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18일 새벽. 종식은 알람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에게 오늘은 다른 날과 달라도 한참 다른 날이었다. 어제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과음했지만 그다지 취하지 않았다. 그는 대충 옷을 걸치고 차를 몰고 경기도 과천 정부종합청사로 향했다. 차안에서 라디오를 켰다. 김대중 제 15대 당선인의 프로필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정권교체가 일어난 날이다.
종식은 어제 저녁일이 뚜렷이 떠올랐다. 어제는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신한국당 이회창후보가 맞붙은 대통령 선거였다. 종식은 어제 아침 과천 기자실에 가서 대기했다. 종식은 브라보 방송국의 보도본부 사회부 차장겸 일선 기자로 건설교통부 교통담당 이었다. 대선날 어떤 상황이 벌어질 지 몰라 기자들 모두 긴장속에 취재 또는 대기상태였다. 그러다 저녁 6시 회사로 돌아왔다. 종식은 브라보 방송국의 보도본부 사회부 차장 그러니까 데스크로 재직했다. 회사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대단히 여권성향이던 보도본부 상황이어서인지 분위기로 볼 때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가 당선된다는 것이 보장되지 않은 그런 모습같았다. 종식의 후배인 영원이 다가와 커피 한 잔하자고 한다. 둘은 보도본부 복도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마셨다. " 형. 아무래도 이번엔 디제이가 당선될 것 같은데요" 영원이 말한다." 그래. 드디어 정권교체인가" 종식은 영원에게 말했다. " 검경 정보로는 디제이가 승리할 것 같다는데요" 박영원은 문화부 차장이었다. 아무래도 사회부보다는 문화부 기자들과 데스크들이 회사에 있는 시간이 많아 내부 정보는 더 많았다. 대선날의 각종 정보는 회사안에서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정치부에서 나오는 전망 그리고 사회부 사건 담당들이 분석하는 판세는 회사안이 더욱 정확한 편이었다. 기자실에서 공보관등 몇몇이 다가와 대선판세를 물어봤지만 서로의 정보가 일치하지 않아 혼선만 더해질 뿐이었다.
종식은 자리로 돌아와 전체 상황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사회부에서 멀지 않은 보도국장 자리의 상황이 궁금했다. 보도국장인 k는 조바심이 나는지 이리 저리 안절부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텔레비젼에서는 대선 특집 방송이 이어지고 있었다. 종식은 또 다른 후배인 김평온에게 전화를 건다. " 어 난데. 디제이가 될 확률이 많다면서. 정말 그런 그야" 평온은 정치부 기자였기 때문에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평온은 아직 정확하지 않다고 말하고 좀 더 있어야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급히 전화를 끊었다. 대통령 선거같은 엄청나게 중요한 정치 행사때는 사실 사회부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퇴근하기고 그렇고 그래서 그는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텔레비젼에서는 처음에는 박빙이던 결과가 점점 디제의의 승리로 가는 분위기이다. 저녁 8시가 되자 여기저기에서 기자들이 퇴근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대충 판이 끝나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종식은 영원에게 전화해서 같이 퇴근하자고 했다. 오늘처럼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면 술한잔 안먹으면 섭하다고 생각하는 종식이었다. 영원도 비슷한 마음이었으리라.
저녁 9시반이 지나자 대세는 기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보도국장실에서 가까운데 있는 사회부 차장이 먼저 자리를 뜰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밤 10가 조금 지나자 보도국장 k가 어두운 표정으로 퇴근하면서 사회부 종식에게 " 집에 가. 상황은 끝났는데 뭘. 에이" 보도국장은 신한국당 이회창 대선후보와 가까운 사이라고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선후배 사이라던가. 하여튼 보도국장은 이회창 후보가 당선될 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을 것이라고 종식은 생각했다.그런 그였기에 그가 대선 방송을 끝까지 보지 않고 퇴근한다는 것은 디제이의 승리가 확실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일이기도 했다. 보도국장이 퇴근하자 종식은 영원에게 전화해서 지하주차장에서 만나자고 말한다.
잠시후 지하주차장에서 종식과 영원은 만나 일단 경기도 일산에 있는 술집으로 향한다. 종식도 영원도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아 몹시 시장하던 참이다. 일산 후곡마을 치킨집에 도착한 둘은 치맥으로 늦은 저녁을 시작한다. 당시 디제이의 집은 일산에 있었기에 종식은 역사적인 순간에 여기서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이제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시작되는 것인가. 아 참으로 오래 기다린 것이지" "형. 참으로 뜻깊은 오늘이에요. 우리가 언제 이런 정권교체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진짜 기분 좋은 밤입니다. 폭음 하시죠." 종식과 영원은 오랜시간 술을 마셨다. 많이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다. 둘은 새벽 두시가 넘어서 술집을 나섰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아 하늘도 서설을 내리시는구만. 이제 이나라에서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네" 종식의 말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니였다. 참으로 얼마나 기다렸던 정권교체였던가. 아마도 한국 최초의 정권교체일 것이리라. 종식은 영원을 택시에 태워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식의 가족들은 모두 잠에 든 상황이었다. 종식은 씻는둥 마는둥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이래저래 피곤했던 대선 하루를 진무해주듯이 함박눈은 편하게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