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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암동성당 50주년사
=응암동 본당 50주년史 ==========================================================
응암동성당 50년사 이야기1부 -
1] 응암동 본당 창설 배경 ~
2] 제1대 김윤상 베네딕도 신부(1968.08~1969.04
3] 제2대 유재국 바실리오 신부 (1969.04~1970.01)
4] 제3대 고명철 아우구스티노 신부 (1970.01~1971.01)
5] 제4대 차인현 알로이시오 신부 (1971.1~1973.12)
6] 제5대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1973.12~1977.12)
7] 제6대 최창화 토마스아퀴나스 신부(1977.12~1982.07)
1] 응암동 본당의 태동과 창설
60년대 초. 응암동 신자 168명은 수색역 건너편 시장 골목 안에 있는 수색동 205번지의 판잣집이었던 수색 본당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해왔다. 당시 응암동 일대는 한강변 수재민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서울시에서 수재민들을 위해 수재민 주택을 분양하여 서울 각지에서 모여 온 인구가 날로 증가하였다. 특히 중림동 본당, 용산 본당 그리고 장호원 본당 출신 신자들이 많이 입주해 오면서 1966년경 수색 본당에 교적을 둔 응암동 신자수는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수색 본당 주임신부는 임충신 마티아 신부로서 넓은 관내(응암동, 역촌동, 신사동, 증산동, 남/북가좌동, 성산동, 상암동, 수색동, 화전동, 행주동 등) 신자 관리를 비롯한 사목활동으로 어려움이 많은 시절이었다.
수색 본당 시절 일부 응암동 신자들은 곤궁한 생활로 본당과의 거리가 멀고 차비와 헌금 마련이 어려운 실정에 냉담하는 교우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이에 당시 열심한 응암동 교우였던 이광렬 프란치스코, 이충근 요한, 김명경 막달레나, 오태환 가타리나, 정 글라라 그리고 석옥건 루피나 등이 모여 늘어나는 냉담자 회두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자주 모여 의논하여 주님을 체험하는 공소 예절(公所禮節)을 가짐으로써 신앙생활을 저버리지 않고 또 가난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공소(公所) 마련이 급선무라는 다수의 의견이 수렴되어 생활 여유가 있는 교우들의 가정을 순방하며 공소 마련 기금을 모금하였다.
이렇게 모금한 기금으로 지금의 성당 앞(당시에는 큰길이 없고 호박밭이었다)에 있는 기다란 판잣집을 4만 원에 전세를 얻어 말끔히 꾸며 모임의 장소로 정하여 자주 모임을 갖으며 공소터를 물색하던 중, 응암동 산 9번지(지금의 150번 버스종점 근처) 시유지(市有地) 50평을 권리금을 주고 맡으려고 추진하였으나 장차 성당터로 부적당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때가 1966년부터 67년 무렵이었다.
1968년. 충암학원 후문 일대 땅을 많이 가지고 있던 성임옥 빅토리아 (당시 56세) 교우의 깊은 신심을 전해 들은 이광렬, 이충근, 석옥건, 오 가타리나, 김 막달레나, 정 글라라 등 몇몇 교우들이 성임옥 교우를 찾아가 방문하여 공소 건립 취지를 설명하고 성 빅토리아에게 소유 대지 일부를 희사해줄 것을 간청하였는데, 성 빅토리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충암학원 후문 근처 응암동 247-21호 소재 대지 185평(호박밭)을 선뜻 내놓았다.
그 해 7월. 우선적으로 185평 호박밭에 남대문 시장에서 헌 천막을 사다가 세우고 바닥에는 가마니를 얻어다 깔았다. 그러나 얼마 후 집중호우가 쏟아져 헌 천막이 찢어지고 주저앉아 모두를 망연자실하게 하였는데, 군인 교우였던 이철호(요한, 당시 현역 육군 대위)가 대형 군용 천막을 가져다가 부하 장병들과 함께 든든하게 다시 세워놓았다. ‘내 이름 아래 두 사람 이상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는 성서 말씀대로 하느님은 분명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하였다.
천막이 세워진 후 첫 미사를 봉헌할 생각을 가지고 여러 교우들이 용산 본당 주임신부였던 김윤상 베네딕도 신부가 성모병원에서 척추수술을 받고 휴양 겸 수색과 불광동 본당 손님 신부로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이광렬, 이충근, 석옥건 등이 김 신부를 찾아가 간청드려 미사 집전을 허락받고 1968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응암동 신자 300여 명이 참례하여 감격의 첫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감격의 첫 미사 봉헌 후, 열심한 교우들이 교구청을 찾아가 본당 설정과 첫 미사를 집전한 김윤상 베네딕도 신부를 응암동에 모시기를 간청하였다. 이에 교구청은 1968년 9월 3일 김윤상 신부를 신설 응암동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하고 10월 23일 본당 설정을 정식 승인하였다. 응암동 천주교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이 자생(自生)적이었던 것처럼 응암동 신자들의 굳은 신앙심으로 이루어진 자생적 교회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응암동 본당 50주년 史 1 ===============================================================
제1대 김윤상 베네딕도 신부 (1968.08~1969.04)
1968년9월 3일 주임신부로 정식 부임한 김윤상 베네딕도 신부는 응암동 본당의 주보(主保-수호성인)로서 ‘성모성심’을 정하고 본당 초대회장에 이광렬 프란치스코, 여회장에 김명경 막달레나를 각각 임명하였다.
김윤상 신부와 함께 이광렬, 이충근, 신영철, 임하천, 김길흠, 정상완 중심으로 성전 건립 추진 기성회를 조직하여 성전 건립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천막 성당 부지(185평)는 성당과 사제관을 짓기에 좁은 땅이어서 성 빅토리아에게 대지를 더 희사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기성회는 천막 성당터 대지를 팔아 다른 곳으로 넓혀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전 장소를 대림시장 입구의 골목으로 정하였으나 대지 매매 계약 후, 성 빅토리아와 의견 충돌하여 그 잡음이 교구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교구청에서는 교구의 사전 승인 없이 대지를 임의로 팔고 산 계약은 해약하게 하였고, 그 책임을 물어 김윤상 신부가 본당 부임 8개월 만인 1969년 4월 20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정릉)’ 지도 신부로 인사이동이 되었다.
천막 성당 시절 특기할 사항으로서는 신자수가 초창기 783명이었던 것이 1968년 말경에는 1,430명에 이르렀다. 새 입교자 교리, 첫 영성체 교리, 신자 재교욱 등에 힘썼던 김윤상 신부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진성만 베드로 신부(예수회 소속)에게 도움을 청하여 진성만 신부가 손님 신부로 어려운 시절 응암동 신자의 영신 생활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응암동 본당 50주년 史 2 ==========================================================
제2대 유재국 바실리오 신부 (1969.04~1970.01)
유재국 바실리오 신부는 학자 신부로 파리 생쉴피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사제 서품을 받고 파리 가톨릭 대학교 교리 사목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유 신부는 한국 천주교 교리서 편찬위원을 역임하였고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신부로 역임하던 중 김윤상 베네딕토 신부와 자리를 바꿔 옮겨 오게 되었다.
1969년 4월. 유재국 신부는 응암동 천막성당에 부임한 이후 이광렬 회장 후임으로 강덕희 베네딕도 회장을 새로 임명하였다. 기존의 성전 건립 기성회는 사목회로 합쳤다. 유 신부는 부임과 동시 성전 건립에 큰 관심을 가지고 새로 임명한 강덕희 회장과 기성회 임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장래성 고려하여 천막 성당 터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을 물색토록 하였으며 이에 현 대성전 터인 은평구 응암동 338의 2 (현 가좌로 200)로 결정되었다.
유재국 신부는 300평 부지에 이문동 본당에서 콘셋(30평)을 물려받아와 반원형의 임시 건물인 콘셋성당을 세우고 천막 성당을 콘셋성당으로 옮겼다(4/30). 콘셋성당에서 본당 창설 이래 두 번째로 23명에 대한 영세식(5/10)이 있었으며, 본당 최초로 레지오 마리에 ‘바뇌의 성모’ 쁘레시디움이 창단(9/18)되는 등 본당 사목에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70년. 성전 건립에 대한 설계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1월, 유재국 신부는 가톨릭대학 교수로 발령이 나서 8개월 만인 1월 20일 응암동을 떠나게 되었다
=응암동 본당 50년 史 3 ========================================================
제3대 고명철 아우구스티노 신부 (1970. 01~1971. 01)
소신학교 부교장이었던 고명철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제3대 주임신부로 1970년 1월 15일 부임하였다. 고명철 신부는 부임 직후 제3대 총회장에 임한천 요셉, 부회장에 김종귀 바오로, 여부회장에 석옥건 루피나, 총무에 박승재 가브리엘을 각각 임명하였다.
고명철 신부 또한 부임 초부터 성전 건립이라는 대역사를 위해 헌신하여 1970년 4월 26일 대망의 본당 신축 공사 착공식을 가졌다.
1천만원 예산으로 총회장 임한천 요셉 감독하에 진행된 공사는 맨주먹으로 시작한 공사이다. 김종귀 바오로 부회장과 이철호 요셉 교우 등이 큰 도움이 되었다. 김종귀 바오로 부회장은 당시 근무처였던 성모병원(당시 관리계장 재직)이 신축된 후 뜯어낸 거푸집과 받침목 등 자재 여섯 트럭분을 김수환 추기경의 허락을 받고 무상으로 얻어 성전 건축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고, 천막 성당 시절 대형 군용 천막을 기증했던 이철호 요셉 교우는 또다시 성전건립에 기여하기 위해 콘크리트용 자갈 등을 수송해 주었다.
고명철 신부는 가가호호 교우들의 집을 방문하여 성전 건립 기금을 신입받는데 전심전력하였고, 임원 및 반장들도 혼연일체 되어 교우 각 가정의 절미 운동 추진, 건축비 마련을 위한 반별 계 조직, 각 가정 저금통 모금, 이웃 본당 방문 물품 판매도 하였다. 또한 어려운 생활로 건축 기금을 낼 수 없는 교우들은 건축 기금 대신 당시 막노동 노임에 따라 노역으로 대신 헌신하기도 하는 등 모든 교우가 한마음으로 내 고장 성당 짓는 일에 기쁜 마음으로 갖은 역경과 갈등을 감내하며 성전 건축에 정성을 다하여 8월 16일에 드디어 상량식(上梁式)을 갖게 되었다.
상량식 이후, 2층 슬라브 골조공사를 무난히 마치고 미완성된 성당에서 그해 성탄 미사를 봉헌하였다. 고명철 신부의 흩어진 양 떼를 불러 모은 착한 목자의 헌신을 통해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1)는 주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큰일을 해낼 수가 있었다.
1971년 1월 15일. 고명철 신부는 교구 인사발령으로 전에 몸담았던 소신학교 교장으로 다시 부임하게 되어 응암동을 떠나게 되었다. 본당 사목을 차분히 펴보지도 못하고 성전 건립의 품만 팔다 떠나는 고명철 신부는 성당 건축 공사에 노임이 밀리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본인의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50만 원을 건축기금으로 내주셨다.
=응암동 본당 50년史4=========================================================
제4대 차인현 알로이시오 신부 (1971.1~1973.12)
소신학교 교사로 있던 차인현 알로이시오 신부가 1971년 1월 15일 제4대 주임신부로 부임하게 되었다. 차인현 신부는 너무 낡아 빛바랜 사제복에 두툼한 더블 코트를 즐겨 세속에 관심없는 예술가의 모습이 특징이었던 수더분함을 풍기는 신부였다. 실제로 차인현 신부는 첼로를 전공한 음악가이다.
차인현 신부는 전임 역대 신부들이 못다 이룬 성전 건립에 주력함과 아울러 성전 건립의 역사로 불목하던 신자들의 일치를 위해 신자 재교육, 영세 입교자 교육에 힘썼다.
1971년 4월. 본당 창설이래 처음으로 사목회를 정식 조직하여 임원을 개편하였다. 총회장에 허규 요한, 부회장에 이남형 안드레아, 그밖에 각 분과별 상임위원을 고루 임명하여 사목회를 대폭 확장하였다. 10월에는 본당 창설 이래 첫 번째 견진성사(200명)가 노기남 대주교 집전하에 이루어졌다. 또한 성당 건립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본당 성가대를 활성화하여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성전건립 기금마련 음악회를 열어 차인현 신부도 첼로 독주를 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차 신부는 불우이웃에게 남몰래 밤에 쌀을 갖다놓는 선행으로 산타클로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1972년 10월 22일 차인현 신부 부임 1년 9개월 만에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2년 6개월의 공사 끝에 김윤상, 유재국, 고명철, 차인현 네 분 신부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드디어 대망의 성전(연건평 215평)을 준공되어 노기남 대주교를 비롯하여 초대 김윤상 신부와 3대 고명철 신부가 함께 자리하여 성전 축성식을 가졌다. 이날 본당 두 번째 견진성사(112명)를 함께 가짐으로써 축성식이 더욱 빛났다. 아울러 1973년 5월 31일 성모의 밤 행사를 계기로 전 아네스가 기증한 새 성모상 제막식도 함께 가져 ‘성모성심’ 성당의 면모를 갖추었다.
차인현 신부는 재임 중 8회에 걸쳐 307명의 새 영세자를 배출하는 사목 성과를 거두었고, 성전 완공과 함께 획기적인 성장의 기틀을 잡아 놓았다. 재임 신부들 가운데 가장 오래 2년 11개월 동안 본당 사목에 열정을 바친 차 신부는 1973년 12월 종교음악을 연찬(硏鑽) 하기 위해 로마로 떠났다.
(뒷줄 중앙이 교구장 공로패를 수상한 성 빅토리아, 1972.10.22)
=응암동 본당 50주년 史5=====================================================
제5대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1973.12~1977.12)
함세웅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우등생으로 로마 우르바노 신학대학으로 유학, 68년 동대학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 되었다. 서품과 동시에 로마 그레고리안 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연구, 1973년 4월 교부학(敎父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연희동 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였다가 곧 바로 1973년 12월 3일 응암동 본당 제 5대 주임신부로 부임하게 되었다.
함신부는 응암동 부임 후 늘어나는 신자들의 교리지도와 전교를 담당할 수녀들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명동 관구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여 1974년 3월 1일 응암 본당에 수녀원 분원장으로 김옥기 아멜리아 수녀가, 전교 수녀로 정기명 마리멜라니 수녀가 첫 부임하게 되었다. 또한 함 신부는 본당 내에 미비했던 장궤틀 50개(400석)을 마련하여 전례 분위기 쇄신하였다.
1974년 5월 9일.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집전으로 본당 창설 이래 세 번째 견진성사(84명)가 있었으며, 또 역촌동 본당이 같은 날 창설되어 본당 관할 역촌 공소 46세대 150명의 신자를 신설 역촌동 본당에 분할 이관하였다. 또 침체되어 있던 연령회를 위해 재건 총회를 열어 이광오 바르톨로메오가 그 해 8월 20일 연령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함세웅 신부는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등 각계 인사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되는 사건을 계기로 교구를 초월한 사제들의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의 창립을 주관하게 되면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1974년 민주회복 국민선언과 1976년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에 앞장 서 참여한 함세웅 신부는 1976년 3월 7일 본당 11시 주일 미사 때, 강론을 마치고 신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드린 후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관원에 의해 연행 수감되었다. 이후 응암동 본당도 수사‧정보기관원의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쉬는 신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함세웅 신부는 76년 12월 29일 서울 고등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형의 유죄 판결을 선고받아 공주 교도소에 수감 복역되었다. 복역 중 1년 10개월 만인 1977년 12월 25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어 1978년 1월 16일 명동 주교좌성당에서 석방 환영 미사, 응암동본당에서는 1월 22일 미사와 석방 환영 및 환송식을 가졌다.
함세웅 신부는 응암동 본당 73년 12월 부임 이후 75년 성탄 때까지 6차례 걸쳐서 337명의 영세자를 배출하였다.
[임시 주임신부 시절- 송순용 라자로 신부, 박용일 다테오 신부]
함세웅 주임신부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교구에서는 1976년 3월 13일 송순용 라자로 신부를 임시로 부임토록 했다. 송순용 신부는 군종 신부로 소임 된 후 임기를 마치고 제대하여 사제 정기 인사이동 때까지 응암 본당에서 3개월간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응암 본당을 방문하여 조속한 석방 기도회를 가졌고(4.17), 송순용 신부는 ‘성모의 밤’을 개최하여 구속 사제를 위한 특별 기도회(5.31)를 가졌다.
6월 10일 교구 사제 인사이동으로 송순용 신부가 용산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고 후임으로 양재동 본당 주임신부로 반포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킨 박용일 다테오 신부가 임시 주임신부로 오게 되었다. 박용일 신부는 해외 교포 사목을 위해 1977년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준비하는 기간 동안 응암동 본당에서 1년 5개월간 재임하였으며 재임기간 동안 청소년과 어린이를 위한 사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응암동 본당 50주년 史6=================================================
제6대 최창화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1977.12~1982.07)
구파발 본당에서 사목하던 최창화 신부가 1977년 12월 16일 응암동 본당 제6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부임 후 곧바로 사목회 회장단을 개선하여 회장으로 이남형 스테파노, 부회장 박근수 요한을 임명하여 사목을 시작하였다.
1978년 본당 설정 10주년이 되는 해로 최창화 신부 ‘쇄신의 해’로 정하고 모든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가 일체 되는 교회 전체의 쇄신을 위해 정진을 독려하였다. 본당 내 옛 사제관을 보수하여 다목적 휴게실로 꾸며 모든 교우들에게 개방하였으며 성가대 재결성(8.15), 무료 영화 상영(10.1), 기념 음악회(8.27), 새 성모자상 제막 및 기념식(10.15)등 기념행사들을 다채롭게 가졌다.
또한 1978년 6월 18일 본당 네 번째 견진성사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집전하여 크리스마스 성유로 특은을 받도록 견진자(197명)에게 도유 예절을 베푸셨다.
1979년. ‘복음적 교회상 정립의 해’의 교구 사목지표에 따라 본당 사목 중점 사업도 이에 맞춰 장년 사도회 발족(4.1), 경로잔치(4.29 300명 참석), 레지오 마리애 단합대회(7.10), 복자 성월 주일학교 어린이 글짓기 대회(9.9), 구역 대항 체육대회(10.14 충암고교), 성소 후원회 발족(11.11)되었으며 사목 확대를 위해 손님 신부 초청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배세영(마르첼리노) 신부가 3월 25일부터 주일마다 손님 신부로 본당 사목을 협조하였다.
1980년. 최창화 신부는 ‘배우는 교회의 해’로 본당 사목 계획을 정하여 배우고 기도하고 봉사하며 이웃과는 화목한 전교하는 생활을 목표로 하였다. 장년 사도회 임원을 개선하고 응암 본당에서 2명이 대신학 입학(김민수 이냐시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하였으며, 본당 출신 김홍진 요한의 학사 부제서품도 있었다. 또 교구 주최 ‘제2회 젊은이 신앙대회’(10.28)에서 추기경패에 해당하는 모범 본당패, 모범 학생상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첫 성령쇄신 세미나를 개최(10,15~11.4)하고 아울러 청년 성가대 창단(11.23), 어머니 성가대 발족(12.7) 등 본당 성가대가 재조직된 해이다.
1981년. 교회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인 ‘선교에 주력한 해’이다. 요셉 성인을 본받아 성가정을 이루며 믿음 생활을 실천하고자 ‘요셉회’를 발족(3.29)하고 주일학교 후원회 임원을 확대하였으며, 본당 교육관 마련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고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아 10월 교구 신앙대회와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앞두고 본당 깃발 도안 공모(당선작. 전상균 바오로)하였고, 연말에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주임신부 추천 무료 진료 및 건강상담 실시하고 요셉회와 성모회에서도 찻집 운영하여 교우 상호 간 친목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1981년은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지구 신앙대회가 6월 14일 서울교구 10개 지구에서 일제히 열렸다. 6 지구에서는 응암 본당이 주관하였다. 10개 본당 8,127명의 신자들이 충암고등학교에서 모여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 저마다의 신앙을 북돋으며 재충전하였다. 응암동 교우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대회 준비, 진행, 질서유지 앞장서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82년. 최창화 신부는 ‘본당 공동체의 해’를 맞아 응암 본당에서는 새로운 본당 공동체의 구현을 위해 거룩한 본당, 믿음과 희망의 본당, 예배하는 본당, 사랑과 친교의 본당, 선교하는 본당을 기본방침으로 삼아 사목 하였으며 성소후원회 임원이 개선되었다. 서울대교구 주최 사순절 어린이 백일장과 사생대회에서 응암 본당 어린이들이 최우수상(유희진), 우수상(정현주), 장려상(정연승)을 수상하는 기량을 발휘하였다(4.18).
최창화 스테파노 신부는 해외(필리핀) 연수차 1982년 6월 6일 본당을 떠나게 되었다. 4년 6개월 재임하며 본당 도약을 이루는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신부로 많은 응암동 교우들이 최창화 신부를 기억하고 있다.
최창화 신부의 후임으로 그동안 본당 손님 신부로 있던 배세영 마르첼리노 신부가 주임신부 서리로 부임하여 3개월 후, 1982년 9월 9일 봉희만 안토니오 신부 부임까지 사목 하였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6지구에서는 응암 본당이 주관이 되어 충암고등학교 운동에서 열렸다.
10개 본당(구파발,금촌,문산,법원리,불광동,수색,역촌동,응암동,일산,홍제동) 8,127명 신자들이 참석하였다.
배세영 신부는 1991년 6월 28일 송별 미사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동안 본당 사목을 도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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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암동 본당 50년 史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