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년(중종 38)~1620년(광해군 12)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년(명종 9)~1637년(인조 15)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년(중종 38)~1620년(광해군 12)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중종 35 1540 경자 嘉靖 19 1 7월 2일, 星州 沙月谷里에서 태어나다.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64 2월, 체직되어 대호군이 되었는데 병으로 辭職하고 鼎坐山으로 돌아가다. ○ 11월 9일, 병으로 卒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 2월 4일, 星州 琴琶谷 蔓里에 장사 지내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 4월, 會寧 鰲山書院이 낙성되어 향사되다.
~ ~ ~ ~ ~ ~ - 鍾城 東岡祠가 낙성되어 향사되다. ○ 鏡城 咸池書院이 낙성되어 향사되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 2월, 檜淵書院에 향사되다.
영조 5 1729 기유 雍正 7 - 沙月里에 晴川書院이 낙성되어 향사되다. ○ 淸州에 鳳溪書院이 낙성되어 향사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년(중종 38)~1620년(광해군 12)
중종 38 1543 계묘 嘉靖 22 1 7월 9일, 星州 沙月里에서 태어나다.
선조 1 1568 무진 隆慶 2 26 봄, 退溪先生에게 稟議하여 迎鳳書院을 川谷書院으로 고치다. ○ 11월, 모친상을 당하다.
중종 38 1543 계묘 嘉靖 22 1 7월 9일, 星州 沙月里에서 태어나다.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41 여름, 공조 정랑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門下의 諸生들과 月朔講會稧를 하다. ○ 檜淵草堂이 완성되다. ○ 겨울, 형조와 호조의 정랑이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63 4월, 海州 牧使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檜淵草堂을 復設하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64 5월, 朔望通讀之規를 정하다. ○ 8월, 光州 牧使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9월, 玄風의 道東書院을 배알하고 金宏弼 墓에 제사하다. ○ 11월, 三嘉의 龍巖書院을 배알하고, 晉州로 가서 德川書院을 배알하고 曺植 墓에 제사 지내고, 山陰의 吳健 墓에 제사 지내고, 咸陽의 濫溪書院을 배알하고 鄭汝昌 墓에 제사를 지내다. ○ 治亂提要를 짓다.
광해군 11 1619 기미 萬曆 47 77 6월, 道東書院과 金海 新山書院을 배알하다. ○ 7월, 울산 椒井과 東萊 온천에서 목욕하고 昌原 海亭에서 조리하다 11월에 돌아오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78 1월 5일, 持敬齋에서 졸하다. ○ 4월, 蒼坪山의 夫人墓에 합장하다. ○ 8월, 光海君이 賜祭하다.
광해군 14 1622 임술 天啓 2 - 3월, 大邱의 士林이 硏經書院에 位版을 봉안하다. ○ 겨울, 星州의 사림이 檜淵에 서원을 건립하고 위판을 봉안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 6월,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에 증직되다. ○ 10월, 川谷書院에 從祀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 9월, ‘文穆(勤學好問曰文 抱德執義曰穆)’의 시호를 받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 9월, 檜淵書院이 완성되어 위판을 봉안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 4월, 蒼坪山 아래에 神道碑를 세우다.
인조 12 1634 갑술 崇禎 7 - 9월, 昌原의 사림이 檜原書院을 건립하고 위판을 봉안하다.
인조 13 1635 을해 崇禎 8 - 4월, 成川의 사림이 龍泉書院을 건립하고 위판을 봉안하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 문인들이 문집을 초간하다.(崔晛의 跋)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 2월, 昌寧의 사림이 冠山書院을 건립하고 위판을 봉안하다.
인조 27 1649 기축 順治 6 - 2월, 木川의 사림이 竹林書院을 건립하여 朱子를 봉안하고 선생을 從祀하다.
효종 2 1651 신묘 順治 8 - 11월, 泗陽書院이 완성되어 위판을 봉안하다.
효종 8 1657 정유 順治 14 - 10월, 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에 증직되다.
현종 2 1661 신축 順治 18 - 4월, 忠州의 사림이 雲谷書院을 건립하여 朱子를 봉안하고 선생을 從祀하다.
현종 4 1663 계묘 康熙 2 - 3월, 星州 印懸山으로 移葬하다.
현종 9 1668 무신 康熙 7 - 2월, 神道碑를 檜淵書院 옆으로 옮겨 세우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 10월, 沃川의 사림이 三陽書院을 건립하고 위판을 봉안하다.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 3월, ‘勤學好問’의 文을 ‘道德博聞’의 文으로 改諡하고 賜祭하다. ○ 玄風의 사림들이 조정에 청하여 道東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숙종 16 1690 경오 康熙 29 - 12월, 상이 致祭하고 檜淵書院에 賜額하다.
18. 辨擬辨
ㅇ 연대 : 1961(癸卯)
ㅇ 내용 : 공히 曺植의 門人이던 鄭逑(1543-1620, 寒岡, 淸州人)와 金宇顒(1540-1603, 東岡, 義城人)의 사후 양인의 德川師友淵源錄의 수록 순서, 檜淵書院(1627년 건립) 配享, 追享 등을 두고 후손들 사이에 제반 알력이 야기된 바 있다. 古文書集成 25집(德川書院篇)에 수록된 바 있는 〈德川師友淵源錄顚末〉은 바로 德川師友淵源錄 수록 순서에 따른 갈등 과정을 다룬 것이다. 본 辨擬辨은 소위 兩岡是非와 관련 金宇顒側(鴨峴金氏)의 擬辨에 대한 鄭逑側(檜淵書堂)의 辨論이라 할 수 있다.
본 문서에서 논란되는 사안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① 德川師友淵源錄에 金宇顒이 3년 아래인 鄭逑 뒤에 기록된 사안.
② 道統의 전수와 관련한 鄭逑와 金宇顒의 優劣與否.
③ 金宇顒의 檜淵書院 追享(1628, 인조6),
④ 追享 이후의 位次論爭
⑤ 檜晴分院(檜淵書院, 晴川書院)
이 문서가 龍淵書院에 소장된 이유는 최초의 南冥 淵源錄인 山海師友淵源錄의 찬자가 바로 朴絪이라는 사실과 유관한 것 같다. 朴絪은 1636년 山海師友淵源錄을 편찬하면서 鄭逑를 金宇顒보다 먼저 수록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후대에 나온 德川師友淵源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용연서원의 고문서 丁淳佑(本院 敎授)>
兩岡是非 류현우 추천 0 조회 55 06.08.02 07:17 댓글 1
이 시비는 남명 조식선생 제자간의 우열시비이다. 성주 사도실의 東岡 김우옹(의성 김씨,남명의 外孫壻이자 곽재우와 동서이며 남명의 성성자 방울을 전해 받음/정인홍은 칼을 전수)과 퇴계 남명 문하 최대의 학자인 寒岡 정구 후손 제자간의 우열 시비// 한강 정구의 회연서원에 합사하였다가 청천서원으로 동강 김우옹의 위패를 독자적으로 옮김
◆ 김우옹 [金宇顒, 1540~1603]
본관 의성(義城). 자 숙부(肅夫). 호 동강(東岡) ·직봉포의(直峰布衣). 시호 문정(文貞). 조식(曺植)의 문인. 1567년(명종 2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역임하고, 1573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오랫동안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었다. 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 ·교리(校理) ·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고, 1583년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적괴(賊魁) 정여립(鄭汝立)과 교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속강목(續綱目)》 15권을 찬(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와 행조(行朝)에 가서 부호군(副護軍)이 되어 비어기무(備禦機務) 7조를 건의하고, 병조참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1599년 다시 한성부좌윤이 되어 모함에 빠진 유성룡(柳成龍)을 위하여 항소(抗疏)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1602년 교정청당상(校正廳堂上) 및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고 이어 부제학 ·이조참판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회령의 향사(鄕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星州)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 《동강문집(東岡文集)》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등과 편저에 《경연강의(經筵講義)》가 있다.
◆ 정구 [鄭逑, 1543~1620]
본관 청주(淸州). 자 도가(道可). 호 한강(寒岡). 시호 문목(文穆). 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조식(曺植)·이황(李滉)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1573년(선조 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禮賓寺) 참봉이 되고 1578년 사포서(司圃署)주부를 거쳐 삼가(三嘉)·의흥(義興)·지례(知禮) 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580년에야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가서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까지 세워졌다. 이듬해 지평이 되고 1585년 교정랑(校正郞)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 간행에 참여하고 그 후 통천군수(通川郡守)·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成川府使)·충주(忠州)목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자고 상소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13년 계축화옥(癸丑禍獄)가 일어나자 다시 상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고,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만들어 유생들을 가르쳤다.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산수(算數)·병진(兵陣)·의약(醫藥)·풍수(風水)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났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성주의 회연(檜淵)·천곡(川谷)서원, 충주의 운곡(雲谷)서원, 창녕의 관산(冠山)서원 등과 통천(通川)의 경덕사(景德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강문집(寒岡文集)》이 있고, 편저로 《성현풍(聖賢風)》《태극문변(太極問辨)》《와룡지(臥龍誌)》《역대기년(歷代紀年)》《관의(冠儀)》《혼의(婚儀)》《장의(葬儀)》《계의(稧 儀)》《갱장록(羹墻錄)》 등이 있다.
이한방 첫댓글 06.05.01 21:45 청천서원의 김우옹과 회연서원의 정구 후손 제자간의 시비라고 해서 청회시비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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