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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전 형성의 주체성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냐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성경 기록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성경이 하나님만이 사용하는 신성한 기호로 기록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의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성경에는 기록될 당시의 역사와 문화라는 시대적 정황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도 당연하다. 복음서나 바울서신 등에는 각 저자의 개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받아들인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의 핵심은 성경의 내용과 의미,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의 경전(cannon) 형성의 주체도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주체이고 각 저자들은 도구의 역할만 했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성경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주장은, 성경의 각 권은 저자나 저자가 속한 공동체에 의해 쓰였거나 수집되었고, 이 자료들이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따르면 성경을 기록한 주체는‘인간’이 되고, 경전으로서의 권위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교회’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를 가진다.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결국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의 여부는 성경의 기록과 경전 형성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성경의 기록에서 누가 주체인지의 문제는 복잡한 신학적 내용이 수반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성경을 경전으로 용인하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만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신약의 경전화 과정에 관해서이다.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많은 논쟁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논의를 매우 단순화해서 볼 것이고, 세부적인 부분까지는 다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두 가지 견해를 차례로 살펴보자.
먼저, 성경이 역사적 과정을 거쳐 교회에 의해 수집되고 경전으로 인정되었다는 주장의 요지를 보자. 기독교 공동체가 처음 형성되었을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성경이 없었다. 각 공동체는 구약과 복음서나 서신의 일부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교회 공동체가 사용할 자료를 수집할 필요가 생겼다. 이 자료들이 모여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신약성경이 된다. 자료를 기록해야 할 필요성은 대체로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예수님에 대한 첫 증인들이 줄어들고 있었다.
둘째,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었다.
셋째, 이단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넷째, 선교로 인해 교회가 확장됨으로 문서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대체로 이상의 네 가지 정도를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자료를 기록하게 된 동기로 본다.
그러면 이제 신약성경이 어떤 기준으로 수집되었는지를 보자.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성경을 수집했다고 본다. 수집의 기준도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사도가 직접 저술한 자료인가?
둘째, 사도에 의해 직접 기록된 것이 아닐지라도 사도적인 전승에 속하는 자료인가?
셋째, 당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높게 평가받은 자료인가?
넷째, 기독교 공동체에서 인정한 기존의 자료와 유사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자료인가?
기독교 공동체가 이런 기준에 따라 수집한 문서를 교회 공동체에서 사용하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서 이 자료들이 경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공식적으로는 397년 제3차 카르타고 회의에서 신약 27권을 채택하였다. 그 후 몇 차례의 교회 회의에서 27권을 재차 확인함으로 신약 정경의 범위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 주장의 근저에는 각 문서에 대한 수집과 평가, 그리고 경전으로서의 인정은 교회가 결정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현재 이 견해는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다. 이 주장 위에서 신약 자료에 대한 다양한 자료설과 역사비평학이 발전하였다. 신학대학의 수준에서 경전의 형성과정을 가르칠 때도 대체로 이 견해를 소개한다.
이 견해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무엇보다 교회가 경전에 대해 여러 차례 회의를 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 주장을 그대로 따르면, 교회가 필요에 따라 경전을 수집하고 그 범위를 결정한 것이 된다. 결국 성경을 수집하고 경전으로 결정한 주체는 성령이 아니라 인간 혹은 교회가 되는 셈이다.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성경의 경전으로서의 절대성은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가 결정을 했다는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정경의 범위에 대해서는 카르타고 회의 이후에도 여러 번 논의된 적이 있다. 심지어 종교개혁자 루터도 정경의 숫자를 변경하려고 하였다. 이런 점을 들어서 교회가 신약 정경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교회가 자료를 수집했다는 견해는 성경의 형성에 관해 좋은 통찰을 준다. 하지만 이 견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 견해가 가지는 약점 중 하나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정한 기준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직은 하나의 가설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성경의 경전성에 대한 다른 견해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견해를 소개하는 이유는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보는 관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의 학설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은 과거 문서들에 대해 보다 많은 이해를 제공해 준다. 이로써 성경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과 시각이 생겼다. 특히 이 분야의 전문 연구가들 사이에서 4세기경 교회가 경전을 결정하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상당한 반문이 일어났다. 정경은 교회를 대표하는 몇몇이 원탁회의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교회 대표들이 수집된 여러 자료를 두고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장면을 상상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 이유를 살펴보자. 여기서는 경전 확정 과정에서 가장 논쟁점이 된 네 개의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바울서신은 저자가 분명하기 때문에 경전성에 대한 논의가 덜 치열하였다. 지금의 신약성경은 약 85~120년경에 이미 모두 완료되었다. 교회 공동체도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서 로마 전역, 근동 지역, 이집트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넓게 흩어진 각 교회 공동체들은 각자 성경을 채택해 쓰고 있었다. 최근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사용한 성경의 범위에 대해서 많이 밝혀졌는데 이 견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첫째, 초기 변증가들과 고대 교부들은 목숨을 걸고 각자 교회를 위해 논쟁했고 복음서와 서신을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이단들과의 논쟁에서 복음서와 서신을 인용하며 사용했다. 특히 에비온주의나 영지주의와 같은 초기 이단들과의 논쟁 때에 인용한 글들이 발굴됨으로써 어떤 복음서와 서신을 ‘성경’으로 사용했는지 알게 되었다.
둘째, 기독교의 가장 초기의 주요 교부들의 저술을 보면 어떤 성경을 사용했는지 그 특징이 나타난다. 처음 사도적 저술로 분류된 것은 5개였지만, 그 후 3개의 저술을 첨가하여 8개를 기독교의 중요한 초기 자료로 본다. 이 저술들에 성경 인용이 나온다. 이 저술과 유사한 시기에 활동한 교부들에게서 성경의 권수에 대한 구체적 언급도 발견되었다. 주로 1세기 말에서 2세기 중반에 활동한 로마의 주교 클레멘트(Clement), 안디옥의 주교 이그나티우스(Ignatius),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등이 그들이다. 그들이 쓴 서신이나 기록을 보면 그들이 사용한 신약의 권수들이 나타난다.
셋째, 최근에는 1~2세기경 각 지역의 교회나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복음서나 서신을 성경으로 사용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3세기 즈음에는 상당한 교회와 지역에서 사용한 여러 종류의 복음서들과 서신들이 드러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교부들의 글, 초기 8개의 중요 저술, 그리고 다양한 지역의 초기 공동체에서 사용된 복음서와 서신의 종류가 놀랄 만큼 유사성을 보였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한 ‘복음서’는 6~7세기까지 알려진 것만도 대략 30개가 된다. 교부들과 기독교 공동체는 이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골라서 사용했다. 그런데 그들이 사용한 복음서를 보면 오늘 우리가 정경이라고 믿는 네 개의 복음서가 아주 높은 비중으로 사용되었다. 복음서뿐만 아니라 신약의 다른 부분도 높은 일치도를 보이고 있다.
당시는 지금처럼 교통이 원활하지 못했고, 정보의 교환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던 시대였다. 초기 기독교는 박해의 시대였음에도 아주 넓은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초기 교회와 교부들은 팔레스타인 지역, 로마, 소아시아 지역, 아랍과 이집트, 북아프리카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당수의 교부와 공동체는 자신이 속한 지역 외에는 상호 교류가 아주 미약했다. 따라서 각 교부와 공동체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지역적인 연합이나 의논 없이 독립적으로 자료를 결정하였다. 또한 당시 성경 필사본은 가격이 비쌌고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러기에 각 공동체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자료를 신중하게 선택하였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받고 처음으로 전체 회의를 연 것은 4세기인 325년 니케아(Nicaea) 회의였다. 반면 교부들, 초기 주요 저술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각기 신약성경의 종류를 정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2세기 사이였고 늦어도 3세기에는 거의 결정이 되었다. 그러므로 1~2세기에 기독교를 대표할 수 있는 전체 회의를 열어서 신약성경을 모으기 위한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공식적으로 자료를 모았을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성경의 종류를 택하기 위한 회의가 있었다면, 그것은 각 지역별로 행해진 회의였을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4세기에 교회 대표들이 모인 회의에서 정경을 결정했다는 주장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일축한다. 즉 성경의 정경화는 몇 세기에 걸쳐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카르타고에서 교회 대표들이 한 것은 이미 여러 곳에서 사용되던 신약성경의 숫자를 확인하고 공식화하는 회의였다는 것이다.
다양한 교부들이 있었고 기독교 공동체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 각 권에 대한 종류와 범위를 선택할 때 서로 간에 어떻게 그런 높은 일치도를 보일 수 있었을까? 복음서만 해도 수십 종류가 있었다. 그럼에도 여러 지역의 교회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사용한 복음서의 종류는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네 복음서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초기 공동체의 다수는 네 개의 복음서를 지칭하면서 동사나 대명사로 표기할 때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했다. 이 네 개의 복음서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스탠턴 같은 학자는 초기 공동체에게 복음서는 네 개가 아니라 네 겹으로 엮인 하나의 복음서를 의미했다고 말한다.
교류가 없던 여러 지역의 교부와 공동체가 사용한 신약의 각 권에 대한 종류와 범위가 어떻게 놀라운 일치를 보이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단히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확률로 설명하기에는 가능성이 너무나 낮다. 이런 점에서 경전은 누군가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고 ‘경전은 스스로 결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이 스스로 경전성을 결정했다는 말은 성경의 경전화는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비록 각 교부들과 여러 공동체가 성경의 종류를 결정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이 모든 과정을 인도하고 결정한 주체는 결국 인간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뜻이다.
이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성경 수집의 네 가지 기준에 대해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네 가지 기준에 의해 성경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사용되던 성경의 종류를 보니 이런 네 가지 특징이 있다고 보면 된다. 즉 네 가지 기준은 신약성경을 모으기 위한 기준이 아니라 이미 사용되던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공통점인 것이다. 교부들과 초기 교회가 사용하던 성경을 보니 사도적 저작, 사도적 전승 등의 특징이 나타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제 신약성경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분명히 드러났다. 하나는, 경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교회가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하고, 4세기에 교회 회의에서 정경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교회가 된다. 이 견해는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간주하는 관점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하나는, 교부들과 다양한 공동체에서 각자 일정한 자료를 성경으로 사용했으며 4세기에 교회는 이미 사용되고 있던 자료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받아들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기에 매우 유리한 관점을 확보할 수 있다. 이 견해에서 성경의 경전화의 주제는 성령이 된다. 우리는 성경의 내용과 경전화의 주체는 성령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학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두 가지 입장은 모두 더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두 입장 모두 학설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더 발전시켜야 할 부분도 있다. 현재는 신학계 내부에 성경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주장이 상당히 팽배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보는 입장은 여전히 하나의 가설이다. 좀 더 진전된 연구과 발굴이 진행되면 경전 형성에 대해 좀 더 명확한 결과를 보여줄 것이다. 교회가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수집했다는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게 될지, 혹은 정경의 형성과정이 더욱 신비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서 성령님을 향하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4. 인식의 주체성
이제 ‘해석학’의 발전과 적용이 성경의 절대성에 대해 어떤 어려움을 야기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해석학은 주어진 자료에 대한 해석의 방법을 가리키는 학문적 용어이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신학뿐 아니라 철학, 역사, 문학과 같이 여러 분야에서 해석학을 다룬다. 해석학에 대한 세부적인 이론은 어렵고 까다로운 편이다. 하지만 해석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해석의 기술’, 혹은 ‘해석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이후 발전되어 사용된 다양한 해석학에서 해석의 주체는 ‘인간’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로 들릴 것이다. 해석학은 고대 문헌, 철학적 개념과 기호, 시와 소설, 역사적 자료를 해석하는 기술이다. 역사적 자료, 문헌, 시와 기호 등을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텍스트를 연구한다. 인간이 텍스트를 읽고 인식한다. 여기서 텍스트를 읽고 인식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내’가 텍스트라는 자료를 읽는다. ‘내’가 자료를 이해한다. 내가 주어(subject)이다. 그렇다면 이해의 ‘대상’(object)은 무엇인가? 당연히 ‘자료’이다. 자료라는 텍스트는 인간의 이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료는 ‘목적어’(object)가 된다. 결국 인간은 인식하는 주체이고, 텍스트는 인간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 해석학에는 다양한 해석의 방법이 있지만, 인간이 인식의 주체이고 텍스트가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기본 구조이다.
이러한 일반 해석학의 방법을 성경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19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이 출현한 이후로 일반 학문에 사용하는 해석의 방법을 성경 해석에도 거의 적용하였다. ‘나’는 여전히 읽고, 해석하고, 인식하는 ‘주체’이다. 성경은 나에게 이해되는 하나의 ‘대상’이 되고 ‘객체’가 된다. 즉 인간이 인식의 주체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해석 방법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성경의 뜻이 달라진다. 성경은 인간의 처분을 바랄 수밖에 없는 실정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성경은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자신의 위치를 잃게 된다.
그러면 일반 해석학의 방법을 성경에 적용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가? 혹은 이런 해석의 방법은 매우 진보적인 신학 노선을 따르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인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성경을 인식하는 구조가 은연중에 교회 안에 넓게 퍼져 있다.
목사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설교를 준비한다. 적절한 예화를 사용하고, 교인들의 수준에 맞춰 설교한다. 설교의 주체는 목사이다.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는 대상이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여기서 주체는 인간이다. 성경의 말씀은 인간이 이해하는 대상이 된다. 이는 비단 목사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작은 공동체에서 말씀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이 된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착각에 빠진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때로는 평가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설교를 해도 자기가 잘한 줄 알고 교만해진다. 선포의 주체가 인간이 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잃는다.
설교를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교인들은 선포된 말씀을 인식하는 주체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인들에게 들려지고, 이해되고, 평가받는 ‘대상’이 된다. 교인들은 편안하게 앉아서 말씀을 듣고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비판한다. 교인은 듣는 주체이고, 말씀은 인식되는 대상이고 객체이다. 교인들은 말씀을 듣고 감동이 되면 설교가 끝난 후 목사에게 가서 훌륭한 설교를 들었다며 감사의 인사를 하기도 한다. 지금 교인들의 설교 듣는 ‘태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가 선포되고 인식되는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크게 영향을 미친 이후, 인간이 주체가 되는 성경 해석학이 팽배해졌다. 이런 해석학이 신학계와 교회에 별 비판 없이 확산되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인간이 주체가 되는 구조 안에서 성경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하고, 교인들은 동일한 구조 안에서 설교를 듣는다. 이런 설교의 행위와 설교를 듣는 행위가 만연하면서 인간이 성경을 이해하는 주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 인간이 해석하고 그 의미를 결정하는 대상이 되었고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성경을 다른 일반 텍스트와 동일한 기준에 따라 해석해도 되는지에 대한 반성이 나타났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해석되고 선포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해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문제의 초점은 ‘어떤 해석의 방법’을 택할 것인지에 있다. 성경에 가장 잘 맞는 해석의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해석의 대상에 따라 해석의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핵심 사안은 ‘해석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인식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사람들은 인간이 주체가 되는 기존의 성경 해석 방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체가 되는 해석학이 나타났다. 여기에는 신학자 바르트(K. Barth)의 공헌이 컸다. 바르트는 성경의 성격을 명확하게 밝혔다. 성경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말씀을 적당히 인식하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음미하고, 윤리적 조항을 찾는 책이 아니다. 인간이 성경을 자기 경건을 위한 것으로 여기는 자세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성경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을 기록해 둔 책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성경에서 주체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천지를 창조했고,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며, 어떻게 그의 피조물을 구원하시는지를 밝히는 책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해 둔 책이다. 바르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인간은 단지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말씀이 주체가 되어 들려올 때, 인간은 말씀 앞에서 그의 죄성이 노출되고 ‘위기’를 느낀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이 말씀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인간을 은혜로 구원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신학을 제시하였다. 바르트에 의해 격발된 ‘말씀의 신학’은 20세기 초에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고 신정통주의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인간이 성경을 읽고, 선포하고, 인식하는 모양을 가진다. 하지만 인간이 주체로 있는 동안에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말일 뿐이다. 누가 인간을 구원하는가? 구원의 주체는 누구인가?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며, 그의 말씀이다. 인간은 구원의 대상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통해 선포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주체가 되어 그 말씀을 듣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선포되는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가 주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인간은 자신이 말씀을 듣는 것 같지만,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가 현존하면서 그가 주체로서 우리를 구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결코, 단 한 순간도 인간 사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 말씀을 가지고 와서 자기 앞에 둘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이 말씀 앞에 서야 한다. 말씀이 주체이다. 말씀이 구원의 능력이다.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 속에서 주체로 다가오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구원의 주체는 오직 그리스도일 뿐이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책상에 앉아 성경을 읽을 때 내가 주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계시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의 능력 때문이 아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읽히고 우리에게 구원의 말씀이 되는 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말씀이 가지는 능력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러기에 말씀이 우리에게 인식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은혜의 사건이다.
이 주제가 워낙 중요하므로 조금 다르게 표현해 보자. 인간이 설교를 하기 때문에 설교에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즉 ‘말씀’은 선포되는 대상처럼 보인다. 우리는 설교자가 던지는 말씀을 듣는다. 설교자가 선포의 주체이고, 말씀은 객체이다. 듣는 우리는 인식의 주체이고, 말씀은 객체이다. 하지만 이 구조에서는 아직 말씀은 말씀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일 뿐이다. 말씀이 주체가 될 때만 말씀이 살아서 임재한다. 바른 설교에서는 말씀이 주체가 되어 현재적으로 임한다.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살아난다. 그가 주체가 된다. 내가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인식하게 해준다. 말씀이 주체가 되어 인식되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인간이 말씀을 인식하지 못한다. 결국 선포의 주체, 인식의 주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말씀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신학자는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의 ‘대상’이 되어 얼마의 개념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학자들의 지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목사들도 말씀 앞에서 두려워해야 한다. 목사의 선포에서 놀라운 감동이 일어난다면, 이는 선포자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말씀의 능력이다. 목사든 전도사든 모든 선포자들은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설교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험해진다. 내가 말씀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말씀을 선포하지만, 말씀이 주체이며, 선포하는 나도 그 말씀 앞에 세워진다. 말씀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역사는 말씀이 가지는 능력 때문이다. 그러기에 때로는 아무런 해석 없이 성경만 읽어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해석에 의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선포자는 말씀이 가지는 주체성에 대해 참여하고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일반 신자들도 항상 주의해야 한다. 자신이 명석해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똑똑해서 설교를 듣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읽을 때 지혜를 허락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말씀을 듣고 구원에 이르렀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체이며 결코 인간의 지성이나 감성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고 역사적 산물로 보게 하는 두 가지 큰 흐름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나는 성경이 역사적 과정을 거쳐 교회에 의해 경전화가 일어났다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성경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구조에 대해서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흐름에 대해 각각 다른 관점의 학설과 이론을 대조해 보았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에 대한 학술적인 논의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권위와 경전성에 대한 도전 앞에서 당황해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다룬 논의를 통해 결코 성경의 경전성이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는 경각심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시대를 넘어 구원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21세기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공허와 위기의 시대에 우리 모두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를 소망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