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관 이사장님의 영전에 올립니다. 아울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사징님께서는 탐진 문중을 위하여 큰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이사장님께는 종종 보고를 드렸지만, 호주로 가신 이후의 결과는 뒤늦게, 고인이 되신 후에 영전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책(도원수 안우장군 고려 16공신)을 저술한 것은 안재관 이사장님께서 "안우 장군"에 대하여 크나큰 열정을 가지시고 문중과 외부 전문가와 함께 "안우 장군의 생애를 밝히고 장군께서 국난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하심"에 대하여 노력하시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어느날 나와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안교수 나는 열정은 있지만, 지식이 부족해서 부득이 명지대학 교수들과 연결하여 장군의 업적을 연구하고 있다네. 자네도 비록 전공을 다르겠지만, 안우 선조의 역사 연구에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란다"라고 당부하시었다.
마침 나의 형님(송원, 황곡)께서도 많은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시는 것을 보고서 나름 후순으로서 마음을 먹고 훌륭하신 안우 선조에 대하여 '내가 공학자로서 한번 연구해 보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먼저 기존의 자료를 조사한즉, 흔히 알고 있는 이성계, 최영 장군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 였다.
이 두분은 안우장군이 죽고 난 후, 고려에 침입한 왜구들을 무찌르면서 큰 인물이 되었다. 홍건적 침입(1,2차)을 무찌른 것은 누가 뭐래도 도원수 안우, 원수 이방실, 원수 김득배 (이분들은 삼원수로 불리우면서, 고려 16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장군들이었다.
이 후 안우장군 학술발표회에도 참석하여 발표 자료를 보니 비논리적 내용이 너무 많았다. 역사에 남겨진 사료들과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내용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시정하려면 완벽한 사료를 바탕으로 틀림을 찾고 사료를 근거로 팩트를 증명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사장님께서 우연한 기회에 주신 말씀 덕분에 나는 이렇게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안재관 이사장님의 조언과 함께 시작한 연구가 약 40개월 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한 권의 책을 완성하였다. 이름하여 "고려 16공신 도원수 안우 장군" 책자를 만들어 세상에 내게 된 배경이다.
개인적인 경비 약 350만원을 들여 출판까지 하여 문중을 비룻한 주변 지인들에게 책을 드린 것이 800부 정도(순흥대종회에도 10여권을 보내드리고 이사징님께는 20부를 드리면서 필요한 분들께 드리라고 하였다.
2023년 봄에는 다시 1000부(약 90만원)를 재판하여 대부분 문중으로 보냈고, 아울러 각 도서관 등으로 보냈다.
결국 나는 공학박사의 학위를 가지고 교수 생활만 하다가 뒤늦게 선조의 명예를 드 높이게 된 것은 이사장님과 개인적인 인연이었다.
이로서 우리나라에서 안우장군에 대한 사료 조사는 이것으로 거의 조사되었음을 자부하고 있다. 아마도 더 이상 연구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첨언하면 이 책자를 가지고 조곡문중과 순흥대종회의 후원아래 관련 내용을 국정교과서 편찬위원회에 진정 및 건의하여 1차 홍건적의 항목에는 시정하게 되었는데, 출판 전에 정치적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이후부터는 황곡형님과 함께 국사편찬위원회로 진정과 건의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후 혼자서 국편위에 공문서를 보내었는데 계속 반려가 되었다.(나를 전문 진정꾼으로 오해하고, 그곳도 역사학자가 쓴 글이라는데....)
이후, 교과서 편찬에 종사하는 선생님과 단체에 자료를 보내고, 유튜브 역사 항목을 뒤져 수많은 강사들에게 잘못되었음을 알리고 시정을 요청하였다.(이들은 모두 조선사 연구자들이었다. 따라서 고려사는 대충 연구한 것 같고, 고려16공신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연계하여 연구하지 않으면 절대로 모르는 내용이다. 그런데 딱 한 분의 여성 강사는 시정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이 여성학자가 진정한 학자라고 생각한다.)
2년 전에 다시 중학교 역사 저술 선생님과 출판사 및 위원회에 자료를 보내고 시정을 요청하였는데, 이번에는 사실를 인정하여 중학교 교과서에 삼원수의 이름이 등재되었다.
(아직도 미완의 내용이지만, 고려사를 연구하는 교수나 학생들이 없는 이 시대에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한 소리가 된다. 다만, 이직도 이성계와 최영 장군의 위상이 더 높아져 있다는 것은 오르지 문중의 힘이라고 추정해 본다.)
지금까지 약 9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적어도 재관 이사장님의 평생 소원이었던 부분은 일부 해결해 드렸다.
작금의 사회 분위기는 한 번 완성된 내용(옳고 그름을 떠나서)을 옳게 수정하려면 어마어마한 노력이 든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들어다 보지 않고 이기주의로 가는 분위기와 아울러 상대 집안의 항의가 더세게 되어 뭘 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상
별하 안기순이 작고하신 안제관님을 존경하여 영전에 이글을 올립니다.
첫댓글 1. 최영은 1차 홍건적 토벌전쟁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2. 개경 수복시 고려군은 20만을 동원하였다. 여러 사료에는 장군들의 나열 순서(일종의 서열)에는 안우, 이방실, 황상, 한방신,
이여경, 김득배, 안우경, 이귀수, 최영의 순서로 최영은 마지막 서열 9위로 되어 있다.
3. 최영은 안우, 이방실, 김득배(삼원수)가 모살된 후에 전리판서가 되었다.
4. 이성계는 동북면병마사 한방신의 부장의 자격으로 개경 수복 전쟁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9명의 장군 반열에는 기록되지 못하였다.
5. 이성계는 안우, 이방실, 김득배(삼원수) 모살된 후에 비로소 동북면 병마사로 진급하였다.
6. 이성계가 홍건적의 괴수를 베었다는 기록은 없다.
7. 홍건적 괴수 사유, 관선생을 벤 것은 박강이었다. 이 전공으로 공민왕의으로부터 왕실 호위를 담당하도록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사제소감까지 승진시켰다.
8. 후 일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 되었고, 최영은 고려 16공신 반열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9. 안우, 이방실, 김득배 장군은 고려 16 배향공신의 반열에 올라 숭의전에서 고려왕과 함께 모셔져 있고, 조선 문종 때부터 지금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려 16 배향공신은 다음과 같다.
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16명이며, 강원도 연천군 미산리의 숭의전에 고려 왕들과 함께 위폐가 모셔져 있다.
1971년 사적제232호로 지정, 2014년 연천군 향토유적 제2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