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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디언 자장가
오크브리지 역 밖에는 여러 사람들이 무리지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
르는 듯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여행 가방을 든 짐꾼이 서 있었
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외쳤다.
「짐!」
한 택시 운전수가 다가왔다. 그는 부드러운 데븐셔 사투리로 물었다.
「인디언 섬에 가십니까?」
네 사람의 목소리가 그 물음에 긍정의 대답을 하고, 그리고 곧 서로의
얼굴을 흘끗 훔쳐보았다.
운전수는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워그레이브 판사에게 말했다.
「택시는 두 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대는 엑서터에서 보통열차가 와닿
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5분쯤 걸릴겁니다만, 그 기차로
오는 남자 손님이 한 분 있습니다. 어느 분이 그때까지 주시겠습니까? 그
편이 더 편할 텐데요.」
벌써 오윈 부인의 비서가 된 듯한 베러 크레이슨이 곧 입을 열었다.
「내가 기다리겠어요. 여러분, 먼저 가주세요.」
그녀는 세 사람을 보았다. 그녀의 눈초리와 목소리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의 명령하는 듯한 투가 조금 나타났다. 여학생들에게 어느 테니스 코
트를 쓸 것인지 지시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에밀리 브랜트가 점잔빼며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먼저.」
그녀는 운전수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택시에 올라탔다. 워그레이
브 판사가 그 뒤를 따랐다.
롬버드 대위가 말했다.
「나도 기다리지요. 저…….」
베러는 말했다.
「크레이슨이에요.」
「나는 롬버드라고 합니다. 필립 롬버드.」
짐꾼이 택시에 짐을 실었다.
자동차 안에서는 워그레이브 판사가 직업적인 주의깊은 말씨로 말했다.
「좋은 날씨입니다.」
에밀리 브랜트는 대답했다.
「네, 참으로.」
아주 훌륭한 노신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바닷가 여관에서 보던 남자
들과 아주 다르다. 올리버 부인인지 미스 올리버인지는 잊었지만, 그녀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물었다.
「이 부근을 잘 아십니까?」
「콘월과 토키에는 갔었지만, 이곳 데븐셔에 온 것은 처음이에요.」
「나도 이 부근은 잘 모릅니다.」
택시는 달려갔다.
두 대째 택시 운전수가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안에 들어가 앉으시겠습니까?」
베러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예요, 밖에 있겠어요.」
롬버드 대위는 미소지었다.
「밖에 있는 편이 기분좋지요. 그보다도 역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여기에 있겠어요. 겨우 무더운 기차 안에서 풀려 났으니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이런 더위에 기차 여행은 정말 견딜 수 없지요.」
「그래도 날씨가 계속 맑아서 좋아요. 영국의 여름날은 변덕이 심하니
까요.」
롬버드는 스스로 평범한 말이라고 여기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물었다.
「이곳을 잘 아십니까?」
「아니오, 처음이예요.」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두려는 듯 급히 덧붙였다.
「아직 나의 고용주와도 만나지 않았어요.」
「고용주라고요?」
「네, 나는 오윈 부인의 비서로 고용되었어요.」
「그렇습니까?」
그의 태도가 눈에 띄지 않게 좀 달라진 것 같았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
지 알게 되어 말하기 쉬워진 듯했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묘한 이야기로군요.」
베러는 웃었다.
「아니, 그렇지도 않아요. 부인의 비서가 갑자기 앓게 되었다며 직업소
개소로 전보가 와서 오게 되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곳에 가서 만일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렵
니까?」
베러는 다시 웃었다.
「뭐, 임시적인 일인걸요. 여름방학 동안만의. 나는 여학교에 나가고 있
어요. 게다가 인디언 섬에 가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신문에 여러 가지
기사가 나고 있었거든요. 정말 아름다운 곳일까요?」
「나는 모릅니다. 가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머나, 그러세요? 오윈 부처는 매우 좋은 분들일 것 같아요. 어떤
분일까? 좀 가르쳐 주겠어요?」
롬버드는 생각했다. 난처하게 되었군. 아는 체하는 게 좋을까, 정직하게
모른다고 할까.
그는 갑자기 빠르게 말했다.
「팔에 벌이 앉았군요. 가만히 계십시오.」
그는 더없이 친절하게 그녀의 팔에 앉은 벌을 손으로 털어 주었다.
「고마워요. 올 여름은 벌이 많군요.」
「그렇습니다. 더위 때문이겠지요. ……우리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아십니까?」
「모르겠어요.」
기차가 가까이 온 듯 길게 꼬리를 끌며 기적이 울려 왔다.
롬보드가 말했다.
「온 것 같군요.」
역 출구에 나타난 사람은 키큰 군인 같은 노인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깎고 잘 손질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육중한 가죽 여행 가방을 무거운
듯 든 짐꾼이 베러와 롬버드 쪽을 가리켜 보였다.
베러는 사무적인 태도로 나아갔다.
「오윈 부인의 비서예요. 택시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이분은 롬버드 씨예요.」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푸른 눈이 롬버드를 관찰
했다. 순간 그의 눈 속에서 하나의 판단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
을 눈치채지 못했다.
(호남자로군. 어딘지 의심스런 점이 있긴 하지만…….)
세 사람은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그들은 조그만 오크브리지
의 잠든 듯 조용한 시가지를 지나 플리머스 가도를 1마일쯤 달렸다. 그리
고 나서 좁은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데븐셔의 이 지방은 전혀 모르오. 도시트셔와의 경계 가까운 동 데븐
셔에 조그만 집을 갖고 있소만.」
베러는 말했다.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언덕이 있고, 땅은 붉고, 한쪽으로는 아름다운
푸르름이 펼쳐져 있군요.」
필립 롬버드는 그녀의 관찰을 비평하듯 말했다.
「좀 협소한 느낌이군요. 나는 넓은 곳이 좋습니다. 멀리까지 환히 내
다보이는…….」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여행을 많이 한 것 같구려.」
롬보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요전번 전쟁에 참가했는지 안 했는지 묻겠지. 이런 늙은이들
은 꼭 그렇게 묻거든.)
그러나 매커서 장군은 전쟁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험준한 구릉의 비탈길을 올라가 스티클헤이븐 쪽으로 구불구불
한 길을 내려갔다. 작은 집이 몇 채 모여 있고 바닷가에 어선 두 척이 조
는 듯 끌어올려져 있었다. 남쪽 방향으로, 저물어 가는 저녁해를 받은 인
디언 섬이 비로소 그들의 눈에 비쳤다.
베러는 놀라운 듯 말했다.
「바닷가에서 꽤 떨어져 있군요.」
그녀는 바닷가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하얀 저택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
러나 저택은 보이지 않고, 거대한 인디언의 머리를 닮은 바위투성이 섬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나쁜 모습
이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일곱 개의 별>이라는 조그만 찻집 앞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등굽
고 나이든 판사와, 자세가 꼿꼿한 에밀리 브랜트, 세번째 사나이는 사람
좋아 보이는 몸집큰 사람으로 그들 앞으로 걸어와 자기 이름을 댔다.
「기다리는 게 좋을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한 번에 갈 수 있으니까
요. 나는 데이비스라고 합니다. 남아프리카의 나타르에 있었지요. 그곳에
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쾌한 듯 소리내어 웃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분명 불쾌한 태도로 그를 보았다. 사나이의 품위없
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에밀리 브랜트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지 뚜렷이 결정한 듯했다.
데이비스는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물었다.
「배가 떠나기 전에 한 잔 들고 싶은 분 없으십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데이비스는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럼, 곧 떠납시다. 오윈 씨와 부인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요.」
모두의 얼굴에 뜻하지 않은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데이비스도 그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들을 초대한 사람은 그들에 모두에게 이상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비스가 손짓하자 가까운 벽 쪽에 서 있던 사나이가 다가왔다. 몸을
양옆으로 흔들며 걷는 모습으로 보아 뱃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이
바닷바람에 그을리고 눈은 검었으며 초점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데븐셔 사투리로 입을 열었다.
「떠나시겠습니까, 여러분? 보트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동차로 오실
남자분이 둘 있지만, 오윈 씨는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니까요.」
모두 일어섰다. 안내자는 그들을 돌을 쌓아 만든 선착장으로 안내했다.
한 척이 모터 보트가 옆에 대어져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꽤 작은 배로군요.」
배주인은 설득하듯 말했다.
「이래봬도 훌륭합니다. 플리머스까지도 문제없이 갈 수 있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토록 많이 타는가?」
「이 곱절의 사람이 타도 끄덕없습니다.」
필립 롬버드가 밝은 목소리로 태평스럽게 말했다.
「괜찮겠지요. 날씨가 좋고 파도도 잔잔하니까요.」
에밀리 브랜트는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태도로 다른 사람의 도움
을 받아 무서워하며 보트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음울한 기분이 가셔지지 않았다. 서로 상대가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보트가 떠나려 할 때 밧줄을 쥐고 있던 안내자가 별안간 고개를 갸웃
했다. 자동차 한 대가 급한 비탈길을 마을 쪽으로 달려 내려왔다. 크고
아름다운 자동차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난 환상처럼 보였다. 머리칼을 바
람에 흩날리며 핸들을 잡고 있는 젊은이는 지는 해의 강한 빛을 받아 스
칸디나비아의 전설 속에 나오는 젊은 무신(武神) 같아 보였다.
그는 경적을 울렸다. 그 커다란 소리가 만 안쪽의 바위에 부딪쳐 메아
리쳐 왔다. 현실로 여겨지지 않는 한순간이었다. 이때의 앤터니 머스턴은
인간 이상의 존재인 것처럼 보였다. 이 곳에 있던 몇 사람은 뒷날 이 순
간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프레드 내러컷은 엔진 옆에 앉아 이상스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상상한 오윈 씨의 손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아름답게 차려 입
은 여자들과 스포츠 옷을 입은 신사들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머 롭슨 씨를 찾아오던 손님들과는 전혀 다르다. 프레드 내러컷은 롭
슨 씨의 손님들을 생각해 내고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들은 무척 쾌활
했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오윈 씨는 몹시 색다른 인물 같다. 이상스럽게도 프레드 내러컷은 아직
오윈 씨를 만난 적도 없고 부인을 본 일도 없었다. 오윈 부처가 마을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일은 모리스 씨를 통하여 했고, 돈도 모리스 씨가 치렀다. 언제나
명확히 지시되고 지불도 틀림없었으나 이상한 일임에는 변함없었다. 신문
에 <수수께끼의 인물 오윈>이라고 난 것을 내러컷도 읽었지만, 확실히
그는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아니면 섬을 산 사람이 정말은 게이브리얼 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
금 배에 탄 손님들을 보자 그렇게 믿어지지 않았다. 영화배우나 영화에
관계있는 이는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프레드 내러컷은 손님들을 차가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늙은 노처녀 한 사람――잔소리 심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는 이런 여자가 싫었다.
군인 같은 노신사――얼굴 표정으로 보아 참다운 군인인 듯하다.
아름다운 아가씨――그러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헐리우
드 스타일의 호화스러운 아름다움이 아니다.
몸집 단단한 쾌활한 신사――이 남자는 진짜 신사가 아니다. 아마 세일
즈맨 같은 일을 하던 남자이리라.
또 한 사나이는 눈이 날카롭고 방심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전혀 정체를
모르겠다. 이 사나이는 혹시 영화와 관계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윈 씨의 손님 같은 사람이 하나 있다. 마지막으로 자동차를 몰
고 온 젊은이다.
(얼마나 훌륭한 자동차인가! 스티클헤이븐에서는 본 적도 없는 자동차
다. 값이 굉장히 비싸겠지.)
이 사나이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재산도 꽤 있음에 틀림없다. 다른 이
들도 모두 그와 같은 사람들이라면 말이 되겠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이상하다. 믿을 수 없을 만
큼 이상스럽다.
보트는 바위코를 돌았다. 마침내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섬 남쪽은 경
치가 전혀 달랐다. 토지가 부드러운 굽이를 이루며 바다로 흘러내리고 있
었다.
저택은 그곳에 남쪽을 향하여 세워져 있었다. 낮고 네모진 건물로, 둥
근 창이 모든 빛을 받아들이는 근대적 건축물이었다. 멋들어진 저택이었
다. 모두들 기대하고 있었던 대로의 저택이었다.
프레드 내러컷은 엔진을 멈췄다. 보트는 바위와 바위 사이의 자연적인
수로를 따라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배를 댈 곳이 없겠는데.」
프레드 내러컷은 무심하게 말을 받았다.
「동남풍이 불면 인디언 섬에는 상륙할 수 없습니다. 1주일이 넘도록
교통이 끊어진 때도 있지요.」
베러 크레이슨은 생각했다.
(요리사의 고생이 심하겠군. 섬은 어디나 그래. 집안일을 맡는 것은 고
생이지.)
보트는 바위 사이에 닻을 내렸다. 프레드 내러컷은 보트에서 뛰어내려
롬버드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상륙시켰다. 내러컷은 바위에 박힌 쇠고리
에 보트를 단단히 묶었다. 그런 다음 모두를 안내하여 바위에 새겨진 층
계를 올라갔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꽤 좋은 곳이로군!」
그러나 마음속은 침착치 못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층계를 올라가 저택의 넓은 뜰로 나오자 마음이 놓인듯 숨을
몰아쉬었다. 저택 정면에 단정한 옷차림을 한 하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
었다. 그의 침착한 몸가짐이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더욱이 저택
그 자체가 느낌 좋은 건물이었으며, 저택에 달린 테라스의 전망도 아름다
웠다.
하인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앞으로 나왔다. 키크고 여윈 사나이로 머리
는 희었으며 기품이 있었다.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넓은 홀에 마실 게 준비되어 있었다. 술병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앤터니 머스턴은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여기에 모인 이들이 재
미없는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 함께 말을 나누고 싶은 사
람은 하나도 없었다. 자기를 이런 부류에 불러 넣다니, 배저는 무슨 생각
을 했던 것일까. 그러나 술은 상등품인 것 같다. 그리고 얼음도 충분하다.
뭐라고? 하인 녀석이 뭐라고 말하고 있군. 오윈 씨는 안됐습니다만 내
일이 되어야 오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시가 계셨습니다. 무엇이든 말
씀하십시오. 먼저 방으로 안내하고…… 식사는 8시에…….
베러는 로저스 부인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방은 복도 끝
에 있었으며 문이 열려 있었다. 베러는 바다 쪽으로 난 창문과 동쪽으로
또 하나의 창문이 있는 아늑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로저스 부인이 말했다.
「뭐, 필요한 게 있나요?」
베러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트렁크가 날라져 와 그 안의 물건들이 깨끗
이 정돈되어 있었다. 방 한쪽에 문이 열려 있고, 담청색 타일을 깐 욕실
이 보였다.
그녀는 빠르게 말했다.
「없어요.」
「볼일이 있으면 방울을 흔들어 주세요.」
로저스 부인은 억양없는 단조로운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베러는 호기심을 품고 그녀를 보았다. 어쩌면 이토록 핏기없는 여자일
까. 마치 유령 같다! 머리칼을 뒤로 꽉 움켜 묶고 검은 옷을 입은, 조금도
빈틈없어 보이는 하녀지만, 불안한 듯 눈동자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베러는 생각했다. 이 여자는 자신의 그림자에 겁먹고 있다. 그렇다. 두
려워하고 있다.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힌 것같이 보인다. 베러는 차가움이
등골을 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여자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베러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윈 부인의 새로운 비서예요. 물론 알고 계시겠지요?」
「아니예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여러분의 이름과 방의 할당만 지시
받았을 뿐이지요.」
「오윈 부인이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요?」
로저스 부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나는 아직 마님을 뵙지 못했어요. 우리들도 이틀 전에 왔을 뿐이에
요.」
오윈 부처는 참으로 색다른 사람들인 것 같다고 베러는 생각했다.
「여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요?」
「나와 내 남편뿐이에요.」
베러는 눈썹을 찌푸렸다. 저택에는 여덟 명의 손님이 와 있다. 주인 부
처를 포함하면 열 명이 된다. 그런데 시중드는 사람은 한 쌍의 부부뿐인
것이다.
로저스 부인은 말했다.
「나는 요리를 잘하고, 남편은 저택 일이라면 무엇이나 해요. 이토록
많은 손님이 오시리라는 건 몰랐지만…….」
「손이 모자라지 않을까요?」
「네, 모자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만일 더 많은 손님이 오시면 마님
이 돌봐 주실 거예요.」
「그래야 되겠지요.」
로저스 부인은 돌아서서 나갔다. 그녀는 발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방에서 나갔다.
베러는 창가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마음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모든 일이 이상했다. 오윈 부처의 부재, 얼굴빛 나쁜 유령 같은 로저스
부인, 그리고 손님들! 그렇다, 손님들도 이상스럽게 모여 있다. 한시 빨리
오윈 부처를 만나고 싶다……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일어나 방안을 거닐었다. 완전히 근대적 스타일로 꾸며진 나무
랄 데 없는 침실이었다. 반질반질하게 닦여진 윤나는 쪽마루 바닥에 깔린
새하얀 카펫, 엷은 색이 칠해진 벽, 전등으로 에워싸인 긴 거울.
하얀 대리석 곰 조각이 놓여 있을 뿐인 벽난로. 곰 조각 속에 시계가
들어 있고, 그 위에는 아름답게 빛나는 크롬 액자에 커다란 양피지가 끼
워져 걸려 있었다. 거기에 씌어져 있는 것은 노래 가사였다.
그녀는 난로 앞에 서서 그것을 읽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있는 오래된
자장가였다.
열 인디언 소년이 식사하러 갔다.
한 소년이 목이 메어 아홉 소년이 되었다.
아홉 인디언 소년이 늦게까지 일어나 있었다.
한 소년이 잠들어 여덟 소년이 되었다.
여덟 인디언 소년이 데븐셔를 여행하고 있었다.
한 소년이 그곳에 남아 일곱 소년이 되었다.
일곱 인디언 소년이 장작을 팼다.
한 소년이 제 몸을 두 조각내 여섯 소년이 되었다.
여섯 인디언 소년이 벌집을 건드리며 장난쳤다.
벌이 한 소년을 쏘아 다섯 소년이 되었다.
다섯 인디언 소년이 법률에 열중했다.
한 소년이 대법원에 들어가 네 소년이 되었다.
네 인디언 소년이 바다에 나갔다.
한 소년이 훈제 청어에 먹혀 세 소년이 되었다.
세 인디언 소년이 동물원을 걷고 있었다.
큰 곰이 한 소년을 안아가 두 소년이 되었다.
두 인디언 소년이 양지 쪽에 앉았다.
한 소년이 햇볕에 타서 한 소년이 되었다.
한 인디언 소년이 뒤에 남았다.
그 소년이 목을 매어 아무도 없었다.
베러는 미소지었다. 과연 여기는 인디언 섬이다! 그녀는 다시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어째서 저토록 넓을까! 육지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석양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바다――오늘은 이토록 조용하지――때로는 거칠게 날뛸 때도 있다.
인간을 그 깊은 곳으로 빨아들이는 바다. 빠진 것이다……빠져서 발견된
것이다……바다에 빠진 것이다……빠진 것이다――빠진 것이다――빠진
것이다……아니, 그녀는 기억하고 있지 않다……생각해선 안 된다! 모든
일은 지나간 것이다.
암스트롱 의사는 마침 해가 바다에 잠기려 할 때 인디언 섬으로 왔다.
바다를 건너올 때 그는 배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이 고장 사나이였
다.
의사는 인디언 섬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려 했으나, 프레드
내러컷이라는 그 사나이는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암스트롱 의사는 날씨와 낚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긴 자동차 여행으로 지쳐 있었다. 눈이 아팠다. 서쪽으로 드라이
브하는 것은 해를 바라보며 달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몹시 지쳐 있
었다. 바다와 완전한 평화, 그것이 그에게는 필요했다. 그에게는 오랜 휴
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가능했지만 런
던을 오래 떠나 있을 수 없었다. 요즘은 누구나 곧잘 잊어버리고 만다.
아니, 성공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니 만큼 어떤 일이 있어도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런던에 돌아가지 말기로 하자. 런던
이며 할리 거리며 일과 인연을 끊어 버리기로 하자.
섬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섬이라는 말만 들어도 환상적 분위기가 상상
된다. 세상과의 교섭이 없어지고 섬만의 세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그 섬에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생각했다. 좋다, 인생을 완전
히 잊어버릴 계획을 세워 나갔다. 바위에 새겨진 층계를 올라갈 때에도
그는 아직 미소짓고 있었다.
테라스의 의자에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그 모습을 어
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개구리 같은 얼굴, 자라 같은
목, 굽은 등, 그리고 날카로운 조그만 눈. 어디서 보았을까.
그렇다. 워그레이브 판사다. 옛날 이 판사 앞에서 증언한 일이 있다. 언
제나 반쯤 잠든 것 같지만,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사람이 달라진 듯 날카
로운 말을 뱉아 내는 사람이었다.
배심원에 대해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언제나 배심원의 판결을 자기
마음먹은 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한두 번 배심원들
로부터 뜻밖의 판결을 끌어낸 일이 있었다. <목매다는 판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묘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구나. 이런 뜬세상을 벗어난 곳에서 만나게 되
다니…….
워그레이브 판사는 생각했다. 암스트롱일까. 증인석에서 본 적이 있었
다. 똑똑한 사나이로 증언도 주의깊고 빈틈없었다. 의사란 대개 우둔한
자들이다. 할리 거리의 의사는 더욱 그렇다. 그는 그곳 의사 중 한 사람
과 만난 최근의 회견을 떠올렸다.
그는 암스트롱 의사에게 말을 걸었다.
「홀에 마실 게 준비되어 있소.」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먼저 주인 부처에게 인사하고 와야지요.」
워그레이브 판사는 다시 눈을 감고 파충류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일은 할 수 없소.」
암스트롱 의사는 놀랐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주인도, 부인도 없소. 이상한 일이오. 나는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
겠소.」
암스트롱 의사는 잠시 판사를 바라보았다. 노신사는 정말로 잠들어 버
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워그레이브 판사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콘스턴스 캘민턴이라는 여자를 아오?」
「네――아니, 모릅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오. 나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소. 필적도
거의 읽을 수 없었소. 잘못 온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암스트롱 의사는 머리를 흔들며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콘스턴스 캘민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는
모두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저택 안에 있는 두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입술을 꼭 다물고 있
는 늙은 노처녀와 젊은 아가씨. 아가씨 일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마음이
차가운 아가씨다.
아니, 로저스의 아내를 합하면 세 사람이 된다. 그 여자는 언제나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들 부부는 착실해서 하는 일에 실수가 없
다.
로저스 테라스로 나왔다.
판사는 물었다.
「콘스턴스 캘민턴이라는 부인이 오는지 안 오는지 알고 있나?」
로저스는 판사를 바라보았다.
「아니오, 모릅니다만…….」
판사는 눈을 들었다. 그러나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는 생각했다――인디언 섬인가. <장작더미>속에 검둥이가
하나 있다.
앤터니 머스턴은 욕조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욕
조 속에서 팔다리를 뻗었다. 긴 드라이브를 한 뒤라 손발이 굳어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앤터니는 감각과 행동만으로 살고 있는 인간이었다. 한번 마음에 결정
한 일은 어떻게든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뒤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욕조, 지친 팔다리, 수염을 깎고, 칵테일, 식사, 그
리고 나서――.
블로어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일에 익숙치 못했다. 옷차
림에 이상한 데가 없을까. 그로서는 없다고 보았다.
그를 알아본 이는 하나도 없다. 이상한 일이다. 서로가 상대의 태도를
떠보고 있다. 마치 사정을 알고 있는 것같이. 그렇다, 일을 잊어선 안 된
다.
그는 일을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벽난로 위의 자장가 가사가 든
액자를 바라보았다. 이 액자를 여기에 걸어 놓은 것은 영리한 착상이다…
….
그는 생각했다. 이 섬은 어릴 때 살아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섬
이 이 저택에서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인간
이 미래를 예상할 수 없다는 건 어떤 뜻에서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매커서 장군은 자신이 한 행동을 생각하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게 이상하다! 상상하고 있었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 될 수만 있다
면 무슨 구실을 대고 돌아가고 싶지만……모터 보트는 이미 돌아가 버렸
다. 섬에서 묵을 수밖에 없다.
저 롬버드라는 사나이가 묘한 녀석이다.
정직한 사나이는 아니다. 정직한 생활을 해온 사나이가 아니다.
종소리가 울리자, 필립 롬버드는 방에서 나와 층계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표범같이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몸 전체의 인상에도 어딘지
모르게 표범 같은 데가 있었다. 먹이――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즐겁다.
그는 미소지었다. 1주일 동안 있게 된다.
1주일 동안 충분히 즐기기로 하자.
에밀리 브랜트는 식사하러 가기 위해 검은 비단옷을 입고 성경을 읽고
있었다. 입술이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 움직였다.
「여러 백성은 자신이 만든 함정에 빠져 들고……여호와는 나를……심
판하도다. 악인은 자신의 덫에 걸려 지옥으로 가리라…….」
그녀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녀는 성서를 덮었다.
그녀는 일어나 연수정 브로치를 달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