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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경상도(慶尙道)
대구(大丘)
연경서원(硏經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정구(鄭逑)ㆍ정경세(鄭經世)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기묘년에 세웠다. : 전경창(全慶昌) 호는 계동(溪東), 지평(持平)을 지냈다. ㆍ이숙량(李叔樑) 호는 매암(梅庵),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현보(賢輔)의 아들이며,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이강서원(伊江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樂齋),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앞에 나왔다.
낙빈서원(洛濱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응부(兪應孚)
표충사(表忠祠) 경술년 때 세웠으며 현종 13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 고려 때의 정승 ㆍ신원길(申元吉)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을묘년에 세웠으며 귀암서원(龜巖書院)이라고도 한다. : 서침(徐沉) 호는 귀계(龜溪), 제처사(制處使)로서 환상(還上)의 모곡(耗穀)을 감면해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은공을 갚았다. ㆍ서거정(徐居正)ㆍ서성(徐渻)
상덕사(尙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숙(李䎘)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소생시켰으므로 도내 인심이 그에게 쏠렸다.
황청향현사(黃淸鄕賢祠) 갑술년에 세웠다. : 손처눌(孫處訥) 호는 모재(慕齋)이다.
백원향현사(百源鄕賢祠) 임신년에 세웠다. : 서시립(徐時立) 호는 전귀당(全歸堂), 참봉을 지냈으며 호조 정랑에 증직되었다. 효자이다.
남강향현사(南崗鄕賢祠) 갑술년 봄에 세웠다. : 박수춘(朴壽春) 호는 국담(菊潭), 임진왜란때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순절(殉節)하였다.
사양서원(泗陽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서종급(徐宗伋) 1688년(숙종 14)~1762년(영조 38)
退軒遺稿卷之七 / 碑銘 / 大丘龜巖書院廟庭碑銘
一鄕之士。道學行誼。儀範後生則祀之。仕䆠功業。布顯中外則祀之。洵是古所謂鄕先生沒而可祭者也。如其施遍於一同。澤流於無垠。愈久而愈不可忘者。則其所以崇報之者。是尤曷可少耶。惟玆大丘之達城。卽我徐氏得姓以來世居之地。地形斗隩。周遭天作。嶺以南一都會之要區也。昔在世宗朝。爲設城庫。官其地而論其賞。時則有
龜巖先生。與一村同人依朝命。徙居于南山故驛基。辭其賞而願减本府糴耗。逐石五升以惠民。此載於諸家掌故及本府邑誌。而我東三百六十州之所獨有也。夫糶糴之法。爲州家之一大政。而每一斗耗一升。實古今不易之規。然而自非富室豪戶。終不免樂於受而艱於納。若乃蔀屋小民。終歲作苦。無擔石之儲。而吏胥之所隳突。官府之所捶撻。挈買鼎犢。猶未能完欠。於此而有一升龠之捐。猶當銘謝感頌之不暇。况此一府之民。不知幾千戶。糴糓不知幾千石。戶戶石石。計其五升。千爲千五升焉。萬爲萬五升焉。而今且至四百年所。則積之之數。殆均歷之所不能筭。而人人之受其辭。卛是將千萬歲。其利民之政普而長。愛人之意微而遠矣。噫。如使公進爲於朝。推是心而行乎政。則其所以兼善一國之民者。必有其道。而惜乎專一州而不咸焉耳。昔庚桑楚居畏壘三年。畏壘大穰。畏壘之民。相與俎豆之。朱夫子甞取其義而扁諸菴。其所慕尙者深矣。夫畏壘之民。不過得三年之穰。而其猶曰庶幾其聖人乎。則今丘之民。欲報我公之德者。雖環一州家尸而戶祝之。未足爲泰。
而至顯宗朝。始創崇賢祠于府南。夫豈有待而然歟。後數十年。遠近章甫。倡議齊誠。
移建于達城龜巖之北。乃先生之故里也。因其舊制而崇餙之。
又以我傍祖四佳先生曁我先祖涵齋,藥峯兩先生次第追享。
盖四佳公奮跡玆土。以文章才猷。際遇光陵。贊治黃閣。
涵齋公受業退陶。德行純至。爲士林所推仰。
藥峯公當宣廟重恢之初。守臬本道。功勞茂著。均爲貫鄕世篤之賢。而實有杖屨茇舍之跡。則向所謂鄕先生可祭者皆是也。
而仍成
族位之祠。吁其盛矣。亦豈非斯院之作。實原於達城而然耶。
龜巖公後孫漢重。曾營竪碑於廟庭。旣伐石而工未訖。今其子鈺爲繼先志。不遠千里。屬余以叙述。將刻畫而樹之。顧余神思耄昏。文詞荒拙。固不足以鋪張闡揄。而此於我徐氏。實係家乘中事。則亦何敢終辭也。
龜巖公諱沉。典醫少監制處使。譜自麗朝版圖判書諱晉始。於公爲高祖。考諱匀衡。恭愍庚子。文科政堂文學貞度公。妣光山金氏。遠鳴之女也。公墓在府北南山中艮坐原。與配李氏爲上下塋。子姓訖今蕃衍。公之行蹟。世遠莫徵。而卽此一事。宜其有餘慶也。
四佳諱居正。與公籍同而派異。官左贊成典文衡達城君。
涵齋諱嶰。四佳之從曾孫。不幸蚤世。言行備載於福州高士李中立誄文。
藥峯諱渻。涵齋之子也。官判中樞。謚忠肅。二公事業。爛焉在國史。玆不復贅云。銘曰。
奕奕達城。肇基我徐。靈根布濩。淑氣扶輿。人維岳降。地亦天府。有若龜翁。寔世其土。官爲設險。方且厚酬。公則掉頭。異乎人求。捨我靑氊。同此闔境。耗蠲五升。糴報新政。仁人利博。萬世永賴。有翼祠宮。報事無怠。民之質矣。汝豈知蒙。糴路院下。亦祗以躬。越我三賢。奉以族位。文忠鳴雅。遺芬未沫。涵齋篤志。忠肅大之。德懿事功。可祭在斯。梓里增光。棠陰依舊。達城不騫。龜巖不仆。歲歲年年。豆爵㓗豊。銘于麗牲。屹立唐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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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서(徐命瑞) 1711년(숙종 37)~1795년(정조 19)
晩翁集卷二 達城徐命瑞伯五著○男祖修輯 / 文 / 涵齋先生位 大邱龜巖書院享祀祭文
聰穎天資。冲齡志道。攝齊陶山。嘿覰堂奧。譬諸闕里。庶幾春生。深潛純粹。門路克明。一畝之宮。所樂何事。博約工夫。瞻忽地位。表裏持敬。小大循轍。敦德鄕黨。絶意榮達。不幸早歲。較古愈短。不如之對。從事之歎。實發同門。悼道無傳。天苟假年。可見卓然。讀書舊址。在彼花山。亭猶顔樂。巷空井寒。卽地創宇。慕德者深。凡在聞風。孰不起欽。睠玆達城。亦惟貫籍。世濟名德。迭薦豆爵。於斯列享。情文允當。高山之仰。自倍他方。詢謀旣同。衿紳競喜。爰趁丁菜。聿修寅祀。有胤善述。棠化梓鄕。前後咸秩。位序鼎章。六二同人。合堂一體。陟降庭只。宛慕詩禮。儒宮異事。罕聞洛閩。來寧來歆。不替千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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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翁集卷三 達城徐命瑞伯五著○男祖修輯 / 圖說
爲學之方圖 圖下晦菴書退溪解栗谷圖牛溪抄涵齋總圖
涵齋曰心存乎學。學尙乎古。眞今世之所不取。古人之所不棄也。心情荒蕩。志氣鹵莽。將不能有以奮發身心。超然自立。不顚仆於世俗。克修省乎方寸。徒就卑汚。不可能矣。寧不憫然思其靜乎。瞿然思其養乎。世間萬事。都在一心之處置。心惟養矣。虛僞萬般。眞是害事。不若闇然藏修。推之容。從于體耳。惟足下勉之。不失本心。惟其至矣。答李强仲書。 ○權遂菴跋涵齋先生遺集。云公之學問之篤。門路之正。律身之嚴。識見之大。可以尊敬而槩見矣。公歿時年甫弱冠。而博學精詣。已至於此。嘗入於退溪之門。觀感者深矣。公之獨子藥峰公爲世名臣。其後赫世相望。甲於諸族。皆公積德之報耶。○寒水齋集。涵下有虛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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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熹, 李滉, 徐山解, 權尙夏 등의 견해를 인용하여 ->徐嶰
*徐嶰 1537 1559 達城 挺之 涵齋
爲學之方圖 圖下晦菴書退溪解栗谷圖牛溪抄涵齋總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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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權尙夏) 1641년(인조 19)~1721년(경종 1)
寒水齋先生文集卷之二十二 / 題跋 / 涵虛遺稿跋
徐嶰 1537 1559 達城 挺之 涵齋
達城徐君文若甫袖其高祖涵虛齋公遺稿。示余於黃江之上。其中祭先妣文。殆令人不忍讀也。噫。今去公世。若是其遠也。而讀其文者。猶不覺腸摧而淚淫。眞所謂孝思不匱永錫爾類者歟。其伯兄岱禱天割指。誠貫神明。而終亦不勝喪。悲哉悲哉。至其朋友間尋常書牘。亦動引經訓。勖以義方。雖散落殆盡。只餘寂寥數篇。亦足爲觀鳳之一羽也。且見李中立祭公文。公之學問之篤。門路之正。律身之嚴。識見之大。亦可以槩見矣。公歿時年甫弱冠。而博學精詣。已至於此。儘絶人之資也。使公享有年壽。則其志業之成就。何可量也。而不幸短命。吁可惜也。天旣生此美質。又從而椓之。此何理也。雖然公之獨子藥峯公。爲世名臣。其後金貂繡黻。奕世相望。而蘭玉之蕃。甲於諸族。是皆公積德之報耶。嗚呼盛矣。徐君要余一言。意甚勤至。有不可辭者。玆以數行題其後。公諱嶰。挺之其表德也。崇禎九十年丁酉正月日。安東權尙夏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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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徐渻) 1558년(명종 13)~1631년(인조 9)
藥峯遺稿卷三 / 附錄 / 家狀
公姓徐。諱渻。字玄紀。號藥峯。大丘府人也。遠祖諱閈。仕高麗盛時。爲郞將。六世而至諱益進。判典客寺事。生諱義。戶曹典書。生諱彌性。入我朝魁國初生員試。官止行安州牧使。贈達川府院君。娶陽村權近女。生二男。諱居廣彦陽縣監。於先君爲高祖也。諱居正。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策佐理功封達城君。推恩府院君以此也。曾祖諱彭召。司憲府掌令兼承文院參校。贈吏曹參判。祖諱固。禮曹參議。贈吏曹判書。考諱嶰。號涵齋。不事擧業。屛居講學。文章學問。爲士類所推。不幸蚤世。屢贈至領議政。三世之贈。以先君貴也。妣貞敬夫人固城李氏。左議政原之後。淸風郡守股之女也。以嘉靖戊午五月十九日丙申。擧先君于安東地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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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집(臨齋集) 서찬규(徐贊奎)생년1825년(순조 25)몰년1905년(고종 42)자경양(景襄)호임재(臨齋)본관달성(達城)특기사항홍직필(洪直弼)의 문인.
臨齋先生文集卷之十五 / 告祝文 / 龜巖書院。龜溪,四佳,涵齋,藥峰四先生位版移安告由文。戊辰(1868,고종5)九月十八日
朝飭星馳。院祠輪撤。指揮有限。靡敢違越。事出凌遽。權安講室。襟珮奔遑。無處訴臆。百世依歸。一朝索漠。謹告厥由。曷任哽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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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齋先生文集卷之十三 / 記 / 龜巖齋記 庚子(1900)
龜巖。舊書院號也。書院撤而齋始創。地與號因舊貫也。往在戊辰。朝令之毁書院也。龜巖亦不得免焉。則龜溪,四佳,涵齋,藥峰四先生位版。埋安廟址。而廟庭之碑。花樹之碣。巋然而存。地何忍廢荒。慕何所羹墻。士林咨嗟。雲仍愴惕。迺於壬午(1882.고종19)。經始齋役。力絀未就。逮至辛卯(1891,고종28)。始克竣功一屋子。而堂室房樓。間架粗備。費用前後數千鏹。可見諸宗苦心效力。而學諭公派居是邑者。幾三之一佽助。非輕財好施慕先爲賢之誠。能如是乎。是可書也。蕩殘之餘。靡有餘力可及於養士之資。前日相聚講習之美。今不可復覩歟。龜齋之設。豈亶使然哉。夫書院者。三代庠序之遺規也。爲羣居遜業培養人材。而祠以先賢。瞻依矜式。有俎豆之儀焉。有揖讓之節焉。有觀善之益焉。彬彬多可述。而今後生少年。無有知其說者。雖欲無野。得乎。天下貿貿。不知何樣變弊伏於其間。甚可懼也。物之廢興。時之運也。循環往復。其有日歟。而猷謀克臧。擴而大之。是在人耳。弗疚於利。弗奪於俗。弗阻於竆。相率入齋。讀書於斯。遊藝於斯。使門墻不空。馨香遠播。是所望於後來云爾。 *〈龜巖齋記〉는 1868년에 훼철된 龜巖書院을 1882년 중건, 1891년에 완공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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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침(徐沈, 1365년경~)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성묵(聖默), 호는 구계(龜溪). 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균형(鈞衡)이며, 어머니는 승동정(承同正) 이영유(李永儒)의 딸이다. 정몽주(鄭夢周)를 따라 학문을 배웠고,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향리에서 은거하여 학문연구에 노력하였다.
세종대에 서씨일문(徐氏一門)의 근거지였던 달성이 경상도지역의 요새가 되므로 다른 땅과 바꾸게 하자, 이에 협조하여 포상을 받게 되었으나, 그는 포상 대신에 환자〔還上〕의 모곡(耗穀 : 세곡을 되돌려 받을 때 운반이나 동물의 해로 손실되는 양을 추가한 양)을 감하여줄 것을 상소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로 인하여 인근주민의 추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남산의 옛 역(驛)터와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등이 하사되었고, 관료로 탁용되게 되었다. 그 결과 1433년(세종 15) 첨지중추원사가 되었고,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다음 해에 전라도처치사가 되었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2)서거정(徐居正, 1420~148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익진(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의(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미성(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최항(崔恒)이 그의 자형(姉兄)이다.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 赤壁賦>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 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를 공편했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오자 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 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필원잡기 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 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경국대전≫·≪연주시격언해 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동인시화 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동인시문 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그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우리 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 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을 편찬했는데, 그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그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에 실린 그의 서문과 ≪필원잡기≫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서는 우리 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 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 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서해(徐嶰, 1537~1559)
조선의 학자. 자는 정지(挺之), 호는 함재(涵齋), 예조참의(禮曹參議) 고(固)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 일찍부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 20세에 이미 문장·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으나 오래 살지를 못하였다. 대구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4)서사원(徐思遠,1550~1615)
자(字)는 행보(行甫), 호(號)는 낙재(樂齋), 시(諡)는 문강(文康)
유일(遺逸)로써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고 선생은 부(父) 진사공 형(浻)의 명을 받들어 채상사(蔡上舍) 응린(應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글을 외우고 익힘이 총명하고 사장(詞章)의 아름다움이 빼어나 날로 칭송이 더하였으며 관년(冠年)이 되어서 사서(史書)에 익숙하고 시문(時文)에도 능하였다. 서낙재(徐樂齋)선생은 1550년(명종5년, 경술)에 팔거현(八筥縣) 외가(外家)에서 출생하여1615년(광해7년, 을묘)에 별세한 학자이고, 의병장이며 평생 교화(敎化), 덕행(德行), 효행(孝行)으로 달성십현(十賢)의 한 분이시다.본관(本貫)은 달성(達成)이고 흡(洽)(1527~1593)의 아들이며 달성군(達成君) 영(穎)의 후손으로, 7세때 진사 연정선생 백부 형(浻)(1524~1575)에게 입양했다. 대구남산에서 을해(1575년 선조8년) 선고별세(先考別世) 후 이천선영(伊川先塋)에 시묘생활을 한 뒤 이천으로 자리 잡았다. 1572년(선조5년, 임신) 오산(熬山)에서 5~6월 여름 50일 동안 산사(山寺)등에서 고문(古文), 고시(古詩) 및 당송(唐宋)의 시(詩)를 공부 시부(詩賦)를 짓는 수업에 참여 하였다. 그 후에는 정한강(鄭寒岡), 김동강(金東岡) 선생의 사우(師友)이시다. 주자학(朱子學)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이후에는 후진(後進) 양성에 힘썼다. 1575년(선조8년,을해)에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개연히 구도(求道)의 뜻을 가졌다. 1584년(선조17년, 갑신)에 학행으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아니 되어 사임했으며, 1595년(선조28년, 을미)에 청안현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3년간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17년간 개령(開寧), 옥과(玉果), 연기(燕岐)의 현감, 형조, 호조의 정랑(正郞), 역학교정(易學校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아니하였다. 학문적으로 장여헌(張旅軒), 손모당(孫慕堂), 최수우당(崔守愚堂), 조대소헌(趙大笑軒), 박대암(朴大庵), 정우복(鄭愚伏) 등과 교류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공산성(公山城)에서 창의하여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 회맹에 참가하였다. 평생 교화(敎化)로 정사학규(精舍學規)를 만들어 학도들에게 학문을 연마하는 방법과 몸을 닦는 규범(規範)을 제정하여 평생실행(平生實行) 할 수 있도록 강학(講學)하셨다. 문하생(門下生)이 180명이 있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구암서원(龜巖書院)(2008년 8월 27일(음) 봉안 고유)과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임란호국중의단 등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문집(文集)은 낙재집(樂齋集) 7권(卷), 일기(日記), 연보(年譜) 등 6책이 있으며, 2008년 6월 4일 (양)대구동방한문학회 주최로 국역낙재선생문집(國譯樂齋先生文集) 4권(卷)과 국역낙재선생일기(國譯樂齋先生日記) 1권(卷)의 발간 기념회를 가졌다.
5)서성(徐渻, 1558~16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이며,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팽소(彭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고(固)이고, 아버지는 해(嶰)이다. 어머니는 좌의정 이고(李股)의 딸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 예문관의 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 홍문관의 전적(典籍)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병조정랑·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해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 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평양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 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 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했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이호민(李好閔)·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했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봉집 藥峯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