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어린 시절 삼촌이었던 조명희의 영향을 받고 자란, 조벽암은 시인, 소설가, 평론가로 활동하며 옥천의 정지용, 음성의 이무영, 충주의 이흡 등, 특히 충북 지역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역량을 키운다. 그가 카프에 몸담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중반부터이다.
그 후 해방이 되면서 그는 조선문학건설본부의 자매출판사인 '건설출판사'의 발행인으로서 조명희의 <낙동강>을 비롯한 작품을 발간하며 카프와 민족진영 문인들의 출판문화를 주도한다. 정지용과 구인회 활동을 함께했던, 그는 그동안 감추고 있던 아픔이라도 털어내듯, 1946년 5월 <정지용 시집> 복간본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시기에 정지용은 조벽암이 운영하는 건설출판사 2 층에 마련된 별도의 집필실에서 원고를 쓰는 날이면 아침마다 파지를 수북히 쏟아내곤 하였다. 이 사실은 <정지용시집> 복간본이 출간될 당시 조벽암의 출판사일을 도왔던 그의 동생 조중협(1918-2010)의 증언을 장남인 조성호 수필가가 전하는 내용이다, 건설출판사에는 서정주뿐만 아니라 여류작가 박화성, 오장환 시인 등도 드나들었다고 한다.
정지용은 해방과 더불어 휘문중학교를 사직하고 10월에 이화여전 교수로 전직한다. 다음 해인 1946년 5월에는 어머니 정미화를 잃은 슬픔을 달래며 <정지용시집>복간본을 내 놓는다. 그리고 8 월에 이화여전이 대학으로 승격했을 때도 교수 남아 있었으나 해임상태와 같았다. 그러다가 10월에 경향신문 주간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948년 2월 교수직을 정식으로 사임한다.
옥천의 김묘순작가는 정지용의 건설출판사에서의 집필기간을 1945년~1947년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정지용시집> 복간본의 판권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주목할 대목이 있다. 초판 발행일이 1934년 10월 7일인데, 이 시집은 시문학사에서 1935년 10월 7일에 발간한 <정지용 시집>과 판형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집마다 정지용 자신의 도장이 날인되어 있다.
이것은 정확하게 1년 전, 건설출판사에서 정지용 시집 초간본을 발간하였던 바, 어떤 불가피한 사정으로 발표되지 못하다가 다음 해, 같은 날짜에 똑같은 판형으로 시문학사에서 출간하였다는 유추를 가능하게 해주며 자용의 판권지 날인은 이 사실을 더욱 유효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1934년 10월 7일을 전 후하여 어떤 필화 사건들이 있었을까. 살펴보면 답을 얻어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정지용 시인의 <카페프란스>는 신경향파 성격을 띤 시로써 1924년 6월에 발표된 데뷔작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실상, 1924년 6월에 발표된 김기진의 <백수의 탄식>을 고스란히 연상시킨다, 즉, 카페 의자에 걸터앉아서, 흰 팔을 내보이며 떠들고 있는 러시아 청년에 대한 탄식을 식민지 청년의 무력감으로 환치시키고 있다 하겠다. 두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객관적 상관물은 백수(白手)이며 이는 계급주의자들의 공격대상인 셈이다. 이것은 정지용이 1925년 카프를 결성한 김기진과 박영희 등과 문학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생각과 터무니없지 않다.
제1차 검거 이후 대중적 지지기반을 잃고 있는 카프는 중앙 위원회 10인을 인선하면서 박영희와 김기진을 제외시킨다. 이때부터 정지용 시인도 카프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 같다.
1933년 12월 10일 박영희가 카프에서 탈퇴한다. 그리고 탈퇴원을 내면서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명언을 남긴다.
이후 카프는 뾰족한 운영 묘책을 찾지 못하다가 1934년 8월 카프 제2차 사건, 일명 “신건설사사건”이 터진다. 박영희, 김기진, 이기영 등 38명의 카프 문인이 체포되어 1년에서 3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1차 지하촌 사건에 이은 두 번째의 필화 사건이었다. 신건설사 연극단이 지방 공연에서 뿌린 선전 전단이 화근을 만들었다.
일제는 카프 맹원들의 목줄을 바짝 틀어 죄이기 시작하였다. 이미 전향 선언을 한 박영희는 재판 과정에서 전향 의사를 다시 확인받았다. 카프 조직은 “신건설사 사건”을 겪으면서 급속도로 길항력을 잃고 와해 되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카프에 직간접으로 관여되어 있던 발행인 조벽암은 “1934년 10월 7일” 자로 발행한 시집을 배포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권을 발간하였는지, 작가가 더 이상의 진행을 포기한 것인지. 기록이 없어 알 길은 없으나 카프의 필화 사건과 연루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카프는 결국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임화 등에 의해 해체가 결정됐다. 서기장 임화가 동대문서에 1935년 5월 20일 해산계를 제출하였다. 같은 해에 일제는 “사상법 보호 관찰법”을 제정한 후 카프 맹원들에게 사상전환을 집요하게 강요하였다. 일제가 황국신민화정책을 본격화하면서 모든 단체 활동을 금지되어 개인적인 창작활동으로 예술활동이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첫댓글 문학 공부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