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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시조는 어떻게 써야 할까
/ 劉 準 浩
Ⅰ. 장형시조(長型時調)의 출현(出現)
시조(時調)는 그 연원(淵源)을 멀리는 신라 향가에 뿌리를 두고, 고려속요의 문학적 향기를 이어 고려 말에 출현한 문학 장르로 어느 다른 문학 형태보다 오랫동안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하며 성장 발달해온 우리 민족 고유의 숨결이다. 그런 시조가 위기에 봉착한 것은 영∙정조 이후이다. 조선조 6세기 동안 이 땅을 지배했던 주자학이 영∙정조에 이르러 인습의 화근으로 전락하면서 이에 대체될 사상(思想)이 필요했는데, 이 때 나타난 것이 실학사상(實學思想)이다. 이 사상적 추이(推移)가 문학에도 미쳐 운문(韻文)전성(全盛)에서 산문문학의 터를 닦게 되었다. 이에 시조문학도 심각한 반성의 압력을 받아 유교(儒敎) 이념의 질곡(桎梏)에서 숨을 돌려 인간성 회복의 삶을 부르짖게 되었는데, 이 흐름으로 새로이 나타난 것이 장형시조(長型時調)이다. 형식면에서는 삼장체(三章體)의 특성을 살리며 초, 종장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범위에서 낡은 허울을 깨뜨리고, 내용면에서는 영탄(詠歎), 서경(敍景)의 경지를 벗어나 폭로적(暴露的) 묘사(描寫)와 상징적(象徵的) 암유(暗喩)로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게 되었다.(박을수, 한국시조문학전사, 성문각, 1978 pp104∼105 요약)
원래 사설시조(辭說時調) 즉, 장형시조(長型時調)는 창(唱)에서 유래한 말이다. 창(唱)에서는 이를 만횡청(蔓橫淸)이라고 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만횡(蔓橫)의 내용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보면 ⌜蔓橫 俗稱 旕弄 興三數大葉同頭而爲弄也⌟라 하였으니, 엇농(旕弄) 즉 “질러내어 흥청거리는 창조”이며, “세 수의 큰 가락으로 희롱조로 흥취를 돋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쩠든 이 때의 장형시조(長型時調)는 형식면에서 길이가 길어졌고, 가사투(歌辭套), 민요풍(民謠風)대화(對話) 등이 삽입되고 내용면에서는 구체성 있는 이야기, 비유(譬喩)의 도입과 인간본심의 적극적 표현이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표현되었다.
Ⅱ. 장형시조(長型時調)의 본질(本質)
시조가 다른 문학 장르와 구별되어 ‘시조(時調)’란 이름으로 분류되는 공분모적(公分母的) 요소, 즉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곰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일차적 본질은 ‘삼장(三章) 구조(構造)’라는 점이다. 시조에서의 장(章)은 음악적(音樂的) 분절(分節) 단위이면서 동시에 의미적(意味的) 분절(分節) 단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조를 가창할 때는 시조를 5장으로 잘게 나눠 부르고 있음으로 3장 구성이란 말은 음악적 구조 단위라기보다는 3단위 의미구조 단위라 보아 문학적 측면에 그 무게를 두어야 한다. 어떤 작품이 시조란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게 되려면 연(聯)의 수(數)에 관계없이 세 단위의 의미 분절성을 이루고 그게 통합되어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형성하는 시적 구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시조의 전통 골격(骨格)이다. 이 삼장(三章) 구조(構造)에 대하여 백수(白水) 정 완영은 “옛날 밤을 새워가면서 잣던 할머니의 물레질, 한 번 뽑고(초장), 두 번 뽑고(중장), 세 번째는 어깨너머로 휘끈 실을 뽑아 넘겨 두루룩 꼬투리에 힘껏 감아주던(종장)것,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초․중․종장의 3장으로 된 우리 시조의 내재율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장형시조가 현대 자유시나 산문시와 구분되는 제1의 조건이라고 본다. 다음 두 번째 본질은 ‘단형시조와 형태상뿐 아니라 제재의 시적 형상화 방법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소재가 단형시조에 비하여 더 일상화되고 속됨을 보여주고 있다. 단형시조에서 속에 숨어 있던 비속한 소재가 표면으로 부각(浮刻)되어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 볼 때 장형시조는 단형시조의 서정 영역 확대(擴大) 및 전성(轉成)이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장형시조가 보여주는 본질적 특성으로는 단형시조가 대상의 단면을 포착하여 폐쇄적 구조 속에 담아내는 완결성 장르인 반면 이 장형시조는 ‘개방적(開放的) 구조(構造)’로 양식은 서정적 양식이지만 서정성만 고집하지 않고 주변 상황에 대한 서사적 양식, 극 양식, 교술 양식을 두루 수용하는 개방성을 보여주는 장르적 지향성과 단형시조의 우아미(優雅美), 숭고미(崇高美)에 이 장형시조는 골계미(滑稽美)까지도 수용하는 미적(美的) 기반(基盤)을 보여 준다. 또한 단형시조가 배타적 자기 세계적 경향이 강하다면 이 장형시조는 타자와의 열린 시선으로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적극적인 시양식이다. 즉 이질 요소에 대한 열린 구조이다. 그러나 이 이질 구조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 미적 구조를 창출한다. 마지막으로 장형시조의 본질적 특성은 ‘산문적 경향’ 이다. 여기서 산문성이라 하니까 리듬감을 상실하고 표현의 이완성(弛緩性)을 보여주는 것으로 오해하지 쉽지만 그것은 아니다. 여기에도 좀 약하지만 이미지가 제시되고, 암시(暗示)와 응축(凝縮)이 있다. 다만 이런 문학적 요소들을 하나의 이야기성으로 사슬 엮듯 이행(移行) 연장해 간다는 뜻이다. 장형시조(長型時調)는 평시조로 풀어내지 못할 능청과 해학, 그리고 애환(哀歡)어린 역사의식 등을 표현하는 시조의 한 틀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를 오해하고 어떤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마련된 마당이 인 줄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비문학적이기에 민족시가인 시조로나 문학으로나 불행한 일이다. 엄밀한 의미로 이는 시도 시조도 아니다. 문학 작품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장형시조(長型時調)는 시조가 추구하는 ‘이완(弛緩)과 역음의 미학(美學)’을 가장 절정에서 보여주는 미학적(美學的) 특성을 구현(具現)하는 양식<김학성, 한국시가의 담론과 미학, 보고사, 2004, P171>으로, 맺고 푸는 시가 형식이다. 그러기에 이 장형시조는 맺고, 옹이를 지우고, 풀되 굽이치는 여울을 둔다. <윤금초, 현대시조 쓰기, 새문사, 2003, p161> 장형시조(長型時調)는 생래적(生來的)으로 서민의 삶의 애환과 사회비판적 목소리를 담는 민중적 문학양식이고, 정제된 사설조로 삶의 애환을 풀어내야 한다. 이것이 시조 형식의 변주(變奏)이다. 그리고 그 율격은 (단형시조에서 보였던) 율격 규칙의 자동화로부터 탈피된 상태이다. 즉, 불규칙의 리듬에서 활력적이면서도 개성적인 리듬감을 느끼게 되고, 이 불규칙 다음에 오는 규칙의 엄수는 그것대로 새로운 생명감을 가진 리듬으로 재출발한다. 시조가 3장이라는 것은 의미 매듭이 세 개라는 뜻이다. [임종찬, 장시조의 문예학적 연구, 부산대 박사학위논문1983, 8. pp29-30] 그러므로 장형시조도 이의 예외가 아니며, 무엇보다도 풍자성(諷刺性)과 해학성(諧謔性), 우의성寓意性), 희화화(戱畵化) 등이 리듬감 있는 가락으로 형상화되어 있어야 한다.
Ⅲ. 장형시조의 시적 장치와 미의식
1. 시적(詩的) 장치(裝置)
현대시에서의 시적 장치만큼 다양성을 띠지는 않지만 장형시조(長型時調)는 그만의 독특한 시적 장치가 있다. 풍자적 알레고리(Allegory-寓意, 諷喩), 아이러니(irony-역설, 반어적 수법), 패러디(parody) 등이 사용되고 있는 점이다.
먼저 풍자적 알레고리에서 알레고리(Allegory)는 본뜻을 감추고 표현되는 내용을 추리하게 하는 문장 수사법이다. 행위자의 행위, 배경을 축어 적으로, 또는 1차적 의미 수준으로 그럴 듯하게 표현하고, 이들 사건이 서로 연결되는 2차적 의미 수준에서도 모종의 의미를 갖도록 꾸며내는 서술 체계이다. 즉, 가공의 껍데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알레고리로 이 껍데기가 벗겨질 때 표현자의 의도가 나타난다. 알레고리를 보이고 있는 것들은 우화(寓話), 비유담(比喩談), 예화(例話)들의 특수한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풍자(Satire)는 라틴어 satura(포만, 잡다함)에서 유래한 말로 현실의 부정적 현상이나 모순을 신랄한 어조나 비난 등으로 우스꽝스럽게 하거나 즐겁게, 때론 분노, 모욕, 멸시로 문학적 기교를 부려 웃음을 자아내게 하여 그를 무기로 빗대어 작품 밖의 대상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大川바다 한 가온대 中針細針 빠지거다
열나믄 沙工놈이 긋므딘 사엇대를 긋긋치 두러메여 一時에 소릐치고 귓거여 내닷 말이 이셔이다.
님아님아 온 놈이 온 말을 하여도 님이 짐쟉하쇼서.
<未詳>
이 작품에서 중장은 ‘열나믄∼내닷 말이 이셔이다.’는 타인의 말로 예화(例話), 속언(俗言)을 예시하는 알레고리로 보여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이면 주제인 임을 일깨움이 나타나게 하고 있다.
님의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가 이중 의미구조로 표출된 것이다. 대천바다-넓고 넓은 큰 바다- 한가운데 빠진 가는 바늘, 중간 바늘을 무딘 삿대로 꺼냈다는 허황된 말에 누구도 현혹되지 않을 것은 뻔하지만 이를 굳이 내세워 강조하는 것이 이 작품의 기교이다. 겉으로는 공손한 어조로 님에게 진언하는 점잖은 어투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즉 이면적으로는 ‘님’이 그런 말도 안 되는 허황된 말에도 넘어가는 어리석은 존재임을 비웃는 태도가 숨어 있다. 이와 비슷한 유형으로 동물을 통하여 풍자적 알레고리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는데 여기서도 표현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개아미 불개야미 잔등 부러진 불개야미 압발에 정종(疔腫)나고 뒷발에 죵 귀난 불개야미
광릉 쉼재 너머 드러 가람의 허리를 가르 무러 추혀 들고 북해를 건너닷 말이 이셔이다 님아 님아
온 놈이 온 말을 하여도 님이 짐쟉하쇼서.
<未詳>
표층적(表層的) 언어 의미와 심층적(深層的) 언어 의미가 이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관념보다는 보조관념의 언어만 표출된 강한 비유로 되어 있는 작품이다.
표층적(表層的)으로는 개미가 잔등이 부러지고 앞, 뒷발에 종기가 나 있어 걸을 수 없는 불개미인데 범의 허리를 물어 치켜들고 북해를 건넜다는 말이 있으나 님이 잘 짐작하라고 하고 있지만, 이면적(裏面的) 즉, 심층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있을 수도 없는 그런 허황된 말에 님이 쏠려 있거나 믿고 있다는 전제 밑에 그런 것도 분별(分別) 못하는 님을 비웃고 있다. 과장과 풍자가 하나의 알레고리로 나타나고 있는 작품이다. 현대시조 중 이런 유형(類型)을 보여주는 장형시조(長型時調)로 다음과 같은 작품이 있다.
강원도 어성전 옹장이
김 영감 장롓날
상제도 복인도 없었는데요 30년 전에 죽은 그의 부인 머리 풀고 상여 잡고 곡하기를 보이소 보이소 불길 같은 노염이라도 날 주고 가소 날 주고 가소 했다는데요 죽은 김 영감 답하기를 “내 노염은 옹기로 옹기로 다 만들었다 다 만들었다”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요
사실은
그날 상두꾼들
소리였대요.
<조오현의 ‘무설설(無設設)1’>
이 시조에서 종장 처리에 한 음보가 없어서 구성상 흠결을 보이지만 이를 제외한다면 장형시조의 격은 갖추고 있다. 옹장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우화적(寓話的)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시조의 파격을 보인 중장에 상상의 대화를 넣어 김 영감의 불길 같은 노염과 옹기 가마의 실제 불길을 상응(相應)시켜 상호 전화(轉化)과정을 상두꾼 소리를 통하여 대비(對比)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실과 허구의 상상적 통합으로 고달픈 서민의 삶을 은연중에 우화적 풍자의 알레고리가 있다. 이렇게 풍자적 어조가 알레고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형(사설)시조의 한 양태(樣態)이다. 비꼼, 조롱, 냉소적 형태가 내재된 작품으로. 동물의 속성을 인간화(人間化)하여 사회의 모순과 갈등, 불합리를 열거법(列擧法)과 우의법(寓意法)을 동원하여 그 효과의 폭을 넓히고 있는 작품도 있다. 장형시조(長型時調)는 그림으로 치면 민화(民畵)이다. 세련미는 없지만 리듬이 경쾌하고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며 구성져 서민들의 고단한 삶의 탈출구로 카타르시스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 이 둘은 공통점이 있다. 민화(民畵)가 대비와 조화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흥(感興)을 불러일으키듯 장형시조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특히 민화(民畵)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호작도(虎鵲圖-호랑이와 까치)의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호랑이와 소나무 위에 앉아 이를 조롱하는 듯한 까치는 무능 부패한 관리(호랑이)와 백성(까치)을 희화화(戱畵化)하여 비꼬고 조롱하는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 점에서도 다음 장형시조와는 닮은꼴이다.
둑거비 뎌둑거비 한눈멀고 다리져 져둑거비
한나래 업슨 파리를 물고 날랜쳬 하야 두험 싸흔 우흘 속꼬다가 발딱 나뒤쳐/ 지고거나
모쳐로 몸이 날낼셰망정 衆人險視에 남 우릴번 하거다.
<未詳>
두꺼비의 위선적 모습과 언행은 지배층 관리나 도덕군자연(道德君子然)하는 양반네의 행위로 치환(置換)되어 희화화(戱畵化)되고 있다. 육체적으로도 온전하지 못한 병신인 주제에 못난 짓, 못난 생각까지 하며 우쭐대는 꼴사나운 두꺼비의 언행과 되먹지 못한 관료의 언행이 병치(倂置)된 이중구조(二重構造)로 짜였으며, 비꼼과 야유가 우화적(寓話的) 알레고리로 표출되어 있다.
다음 장형시조(長型時調)의 시적 장치로 아이러니(irony)를 보이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 아이러니는 풍자를 위한 교묘한 수법으로 자리 잡은 하나의 표현 틀로 두 가지 가치평가와 만나게 된다. 역설적(逆說的) 수사법, 반어적(反語的) 수사법으로 긍‧부정의 야유적(揶楡的)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예정하고 표현하는 역설논리(逆說論理)의 표현기법이 사용된 경우도 있다.
이 몸에 가진 病이 한두 가지 아니로되
보아도 못보난 눈 드러도 못듯난 귀 마타도 못맛난 코 말 못하난 입이로다
잇다감 腰痛과 腹痛이며 眩氣 면氣 痰帶症)은 別症인가 하노라
<金 敏淳>
중장 ‘보아도∼못하난 입’ 등에 아이러니적 요소가 있다. 즉 상반된 상황에 의한 부조화와 모순된 의미 상황에서 독자는 작중인물보다 우월한 입장을 가질 수 있으므로 아이러니적 성향 표출을 할 수 있다. 역설적, 배반적 모순어법의 말을 열거법(列擧法)으로 반복(反復)함으로써 조소적(嘲笑的) 아이러닉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노새노새 매양쟝식 노새 낫도놀고 밤도노새
壁上의 그린 黃鶴 수닭이 뒤나래 탁탁치며 진 목을 드리워셔 홰홰쳐 우도록 노새 그려
人生이 아츰 이슬이라 아니 놀고 어이리
<未詳>
인생은 아침 이슬처럼 허무하니 실컷 놀기나 하자는 내용이다. 벽에 그린 황학 수놈이 뒷날개 치며 울도록 놀자고 하고 있다. 그림 속의 동물이 실제 동물로 살아나 날개 치며 운다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가 가능한 것처럼 역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공감적(共感的) 시선(視線)을 유도한 상황(狀況) 아이러니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장형시조의 또 하나의 특이하게 사용되는 어휘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의성어와 의태어 사용을 통한 표현의 발랄성이다.
마지막장형시조(長型時調)의 시적 장치로 등장하는 패러디(parody)를 통한 표현이다. 패러디(parody)는 서툴고 익살맞은 흉내 내기 표현으로 연상되는 텍스트를 대비, 대치, 적용하여 표현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다. 또한 이 패러디(parody)는 다른 작품을 배경으로 이동하면서 그것을 폭로(暴露)한다. 장형시조에서의 패러디(parody)의 요소는 평시조와 관련성을 가진 것이 대부분이며, 그 외 민요, 속요, 고사, 속담, 경구 등이다. 패러디는 형식보다는 말 모방이 중점을 이룬다.
가마귀를 뉘라 물드러 검다 하며
백노를 뉘라 마젼하야 희다하랴
황새다리를 뉘라 니워기다 하며
오리다리를 뉘라 분질러잘으다 하랴
아마도 검고 희고 길고 잘으고
흑백장단이야 일어 무삼
<未詳>
이 작품은“가마귀 거므나다나 해오리 희나다나/ 황새다리 기나다나 올히다리 져르나다나/ 세상에/ 흑백장단(黑白長短)은/ 나는 몰라/ 하노라.// 하는 평시조를 모방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시적 분위기나 시적 화자의 어조는 상당히 차이를 보이고 있다. 평시조가 담담한 진술에 의한 시적 화자의 주관적 감정의 토로(吐露)라면 장형시조는 이에 몇 마디 어휘를 첨가하여 골계, 해학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즉, 까마귀의 검음(黑)을 누가 물감으로 물 들려서 그렇다고 하며, 백로의 흼(白)을 누가 마전하여(빨아서) 그렇다고 하느냐, 황새 다리는 이어서 길고 오리다리는 분질러서 짧은가 하는 질문에 골계(滑稽)와 해학(諧謔)이 나타나 있다.
2. 미의식(美意識)
과거 고시조 때에도 그랬지만 현대시조에 와서도 평시조가 우아(優雅)한 기품(氣稟)과 균형(均衡)을 중히 여기는데 반하여 장형(사설)시조는 거칠고 활기찬 역동적(力動的)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장형시조를 지배하는 원리는 웃음의 미학(美學)이다. 현실 모순에 대한 풍자, 해학 등을 주 내용으로 삼고 있다. 장형시조(長型時調)는 형식면에서는 ①사설조로 길어지고, ②가사투, 민요풍이 혼입(混入)하며, ③대화가 많이 쓰이고, ④새로운 종장 문구(文句)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내용면에서는 ①구체적, 서민적인 소재와 비유가 도입되고, ②강렬한 애정과 육욕(肉慾)이 표현되며, ③어희(語戱), 재담(才談), 욕설이 삽입되고, ④거리낌 없는 자기 폭로, 사회 비판 등이 다루어졌다. 또한 작자층과 향유 계층의 평시조에서 추구하던 우아미와 숭고미 대신에 골계미(滑稽美)를 추구하게끔 하였으며 정서의 부조화(不調和), 표현의 사실성(事實性) 등 장형시조 특유의 기법이 작품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장형시조에 나타난 내용면에서의 뚜렷한 특징은 비판성(批判性), 해학성(諧謔性), 본능(本能) 발현성(發現性), 유락성(遊樂性)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는 서민적 특성으로 인하여 생긴 것으로 보인다.
비판성(批判性)이 표출된 작품의 특징은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고부(姑婦)간(間)의 갈등(葛藤)에서부터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부패상에 이르기까지 현실에 대한 비판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장형(사설)시조에 이러한 특성이 내재하는 데는 형식의 완화와 작가 층이 주로 서민층이라는 데에서 들 수 있다. 이런 장형시조(長型時調)의 미학적 특질과 형식을 모두 다 인식하고 그것을 현대 장형(사설)시조의 창작 지표로 삼아 모범적으로 작품을 쓴 이를 찾아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그 일면 또는 몇 면을 보여주는 현대시조 작품을 쓰고 있는 이들은 없지 않다. 장형(사설)시조의 형식과 미학적 특질에 대하여 홍성란은 ‘풍골 그리고 문자향’(시조월드 2006 봄호 p66을 약간 첨삭함)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 통사의미론적 연결고리를 이루는 3개의 장(초∙중∙종장)으로 하나의 시상을 완결하며, ② 각 장은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구로 형성되며 각 장은 2음보 연속격으로 엮어 짜는 길이의 융통성을 갖는다. ③ 시상의 전환과 완결을 위해 종장의 첫 음보는 3음절로 고정시키고 둘째 음보는 5음절 이상으로 늘여 변화를 준다. 장형시조는 평시조의 형식적 정체성을 이어받아 초 중 종장의 3장으로 구성한다. (사설시조의 정형성) 단 평시조가 각장 4개의 음보로 이루어지는 반면 사설시조는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로 이루어진다.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가 연속체로 이루어지고 그 길이는 상당수 늘어날 수 있다. (사설시조의 비정형성) 그러나 장형(사설)시조는 아무리 말이 많아도 대개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로 구성 된다.(물론 현대 장형시조 가운데는 예외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 위에서 지적한 장형시조의 여러 면을 고려하여 현대시조(現代時調) 작품 가운데에서 이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영변 약산 동대/소월의 진달래꽃
핵 공장 차리면서 뿌리째 밀어붙인 꽃 이삭 긁어모아 팔도 도붓장수로 떠난다. 경의선 남행열차 철로변 곳곳이 열어놓은 간이역, 본역 설적마다 나눠주고 서울역 닿기 무섭게 도매금에 싸구려로 반 남아 떠넘기고 갈아 탄 순환열차 멈춰서는 지경 지경 소매로 갈라주고 천릿길 귀 떨어진 진주역에 닿을 쯤이면 서산에 걸려 떨던 해는 까무라치고 짓뭉개져 볼꼴 없는 찌꺼기를 석새베 씨도 안 드는 소리 한참 주워다 섬겨 떠리미로 받아 왔다 석삼년 내리 든 흉년 넘긴 쑥 범벅 보리개떡 열 두 폭 화선지에 덕지덕지 떡칠을 해댔으니
밤새운 시조 한 구절 거들떠볼 이도 없다.
<박재두의 ‘봇짐장수’>
위 작품을 보면 초장과 종장은 평시조의 율격을 따르고 있으며, 중장은 ‘핵 공장∼떠난다.’ ‘경의선∼갈라주고’ '천릿길∼왔다.’ ‘석삼년∼해댔으니’의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난에 쪼들린 민중의 삶의 애환을 사설조의 리듬을 살려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도 장시조 고유의 기법이랄 수 있는 희롱(戱弄)의 살수(殺手)기법이 쓰이고 있다. 핵 공장으로 상징되어 표현한 현대화, 산업화로 말미암아 삶의 터전을 상실하고 떠르미(떨이)로 살아가는 민초(民草)의 애환이 담긴 작품이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외장적(外裝的) 수사(修辭)로 민중 정서가 질식할 뻔한 것을 풍자(諷刺)와 냉소(冷笑) 어린 평민 언어로 되살려 놓은 그 시적 수사가 여기에도 살아나 있다. 서민들의 걸쭉한 입심이 인간적인 진한 사설 미학으로 그 묘미를 터뜨리고 있다. 그것은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다.
풀무잡이 3년 망치잡이 3년 집게잡이 3년은 해야 대장간 강아지만큼 눈치가 생긴다는디 내사 눈을 감아도 절로 손이 움직이니 어깐? 망치밥 묵은 지 햇수로 하마 마흔 해가 넘었응께 그럴 법도 하지 안?
제대 이듬 해 봄에 무작정 상경해서 그냥 굴러다니는 쇠붙이들을 긁어 모아설랑 풀무질을 했지 일할 때믄 몰골이 좀 거시기해서 글치 맹글어 논 물건이 어디 썩기를 하나 유행을 타나 할만은 하지 뭐
거 뭐냐 로케트 맹그는 사람이나 나나 쇠 만지기는 매 한가지여
<박기섭의 ‘엮음 수심가 김예섭’>
이 작품은 모든 장을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로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표현기법에서 회화체 방언을 부연하여 해학적인 분위기를 경락에 대침 놓듯 행간에 꽂아놓고 있다. 특히 유장한 언어 기법과 종장의 시침떼기 기법이 이 시조의 묘미를 더해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얼핏 보면 자유분방한 것 같지만 정제된 형식미를 잘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칫 이런 장형시조는 자유시와 혼동될 염려가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지만, 시조로서의 음보와 장 배열이 잘 갖추어진 작품으로 이 장시조도 정형시의 한 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조의 장(章)은 자유시의 행(line)와 다르다. 시조는 크게 3개의 의미 단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완결되는 시 형태이다.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들엔들 귀 없으랴 천년을 우는 파도 소리, 소리……어질머리로다. 어질머리로다 내 잠머리 밑의 물살을 뉘 보낼 것이냐
천년을 유수라 한들 동해 가득히 풀어놓은 내 꿈은 阡의 용의 비늘로 떠 있도다 나는 金을 벗었노라. 머리와 팔과 허리에서 新羅 文武王 그 榮華 아닌 束縛, 安存 아닌 고통의 이름을 벗고 한 마리 돌거북으로 귀닫고 눈멀어 여기 동해 바다에 잠들었노라. 천년의 잠을 깨기는 저 天馬 炤知王陵의 부름이거니와 아아 살이 허물러지고 피가 허물어져 불 타는 저 新羅 어린 계집애 벽화의 울음소리 사랑의 외마디 동해에 몰려와 내 귀를 열어
大王巖 이 골짜기에 나는 잠 못 드는 한 마리 돌거북
<이근배 동해 바다 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이 시조 역시 장형시조의 특징인 2음보 연속체 사설 역음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각장마다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예화를 통하여 비장미와 숭고미(崇高美)를 느끼게 한다. 신라의 소지왕(炤知王. 21대)과 문무왕(文武王 30대)은 약 200년의 시차(時差)가 있다. 문무왕은 죽어서 동해 바다에 수장된 왕으로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겠고 한 분이다. 왕은 영화롭고 편안한 존재로 생각하지만 속박과 고통의 삶이었음을 말하며, 죽어서 그런 모든 듣지도 보지도 않고 속세의 것을 다 벗고 잠들려 하나 천년을 넘게 몰아치는 파도소리와 물살에 어지럼을 겪고 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다름 아닌 소지왕릉(炤知王陵)에 순장(殉葬)된 16세 된 왕의 후비 벽화의 슬픈 울음소리인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는 역설의 미학을 통하여 아이러니를 표출하고 있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슬퍼할줄 안단말이냐
팔 벌려 환히 웃던 내 마지막 아버지, 다시 올 수 없는 먼 길 떠나시고 울음은 죄이라 울음은 죄이라서, 베인 살 파고드는 소금강(江) 흐른다 입동 무렵 저녁강(江), 벙어리 울음강(江) 붉게 흘려보낸다 살아생전 효도하라 누가 먼저 말했느냐, 누가 말해버렸느냐 옛사람 그 말 할 줄 몰랐다면 뼛속까지 저리진 않으리 사진 속 아버지 끌어낼 수 있다면, 마흔넷 아버지 마음 외톨이 배고픈 아이는 헤아릴 수 있으리
석류빛 큰키나무 속으로 춥다 춥다 하며 가는 실루엣 너 무슨 새라/ 했느냐
<홍성란의 벙어리 울음강(江)>
이 장형 시조도 각 장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를 이루어 시조 형식의 틀을 지키면서, 각 장을 2음보격 연속체 사설 엮음으로 짜내어 보통의 평시조가 다 담아낼 수 없는 설움과 한을 한껏 풀어내고 있다. 초장에서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슬퍼할 줄 안단 말이냐’고 화두를 던진 다음 중장에서 회상과 탄식으로 그 슬픔의 구체적 사연을 하나하나 자세히 펼쳐 보이고, 종장에서는 비유적 이미지를 통하여 시적 이미저리를 갈무리하여 맺음을 했다.
다음은 옴니버스 시조 형태가 1970년대 이후 새로이 시도된 현대 장형시조 형태로 등장하였다. 이 옴니버스시조는 한 편의 연작시조(連作時調) 속에 앞에서 말한 평시조·사설시조(엇시조 포함) 등 다양한 시조 형식을 아우르는 혼합(混合) 연형시조(連形時調) 형태를 가진 장형시조이다. 이런 작품의 시발점이 된 것은 윤금초의 장형시조 "청맹과니 노래"로 보고 있다.
현대 사회는 복잡다기(複雜多技)하고,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면서 인간들의 심리도 중층구조(重層構造)가 되어 이에 부응할 시조의 새 양식으로 등장한 것이 이것이다. 서사시조의 양태를 띠면서 시조문학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 옴니버스 시조는 "누벨 바그 운동(새 물결)"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시도하여 문단의 조목을 받고 있다.
---Ⓐ----
1 쑥대머리
사람의 설움이 어지간해야 눈물이 나오는 법이지, 기가 차고 멱이 꽉 차면 뛰고 미치고 환장을 하는 법이렷다.
-판소리 ‘심청전’에서
쑥대머리 애원성을
임방울만 울었다더냐.
한 세상 오만 시름
시궁을 딛고 서서
여보게,
우리네 연꽃
살 비비고 오리라.
2 사동(私칮)*짓소리
두들겨라
지게 장단,
어서 노를 휘저어라.
그 무슨 젓대를 불어
이 아픔을 하소하랴.
환장할 경치를 지고
떼거지로 그렇게.
조지고, 비비 틀고, 직신작신 할퀸 세월.
더러는 혼을 챙겨 공출 나간 아수라장, 도솔천 차양을 드린 그 마름 야로 속에 모가지 얼레에 감긴 참혹한 생애던가.
어이어, 어여하 어이. 어이 어이 어여하.
풀고
풀어볼수록
가슴 조이는 사슬,
끝끝내 무르팍에
찬바람 절로 인다.
비비쫑
우니는 새야
형극의 강 비켜 날고.
이승을 닫아 건 보릿대 쓰디 쓴 연기.
글러먹은 연대의 글러먹은 식리(殖利)였네. 등줄기 휘인 채로 요역, 공신 죄구렁의 거만(鉅萬)의 농장에 갇혀 불지짐 효수할 때
거꾸로 매달린 목숨, 오리무중 달은 지네.
으스스 멀미난다.
어시 새끼 누역이 탄다.
피의 소금 긁어내듯
조공 받던 손갈퀴로 앗아간 태평성대
찰진 내 사랑은 차마
손톱마저 짓물러…
여보게, 하늘도 정녕 목이 잠겨 누웠는가.
어석석한 세간살이 쓸개라도 갊아 두게. 연옥리 마구간 마소의 엉덩이살 그건 바로 우리들의 살이어든
회초리 후리친 권신, 어휴 저 넉살 좀 보게.
지느러미 너울대던 아사녀 치맛자락.
유리 하늘 노대 아래 사타구니 헝클린 능욕의, 주육을 짓이겨댄 아, 우악스런 생채기로
끊길 듯 끊기지 않는 끝없는 저 무두질.
징그런 못자국의 살에 새긴 문신처럼
한 거풀 가죽을 벗겨 먹물 수결을 씻어낼까.
죽었다 거듭 난 찰라, 도로 천적(賤籍)을 입는 너.
<윤금초의 ‘청맹과니 노래’>
---Ⓑ----
(1)
천수만 뼛속 깊이 범벅이 된 검은 아픔
차마 눈길 못 떼고 피눈물 쏟는 낙조
어부넨 꿈 분질러져 죽음에 입 맞추고.
(2)
지난 해 막바지는 가슴 치는 먹빛이었다.
온 해안 속살까지 침투한 검은 앙금, 타르덩이 풀린 바다 물결마다 그늘이고, 푸른 삶 뛰놀던 자리 어둠이 발 뻗었다.
웃음 잃은 얼굴엔 바람마저 흐느끼고, 가뭇한 수평선 따라 피 토하는 햇살무리, 펼쳐진 저 망연한 꼴을 차마 말로 어이 하리.
하얗게 둘러붙어 죽음 씻는 자원(自願) 손길, 파도 타며 광란(狂亂)하는 그 떼거리 감당 못해, 추위에 식은 땀 흘리며 이 악물고 견딘다.
어쩌랴 퍼내도 끝없이 엉겨붙는 저 더께를.
<필자, 태안반도 정경-07. 12. 7 유조선 기름 유출>
---Ⓒ----
1.
코카콜라 뚜껑이 버려진 잔디밭에
푸르름은 그들의 작업을 봄이라 부르며 땅 깊이 산발한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 있었다. 그들의 생명 위로 쓰레기가 버려져도 푸르름은 열심히 땅을 일구고 뿌리내릴 양분을 채웠다. 돋아나는 새순에 풀벌레 스며들면서 푸르름의 목소리는 한 뼘이나 커졌지만 빌딩 숲을 이고 있는 숨 가쁜 흙에서는 아늑한 숲의 향내가 새나올 수 없었다. 어느 날 문득 푸르름의 어깨 위로 낯설고 고운 아이의 손길이 내려와 버려진 장난감 같은 코카콜라 뚜껑을, 진달래 꽃잎에 미끄러진 햇빛을 줍고 있었다.
겨울의 빨간 귓불에 피가 돌고 있었다.
2.
끊임없이 표정 바꾸는 자화상을 그리며
봄아, 너는 투명한 손이다 아이처럼
흩어진 햇빛 조각을 이파리에 입히는.
<현상헌, ‘봄, 유년, 코카콜라 뚜껑’>
윤금초 시인은 위와 같은 시조를 선보이면서 ‘옴니버스시조는 다양한 변주를 시도할 수 있는, 이 시대에 걸맞은 그릇’이라고 말하고 있다. 평시조의 단조롭고 틀에 박힌 가락을 한 단계 뛰어 넘어 스케일이 웅장한 서사 구조(敍事 構造)의 시조를 시도할 수 있는 형식 장치로 등장한 셈이다.
Ⓐ는 평시조+평시조+사설시조+평시조의 형태로 결합되었고, Ⓑ는 평시조+사설시조가 어울린 장형시조로 사설시조 중장에 평시조형이 삽입된 옴니버스형 장형시조이다. Ⓒ는 사설시조에 평시조가 이어진 형태의 옴니버스형 장형시조이다. 이런 종류의 장형시조 형태가 요즘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데 그 모습은 ‘단순 사설시조형’ ‘사설시조+평시조형’ ‘평시조+사설시조형’ 등의 연속 반복 연결 모습이거나, 사설시조의 중장이 다시 평시조형이 되어 삽입되는 예이다. 이렇게 혼합 연형된 시조를 우린 편의상 옴니버스형 장형시조라 칭한다.
그러나 여기에 보인 작품 가운데 Ⓑ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장형(사설)시조가 유지하고 있는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 구성에서 예외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위에서 보통의 장형시조보다 더욱 많은 이야기가 삽입되는 서사성이 중시되다 보니,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 구성만으로는 그 표현 의도를 다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는 과거 고시조에도 무절제하게 나타나고 있던 모습이지만 이들을 혼합하여 놓은 형태는 새로운 시도로 어찌 보면 이것은 윤금초류(類)의 시조쓰기인지는 모르지만 현대시와의 구분이 불분명하여 이를 시조의 범주에 넣어야 할지 문제가 된다.
Ⅳ. 현대 장형시조(長型時調)의 문제(問題)
현대시조(現代時調)가 성장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시조를 평하는 평자들에 의하면 고루(固陋)한 형식에 젖어 그 탈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너무 시형(특히 글자수)에 얽매여 있고 시행 배열 역시 3장으로 규제한 제약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하이구나 서양의 소네트는 글자 수나 행수에 엄격한 제약이 있지만 우리의 시조는 그에 비하면 너름새가 있음을 간과하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현대시조는 표현의 특성인 펼침과 맺음(닫힌 맺음을 열린 맺음으로까지 확산시킴)의 미학을 살려 우리 민족의 전통시로서 그 몫을 넉넉히 수행하며 조용하나 다양하게 발전해 왔고, 과거의 전래적 주정주의 시조에 주지적, 주의적 시조로까지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시형과 시행 배열에 이유를 제기하는 이들을 향하여 서울대 오세영교수는 “시조는 엄격한 형식을 지켜야 하고 글자수도 주어진 조건에 맞추어야 한다. 그 이유는 시조는 우리 전통의 정형시이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하면 정형시가 아니기에 혹시 예외를 범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의식적으로 이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시조를 위한 고언(苦言)이다. 이를 어기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이는 정형시 작가를 포기하고 자유시를 써라. 역사적으로 볼 때 자유시는 정형시의 해체에서 발생한다. 원래 자유시(vers libres)란 말은 자유로운 운문 즉 다소의 파격을 지닌 운문인데 이는 자유시의 고전적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요즘 시조시단에서 쓰이는 파격적인 시조는 고전적 개념의 자유시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환기(換氣)의 말을 해주고 있다. 이는 우리 시조단이 귀 기울려 들어야 할 말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사설시조는 우리 전래의 시조와는 다른 문학 장르로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거므로 우리는 이런 민족 시가(民族 詩歌) 양식을 일부러 파괴하고 서양문화에 귀가 솔깃하여 그에 기우러져 있는 이들은 현 세계에서 자기 나라만의 고유한 정형 시가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10여 개국에 불과한데, 이들 국가는 모두 세계 문명과 문화를 선도하는 나라들이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하고, 그들이 문명, 문화의 선도국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들 나라에서는 자기 나라만의 시가를 가지고 있음을 민족의 자부심으로 알고 이를 소중하게 여겨 가꿔나가고 있다는 점에 눈길을 돌려봐야 할 것이라고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요즘 부쩍 우리 시조단에 무분별한 시조쓰기를 하는 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시조의 현대화란 미명 아래 이런 짓을 함부로 하는 이는 없어야 하겠다. 굳이 새로운 시대의 요청이라며 발전적 시도라고 장형시조를 쓰면서 멋대로 시조의 형을 파괴하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리 장형시조라 하더라도 정제된 형식미는 갖추고 있어야 하며, 율격과 음보는 잃어선 안 된다.
그러면 자유시와 지금 문제로 제기한 장형시조(長型時調)는 어떤 관계일까. 오세영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분명 평시조 율격을 두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 조상이 오랜 세월을 두고 갈고 닦아 정착시킨 시조의 본질을 깨먹고 부수지 말고 그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지 꼭 평시조형만을 고수(固守)하고 장형시조 등은 배척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세상에 뿌리(근원) 없이 태어난 것은 하나도 없듯이 이 장형시조도 엄연히 시조라는 장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형이든 장형이든 시조를 쓸 때 시조라는 뿌리를 바꾸는 일은 없어야 하고, 그 뿌리 위에 가지와 잎, 꽃을 피워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추0구할 장형시조는 형태면에서 3장(초, 중, 종장)이 분명 있어야 하고, 각 장은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편의상 ‘긴 4음보율격’이라 한다)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 4개의 통사 의미 마디 단위인 긴 4음보율은 호흡의 단위이기도 하다. 우리 시조에 사용되는 호흡에는 긴 호흡과 짧은 호흡이 있다. 단형시조에 주로 쓰이는 것은 짧은 호흡률이고, 장형시조에 쓰이는 호흡은 긴 호흡률이다. 그러니까 장형시조는 긴 4음보율격으로 해야 한다. 또한 종장 첫구 3음절 1 음보는 시조의 불문율이므로 꼭 지키며, 초, 중 종장은 의미상 하나의 통사 연결고리로 묶여져야 한다.
다만, 형태는 단순 사설시조 형태나 평시조 형태에 사설시조 또는 엇시조 형태가 적절히 연속 접속되어 구성되는 옴니버스형 혼합 연형시조로의 장형시조가 있는데, 이 옴니버스형 혼합 연형시조는 스케일 넓은 서사시조일 때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에 꼭 상응하지는 않지만 표현 내용면에서는 설명, 해설이 아닌 상징성(象徵性), 해학성(諧謔性), 우의성寓意性), 아이러니, 역설(逆說), 풍자(諷刺), 냉소(冷笑) 등이 어울려 있어 은연중에 골계미(滑稽美), 유락미(遊樂美)와 같은 웃음의 미학이 발현(發現)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단형시조(短型時調)인 평시조(平時調)가 담당할 수 없는 영역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제반(諸般) 면(面)을 상고(詳考)할 때 그 가락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단형시조는 대중가요의 트로트 리듬이라고 한다면, 장형시조인 사설시조나 특히 옴니버스시조는 랩이나 힙합조 리듬에 트로트 리듬을 가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단형시조가 ‘낭창’이라면 이 장형시조들은 ‘능청’이라고 해야 하겠다. 아울러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말은 단형시조거나 장형시조거나 우리는 작품을 쓸 때 표어나 구호처럼 A를 A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조가 아닌 서사 단문이기 때문이다.
시조는 반드시 B로 A를 말해야 하며, 그 문학적(文學的) 흐름은 강물처럼 유연해야 하고, 구와 장은 서로 유기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시적(自由詩的) 잔재가 없어야 함은 물론 멋대로 행갈이를 하여 시조로 위장(僞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는 자유시(自由詩)도 마찬가지이다. 행(行)만 바꾼다고 서사적 산문이 운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행(行)이나 연(聯)을 바꿀 때에는 그만한 시적(詩的) 사유(思惟)의 마디가 있어야 한다.<가람문학 28, 29집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