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눈사람
반 인 자
“종이야, 오늘은 오월의 푸른 바다를 보러 광덕산으로 가자.”
아빠는 잠바를 걸치며 다정스러운 목소리다. 그런데 종이는 모자만 깊숙이 눌러쓰고 문을 발로 툭 차며 나왔다. 밀가루나 반죽하며 머리가 하얀 아빠와 같이 등산 가는 게 싫었다. 혹시, 친구라도 보면 거지 할아버지라고 빈정거릴 게 뻔하다.
우리 집 칼국수 가게는 그달 마지막 일요일에 한 번 쉰다. 그럴 때면 산에 오르곤 한다. 김밥을 싸고 엄마도 다녔는데, 오늘은 아빠와 둘이다.
광덕산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산에 오르는 일은 늘 소풍처럼 즐거웠다. 그런데 3학년에 올라와서는 학교 가는 것조차 싫다.
“종이 아빠는 머리가 하얀, 꼭 거지 할아버지 같아. 히히히.”
“맞아, 정말 그래!”
친구들이 체육 시간에 피구 하러 복도로 막 뛰어가고 있었다. 종이는 운동화 끈 고쳐 매느라 얼쩡거리다 늦게 교실을 나오고 말았다. 앞서 뛰어가던 친구들이 재잘거리는 소릴 얼핏 들었다. 대번에 어깨 힘이 쭉 빠졌다.
‘아빠도 멋진 양복 입고 회사 다녔으면…….’
그날 이후, 종이 머릿속은 이런 생각만이 꽉 차 있었다.
‘공부 잘하면 뭘 해. 풀풀 날리는 밀가루나 만지는걸.’
종이는 입이 댓 발이나 나오고 자꾸 심통만 스멀스멀 났다.
“엄마한테 꾸중 들었니?”
아빠가 큰길을 돌아 나무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떼며 물었다.
“아뇨.”
종이는 퉁명스레 대답하고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빠와 같이 다니기 싫어.’
이런 말이 불쑥 나오려 했지만, 꾹 눌렀다.
바삭바삭 낙엽 밟히는 소리도 노래로 즐거웠는데 오늘은 짜증스럽다.
“산에 들어서면 부모님 품 안에 안기는 기분이야. 그러기에 사람들은 등산을 좋아 하나 봐. 산봉우리에 저마다 열심히 오르지. 사람도 꿈의 봉우리가 있잖아. 오르다 보면 힘은 들지만, 보람도 기쁨도 있어.”
알 듯 모를 듯, 이런 말을 하는 아빠.
숨이 차게 걷다 보면, 어느새 산 정상인 맨 꼭대기에 오른다.
“와, 좋다. 야 호, 야호!”
종이는 두 손 모아 입에 대고 목청껏 외쳤다.
“그렇게 크게 소리쳐? 숲속의 다람쥐나 산 까치가 깜짝 놀라겠네!”
아빠는 눈을 찡긋하며 손사래를 친다.
“아빤 오늘따라 별나네요! 야호, 정도는 하잖아요?”
종이는 짜증이 찐빵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다.
“우리 집에 온 손님이 마구 시끄럽게 하면 좋겠어? 산새나 너구리의 동식물이 사는 숲에, 우리는 손님이야!”
“산에서 떠들면 산 주인들이 싫어해요?”
“그럼. 숲에 맑은 공기 마시고 잠시 쉬러 왔으니 조용히 해 줘야지.”
“산에서 장구나 꽹과리도 치며 소란을 피우는 사람도 많던데…….”
“우리가 자연을 아껴줘야지. 소란을 피우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마구 파헤치는 사람은 지구의 깡패야. 아빠가 잠시 몸담고 살다, 그다음 종이에 고스란히 물려줘야지. 은행의 원금은 놔두고 이자만 쓰다가.”
아빠는 눈짓, 손짓 섞으며 어려운 말이다. 종이도 자연에 상처 주면 내 몸에 상처를 입히는 거와 똑같다고, 지난 사회 시간에 배워 조금은 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휙 지나간다. 집에서 나올 때 구겨진 마음은, 시원한 자연 바람에 모두 날려 버리고 싶다.
“마음이 언짢을 때, 시를 낭송하면 편안해지잖아. 시를 좋아하면, 가슴에 늘 꽃을 달고 사는 멋진 사람이라고 했지!”
아빠는 이렇게 말하며 숲속 친구를 위해 시를 낭랑히 들려준다.
나뭇가지에 앉은 청설모나 직박구리도 귀를 쫑긋하며 듣는다. 나무나 바위, 풀도, 꽃도 저마다 마음이 있다는 아빠.
산길을 가다 나무에 오르는 다람쥐를 본다. 아빠가 무어라 무어라 하면 다람쥐가 멈춰 눈을 맞춘다. 한참 동안 꼬리를 살랑거리며 듣는다.
훗날 산골에 가서, 아침을 깨우는 닭이랑, 우유가 나오는 염소를 키우며 작은 동물 농장을 하고 싶단다. 닭의 시를 짓고, 염소의 시를 멋지게 지어 낭송해 줄 아빠다.
종이가 어릴 때다. 자려고 불을 끄면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 시나 동시를 낭송해 주었다. 자장가처럼 듣다 잠이 들곤 했다. 아빠는 가게 하얀 벽 액자에 시를 적어 놓았다. 수시로 바꿔 적어 놓는다.
종이도 학교에서 지은 동시를 빼틀빼틀 써서 가게 벽에 붙였다. 부모님을 따라온 아이가 눈을 받고 읽다가 씩 웃는 걸 보았다.
종이도 산 정상에서 제가 지은 “마주 보고”를 낭송해 본다.
눈과 눈 /마주 보고 쌩긋, 손과 손 /마주 보고 짝짝
쌩긋 속에 /정이 들고, 짝짝 속에 /힘이 솟고.
종이는 평소에도 이 동시를 자주 낭송한다. 그러면 뒤죽박죽 헝클어진 마음이 차분히 가지런해지는 걸 느낀다.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소나무들이 병사처럼 일 열로 서 있다. 그 병사들 앞에서 호령하는 씩씩한 장군도 되어본다. 산꼭대기에서는 생각도 몸도 키가 큰 아이가 되어 으쓱해진다.
종이와 아빠는 울퉁불퉁한 바위에 철퍼덕 앉았다.
“따라서 오느라 힘들었지?”
아빠는 종이 목덜미에 흐르는 구슬땀을 수건으로 닦아 준다.
“힘은 들지만 우람한 나무랑 바다도 보고, 생각도 쑥쑥 알통도 쑥쑥 키우잖아요.”
종이는 주먹을 불끈 쥐고 팔 근육의 알통을 탁탁 세게 두드린다.
“어른 같은 말을 할 줄 아네?”
아빠가 눈을 부리부리 뜨며 하는 말.
“형이나 동생도 없는 외톨이잖아요. 빨리 어른 되어, 아빠가 칼국수 장사 안 하게 해드려야지.”
종이는 메기처럼 입을 불쑥 내밀며 하는 말.
“아빠가 칼국수 장사하는 게 싫어?”
“석이 아빠처럼 승용차 타고 회사 다니는 것도 좋아. 엄마, 아빠는 공부도 잘해서 좋은 대학도 나왔잖아?”
종이가 아빠 눈 빤히 들여다보며 퉁명스러운 말.
“이젠 무슨 말을 해도 되겠네. 3 학년이 되더니 몸도 마음도 부쩍 컸구나!”
아빠는 숨 깊게 내쉬며, 두둥실 떠 있는 하얀 구름에 눈을 멈춘다.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본다.
“대학 졸업하기 전에 외교관이 되려고 공부했지. 열심히 했지만, 마음같이 안되었어. 자꾸 떨어지다 보니 민망해서 신문사 시험을 보았지. 정직을 보도하는 기자가 되겠다고. 기삿거리를 쓰며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어느 날. 신문사가 갑자기 문을 철컥 닫아버렸어.”
“왜요?”
종이 눈이 구슬처럼 똥그래진다.
“정부는 신문사가 잘못을 자꾸 들추어내는 걸 싫어해. 그때는 우리나라가 군사 시절이라 강제로 문을 닫게 한 거야. 민주주의로 성장하게 된 지금은 절대 그럴 수 없지만.”
아빠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진다.
“다시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어. 회사마다 살림이 어려워 사람을 아예 뽑질 않았거든. 하늘을 주먹으로 힘껏 치고 싶을 정도로 막막했지. 엄마가 다니던 출판사도, 경영을 버티다가 결국 문을 닫고 말았어. 작가가 되겠다던 엄마의 꿈도 접고 말았지.”
아빠가 고개를 살살 저으며 시무룩해진다.
“그럼, 쌀이랑 달걀은 어떻게 샀어요?”
“그때, 우리 집 건너에 칼국수 가게가 있었어. 점심시간에만 음식 솜씨 좋은 엄마가 거들어 주었지. 아빠는 어린 너랑 재미있게 놀고.”
아빠는 웃음 띠며 말하지만, 종이는 그만 가슴이 싸하고 서글퍼진다.
“주인이 뉴질랜드에 이민 간다기에 우리가 맡았어. 마침 적금 든 게 있었거든. 그래도 돈이 턱없이 모자랐어. 까다롭다는 은행에서 사정 이야길 했더니 친절하게 빌려줬지.”
아빠는 어제 일 꺼내듯, 담담하게 지난 일을 펼친다.
“아빠가 밀가루 반죽을 했지. 처음에는 쑥스럽고 창피했어. 그렇지만 무조건 열심히 했지. 차츰 익숙해지더니 손님이 점차 많았어. 그래서 힘든 줄도 모르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밤에는 잠이 꿀맛이었단다.”
아빠가 빙그레 웃는 걸 보니, 종이 아픈 마음도 지긋이 가라앉는다.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일이 좋아지나 봐!”
“하기 싫은 일도 열심히 하면 좋아져요?”
“싫어도 꾸준히 하면, 그 일이 좋아지는 걸 느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즐겁게 할수록 좋겠지.”
“싫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능률도 오른다고 선생님도 그랬어요.”
“그-럼. 들어오는 입구 유리문이 바로 주방이잖아.”
“깔끔하고 먹음직스러운 반찬들이, 유리그릇 뚜껑에 덥혀 환히 볼 수 있는 거요?”
종이는 생글거리며 눈을 반짝인다.
“맞아. 국수 뽑는 것도 밖에서 볼 수 있게, 아빠가 직접 시설을 했어.”
얼굴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반죽하는 아빠 모습이 확 떠오른다.
“아빠, 이런 생각도 했어요. 겨울에 눈이 펑펑 내릴 때, 우리 집 지붕 위에 눈 대신 밀가루를 펑펑 뿌려 준다면…….”
“그래?”
아빠의 동그란 눈을 보자 종이는 머쓱해진다.
“아빠도 어릴 때야. 마당에 소복이 쌓이는 눈이 온통 쌀이었으면 했잖아. 아빠하고 똑같네?”
종이와 아빠는 손바닥을 짝짝 마주치며 흰 구름처럼 하얗게 웃었다.
“은행 돈도 다 갚고, 다시 적금이 모아져 이제는 할머니 모시려고 해.”
“와-아! 할머니 계시면 참 좋겠어.”
“그런 다음, 가게를 넓히는 거야. 점심때는 빈자리가 없어 손님들이 한참씩 기다리잖아. 그래서 늘 고맙고 미안하기도 해.”
“우리 가게는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려!”
종이는 주먹을 꼭 쥐고, 두 엄지손가락을 쫙 펴서 까닥까닥.
“엄마, 아빠가 정성껏 하니까 잘 돼. 의과대학을 잘 다니다 관두고 드럼 치는 친구도 있어. 회사의 간부로 지내다 음식점 하는 친구도 있고. 아빠도 이쪽에 재능이 있나 봐. 넥타이 매고 회사에 출근하는 것도 좋지. 그렇지만 지금은 엄마, 아빠가 주인이고 대장인걸. 하하 하하.”
아빠 얼굴에 앵두꽃처럼 웃음이 망울망울 피어오른다.
“깊은 절간 풍경처럼 맑은 종소리 울리라고 “종”이란 이름을 지었지. 그런데 오늘은 커다란 기쁨 세상이 열렸네. 아들이 이렇게 자라서, 아빠 고생한다고 여기는 마음씨가 눈물 나게 고마워!”
아빠 얼굴에 웃음이 번지지만, 눈가에 촉촉한 물기가 고인다.
“아빠, 힘들지?”
“아냐! 고생도 아니고 부끄럽지도 않아. 아빠 손에 만들어지는 음식을 손님들이 맛있다고 찾아 주어, 즐겁고 보람도 느끼는걸! 자기 스스로는 엄하고 친구 허물은 감싸주는 듬직한 아들로 자라주렴.”
외국 같은 경우 빵이나 가락국수, 구두 가게를 백 년, 이 백 년 자랑스레 여기며 이어간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훌륭한 사람 중에는 어릴 때, 가난한 사람이 많아. 배고픈 설움을 겪었기에 남들 보다 두 배, 세 배 노력을 더 했지. 아빠도 어릴 때, 잔칫집에 가면 물도 먹고 오지 말라는 엄마 말이 귓전에 쟁쟁거렸어. 맛있는 음식을 보면 철없는 내가 헐떡거리며 마구 먹으려 하는 걸 꾹 참게 하셨던 거야.”
아빠 말에 종이는 가슴이 찡하다. 그래서인지, 아빠가 시를 쓰던 멋진 붓글씨로, 유리 벽에 광고처럼 크게 붙여 놓은 글귀가 눈에 확 들어왔다.
“시장하신 분은 음식값이 없어도 잡수고 가세요.”
배고픈 사람에게 언제라도 끼니를 대접할 수 있는 우리 아빠.
“가게 앞을 지나기가 싫었어요. 밀가루가 날려 까만 눈썹부터 온통 머리가 하얀 눈사람 된 것도 창피했어. 승용차 타고 다니는 친구 아빠를 부러워했거든. 이젠 우리 아빠가 최고로 좋아!”
종이는 아빠에게 와락 안겨 목을 꼭 껴안는다. 종이 가슴에도 아빠 가슴에도, 벌렁벌렁 가쁜 숨소리가 났다. 밀가루 반죽하는 아빠의 커다란 손이, 종이 작은 등을 오랫동안 토닥토닥.
“아빠 몸에서 나는 밀가루 냄새가 고소해!”
“그 녀석!”
아빠는 종이량 볼을 잡고 가볍게 흔든다.
“기쁜 소식 하나 알려 줄까?”
“그런 거 없어도 돼!”
종이는 몸을 살래살래 흔든다.
“여름 방학쯤이면 동생이 태어나!”
“와! 그래서 엄마가 오늘 못 따라 왔구나. 엄마 뱃속에 귀여운 내 동생이 자라고 있어……!”
종이는 벌떡 일어났다. 종이가 높다란 하늘 향해 크게 소리친다.
“나무야, 구름아, 하늘아 고마워. 동생아, 건강하게 자라 빨리 나와!”
“엄마한테 고마워해야지.”
“물론이지요!”
절벽 아래서, 장끼와 까투리가 푸드덕 날개 활짝 펴며 높이 높이 날아간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