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과 선종의 대립
부처님의 가르침을 문자로 기록하여 남긴 것이 바로 불경인데, 이 불경의 문자에 근거해서 가르침을 전하는 종파들을 교종이라고 한다. 사실 불교는 본래 교종과 선종이라는 구분이 없었다. 교종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선종이 생겨나고부터 그것과 구분하는 과정에서 교종이라 부르게 되었을 뿐이다. 삼국시대의 불교 역시 모두 교종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글로 옮기고, 이를 경전으로 삼아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이 불교의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선종은 부처님의 진리는 문자가 아닌 마음으로 전달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석가가 인도의 영산회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연꽃을 보이며 미소를 지었는데, 모두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직 마하가섭이라는 제자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는데, 석가가 가섭의 미소를 보고 “내 마음속의 정법과 원리가 가섭에게 전달되었다.”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염화미소(拈華微笑)’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진리는 언어라는 수단에만 의존하여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종을 중국에 가져온 사람은 인도 출신 달마대사다. 그리고 중국에서 시작된 이 선종이 한국에 들어와 교종과 함께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된 것은 고려 시대 때다. 통일신라 말 교종을 지지한 세력이 왕족이나 귀족들임에 반해, 선종을 지지한 세력은 점차 힘을 얻고 있는 지방의 호족들이었다. 선종은 고려 중엽에 이르러 교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때의 분쟁이 가장 극심했다고 한다. 교종은 선종에 대해 무식하며 계를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하였고, 선종은 교종에 대해 글자에만 집착하여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교종과 선종은 그것을 지지하는 계층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랐을 뿐만 아니라 교리상 견해까지 달랐기 때문에 갈등이 점차 심화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 교종과 선종을 의천(義天, 1055~1101) 이후로 다시 통합하여 조계종을 창시한 이가 바로 지눌(知訥)이다.
고려 중기의 불교는 지방 중심의 선종(禪宗)과 중앙의 교종(敎宗)으로 나뉘어 있었고 교종 또한 왕실의 후원을 받은 화엄종과 귀족 중심의 법상종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의천은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바탕으로 개성 흥왕사에서 교단통합운동을 하며 천태종을 도입하였고 이후 국청사를 세우면서 선종까지 통합하려 하였다. ‘교관겸수’에서 ‘교(敎)’는 교리와 형식을, ‘관(觀)’은 참선과 수양을 의미하며, ‘교’와 ‘관’ 둘 다 수양해야 한다는 뜻이다. 교리와 형식은 교종에서, 참선과 수양은 선종에서 중요시하였다. 의천은 ‘교’와 ‘관’ 모두 다 수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교’를 더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의천이 창시한 천태종은 교종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한 불교 종파이다. 그러나 의천 사후 천태종이 분열하면서 교단 통합은 이어지지 못했고 다시, 지눌이 등장하기 전까지 고려 불교는 교종과 선종으로 양립했다.
지눌은‘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하였다.‘정(定)’은 선종(禪宗)의 수행방법을, ‘혜(慧)’는 교종(敎宗)의 지식과 지혜를, 쌍(雙)은 양쪽을, 수(修)는 마음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정혜쌍수는 선종과 교종의 수행방법을 모두 겸한다는 의미다.
선종(禪宗)의 수행방법이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진리를 직시하게 해 준다면 교종(敎宗)의 수행방법은 수행의 방향이 잘못된 곳으로 빠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지눌은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교종(敎宗)을 통합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한국 불교의 전신이 되었다.
지눌은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에 그치지 않고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개념까지 제시한다. 돈오점수란 단번에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지속적으로 번뇌와 습기를 차차 제거해야 하는 점진적인 수행의 단계가 요구됨을 이르는 말이다.
※ 종밀(宗密)의 5가지 돈점설
① 돈오돈수(頓悟頓修) :
일시에 깨치고 더 닦을 것이 없이 공행을 다 이룬다.
② 돈오점수(頓悟漸修) :
단번에 진리를 깨친 뒤 번뇌와 습기를 차차 제거해나간다.
③ 점수돈오(漸修頓悟) :
단계를 밟아 차례대로 닦아 깨달음에 이른다.
④ 점수점오(漸修漸悟) :
차츰 닦아가면서 차츰 깨달음에 이른다.
⑤ 돈수점오(頓修漸悟) :
닦기는 일시에 닦지만 공행이 익은 뒤에 차차 깨달음에 이른다.
* 염화미소(拈華微笑)
‘꽃을 집어 들고 웃음을 띠다’란 뜻으로, 말로 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을 이르는 말. 불교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뜻으로 쓰인다.
① 종밀(宗密, 780 ~ 840)
중국 당나라의 승려다. 화엄종의 제5조로 규봉 대사(圭峯大師)라 칭하였다. 교선일치(敎禪一致)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저서로는 《원인론 原人論》, 《원각경소 圓覺經疏》, 《우란분경소 盂蘭盆經疏》 따위가 있다.
② 의천(義天, 1055~1101)
의천은 고려전기 국사, 승통, 국청사 제1대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이다. 1055년(문종 9년)에 태어나 1101년(숙종 6년)에 사망했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자원하여 11세에 출가했다. 화엄종 승려인 그는 화엄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섭하고, 나아가 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여 선종을 포섭함으로써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정혜쌍수(定慧雙修),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다
③ 지눌(知訥, 1158 ~ 1210)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을 통합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고려시대 승려로 지눌은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개념을 내세워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였으며, 오늘날 한국 불교의 주류인 조계종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진심직설 眞心直說》, 《수심결 修心訣》, 《정혜결사문 定慧結社文》 등이 있다.
지눌은 ‘마음은 본래 맑아 번뇌가 없다. 본래 마음을 깨치면 돈오(頓悟)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은 후에도, 지금까지 축적된 습기를 한 번에 제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습기를 제거하는 수행을 해야 하며, 점차로 훈화해야 하기에‘점수(漸修)’라고 하였다.
한 제자 여쭙기를 [견성 성불(見性成佛)이라 하였사오니 견성만 하면 곧 성불이 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근기에 따라 견성하는 즉시로 성불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는 드문 일이요 대개는 견성하는 공보다 성불에 이르는 공이 더 드나니라. 그러나, 과거에는 인지가 어두운 고로 견성만 하면 곧 도인이라 하였지마는 돌아오는 세상에는 견성만으로는 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며 거개의 수도인들이 견성만은 일찌기 가정에서 쉽게 마치고 성불을 하기 위하여 큰 스승을 찾아 다니며 공을 들이리라.] <성리품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