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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60권, 숙종 43년 11월 19일 기사 3번째기사 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유생 정민하의 송시열·송준길의 문묘 종사에 관한 상소문
전라도(全羅道) 유생(儒生) 정민하(鄭敏河) 등이 상서(上書)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천지의 순수하고 강직한 정기(正氣)를 타고났으며 하악(河嶽)의 맑고 깨끗한 정영(精英)이 모여 있습니다. 학문은 정학(正學)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어 멀리 고정(考亭)538) 에 연접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엄숙하고 씩씩한 정일(精一)함의 가운데에 두고, 이러한 이치를 학문(學問)과 사변(思辯)하는 즈음에서 궁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서(天敍)·천질(天秩)539) 의 경례(經禮)와 위의(威儀)·의문(疑文)의 변절(變節), 그리고 경전(經傳)과 제서(諸書)의 미언(微言)과 오의(奧義)에 이르기까지 연구(硏究)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잘 이해하여 관통(貫通)한 다음 이를 자신에게 돌이켜 하늘에서 타고난 하나의 직(直)자를 삼가 지키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므로, 굉대(宏大)한 강목(綱目)이 모두 잘 시행되어 주편(周遍)하게 되었습니다. 도덕(道德)이 완전히 구비됨에 따라 덕기(德氣)가 온몸에 넘쳐 흘렀으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하기가 태산(泰山)·교악(喬嶽)과 같고, 가깝게 다가가면 온화하기가 화풍(和風)·경운(慶雲)과 같았습니다. 아! 공맹(孔孟)의 도통(道統)을 전하고 군현(群賢)들의 학문을 집대성(集大成)한 사람이 주자(朱子)인데, 선정(先正)께서 주자에 대해 성심(誠心)으로 열복(悅服)한 것이 70제자가 공자(孔子)에게 열복한 정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모두 주자를 본받았고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에 있어서도 어느 것 하나 주자의 법문(法門)에서 얻어 내어 공맹(孔孟)의 도(道)를 발명(發明)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또 병자540) ·정축541) 의 호란(胡亂)을 당하여서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강명(講明)하였고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큰 일을 하려는 뜻을 비밀히 도왔습니다. 그런데 성조(聖祖)542) 께서 중도에 승하(昇遐)하셨으므로 갑자기 영릉(寧陵)543) 의 만사(挽詞)를 남기게 되었는데, 거기에도 주자(朱子)가 애용해 하면서 지었던 운(韻)을 써서 지었습니다. 따라서 두 분 대로(大老)544) 의 궁천(窮天)의 한은 전후가 일반인 것입니다. 아! 대업(大業)을 비록 당시에 성취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룬 대의(大義)는 갠 하늘의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어 우리 동토(東土)의 사람들로 하여금 군신(君臣)·부자(父子)의 대륜(大倫)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이적(夷狄)·금수(禽獸)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충성을 다해 국가에 보답하려는 일념(一念)을 잠시도 잊지 않고 또 성조(聖祖)545) 의 당일의 의지를 가지고 성자 신손(聖子神孫)546) 들에게 면려(勉勵)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이 늙어 이 세상에서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기대가 끊기자 드디어 차자(箚子)를 올려 효종(孝宗)께서 지녔던 백세(百世)가 되어도 변할 수 없는 의리를 밝혔으니, 이는 바로 주자(朱子)가 효종 황제(孝宗皇帝)의 성덕(盛德)을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서 찬송(贊頌)하였던 그런 뜻이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은 천자(天姿)가 정금(精金)·미옥(美玉)처럼 순수하였고 흉금(胷襟)은 광풍(光風)·제월(霽月)처럼 깨끗하였으므로 그의 문하에 나아가 덕(德)을 직접 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심취(心醉)되어 열복(悅服)하였습니다. 그의 높고 깊은 덕업(德業)과 넓고 원대한 수립(樹立)은 당세(當世)를 찬란하게 비추고 후세에 밝게 전하기에 충분하였으니, 또 어찌 도통을 전하는 유종(儒宗)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유학(遊學)하였는데, 《소학(小學)》을 독신(篤信)하여 오로지 내향(內向)의 공부만을 힘썼기 때문에 훌륭하게 덕을 이룬 군자(君子)가 된 것입니다. 인조조(仁祖朝)에도 누차 소명(召命)을 받았었습니다만,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즉위한 처음에 바야흐로 큰 일을 하시려는 뜻을 두신 데에 이르러서야 선정(先正)께서 생각하시기를, ‘이런 때에 나아가 마음과 힘을 다해 성덕(盛德)을 보필하지 않는다면 장차 천고에 한을 남기게 됨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나아가 소명에 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연관(經筵官)·주연관(胄筵官)547) 을 겸임하고 날마다 강석(講席)에 입시(入侍)의 경의(經義)를 천발(闡發)하고 임금이 마음을 개도(開導)하면서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매양 천리(千里)와 인욕(人欲)의 구분에 대해 더욱 정성스럽게 마음을 다하여 반복해서 분명하게 밝히고 정미(精微)로운 부분을 예리하게 분삭하였으므로, 효종(孝宗)께서 송탄(悚歎)하며 하답(下答)하심에 있어 사지(辭旨)가 깊고도 간절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잘 만난 성대함과 밝은 마음이 서로 합하게 된 것은 참으로 천년에 한 번 있을 그런 것이었습니다. 효종(孝宗)께서 선정(先正)을 찬선(贊善)에 제수하시자 선정께서는 세자(世子)를 보도(輔導)하는 일에 정성과 힘을 끝까지 다 했는데, 현종(顯宗)께서도 겸허한 자세로 따르셨습니다. 효종께서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유사하시기를, ‘세자(世子)가 학문에 부지런하게 된 것은 실로 찬선(贊善)의 공력에 힘입은 것이다.’ 하셨습니다. 아! 그의 도덕과 공효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과거에 역적 김자점(金自點)이 용사(用事)할 적에는 그들의 당여(黨與)가 조정에 가득 깔려 있어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두려워서 감히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정(先正)이 제일 먼저 탄핵하는 글을 올려 준절히 논핵(論劾)하자 간당(奸黨)들이 흩어져 그들의 간계를 부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허적(許賊)548) 이 국권을 쥐고 멋대로 휘두를 적에도 선정이 혼자서 한 통의 소장(疏章)을 진달하여 그 죄상을 논열(論列)하고, 그가 사림(士林)에게 화(禍)를 떠넘기고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한다고 바로 지척(指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경신년549) 에 이르러서야 선정의 말이 과연 증험되었습니다. 따라서 주상께서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추념(追念)하시어 치제(致祭)라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의 화복(禍福)에 대해 회피(回避)하지 않고 곧은 절개를 지닌 평생의 정력(定力)550) 은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송시열(宋時烈)과는 한세상에 같이 살았고 뜻이 같고 도(道)가 합치되었으므로 사업(事業)도 같았고 진퇴(進退)도 함께 하였습니다. 송시열이 일찍이 송준길(宋浚吉)의 광지(壙誌)를 지으면서 ‘옛날 온공(溫公)551) 이 경인(景仁)552) 에게 성(姓)이 다른 형제(兄弟)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나는 공(公)과 성도 같다. 다만 부모(父母)만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교계(交契)가 깊고도 친밀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의 선비들이 두 분 선정(先正)을 크게 우러러보는 것이 마치 태산(泰山)·북두(北斗)와 같아서 말만하면 반드시 ‘두 송선생(宋先生)’이라고 하였으며, 우리 성상(聖上)께서도 직접 원액(院額)553) 을 써서 내리시어 특별히 포숭(褒崇)하셨으니, 또한 두 분 선생에 대해 차별이 없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무(聖廡)554) 에 배향하는 성전(盛典)에 이르러서도 어찌 다른 점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이명(离明)555) 께서는 특별히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도통(道統)의 소재를 시원스럽게 보이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지금 두 분 선생을 종사(從祀)시켜 달라고 청하는 것은 이것이 진실로 선현(先賢)을 높이는 성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으나, 이는 사체(事體)가 중대한 것이므로 준허(準許)할 수가 없다."
하였다.
[ 註 538]고정(考亭) : 주자(朱子)를 가리킴.
[註 539]천서(天敍)·천질(天秩) : 천서는 군신(君臣)·부자(父子)·형제(兄弟)·부부(夫婦)·붕우(朋友)의 윤서(倫叙)를 말하고, 천질은 존비(尊卑)·귀천(貴賤)과 등급(等級)의 융쇄(隆殺)를 품정(品定)한 것임.
[註 540]병자 : 1636 인조 14년.
[註 541]정축 : 1637 인조 15년.
[註 542]성조(聖祖) : 효종.
[註 543]영릉(寧陵) : 효종의 능호.
[註 544]대로(大老) :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
[註 545]성조(聖祖) : 효종.
[註 546]성자 신손(聖子神孫) : 임금의 자손.
[註 547]주연관(胄筵官) : 서연관(書筵官).
[註 548]허적(許賊) : 허적(許積)을 가리킴.
[註 549]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550]정력(定力) : 확정된 학문의 힘.
[註 551]온공(溫公) : 송(宋)나라 명신(名臣) 사마광(司馬光). 태사온국공(太師溫國公)의 증직을 받았으므로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 함.
[註 552]경인(景仁) : 송(宋)나라 명신(名臣) 범진(范鎭)의 자(字). 평생에 사마광(司馬光)과 서로 마음이 맞았고 의론이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듯하다고 함.
[註 553]원액(院額) : 서원(書院)의 편액(扁額).
[註 554]성무(聖廡) : 문묘(文廟).
[註 555]이명(离明) : 세자(世子).
○全羅道儒生鄭敏河等上書, 請以先正臣宋時烈、宋浚吉, 從祀文廟。 略曰:
先正臣宋時烈, 稟天地純剛之正氣, 鍾河嶽淸淑之精英, 淵源正學, 遠接考亭。 存此心於齊莊靜一之中, 窮此理於學問、思辯之際。 至如天敍、天秩之經禮, 威儀、疑文之變節, 與夫經傳、諸書之微言奧義, 靡不硏究, 覃思融會而貫通, 反之於身, 謹守其一箇直字之得於天者, 以爲根柢, 而宏綱大目, 該擧而周遍。 道全德備, 晬面盎背, 望之巖巖若泰山喬嶽, 卽之溫溫如和風慶雲矣。 嗚呼! 繼孔孟道統之傳, 而集大成於群賢者, 朱子, 而先正之心悅誠服, 不啻若七十子之服孔子, 一言一行, 動法朱子, 出處進退, 孰非得於朱子法門, 而發明孔孟之道者乎? 又値丙、丁之變, 講明《春秋》之大義, 而密贊孝宗大王大有爲之志矣。 聖祖中途, 弓劍遽遺, 寧陵之挽, 又用朱子之哀韻。 二大老窮天之恨, 前後一般矣。 嗚呼! 大業雖缺於當時, 而明天理正人心之大義, 炳然如靑天白日, 使東土之人, 知有君臣、父子之大倫, 而得免於夷狄、禽獸之歸。 忠報一念, 耿耿未已, 又以聖祖當日之志, 勉勵於聖子神孫, 而甚矣吾衰, 望斷斯世, 遂上箚明孝廟百世不可祧之義, 此乃朱子贊頌孝宗皇帝深知盛德之意也。 先正臣宋浚吉, 天姿粹然, 若精金美玉, 胸襟灑落, 如光風霽月, 登門而覿德者, 不覺心醉而誠悅。 至其德業之崇深, 樹立之宏遠, 有足以輝暎當世, 昭垂後來, 則又豈非傳道之儒宗乎? 早遊於文元公 金長生之門, 篤信《小學》, 專務向裏, 蔚爲成德之君子。 仁廟朝屢被召命, 及至孝宗大王嗣服之初, 方有大有爲之志, 先正以爲若不以此時殫竭心力, 以補聖德, 則將不免遺恨千古, 遂乃出而膺命。 兼經筵、冑筵之官, 日侍講席, 闡發經義, 啓沃開導, 靡不用極。 每於天理人欲之分, 尤眷眷致意, 丁寧反覆, 剖柝精微, 孝廟悚歎俯答, 辭旨深懇。 其際遇之盛, 昭融之契, 眞千載一時也。 孝廟除先正以賛善, 先正於輔導之事, 竭力盡悃, 而顯考亦爲之虛己以聽。 孝廟嘗面諭曰: "世子進學之勤至, 實賴贊善之功。 噫! 其道德、功效之卓爾者, 有如是夫! 往在賊點用事之日, 黨與布滿, 勢焰熏天, 人皆怵怯, 不敢出一言, 而先正首發彈文, 論劾截峻, 奸黨散落, 不得售其計。 又於許賊之秉軸擅恣也, 先正獨陳一疏, 論列罪狀, 直斥以嫁禍士林, 謀危宗社。 逮至庚申, 先正之言果驗。 自上追念先見之明, 至有致祭之擧, 此可見其禍福不回, 直節自持, 平生定力, 人不可及也。 與時烈, 生竝一世, 志同道合, 事業不異, 進退與共。 時烈嘗作浚吉壙誌曰: "昔者溫公之與景仁, 謂之曰姓不同兄弟。 今吾之於公, 姓亦同焉, 特父母不同而已。" 其交契深密如此。 所以擧國章甫, 景仰兩先正, 如泰山北斗, 言必稱之曰, 兩宋先生, 而我聖上, 親題院額, 特加褒崇, 亦無間於兩先生, 則至於躋廡之盛典, 寧有異同哉? 伏願离明, 持許從祀聖廡, 快示道統之所在。
世子答曰: "今玆, 兩先正從祀之請, 固知出於尊賢之誠, 而玆事體重, 不得準許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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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 2월 29일 무신 1번째기사 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송시열 등을 종사하자는 논의를 비방하는 상소를 올린 유생 이승운 등을 유배시키다
전라도 유생 이승운(李升運) 등이 상서(上書)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등 두 신하를 종사(從祀)하자는 논의를 비방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작년에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배향하였으나, 이는 성문(聖門)의 더없는 치욕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에 본도(本道)의 유생 정민하(鄭敏河) 등이 또 한 통의 상서를 올려 감히 죄를 받고 죽은 신하 송시열(宋時烈)과 고 판서 송준길(宋浚吉)을 아울러 성무(聖廡)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정민하 등이 감히 패륜스럽기 짝이 없는 말을 하여서 우리 이명(離明)074) 을 속였으니, 어찌 천지 귀신(天地鬼神)이 감림(監臨)하는 것을 이토록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아!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뜻이 밝기가 해와 별 같았는데, 송시열이 은밀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헤아려서 주실(周室)을 높이는 의리를 가탁(假托)하여 임금의 총애를 견고하게 하려는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한 가지 방책도 우러러 성모(聖謨)를 도운 적이 없었고 전석(前席)에서 독대(獨對)하게 되어서는 임금께서 비밀히 큰 계책을 자문하시니 도리어 오현(五賢)의 종사(從祀)에 정밀한 취사(取捨)를 할 것과 강빈(姜嬪)의 옥사(獄事)075) 와 김홍욱(金弘郁)이 원통하게 죽은 것076) 등의 말을 하여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함으로써 완전히 어진 신하에게 겸허하게 자문하려는 성상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또 송시열은 일찍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포위되어 있던 중에는 항상 칼고 노끈을 가지고 다니면서 짐짓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한 것처럼 했습니다만, 성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자 구차스럽게 목숨을 도둑질하였습니다. 이에 동료들의 질책하는 글에 대하여 도리어 ‘청성(靑城)077) 에서는 죽는 것이 마땅하지만 남한산성에서는 죽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말을 만들어 냈으니, 그가 허성(虛聲)으로 대갈(大喝)하여 한 세상을 철저히 속인 것이 이에서 남김없이 환히 드러났던 것입니다.
계축년078) 산릉(山陵)의 변079) 은 오로지 일을 맡아 보았던 여러 대신들의 죄인데도 송시열은 자기 당파를 보호하려는 데에 급급하여 김수흥(金壽興)에게 준 글에서 말하기를, ‘경자년080) 에 성상께서 산릉을 친심(親審)하실 때 개봉(改封)하지 아니하고 인하여 허물어져 틈이 난 곳을 보수하게 한 것은 진실로 성단(聖斷)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금일에 이르러서는 곧 털끝만큼도 스스로 반성하는 말은 없고 오로지 여러 대신들만 탓하고 있으니, 임금과 신하가 의논할 즈음에 어찌 자가구(子家駒)가 소공(昭公)에게 대답한 뜻081) 에 의거 은밀히 규계(規戒)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경자년 이후 성상께서 전릉(展陵)하는 예를 폐하였으나 온천에는 해마다 행차한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당초에 성상의 뜻은 홍제동(弘濟洞)이 멀기에 쓸 수 없다고 여겼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또 할 말이 있습니다. 〈효종의〉 영릉(寧陵)이 가까운 데 있는데도 전하께서 능을 전성(展省)하지 아니한다고 할 터인데, 이 말이 영릉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송시열도 선왕의 신하인데 어찌 차마 이런 따위의 말을 마음에 품고서 입으로 발설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송시열은 효종의 은혜를 받은 것이 천고에 매우 드문 일인데, 효종이 승하(昇遐)한 때를 당하여 인산(因山)이 지나기도 전에 갑자기 국문(國門)을 나서면서 이에 말하기를, ‘나는 영안(永安)의 조서(詔書)를 받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만사(輓詞)를 지으라는 어명을 받고서도 스스로 지으려고 아니하여 남을 시켜서 자기 대신 글를 짓게 하였으니, 조금도 충실하고 간절한 정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글에다가 도리어 가필하여 자기가 지은 글로 만들어 자기를 과장하는 밑천으로 삼았으니, 또한 그 마음 쓰는 것이 무상(無狀)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을사년082) 에 올린 한 통의 상소는 인용한 것이 사리에 어긋났으니 그 진심은 은폐하기 어려운 것으로 천지 사이에 도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갑술년083) 에 다시 복직(復職)시킨 것은 허물을 용서하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옳지 아니하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성상께서도 이때에 또한 어찌 통쾌하게 씻어버리고 그를 완전하게 용서한 것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아비를 폐하도록 가르쳐 이륜(彛倫)을 퇴패시켜 끊어지게 하였고 자부(子婦)를 핍박하여 죽게 하여 골욕(骨肉)을 잔멸(殘滅)하게 하였으니, 사람의 도리가 이에 이르러 기강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그가 입조(入朝)하던 초기에는 겉으로 청의(淸議)를 가탁하여 임금의 친족을 힘써 배척하였는데, 이는 오로지 알력 다툼에서 나온 계책이었습니다만 중간에 실세(失勢)하게 되어서는 뼈에 사무치도록 실수를 징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가게 되자 안면을 바꾸어 그들에게 투탁(投托)하여 힘을 합쳐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비밀히 모의하고 은밀히 사찰하는 것을 참여하여 알지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상해(傷害)하는 성품이 노년에 이를수록 더욱 심하여져 당쟁의 의논이 더욱더 치열하게 되었으니, 의리가 땅에 떨어지고 인심과 세도가 날로 쇠란한 지경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은 모두가 이 사람이 조장한 것이었으니, 홍수(洪水)와 맹수(猛獸)의 피해084) 인들 어찌 이처럼 심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송준길의 노둔함과 지리 멸렬함은 다만 송시열의 그림자로서 당인(黨人)의 숭배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는 논한 만한 학술도 없고 또 취할 만한 식견도 없음은 물론이고 일생 동안의 언행(言行)과 동정(動靜)은 한결같이 송시열이 하는 것을 보고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무릇 논변할 때에는 송시열이 옳다고 하면 송준길도 옳다고 하였고 송시열이 그르다고 하면 송준길도 그르다고 하는 등 일찍이 자기의 견해를 한 번도 나타낸 적이 없었습니다. 만년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송시열의 권자(圈子)085) 에 빠진 줄을 알고 나서는 조금 스스로 갈라서서 견해를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기관(機關)086) 이다.’라는 따위의 말로 은연중 비난을 가하였습니다만, 그래도 드러내 놓고 끊지는 못하였으니, 그가 주재(主宰)가 없었던 것을 이것으로서 알 수가 있습니다. 향사(鄕社)의 제향에서도 남우(濫竽)087) 라고 하였는데, 이번에는 아울러 묘정(廟庭)에 올리자고 청하였으니, 이 어찌 너무나 통탄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서가 승정원에 이르자 승정원에서 소장의 내용에 멋대로 입을 놀려 무욕(誣辱)을 가하였고 문장의 조어(造語)가 흉패스럽다는 뜻으로 진달(陳達)하고 봉입(捧入)하니,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지금 이승운 등의 상서(上書)를 보건대, 먼저 문원공을 묘정에 올려 배향하자는 일을 문제로 제기하면서 성문(聖門)의 수치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미 더없이 통탄할 일이다. 그런데 또 정민하 등이 두 선정(先正)을 문묘(文廟)에 종사시키자고 청한 것으로 인하여 두 현신(賢臣)에게 무욕(誣辱)을 가함에 있어 말할 수 없는 비난을 퍼부어 패려스럽기 짝이 없다. 더구나 우리 성상께서 서원(書院)의 액자(額字)를 친히 쓰시고 교지(敎旨)를 특별히 내리신 것은 진실로 현인을 존경하고 사도를 지키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조처인 것이다. 이런 음흉한 무리들을 귀양보내는 법전을 빨리 시행함으로써 선비들로 하여금 정도(正道)를 따르게 하고 사설(邪說)을 그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두(書頭)088) 인 이승운은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이승운 등을 경흥부(慶興府)에 유배시켰다.
[註 074]이명(離明) : 세자를 가리킴.
[註 075]강빈(姜嬪)의 옥사(獄事) : 강빈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사사(賜死)된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빈(嬪)인 강씨(姜氏)를 가리킴. 인조 23년(1645) 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죽자 소의(昭儀) 조씨(趙氏)의 무고로 인하여 조씨를 저주한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었고, 어선(御膳)에 독약을 넣은 사건이 일어났을 적에도 조씨가 이를 강빈(姜嬪)의 소행이라고 무고하여 결국 후원(後苑)에 유폐(幽廢)시켰다가 사사했음.
[註 076]김홍욱(金弘郁)이 원통하게 죽은 것 : 효종 5년(1654)에 황해도 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 인조 24년(1646)에 사사(賜死)된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와 그 후 유배되어 죽은 그녀의 어린 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효종 즉위 초부터 이 문제에 대해 발언을 금지했는데 또 그 이야기를 꺼낸다고 격노한 효종에 의해 투옥되어 친국(親鞫)을 받다가 장사(杖死)한 것을 이름.
[註 077]청성(靑城) : 북송(北宋)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金)나라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어의(御衣)를 벗기움을 당했던 치욕스러운 곳임.
[註 078]계축년 : 1673 현종 14년.
[註 079]산릉(山陵)의 변 : 현종(顯宗) 14년(1673)에 효종(孝宗)의 능(陵)의 석물(石物)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고 영림 부령(靈林副令) 익수(翼秀)가 아뢴 것을 말함. 이해 겨울에 양주(楊州)에 있던 구릉(舊陵)을 여주(驪州)로 옮겼음.
[註 080]경자년 : 1660 현종 원년.
[註 081]임금과 신하가 의논할 즈음에 어찌 자가구(子家駒)가 소공(昭公)에게 대답한 뜻 : 노소공(魯昭公)이 권신(權臣) 계씨(季氏)에게 축출당했을 적에 소공을 따라갔던 자가구(子家駒)가 소공에게 "신하만 원망하지 말고 임금 자신이 반성해야 합니다." 한 고사(故事)를 인용한 것임.
[註 082]을사년 : 1665 현종 6년.
[註 083]갑술년 : 1694 숙종 20년.
[註 084]홍수(洪水)와 맹수(猛獸)의 피해 :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의하면 "우왕(禹王)이 홍수를 막아 천하가 화평해했고 주공(周公)이 맹수를 몰아내어 백성이 편안해졌다."고 했는데, 그 주(註)에 "사설(邪說)이 사람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리는 것이 홍수나 맹수의 재앙보다 더하다."고 했음.
[註 085]권자(圈子) : 사유(思惟)의 범주(範疇)임.
[註 086]기관(機關) : 남을 해치기 위하여 계책을 꾸미고 활동하는 것.
[註 087]남우(濫竽) : 쓸데없이 붙어 있다는 뜻. 옛날 제 선왕(齊宣王)이 큰 생황[竽]을 좋아하여 악사(樂士) 3백 명을 불러 생황을 불게 했는데, 그때 남곽(南郭)이란 사람이 불줄 모르면서도 그 가운데 끼어 탈없이 넘어갔었던 고사에서 온 말임.
[註 088]서두(書頭) : 소두(疏頭)와 같음. 세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썼음.
○戊申/全羅道儒生李升運等上書, 醜詆文正公 宋時烈等兩臣從祀之論。 略曰:
昨年金長生之躋享文廟, 而聖門之羞辱極矣。 不意今者, 本道儒生鄭敏河等, 又進一書, 敢以罪死臣宋時烈, 故判書宋浚吉, 竝請從享於聖廡。 敏河等敢爲萬萬絶悖之言, 以誣我离明, 獨不畏天地鬼神之監臨耶? 嗚呼! 惟我孝宗大王薪膽之志, 炳如日星, 時烈陰揣上意之所在, 假托尊周之義, 以爲固寵之計。 曾無一策仰贊聖謨, 及其前席獨對, 密詢大計, 則反以從祀五賢, 精加取舍, 姜獄、金弘郁冤死等語, 東問西答, 全孤虛佇之聖意。 且時烈, 曾在南漢圍中, 常携刀繩, 佯若必死, 及至下城, 苟然偸生, 乃於儕友質責之書, 反創靑城當死, 南漢不當死之說, 其虛聲大喝, 厚誣一世, 於此彰露無餘。 癸丑山陵之變, 亶出任事諸臣之罪, 而時烈急於護黨, 與金壽興書曰: "庚子聖上親審之時, 不爲改封, 因補罅隙, 實出聖斷, 而至於今日, 乃無一毫自反之語, 專罪諸臣, 都兪之際, 何不以子家駒對昭公之義, 密進規戒?" 又曰: "庚子以後, 聖上廢却展陵, 溫泉則逐年行幸。" 又曰: "當初聖意, 以弘濟洞爲遠不用云。 如是則又有說。 雖若寧陵之近, 而不能展省, 與寧陵何異哉?" 噫噫! 此何言也? 時烈亦先王之臣耳。 尙何忍以此等之語, 萠於心而發諸口乎? 且時烈受恩孝廟, 逈出千古, 而逮當昇遐之日, 因山未過, 遽出國門, 乃曰: "我不受永安之詔。" 及其承命製輓, 不肯自撰, 倩人代述, 頓無忠實懇惻之誠, 乃反筆之於書, 掠爲己有, 要作夸詡之資, 亦可見其心迹之無狀矣。 乙巳一疏, 引喩乖悖, 肝肺難掩, 無所逃於天地之間矣。 甲戌牽復, 雖出含垢之聖意, 猶有不韙之敎, 則聖上於此, 亦何嘗快雪全釋也哉? 敎人廢父, 而彝倫斁絶, 迫死子婦而骨肉殘滅。 人理至此, 綱紀盡喪。 方其入朝之初, 外托淸議, 力排戚畹, 專出相軋之計, 中間失勢, 刻骨懲創。 及其再入, 改頭附托, 合而爲一, 密謀陰察, 無不預知。 傷人害物之性, 到老益甚, 以致黨議轉激, 義理晦塞, 人心世道, 日入於衰亂之域者, 無非此人之釀成, 洪水、猛獸之禍, 亦豈若是之甚哉? 若夫浚吉之鹵莾滅裂, 只是時烈之影響, 黨人之尸祝耳。 旣無學術之可論, 又乏見識之可取, 一生言行動靜, 一視時烈之所爲, 凡於論辨之際, 時烈以爲是, 則浚吉亦曰是, 時烈以爲非, 則浚吉亦曰非, 未嘗一出己見。 及其晩年, 自知見墮於時烈之圈子, 稍自岐貳, 乃以都是機關等語, 陰加譏切, 而猶不能顯言絶之, 其無主宰, 卽此可知。 鄕社之享, 亦云濫竽, 今玆竝陞之請, 豈非萬萬痛惋者哉?
疏至政院, 政院以其疏肆口誣辱, 造語凶悖之意, 陳達捧入, 世子下令曰: "今觀李升運等上書, 首提文元公陞配事, 至以聖門羞辱爲言, 已極痛惋, 而又因鄭敏河等兩先正從祀文廟之請, 誣辱兩賢, 極口醜詆, 絶悖無倫。 況我聖上院額之親寫, 敎旨之特降, 實出於尊賢衛道之盛意, 則如此陰凶之輩, 不可不亟施投畀之典, 使士趨正而邪說熄。 書頭李升運, 極邊定配。" 於是, 配升運於慶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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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문묘종사 반대
그의 할아비는 조선(趙銑)이고, 그 하자란 1717년(숙종43)에 당시 진사(進士)였던 조선이 윤선거(尹宣擧) 부자를 위해 변론하고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하여 문묘(文廟)의 배향에서 빼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는 데 참여하였다가 승정원의 계품(啓稟)으로 인해 상소가 봉입(捧入)되지 않자 승정원에 들어가 궐문이 닫힐 때까지 물러가지 않으면서 시위한 일을 말한다. 이 일로 조선은 도리를 지키지 않고 거만했으므로 처벌해야 한다는 대간의 상소로 인해 정배되는 처벌을 받았으나 위에까지 올라가지 못한 상소이므로 처벌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우의정 이이명(李頤命)의 차자로 인해 용서를 받았다. 《肅宗實錄 43年 4月 17日,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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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9권, 숙종 43년 4월 17일 신축 1번째기사 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임금이 진사 조선의 상소문을 봉입하지 말라 하다
진사(進士) 조선(趙銑) 등이 상소하여, 윤선거(尹宣擧) 부자를 위해 수천 마디 말을 크게 떠벌여 신변(伸辨)하고, 송시열(宋時烈)을 한없이 헐뜯어 욕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봉입(捧入)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조선 등이 정원에서 계품한 것에 발노(發怒)하여 정원의 문안으로 곧바로 들어와 승지(承旨)들에게 욕하며 행동이 패악(悖惡)하였으며, 대궐 문이 닫히려 하는데도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원에서 다시 이것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습(士習)이 매우 해괴하다. 빨리 물러가게 하라."
하였다.
○辛丑/進士趙銑等上疏, 爲尹宣擧父子伸辨, 張皇數千語, 醜詆宋時烈, 罔有紀極, 政院啓稟, 上命勿爲捧入。 銑等發怒於政院之啓稟, 直入院門, 詈辱諸承旨, 擧措悖惡, 闕門將閉, 猶不退去, 政院復以此啓奏, 上以爲: "士習極其駭怪。 亟令退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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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9권, 숙종 43년 4월 21일 을사 3번째기사 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장령 이정익의 상소로 박태문·조선을 징벌하다
장령(掌令) 이정익(李禎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박태문(朴泰文)·조선(趙銑)의 소(疏)는 미처 예람(睿覽)을 거치지 않았으나, 장황한 사설로 선정(先正)을 한없이 무욕하였습니다. 그리고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신 뒤에 그 무리를 거느리고 망문(望門) 【망문이란 정원의 중문(中門)이다.】 안으로 불쑥 들어와 그 무리가 금중(禁中)의 넓은 마당 가운데에서 선정(先正)의 성명을 함부로 헐뜯어 욕하며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으니, 사람으로서 윤기(倫紀)가 없고 패만(悖慢)한 것이 어찌 이토록 지극합니까? 이제 그 소를 물리치기만 하고 엄히 징벌하지 않으면, 간사한 자를 돕고 바른 사람을 헐뜯는 무리를 장차 두려워 움츠리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박태문·조선 등의 소는 윤기가 없고 패만하여 결코 그 소를 물리치는 것으로 그칠 수 없으니, 모두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라. 이미 소두(疏頭)를 죄주고 나면, 함부로 부른 자들이 매우 통탄스럽기는 하나, 적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박태문은 김해(金海)에 정배(定配)하고, 조선은 가산(嘉山)에 정배하였다. 그 뒤에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다만 정원(政院)에 바친 개략을 가지고 상달되지 않은 말에 대하여 죄를 성토하여 귀양보내는 것은 알맞은 형정(刑政)이 아닐 듯합니다. 선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자에 이르러서는 금중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방자하게 패만하여 무엄하였으니, 이미 듣고 본 사람이 많고 정상이 분명한데, 버려두고 묻지 않는 것은 도리어 너무 너그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여 박태문·조선을 용서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헐뜯어 욕한 홍계일(洪啓一)을 찾아내어 멀리 귀양보냈다. 그런데 그 뒤에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채(趙泰采)의 상소로 인하여 임상극(林象極) 등 세 사람과 함께 한꺼번에 용서받았다.
○掌令李禎翊上疏。 略曰:
朴泰文、趙銑疏, 雖未經睿覽, 其所張皇辭說, 誣辱先正, 罔有紀極。 及其勿捧命下之後, 率其徒黨, 突入望門之內, 【望門者政院中門也。】 而其徒黨, 斥呼先正姓名於禁庭稠廣之中, 醜辱詬詆, 無所不至。 人之無倫悖慢, 胡至此極? 今若只却其疏, 不嚴徵討, 則扶邪醜正之徒, 將無以畏戢矣。
上答曰: "朴泰文、趙銑等之疏, 無倫絶悖, 決不可退却其疏而止。 竝遠配, 而旣罪疏頭, 則斥號者雖極可痛, 不必摘發也。" 於是, 泰文配金海, 銑配嘉山。 其後右議政李頣命陳箚言:
徒以呈院之槪, 未徹之語, 聲罪行遣, 恐非政刑之得中。 至於斥呼先正之名者, 咫尺禁中, 肆悖無嚴, 聽聞旣多, 事狀昭著, 置以不問, 反爲太寬。
上納其說, 宥泰文、銑, 而覈得斥呼宋時烈名字詬辱者洪啓一, 遠配。 後, 因工曹判書趙泰采上疏, 竝與林象極等三人, 同時蒙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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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1월 25일 경자 3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서유문을 주서 추천 명단에서 삭제하도록 명하다
서유문(徐有聞)을 주서 추천 명단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신방 급제 조수민(趙秀民)이 처음 급제할 때 유문이 주서로서 수민을 가주서에 의망하면서 성균관에 소속시킬 사람과 함께 배열하였는데, 분관(分館)할 때 승문원 정자 이인채(李寅采)가 ‘수민은 선대에 하자가 있는데 성균관에 소속시켰다.’고 하였다. 이는 대개 수민의 할아버지 조선(趙銑)이 일찍이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문묘의 배향에서 내쫓자는 상소에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상이 조선의 상소는 임금에게까지 올라가지 않았고, 수민의 아버지 조종렴(趙宗濂)은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한창 세도를 부릴 때 절개를 지켰다 하여 특별히 수민의 억울함을 신설하여 주었다. 그리고 인채의 그와 같은 일은 사실 유문이 가주서로 의망할 때 성균관에 소속시킬 사람과 함께 배열한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 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命徐有聞削名注薦。 新榜及第趙秀民登科之初, 有聞以注書, 擬秀民假注書, 而與當隷國子者排望, 及其分館也, 承文正字李寅采以: "秀民有世累, 隷之國子。" 蓋秀民之祖銑, 曾與文正公 宋時烈黜享之疏也。 上以銑疏是未徹, 而秀民之父宗濂, 當賊臣洪麟漢鴟張之時, 能自樹立, 特伸秀民, 謂寅采此擧, 實由於有聞假注書排望之不善, 有是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