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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와 광주. 춘천 지목구
[자료: 한국 천주교회사 제 5권]
1. 성 골롬반회의 진출과 전라남도 감목대리구의 설정
성 골롬반회는 1916년 아일랜드의 갤빈(E. Galvin, 1882〜1956) 신부에 의해 창설된 선교 단체이다. 갤빈 신부는 미국 뉴욕 교구 브루클린 지구에서 사목하던 선교사로 1912년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1916년 아일랜드로 돌아온 후 메이누스의 성 페트릭 대학교수로 있던 블로윅(John Blowick) 신부와 함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중국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중국 선교를 목표로 하던 성 골롬반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33년 10월29일이었다. 당시 대구 대목구의 드망즈 주교는 1931년 5월 10일 전라도 감목대리구를 설정하고 김양홍 신부를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하였다. 이것은 한국인 교구 설립의 준비 단계로, 이때부터 이 지역에 대한 사목은 한국인 신부 15명이 전담하였다.
그러나 감목대리구 설정 이후 드망즈 주교는 전라남도의 사목과 관련해서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먼저 1933년 당시 인구가 1,410,108명이었던 전라북도에는 본당이 12개, 신자 수가 16,564명이었던데 반해, 인구가 2,239,346명이었던 전라남도에는 본당이 6개, 신자 수는 2,363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막대한 노력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많은 신부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러나 ‘전라도 감목대리구’의 경우 서품받는 사제 수가 한정되어 있기에, 전라북도 본당에 배치하고 나면 전라남도에서 선교할 사제는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원래의 계획대로 이 감목대리구를 그대로 독립 교구로 설정하면, 전라남도 지역의 구원사업은 한없이 지연될 가능성이 컸다.
다음으로 전라남도 지역은 제주도를 포함하는 방대한 지역 이었다. 따라서 많은 수의 사제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전교 회장과 성당도 필요했다. 더욱이 전교 회장의 활동과 성당 건축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라도 감목대리구에서는 이것을 감당할 힘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사목은 한국인 신부들에게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한국인 사제들이 계속 맡을 경우, 선교 활동도 부진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위와 같은 문제 때문에 드망즈 주교는 전라남도 지역을 ‘전라도 감목대리구’에서 분리하여 수도회나 선교회에 이양해 줄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전라도를 둘로 나누어 전라남도를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한 선교 단체에 이양할 것을 건의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1933년에 이 문제를 포교성성과 협의하였다. 그리고 포교성성은 1933년 6월에 성 골롬반외방선교회에 한국 진출을 제의했고, 성 골롬반회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포교성성에서는 1933년 7월 6일자로 ‘성 골롬반외방선교회가 전라남도의 사목을 맡겠다고 승낙했다.’는 사실을 드망즈 주교에게 통보했다.
성 골롬반회의 한국 진출이 결정되면서, 중국 한양에서 활동하던 성 골름반회의 맥풀런 신부가 1933년 9월 11일 진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대구에 왔다. 그리고 9월 16일에 드망즈 주교와 협정을 체결한 후 중국으로 돌아갔다. 맥폴린 신부는 10월 14일에 재차 입국했다가, 10월 20일 한국으로 파견될 선교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다시 중국 상해로 갔다.
한편 중국 사목을 위해 중국으로 향하던 8명의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도중에 한국으로 가라는 장상의 통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상해로 가서 맥폴린 신부를 만난 뒤 그와 함께 일본을 거쳐 1933년 10월 29일에 부산에 도착했고, 곧바로 대구로 왔다. 그리고 11월 19일에는 열 번째 선교사인 스위니 (J. Sweeney) 신부가 도착하였다.
이들은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934년 3월 8일에, 드망즈 주교는 전라도 감목대리구를 남, 북 감목대리구로 나누고, 맥폴린 신부를 전라남도 감목대리로 임명하였다. 이 조치 후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1934년 4월에 각자의 본당으로 파견되었고, 감목대리 맥폴린 신부는 목포에 성 골롬반회 한국 본부를 두었다. 맥폴린 신부가 목포에 본부를 세운 것은, 광주가 도청 소재지이기는 하지만 신자들이 많지 않은 반면, 목포에는 전라남도 교우의 1/4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 광주 지목구의 설정과 변화
1) 광주 지목구의 설정
1934년 3월 전라남도 감목대리구가 설정되었을 당시, 감목대리구의 관할 구역 내에는 본당 6개(목포, 노안, 광주, 순천, 제주, 홍로)와 3,143명의 신자가 있었다. 10명의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감목대리구의 설정과 동시에 부임지를 배정받았고, 1934년 부활 대축일(4월 1일) 후에 부임하기로 하였다.
선교사들은 우선 한국인 본당 신부의 보좌로 선교 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 4월 3일에는 게라티(B. Geraghty) 신부와 네리간(T. Neligan) 신부가 정수길(요셉) 신부가 맡고 있던 순천 본당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4월 4일에는 마리난(G. Marinan) 신부가 민정호(마르코) 신부의 광주 본당으로 갔고, 헨리 (H. Henry) 신부는 박재수(요한) 신부의 노안 본당으로 갔다. 같은 날 4명의 신부가 제주도로 출발했는데, 도슨(R Dawson) 신부와 스위니(J. Sweeney) 신부는 최덕홍(요한) 신부의 제주 본당으로, 맥메나민(D.McMenamin) 신부와 라이언(T.D. Ryan) 신부는 김창현(바오로) 신부의 흥로 본당으로 떠났다. 마지막으로 4월 9일에는 맥폴린 신부와 모나간(P. Monaghan) 신부가 목포로 출발했는데, 당시 목포 본당은 송남호(요셉) 신부가 맡고 있었다.
한국인 사제들을 도와 선교사업에 종사하던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차츰 지역의 풍습과 관할 지역의 현황을 파악해 가는 가운데 1935년부터 본당 사목을 맡게 되었다.
당시 광주 본당의 민정호 신부는 1934년 12월에 물러났고, 목포 본당의 송남호 신부는 1935년 2월에 서울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순천 본당의 정수길 신부는 1935년 6월에 순천을 떠났고, 1936년 6월에는 제주의 두 한국인 신부도 전임되었다. 그 결과 한국인 신부들을 대신하여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이 본당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아울러 1935년 5월에는 나주 본당이 신설되어 헨리 신부가 초대 주임이 되었는데, 나주 본당은 성골롬반회가 한국에서 건립한 첫 번째 성당이 되었다.
한편 이 시기 전라남도의 교세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즉 감목대리구 설정당시
3,143명이었던 신자 수는, 1935에는 3,350명, 1936년에는 3,567명, 1937년에는 4,016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1935년에는 나주 본당이 신설되고, 1936년에는 여수 본당이 신설되었다. 아울러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의 입국도 이어져, 1934년 6월 26일에는 퀸란(T. Quinlan) 신부가 입국했고, 1935년 11월 21 일에는 델빈(P. Devin) 신부, 우즈(F. Woods) 신부, 쿠삭(T. Cusack) 신부, 스위니(A. Sweeney) 신부가 왔다.
그리고 1936년 11월 7(또는 21)일에는 맥간(F. McGann) 신부, 물켄(T. Mulkem) 신부, 매긴(J.P. MaGinn) 신부, 메카티(M. McCarthy) 신부가 입국했다. 그 결과 1937년 초 전라남도 감목대리구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는 모두 19명 이 되었고, 3명의 한국인 신부도 이 지역에서 사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청은 1937년 4월 13일에 전라남도 감목대리구를 광주지목구로 설정하고 맥폴린 신부를 광주 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전라남도 감목대리구는 설정 당시부터 독립 교구로 승격될 예정이었고, 드망즈 주교는 그 승격 시점을 대구 대목구의 설정 25주년이 되는 1936년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이 현재의 관할권으로부터 너무 빨리 독립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전라북도의 한국인 신부들도 독립 교구의 설립 연기를 드망즈 주교에게 요구하였다. 그런 가운데 드망즈 주교는 1936년 4월 22일 광주지목구와 전주 지목구의 설정을 요청하는 서류를 로마로 보냈고, 그로부터 1년 뒤인 1937년 4월에 광주지목구와 전주지목구의 설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2) 제2차 세계 대전과 골롬반회 선교사들의 구금
1937년 4월 광주 지목구의 신자 수는 4,016명이었다. 이후 지목구의 신자 수는 계속 늘어 1938년에는 4,356명, 1939년에는 4,852명, 1940년에는 5,346명, 1941년에는 5,772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본당도 신설되었는데, 1937년에는 영광 본당과 장성 본당이 설립되었고, 1941년 9월에는 보성 본당이 순천 본당의 공소에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38년 5월 4일에는 ‘재단법인 광주구 천주교회 유지재단’도 설립되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광주 지목구는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일제는 전쟁을 개시함과 동시에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을 추방하거나 감금하였다. 그래서 중립국인 아일랜드출신의 성골롬반회 선교사들도 준적성국 국민으로 간주되어 구금되었다. 이들은 각지의 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1개월 후에 목포 경찰서로 이감되었다. 이에 앞서 제주도에서 사목하던 도슨 신부, 스위니(A. Sweeney) 신부, 라이언 신부는 1941년 10월에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고, 그 후 2〜5년형을 선고받고 구속되었다.
한편 나주 본당의 헨리 신부는 목포를 방문했다가 맥폴린 몬시뇰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얼마 뒤 자신의 임지인 나주로 이송되었고 거기서 노안 본당의 케인(T. Kane) 신부와 함께 심문을 받은 뒤 1942년 2월 초 광주로 보내졌다. 광주에서는 광주 본당의 옛 사제관에 감금되었는데, 이곳에는 다른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도 함께 억류되어 있었다. 이들 중 미국인이었던 헨리 신부와 케인 신부 그리고 호주인인 망간(K. Mangan) 신부는 5월에 부산으로 보내져 6월 1일 한국을 떠났다.
맥폴린 몬시놀와 선교사들이 구금되면서 광주 지목구의 신자들은 목자 잃은 양이 되었다. 게다가 일제는 외국인 성직자들과 접촉하였다는 이유로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김재석(金在石, 요셉, 1910〜1987), 김창현, 이민두(李敏斗) 등 한국인 신부들도 같은 이유로 수감하였다. 그 결과 사목할 신부가 부족하여, 여수본당, 보성 본당처럼 다시 공소가 되는 경우가 생기면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대단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는 한국인 모두가 일주일 내내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 신자들은 성당에 나오기도 어려웠다.
3) 와키다 신부의 지목구장 임명
1942년 1월 7일, 전주에서 주재용 신부의 전주 지목구장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김양흥 신부의 사임으로 전주 지목구를 맡게 된 주재용 신부는 맥폴린 지목구장을 대신하여 광주 지목구도 관리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42년 가을 맥폴린 교구장은 도쿄로 가서 주일 교황사절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이것이 수리되면서 1942년 11월 21일에 일본인 와키다 아사고로 신부가 로마로부터 광주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2월 1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와키다 신부는 며칠 간 서울 주교관에 머물며 총독부와 주요 기관에 신임 인사를 한 뒤 목포로 갔다. 그리고 감금되어있던 맥폴린 지목구장을 만나 사무를 인계받았다. 이후 성 골름반회 선교사들은 경찰서에서 풀려나 목포(산정동) 성당 근처에 있는 본부 건물(1935년 가을 신축)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나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금지되어 있었다.
와키다 지목구장이 부임한 이듬해 2월 7일, 목포 성당에서는 지목구장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착좌식에는 노기남 주교와 주재용 전주 지목구장, 그리고 맥폴린 전임 지목구장이 참석 했고, 다수의 관공서 내빈과 1,000여 명의 교우들도 함께했다. 이후 와키다 지목구장은 광주 본당의 사제관을 증축 수리한 후, 1943년 말에는 목포에 있던 교구청을 광주 본당으로 이전하였다.
새로운 지목구장이 부임하면서, 지목구의 사목활동도 어느 정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먼저 와키다 지목구장은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족한 신부를 타 교구에 요청하였다. 그 결과 전주 지목구 및 서울 대목구에서 신부들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이 광주 지목구의 한국인 신부들과 함께 본당 사목을 수행하였다. 이때 활동하던 신부로는 광주 지목구의 김재석 신부, 김창현 신부, 이민두 신부, 장옥석(루치오) 신부, 전주 지목구의 김양홍 전 지목구장, 최덕홍 신부, 박문규(미카엘) 신부, 오기순(알베르토) 신부, 1943년 3월 서울 대목구에서 순천 본당으로 파견된 임세빈 신부 등이었다.
와키다 지목구장이 재임하던 시기는 전쟁 말기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창씨개명, 일본어 사용 등 한국민에 대한 황민화 시책을 더욱 강화하였고, 징병, 징용, 학병, 군수물자 징발 등 한국민들의 전쟁 참여도 강요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요구와 탄압은 교회에도 가해져, 군수물자로 쓰기 위해 성당종의 헌납을 요구하거나, 교회 건물과 시설들을 강제로 징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와키다 지목구장은 총독부와 헌병대 그리고 군사령부를 쫓아다니며 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적극 노력하였다.
한편 1945년 4월 25일, 노기남 주교는 총독부 정무국으로부터 목포에 있는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을 충청도 이북으로 이동, 수용시키라는 통고문을 전달받았다. 목포가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그곳에 외국인이 거주하면 스파이 노릇을 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였다. 노기남 주교는 다음날 광주로 가서 와키다 지목구장과 의논한 후 함께 목포로 갔다. 그리고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을 광주로 데려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광주행은 허락되지 않았다. 한편 당시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덕원으로 가려 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 역시 덕원에 바다가 있다는 이유로 일제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노기남 주교는 대책을 논의한 끝에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을 춘천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보안과에서 춘천에 3명, 홍천에 10명으로 분산, 배치할 것을 요구하여 계획을 변경하였다. 1945년 5월 27일 목포에 있던 골롬반회 선교사 전원이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5월 29일 보안과에서는 다시 선교사 전원을 홍천으로 보낼 것을 통지하였다. 그 결과 맥폴린 몬시놀을 비롯한 12명의 선교사는 5월 30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홍천으로 가서 해방이 될 때까지 홍천 본당에 갇혀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와키다 교구장은 2〜3개월 후 노기남 주교의 도움으로 귀국하였고, 강제 연금되었던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9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광주 지목구의 책임을 맡은 맥폴린 몬시뇰과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9월 27일 목포로 내려가 교구의 재건을 도모했고, 광주로 옮겨졌던 교구청도 목포로 환원시켰다.
3. 춘천 지목구의 설정과 변화
1) 춘천 지목구의 설정
1933년 한국에 진출한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1934년에 전라남도 감목대리구를 맡았고, 1937년에는 감목대리구가 광주 지목구로 승격되면서 독립 교구를 사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강원도 지역의 사목도 성 골롬반회에 위임되었다.
당시 서울 대목구의 라리보 주교는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울 대목구의 분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황청에 서울 대목구의 분할을 청했는데, 교황청에서 이 청원을 받아들여 1938년 6월 9일 강원도의 사목을 성 골롬반회에 위임했던 것이다.
성 골롬반회에서는 1938년 10월 광주에 있던 퀸란 신부를 새 지역의 사목 책임자로 임명하고, 11월 중순 브렌난(P. Brennan) 신부와 함께 춘천으로 파견하였다. 퀸란 신부는 강원도 지역의 본당들을 시찰한 11월 하순 춘천 본당에 도착하였다. 이후 교구 설립을 준비하는 가운데, 1939년 4월 25일 강원도 지역은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춘천 지목구로 설정되었고, 광주 지목구장인 맥폴린 몬시놀이 초대 지목구장 서리를 겸임하였다.
지목구가 설정당시, 강원도에는 11개의 본당과 약 10,000명의 신자가 있었으며, 퀸란, 브렌난, 게라티, 네리간 신부가 춘천 지목구 소속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맥간 신부, 매긴(J. Maginn) 신부, 마리난 신부, 도일(J. Doyle) 신부 등도 춘천 지목구로 파견되었다.
한편 지목구장을 맡게 된 맥폴린 몬시놀은, 1939년 6월 21일 라리보 주교로부터 춘천 지목구의 재치권을 인계받았다. 그리고 퀸란 신부를 지목구장 대리로 임명하여 자기 대신 춘천 지목구의 사목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이것은 광주와 춘천이 거리상 너무나 멀어, 자신이 두 곳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라리보 주교와 함께 사제들의 인사문제를 협의했다.
당시 강원도 지역에는 11개의 본당이 있었는데, 이 중 7개 본당에 대한 인사이동이 단행되었다. 7개 중 5개 본당(이천, 횡성, 평강, 원주, 흥천)은 한국인 신부에서 성 골롬반회 신부들로 교체되었고, 2개 본당(양양, 강릉)은 한국인 신부끼리 교대하였다. 그리고 일본 동경에서 일본어를 배우던 도일 신부가 입국하여 춘천의 일본인 사목을 맡게 되었다.
이외 춘천 지목구에 속한 본당 중, 춘천 본당은 1938년 11월 이래 퀸란 신부의 책임 아래 있었고, 풍수원 본당은 정규하(1896〜1943.10재임) 신부, 신림(용소막) 본당은 백남희(베드로) 신부, 대화 본당은 윤예원 신부가 계속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춘천 지목구에는 5명의 한국인 신부가 남아 성 골롬반회의 사목을 돕게 되었다. 그리고 1939년 12월에는 성 골롬반회 본부에서 3명의 선교사가 춘천으로 파견되었다.
맥폴린 몬시놀은 춘천 지목구의 기틀을 잡아가는 한편, 춘천 지목구를 온전히 맡아서 운영할 새로운 지목구장의 임명을 바랐다. 그리하여 그는 1939년 12월에 동경의 교황사절을 방문하여 새로운 지목구장의 임명 필요성을 주장했고 교황사절로부터 교구장의 임명 문제를 교황청에 보고하겠다는 답도 듣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교황청에서는 1940년 11월 22일자로 퀸란 신부를 춘천 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이 소식은 1941년 1월 13일 맥폴린 몬시놀에게 알려졌고, 퀸란 신부는 1941년 1월 상순에 맥폴린 몬시놀을 만나 춘천 지목구의 사무를 인계받은 후 지목구장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춘천 지목구는 명실상부한 독립 교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2) 제2차 세계 대전과 춘천 지목구의 시련
퀸란 신부가 지목구장에 취임할 당시, 춘천 지목구의 교우 수는 11,166명이었고, 본당은 11개였다. 그리고 이들을 성 골롬반회 선교사 15명(지목구장 포함)과 한국인 신부 5명이 사목하였다. 지목구의 상황은 전년에 비해 큰 변화가 없었지만, 신자 수가 10,444명에서 11,166명으로 증가한 것은, 증가된 인원(722명)이 대구 대목구의 증가 수(746명)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당시 춘천 지목구의 사목이 그만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일제는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을 추방하거나 감금했는데, 춘천 지목구의 선교사들도 광주지목구의 신부들처럼 체포되었다. 일제는 아일랜드가 중립국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출신의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을 준적성국 국민으로 간주하여 구금했던 것이다.
체포된 선교사들은 12월 9일 또는 10일에 체포된 지역의 감옥에 수감 되었다. 그러다가 12월 10일에 4곳의 감옥으로 분산수용 되었는데, 퀸란 몬시뇰, 브렌난 신부, 헤리기(F. Herligy) 신부, 네리간 신부, 크로스비어 Crosby) 신부는 춘천, 게라티 신부, 겔라허 신부, 디어리(P. Deary) 신부는 원주, 콜리에(T. Collier) 신부, 도일 신부는 강릉, 맥간 신부, 매긴 신부, 맥고완(P.McGowan) 신부, 해이워드(H. Hayward) 신부는 평강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보름 후인 1941년 12월 25일, 선교사들은 모두 춘천으로 압송되어 경찰훈련학교에 감금되었고, 1942년 1월 말에는 빈 감리교회 건물로 옮겨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더 이상 사목활동을 할 수가 없었고, 이에 교황청에서는 1942년 1월 3일 서울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노기남 신부에게 춘천 지목구의 재치권도 함께 부여하였다. 노기남 신부는 1942년 1월18일 착좌식을 거행한 후, 2월 8일 춘천을 방문했다. 그리고 구금 중인 퀸란 몬시뇰을 만나 교구 사무를 인계받았다.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이 감금되면서 춘천 지목구의 사목활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춘천 지목구에서 사목하던 한국인 신부들이 있었지만, 5명 정도의 인원으로 춘천 지목구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노기남 신부는 1942년 2월과 5월에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서울 대목구의 한국인 신부 5명을 춘천 지목구로 파견하였다.
신부들을 파견함과 동시에, 노기남 신부는 사제가 부족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한 신부가 여러 본당을 관리하는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 결과 횡성 본당은 풍수원 본당으로, 용소막 본당은 원주 본당으로 병합되었고, 흥천 본당은 춘천 본당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한편 감금되어있던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중립 국민임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1942년 3월에 풀려나 사제관에 연금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1942년 말, 선교사들은 다시 춘천, 횡성, 홍천에 나뉘어 수용되었다.
춘천에는 퀸란 몬시놀, 도일 신부, 콜리에 신부, 맥고완 신부가 수용되었고, 횡성에는 네리간 신부, 디어리 신부, 겔라허 신부, 홍천에는 게라티 신부, 맥간 신부, 매긴 신부가 갇혀 있었다. 반면 헤이워드 신부. 헤리기 신부, 브렌난 신부, 크로스비 신부 등 4명은 뉴질랜드인, 미국인, 호주인이었기 때문에 1942년 6월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노기남 주교는 춘천 지목구장 서리직을 사임하였다. 교황청에서는 노기남 주교의 사임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퀸란 몬시놀을 춘천 지목구장서리로 재임명하였다. 이 소식은 마텔라 주일 교황사절이 1945년 10월 4일자 서한을 통해 퀸란 몬시뇰에게 알렸다. 그 결과 춘천 지목구는 다시 성 골롬반회에서 맡아 사목하게 되었다.
자료: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한국천주교회사” 제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