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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여자 수도회의 활동
1.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888년 7월 한국에 진출한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는 교구로부터 종현 고아원(1888.9)을 인수 받아 운영하였고, 1894년 8월에는 제물포 수녀원이 설립되면서, 제물포에서도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고아원과 함께 시약소도 설치, 운영했는데, 제물포수녀원에서는 1894년부터, 서울 수녀원에서는 1899년경에 시약소(무료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 봉사를 하였다.
수녀회는 1899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육 사도직을 전개했다. 제물포 수녀원에서는 1899년 8월에 여학교를 시작했고, 서울 수녀원에서는 1900년 가을부터 명동 본당에 여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1901년 약현 본당에 설립된 여학교에도 수녀들이 파견되었다.
수녀들은 1909년부터 지방에도 보내져, 1909〜1910년에 평양 본당의 성모여학교, 진남포 본당의 지정여학교, 매화동 본당의 봉삼학교, 제주 본당의 신성여학교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신부들을 도와 본당 사목에 협조함으로써 본당의 발전과 활성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수녀회의 활동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전과 같이 고아원과 양로원을 돌보았고, 시약소를 운영했으며,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교리 지도, 가정 방문, 신심 단체 지도 등 본당 사목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다만 대구 대목구에 새로운 수녀원이 설립된 것,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하는 학교와 본당들이 늘어 분원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점, 성모병원 등 정식 병원의 설립으로 전문적인 의료 봉사에 이바지하게 된 점, 보통교육 중심에서 중등 교육과 고등 교육으로까지 교육 사도직이 발전한 점 등은 일제 강점기 수녀회의 새로운 활동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변화 중에 주목되는 것이 대구 수녀원의 설립이다. 이것은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그는 서울과는 독립된 수녀원을 가짐으로써 대구 대목구의 사도직이 활성화되기를 희망했다. 그리하여 드망즈 주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총장수녀에게 대구로 회원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수련원의 설립도 계획하였다. 그 결과 1915년에 대구에 수녀원이 설립되었고, 1923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수련원의 설립 인가를 받고, 1925년에 수련원도 개설하였다. 대구수녀원의 수녀들이 대구 대목구의 보육원, 학교, 무료 진료소, 본당 활동 등에 종사함으로써 교구 사목에 커다란 활력이 되었다.
한편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고아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성영회에서 보내주는 보조금이 줄어들면서 이들은 극도의 내핍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에 서울의 수녀들은 자선 복권을 판매하고, 바자회를 열며, 아이들과 만든 물건을 팔아서 생활비를 보탰고, 대구의 수녀들은 양잠업을 하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아들은 계속 늘어 1927년까지 서울 고아원에서 구호되고 양성된 고아 수는 4,500명이 넘었다. 그 결과 늘어나는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해 1936년에는 용산 삼호정에 분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서울과 제물포의 무료 진료소도 계속 운영되었다. 그리고 수녀들은 새로 파견되는 본당에서 대부분 시약소를 개설하였다. 그리하여 1936년 성모병원이 설립될 때까지 서울 대목구의 구호사업과 의료사업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시약소가 전부였다. 시약소뿐만 아니라 수녀들은 성모병원에 파견되어 활동했고, 1940년 9월에는 재령의 성심병원에서 봉사하는 등 정식 병원에서도 의료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당시 교회의 의료사업은 대부분 수녀회가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수녀들의 교육활동도 계속되었다. 수녀회에서는 1912년에 장호원, 안성, 대구 본당의 학교에 수녀들을 파견하였고, 1920년대에는 의주 해성학교(1921년), 왕림 광성학교(1929 년) 등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은율 해성학교(1931년), 마산 성지학원(1932년), 원주 소화강습소(1934년), 왜관 소화여자학원(1936년), 전주 해성보통학교(1937년) 등에 수녀들을 보냈다. 물론 교사 자격증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교단을 떠나 본당 활동에 전념하는 수녀들이 늘어갔지만, 해방 때까지 수녀들은 23개의 초등 교육기관에서 지속적으로 혹은 단기적으로 교육을 시행하였다.
수녀회의 교육 사도직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은, 1927년 5월에 개원한 계성여학원과 1944년 9월에 개교한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의 존재이다. 계성여학원은 수녀회에서 자체적으로 설립, 운영한 특수한 교육기관으로, 고등여학교 출신의 규수들에게 가사를 가르치는 일종의 가정 학교였다. 그리고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는 천주교회 최초의 여성 중등 교육 기관으로 수녀들이 일반 과목과 종교를 가르쳤다. 이것은 지금까지 보통교육 중심이었던 수녀회의 교육 사도직이 점차 중등 교육, 고등 교육으로까지 발전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수녀들의 본당 파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11년 이후 24개 본당에 새로이 파견된 수녀들은 본당을 중심으로 교육, 의료, 자선 활동을 전개하였다. 수녀들은 소학교, 유치원, 시약소, 양로원 등의 일에 종사함과 동시에, 교리 지도, 가정 방문 등으로 본당 전교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특히 신자들에 대한 교리 교육은 한글 교육을 통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결과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수녀회에서는 1931년 11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이 연길 지목구로 파견되자, 김해겸(쌘뿔) 수녀와 이 공자가 수녀를 보내 6개월 동안 스위스 수녀들의 선교지 적응을 돕고, 지원자들의 수도생활 준비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1945년에는 ‘성가 소비녀회’에 강부길(데클라) 수녀와 김덕생(아델라) 수녀를 파견하여 회원 양성을 위한 수련을 돕기도 하였다.
2. 메리놀 수녀회
1) 한국 진출
메리놀 수녀회는 1912년 1월 6일 로저스(Mary Joseph Rogers) 수녀가 설립한 미국 최초의 외방 선교 수녀회이다. 보스톤의 공립학교 교사였던 로저스 수녀는 외방 선교에 관심이 있던 여성들을 모아 메리놀 외방선교회에서 간행하는 잡지 The Field Afar의 편집 일을 도왔는데, 이들 중 수도 생활을 희망하는 여성들이 생겨나면서 수도단체를 설립했고, 1920년 2월 14일에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수녀회의 명칭은 ‘성 도미니코 외방 선교 수녀회(Foreign Mission Sisters of St. Dominic)였다가, 1954년에 메리놀 수녀회로 개칭하였다.
메리놀 수녀회는 복음이 선포되지 않은 아시아의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 홍콩에 처음으로 회원을 파견하였고, 1924년에는 한국에도 수녀들이 진출하였다. 메리놀 수녀회의 한국 진출은, 평안도 지역의 사목을 위임받은 메리놀 외방선교회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선교사들의 선교 사업을 돕기 위해 한국에 왔다. 1924년 10월 19일 루득(L. Luduc) 수녀를 포함한 6명의 수녀가 1진으로 입국했고, 1925년 10월에는 장정온(앙네다) 수녀와 김교임(말가리다) 수녀 등 6명이 2진으로 입국하였다. 이들은 평안도 의주에 임시 수녀원을 마련하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익히면서 선교 활동을 준비하였다.
2) 활동
1926년 수녀회는 영유에 수녀원을 신축하고 한국 지부를 영유로 이전하였다. 의주에는 3명의 수녀가 남았는데, 이들은 양로원을 돌보고 고아들을 양육했으며, 시약소를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을 치료해주었다. 이 시약소는 1936년 신의주에 성모병원이 설립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영유에서도 본당의 선교 사업을 돕는 한편, 시약소를 설치하고 고아원을 개설하여 빈민 구제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는 수녀원 내에 여자기예학교를 설립하여 12세부터 19세까지의 여학생들을 모집하여 자수를 비롯한 보통학교 교육 과정을 이수시켰다.
메리놀 수녀회는 신의주 본당에도 분원을 설치하였다. 신의주 본당의 4대 주임 페티프렌(R. Petipren) 신부는 의주에 주재하던 3명의 수녀를 초빙하여 시약소와 병원을 병설하고 의료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의학박사 멜시(H. Meercy) 수녀의 뛰어난 의술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
한편 각 지방에서 활동하던 메리놀회 수녀들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활동 성과가 빠르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활동 범위가 확대되고 다양화되면서 활동할 수녀도 매우 부족했다. 이에 평양 지목구장 모리스 몬시놀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인 수녀회의 설립을 절감하고, 그 책임을 메리놀 수녀회에 위촉하였다.
1931년 7월 16일 메리놀회 수녀 3명은 평양 상수구리 257번지에 마련된 숙소와 수련소에서 한국인 수녀 양성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6월27일 입회자 5명으로 첫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최초의 한국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탄생하였다.
평안도 지역에서 본당 사무, 사회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등에 종사하던 메리놀회 수녀들은, 1941년 12월 일제가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영유 수녀원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1942년 6월 1일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는데, 이후 메리놀회 수녀들이 한국에 재입국한 것은1949년 12월이었다.
3.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1) 한국 진출
원산 대목구를 맡게 된 베네딕도회의 사우어 주교는 새로운 포교지의 선교사업을 위해 수녀회의 초청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11월 27일 독일의 오털리엔을 방문한 길에, ‘투칭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 of Tutzing)의 모원을 찾아가 원산 대목구에 수녀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베네딕도회를 설립한 암라인 신부가 1885년 9월24일 독일의 라이헨바흐(Reichenbach)에 세운 수녀회이다. 수녀회는 1888년에 오틸리엔으로 이전했다가 1897년 투칭에 새 수녀원 부지를 마련하고 1904년 7월부터 이곳에 정착하였다.
1887년부터 동아프리카에 수녀들을 파견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사우어 주교의 요청을 수락하고 1922년 6월 25일 사우어 주교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여비가 없어 한국파견이 미루어지다가, 계약 후 3년이 지난 1925년 10월 4일 4명의 수녀들이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파견된 수녀는 분원장 마틸데 히르쉬(Mathilde Hirsch) 수녀, 크리소스토마 슈미트(Chrysostoma Schmidt) 수녀, 헤르메티스 그로흐(Hermetis Groh) 수녀, 다니엘라 키르크비클러(Daniela Kirchbichler) 수녀 였다.
4명의 독일인 수녀들은 1925년 11월 18일 부산에 도착 했고, 이후 서울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3일을 머문 뒤 11월 21일 원산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원산 본당에 마련된 수녀원(성 데레사의 집)에서 한국어를 익히며 선교활동준비를 하였다.
2) 활동
독일 수녀들이 원산에 정착하자 한국인 지원자들이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수녀원은 협소하여 좀 더 넓은 새 수녀원 건물이 필요하였다. 새 수녀원(성 임마꿀라따)은 중국의 자선사업가 육백홍의 도움으로 1926년 3월에 기초 작업을 시작했고, 1927년 6월 6일에 축성식을 거행했다. 그 사이 1926년 10월 말에는 3명의 수녀가 2차로 파견되었고, 1927년 5월 6일에는 다시 3명의 수녀가 원산 본원에 도착하였다. 그 결과 1927년 당시 원산에는 25명의 수녀와 예비 수녀(유럽인 9명, 한국인 청원자 16명)가 있었고, 독일로부터의 수녀 파견은 1940년 12월 12일(11차)까지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교황청에서는 1927년 4월 29일자로 원산수녀원의 정식 수녀원 승격과 수련원의 개설을 인준하였다.
수녀들은 원산에 진출한 후 5~6년 동안 원산 본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수녀들은 원산본당의 제의방을 맡아보았고 미사 때 풍금을 연주했으며, 시약소(무료 진료소)를 개설하여 환자들을 돌보았다. 시약소는 1929년 4월 사우어 주교가 5칸 정도의 가옥을 매입하여 제공함으로써 이때부터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라고 불렸다.
수녀들은 1926년부터 여자아이들을 모아 교리를 지도함은 물론, 해성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교리를 지도하던 모임은 점차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호수천신학교’로 발전했는데, 여기서는 보통학교 과정과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가난한 아이들을 문맹에서 구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1927년 4월에는 해성유치원을 개원하여 원아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해성유치원은 1931년 9월30일에 정식 설립 인가를 받았고, ‘호수천신학교’는 1941년 4월에 정식 보통학교로 인가되었다.
원산 본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수녀회는 점차 분원을 설립하여 다른지 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갔다. 원산수녀원에서 설립한 최초의 분원은 신고산 분원으로, 이곳의 수녀원은 1933년 3월 19일에 축성되었다. 신고산의 수녀들은 유치원과 시약소를 운영했으며, 1935년 3월에 설립된 해성보통학교에서 교리도 가르쳤다.
신고산에 이어 1936년 10월20일에는 회령에도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령의 수녀들은 전교 활동과 함께 명악학교(해성학교로개칭)의 교육을 담당했으며, 시약소도 설립, 운영하였다. 이어 1940년 7월 22일에는 청진에 분원을 설립하여, 본당 내의 빈민 학교와 시약소를 맡아보았고, 1941년 8월 22일에는 함흥 본당에 분원을 설립하였다. 함흥 본당에서는 9월 24일 예수성심의원을 개원하여 수녀회에 위탁했는데, 의사인 디오메데스 수녀가 원장직을 맡았다.
본당 사무, 교육활동, 시약소, 의원 등의 사도직 활동을 펼치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제는 1943년 8월에 원산 본당의 해성학교 건물을 요구하였고, 1945년 8월 1일에는 유치원과 수녀원 건물을 징발하였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었지만, 1949년 5월 북한의 공산정권이 수녀들을 체포하면서 수녀원은 폐쇄되었다. 이후 1952년 10월 12일 남하한 한국인 수녀들이 대구 공평동에 분원을 설치하면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4.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1) 한국 진출
1931년 연길 지목구에 진출한 수녀회는 스위스 캄(Cham)에 있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이다. 이 수녀회는 처음 루체른(Luzem) 주의 발텍(Baldegg)에 있다가 1853년 5월 죽(Zug) 주의 캄으로 옮겼고, 수녀회 근처에 성 십자가 순례 성당이 있었기 때문에 ‘성 십자가 수녀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수녀회는 1887년부터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가입하기를 원하다가, 1892년 9월에 이탈리아 시에나의 성 베네딕도회인 ‘몬테 올리베토 성 마리아수도원’(Abbazia Monte Oliveto S. Maria Maggiore)과 연합회 가입 수락서를 교환하였다.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연길 지목구의 브레허 신부가 1930년에 수녀 파견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브레허 신부는 효과적인 교구의 선교 활동, 특히 젊은 여성들의 교육, 본당 밖의 여성지도, 병원의 의료봉사 등을 위해서는 수녀들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브레허 신부는 1930년 스위스 캄의 ‘성 십자가 수녀원’에 선교 수녀의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수녀회에서는 연길 지목구의 요청을 수락하고, 1931년 6월 14일에 연길 지목구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그해 9월 14일 마침내 베로니카(M.Veronika) 수녀, 돌로로사(M. Dolorosa) 수녀, 릿다(M. Rita) 수녀, 프란치스카(M. Franziska) 수녀, 이르멘트루디스(M. Irmentrudis) 수녀, 루카(M. Lukas) 수녀 등 6명의 수녀가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이들은 11월 1일 제물포를 통해 입국 했고, 서울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사흘간 머물렀다. 당시 브레허 신부는 선교 수녀들의 적응과 한국인 지원자들의 양성을 위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김해겸 수녀와 이 공자가 수녀를 파견하였고, 스위스에서 온 6명의 수녀는 이들과 함께 11월 6일 연길에 도착하였다.
2) 활동
브레허 신부는 연길 수도원 옆에 4층의 수녀원 건물을 마련하고, 1931년11월 9일 축성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수녀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브레허 신부가 받아들인 4명의 한국인 지원자들이 11월 11일 연길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이후 한국인 지원자들은 계속 늘어 1931년 말에 6명이었던 지원자는 1932년 말에는 20명으로 증가하였다.
연길에 정착한 선교 수녀들은 먼저 선교지의 언어와 생활 방식을 익혔고, 1931년 12월 초에는 수녀원 정문 앞에 조그만 시약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점차 활동 범위를 확대하여 1932년 12월에는 연길 상시 본당에 수녀들을 파견하여 전교 활동과 유치원, 학교 등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부터는 연길 이외의 지역에도 분원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3월 25일에는 용정 하시 본당, 1934년 3월에는 훈춘 본당에 분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34년 8월 14일에 정식으로 수련원이 개설되면서, 1935년 10월 20일에 처음으로 한국인 수녀 4명이 탄생하였다. 그런 가운데 1933년 11월1일에는 스위스에서 4명의 수녀가 2차로 파견되었고, 1934년 12월 11일에는 다시 4명의 선교 수녀가 연길에 도착하였다. 이후 캄의 수녀들은 1936년 11월 25일에 4명, 1939년 5월 22일에 3명이 파견되면서, 5차에 걸쳐 총 21명이 연길로 보내졌다.
수녀들의 수가 증가하자 연길 수녀원에서는 분원 설립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36년 5월에는 명월구 본당, 1937년 6월에는 팔도구 본당, 1941년에는 돈화 본당 1942년에는 도문 본당, 1945년 3월에는 용정 상시 본당에 분원을 설립하였다.
연길 지목구의 수녀들은 전교와 교육활동, 시약소, 진료소를 통한 의료봉사, 사제관 살림 등을 담당하였다. 수녀들은 본당의 부설 학교를 통해 교리와 신앙 교육을 시켰고, 가사, 재봉 등 생활 교육과 유치원, 초등학교 교육까지 수행하였다. 그리고 각종 여성 단체의 지도도 맡았다.
그중 연길의 시약소는 1935년 7월 독일인 의사 레너(Lehner) 박사가 파견되면서, ‘연길 수녀 병원’이 되었고, 약제실과 입원실도 갖추었다. 연길 병원에서는 각 본당 진료소에 필요한 의약품을 보내주었고, 진료소의 간호 수녀들은 연길 병원 의사의 지시에 따라 환자들을 치료하여 많은 생명을 구했다.
수녀들은 1940년 초부터 이동 전교도 다녔다. 이동 전교란, 수녀가 상주하지 않은 시골 본당에 두세 달 머물면서 대축일 준비를 돕고, 첫영성체 교리, 예비자교리, 부인회와 신심 단체의 피정, 교리, 성가 지도, 연극 연습, 성탄 장식, 교리 시험 등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본당 전체의 신앙을 활성화 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던 연길 수녀원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1946년 5월에 1차 청산, 1947년 7월에 2차 청산, 1950년 11월에 3차 청산을 거치면서 폐쇄되었다. 그리고 연길 지목구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수녀들은 1949〜1951년 사이에 본국으로 돌아갔고, 한국인 수녀들은 1946~1947년에 월남한 뒤, 청주, 안동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 전쟁 후 부산에 새 터전(현재의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을 마련하였다.
5. 가르멜 여자 수도회
가르멜 여자 수도회는 관상 수도회로, 기도로써 교회에 봉사하는 단체이다. 이 수도회는 1939년 5월 24일 프랑스의 에르 쉬르 라두르(Aire surl’Adour)에 있는 ‘맨발의 가르멜 여자 수도회’의 멕틸드(Marie Mechthild) 수녀와 마들렌(Marie Madeleine) 수녀가 서울에 도착하면서 한국에 진출하였다.
수녀들의 파견은 서울 대목구 라리보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당시 라리보 주교는 한국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들을 위해 ‘마리아의 본분을 다해 줄 가르멜수녀회’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이에 라리보 주교는 프랑스의 가르멜 수녀회를 초청했고, 수녀회에서 이 요청을 수락하면서 2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녀회의 한국 진출은 장호원 본당의 부이용(C. Bouillon) 신부의 노력과 ‘에르 가르멜 수녀회’가 처했던 당시의 상황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즉 에르 가르멜에서는 1903년 터키에 수녀원을 설립했으나 전쟁으로 폐쇄되면서 새로운 창립지를 물색하던 상황이었고, 부이용 신부는 장호원에 가르멜 수녀원의 설립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녀회의 한국 진출이 논의되었고, 그 결과 1939년에 라리보 주교의 초청 형식으로 2명의 수녀가 한국에 입국했던 것이다. 그리고 라리보 주교가 서울에 정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수녀들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머물면서 수녀회의 설립 준비를 하였다.
1939년 가을 가르멜수녀들은 혜화동의 베네딕도회 수도원 성당 위쪽 언덕에 임시 수녀원을 짓기 시작했다. 이 공사는 1940년 3월경에 끝나, 4월 1일 라리보 주교의 집 전으로 축복식과 개원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가르멜 수녀회에는 프랑스 수녀 2명과 한국인 지원자 2명이 있었는데, 한 달여가 지난 1940년 5월에 앙리에트 수녀 등 3명의 수녀가 다시 파견되었다. 이렇게 수녀들이 늘어나자 수녀회에서는 1940년 가을부터 새 수녀원의 건축 공사에 착수하였다. 서울 대목구로부터 가톨릭대학 부지 일부(혜화동 161번지)를 할애받아 시작된 이 공사는 1941년 7월 상순에 완료되었고, 7월 16일에 라리보 주교의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새 수녀원에서 5명의 프랑스인 수녀와 5명의 한국인 지원자들이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수녀들은 끊임없이 일본 경찰의 감시와 조사를 받아야 했고, 일제의 한국민에 대한 경제적 착취 때문에 수녀들의 생활고도 심하였다. 비록 보댕 신부가 전 재산을 희사하면서 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일상생활의 궁핍함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입회한 수녀들을 귀가시키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한 가르멜 수녀회는 귀가했던 지원자들이 돌아오고 새로운 지원자들도 입회하면서 점차 수녀회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한국인 수녀회의 설립과 활동
1.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1) 설립
메리놀 외방선교회가 평안도 지역을 담당하면서, 1924년 메리놀 수녀회가 그들을 돕기 위해 한국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미국인 수녀들은 문화와 생활관습의 차이, 언어 소통의 문제 때문에 열성과 노고에 비해 성과가 적었다. 게다가 활동 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다양화됨에도 불구하고 수도자의 수는 매우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 4월 제2대 평양 지목구장으로 임명된 모리스 몬시놀은 한국인 수녀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의 설립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에 평양 관후리 성당 근처인 상수구리에 기와집 2채를 매입했고, 1931년 초에는 메리놀 수녀회에 한국인 수녀회의 설립을 위촉하였다. 그리고 각 본당 신부에게 수녀회 창립 사실을 알리고 지원자들을 추천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수녀회의 설립 사업을 위촉받은 메리놀 수녀회의 비즈(G. Beez) 수녀, 클런스(S. Collins) 수녀, 헤세(T. Hesse) 수녀는 1931년 7월 16일에 영유을 떠나 평양 상수구리로 왔다. 모리스 몬시놀과 책임자 비즈 수녀는, 새로 탄생할 수녀회의 수호자를 길의 인도자로 알려진 ‘영원한 도움의 성모’로 정하고, 그 축일인 6월 27일에 창립 미사를 봉헌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932년 6월 27일에 첫 입회자인 서원석(안젤라), 김 루치아, 문 바드리시아, 김 체칠리아, 홍 루실라와 지도 수녀들이 모인 가운데 모리스 몬시놀이 첫 미사를 집전함으로써 최초의 한국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창립되었다.
2) 활동
수녀회가 설립된 이후 1933년에 8명, 1934년에 2명 등 지원자는 꾸준히 있었다. 이와 함께 지도 수녀들은 소학교를 졸업한 지원자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해 중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도록 시켰고, 그 결과 여러 명의 지원자가 교원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소학교 교원 자격을 획득하였다.
이처럼 지원자들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인원도 20여 명에 이르자, 모리스 몬시놀과 비즈 수녀는 수도 생활에 대한 정규 교육을 위해 1935년 3월 일본 성심여자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장정온 수녀를 선생 수녀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1935년 6월 27일에 첫 청원식을 거행하였고, 9월 15일에는 수녀회의 승인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한편 수녀회에서는 1936년 5월 8일부터 지원자 2명을 1주일에 두 번씩 선교리 본당으로 파견하여 교리를 가르치도록 하였고, 수녀원 주위에 사는 아이들을 모아 수녀원에서도 교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0일부터는 장정온 수녀와 청원자 1 명, 지원자 1 명이 매일 성모 보통학교에 나가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수녀회는 창립 직후부터 본당과 학교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모리스 몬시놀의 사임으로 1936년 10월 평양 지목구장 서리로 임명된 부드(W. Booth) 신부는 1937년 12월 29일 수녀회의 정식 승인을 위해 마련된 회헌의 사본을 일본 주재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에게 보냈다. 이것은1938년 1월에 마렐라 대주교를 통해 포교성성에 전달되었고, 포교성성에서는 심의 후 같은 해 2월 25일자 서한을 통해 수녀회의 창립과 수련원의 설립을 승인하였다. 그런 가운데 1938년 6월 18일에 16명의 첫 수련자들이 탄생하였고, 이들 중 11명이 1940년 6월 27일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40년 6월 30일, 서원한 수녀들의 소임이 발표되었다. 이들 중 6명은 평양 관후리 본당으로 파견되어 본당 사무와 성모 보통학교, 학원, 유치원 등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고, 2명의 수녀는 신의주의 마전동 본당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평북 비현 본당에도 2명의 수녀를 파견하였다. 이와 같이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수녀들을 배출하고 본당으로 파견하면서, 그동안 평양 대목구에서 활동하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점차 새 수녀들에게 소임을 인계하고 서울 본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일제가 미국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수녀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먼저 미국인이었던 메리놀회 선교사와 수녀들이 감금되었다가 1942년 6월에 강제 추방되었다. 그 결과 수녀회는 자신들을 이끌던 지도자들과 이별하게 되었다. 그 사이 평양 대목구의 오셰아 주교는 1941년 12월 13일 메리놀 회원인 장정온 수녀에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맡겨 한국인 수녀회의 자립을 돕게 하였다.
한편 오세아 주교는 한국을 떠나면서 서포에 있던 교구 본부 건물과 부속 토지 전체를 수녀회에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수녀회는 1942년 6월 3일 평양의 상수구리 모원을 떠나 서포로 이사하였고, 서울 대목구의 서기창 신부를 새로운 지도 신부로 맞이했다. 하지만 일제 말기 한국민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탄압이 가중되면서, 수녀들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녀들은 적은 식량 배급과 겨울철의 추위로 많은 고생을 하였고, 봄에는 나물을 채취하여 부족한 식량을 보충했다. 비록 밭을 일구어 콩과 조를 심기는 했지만, 수녀원 주위의 토질이 좋지 않아 농사는 잘되지 않았다. 그 결과 영양실조로 인한 환자들이 많이 생겨났고, 이에 지도 신부는 수녀들이 더 이상 버터 나가기 힘들 것을 염려하여 해산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포기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생활난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수녀들의 수도 생활은 계속되었다. 장정온 수녀는 분원에 파견된 수녀들에게 영신 생활의 양식이 되고 전교 활동에도 도움이 되는 회지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를 월 2회 발행하여 배부하였다. 이 회지는 회원들 간의 일치를 도모하고 상호 교류를 위한 매개체로써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장정온 수녀는 수련자 교육에 필요한 서양서를 번역하였으며, 박숙안(카리타스) 수녀에게도 《가톨릭 성인전》과 같은 영적 도서를 번역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수녀들에게 물질적인 궁핍 속에서도 영신적 풍요로움을 더해 주었다.
1944년 12월 4일 덕원에서 휴양 중이던 최병권 신부가 새로운 지도 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945년 4월 9일에는 안주 본당에 새로 수녀들을 파견하여 신심 단체와 주일학교 지도를 맡게 하였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한 수녀회는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1950년 5월 14일에 해산되었고, 다음날 서포의 수녀원 건물도 압수당했다. 수녀들은 연합군이 북진할 때 수녀회를 재건하려고도 했으나, 중공군의 전쟁 참여로 1950년 12월 일부가 남하하여 부산에 정착했다가, 1955년 서울로 본원을 이전하였다.
2. 예수 성심 시녀회
1) 예수 성심 배종회의 형성
예수 성심 시녀회는 1952년 9월에 대구 교구장인 최덕홍 주교로부터 수도회의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이 수녀회의 기원은 일제 시대까지 소급된다. 즉 1935년 12월 8일 파리 외방전교회의 델랑드(L. Deslandes) 신부가 영천의 용평 본당(경북 영천군 화산면 용평리)에 있을 때, 6명의 동정녀가 삼덕당 공동체를 이루면서 시작되었다.
델랑드 신부는 1923년 6월 5일 한국에 부임한 후 낙산, 부산, 대구 등지에서 사목하였다. 그리고 1933년 1월 20일 요양차 본국으로 귀국했다가, 1934년 초에 재입국하여 4월에 용평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사업을 전개하고자 하였고, 그러면서 이 일을 함께할 정녀(貞女)들을 만났다.
정녀들은 공소를 방문하여 대세를 주거나 교리를 가르쳤고, 사제관 옆에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여 환자들을 치료하고 약을 처방했다. 그리고 아낙이나 소녀들, 그리고 예비 신자들에게 교리 교육을 시키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었다.
델랑드 신부는 정녀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하며 생활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1935년 9월 드망즈 주교에게 이들을 소개하면서 공동체의 설립 준비가 시작되었다.
한곳에 모아 공동체를 만들 필요가 있음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드망즈 주교가 이 요구를 승인하면서 공동체의 설립 준비가 시작되었다.
1935년 11월 12일 델랑드 신부는 정녀들이 살 집을 마련했고, 12월 8일 6명의 정녀가 ‘삼덕당’에 입주하면서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공동체의 명칭은, 정녀들이 동정을 지키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정식 수녀회가 설립될 때까지 ‘예수 성심 배종회’로 하였다.
2) 활동
공동체가 설립된 후 정녀들은 종교와 세속 공부를 하면서 아이들과 예비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거나 무료 진료소에서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1936년 2월 17일 거지 할머니를 집으로 데려와 살게 되었고, 같은 해 여름에는 나환자인 아버지가 구금되어 고아가 된 6,7세의 두 자매도 돌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가난하고 불쌍한 아이와 노인들이 공동체로 몰려들었다.
정녀들은 처음 방 두 칸의 초가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공동생활을 하기에
불편하였다. 이에 1936년 9월 말 초가집을 헐고 방이 6개인 새집을 마련하였다. 그러면서 델랑드 신부는 이 공동체를 한국인 수도회로 발전시키는 문제를 드망즈 주교와 의논 하였고, 준비 작업도 진행하였다.
그러나 1938년 2월 드망즈 주교가 사망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이 계획은 결실을 보지 못한 듯하다. 이에 델랑드 신부는 1938년 일본에 있는 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몇몇 정녀들이 정식 수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계획을 추진하여 1939년에 3명의 정녀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그런 가운데 델랑드 신부는 1940년 5월에 영천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이에 용평에 있던 정녀들과 그들이 돌보던 노인과 아이들도 함께 영천으로 이주하였다. 영천에서도 정녀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무의무탁한 노인들과 아이들을 돌보았고, 교리를 가르치고 병자들을 간호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전시 체제하에서 델랑드 신부와 정녀들은 고초를 겪었다. 즉 일본 경찰은 1941년 7월에 정녀들을 체포했는데, 이것은 종교인들에게 신사 참배, 천황 숭배를 강요하기 위한 탄압이었고, 다른 한편 델랑드 신부를 구속할 구실을 찾는 것이었다, 실제 일본 경찰은 델랑드 신부를 찾아와 신사 참배와 천황에 대해 질문하기도 하였다.
정녀들은 11월에 모두 석방되었지만,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번에는 델랑드 신부가 체포되었다가 12월 24일에 풀려났다. 이후 델랑드 신부는 영천에서 계속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이했고, 1948년에 영천 본당을 떠났다. 그리고 1950년 3월에 포항 송정으로 이주했는데, 이곳에서 활동하던 정녀 공동체는 1952년 9월 8일에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라는 명칭의 대구 대목구 소속 수도회로 정식 인준되었다.
3. 서울 성가 소비녀회
성가 소비녀회는 ‘예수님의 성가정을 받드는 여종’이라는 뜻으로, 1943년 12월 25일 파리 외방전교회의 생제(P. Singer) 신부가 성가정의 경손과 가난을 본받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자는 취지에서 설립한 수녀회이다.
창설자 생제 신부는 1935년에 한국에 왔다. 그는 입국 후 합덕 본당과 제물포 본당에서 사목하였고, 1939년 7월에 혜화동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 무렵 한국사회는 일제의 탄압과 수탈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특히 프랑스인인 생제 신부는 경찰이 매사를 감시했기 때문에 밖에 나가거나 공소를 방문하는 것도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제 신부는 전쟁의 여파가 한국에도 미쳐, 수많은 피난민과 부상자, 그리고 병든 고아들이 생겨날 것을 예상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할 수녀회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러면서 수녀가 되기 위해 농촌에서 상경한 백동 본당의 처녀들을 주목하였다. 생제 신부는 이들에 대해 소신학교의 공베르(A. Combert, 孔安國, 1875〜 1950) 신부와 이재현(요셉) 신부와 협의한 결과, 이들을 위해 수녀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생제 신부는 이러한 사실을 노기남 주교에게 보고한 후, 수녀회의 창설 준비를 시작하였다. 지원자들은 1943년 9월 초부터 매주 목요일 생제 신부에게 교리 교육을 받으며 기도하였다. 그리고 1943년 12월 25일 백동 본당의 성모상 앞에서 김청자(루치아), 김충순(바르바라) 등이 순명서약을 함으로써 성가 소비녀회가 창설되었다.
생제 신부는 1944년 3월 백동 본당의 방연용(벨라도) 복사 집에 수도 공동체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강부길(데클라) 수녀와 김덕생(아델라) 수녀를 초청하여 수녀 양성 교육을 맡겼다. 그런 가운데 해방이 되었고, 1947년 1월 13일 드디어 6명의 첫 서원 자들이 탄생하였다.
자료: 한국 교회사 연구소 발행 "한국천주교회사" 제4권 중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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