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남계서원과 남계오현
김윤수(성균관유도회총본부 부회장, 일두기념사업회 이사장, 지리산문학관장)
2023년 5월6일 세계문화유산 남계서원 창건주역 개암 강익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대회가 세계문화유산 함양 남계서원에서 성대히 열리니, 졸고 축시를 지어 송축하다.
恭祝介庵先生誕辰五百周年 공축개암선생탄신오백주년
<世界遺産第一士>
金侖壽(一蠹記念事業會理事長)
心感獨勞排不平 심감독로배불평
坐堂遠望白雲生 좌당원망백운생
灆溪五俊尊賢始 남계오준존현시
天嶺三侯贊業成 천령삼후찬업성
弱冠冥門窮性理 약관명문궁성리
最初院長敎明誠 최초원장교명성
世遺第一士名盛 세유제일사명성
後學整襟呈頌聲 후학정금정송성
개암선생 탄신 500주년 축시 <세계유산제일사>
김윤수(일두기념사업회 이사장)
불평 배격 혼자 수고 마음으로 느끼며
강당에 앉아 흰 구름 생김 멀리 바라보네
남계의 다섯 선비 명현 존숭을 비롯하고
천령의 세 군수는 사업 도와 완성하였네
약관에 남명 문인으로 성리를 궁구하고
최초로 원장 되어 명과 성을 가르쳤네
세계유산 첫째 선비 명성이 성대하니
후학이 옷깃을 여미며 찬송을 바치네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아홉 서원에 한국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과 한국 선비 최초의 서원 남계서원이 나란히 등재되었다. 소수서원은 벼슬아치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서원이다. 그에 비해 남계서원은 선비가 세운 최초의 서원이다.
소수서원은 고려 대유 회헌 안향의 유적을 찾아 강당을 지어 서원을 만든 것으로 당시 벼슬아치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이 주도한 것이다. 한국의 두 번째 서원, 고려 해동공자 최충을 향사하는 해주의 문헌서원도 주세붕이 황해도관찰사로서 세운 것이다. 그에 비해 함양 남계서원은 벼슬아치가 아닌 선비가 세운 서원으론 첫 번째 서원이다. 당시 함양군수는 건립을 지원하였다.
남계서원 창건 이듬해에 창건되어 불과 1년 만에 완공된 영천 임고서원은 고려 대유, 충신, 해동성리학의 비조 포은 정몽주를 향사한다. 서원사 초기 3대 서원은 다 고려 선비를 향사하는 서원이다. 그에 반해 남계서원은 조선성리학의 비조 한훤당과 일두, 동방오현 일두 정여창이라는 거유, 조선 선비를 향사하는 최초의 서원이다. 누가 조선 선비를 향사하는 서원을 세울 생각을 했겠는가. 그것도 벼슬아치가 아닌 선비가, 파천황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남계서원 건립은 함양 선비 5인이 주창하였다. 주도적 역할을 한 선비는 올해 탄신 500주년을 맞이한 개암(介庵) 강익(姜翼,1523~1567)이다. 개암은 재정 부족으로 건립이 지연되는 가운데 온갖 비방과 공갈이 있었으나 불굴의 의지로 10여 년에 걸쳐 노력하여 결국 완성하고 남기어 문묘종사 동방오현의 서원, 흥선대원왕 때도 존속된 서원, 세계유산에까지 등재된, 빛나는 서원의 보람찬 창건 주역이 되었다. 당시 함께 주창한 다섯 선비는 개암과 고향 친구이고 같은 스승 당곡 정희보의 동문들이다. 남계오현이라고 칭하여 존숭하는 바이다.
남계오현(灆溪五賢)
반계(潘溪) 박승원(朴承元)[1516?~1561?] 潘南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1521~1591] 瑞山 / 영빈서원
사암(徙庵) 노관(盧祼)[1522~1574] 豊川
개암(介庵) 강익(姜翼)[1523~1567] 晋州 / 남계서원
남계(灆溪) 임희무(林希茂)[1527~1577] 羅州 / 화산서원
여기의 박승원은 문제가 있다. 같은 창건 동지 친구의 문집에 이름이 오자 나서 실리는 바람에 존재가 말살된 것이다.
<개암집>에 보면 1552년(명종7)에 개암 강익이 박승임, 사암 노관, 매촌 정복현, 남계 임희무랑 서원창건을 논의했다고 하였다. 같은 5현인 임희무의 <남계집>을 보면 개암이 임희무, 박승원, 사암 노관, 매촌 정복현과 서원창건을 논의하였다고 했다. 이들을 남계5현이라고 정의하여 기념한다.
남계서원 초대 원장 개암 밑에서 유사를 지내고 제5대 원장이 된 홍와 노사예의 저작 <남계서원경임안>에서도 개암과 박공승원, 정공복현, 노공관, 임공희무가 군수 서구연과 함께 서원을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박승원(朴承元)과 박승임(朴承任), 두 인명이 존재하는데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개암집>의 박승임은 오자다. <남계집>의 박승원이 맞다. 그는 추정 1516(?)년생으로 1518년생인 옥계 노진의 죽마고우, 동문수학한 사이로 친하였다. 박승원이 40대에 별세했을 때 옥계가 만사도 짓고 제문도 지어 애도를 표하였다. 박승원은 그 셋째 아우 박승남과 동갑인 청련 이후백의 자형이다. 그 아내 연안이씨는 남편 사후 수십 년 동안 고기도 먹지 않고 추모하며 수절한 열녀이다.
박승원은 옥계, 개암, 남계, 매촌, 그리고 구졸암 양희, 청련 이후백이랑 같이 함양의 큰 스승 당곡 정희보의 알려지지 않은 제자였을 것이다. 반남박씨 명현 춘당 박맹지의 차남 박계간의 사위가 당곡이다. 박승원은 춘당의 증손자이고, 당곡의 처조카이다. 동시에 소수서원을 세운 신재 주세붕의 제자이기도 하니 서원정보 소스는 박승원이 개암에게 제공하여 개암의 남계서원 창건 주동에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박승원은 임희무랑 남명 조식의 제자가 되기도 하니 개암과도 남명 동문인 셈이다.
박승원을 비롯한 남계오현은 말로만 서원창건에 공헌한 것이 아니다. 모두 공사비용 양곡과 서원비치용 서책을 기부하여 찬조하였다.
반남박씨 박승원은 <가례육권>과 나락 두 섬, 콩 세 말, 논 9마지기를 기증, 1556년(명종11)에 나락 한 섬, 콩 한 말을 추가 기증하고, 박승원의 들째 아우 박승선은 나락 닷 말, 넷째 막내아우 박승효도 나락 닷 말을 기증하였다. 산청으로 장가간 셋째 아우 박승남은 기부물품이 없다.
서산정씨 정복현은 <이락연원록이권>과 <소학삼권> 및 나락 두 섬, 콩 두 말을 기증, 1556년(명종11)에 나락 한 섬을 추가 기증하고,
풍천노씨 노관은 <이학유편이권> 및 나락 두 섬 여덟 말, 콩 세 말을 기증, 1556년(명종11)에 나락 한 섬을 추가 기증하고,
진주강씨 강익은 <심경일권>과 나락 한 섬, 콩 한 말을 기증, 1556년(명종11)에 나락 한 섬, 콩 한 말을 추가 기증하고,
나주임씨 임희무는 <공자통기이권>과 <주자연보이권> 및 나락 두 섬, 콩 한 말을 기증하고, 1556년(명종11)에 나락 한 섬을 추가 기증하였다. 남계오현이 남계서원의 창건 책임자이고 대표책임자가 개암 강익이다.
박승임은 기부자 명단에도 없다. 박승임으로 저명한 인물에 같은 시기, 같은 반남박씨 소고 박승임이 있는데 그는 영주 출신으로 현풍현감, 진주목사, 창원부사도 지냈지만 함양서원과는 무관하다. 진주목사로서 남계서원에 쌀 한 톨 기부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개암집>의 오자 1자 때문에 소고 박승임으로 오인되어 남계서원 창건의 공로자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필사나 판각에 있어 오자는 있기 마련인데 고치지 않고 틀린 걸 고수할, 바로잡지 않고 고집부려 지킬 필요가 있나. <개암집> 필사자나 각수가 우연히 오자 낸 것을 실존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 오자는 고치면 된다. 박승임이 아니고 박승원이다.
개암선생은 남계서원을 창건하여 세계문화유산을 남겼는데 뒤에 간행한 <개암문집>은 오자를 1자 남기어 한 사람의, 창건공신 1명의 이름, 명예, 일생, 인생을 묻히게 하였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바로잡고 현창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개암 강익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대회에서는 남계서원 창건주역에 대한 현창, 창건공로자에 대한 감사를 표하니 크게 경하할 일이다.
그러나 그 <개암집> 때문에 500년 동안 묻힌 창건 5현의 일인, 함양선비 박승원의 억울함은 어찌할 것인가. 그를 비롯한 5현의 남계서원 창건 공로에 대해 남계오현 공적비든, 공로패든 뭐든 뭉뚱그려 기리는 것이 어떠한가. 함양군수 서구연과 남계오현이 모여 앉아 서원창건을 논의하는 남계서원창건도 상상화를 그려 게시하는 것도 기림의 한 방법이겠다. 책임자의 공로 포상을 외치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