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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 맛보기 )
2002년 2월 16일(토) 최성흠군이 가족과 함께 남도를 방문하여 남도지킴이 이상국(나)과 이재균이 그를 맞아 지리산자락까지 친히 방문하여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3가족이 함께 보낸 1박 2일을 회고해보며 지리산 자락 맛보기를 기록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엮은 "답사여행의 길잡이 6편 지리산자락"을 읽으면
"한반도의 남쪽에 우람한 자태로 기품 있게 자리 잡고 있는 지리산은 그 무한한 깊이와 측량할 길 없는 변화로 뭇 산악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지리산을 종주하는 등반이 한반도 등산에서 하이라이트라고 한다면 지리산 열두 폭 치맛자락에 서린 옛 자취를 찾아가는 것은 답사여행의 한 절정을 이룬다. 지리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시대의 영욕을 대대로 묻어온 역사의 산으로, 그리고 이룰 수 없는 그 무엇의 마지막 귀의처였던 회한(悔恨)의 산으로 우리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 있듯이 지리산 자락의 옛 자취의 답사는 한민족 혼에 대한 답사이며, 역사의 숨결을 찾는 길이며, 그 누군가에 대한 사랑과 사죄를 드리는 벅찬 가슴의 여행길이다."라고 하였다.
이번 최성흠군의 방문은 비록 눈과 귀로 흝어내린 것이었다 하더라도 지리산 자락의 답사일정 중 곡성, 구례에서 하동에 이르는 지리산 남쪽자락과 지리산의 서쪽 산등성이를 타고 넘으면서 노고단의 성삼재휴게소나 시암재휴게소에서 지리산의 정기를 느껴보았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순천에서 출발하여 약 40여분만에 산동면에 위치한 지리산온천에 도착
이재균은 여수에서 약 1시간 30분만에 도착
최성흠은 아산에서 대전, 전주, 남원을 거쳐 약 4시간여만에 도착하였는데 오는 국도에 카메라가 많았고 속도제한이 50에서 80까지 다양하였다고 함.
송원리조트에서 1박하고 차로 노고단에 오를 수 있는 성삼재로 갔다. 노고단까지는 춥고 안개가 많이 끼어서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왔고, 천은사를 지나 화엄사 입구를 거쳐 하동으로 향하였다. 구레에서 하동가지 섬진강을 곁에 끼고 달리는 국도와 전라선 기찻길은 강 건너 마을을 두고 산자락에서 달리기 때문에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섬진강은 전설 속의 강처럼 곱고 아름다워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의 하나이다. 구례의 운조루와 매천사당을 우로 두고 지나가고, 집채만한 냇돌과 계단식 논이 있는 피아골과 연곡사를 거쳐, 구례를 벗어나 하동으로 넘어가면서 화개장터 지나 쌍계사로 들어가 파전을 먹고 소설[토지]의 무대로 설정된 하동군 평사리 입구를 지났고, 배꽃만발한 마을을 지나 강 건너 언덕 위의 홍쌍리아줌마의 매실로 유명한 청매실농원을 바라보노라면 어느덧 10리 벚꽃 길의 대미인 하동백사장이 나오고 하동다리를 지나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가게 된다.
천은사는 거대한 지리산에 안온하게 들어앉아 있는 조용한 절이다. 연곡사가 자리한 피아골은 구한말에는 의병의 본거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빨치산의 아지트로서 파란 많은 역사의 현장이었다. 연곡사에 남아있는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을 갖춘 부도 여러 점은 그래서 더욱더 귀하게 느껴진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인 운조루가 있는 구례 토지면은 예로부터 이상향으로 여겨져 온 명당이다. 비좁은 계단식 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피아골 사람들, 지리산 중에서도 가장 오지라는 심원마을에 사는 산골사람들, 섬진강에서 은어와 재첩을 잡아올 리는 사람들,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드는 화개장터 사람들, [토지]라는 소설 속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땅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평사리 사람들에게서 자연에 기대어 사는 건강함을 배울 수 있는 것도 곡성, 구례와 하동 답사의 큰 매력이라고 한다.
최근 드라마에 나왔던 인물을 소개하기 위하여 곡성 서부에서 흘러온 보성강 물줄기 '압록'에서 구례 쪽으로 빠져나가는 섬진강 본류를 뒤로하고 보성강 물줄기를 따라 난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안사(泰安寺)가 나오는데 태안사 들목에 서 있는 '장절공 태사 신선생 영적비(壯節公 太師 申先生 靈蹟碑)의 신선생은 신숭겸(申崇謙)을 말하며, 그는 곡성 출신으로 왕건을 도와 고려의 건국에 큰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장절은 태조가 내린 시호이다.
** 지리산온천을 나와 구례방향으로 10여km를 가면 성삼재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지리산관광도로와 老姑壇』- 천은사 입구에서 시암재를 지나 성삼재
(1,090m), 심원, 달궁으로 이어지는 총 36.7km의 지리산관광도로를 타고 달리면 지리산의 진면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구불구불 도로는 대관령에 버금가고 시암재나 성삼재 휴게소에 올라 웅장한 지리산괴를 한눈에 조망할 수도 있다. 만복대에서 피어오르는 운해나 맑은 날 지리산 아랫자락에 펼쳐지는 구례땅 또는 남원 땅을 바라보는 전망이 장관이다.
성삼재에서 '노고운해'(노고단에서 내려다보는 구름바다)라 하여 지리산팔경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노고단(1,570m)으로 걸어서 갈 수도 있는데, 노고단주차장까지만 차량통행이 가능하여 노고단까지는 1시간정도 걸어가야 한다.
노고단은 신라 때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이라 여겨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老姑)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神壇)이 있었다 하여 노고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관광도로로 인해 누구나 지리산을 쉽게 만나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지만. 그것이 생태계와 자연환경 파괴라는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편리함임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 지리산관광도로를 내려오면 매표소 못미처 왼쪽으로 천은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이 있다..
『泉隱寺』 - 천은사는 아직도 호젓하고 청아하다. 근래 절 앞에 큰 저수지가 들어서고 일주문 앞에 널찍한 주차시설이 자리잡아 조용한 산사의 아름다움을 흐려놓기는 했어도 경내에 가진 미치지 않았다. 천은사는 828년 인도 승려인 덕운선사가 감로사(甘露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었다. 경내에 이슬처럼 말고 차가운 샘물이 있어 감로사라 했는데, 이 물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도 맑아진다고 하여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천명이 넘는 스님이 지내기도 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에는 '南方 第一 禪刹'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천은사(泉隱寺)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을 바꾼 뒤부터 원인 모를 화재가 잦고,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사람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가 절에 수기를 불어놓기 위해 '智異山 泉隱寺'라는 글씨를 물 흐르듯 한 채로 써서 일주문의 현판으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 고요한 시간에는 일주문 현판 글씨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고 한다.
** 천은사를 나와 구례방향으로 달리다보면 화엄사로 오르는 가는 길이 보인다. 왼쪽으로
『華嚴寺』- 천은사와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대찰 화엄사는 노고단으로 오르는 지름길이 나 잇는 초입이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승려였던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선교 양종 대가람의 지위를 얻은 대찰로 동오층석탑, 서오층석탑, 대웅전, 각황전,원통전, 사자탑, 사사자삼층석탑이 유명하다.
** 구례를 나와 하동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아늑한 산자락에 고가옥들이 보인다.
『운조루』- 구례구에서 경남 하동포구로 흘러가는 섬진강을 따라 난 19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보면 토지면이 나오는데 土指면은 금가락지를 토해냈다는 뜻으로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명당으로 우리나라 3대 명당 터의 하나라고 한다. 1776년 유이주가 승평군(전라도 순천)에서 낙안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바위가 험하여 집을 지을 엄두도 못 내던 땅에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해 집터를 닦아 운 조루를 지었다고 한다. 1,000평의 대지에 건평이 100평이 넘는 보기 드문 이 집은 구성이 뛰어나며 지리산의 좋은 나무 중에서 엄선하여 지은 집답게 쪽마루도 통나무이고 딛고 올라서는 포석조차도 통나무로 하였다.
** 구례에서 10여km 섬진강을 오른쪽에 두고 강변도로를 달리다보면 왼쪽으로 연곡사/피아골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연곡사로 오르는 계곡한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발을 담그면 신선이 부럽지 않다. 그러나 휴가철에는 사람들의 행렬로 계곡마다 몸살이고 좁은 길은 주차장으로 변한다.
『연곡사( 谷寺)』-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절로 알려진 연곡사는 현대사의 질곡을 간직한 사연 많은 피아골이 시작되는 직전리 조금 못미처 자리잡고 있다. 연곡천을 오르다보면 좁은 산비탈을 억척스럽게 일궈 만든 계단 논을 볼 수 있는데 계단 논은 평지를 놔두고 이 깊은 지리산 속에까지 들어와 살아야 했던 고달픈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살고자했던 인간의 모습들을 느끼게 해준다.
피아골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에 이들을 토벌하려는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피아골의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에 붙여진 것이라는 말이 있으며, 당시 죽은 이들의 넋이 나무에 스며들어 피아골 단풍은 여느 단풍보다 유난스레 붉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피아골은 옛날 이곳에서 오곡의 하나인 식용 피(稷)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 하였다가 바뀐 이름이며, 피아골 입구의 직전리(稷田里)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연곡사에는 동부도 동부도비, 북부도, 서부도, 현각선사 부도비, 삼층석탑이 있다.
** 연곡사로 오르는 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카오로우취가 있고 각종 운동장과 휴게시설이 있고, 거기를 지나자말자 왼쪽으로 악양면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토지의 무대 악양면 평사리』-구례에서 화개에 이르기 전에 악양면이 있는데 고소산성이 있고, 고소산성 아래로 보이는 악양면 평사리 마을은 박경리의 대하 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하다. 그러나 작가는 정작 평사리에 들어가 본 적은 없고 다만 스쳐지나가면서 평사리를 감싸안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지닌 역사적 자취, 경상도 땅에서 좀체 찾아보기 힘든 넓은 들녘이 구상 중인 소설의 배경으로 어울려보였고, 동네사람들에게 큰 부잣집이 인근에 있는데 역병으로 가솔들을 잃어 넓은 들판에 곡식을 추수하지도 못한 채 내버려두었다는 얘기를 듣고 작품 구상에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최근에 최참판댁 고가를 재현하여 관광지로 유명하고, 악양면 어귀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비도 있으나 아는 이가 별로 없다. 이순신 장군은 왜란당시 전라좌수사(여수)였으며 여수에 장군과 관련된 유적이 많으나 후에 소개키로 한다.
『하동포구 팔십리』- 경남의 남서부에 자리잡은 하동은 서쪽으로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남의 구례, 광양과 이웃해 있다. 백제의 땅이었으나 삼국통일이후 하동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하동군과 구례군이 만나는 화개면에 이르면서 강폭이 넓어져 제법 강다운 모습을 보이며 하동의 서쪽 경계를 이루기에 이름도 섬진강의 동쪽에 붙은 땅 곧, 하동이 되었다. 화개에 이른 섬진강은 하동솜림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 광양과 하동사이을 지나 바다에 이르러, 여수와 남해를 사이에 두고 큰 항만을 이룬다.
『화개장터』- 화개면 탑리는 지리산 산간마을을 잇는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물산을 교환하고 지리산의 생산물이 모이는 큰 장, '화개장'이 열렸지만 예전의 흥청거림은 흔적도 없고 지금의 화개장터는 채 50m도 못 되는 거리에 40-50평 넓이의 작은 시골 장터이다. 1700년대 중반 번성기 때에는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들이 또한 구롓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장수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잔반고등어 들이 들어오곤 하여 산협치고는 꽤 풍성한 장이 섰다고 한다. 최근에 하동군에서 크게 장터를 복원하였으나 민속촌의 시장모습 마냥 인위적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