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의 경전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방대한 경전들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정리한 것이 경전입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것을 문자로 기록해서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설법을 들은 제자들이 기억하고 있던 내용을 다시 설법을 들은 제자들에게 전수해 왔을 뿐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성스러운 말씀은 문자로 기록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관습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시자 일부의 수행승들은 부처님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되려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롭다. 더 이상 간섭받을 필요가 없다.”
이 소리를 들은 마하가섭은 놀라서 부처님 장례를 치른 후 왕사성(지금의 라즈기르) 외곽, 입구에 칠엽수 나무가 우거진 굴(칠엽굴, 七葉窟) 속에서 수도승단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경전편찬회의를 열었습니다. 이에 500명의 수행승들이 모여 부처님의 말씀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암송(暗誦)형식으로 경전을 편찬하였다. 이렇게 제자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것을 ‘결집’이라고 합니다. 1차 결집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 2차 결집은 입멸 후 100년 경에, 3차 결집은 200년이 지난 아쇼카왕 재세 시에, 4차 결집은 400년이 지난 무렵에 이루어졌습니다.
1차 결집은 마하가섭 존자가 주관하여 500명의 아라한이 참여하였습니다. 아난 존자가 경전을 외워내고, 우바리 존자가 계율을 외우면 대중이 그 잘잘못을 가려 교정을 했습니다. 교정된 내용을 대중의 의결을 거쳐 확정하고, 그 확정된 내용을 대중이 함께 암송하였습니다.
1차 결집 때는 경전이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결집한 내용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장과 계율을 담은 율장으로 성립되었습니다.
2차 결집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100년 경에 사회의 발전과 변화에 따라 계율에 대한 해석과 수용에 있어서 대중들간의 견해 차이가 생기기 시작, 진보파와 보수파 간의 대립이 나타나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장로 야사가 주관하여 비야리성(지금의 바이샬리)에서 700명의 아라한이 모여 법과 율의 체계를 다시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결집에서는 보수파가 진보파의 주장을 배척했기 때문에 진보적인 비구들은 다시 1만의 비구들을 모아 따로 결집을 행했습니다.
3차 결집은 부처님 열반 후 200년 경에 아쇼카왕 시대에 파탈리뿌뜨라(지금의 파트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2차 결집 이후 교단은 진보적인 대중부와 보수적인 상좌부로 나누어졌습니다.
아쇼카왕 시대에는 부파가 20여 개에 이르러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그 때문에 아쇼카왕의 지지를 받은 상좌부의 목가리풋타 존자가 1천 명의 아라한을 모아 9개월간에 걸쳐 당시 불교의 각 부파 교리를 결집하여 논장을 결집하였습니다.
4차 결집은 카니시카왕 때 이루어졌으며, 협 존자를 중심으로 500명의 아라한이 모여서 결집을 행했습니다.
경전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세기 중반 무렵이며, 그 이전에는 모두 입에서 입으로 전승된 암송형식이었습니다.
이 네 번째 회의에서는 종려나무 잎(패엽, 貝葉)에 상할리 문자(스리랑카 문자)로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팔리어는 글자가 없는 인도 북부의 서민층 방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최초로 문자로 기록된 경전을 ‘패엽경(貝葉經)’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종려나무 잎에 기록된 부처님 말씀”이란 뜻입니다.
~~ 돈관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