 전에도 권진 같은 원이 없었고, 권진의 뒤에도 권진 같은 원이 없으리라.” 하였다. 조오(趙峿) 청백한 절조가 비교할 데가 없었다. 일찍이 군수로 있으면서 아들 사위와 노복들이 오갈 때에도 모두 개인 양식을 가지게 하였다. 또 군에 은어[銀口魚]가 생산되었는데, 여름에 비록 썩게 되어도 처자에게 맛보지 못하게 하였다. 조상치(曹尙治)ㆍ모순(牟恂) 모두 지군(知郡)이었다. 권득경(權得經)ㆍ정이우(鄭而虞) 모두 군수로 있었다. 유호인(兪好仁) 사헌부 장령으로 있다가,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봉양하기 위하여 나와서 군수로 있다가 죽었다.
【인물】 신라 죽죽(竹竹) 대야주 사람이다. 선덕왕 때에 사지(舍知)가 되어 본주 도독 김품석(金品釋)의 휘하에 보좌로 있었다.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주의 성을 공격하니, 품석이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죽죽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성문을 닫고 항거할 때 용석(龍石)이 죽죽에게, “지금 전쟁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항복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소.” 하니, 답하기를, “우리 아버님이 나를 죽죽이라 이름한 것은 추운 겨울이라도 시들지 아니하고, 꺾이기는 할지언정 굽히지는 못하게 한 것이다. 어찌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살기를 구하리오.” 하고 드디어 힘껏 싸웠으나 성이 함락하여 용석과 함께 죽었다. 임금이 듣고 애통하여 죽죽에게는 급찬(級飡)을, 용석에게는 대나마(大奈麻)를 추증하였다. 거인(巨仁) 진성여왕이 음탕하고 방자하여 꺼림이 없으니 기강이 무너졌다. 어떤 사람이 당시 정사를 비방하여 큰 길에다가 방을 걸었다. 임금이 명하여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대야주(大耶州)에 숨어 사는 거인의 짓이오.” 하였다. 임금이 거인을 체포하여 옥에다 가두고 장차 형을 시행하려 하니, 분하고 원망스러워서 옥 벽에다가, “우공(于公)이 통곡하니 3년 동안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퍼하니 5월에도 서리왔다. 지금 갇힌 시름도 역시 옛 사람 같은데, 황천은 말 없고 창창할 뿐이네.”라는 시를 썼다. 그날 밤에 갑자기 벼락을 치며 우박이 내리니 임금이 두려워하여 석방하였다.
고려 이순목(李淳牧) 고을 아전으로서 젊어서부터 글을 잘 지었다. 과거에 올라 금성관기(錦城管記)로 등용되었고, 조금 뒤에 첨사부 주부로 전임되었고, 여러 번 옮겨져서 보문각 대제에 이르렀으며, 판비서성사로 승진하였다.
『신증』 본조 방유령(方有寧) 과거에 올라서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이요(李瑤) 모친 상을 만나 3년 동안 시묘하였다.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하였고, 벼슬이 정헌대부에 이르렀다. 한충로(韓忠老) 부모 상을 만나 전후 6년 동안 시묘하였다. 조정에 알려져서 장사랑(將仕郞)으로 제수되었다.
【제영】 호산배달천중원(好山排闥千重遠)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아름다운 산은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듯 천겹이나 아득하고, 절벽은 강에 임해 몇 자나 높은가.” 하였다. 용문고처희초등(龍門高處喜初登)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오늘 강북(江北)에서 한 번 취하니, 용문 높은 곳에 처음 올라 기쁘다.” 하였다. 지벽촌용고(地僻村容古) 유사눌(柳思訥)의 시에, “땅이 궁벽지니 마을 모습이 옛되고, 시냇물이 맑으니 나무 그림자가 깊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 대나무[竹].
【성지】 미숭산고성(美崇山古城) 둘레가 1천 6백 43척이며, 우물이 여섯, 못이 하나이며 아주 험하다. 갈점고성(葛岾古城) 둘레가 2천 2백 39척이다. 갈귀성(葛歸城) 해인사(海仁寺) 동북쪽에 있는데 석축의 유지(遺址)가 있다. 갈마성(葛馬城)ㆍ구산성(傴山城)ㆍ벽계성(僻溪城)ㆍ천개성(天蓋城).
【누정】 호연정(浩然亭).
【누정】 상삼(上三) 북쪽으로 끝이 15리이다. 하삼(下三) 북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율진(栗津)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천곡(泉谷)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대월(大月)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이사역(伊士亦) 위와 같다. 양산(陽山)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조고개(助古介)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가의(加衣)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독토(禿土)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두상(頭上) 일명 두현(豆峴)이라고도 하는데,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거거산(居居山)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현동(縣東) 일명 동촌(東村)이라고도 하는데, 처음이 40리, 끝이 45리이다. 상북(上北)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하북(下北) 북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50리이다. 산곡(山谷) 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90리이다. 숭산(崇山)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관소(官所)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60리이다. 심묘(心妙)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 미곡향 좌이(坐伊) 부곡은 모두 야로(冶爐)에 있으며, 박산의 소재지는 동쪽으로 10리이다.
【진도】 남강진(南江津) 삼가(三嘉)로 통하는 대로이다.
【창고】 읍창ㆍ신창(新倉) 서북쪽으로 35리이다. 야창(冶倉) 야로의 고현에 있다. 북창(北倉) 북쪽으로 60리에 있다.
【사원】 이연서원(伊淵書院) 선조 병술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모두 문묘 편에 보라. ○ 화암서원(華巖書院) 효종이 계사년에 세우고 영조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박소(朴紹) 자는 언주(彦冑), 호는 야천(冶川), 반남(潘南) 사람이다. 벼슬은 사간이며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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