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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서원터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 산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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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을 향사하는 최초의 서원은 그가 죽은 뒤 60여 년 후인 1565년(명종 20)에 謫所인 전라도 순천에 건립된 玉川書院이다. 이후 그의 고향인 현풍에서도 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 건립이 추진되어 1568년(선조원년) 비슬산 계곡에 雙溪書院이 건립되었다. 이 서원에 대한 자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탓에 건립과정이나 운영 등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알 수 없다. 다만 창건 당시 文籍에 의하면 다른 여타의 서원과 마찬가지로 鄕中士林 뿐만이 아니라 감사를 비롯한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1573년(선조 6) 경상감사의 狀啓에 의하여 <雙溪>의 賜額과 함께 서적을 하사받았다.
쌍계서원은 壬亂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당시 전란으로 인한 향촌사회의 피폐와 물력의 부족으로 10여 년 동안 중건되지 못하였다. 이후 1604년(선조 37) 현풍현 오설리 송림 보로동으로 옮겨 중건하였다. 이때 서원명을 甫老洞로으 改名하였다. 1610년(광해 2)에 봉안하였으며, 같은해 도내 유생들의 啓請으로 <道東>으로 再賜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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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曺植) 1501년(연산군 7)~1572년(선조 5)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71 1월, 지난해 12월에 졸한 退溪 李滉의 부음을 이때 듣다. ○ 4월, 임금이 特命으로 경상 감사를 시켜 음식물을 하사하니 글을 올려 謝恩하다. ○ 〈寒暄堂畫屛跋〉을 짓다. ○ 9월, 吳健이 찾아뵙다. ○ 11월, 盧禛이 찾아뵙다. ○ 12월 21일, 병석에 눕다.
南冥先生集卷之二 / [跋] / 寒暄堂畫屛跋 寒暄姓金。名宏弼。字大猷
善藏者。藏於天。太虛者。天之實也。虛而藏用。故其藏也無藏。物無所遁。而人莫與爭。大而天下。小而一介。以力控之則喪。以智籠之則失。必也物各付物。藏之於自然而後。責付於天矣。今觀寒暄先生家藏古畫。轉沒飄泊。主不得爲有者。近百年矣。於今。復得爲主人之藏焉。數紙遺墨。非有人物典守。鬼神呵護。鼠不得破。蠧不得蠱。風不得毁。雨不得朽。趣色涵茫。完如昨日。粧成十幅短屛。蒼檜老松。碧樹靑楊。古木叢篁。琴鶴牛羊。垂綸翫月。雲山草屋。百里長河。千尺懸瀑。光陰何代。息偃爲孰。想像先生。對眼卧遊。寓目興思。做得甚樣襟懷耶。舒卷萬念。嘯咏俛昂。颯颯精爽。依俙留在於畫圖中。彷彿猶見於羹墻間。其人已去。欲聞噫歆而不可得焉。爲子孫者。桑榟猶敬。况此神會之地。如見其面目者乎。後生之欲見先生而不得者。亦於此焉興懷。畫出安堅。堅有傳神法。爲東國吳道子。指與物化。不以心稽。描出自然之眞。幻成生香活毛。初付之以物而已。及先生之不幸也。籍其家。家業蕩盡。靡有敝帚。獨此一物。藏於圖畫署。於是而藏之以無藏。非吾之有也。又不知在何年代。飄出民家。莫知所之。復歸於無藏之地矣。去歲庚午。主上偶於召對。問金宏弼遺跡可得見乎。承宣李忠綽登對。臣見一民家有金某家藏畫屛帖云。先生之孫草溪守立爲探於忠綽。忠綽曰。曾見於縣監吳彦毅家。彦毅之孫學諭澐。初得於其聘家許元輔之門。改粧新絹。以與金草溪。皆非人力所及。主上之問。初發於自然之偶。他人之傳。曾出於自然之幸。家孫之得。終歸於自然之會。是知付之以理之自然者。實而無跡。聽之以物之自化者。虛而有待。無藏也故有藏。無意也故善藏。可見其藏於天而物莫能遁。人莫能奪也。請主人勿以爲家藏。而藏於先生書院。其庶幾善藏者乎。若以金緘而世守之。未必不爲壑藏之舟矣。金草溪年近八十。爲訪我於頭流。請記巓末。辭不獲焉以識。隆慶五年辛未重光協洽玄黓涒灘十一日。南冥曺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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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11월 28일 갑진 2번째기사 1573년 명 만력(萬曆) 1년
경상 감사가 김굉필·이언적·이황 서원에 사액할 것을 청하자 예조에 계하하다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가 장계(狀啓)하기를,
"도내(道內) 현풍(玄風)에는 김굉필(金宏弼)의 서원(書院)을 설치하였고, 경주(慶州)에는 이언적(李彦迪)의 서원을 설치하였고, 영천(榮川)에는 이황(李滉)의 서원을 설치하였으니, 사액(賜額)하고 서적을 반강(頒降)하소서."
하였는데, 예조에 계하(啓下)하였다.
○慶尙道監司狀啓: "道內玄風設金宏弼書院, 慶州設李彦迪書院, 榮川設李滉書院, 乞賜額, 頒降書籍。" 啓下禮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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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賢錄
景賢續錄補遺下
神道碑銘 幷序
盡屛跋
善藏者藏於天太虛者天之實也虛而藏用故其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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也無藏物無所遁而人莫與爭大而天下小而一介 以力控之則喪以智籠之則失必也物各付物藏之 於自然而後責付於天矣今觀寒喧先生家藏古畵 轉沒漂泊主不得爲有者近百年矣於今復得爲主 人之藏焉數紙遺墨非有人物典守鬼神呵護鼠不 得破蠹不得蠱風不得毁雨不得枋趣色涵茫宛如 昨日糚成十幅短屛蒼檜老松碧樹靑楊古木叢篁 琴鶴牛羊垂綸翫月雲山草屋百里長河千尺懸瀑 光陰何代息偃爲孰想像先生對眼臥遊寓目興思 做得甚樣襟懷耶舒卷萬念嘯詠俛仰颯颯淸爽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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俙留在於畵圖中彷彿猶見於羹墻間其人已去欲 聞噫歆而不可得焉爲子孫者桑梓猶敬況此神會 之地如見其面目者乎後生之欲見先生而不得者 亦於此焉興懷畵出安堅堅有傳神法爲東國吳道 子指與物化不以心稽描出自然之眞幻成生香活 物初付之以物而已及先生之不幸也籍其家家業 蕩盡靡有弊帚獨此一物藏於圖畫署於是而藏之 以無藏非吾之有也又不知在何年代飄出民家莫 知所之復歸於無藏之地矣去歲庚午主上偶於 召對問金宏弼遺迹可得見乎承宣李忠綽登對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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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一民家有金某家藏畫屛帖云先生之孫草溪守 立爲探於忠綽忠綽曰曾見於縣監吳彦毅家彦毅 之孫學諭澐初得於其聘家許元輔之門改糚新絹 以與金草溪皆非人力所及主上之問初發於自 然之偶他人之傳曾出於自然之幸家孫之得終歸 於自然之會是知付之以理之自然者實而無迹聽 之以物之自化者虛而有待無藏也故有藏無意也 故善藏可見其藏於天而物莫能遁人莫能奪也請 主人勿以爲家藏而藏於先生書院其庶幾善藏者 乎若以金緘而世守之未必不爲壑藏之舟矣金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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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年近八十爲訪我於頭流請記顚末辭不獲焉以 識隆慶五年辛未重光協洽玄黓涒灘十一日南冥 曺植跋
按此屛帖家不能傳朴大庵惺遣興詩序曰昔余 嘗遊雙溪書院見寒暄先生古屛其一幅畫雲山 千疊茅屋數間中有幅巾端坐手閱芸篇者最愛 翫久而不忘云豈此屛藏於雙溪書院見灰於壬 辰兵燹歟 其詩曰曾見寒暄畫屛裏雲山蒼翠幾重深千巖淨界三間屋一軸遺篇萬古 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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冲齋先生文集年譜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 9월, ‘忠定’(事君盡節曰忠 純行不爽曰定)의 시호를 받다.
五年辛未九月。贈諡忠定。事君盡節曰忠。純行不爽曰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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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권, 선조 3년 5월 6일 계유 1번째기사 1570년 명 융경(隆慶) 4년
조광조를 문정으로, 이언적을 문원으로, 권벌을 충정으로 각각 시호를 내리다
조광조(趙光祖)의 시호(諡號)를 문정(文正)으로, 이언적(李彦迪)의 시호를 문원(文元)으로, 권벌(權橃)의 시호를 충정(忠定)으로 내렸다.
○癸酉/贈趙光祖諡文正, 李彦迪諡文元, 權橃諡忠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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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溪先生年譜卷之一
四年庚午 先生五十歲 正月。除直講。○二月。拜吏曹佐郞。上狀辭。不許。
○奉命宣權忠定公 橃 諡。有與道東書院儒生書。略曰。健之奉命南來。爲故相權某。而忠定其諡。昌寧守。乃其主人。而感上之賜。榮父之寵。欲報莫大之恩。而推誠於使人。宜無不用其極。至納其菱花紗段。以輸其忱。亦一俗例也。辭受之際。固不可不謹。而其交也以道。其接也以禮。亦不可不受。受之而嫌於己有。用之於無益之地。雖出於不獲已者。亦豈盡合於用財之義乎。況幣之未將之前。已有敬慕之心。而値此應俗之儀。則敢不將無益而供有用。許其誠而受其物乎。物之來也。各有其誠。而心之所存者。必因此而著。則僕之將此幣而欲納於書院者。夫豈徒然哉。諸生若問其物之所自。則奬忠其諡。而感恩其幣也。察其心之所存。則鄙人向慕之誠。亦豈非君子之所許者乎。其誠可許。其物可受。則義理之介。固諸君所嘗講明而裁度者。何待鄙說而後。能定其取與乎云云。觀此可知先生取與之義。故附見焉。 八月。以御史兼災傷敬差官。覆審湖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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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건(吳健) 1521년(중종 16)~1574년(선조 7)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50 1월, 직강이 되다. ○ 2월, 이조 좌랑이 되다. ○ 8월, 御史 兼 災傷敬差官이 되어 湖南을 돌아보다. ○ 12월, 退溪先生을 哭하다.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51 1월, 이조 좌랑이 되다. 이후 부교리, 예조 정랑, 이조 정랑, 지평을 역임하다.
德溪先生文集卷之六 / 與道東書院儒生書
書 書簡散失殆盡。而陶山往復十八張。亦遭火於蘆谷。
秋晩苞山。講候如何。不堪慕想之至。前賢旣往。師道無托。淸風尙襲。君子其鄕。諸君之所欲建院而依慕者。蓋將數十年。而得成於今日。實斯文之一大幸也。健之奉命南來。爲故相權某。而忠定其謚。昌寧守乃其主人。而感上之賜。榮父之寵。欲報莫大之恩。而推誠於使人。宜無所不用其極。至納其菱花紗段。以輸其忱。亦一俗例也。辭受之際。固不可不謹。而其交也以道。其接也以禮。亦不可不受。受之而嫌於己有。用之於無益之地。雖出於不獲已者。亦豈盡合於用財之義乎。況幣之未將之前。己有敬慕之心。而値此應俗之儀。則敢不將無益而供有用。許其誠而受其物乎。物之來也各有其誠。而心之所存者。必因此而著。則僕之將此幣而欲納於書院者。夫豈徒然哉。諸生若問其物之所自。則奬忠其謚。而感恩其幣也。察其心之所存。則鄙人向慕之誠。亦豈小君子之所許者乎。其誠可許。其物可受。則義利之分。固諸君所嘗講明而裁度者。何待鄙說而後能定其取與乎。然其遷就之間。或違其理。則未免有自失之悔。故敢以鄙見。稟質於左右者。庶聞講明之中。有所卓見而警拔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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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집 제6권 / 서(書) 서간은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그리고 퇴계와 주고받은 18장 또한 노곡(蘆谷)에서 불탔다.
도동서원 유생에게 보내는 서신〔與道東書院儒生書〕
늦가을 포산(苞山)에서 강학하며 지내는 형편이 어떠하십니까. 지극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전현(前賢)은 이미 가시고 스승의 학문은 의탁할 곳이 없는데, 청렴한 풍속을 아직까지 계승하고 있으니 군자의 고을입니다. 제군이 서원을 창건하여 의지하고 사모하고자 한 것이 수십 년이 되어 오늘에 이룰 수 있었으니, 실로 사문의 매우 큰 행운입니다.
제가 성상의 명을 받고 남쪽으로 온 것은 돌아가신 정승 권모(權某)에게 충정(忠定)이란 시호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창녕 현감(昌寧縣監)이 곧 그 주인인데, 성상의 하사에 감격하고 부친의 은총을 영광스러워하면서 더없이 큰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심부름꾼인 나에게 정성을 미루었으니, 그 지극함을 쓰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 마땅합니다. 능화판 무늬의 비단을 주어 그 정성을 드리기에 이르렀으니 또한 민간의 관례입니다.
사양하거나 받을 때는 물론 삼가지 않을 수 없지만, 도로써 교유하고 예로써 접대하면 또한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받았으나 자기가 소유하는 것을 꺼려서 무익한 곳에 쓰면, 비록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고 해도 또한 어찌 재물을 쓰는 의리에 모두 합치되겠습니까. 하물며 예물을 아직 가져가기 전에 이미 존경하고 앙모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이 세속을 따르는 의식을 만났으면 감히 무익한 것을 가지고 유용한 곳에 주고, 그 정성을 인정하여 그 물품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물이 이르는 것은 각기 그 정성이 있으니, 마음에 보존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이것으로 인하여 드러납니다. 그러니 제가 이 폐백을 서원에 바치고자 하는 것이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
제생이 만약 그 물품의 유래를 물으면, 시호로 충성을 표창하고, 폐백으로 은덕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지니고 있는 것을 살피면, 저의 동경하고 앙모하는 정성 또한 어찌 여러분이 허락한 것보다 작겠습니까. 그 정성을 허락할 수 있고 그 물품을 받을 수 있으면, 의리와 이익의 구분은 본래 제군이 일찍이 연구하여 밝히고 재단하여 취사를 정한 것이니, 어찌 저의 설명을 기다린 이후에 취하고 주는 것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자신을 굽혀 남의 뜻에 영합하는 사이에 혹 그 이치를 어기면 스스로를 잃는 후회가 있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저의 견해를 여러분에게 아뢰어 묻는 것은, 연구하여 밝힌 가운데 탁월한 견해가 있어서 책려하는 것을 듣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D001] 도동서원(道東書院) :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서원으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향사한다.[주-D002] 포산(苞山) : 경상북도 현풍(玄風)의 옛 이름이다.[주-D003] 권모(權某) : 권벌(權橃, 1478~1548)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저술로 《충재집》이 있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양기석 김익재 (공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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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속집 제7권 / 서(書) / 어떤 사람에게 보냄
삼가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매우 감격하고 기뻤습니다만, 더위에 병이 들어 음식을 절제하신다는 말씀에 또 우려됩니다. 나는 이전에 연일 코피를 쏟다가 다행히 저절로 멈추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으니, 이 또한 벗들이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러나 정신이 매우 손상된 점으로 보면 어찌 수년간의 기혈을 한꺼번에 소진해 버린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앞으로 또 어찌될지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전일에 멀리 찾아 주신 데 대한 고마움을 항상 감히 잊지 못합니다만, 헤어진 뒤 끊이지 않는 그리움을 또 자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씨를 맞아들이는 문제는 사실 나도 원합니다. 하지만 그를 오라고 청한다는 것도 쉽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정쉬(亭倅 찰방(察訪))는 이미 갈려 갔습니다.
석전(釋奠) 이튿날 그 제향을 행한다는 것은 이미 전일 쌍계서원(雙溪書院)의 규정을 어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다면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되어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비록 서원에 들어오지 않은 선비라 하더라도 만일 학생 두세 명을 구한다면 이들이 여러 가지 소임을 맡아 진행하여 한 사람이 삼헌(三獻)을 다 겸한다 하더라도 그다지 문제되지는 않을 듯하니, 무엇보다 중정(仲丁 음력 매월 중순에 드는 정일(丁日))에 제향을 지내는 규정을 어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의견이 과연 어떻습니까? 비록 글을 모르더라도 진실하고 순박한 후생이라면 일을 부릴 수 있다고 봅니다. 헤아려 조처하시기 바랍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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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鄭逑) 1543년(중종 38)~1620년(광해군 12)
寒岡先生文集卷之十三 / 墓表 / 先祖妣淑人贈淑夫人瑞興金氏墓表後序
夫人金氏。瑞興人。大儒贈右議政文敬公寒暄堂先生諱宏弼之女。司憲府監察贈承政院左承旨淸州鄭氏諱應祥之妻。生于成化壬寅。終于嘉靖壬戌春秋八十一四月十四日。寔爲屬纊之日。承旨公兆次。遠在長湍府臨津縣柏木谷。旣不得歸祔。則乃卜先文敬公塋下三十步許玄風縣西
松林甫老洞西北向之原。以是年十二月二十一日葬焉。夫人夙承家訓。貞正有婦道。先生擇配。而十九歲。歸于承旨公。歸二十有一年而寡。又三年而携諸孤。自京省母貞敬夫人朴氏于玄風率禮村。因家焉。年七袠而喪冢嗣。又十二年而夫人下世。子男三人。冢嗣思中。文行謹飭。士友推許。用勳蔭補副司猛。贈吏曹參判。仲思誠。累擧不中。蔭補禦侮。季思敬。亦禦侮。孫男六人。适力學未第。蔭補敦勇。承重夫人喪。以毀而歿。逵改名崑壽。丙子。壯元。輔國崇祿大夫西川君。逑以薦累授。奉節關東。贈及祖禰。今以嘉善。出牧忠州。遠,進,遇。女六人。適贈軍資監副正盧儼禮賓寺副正兼草溪郡守郭𧺝,士人白玹,朴澔,孫暹,郭再興。曾孫男女若干人。右西川府院君所撰
嗚呼。我祖妣墓表。仲氏起草於壬寅之歲。未及修完。而以是冬下世。孫逑謹奉刻立。所謂冢嗣。卽我先考。累贈吏曹判書。仲卽我仲父。贈左承旨。孫男敦勇公。卽我伯氏。承重夫人喪。以毀而歿。贈戶曹參判。我仲氏。錄扈聖元勳。贈領議政。西川府院君。以先人命。出繼大宗。蓼莪之痛。倍切常情。凡所以爲先表章之勤。蓋無所不用其極云爾。萬曆戊午秋七月丁亥朔。孫嘉善大夫行龍驤衛副護軍逑。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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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應祥妻金氏 1482 1562 先祖妣淑人贈淑夫人瑞興金氏墓表後序 墓表後序 鄭逑 寒岡集
한강집 제13권 / 묘표(墓表) / 선조비(先祖妣) 숙인(淑人) 증(贈) 숙부인(淑夫人) 서흥 김씨(瑞興金氏) 묘표 후서(後序)
부인 김씨의 본관은 서흥으로, 대유(大儒)인 증 우의정 문경공(文敬公) 한훤당 선생 휘 굉필(宏弼)의 딸이며 사헌부 감찰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청주 정씨 휘 응상(應祥)의 아내이다.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임인년(1482, 성종13)에 태어나 가정(嘉靖) 임술년(1562, 명종17) 4월 14일에 별세하니, 향년 81세였다. 승지공의 묘역이 멀리 장단부(長湍府) 임진현(臨津縣) 백목곡(柏木谷)에 있었으므로 그곳까지 가서 합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문경공의 무덤에서 아래로 30보쯤 되는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곳은 현풍현(玄風縣 경북 달성(達城)) 서쪽의 송림(松林) 보로동(甫老洞) 서북향 자리이다. 이해 12월 21일에 장사 지냈다.
부인께서는 일찌감치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심지가 굳고 단아하여 부덕을 지녔는데, 선생이 배필을 골라 19세 때 승지공에게 시집왔다. 시집온 지 21년 만에 과부가 되었으며, 그 뒤 3년이 지나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현풍 솔례촌(率禮村)으로 친정어머니인 정경부인(貞敬夫人) 박씨(朴氏)를 뵈러 왔다가 그대로 자리를 잡고 살았다. 칠순의 나이에 맏아들을 잃고 또 12년이 지나 부인께서 별세하였다.
아들은 셋을 두었다. 맏아들 사중(思中)은 문장과 행실이 알차고 신중하여 사우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는데, 선조가 쌓은 공으로 인해 부사맹(副司猛)에 보임되고 뒤에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둘째 아들 사성(思誠)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선조의 공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에 보임되고, 막내아들 사경(思敬)도 어모장군에 보임되었다.
손자는 여섯 명을 두었다. 괄(适)은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선조의 공으로 돈용교위(敦勇校尉)에 보임되었는데, 부인의 승중복(承重服)을 입던 중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을 돌보지 않다가 죽었다. 규(逵)는 이름을 곤수(崐壽)로 바꿨는데 병자년(1576, 선조9)에 장원급제하였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서천군(西川君)에 봉해졌다. 구(逑)는 조정에 천거되어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이로 인해 조부와 선고에게 증직이 내려졌으며, 지금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라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나가 있다. 나머지 손자는 원(遠), 진(進), 우(遇)이다.
손녀는 여섯 명을 두었는데 증(贈)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 노엄(盧儼), 예빈시부정 겸 초계군수(禮賓寺副正兼草溪郡守) 곽율(郭𧺝), 사인(士人) 백현(白玹), 박호(朴澔), 손섬(孫暹), 곽재흥(郭再興)에게 시집갔다. 증손으로는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이상은 서천부원군이 지은 것이다.
아, 우리 조비(祖妣)의 묘표는 중씨께서 임인년(1602, 선조35) 봄에 초안을 잡아 놓은 것으로, 미처 완결하지 못하고 그해 겨울에 별세하였으므로 손자 구(逑)가 삼가 받들어 빗돌에 새겨 세운 것이다. 이른바 ‘맏아들’은 곧 나의 선고로 누차 증직되어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은 곧 나의 중부(仲父)로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손자 돈용공(敦勇公)’은 나의 백씨인데 부인의 승중상을 입던 중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을 돌보지 않다가 죽었다. 나중에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나의 중씨는 호성 공신에 책록되어 영의정에 증직되고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선고의 명에 따라 대종(大宗)으로 출계(出繼)하여 생부모를 그리는 아픔이 일반 사람들이 부모를 그리는 정보다 훨씬 더 간절하였으므로 선조를 위해 그 생전의 사적을 표창하는 일에 모든 정성을 다 들였다.
만력 무오년(1618, 광해군10) 7월 1일 정해일(丁亥日)에 손자 가선대부 행 용양위 부호군 구(逑)는 삼가 기록하다.
[주-D001] 승중복(承重服) :
아버지를 여읜 맏아들이 조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입는 상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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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제13권 / 묘지명(墓誌銘) / 선조비(先祖妣) 숙인(淑人) 증(贈) 숙부인(淑夫人) 서흥 김씨(瑞興金氏) 묘지(墓誌)
우리 선조고(先祖考) 부군은 성은 정씨(鄭氏)이고 휘는 응상(應祥)이다. 어릴 적에 남다른 자질을 지녀 단정하고 총명하였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학문에 뜻을 두어 정밀하고 신중히 공부하였다.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金先生)에게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선생께서 사랑하여 딸을 시집보냈으니, 곧 우리 선조비이다.
선생의 휘는 굉필(宏弼)로 본관은 서흥(瑞興)인데, 고려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찬성사 상장군(都僉議贊成事上將軍) 서흥군(瑞興君) 천록(天祿)의 7대손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호군(行護軍) 휘 뉴(紐)는 선생의 선고이고 의영고사(義盈庫使) 휘 소형(小亨)은 선생의 조부이다. 선생은 순천 박씨(順天朴氏)에게 장가들었다. 어모장군(禦侮將軍) 부사맹(副司猛) 예손(禮孫)의 딸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제사(節制使) 유성(柳星)의 손녀이며,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천상(天祥)의 현손녀인데, 성화(成化) 임인년(1482, 성종13) 9월 16일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심지가 굳고 어질며 바르고 아름다웠는데 일찍부터 가정에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고 19세 때 정씨 가문으로 시집왔다.
정씨는 서원(西原)의 대성(大姓)인데 서경 선유사(西京宣諭使)로 상장군(上將軍)에 추증된 휘 의(顗)의 후손이다. 선고 윤증(胤曾)은 철산 군수(鐵山郡守)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청성군(淸城君)에 추증되었고, 조부 옥경(沃卿)은 사헌부 집의이며, 증조 총(摠)은 본조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정당문학(政堂文學) 서원군(西原君)으로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다. 조고께서 부인을 맞아들인 지 20년 만에 별세하여 장단부(長湍府) 임진(臨津) 폐현(廢縣)의 동쪽 백목곡(柏木谷) 아래 물가 대왕동(大王洞) 서향 자리에 장사 지냈다.
정씨는 본디 청빈한 가문으로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방석 하나도 물려주지 않았다. 부인은 남편을 잃은 뒤에 살림살이가 더욱 어렵게 되자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현풍(玄風)에 사는 모부인(母夫人)에게로 와서 40년 동안 살다가 가정(嘉靖) 임술년(1562, 명종17) 4월 14일에 별세하니, 향년 81세였다. 이해 12월 일에 현풍현 서쪽 20리 지점의 오설리(烏舌里) 보로동(甫老洞)에 있는 문경공 무덤에서 아래로 30보쯤 되는 곳의 간좌곤향(艮坐坤向 남서향)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세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우리 선군(先君)으로 휘는 사중(思中)인데 증 이조 참판이고 둘째 아들 사성(思誠)은 증 좌승지이며, 막내아들 사경(思敬)은 대호군(大護軍)이다. 손자는 괄(适)과 서천군(西川君)으로 호성 공신(扈聖功臣) 영의정(領議政)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곤수(崐壽), 원(遠), 구(逑), 진(進)이다. 딸은 사인(士人) 노엄(盧儼), 부정(副正) 곽율(郭𧺝), 사인(士人) 백현(白玹), 박호(朴澔), 손섬(孫暹), 곽재흥(郭再興)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남녀 약간 명이고 현손도 남녀 약간 명이다.
부인을 장사 지낸 지 46년이 지난 지금, 손자 구(逑)가 세월이 많이 지난 후일에는 상고할 곳이 없게 될까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삼가 슬픔을 머금고 그 대체적인 사실을 초록하여 사기(沙器)에다 써서 불에 구워 무덤에 들여 넣었다.
만력 35년(1607, 선조40) 9월 일에 손자 가선대부 행 안동대도호부사 구는 눈물을 흘리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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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처눌(孫處訥) 1553년(명종 8)~1634년(인조 12)
慕堂先生文集卷之六 / 附錄 / 年譜上
皇明世宗皇帝嘉靖三十二年 明宗大王八年 癸丑六月二十五日。先生生于大丘府壽城里第。先生之先。安東府一直縣人。七代祖庫使公。以外鄕始移于密陽。至曾王考參奉公。又以外鄕移于大丘。子孫因家焉。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53 3월, 정구를 모시고 仙査齋에서 강론하고 낙동강에서 舟遊하다. ○ 6월, 苞山 蓮池를 유람하다.
三十三年乙巳 先生五十三歲 三月。陪鄭先生。講學于仙査。因船遊於洛江。時會員七十餘人。○先生作舟中吟以進。其詩有曰已得鳶飛魚躍妙。自餘榮辱等浮雲。
○鄭先生貽書議寒暄堂金先生書院移建事。玄風縣舊有
雙溪書院。而火于龍蛇之亂。至是鄭先生卜地于松林金先生墓下。
○鄭先生書畧曰。松林建院事。卽一家事也。旣無彼此。而曾見面諾於稺靜。此固賢契之所深量云云。○稺靜郭省齋赾字也。 ○四月講會于孤山書院。院在慶山○李君顯,李景培及本縣儒生十餘人講質所疑。○李君顯爲先生作歌。先生詩以和之。有歌傳好意知音少之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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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광(張顯光) 1554년(명종 9)~1637년(인조 15)
旅軒先生文集卷之十二 / 碑銘○墓碣○墓誌 / 寒暄堂金先生神道碑銘 幷序
甲子冬。終命加焉。年五十一。歸葬于玄風烏舌里松林甫老洞。卽先塋傍也。家被籍沒。諸子分配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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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연보 제1권 / [연보(年譜)]
32년 우리나라 선조 37년 갑진(1604) 선생 62세
○ 봄에 오창정(五蒼亭) - 오창정은 한강 북쪽에 있다. 위도 푸르고 아래도 푸르고 앞쪽도 푸르고 뒤쪽도 푸르며, 그 중앙에 창안백발(蒼顔白髮)의 자신이 있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 과 천상정(川上亭) - 천상정은 한강 서쪽에 있다. - 을 지었다.
○ 9월에 지지당(止止堂) 김 선생(金先生)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 김 선생의 휘는 맹성(孟性), 자는 선원(善源)이며 성종조(成宗朝) 사람이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당시의 명현(名賢)들이 모두 스승으로 섬기고 존경하였다. -
○ 현풍(玄風) 사류들과 의논하여 송림(松林)에 서원을 세웠다. - 현풍현 동쪽에 지난날 쌍계서원(雙溪書院)이 있었다. 이곳은 한훤당 김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었는데 임진년 전란에 불타 버렸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김 선생의 무덤 밑에 터를 잡아 서원을 옮겨 세웠다. 방백(方伯)이 계청(啓請)하여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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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속집 제2권 / 서(書) / 박덕응(朴德凝) 성(惺) 에게 보냄
포산(苞山 현풍(玄風))의 서원에 치정(穉靜 곽근(郭赾))이 원장(院長)이 되었으니, 그가 비록 신병이 있고 성품이 데설궂기는 하나 어찌 사우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겠습니까.
서원 자리를 도로 옛터로 정하자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선생을 위해 서원을 세운다면 반드시 선생이 사시던 옛집 곁에다 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마땅히 선생의 묘소 밑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지동(池洞)에는 적합한 자리가 없고 묘소 근처만은 앞으로 강물이 내려다보이고 뒤로 산을 등지고 있어 조용한 곳이 아니라 할 수 없는데도 한 고을 제군(諸君)의 소견이 모두 좋아하지 않고, 또 말을 들으니 형께서도 그 자리로 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의 견해는 끝내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치정 등 벗들이 여러 이유를 들어가며 불가하다는 뜻을 설명하였으나 그 모든 뜻에 대해서 나는 응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또 장차 국가에서 만약 왜노(倭奴)가 왕래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강가에 사당을 세웠다가는 뜻하지 않은 욕을 당할 우려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나 또한 의구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달리 가능한 장소가 없어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가 옛터로 돌아가자는 논의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옛터는 도성에 가까워 분위기가 정숙하지 못하니 아무래도 선생의 신주를 모시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지난날 처음 서원을 건립할 당시 내가 후생으로 선배들을 모시면서 여러 차례 그곳이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지금 늙은 나이에도 생각이 이전과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비록 왜노가 왕래하는 길과 가깝기는 하지만 어찌 별다른 피해가 있겠습니까. 다시 논의하여 나의 견해를 올리고 싶은데 아직 치정 등 벗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위풍당당한 서원이 선생의 묘소 아래에 세워지고 나면 우거진 잡초와 쌓여 있는 흙덩이들이 자연히 제거되어 맑고 정결한 장소가 될 것이니, 어찌 더러운 곳이라는 혐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점을 피하려고 시끄러운 도성 가까이로 간다면 너무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소견은 늘 이와 같은데, 고명께서는 결국 안 된다고 생각하여 허락하지 않으실까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D001] 박덕응(朴德凝)에게 보냄 : 작자가 62세 때인 1604년(선조37)에 쓴 편지로 보인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을 어디에 건립할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박성(朴惺)의 동의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전에 현풍현 동쪽에 김굉필을 향사하는 쌍계서원(雙溪書院)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려 이때 지방 사류들이 중건하려 하면서 장소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다. 다음 편지에 의하면 작자의 의견과 달리 결국 옛터에 자리를 잡아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작자의 연보에는 “선생이 김 선생의 무덤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아 옮겨 세웠다.”라고 되어 있다. 이듬해에 ‘도동(道東)’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덕응은 박성의 자이다. 호는 대암(大庵)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현풍현에 살았다. 작자보다 6년 연하로 작자를 스승처럼 극진히 모시면서 사귄 벗이다. 《寒岡先生年譜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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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속집 제2권 / 서(書) / 박덕응에게 답함
요즈음 한동안 서로 소식이 없어 그리움만 쌓이던 차에 뜻밖에 일부러 보내신 심부름꾼을 통해 삼가 편지를 받고 서늘해진 가을 날씨에 병을 조섭하는 몸을 신명이 도우시어 순탄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침 장덕회(張德晦 장현광(張顯光))를 보았는데, 그가 저번에 고명의 집을 방문하여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 말을 듣고 흥분한 끝에 너무도 기쁘고 흐뭇하여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말 위에서 떨어져 중상을 당한 지가 지금 다섯 달이 지났으나, 어혈이 아직도 허리와 배 사이에 뭉쳐 있으면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통증을 일으키는 바람에 끙끙 앓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학업을 전폐하고 멍청하게 흙으로 빚은 인형처럼 날짜만 보내고 있으니, 다른 것이야 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10년 동안 헤어져 살며 아직도 만날 기약이 없으니, 우리 벗이 나를 애타게 그리는 심정이 과연 내가 벗을 그리는 정도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내 심정을 미루어 생각하면 분명히 형께서도 틀림없이 그럴 것으로 압니다. 일가 친족의 아들을 구해 후사(後嗣)로 삼을 계획에 관해 일찍이 형의 사위를 통해 그 소식을 듣고 사실 형의 어쩔 수 없는 궁여지책일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한 형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수긍이 갔습니다. 다만, 형제 몇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중에서 대상을 잘 가려 빨리 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원의 일은 삼가 자세한 말씀을 받들었고 별지의 내용도 잘 알았습니다. 그 뜻을 나도 처음에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대로 그만한 뜻이 있었던 것이지 아무런 의견도 없으면서 잡다한 말로 큰일을 어지럽게 하려 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명의 의견이 이미 그러하고 치정(穉靜) 등 제공(諸公)의 생각도 형의 의견과 부합하며, 게다가 치정이 묘소(김굉필(金宏弼)의 무덤) 아래에 쇠를 놓아 보았더니 남쪽을 등진 북향으로서 서원을 세우기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했다 합니다. 원근 제현(諸賢)의 논의가 사실 이미 하나로 모아진 지금 우매하고 고지식한 나의 의견이야 풀리든 말든 물어볼 것이 없는 일입니다. 이 어찌 사문(斯文)의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경발(景發 이천배(李天培))을 이미 장사 지냈으나 슬픔을 아직도 감당할 수 없는데 지금 또 소식을 들으니, 후배 벗 가운데 나름대로 뜻이 학문에 쏠려 다소나마 믿고 아낄 만한 자가 갑자기 죽었다 하여 쓰라린 심정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어제 산중에서 병을 무릅쓰고 나왔다가 또 세상일을 간여하느라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보내온 사람을 하루 이틀 머물러 있게 하였으니, 부끄럽고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주-D001] 박덕응에게 답함 : 위의 편지 〈박덕응(朴德凝)에게 보냄〉과 같은 해인 1604년(선조37) 7월에 쓴 것으로 보인다.[주-D002] 나는 …… 지 : 작자가 1604년 봄에 성주에서 서쪽으로 지례(知禮)와 거창(居昌)의 경계에 위치한 수도산(修道山) 속에 초가 3칸으로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지었는데, 이 당시 공사를 감독하느라 말을 타고 왕래하다가 비탈길에 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말 위에서 떨어져 몇 바퀴를 굴렀다. 이때 허리뼈를 크게 다쳤다. 《寒岡先生年譜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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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朴德凝
近者。久未相問。政積馳思。忽被專伻。謹奉惠書。就審秋涼。調候有相。起居沖迪。又適見張德晦。言頃訪高寓。晤語從容云。蘇感之餘。欣慰竝深。有不可以言語諭也。逑墜馬重傷。今五朔矣。而瘀血尙滯於腰腹之間。流注作痛。沈呻苦惱。專廢學業。氣像憒憒。有同土偶人。已何足道哉。十年相離。尙未有會合之期。不知故人之戀鬱我。亦如我之戀鬱故人否。自我而思之。決知兄之亦必然矣。求同姓之子。爲后之計。曾因令賢壻聞之。固知兄之出於不得已焉。而亦以爲兄之不得已焉耳。但聞有兄弟數人云。就其中須審擇速定。何如。
書院事。謹承縷縷之敎。別紙亦奉審之矣。此意鄙人亦初未爲不審。而區區滯見。則亦實有意。非都無意見。而徒爲胡亂說話。以攪擾大事也。然高明之見旣如是。且穉靜諸公之意。亦與兄見同符。又穉靜泛鐵松楸之下。則背南向北。不合建院云。遠近諸賢之論。固已歸一矣。愚陋鄙滯之見。自不足問其解否。豈不果爲斯文之幸哉。景發已葬矣。悲猶不自堪焉。而今者又聞後來朋友中。稍有志向。稍尙信愛者。遽又云亡傷哉。情不能自已耳。昨自山中。力疾出來。又緣人事應接。不免留來人一兩日。不任慙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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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제3권 / 서(書) / 박덕응(朴德凝) 성(惺) 에게 보냄
지난봄에 멀리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어주신 이후 이제까지 서로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으니, 하루도 잊지 못한 그리움과 답답한 마음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처럼 추운 날씨에 병석에서 잘 조리하고 계십니까? 나는 여름은 물론 가을까지 줄곧 병에 시달리면서 침이며 약물과 뜸 등 온갖 방법을 다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가을이 끝나 갈 무렵 조상이 그리운 비감을 스스로 억누를 수 없어 뜸을 뜬 상처가 미처 아물기도 전에 병을 무릅쓰고 남쪽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단 고향에 돌아오고 보니 친지와 벗들이 단단히 붙잡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 또한 저절로 스러져 서울로 돌아가고픈 생각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체류하여 선영 곁에 엎드려 있는데, 지난날 천리 밖에서 고향을 아련히 그리던 심경을 돌아보면 그때 그 심경과 또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다만 지금 살아 있는 친구는 모두 서로 만나 보았지만 우리 덕응(德凝) 존형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손을 잡고 다정하게 정을 나눌 길이 없어 목을 길게 늘여 빼고 동쪽을 향해 바라보고 있으니, 이 가슴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우리 벗들이 불행하여 동강(東岡) 노형께서 이달 초아흐렛날 세상을 떠나 너무도 놀랍고 애통하여 어떻게 자제할 수가 없습니다. 객지에 있는 널이 곧 고향으로 돌아와야 할 것인데 고향 마을이 황량하니 장례를 치를 제반 절차를 어떻게 조처할지 모르겠습니다. 얼음과 옥처럼 해맑은 자질과 꼿꼿한 절개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고 사후 대책이 캄캄하여 방안을 낼 수가 없으니, 사람들의 쓰린 가슴을 뭐라고 형용할 수 없습니다. 《강목(綱目)》을 가려 뽑아 정리하는 작업도 당나라 대종(代宗)과 덕종(德宗) 연간까지 이르고서 끝내 일을 마치지 못했으니, 이 또한 남은 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무(汝懋 이후경(李厚慶))의 편지를 보고서 그가 형을 찾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쓸쓸한 심경을 몇 자 적어 그의 편에 삼가 부치는 것입니다. 나와 형은 각기 깊은 병에 걸려 앞으로 서로 만날 기약을 할 수 없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형은 원기가 자꾸 더 약해져 목숨을 지탱할 수 없을 것만 같고, 사람들을 대하여 하는 말이나 편지 내용 속에서도 걸핏하면 불안하고 쓰라린 말을 함으로써 간혹 사람들로 하여금 차마 들을 수 없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이래서 더욱더 염려되어 항상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또 생각하면 지금 동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중에 있는 심경이 더한층 괴로울 것인데, 과연 어떻게 자제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의(道義)를 위해 마음을 애써 너그럽게 갖기를 간절히 빕니다. 그리고 세상의 공적이나 사적인 온갖 시름은 넓은 마음속에 끌어들이지 말아서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여 찌꺼기가 없게 한다면 그 또한 병을 돌보는 방도에 반드시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주-D001] 박덕응(朴德凝)에게 보냄 : 본 편지는 작자의 나이 61세 때인 1603년(선조36) 11월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있으면서 이때 죽은 벗 김우옹(金宇顒)을 애도하는 내용으로 쓴 것이다. 덕응(德凝)은 박성(朴惺)의 자이며, 호는 대암(大菴)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작자를 스승처럼 극진히 모시며 사귄 벗이다.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종사하고, 정유재란 때는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막료(幕僚)로 종군하여,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으로 활약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나중에 공조 좌랑과 안양 현감(安陽縣監)을 지냈다. 작자보다 6년 연하이며 1606년에 58세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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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朴德凝 惺
自春間蒙專人遠問之後。一向不復得相聞。其懸慕鬱陶。一日而不可忘者。寧可紀極耶。卽日天寒。伏惟調護有相。逑連夏涉秋。呻痛支離。鍼藥灸熨。無所不試。秋將盡而霜露之感。有不能自抑。則至於灸瘡未痊。而力疾南歸。旣歸則不惟親朋仇執不已。吾心亦自頹然而忘返。遂此滯留。屛伏先塋之側。回視昔日渺然千里之外者。適思之適。又自不同矣。但在世親舊。無不相見。而獨於吾德凝尊兄。尙未由執手團圞。引頸東望。此懷如何。朋儕不幸。東岡老叔。以本月初九損館。驚痛之至。豈所敢忍。旅櫬將返。而故墟荒落。殯葬凡百。何以措處。水玉之姿。忠鯁之節。旣不可以復見。而後計茫然。莫以爲策。令人酸酸。不可言說。抄節網目。至于唐代德之間。而竟不能卒業。此亦可爲遺恨。見汝懋書。聞將就訪高寓。落落長懷。謹附一二。我與兄各嬰沈病。會合無計。而聞兄元氣益弱如。不能自支。對人言或與人書。輒有危辭苦語。或使人有不聞焉者。益使人爲之頃想懸念。恒無以爲懷也。且想聞東岡之訃。益疚病中之懷。其何以自處耶。切祝爲道義寬勉焉。且毋以世間公私百慮。有以掛於曠然之胷次。使吾心常湛乎其無物。兼亦未必無補於養疾之道也。何如何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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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 선조 39년 병오(1606) 12월 26일(경신)
중건한 천곡ㆍ금오ㆍ쌍계ㆍ남계 등 서원에 사액하다
경상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치계하기를,
“도내(道內) 여러 고을이 선현을 위해 사우(祠宇)를 세워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고 그 곁에 강당(講堂)과 재사(齋舍)를 지어 선비들의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은 곳이 한둘이 아닙니다. 성주(星州)의 천곡 서원(川谷書院)은 그곳에 이천(伊川), 운곡(雲谷)이란 지명이 있는 것을 인연으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위판(位版)을 봉안(奉安)하였고, 선산(善山)의 금오 서원(金烏書院)은 야은 선생(冶隱先生) 길재(吉再)가 살던 곳이고, 현풍(玄風)의 쌍계 서원(雙溪書院)은 한훤 선생(寒暄先生) 김굉필(金宏弼)이 살던 곳이고, 함양(咸陽)의 남계 서원(藍溪書院)은 일두 선생(一蠹先生) 정여창(鄭汝昌)이 살던 곳이라 하여 평시에 온 도내의 선비들이 힘을 합쳐 세우고서 조정에 아뢰자, 특별히 편액(扁額)을 하사했었는데, 불행히도 병화(兵火)에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지금 선비들이 각기 재력(財力)을 염출하여 지방 관아에서도 힘을 합쳐 도와줌으로써 옛날 모습대로 중건(重建)하여 신주를 모실 곳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전날 하사된 편액이 남아 있는 곳이 없어 중건하고서도 아직 서원만 있고 편액이 없으므로 국가에서 표장(表章)하여 높게 걸도록 한 뜻을 보여줄 수 없는 점이 매우 흠입니다. 조정에서 특별히 거듭 내리도록 하여 사문(斯文)을 빛나게 해 주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그 중에 남명 선생(南溟先生) 조식(曺植)은 학행과 도덕이 전현(前賢)의 아름다움에 손색이 없으므로 선비들의 흠모도 전현들에 못지 않습니다. 평소에 진주(晉州) 덕산(德山)의 옛날 거처하던 곳 부근에 서원을 세웠었는데 역시 방화에 불타버렸던 것을 지금 중건하였으니 다른 서원의 예처럼 아울러 사액(賜額)하여 조정에서 문헌을 숭상하고 도덕을 높이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예조에 계하하였다. 예조의 계목에,
“계하(啓下)를 점련합니다. 천곡(川谷)ㆍ금오(金烏)ㆍ쌍계(雙溪)ㆍ남계(藍溪) 등 네 서원은 평소에 특별히 편액을 하사했었으니 편액 이름은 그것으로 쓰되, 본도로 하여금 고증해 계문하게 한 뒤에 특별히 거듭 하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조식의 학행은 전현들의 아름다움에 손색이 없을 뿐더러 지금 서원이 창설되었으니 다른 서원의 예대로 아울러 사액하도록 명하는 것이 문을 숭상하고 도를 높이는 뜻에 참으로 합당하나 은명(恩命)과 관계되니 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일찍이 이미 사액되었던 곳은 사액하고 새로 세운 곳에 대한 사액은 천천히 하도록 하라.”
【원전】 25 집 299 면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사급(賜給)
ⓒ 한국고전번역원 | 김재열 (역) |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