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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탁 / 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을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늘 열려서 불빛을 흘릴 것이다
지하도에서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고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
해설
육탁[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산에는 절이 있고, 절 안에는 목어가 있다. 커다란 나무 물고기가 산바람을 맞아 흔들리는 모양을 보면 의아할 수밖에 없다. 산에 무슨 물고기인가. 물고기와 부처는 무슨 관계인가. 오래된 물고기 전설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물고기처럼 눈을 감지 말고 정진하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이 목어가 작아지고 둥글게 변하면 우리가 아는 목탁이 된다. 그러니까 스님들이 두드리는 목탁이란 아주 먼 옛날, 먼 바다의 물고기로부터 왔다는 말이다.
이런 사정 때문일까. 목탁을 보면서 물고기를 떠올리는 우리 앞에 배한봉 시인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한 생각을 제시한다. 그는 물고기로부터 목탁이 아닌 ‘육탁’을 건져낸다. 새벽 어판장, 살아 있는 물고기들이 뭍에 나와 펄떡인다. 온몸으로 바닥을 두드리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 꼭 몸으로 치는 목탁 같다. 생의 가장 비참한 순간은 가장 괴로운 순간이고 가장 살고 싶은 순간이다. 그때에는 할 수 없는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물고기가 펄떡거리는 그 새벽을 활기찬 시장이라거나 용솟음치는 생명력이라고 표현하지 못한다. 바닥을 치는 온몸의 두드림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에서 물고기를 보았는데, 물고기만 보지 않았다. 시 안에는 비린내 대신 눈물 냄새, 사람 냄새, 진땀 냄새가 가득하다. ‘육탁’이라는 말을 오늘 처음 들었는데, 그것을 이미 좀 알고 보고 겪은 느낌이 든다. 남의 이야기인 듯하지만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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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하이데거의 피투와 기투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들이다. 현실의 바닥을 온몸으로 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이랄까. 이 시에서 화자는 온몸으로 바닥을 치는 생선만큼이나 고통스럽고 절박한 삶을 사는 아버지이다. 아버지라는 존재보다는 그 아버지가 가지고 올 일용할 양식을 먼저 기다리는 "새끼들 눈빛 같은" 현실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겪어야 할 삶의 비극성을 잘 보여준다.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는 교훈 같은 말보다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는 고백이 더 현실적이고 공감이 가는 이유이다. 그러나 팍팍하고 고달픈 현실이지만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그 눈을) 닫을 수 없는" 이유는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며, 그 눈이 흘리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불빛'이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다. 그 불빛은 고통 속에서 꾹꾹 눌러 담았을 침묵들의 깊이와 숭고함이 배어 있다. 이 허무의 바닥에서 우리들의 삶은, 그래서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강동우 가톨릭관동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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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투(企投)와 피투(彼投)
*피투→기분 불안 → 선택
피투성; 인간에게 공통되게 자의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져있는 존재로서의 특성. 이런 피투성은 기분, 그중에서도 불안을 통해 자각된다.
특히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왜 나는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불안으로부터 자신이 이 세상에 던져졌고 여기에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피투성)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일단 피투성을 자각할 때, 인간은 언젠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며 이 세계를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이라 불렀다. 이런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포착해서 재구성 하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이런 시도는 '기투'라고 불린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세계 속에 자의와 상관없이 던져진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이런 상황을 자각하는 동시에 새로운 자신을 포착해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한다.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던져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피투성을 직면하지만, 역으로 이런 상황 때문에 최초로 존재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의 패러독스에 대해 하이데거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불안과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진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답한 것이다.
삶에 있어서 피투성(被投性)과 기투(企投)에 관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의 확립은 피투성 으로서 이루어진다. 자신의 의지와는 조금의 상관도 없이, 세상에 던져질 뿐. 애초부터 존재에 기투라고는 조금도 없는 상태에서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기투성, 즉 선택만을 요구한다. 인간은 매일매일, 평생을 선택의 기로에서 살아가며, 그 와중에서 자신의 선택, 즉 기투를 실현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가 행운이든 불행이든, 인간이 자신의 선택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즉, 선택의 결과는 다시금 피투성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죽음 역시도 기투가 아닌 피투성이다. 그 누구도 - 자살을 제외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죽음 -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으며, 자신의 선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음은 찾아온다. 즉, 인간의 죽음 역시 태어남과 같이 기투가 아닌 피투성이다.
어쩌면 이렇듯, 태어남과 죽음의 순간은 피투임은 분명하다. 거기에 삶의 결과 역시 피투성이다. 어쩌면 살아감에 있어서 유일한 기투는 피투에 의해 발생된 선택의 기로에 있어서의 선택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런데 그 선택이 과연 기투라고 할 수 있을까?
선택 역시, 어쩌면 운명론과 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출생도 죽음도, 그리고 살아온 삶에 대한 자신의 평가도 어쩌면 피투에 불과한 것이 사실인데, 알량한 선택의 기로에서의 선택만으로 삶이 기투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 어렵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 발리스 듀스 지음, 남도현 옮김 중에서.
첫댓글 육탁의 개념분석
ㅇ 구성요소- 몸, 바닥, 치다
ㅇ 존재의 새로운 발견(관련주의-생의 유비)
-몸+목탁=육탁, 새로운 언어와 세계의 발견
- 물고기의 눈과, 몸으로 바닥을 치다 / 인간의 눈과, 처절한 삶과 뼈아픈 체험
-바닥이라는 상투성에 기발한 육탁이라는 신선한 시어를 덧입혀 삶의 비극성을 극대화. 목탁의 연상으로 종교의 이미지까지 끌고와 숭고한 경지까지 끌어올림
-(이항대립)피투와 기투,물고기와 나, 물고기의 눈, 전등, 아이의 눈, 바닥과 바다
좋은시 읽게 되어 감사합니다
바닥을 바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강도의 세기가 강하고 약함의 차이를 모르고 비로소 눈을 감을때쯤 비로소 제일 아프고 괴로운순간이 정산 되지않았을까요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끝도 없는 바닥을 친 경험이 있어서
공감가네요
없는 육탁이라는 조어를 만들어 낸 시인이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