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목 작사한 한명희 씨의 6.25 회고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보훈의 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름다운 가곡 이 있다. 바로 GP 소대장을 지낸 한명 희 선생이 작사한 ‘비목’이다. 그만큼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오는 노래 이다. 가사가 슬프지만 정답고, 멜로 디 또한 좋지만 내용을 좀 더 음미하 면서 부르다 보면 감정이 복받쳐서 그만 눈물을 흘리게 된다. 지난 6월 셋째 주말 한 선생이 거주 하고 있는 서울 근교 남양주 자택으 로 찾아가 인터뷰를 통해 ‘비목’의 탄 생에 얽힌 사연과 정전협정 후 10년 차부터 최전방에서 소대장으로 복무 한 경험담을 들었다.
“ROTC 2기로 백암산 전방 GP 소대 장으로 2년간 근무하셨다고 들었습 니다.” “그렇습니다. 그 지역은 ‘금성전투’ 라고 해서 휴전 무렵인 7월 15일 경부 터 한 보름간 전투가 아주 치열했던 격전지였습니다. 당시 쌍방 희생자가 45만 명이나 달한다고 했으니까요. 그 곳은 철의 삼각지라고 하는데 동쪽 끝자락에 백암산이 있습니다.” “비목은 한 선생이 작사하고 장일 남 선생이 작곡하신 것으로 알고 있 는데요. 이 노래를 듣다보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이 떠오르고 그저 감사한 마음만 듭니다.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 에 비바람 긴 세월 이름 모를 이름 모 를 비목이여’로 시작되지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근무 할 때만 해도 산비탈이나 계곡에는 전쟁의 흔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녹 이 슨 철모나 수통, 부러진 총대 등이 가는 곳마다 널려 있었고, 봄에 호박 등 채소를 심기 위해 땅을 조금만 파 도 인골이 나오곤 했어요.
그 때마다 처참했던 광경이 떠오르고 비참한 생 각만 들었지요.” 한 번은 유골 하나를 잘 씻어가지고 막사로 돌아와 자신의 책상에 올려놓 고 바라보다가 ‘아, 나하고 비슷한 나 이에 처참하게도 저렇게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뒹굴고 있었구나’ 하고 생 각하니 잠을 못자겠더라고 했다. 다음 ‘철의 삼각지’ 백암산 근무때 선배 전우 유골안고 잠 못이뤄 숨진 ‘전쟁영웅’ 입장에서 심정 대변…국민의 정서 응축 학도병 참전용사 송창원 박사에게 듣는다 GP 소대장 출신 ‘비목’ 작사가 한명희 선생의 증언“나라 지킨 호국 영혼의 넋 기려” 그날 아침 그 유골을 산으로 가져다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막걸리 한 잔 따라 주었다고 했다. 그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 대학 철학 과에서 배운 지식보다 더 깊은 지식 을 배웠다고 했다. 그것은 “나라가 없 으면 절대 안 된다.”는 철학이었다. 지 금도 그는 GP에서 군 생활을 했다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라고 했다. “인생의 꽃망울도 피어보지 못하고 깊은 산골짜기에 묻혀 있으니 이 얼 마나 크나큰 불행입니까? 그런 것을 가끔 반추해 보고 음미해 본다면 우 리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나 가치관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러면서 그는 우리가 이처럼 풍요롭고 여유롭고 자유롭게 사는 것은 모두 그 분들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을 잊 어서는 안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가사에 보면 ‘초연’이라는 말이 나 오는데 많은 분들이 그 뜻을 모르는 것 같아요.” “그건 대포 연기입니다. 그리고 화 약 냄새가 한 번 쓸고 갔다는 이야기 는 전투가 한바탕 쓸고 지나갔다는뜻이고요.” “궁노루에 대해서도 일반인들은 모 른다고 해요.” “궁노루는 아주 작은 종류의 노루 예요. 전방에는 노루가 많이 번식하 는데 사병들이 자주 사냥해요. 그런데 수놈이 잡히면 암놈이 밤새 슬피 울 어댑니다.”
“그럼 비목을 군에 있을 때 작사했나요?” “아닙니다. 제대 후 첫 직장이 동양 방송이었고 직종은 PD였어요. 당시 우리 가곡 작품을 방송하는 프로그램 이 있었는데 우리 가곡이 많이 없었 어요. 그 땐 각 방송사마다 라디오를 통해 내보내는 음악이 거의 유행가나 팝송뿐이었어요. 60년대만 해도 서구 문명을 선망할 때였으니까요. 왜 우리 가곡은 천덕꾸러기냐. 그래서 한 동안 가곡만 틀어줬더니 엽서가 쇄도해요. 그런데 우리 가곡 수가 100곡도 안 돼 신곡을 만들기로 했지요. 그 때 탄생 된 것이 ‘비목’과 ‘동그라미 그리다가’ 라든가 ‘기다리는 마음’ 등이지요.” ‘비목’은 원래 ‘목비’인데 자신이 ‘비 석‘처럼 도치해 ‘비목’이라고 붙였다 고 한다. “죽은 자의 입장에서 고인의 심정을 내가 대변해 본거지요. 내가 가사를 썼다기보다 그 시대에 우리 국민들의 정서가 만들어낸 하나의 시 대 감정의 응축이라고 봐야지요.” 그는 그 이후로 사비를 들여 현충일 행사를 해온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 었다. “현충일이면 사람들은 묵념하고는 들로 산으로 모두 놀러나가요. 그렇게 넘길 날이 아닌데. 20대 청춘에 나라 를 지키다가 산화한 사람은 그럼 뭐 가 됩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1996년부터 평화의 댐 부근에서 호국 영령들의 혼을 달래주는 ‘진혼예술제’ 를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 정원에 촛 불이 켜 있는데요. 그게 2010년 6·25 60주년 때 화천 비목공원에서 채화해 가져다가 계속 켜놓고 있습니다. 왜? 외국에 가면 공원 같은데 꺼지지 않 는 ‘영원의 불’이 있잖아요. 그런 의미 입니다.” 진혼예술제는 27년째 하고 있는데 5년 전부터 강원도와 춘천시가 주관이 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바 라는 것은 ‘6·25 추념공원’의 조성과 ‘한국전쟁 아카이브’ 그리고 ‘6·25 추 념곡’을 만들고, ‘6·25 도서관’을 짓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세대가 지 나면 6·25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처럼 기억에서 희미해질까 두렵다고 했다. 민족적 비극인데 후세에 역사의 자료로 남겨 다시는 같은 비극이 일 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일은 정부가 할 게 아니라 국 민들이 자발적으로 해야 합니다. 국 민 성금 1만원씩 백만 명이 내면 100 억 원입니다. 그걸로 첫 삽을 뜨는 겁 니다.” 한 선생은 정전협정 70주년을 기념하여 ‘비목’을 포함하여 연가곡인 12곡 가사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