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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8 대림 12월 18일 – 133위 002° 김범우 토마스
“보라, 그날이 온다!”(예레 23,5).
133위 002° ‘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
이름 :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출생 : 1751년[1], 서울 명례방(서울 중구 명동성당 부근), 중인(역관)
거주 : 서울 명례방(서울 중구 명동성당 부근)
사망 : 1786년 또는 1787년(36-37세), 유배 중 杖毒死, 충북 단양[1.1]
묘지 : 밀양(경남 밀양시 삼량진읍 용전동 산 102-1)
父母 : 김의서(金義瑞, 역관), 남양 홍씨(南陽洪氏)
妻 : 천녕 현씨(川寧玄氏, 1767년 혼인)
子 : 김인고(金仁考)
弟[1.2] : 김형우, 김관우, 김적우(金績禹), 김이우(金履禹, 바르나바), 김순우(‘金顯禹’로 變名, 마태오), 두 여동생
洗同氣(1784년 음력 9월) :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최창현(요한), 최인길(마티아), 지황(일명 ‘池洪’, 사바)
傳敎 : 윤지충(바오로), 최필공(토마스), 김종교(프란치스코), 홍익만(안토니오), 변득중[1.3], 허속[1.4], 아우 김이우·김현우.
김범우(金範禹) 토마스는 중인 역관인 김의서(金義瑞)와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맏아들로 서울 명례방(현 서울시 중구 명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아내는 천녕 현씨(川寧玄氏)였다. 1801년의 순교 복자 김이우(金履禹, 바르나바)와 김현우(金顯禹, 마태오)는 그의 이복동생들이다.
김범우 토마스는 1773년(영조 49년)에 실시된 역과 증광시에 합격한 뒤 역관 생활을 하였다.[2] 이후 그는 먼 인척인 정약전과 정약용(요한 사도) 형제를 비롯하여 이벽(요한 세례자),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베드로) 등과 교유하였다. 그 과정에서 토마스는 요한 세례자에게 교리를 배웠으며,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3]
입교 이후 토마스는 신자들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1784년 말에서 1785년 초 사이에 자신의 명례방 집을 신자들의 집회소로 제공하였고, 그 결과 서울 수표교(水標橋) 인근에 있던 신자들의 집회소는 명례방으로 옮겨졌다. 이 무렵 김범우 토마스는 최인길(마티아), 윤지충(바오로), 최필공(토마스), 김종교(프란치스코), 홍익만(안토니오)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 서적을 빌려주었고, 동생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쳤다.[4]
1785년 봄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는 이전처럼 신자들의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이때 형조의 금난서리(禁亂胥吏)들, 곧 범법 행위를 단속하는 형조의 관원들이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이상한 모임이 열리고 있는 것을 알고는 집 안으로 들이닥쳐 성물과 서적을 압수한 뒤,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형조로 압송하였다.[5]
형조로 압송된 신자들 가운데 양반인 이승훈 베드로와 이벽 요한 세례자,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 요한 사도 등 兩班들은 모두 훈방되었다. 반면에 명례방 집회소의 집주인인 中人 김범우 토마스는 형조 판서 앞에서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형조 판서의 강요와 거듭된 형벌에도 배교를 거부하였으며, “천주교에는 좋은 점이 아주 많으니, 천주교를 그르다고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굳게 증언한 뒤 도배형(徒配刑), 곧 노역형이 부과되는 유배형을 받았다.[6]
김범우 토마스가 도배형을 받고 유배 생활을 한 곳은 충청도 단양(丹陽)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변함없이 큰 소리로 기도를 바치고, 교회를 멀리하고 있는 교우들을 가르치는 등 공공연하게 신앙을 실천하다가 형벌 때문에 생긴 상처로 몸이 약해지면서 1786년(또는 1787년)에 선종하였다. 이후에도 단양의 노인 아전들은 김범우 토마스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이야기했다고 한다.[7] 선종한 뒤 토마스의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하였으며, 가족들이 이주해 살고 있던 경상도 밀양(현 경남 밀양시 삼량진읍 용전동 산 102-1)에 안장되었다.[8][8.1]
[註]__________
[1] 토마스의 출생 연도는 그의 과거 합격 기록에 신미년(1751년)으로 정확하게 나온다(『잡과방목』, 역과, 영조 49년 계사). 반면에 사망 연도는 자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이승훈(베드로)의 서한과 아우 김현우(마태오)의 진술, 다블뤼(안토니오) 주교의 기록 등에는 1786년으로 나오며(최석우 역주, 「이승훈의 1789년 말 서한」, 『교회사 연구』 제8집, 1992, 172면; 『사학징의』, 1권, 정법죄인질(正法罪人秩), 현우;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 1), 집안 족보인 「경주 김씨 세보」[家牒]와 「장생보록」 (長生寶錄)에는 정미년(1787년) 7월 16일(양력 8월 28일)로 나온다(손숙경 편저, 『중인 김범우 가문과 그들의 문서』,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1992, 46.51면).
[1.1] “김범우의 유배지는 달레가 쓴 ‘한국 천주교회사’에 근거하여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중, 후손 김동환(金東曄, 1795~1877?)이 가족에게 전했다는 이야기와 호구단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범우의 유배지가 단양(丹陽)이 아니라 밀양 단장(丹場)임이 새롭게 밝혀졌다.”라는 주장이 있지만,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① 김범우의 아우 김현우는 공초에서 형 김범우의 도배지가 충청도 단양이라고 진술한다. 다블뤼 주교님의 ‘조선순교사비망기’에서 “충청도 동쪽 끝의 단양(Taniang)”이라고 기록했다. 김범우가 단양(丹陽)고을이 아니라 단장(丹陽)면으로 유배되었다면, 귀양지를 面 단위가 아니라 고을 단위인 ‘밀양(密陽)’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②또한, 김범우가 유배될 당시 밀양부에는 단장면이란 지명이 없었다. ③ 김범우의 손자 김동엽은 김범우가 충북 단양(丹陽)에서 죽은 지 68년이 지난 1854년 밀양으로 이사하여 하동면 굴암리와 구암리에서 1869년까지 15년간 살다가 김범우 사후 84년이 지난 1870년에 ‘단장(丹陽)’으로 이사하였다.
[1.2] 김범우는 부친 김의서(金義瑞, 1721-1774)와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의서는 첩에게서 2남 1녀를 더 두었다. 서자인 김이우(金履禹, ?-1801)와 김순우(金順禹, 1775-1801)가 그들이다. 복자 김현우(金顯禹, 1775-1801)의 이름은 족보에 보이지 않는데, 김순우(金順禹)는 김현우(金顯禹)의 고치기 전 이름이다.
[1.3] 변득중(邊得中, ?-1801). 순교자. 서울 대묘동(大廟洞, 현 종로4가) 출신. 세례명은 알 수 없으나 초대 조선 교회의 창설자의 한 사람인 김범우(金範禹)와 최창현(崔昌顯)에게서 교리를 배워 1785년에 입교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잡혀 황사영(黃嗣永)의 숨은 곳을 대지 않으면 죄가 더 무거워질 뿐만 아니라 사서(邪書), 즉 천주교 서적을 내놓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협박과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다시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을 때는 전일의 배교를 취소하고 자기 신앙을 굳건히 고백하였다. 결국, 1802년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였다.
☞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12월 26일 무진 1번째 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 : 형조(刑曹)에서 승관(承款)한 사학죄인을 정법(正法)하고 아뢰기를, “죄인 정광수(鄭光受)는 사호(邪號)가 파이납(巴爾納, 바르나바)으로 늘 도당(徒黨)을 모아 놓고 날마다 강습하면서 자기 처 운혜(雲惠)와 더불어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 유혹하였고 사서(邪書)를 직접 만들어 가는 곳마다 다니며 팔았습니다. 죄인 홍익만(洪翼萬)은 사호가 안당(安堂)으로 역시 영세(領洗)의 법을 받고서 주문모(周文謨)와 더불어 강론을 대단하게 학습하여 신부(神父)로 섬겼습니다. 죄인 김계완(金啓完)은 사서(邪書)를 최필공(崔必恭)한테서 빌려 보고 정약종(丁若鍾)·황사영(黃嗣永)·이추찬(李秋贊) 등과 더불어 혈당(血黨)을 만들었는데, 사호는 서만(西滿, 시몬)입니다. 죄인 손경윤(孫敬允)은 사호가 열와삭(熱瓦削, 제르바시오)으로 사서를 최필공한테서 처음으로 배워서 가는 곳마다 해독을 끼치어 많은 사람을 그릇되게 하였습니다. 죄인 김희호(金羲浩)는 최필공한테서 처음으로 배우고 황사영에게 찾아가 익혔습니다. 죄인 송재기(宋再紀)는 정약종·황사영과 더불어 서로 친하여 황사영이 망명할 때에 서로 모의하였습니다. 죄인 김귀동(金貴同)은 옹점(甕店)을 제천(堤川)의 주론산(舟論山) 중에 옮겨 거처하였는데, 김한빈(金漢彬)이 한 이가(李哥)의 상제(喪制)를 데리고 오자, 힘을 합해 땅을 파서 숨도록 하고는 사서를 학습하였으니, 이른바 이가란 자는 바로 황사영이었습니다. 죄인 최녀(崔女) 설애(雪愛)는 사술(邪術)에 빠져들어 황사영이 망명해 온 것을 알고는 상복(喪服)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죄인 김일호(金日浩)는 최필제(崔必悌)에게 몸을 의탁하고 정약종에게 찾아가 성심을 다해 강습하고는 처음 먹었던 마음을 변경하지 않았습니다. 죄인 장덕유(張德裕)는 주문모·정약종과 더불어 생사(生死)를 같이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죄인 변득중(邊得中)은 사학에 고혹 되어 여러 해 동안 강습하였고,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는 데 있어서 부녀들을 간교하게 속였습니다. 죄인 이경도(李景陶)는 이윤하(李沇夏)의 아들이고 권철신(權哲身)의 생질이며 순이(順伊)의 오라비인데, 연관된 인척(姻戚)과 접촉하는 종족(宗族)이 모두 사학의 무리로서 요서(妖書)를 혹독하게 믿었고 사당(邪黨)을 주무(主務)하였습니다. 죄인 황일광(黃日光)은 이존창(李存昌)에게 사서를 학습하고서 정약종의 가까운 이웃으로 거처를 옮겨 자리를 잡고는 세례(洗禮)를 받고 명호(名號)도 받았는데, 심연(深淵, 시몬)이라고 사호를 지었습니다. 죄인 한덕운(韓德運)은 윤지충(尹持忠)에게서 비로소 배웠는데, 홍낙민(洪樂敏)의 원혼을 조문하였고 최필제의 시체를 거두어 주었습니다. 죄인 홍인(洪鏔)은 홍교만(洪敎萬)의 아들로서 주문모가 미사를 드리는 자리에 동참하였습니다. 죄인 권상문(權相問)은 권일신(權日身)의 아들로서 사서(邪書)를 따라 배우다가 그 아비가 죽은 뒤로 인하여 고혹 되었는데, 모두 요사스러운 말과 요사스러운 글을 선전하여 뭇사람들을 미혹시킨 것으로써 결안 정법(結案正法, 처형)하였으며, 살아 있는 외도(外道)의 사람은 각각 해당 고을로 압송(押送)하여 형벌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1.4] 허속(許涑) : 신해박해(1891년) 때 서울의 중인 출신 최필공(崔必恭)·최필제(崔必悌)·최인철(崔仁喆)·최인길(崔仁吉)·최인성(崔仁成)·정의혁(鄭儀赫)·정인혁(鄭麟赫)·손경윤(孫景允)·현계온(玄啓溫)·허속(許涑)·김계환(金啓煥)·김덕유(金德愈)·백상옥(白尙玉)·조지화(趙之和)·양윤덕(梁潤德)·최돈행(崔敦行)·이재겸(李載謙) 등이 문초를 받다 배교하고 풀려났다. 그리고 경기도 광주에서도 최창주(崔昌周)와 많은 그의 동료들, 충청도 당진 진목 배관겸(裵), 예산 여사울 이존창(李存昌)도 형문을 받다 배교하고 풀려났다. 또한, 솔뫼 김진후(金震厚), 황무실 박취득(朴取得) 등 많은 천주교인이 체포되어 갇혔지만 배교하지 않고 뒤 석방되었다. 합덕 응정리 ‘성화’ 집안과 원시장(元)도 체포되어 형문을 받게 되는데, ‘성화’ 집안은 배교하고 풀려나고, 원시장은 옥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였다(달레 교회사 上, pp. 362-369).
☞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11일 임오 4번째 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 형조가 아뢰기를, “체포한 사학죄인(邪學罪人) 정의혁(鄭義爀)·정인혁(鄭麟爀)·최인길(崔仁吉)·최인성(崔仁成)·손경윤(孫景允)·현계온(玄啓溫)·허속(許涑)·김계환(金啓煥)·김덕유(金德愈)·최필제(崔必悌)·최인철(崔仁喆) 등 11명을 혹 형조의 뜰에서 깨우쳐 감화시키기도 하고 혹은 그 집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간곡히 깨우쳐 회개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중인(中人)들로서 잘못 미혹된 자들에 대해 반드시 그 소굴을 소탕하고자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자는 것이요, 한편으로는 백성을 교화 시켜 좋은 풍속을 이루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대개 중인(中人)의 무리들은 양반도 아니고 상인(常人)도 아닌 그 중간에 있기 때문에 가장 교화하기 어려운 자들이다. 경들은 이 뜻을 알아서 각별히 조사하여 혹시 한 명이라도 요행으로 누락시키거나 한 명이라도 잘못 걸려드는 일이 없게 하라. 요컨대 모두 새사람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니, 그러면 경들은 하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하고, 이어 권일신(權日身)과 최필공(崔必恭) 등에게도 의리를 깨우쳐 새사람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2] 『잡과방목』, 역과, 영조 49년 계사(1773년). 토마스는 한학우어별체아(漢學偶語別遞兒)와 주부(主簿)를 지냈다.
[3]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24;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 1.
[4] 손숙경, 「중인 김범우의 천주교 입교와 그의 가문」, 『중인 김범우 가문과 그들의 문서』, 7면.
[5] 이만채 편, 『벽위편』, 2권, 을사년의 형조 적발 사건.
[6] 『정조실록』, 정조 15년 11월 8일, 권일신 진술; 『사학징의』, 2권, 작배죄인질(作配罪人秩), 부록: 형조의 을사년 봄 공문.
[7] 『사학징의』, 1권, 정법죄인질, 현우;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25;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f. 1-2. 토마스의 유배지를 경상도 밀양의 단장(丹場)으로 보기도한다(마백락, 「경상도 지방의 천주교 복음 전파와 김범우」, 『부산 교회사보』 제41호, 2004; 손숙경, 「순교자 김범우와 이에 대한 논의」, 부산 교회사보』 제48호, 2005).
[8] 김범우 토마스의 묘는 1989년 4월 3일 김범우 토마스의 외손 손임덕의 증언(채록자: 마백락 클레멘스)에 따라 5월 15일에 발굴되었으며(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708면; 『가톨릭신문』 제1673호, 1989년 9월 24일), 현재 그의 묘를 중심으로 ‘김범우 순교자 성지’(현 경남 밀양시 삼량진읍 만어로 652)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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