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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2권 / 충렬왕 4(忠烈王四) / 갑진 30년,(1304), 원 대덕 8년
○ 이지저(李之氐)를 도첨의찬성사로, 민훤(閔萱)을 자의 도첨의찬성사(咨議都僉議贊成事)로, 정해(鄭瑎)를 판삼사사로, 이혼(李混)을 판밀직사사로, 권영(權永)을 밀직사사로, 김심을 지밀직사사로, 고세(高世)를 동지밀직사사로, 박전(朴顓)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국학의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였다. 과거에 찬성사 안향(安珦)이 학교 교육이 크게 무너지고 유학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우려하여 양부(兩府)와 의논하기를, “재상의 직책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데, 이제 양현고가 탕진되어 교육에 쓸 자금이 없으니, 청컨대, 6품 이상은 각기 은(銀) 한 근씩을 내고 7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베를 내게 하여 양현고에 귀속시켜서 본전은 그대로 두고 이식을 받아서 영구히 교육 자금으로 만들자." 하니, 양부에서 이를 좇았다. 그 사실이 보고되니, 왕이 내고(內庫)의 금전과 양곡을 내어 보조하였다. 이때 밀직 고세(高世)라는 사람이 자기는 무인(武人)이라 하며 돈을 내려하지 않으니, 안향이 여러 재상에게 이르기를, “공자의 도가 만세에 법을 내려주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어버지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에게 공경하는 것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애써 돈을 내어 저 생도들을 양성하겠느냐'고 한다면, 이 사람은 공자를 위하지 않는 것이니, 되겠는가" 하니, 고세가 듣고 매우 부끄러워 즉시 돈을 냈다. 향은 또 남은 돈을 박사 김문정(金文鼎)에게 주고는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을 그리고, 또 제기ㆍ악기ㆍ육경ㆍ제자ㆍ사서(史書)들을 사오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향이 밀직부사로 치사한 이산(李㦃)과 전법판서 이진(李瑱)을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금내학관(禁內學官 대궐 안에 있는 학관)과 내시(內侍)ㆍ삼도감(三都監)ㆍ오고(五庫)에서 수학을 원하는 선비와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의 여러 생도들이 책을 끼고 와서 수업하는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 6월에 국학의 대성전(大成殿)이 준공되었다. 과거에 원 나라의 야율희일(耶律希逸)이 건물이 협소하고 누추하여 반궁(泮宮)의 제도를 잃었다 하여 왕에게 신축할 것을 말하였는데, 이때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왕이 국학에 나아가자 홀련(忽憐)과 임원(林元)이 뒤를 따르고, 칠관(七館)의 생도들이 관복을 갖추고 길에 나와 맞이하며 가요를 올렸다. 왕이 대성전에 들어가 선성인 공자를 배알하고, 밀직사 이혼(李混)에게 명하여 입학송(入學頌)을 짓게 하고, 임원(林元)에게는 애일잠(愛日箴)을 짓게 하여 여러 생도에게 보였다.
십이도(十二徒) : 개인의 교육 기관인 12개소의 문도(門徒). 즉 최충(崔冲)의 문헌공도(文憲公徒), 정배걸(鄭倍傑)의 홍문공도(弘文公徒), 노단(盧旦)의 광헌공도(匡憲公徒), 김상빈(金尙賓)의 남산도(南山徒), 김무체(金無滯)의 서원도(西園徒), 은정(殷鼎)의 문충공도(文忠公徒), 김의진(金義珍)의 양신공도(良愼公徒), 황영(黃瑩)의 정경공도(貞敬公徒), 유감(柳監)의 충평공도(忠平公徒), 문정(文正)의 정헌공도(貞憲公徒), 서석(徐碩)의 서시랑도(徐侍郞徒), 실명씨(失名氏)의 귀산도(龜山徒)이다.
칠관(七館) : 고려 때 국학에 설치한 일곱 개의 분과. 즉 《주역》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이택관(麗澤館) , 《상서》의 대빙관(待聘館), 《시경》의 경덕관(經德館), 《주례》의 구인관(求仁館), 《대례(戴禮 : 禮記)》의 복응관(服膺館), 《춘추》의 양정관(養正館), 병학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강예관(講藝館)을 말하는데, 칠재(七齋)라고도 한다.
무고 정재(舞鼓呈才) : 정재(呈才) 때에 추는 북춤의 한 가지. 고려 때 시중(侍中) 이혼(李混)이 영해(寧海)에서 귀양살이할 때 꾸몄다는 북춤으로 원래는 2명이 추었으나 조선 세종(世宗) 때 8명, 4명, 2명이 출 수 있도록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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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3권 / 충선왕(忠宣王)
임자 4년(1312), 원 인종(仁宗) 황경(皇慶) 원년
○ 8월에 왕이 민천사(旻天寺)에서 금글씨로 장경을 베껴 모후(母后)의 명복을 빌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첨의정승으로 치사한 이혼(李混)이 졸하였다. 혼은 성품이 관후하였다. 정해(鄭瑎)ㆍ윤보(尹珤)와 함께 정방(政房)에 있으면서 서로 추켜 세웠는데, 하루는 말하기를, “우리들이 서로 사귄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서로 허물을 일러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혼이 정해에게 말하기를, “남들이 자네를 교묘하다고 하네." 하고, 또 윤보에게 말하기를, “남들이 자네를 잘난 체하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마땅히 고쳐야 되겠네." 하였다. 정해가 이혼에게 말하기를, “남들이 자네를 청렴하지 않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가." 하였다. 이혼은 오랫동안 전선(銓選)을 관장하였으며, 성품이 또 청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집은 꽤 부유하였으나 흩어 쓰기를 힘썼다. 빈객이 오는 것을 즐기고 거문고와 바둑을 좋아하였다. 영해(寧海)에 좌천되었을 때, 바다에 떠 흘러온 뗏목을 얻어 무고(舞鼓)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악부(樂府)에 전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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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42권 / 황해도(黃海道) / 문화현(文化縣)
【인물】 【고려】
유경(柳璥) 유택의 아들이다. 고종(高宗)조에 급제하고, 김준(金俊) 등과 함께 최의(崔竩)를 주벌하고서, 정권을 왕실에 돌렸다.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세 번 문과 시험을 맡아보았는데 뽑은 사람은 모두 명망있는 인사들이다. 이존비(李尊庇)ㆍ이혼(李混)이 모두 그의 문생(門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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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4권 / 경상도(慶尙道) /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누정】 해안루(海晏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서루(西樓) 곧 성(城)의 서쪽 문루(門樓)이다. ○ 권근(權近)의 기(記)에, “영해(寧海)는 즉 옛날의 덕원(德原)이다. 산이 막히고 바다에 임하여 땅은 궁벽하고 깊숙하여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많고, 겨울에도 대단한 추위는 없다. 물고기와 자라와 전복과 조개 등 해산물의 생산이 많다. 옛날 태평하던 때에는 백성들은 풍성하고 송사(訟事)는 간단하여 집마다 거문고를 갖고 있어서 사람들은 줄을 다루는데 공교로웠다. 노래하는 목청과 춤추는 태도는 맑고도 예뻤고, 정사(亭榭)와 누대(樓臺)의 아름다운 경치는 거의 선경(仙境)과 같았다. 시중(侍中)
몽암(蒙庵) 이혼(李混)이 이 고을에 귀양왔을 때에, 바다에 떠 있는 나무를 얻어서 무고(舞鼓)를 만들고 그 절도(節度)를 가르치니, 그 소리는 굉장하고, 그 춤은 변전(變轉)하여, 쌍쌍이 펄펄 나는 나비가 봄을 재촉하는 것보다도 화기(和氣)가 있고, 날래고 사나운 용감한 기세는 두 마리의 용(龍)이 서로 다투어 적(敵)에게 달려갈 때보다도 힘차다. 이것이 영해부의 가장 기이한 광경으로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이다. 풍속을 살피며 절월(節鉞)을 가진 인사(人士 감사)들은 반드시 와서 유람하고 관찰하니, 실로 한 방면의 아름답고 고운 땅이었다. 그런데 왜구(倭寇)가 일어나고부터는 날로 쇠체(衰替)하더니 신유년에는 그 화(禍)가 더욱 격렬하여 성(城)과 읍(邑)은 폐허가 되고 여염은 불타버렸다. 두어 해 동안을 적(賊)의 소굴이 되게 내버려두니, 관리들은 다른 고을에 가서 붙여 살고, 범과 산돼지가 옛마을에 와서 살았다. 변방이 이미 이즈러지니 왜구의 침입은 더욱 심해져서, 계해년 여름에는 원주(原州)와 춘천(春川)을 거쳐서 철원(鐵原)의 경계를 와서 침노하며, 양주(楊州)ㆍ광주(廣州)를 침략하고, 공주(公州)의 수령을 살해하는 일을 일으키는데 이르렀다. 그 왜구는 다 축산도(丑山島)를 거쳐서 들어 온 것이다. 한 읍이 수비를 잃어 삼도(三道)가 해를 입었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것은 이처럼 참혹한 것이었다. 다음해 갑자년에 원수(元帥) 윤가관(尹可觀) 공이 합포(蛤浦)로 나와서 진무(鎭撫)할 때, 바다를 따라 북으로 올라와서 마침내 이 고을에 이르렀다. 가시덤불 속에 원수의 절(節)을 멈춰 세우고 둘러보며 탄식을 거듭하였다. 곧 성을 쌓아서 국경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여 즉시 역전(驛傳)을 통해 계문(啓聞)하였더니, 묘당(廟堂)의 의논이 그러하게 여겼으나 그 수비를 어렵게 여기었다. 김을보(金乙寶)군이 자원하고 나서니, 부월(斧鉞)과 인절(印節)을 주어 만부장(萬夫長)을 삼고, 계림(鷄林)과 안동(安東)의 군사 2천명을 출동시켰다. 이에 뭇 왜구가 소요하고 양탈(攘奪)하는 가운데서 한쪽으로 적을 방어하고 한쪽으로 성을 쌓아서 7월에 시작하여 한달 만에 마쳤다. 또 축산도에 전선(戰船)을 배치하여 수졸(戍卒)을 두었다. 그런 뒤에는 왜구가 여기에 배를 대고 서식하지 못하게 되어, 한 읍은 재건되고 여러 고을들은 편안함을 얻었으니, 다 윤공이 성을 쌓은 덕택이다. 이때로부터 유리(流離)하여 남의 고을에 붙여 살던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백성의 집들이 겨우 서더니, 무진년 정월에 실화(失火)로 연소되어 공(公)ㆍ사(私) 건물들이 적지(赤地)가 되어버렸다. 기사년 봄에 병마사(兵馬使) 박문부(朴文富)가 왔는데, 남은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 힘써 관대한 정치를 시행하며, 백성으로서 생업을 잃고 유리하는 자를 보듬고, 아전으로서 허가 없이 중이 된다는 환속시켜서, 그 노고(勞苦)와 안일(安佚)을 균평하게 하며, 그 주리고 결핍함은 구제하여 따뜻이 보호하고 어루만져서, 갓난 아기처럼 돌봐 주었다. 역마를 타고 온 사자(使者)라면 비록 미관(微官)일지라도 반드시 묵고 있는 객관에 가서 위로하고 대접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公)은 벼슬이 높고 저 사람은 낮은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극진히 하십니까.’ 하니, 후(侯)가 말하기를, ‘저 사람은 손이고 나는 주인이다. 손과 주인 사이에 어찌 자급(資級)과 품등(品等)을 따질 수 있겠는가. 저 사람이 혹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함부로 위세를 부려 아전과 백성을 혹독하게 꾸짖는다면 내가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내가 저 사람에게 후(厚)하게 하면 저 사람도 반드시 성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오는 자는 감복하여 즐거워하고 아전은 꾸짖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이 해에 왜구가 다시 와서 밤에 해안에 이르렀다. 후가 듣고 즉시 성문을 열고 말에 채찍질하여 나가려 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적(賊)이 어두운 밤을 타고 왔으니 적변(賊變)이 장차 어떻게 될지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군사는 고립되어 있고 수가 약소하니 적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벽을 굳게 지키며 기다려서 만전을 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더니 후가 말하기를, ‘국가가 나를 인재가 아니라고 버리지 않고 한 지방을 맡겨서 백성의 사명(司命)이 되었는데, 바닷가의 소금 굽는 사람들은 홀로 국가의 백성들이 아니란 말인가. 적이 왔다는 것을 듣고도 구제하지 아니하여 적의 칼날 앞에 쓰러지게 한다면, 비록 내가 구차하게 산들 장차 어찌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전투에 달려가 죽는 것은 그게 바로 나의 직책이다. 또 내가 돌격해 나가면 적도 또한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군사들의 행렬에 앞장서 적진을 향하여 달려가니 적이 과연 도망쳐 달아났다. 말[馬]을 해치는 표범과 사람을 잡아 먹는 범들도 모두 단번에 무찔러서 백성의 피해를 제거하였다. 그가 백성에게 어질고 적에게 용감함이 이와 같으니, 고을 사람들의 유임(留任)을 원하는 신망을 얻고 관찰사의 포상과 칭찬의 추천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또 농한기에 백성의 힘이 한가할 때에는 성의 무너진 것을 수리하고, 도로의 장애물을 제거하며, 옛터에서 기와를 주어다가 관사를 덮게 하였다. 또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기를, ‘서문(西門)은 이미 화재로 인하여 막아버린 채 쓰지 않는데 어찌 또한 이것을 구축(構築)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기꺼이 명령을 들었다. 몇 날이 못 되어서 다시 지으니, 위는 누(樓)이고, 아래는 관문(關門)인데, 견고하게 되었다. 성에 세 문이 있는데, 동문은 땅이 낮고 누추하고, 남문은 산이 가깝고 좁다. 오직 서문만이 넓은 들을 향하여 버티고 서서 훤하게 통하고 시원스럽게 트였다. 산은 멀고 첩첩하며, 바다는 넓고 평평하다. 굽이치기도 하고 트이기도 하면서 멀고 아득하여 한 눈으로 천 리를 볼 수 있으니, 실로 한 고을의 좋은 경치를 독차지하고 있다. 만약 봄ㆍ여름ㆍ가을의 농사철이 되어, 모든 집들이 일제히 일하는 때에 이 누에 오르면,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점심을 가져가며, 아침에 나가 김을 매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어떤 이는 짝지어 일하고 어떤 이는 떼를 지어 일하며, 어떤 때는 심고, 어떤 때는 수확한다. 서쪽 들에 일하며 남쪽 밭에 힘쓰는 자들은 진흙이 묻고 바람과 햇볕에 그을리면서, 부지런히 노역(勞役)하여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의 온갖 상태가 다 누(樓)의 헌창(軒窓)과 좌석 아래에 있어서 모두가 눈앞에서 떠나지 아니한다. 그러니 농사를 권장하는 직책을 가진 자는 마땅히 날마다 이 누에 올라서 때대로 살펴보아야 하겠다. 그렇게 한다면 오직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알아서 권장하고 징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농사에 힘쓰는 자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고, 또한 농사짓는 일의 어려움과 밥상 위의 밥알이 낱낱이 농부들의 신고(辛苦)에서 온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부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적게 하며,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아끼려는 마음이 왕성하게 자라서, 반드시 백성의 힘쓴 결과를 먹으면서 백성을 위한 일은 게을리하는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그들의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부수어서 그의 기름과 피를 빨아 먹으며, 쓰는 것을 사치하게 하여 재물을 손상시킴으로써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이야 차마 어찌 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누를 지은 것이 우리 농민에게 유익함이 크다. 따라서 저 산 모양과 바다의 빛 같은 경치 좋은 것은 이 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 어째서 그런가, 옛일에 징험하여 지금을 알 수 있으며, 전의 일을 거울 삼아 뒷일을 경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노래와 춤을 즐거던 곳도 본래 같은 산과 바다였고, 중간에 폐허가 되었던 것도 또한 같은 산과 바다였으며, 이제 이 성루(城樓)를 복구한 것도 또한 같은 바다와 산인 것이다. 산과 바다는 변천함이 없는데, 인간 세상은 폐(廢)함도 있고 흥(興)함도 있으니, 즐거움이란 산이나 바다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느끼는 바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전 일을 생각하면 마땅히 즐길 만하고, 뒷일을 생각하면 또한 상심(傷心)할 만하다. 예전에 이미 음란하고 사치하며 안일(安佚)하고 향락(享樂)함으로써 망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러니 이제 도로 안정하고 다시 진기(振起)하는 초두(初頭)에 불현듯 엎어진 앞 수레의 자국을 밟아서 뒷날의 근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도 또한 뒷날 이 누에 오르는 자들이 마땅히 알아서 경계해야 할 바이다. 내가 이 고을에 귀양살이를 왔는데 마침 이 누 낙성(落成)하는 때를 만나 벽에 기(記)를 쓰라고 청하므로 내가 사양하지 못하였다. 아, 몽암(蒙庵)이 북[鼓]을 만들어 한 고을의 화려한 사치를 더하더니, 박후(朴侯)는 누를 지어서 한 고을의 근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 명성을 남기고 은택을 끼치는 장점은 마땅히 한 개의 북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이것을 기(記)로 한다.” 하였다.
남루(南樓) 성의 남쪽 문루(門樓)이다. 동루(東樓) 성의 동쪽 문루이다. 봉송정(奉松亭) 부의 북쪽 4리에 있다. 바다 어귀가 비어 매우 허전하였는데 옛날에 봉씨(奉氏) 성(姓)을 가진 이가 부사(府使)가 되어 소나무 일만 그루를 심어서 돌개바람을 막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소송정(小松亭) 부의 북쪽 4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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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도(忠淸道) / 전의현(全義縣)
【인물】 고려 이도(李棹) 태조(太祖)가 남으로 정벌하러 금강(錦江)에 이르렀을 때 물이 범람하였는데, 이도가 태조를 보호해 건너는 데 공이 있어 도(棹)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벼슬은 태사 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이혼(李混) 도(棹)의 7대 손이다. 원종(元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충선왕(忠宣王)까지 계속 섬기면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치사하였으며, 호는 몽암(蒙菴)이다. 일찍이 영해부(寧海府)로 좌천되어 바다 가운데 뜬 나무등걸을 가지고 무고(舞鼓)를 제작하였는데, 지금까지 악부(樂府)에 전해지고 있다. 이언충(李彦沖) 이혼(李混)의 형의 아들이며, 과거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본조 이정간(李貞幹) 이혼(李混)의 아우 이자화(李子華)의 증손이다. 어머니 김씨(金氏)의 나이 1백 2세 때에 정간은 당시 80세였는데, 어머니 앞에서 새 새끼를 가지고 희롱하여 노래자(老萊子)와 같은 어리광을 부리니, 세종(世宗)이 글을 내려 표창하였다. 벼슬은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이사관(李士寬) 이정간(李貞幹)의 아들로 벼슬이 부윤(府尹)에 이르렀으며, 그 아들 지장(智長)ㆍ예장(禮長)ㆍ함장(諴長)ㆍ효장(孝長)ㆍ서장(恕長)은 문과에 오르고, 의장(義長)은 무과에 오르니 이는 세상에 드물게 있는 일로서 선비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이예장(李禮長) 세조(世祖) 때의 정난 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이고, 벼슬이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이함장(李諴長) 벼슬이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이효장(李孝長) 벼슬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이서장(李恕長) 세조 때의 적개공신(敵愾功臣)이며, 벼슬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이르고,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이수남(李壽男) 이함장(李諴長)의 아들로 문과에 등과하였다. 성종(成宗) 때의 좌리공신(佐理功臣)이며, 전산군(全山君)에 봉해졌다. 이의흡(李宜洽) 문과에 올라 벼슬이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다. 아들 신효(愼孝)는 형조 참의를 역임하였고, 원효(元孝)는 과거에 올라서 첨지중추(僉知中樞)에 이르렀다.『신증』 이계맹(李繼孟) 성격이 호방하고 기개가 있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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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 제12하 기축년 충렬왕 15년(원 세조, 지원 26, 1289)
11월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한 유경(柳璥)이 졸하였다.
경은 몸이 비대하고 키가 작달막했으나 보기에 의젓하였다. 타고난 재질이 총명하며 기품과 도량이 크고 깊어서 큰 사건을 잘 처결하였으며 사람과의 접촉을 잘하여 웃고 얘기하는 것이 상대방을 흡족하게 하였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높으며 문장을 평하는 데 있어서 체제를 먼저 보고 기교는 그 다음으로 보았다. 유천우(兪千遇)와 함께 고시(考試)를 관장했을 때에 천우는 제 마음대로 하여 문장에 조그마한 흠이 있어도 반드시 제쳐 놓았으나, 경은 이를 문제로 삼지 않았다. 합격자가 발표되고 보니 모두가 문학에 노련한 사람으로 원부(元傅)ㆍ허공(許珙) 같은 이가 모두 그의 추천이었고, 이존비(李尊庇)ㆍ안유(安裕)ㆍ안전(安戩)ㆍ이혼(李混)이 모두 그의 문생이었다. 죽을 때에 나이가 79이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첫댓글 유경(柳璥)->안유(安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