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영화 “영웅” 관련.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
▲안 태훈(安泰勳, 베드로)
안중근(安重根,토마스,1879〜 1910)은 1879년 9월 2일(음 7월 16일) 본관은 순흥(侧興). 황해도 해주 부 수양산(黃海道 海州府 首陽山) 아래에서 안 태훈(安泰勳, 베드로)과조㈱ 마리아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므로 이름을 중근(重根)이라 했고, 배와 가슴에 검은 점이 일곱 개가 있어 아명(兒名) 겸 자(字)를 응칠(應七)이라 하였다.
일곱 살 때인 1885년에 해주에서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주하였으며, 1894년에 김홍섭의 딸인 김아려 아녜스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쯤 뤼순 감옥 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하였다.
2010년 3월 26일은 안중근 토마스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지 110주기가 되는 날이다. 안중근은 신앙인으로서,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교육자와 독립운동가로 살았고, 서른 한 살의 짧은 삶이었지만 후세에 남긴 족적이 매우 컸다.
안중근의 부친 안 태훈은 해서(海西) 지방에서 학문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개화파와 관련이 있었는데,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 하자,가족을 이끌고 해주를 떠나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信川郡 斗羅坊 淸溪洞)으로 이주하였다.
안중근은 어려서는 동양 고전을 익혔고, 성장한 뒤에는〈대한매일신문〉(大韓每曰新聞) •〈황성신문〉(皇城新聞)과《만국사〉〉(萬國史) • 《조선사》(朝鮮史) •《만국공법》(萬國公法) 등을 읽고 국제 정세와 조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무예와 병법을 익히면서 무강(武强)의 정신도 함양해나갔다.
안중근은 부친 안태훈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안태훈은 1894년 황해도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자, 사병과 촌민들을 모아 동학군에 맞섰다.
그런데 동학군이 진압된 후, 안태훈은 동학군으로부터 노획한 군량미를 사용한 문제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정부 관료로부터 추궁을 당하게 되자, 안태훈은 서울로 가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안태훈은 천주교회로 피신하였고,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성당에 머물면서 강론을 듣고 성서도 읽은 뒤 천주교에 입교할 결심을 했다. 이후 문제가잘 마무리되자, 안태훈은 교리에 박식한 이종래(바오로)와 함께《십이단〉〉(十二端),〈〈문답》(問答) 등의 교회 서적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친지들과 청계동 주민들에게 교회 서적을 나누어주면서 선교하였다. 그리고 1897년 1월 11일 마렴 본당의 빌렘(N.J.M. Wilhelm, 洪錫九, 1860〜1938)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때 안중근도 가족 및 청계동 주민들과 함께 ‘토마스’ (Thomas, 多黙)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무렵 아버지는 널리 복음을 전파하고 원근에 권면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갔다. 우리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믿게 되었고, 나도 역시 입교하여 프랑스인 선교사흥신부(빌렘) 요셉에게서 영세하고 성명(聖名,세례명)을 도마(多黙,토마스)라 하였다.
경문(기도문)을 강습도 받고 도리를 토론도하기 여러 달을 지나 신덕(信德)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 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주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몇 해를 지났다. 그때 교회의 사무를 확장하고자 나는 흥 교사(洪敎師)와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을 권면하고 전도하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했었다(윤병석 편역,〈안응칠 역사〉,《안중근 전기 전집》,국가보훈처,1999,137쪽).
교리 연구를 통해 안중근의 마음에 ‘독실한’ 천주 신앙이 자리 잡게 되었다. 안중근은 영혼의 신령(神靈) • 사후심판(死後審判) • 상선벌악(賞善罰惡) •천당지옥〈天堂地獄) 등 천주교의 주요 교리들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사상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관리들의 학정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고, 민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 가운데 안중근의 신앙과 사상은 조국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부합하면서 도덕사회의 실현과 민족구원 사상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문명개화의 독립국을 이상으로 삼는 진보적 인 사상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입교한 후, 안중근은 전교 회장인 숙부 안태건(安泰健,가밀로)과 함께 교회 활동에 매진했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의 복사로 활동 하였고,해주 • 옹진 등 황해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빌렘 신부의 선교 활동도 도왔다.
또한 빌렘 신부로부터 프랑스어와 서양 학문을 배워 새로운 사상에 눈을 떴다. 그러면서 1901년 2월 이전에는 뮈텔 주교에게 대학 설립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는 빌렘 신부에게 순명 했지만,때로 불합리한 점이 있다면 거침없이 이를 지적했다. 빌렘 신부가 신자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자, 안중근은 신자들과 함께 뮈텔 주교에게 문제의 해결을 청원하고자 한 점 이 그 한 예였다.
그러나 안중근의 교회 활동이 그리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00년을 전 후한시기에 해서 교안(海西敎案)이 발생하여 해주관찰부에서 안태훈 형제를 잡아 투옥하는 일이 있었다. 이 교안으로 황해도 천주교회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1903년 4월 7일 뮈텔 주교가 교안의 책임을 물어 빌렘 신부를 서울로 소환하였다. 그해 11월 24일 빌렘 신부가 다시 청계동으로 돌아 왔지만, 교안으로 타격을 입은 황해도 천주교회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중근의 교회 활동도이 전에 비해 활발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안중근의 모습은 독립 전쟁 중에도 나타났다. 그는 독립 전쟁 중에 일본군에게 쫓기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동료들에게 “전일의 허물을 회개하고 천주님을 믿어 영생하는 구원을 받기”를 권면하였다.
안중근은 동료들에게 가톨릭의 주요 교리들을 설명한 다음, 그들의 동의를 얻어 교회의 규칙대로 대세(代洗)를 베풀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포살(砲殺)이 신앙적으로도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비록 성서에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남의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 하는 것은 죄악이므로 그 죄악을 제거한 것이기 때문에 신앙적으로도 정당한 행위였다고 강변했다.
또한 이토 포살 당시 정거장으로 가기 전에 하느님에게 예배를 드렸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그날 아침에 한해 특별히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고 매일 아침 하느님을 예배하고 기도드렸다”고 대답했다.
그는 옥중에서 뮈텔 주교에게 남긴 유언장에서 교구장에게 불손하게 대했던 것을 사과한 뒤, 나라의 복음화를 기원한다고 했다. 아우와 빌렘 신부에게는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대한국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안중근은 교리 연구와 철저한 기도 생활 등을 통해 굳건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입교 초기 의 선교 활동은 전쟁 중의 교리 전파, 옥중에서의 복음 전파로 이어 졌으며, 그의 신심은 독립 전쟁과 하얼빈 의거, 체포 후의 순국 과정에서 언제나 신앙인의 용기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안중근은 독실한 신앙과 조국애를 조화시킨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