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신라 명기(名妓) '轉花鶯'을 아십니까'
입력 1996.07.11. 11:24수정 1996.07.11. 11:24
(울산(蔚山)=연합(聯合)) 李相賢기자= "신라(新羅)명기(名妓) `전화앵(轉花鶯)'을 아십니까?"
신라(新羅)가 망한 뒤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고려(高麗)로의 귀속을 거부한 신라명기 전화앵을 기리는 추모사업이 경남(慶南) 울산(蔚山)지역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일고 있다.
울산(蔚山)의 무용인과 방송인 등으로 구성된 `전화앵 묘역 성역화 추진위'는 지난 10일 울산(蔚山)시 蔚州구 斗西면 활천리 장승배기 전화앵 묘역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활천리에서 최고령인 孫만호씨(82)를 제관으로 주민 등 80여명이 참석한 추모제는 분향, 헌주, 축문낭독에 이어 새로 제작한 묘비와 안내문 제막식, 무용협회 울산지부 회원 3명의 진혼무 공연이 펼쳐졌다.
전화앵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慶州府 고적(古蹟) 悅朴領條'에 경주에서 남쪽 30리에 명기 전화앵 묘소가 있다고 적혀 있다.
또 고려명종때 한림학자 김극기(金克己)는 전화앵의 묘소를 찾아 `옥모(玉貌) 催魂隔世 空端只見層전(山아래 顚) 神女雨收巫峽 여인(麗人)風斷洛川'(옥같은 얼굴 혼을 재촉해 간지 오랜데 하늘끝에 다만 층층한 꼭대기만 보이네 신녀의 비는 무협에서 거두고 여인(麗人)의 바람이 낙천에서 끊어졌네)이라고 노래해 그녀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정절이 고려때까지 회자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활천리 주민들은 전화앵은 신라가 망한 후 지배계급이 대거 개성으로 이주하면서 소매를 끌며 함께 가길 강권했으나 한 왕조만을 섬기겠다며 거절했다는 전설이 대대로 구전되어 왔다고 말했다.
그녀의 묘는 퇴락한 채 방치돼 왔으나 지난 91년 지역 언론인이 향토기행 취재도중 활천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이 마을 인근 장승배기에서 전화앵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묘를 발견했다.
이 마을을 지나는 울산 - 경주간 35호 국도에서 1백20여m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에서 북쪽 경주를 바라보고 있는 이 묘는 발견 당시 도굴이 돼버려 아쉬움을 더하고 있는데 최근 추진위는 봉분에 무성했던 소나무와 잡목 등을 베냈다.
전화앵 추진위는 姜花子무용협회 울산지부장과 孫호준활천이장(60) 등 20여명의 예술, 언론인들로 구성돼 지난달 정식발족했으며 전화앵을 남원의 춘향, 진주 논개, 개성 황진이 같은 울산 美의 상징으로 널리 알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추진위는 우선 묘역 단장과 제당 진입로와 주차장 확보 등 부속시설을 갖추고 전국행사로 전화앵 미인선발 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지역 무용가들을 오는 9월에 열리는 전국무용대회에 전화앵을 기리는 창작무용 `두견새는 살그내에 우는가'라는 제목으로 출전시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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