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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별표종합D.C도매센타 원문보기 글쓴이: 용천
문열공,평도공파,한성판윤공파 장손마을....
최종일 2002-08-01 13:39:01, 조회 : 163, 추천 : 0
작성자
최종일 (29세손)
제 목
전주최씨 한성판윤공파 장손마을 내력 (중시조: 평도공파)
전주최씨 한성판윤공파 장손 한성 - 전주에서 -
전남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오룡부락으로 이주 내력 등 참고
*1세 최순작 문열공을시조로
8세 최유경 평도공을 중시조로
9세 최사위 한성판윤공을 파시조인
전주최씨 한성판융공파 종친들께서는
병자호란시 피난하여
전주에서
전남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오룡부락으로 장손이 이주하게된
내력등을참고하시여
종친들게서는
이메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궁금한점도....
ckn54@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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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崔氏 漢城判尹公派 長孫
智島積巨里,五龍部落 移住 來歷 等
(전주최씨 한성판윤공파장손 지도적거리,오룡부락 이주내력등)
全州崔氏 漢城判尹公派 長孫 집안 마을
全南 新安郡 智島邑 自東里 五龍部落
역사는 도도히 흘러간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속에 전주최씨 한성판윤공파 장손 선조들이 걸어온 발자취는 우리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오늘의 삶의 뿌리이기도 하며 그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우리 조상들의 온갖역경과 시련 평화와 희열의 순간을 느껴 보고자 한다
그러한 조상들의 역사적 숨결을 우리 후손들이 이해하면서 오늘의 현실 속에서 후손들끼리 마음을 보다 넓게 눈을 보다 멀리향하면서 현재를 바로 인식하고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세월에 대한 책임과 후손들에게 물려줄 미래를 올바로 설계함에 의의가 있다고본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전통과 역사 그리고 그 끈질긴 생명력 발자취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오늘 우리 후손들의 삶의 질과 자세가 한층 세로워질 것을 기대해본다
한성판윤공파 장손 집안인 전남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오룡부락에 거주하는 후손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다시한번 미흡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희미하게나마 더듬어 봄으로써
오늘의 후손들끼리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서로를 올바로 이해하도록하여 앞으로 도도히 흘러갈 역사속 우리 다음세대의 후손들로하여금 자랑스러운 삶을 누릴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음한다
2001.10.2
29세손 최광남 (최종일,49살)
전남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오룡부락에서
ckn1200@hanmail.net
ckn1200@yahoo.co.kr
1세시조 최순작(문열공) -900년전 조상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으로 완주(현 전주) 개국백에 봉해짐
고려정종-숙종때까지활동(1016-1100년정도)
2세 최숭(이부상서) , 최공(개성소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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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최남부(공부상서,수문전태학,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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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최전(비소소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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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최정신(병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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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최득평(선부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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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최재(감찰대부,시중완산군 문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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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의 아들 3형제
8세 첫째 - 최사미 (예의판서공파 중시조)
8세 둘째 - 최덕성 (삼사좌윤)
8세 세째 - 최유경 (평도공파 중시조) - 588년전조상
- 휘는 유경, 자는 경지, 호는 죽정
- 전주최씨 최순작계통 7세(최재)의 세째아들로 태어남
- 세번 장가 가셨다.(여복이 많으신 조상님입니다.)
- 활동시기: (1342~1413, 고려말 충혜왕 3년 ~조선 태종13년)
- 1360년 - 장령벼슬
- 태?이성계가 등극하기전 고려를 섬김에 충성심을 가상히 여김
- 조선개국공신
- 조선태조(이성계)때 -영촉도 감사 제수, 청백리라 칭함
- 대사헌, 정헌대부,의정부 좌참찬 벼슬함
- 1413년(조선 태종13년) - 별세
- 조선세종대왕때 " 평도공 "시호 받음
최유경(평도공파 중시조) 의 아들 6형제
9세 첫째 - 최사위, 판윤공파 ,파시조-562년전 조상
- 파시조: 최사위,전주최씨9세 문열계(시조-최순작)
- 최유경(평도공파 중시조,전주최씨8세)의 첫째아들
- 모친은 지밀직사 김달상의 딸(일선김씨) 소생
- 활동시기: (1362~1439, 고려말 공민왕 10년~조선 세종20년)
- 1411년(태종11년)-- 우군동지총제
- 개성부사,풍해도(황해도)관찰사
- 1424년(세종6년)-- 자헌대부, 한성판윤
- 1439년(세종20년)-- 별세
- 묘좌 -- 경기도 용인군 남서면 완압리 산78번지 자봉산
* 한성판윤--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조선때 한성부의 우두머리로 정2품의 관직
9세 둘째 - 최사의, 양도공파 파시조
9세 세째 - 최사규, 지평공파 파시조
9세 네째 - 최사강, 경절공파 파시조
9세 다섯째-최사용, 첨추공파 파시조
9세 여섯째-최사흥, 감무공파 파시조
최사위(판윤공,파시조) 의 아들 4형제
10세- 1)처사조파(소시조-최조):벼슬하지않음,전주최씨10세-장손
2)학생계파(소시조-최계):사직,전주최씨10세,단종복위때 귀양감
3)예판원파(소시조-최원):예조판사,전주최씨10세,단종복위 귀양
4)학생?파 (소시조- 최?):전주최씨10세, 단종복위때 귀양
장손들
11,12세묘역- 경기도 용인
13,14세묘역- 1979년 과천 서울대공원 공사로 적거리로 이장
15세 최덕봉 기묘생 1579년생 묘역 -전주 송강동에서
적거리로 묘이장
16세 최대인 경자생 1600-1635 묘역-전주 송강동에서
적거리로 묘이장
*1세 최순작부터 16세최대인 까지 장손들이 1016년부터- 1636년까지 약 620여년을 서울,전주,철원, 청원등 지금의 수도권 중심으로 거주
한성판윤공파 장손 17세손 최치현 지금부터 364년전인 1637년3월30 전남신안군 지도읍 적거리에 최초 들어옴
(무오년 1618.3.3-갑진년 1664.4.10 -47세)
1636년 12월12일 한성의 조선 조정은 긴장감이 감돈다
그동안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를 약탈하고 괴롭히던 청나라의 횡포가 날로 심해져 급기야는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황금과 백금만냥 전마 3천필을 요구할뿐아니라 정병 3만명지원을 요구하더니 조선이 이를 묵살하자
1636년12월1일 청태종은 압록강이 얼어붙자 1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한성을 향해 처들어왔다 ,병자호란인것이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가 중앙조정에 바로 1636년12월12일 도달한것이였다
인조는 조정대신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숙의하였으나 청군이 이렇게 빨리 한성을 향해 밀고 내려올지는 예상하지 못해 조선조정으로써는 특별한 대비책이 나오지 못해 조정은 극도로 혼한에 휩싸였고 드디어 인조는 1636년12월14일 세자와 백관을 대동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였다
도성내의 주민들도 추운겨을임에도 불구 이미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전주최씨 한성판윤공파 15세손 호조참의 최덕린 은 청군이 도성을향해 밀고 내려온다는소식을 듣은후 그날밤부터 퇴청치 못하고 한숨도 자지못한가운데 조정대신들과 사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장남집안으로써 전주에 살고 있는 장손인 사촌형 15세손 최덕봉에게 이러한 전란 소식을 전해 600여년 내려온 조상들이 위패를보호해야 겠다는 생각 또한 간절했다
최덕린 자신또한 한성에서 벼슬을 하고 있지만 조상에게 늘 죄지은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것이였다
자신은 장손집안의 사촌 동생이지만 그동안 정부인 양천허씨로부터 후사가 없자 둘째부인 하동정씨를 맞이하면서까지 후사를 기대하였으나 그마져 끝내 후사를 얻지못하자 지난해 친척인 16세손 최숙(8살)을 양자로 입적하여 대를이어가고 있는 형편이라
어떻게 하던지 전주에 있는 사촌형 최덕봉의 장손가족이 무엇보다 먼저 걱정이 되고 있는것이다
최덕린은 자신의 두부인과 양아들 최숙을 가솔들과함께 직산으로 피난가도록 내려보내고
전주 최덕봉 형에게도 사람을보내 금번 전란의 심각성을 알리고 가능하면 장손이 안전하도록 멀리 남쪽으로 피난가도록 조치를 하였던것이다
전주에 살고있는 한성판윤공파 장손 15세손 최덕봉은 지난해인 1935년 독자인 16세손 아들 최대인을 병으로 잃고
며느리 김씨
손자인 17세손 최치현 (18살)
손자며느리 박씨
증손자 18세손 최영귀 (3살)
증손자 18세손 최영후(1살) 와 함게 어린 손자 증손자들을 거두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차에 한성에서 벼슬을 하며 가끔씩 돌봐주던 최덕린 사촌동생이 사람을 보내왔으니 반가웁게는 맞이하였으나
전해온 소식은 금번 전란의 심각함과 하루빨리 피난길에 오르라는 장손을 걱정하는 소식이였다
전란소식을 전해듣은 최덕봉은 전란의 심각성을 이해하면서도 한성이남으로 청군이 내려올려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것으로 보고
또한 추운겨을철에 어린 증손자들을 피난길로 보낼수없어 당분간 한성의 사태를 지켜보기로 하고 있는가운데
해가 바뀌고 1937년 1월30일 그동난 남한산성에서 버티었던 인조가 세자와함께 청태종에게 한강동편 삼전도에서 무릎을 끊고 신하의예를하고 조선이 청나라의 복속국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오고 청나라 군사들이 닥치는데로 노략질하고 부녀자들을 잡아가고 (철군하면서 조선의 부녀자 50만명 데려감) 도성뿐만아니라 한성이남 각 성에도 청군이 파견하여 온다는 급박한 소식을 전해들은 한성판윤공파 지혜로운 장손인 15세손 최덕봉 조상님은
1637년 2월10일 날씨가 조금풀리자 자신(당시 58세)과 작년에 병으로 사망한 16세손 최대인의 처인며느리 김씨만 전주에 남아 집안을 지키기로 하고
손자인 17세손 최치현 (당시 19살)
선자며느리 박씨
18세증손 장손인 최영귀(4살)
18세증손 차남인 최영후(2살) 등 4명을
간단한 짐과 노자를 챙겨 피난길에 오르게 하면서 가능한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 청군이 완전히 철군할때까지 숨어 살아 남도록 당부를 하였다
피난길에 오른 17세손 최치현은 처와 어린 두아들을 데리고 전주에서 나주무안 해제반도를 거쳐 양월리 나루를건너 두달여만인
1937년3월30일 드디어 당시로는전혀 외부위험이 접근하기힘든
전남 신안군 지도읍 적거리에 도착 지방민들에게 한성의 전란소식과 청군의 횡포를 전하고 도움을 요청 지방민들의 따뜻한 호의속에 의식주를해결하면서 당분간 거주하는심정으로 거주하게되었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인 전주에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던 생각은 인심좋고 살기좋은 평화로운 적거리에서 두아들들이 아무탈없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정이들었고 2년이 지난 1639년 전주에 계신 15세손 최덕봉 할아버지마져 돌아가심으로 이곳 적거리에 아예눌러앉아 살기로 마음먹고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시조인 1세 최순작부터 16세 최대인 까지 1016년-1636년 까지 한성판윤공파 장손 집안은 약 620여년간을 고려,조선 도성인 철원 한성 과 전주 천원 등 지금의 수도권을 중심으로 거주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을 시점으로
17세손 최치현이 적거리에 들어온1637년3월30일부터 현재2001년까지 약 364년간을 전남 신안군 지도읍 적거리,오룡, 자서리, 해제
등지에 번창하여 많은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최치현의 손자인 19세 최응홍 장손이 오룡동으로 분가 지금까지 오룡동에서 장손집안이 이어지고 있는것이다
17세 최치현은 1637년 3월30일부터 적거리에 정착 두아들 18세손 최영귀(1634년생)와 최영후(1636년생) 그리고 부인 박씨와 함게 열심히 생활하여 가세를일으켜
18세손 장손 최영귀 가 18살때인 1652년 처인 양성이씨와 혼례를 치루고 세아들을 두었으며
장손(19세최응홍1653-1689)-오룡동 종암,기호,광선집안
둘째(19세 최창홍1655생) - 오룡동 영주,완규,병남집안
셋째(19세최응발1657생)-오룡동현섭,용섭,종두,적거리집안
18세손 차남인 최영후(1636년생) 도 1658년 22살 때 인동정씨와 결혼 1659년 두아들을 두었는데
첫째(19세손 최시흥 1659년생) -오룡동 명욱,재 락 ,기수,자서리
둘째(19세손 최직홍 1662년생) - 해제쪽
적거리로들어온지 40여년이 지나자 손들이 성장 각자 오룡동,자서리 해제등으로 분가하여 오늘의 한성판윤공파 자손들로 번창하게된것이다
한성판윤공파 장손 19세 최응홍이 적거리에서 오룡동으로 지금부터 323년전인 1678년 3월 30일 처 제주고씨와 함께 최초 분가
19세 최응홍 (최응승) (1653년계사생- 1689년) 이
할아버지 17세 최치현,
아버지 18세 최영귀 와 함께 적거리서 거주 25살때까지 함께거주하다가 25살때인 1678년 (지금부터 323년전) 효지거주하는 고효직의 딸 제주 고씨와 혼례를 치루고 처가집 옆 골짜기인 지금의 오룡동 감나무골 로 분가하여 다섯 마리 용의형상을 하고 있는 지세를살펴 오룡이라 마을이름을 짓고
마을앞 우물가에 정착기념으로 전나무 한그루를 심으니
이때가 바로 오룡마을형성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이듬해인 1679년 독자인 20세 최무조 (기미생 1679년)를 오룡동에서 출산 최무조가 10살때인 1689년 36세 나이로 사망함
묘역 -선황산 태천넘어가는길 고개넘어 왼편위치
20세 최무조(최무) 기미생 1679년생
10살때인 1689년 아버지 최응홍이 갑작스런 죽음으로 홀어미니인 제주고씨 밑에서 어렵게 살던 최무조는 1695년 16살때 밀양박씨와 일찍히 결혼하여 17살 때 인 1696년에 오룡동 금암.석오,광선
세집안의 8대조인 21세 최종빈 ( 선황산 상봉 묘역)과
둘째인 21세 최종걸(22세 효구,23세 득봉,24세 창석 후 대가 끊김-뒷매선영)을 출산함
* 오룡동에서 최초로 태어난 전주최씨 한성판윤공파는
322년전인 1679년에 태어난 20세 최무조 9대조 할아버지임
(29세 입장에서 9대조임)
묘역 -선황산 태천넘어가는길 고개넘어 왼편위치
21세 최종빈 (최시빈) (병자생 1696년생- 1759,63세)
26살때인1722년 한산전씨와 오룡동에서 혼례를치룬 21세손 최종빈 장손은 내리 다섯 아들을 출산함으로써 이때부터 한성판윤공파 장손집안의 손들이 번창하는 계기가 되어 후일 장손 집안 증흥조로 인정이되어 사후 지도에서 가장 명당자리로 어느집안에서도 감히 묘역을 조성하지못했던 선황산 최정상에 모셔짐
*묘역 : 선황산상봉
다섯자녀 출산
22세 첫째- 최효보 - 27세에서 대가 끊김
(묘역:22세-26세까지 장손 선황산 선영)
*둘째 최효문의 27세손 최봉오(최병채)에게 장손 이어짐
22세 둘째 최효문 -후손:철민(한성판윤공파 장손 30세손, 29세 상필의자),상윤,상문,용기, 학순,일석,권순,종암,근수,정수,복남
*묘역 : 땟금머리(작은저수지위)
22세 셋째 -최효수 -후손: 맹상,맹식,용호,성오,기호,석오,
선호,대호,광호,중호,상호
*묘역 : 매살매 (큰저수지위)
22세 내째 -최효홍 - 후손:복태,성락,종선,인석,종성,진수, 종신,종화,용담,용원,철종,정인,광선, 광남,종태,광태,종욱,종방,종인,종학, 종택,종흥,진호,흥호,지훈,지흥,지만
*묘역 : 수레봉(차봉)(선황산뒤)
22세 다섯째-최효호 - 고사쪽 집안
이렇듯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속에 많은자손들이 번창하였는데
장손 집안 조상들의 발자취를 다시한번 더듬어 보면
19세 최응홍 장손이 적거리에서 오룡동으로 323년전인 1678.3.30 처 제주고씨와 함께 이주한이후 그의 손자 21세손 최종빈 장손이
다섯 아들을 둠으로써 한성판윤공파 장손 집안의 번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오룡동에서 300여년이 지난 오늘날 29세손을 깃점으로 많은 30세손들이 세로운시대를맞아 각 분야에서 도약하기위해 고향을 떠나 분발하고 있어
과거 우리 조상들중 300여년마다 증흥조가 나타나 집안을 일으키고 번창시킨 그 끈질긴 생명력을 돌이켜보면
이제 또다시 객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후손들중 전주최씨
한성판윤공파 의 증흥의 발판을 마련할 것을 기대해볼수있다
오룡동 집안
29세 입장에서 촌수 ( 27세-30세 명단)
18세손이 형제 24촌
명욱,자서리 -석오,광선,종암,적거리,현섭,용섭,종두,영주,완규,병남
19세손이 3형제 22촌
오룡동 석오,광선, 종암 - 적거리,현섭,용섭,종두 -영주,완규,병남
21세손이 형제 18촌
완규 -영주
22세손이 형제 16촌
완규,영주 - 병남
22세손이 5형제 16촌
종암 -석오 -광선
24세손이 3형제 12촌
종두- 용섭- 현섭
26세손이 3형제 8촌
종신- 종학 - 광선
전주최씨 한성판윤공파 장손묘역 위치
묘역 :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완압리 산 78번지
(1979년 3월 서울대공원건설로 과천선영에서 이장)
9세 최사위 (한성판윤공) - 파시조
10세 최 조 ( 처사조파) - 소시조
11세 , 12세
묘역: 전남 신안군 지도읍 적거리 산 248번지 등
13세,14세 과천에서 1979년 적거리로 이장
15세 최덕봉, 16세 최대인 전주 송강동에서 적거리로 이장
17세 최치현,18세 최영귀 적거리에서 사망 적거리 중산촌
묘역: 전남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오룡동 앞 선황산
19세 최응홍,20세 최무조 선황산 고개넘어 왼쪽 선영
21세 최종빈 선황산 상봉
22세효보,23세영여,24세창인,25세승봉,26세달관-선황산선영
(오룡동 종암,석오,종신 집안관리)
묘역: 전남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오룡부락 입구
27세 최봉오 (최병채) -작은저수지위(22세 최효문묘역)
(29세 장손 최상필의 6촌동생 최종암이 관리)
묘역 : 전북 군산시
28세손 최인학 ,29세손 최상필 (1994년12월 사망)
* 30세손 최철민(정미생1967년생)-군산시 조촌동 거주
마무리하면서 ...............
수도권과 전주등지에서 600여년간 살던 우리 장손집안의 조상들이 지도에 들어온지 364년, 오룡동에 들어온지 323년이 지난 2001년 10.1일 오늘
너무나 빨리 지나가고 있는 세월속에 소홀하기쉬운 과거 조상들의 흔적 그 희미한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다가오는 미래를 생각해보고자 미흡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에 대해 전주최씨 한성판윤공파 파편에 의해 세로운세대들에게 다소 참고가 되었음하는 바램과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 자손들끼리 이런기회를통해 서로 골육의 정을 나눌수 있는 계기가 되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가운데 날로 번창해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해본것이다
먼훗날 또다른 후손이 수정하고 보완하여 젊은세대들에게 쉽게 이해하고 기억되어질수 있길 바랄뿐이다
28세 장손인 최인학 (1908년생)이 청년의때인 1930년대에 객지에 나간이후 29세 장손 최상필 (1938년생,94.12월 졸)과 30세 장손 최철민(1967년생, 군산시 조촌동 거주)이 장손마을을 잠시 떠나 해남,목포,군산등지에서 객지
생활을 하고있어장손인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수 있을지 여부는 장손 본인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지금부터 364년전 인 1637년 ,병자호란(1636년)의 난을 피해 장손을 보호하기 위해 지도 적거리를 처음 찾은 17세손 최치현 장손의 후손들인 지도 한성판윤공파 자손들이 객지에서 살아가고있는 장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또한 절실히 필요할때라고 생각되며
장손 마을의 전통이 계속 이어질지 여부 또한 오늘날 지도적거리,오룡,자서리 등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성판윤공파 17세최치현 장손 후손들의 몫이라고도 볼수 있는것이다
장손마을인 오룡동에는 29세장손 최상필의 6촌동생인 최종암과 16촌등 형제들이 한성판윤공파 장손들의 선영을 관리하고 있으며
27세-영채,영주 28세-맹수,완규,길영
29세-종암,기호,석오,종신,종학,광선,광남,광태,순용,옥동,
용섭,종두,용섭,종흥,형종,
30세-재락,기수,용담,혜신,근옥,용원등 26가정이 아직도 오룡동에서 300여년의 전통을이어 내려오고있는
한성판윤공파 장손마을을 지키고 있다
29세장손 최상필의 형제 상윤,4촌 상문,용기,학순,일석,권순,6촌 정수,복남 등 대부분 장손과 가까운 집안은 장손마을인 고향을 떠나 객지생활을하고 있기 때문에 훗날 어떻게 변천하여 갈것인지가 오늘의 시점에서 또한 궁금하여 여기 기록해두는 것이다
20세기말 세로운 문명세대에 태어난 30세손 자손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교육을 받은 신세대들로
한성판윤공파 집안의 세로운 300년을 약속하며 교육계,사업가,공직자,성직자등의 길을 훌륭하게 걷기위해 분발하고 있는가운데
아쉬운 것은 300여년 조상의 맥이 이어져내려온 그들의뿌리인 고향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것이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삶을 영위에 가더라도 고향을 잊지않고 언잰가는 고향에 되돌아올수 있는 후손들이 많아져 더 이상 한성판윤공파 장손마을이 쇠퇴해지지 않고 앞으로 수백년간 더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 작은기록을 남겨 뿌리를 이해하고자 하는것이다
앞으로 30-40년후 과연 오룡마을은 어떻게 변모해 있을지 장손의 맥은 이어갈련지, 훌륭한 후손들이 많이 나타나 아주 살기좋고 인심좋고 공기좋은 고향마을로 가꾸워 도시에서 지친 후손들이 고향에 돌아와 편안하게 휴식할수 있는그런 안식처로 계속 번창해 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여기에 그바램을 기록해두는것이다
객지에 나가있는 후손들에게 정리된 이 작은 글이 전파되어 고향을 잊지않고 사는 그런 계기가 되길 바랄뿐이다
2001.10.2
29세손 최광남 (최종일,49살) -한성판윤공파 장손과 16촌간
전남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오룡부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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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십니까! 29세 최 종신 큰손자이자 30세 최 명길 장남인 31세손 최 동민 (1980년생) 인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