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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장암은 내게 축복의 행진곡이었다>
몸에 이상이 오다
2017년 4월부터 몸이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식욕도 저하되며 체중도 조금씩 감소했다.
이에 따라 자꾸 자리에 눕고만 싶었다.
그래도 '이러다가 괜찮아지겠지.'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내는 이런 나를 보고
빨리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원래 병원에 가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난 일평생 병원에 입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위급한 병에 걸린 적이 없었고
더구나 내가 암에 걸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건강 검진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패착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췌장암에 걸릴 줄이야.
이 일을 통해 큰 고통을 겪게 되었지만
나의 경험상 누구든지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여
철저한 건강 관리 구역 밖으로 튀어 나가면
질병의 덫에 걸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주시나이다
(시편 41:3)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던 날
그런데 주일 예배 설교 시간에
자꾸 입술이 마르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예전과 달리 기분이 안 좋은 피곤도
저 깊은 어디로부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런 현상은 몇 주째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주일 1부 예배 시
드디어 큰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온 힘을 다해 설교를 하는데
그만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입술도 타들어 가면서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숨이 차올라 헐떡였고
발음조차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얼굴 표정마저 잔뜩 일그러져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도들 역시 이것을 보고
이내 눈치를 챘는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결국은 사물이 희미하게 보이면서
실신하다시피 했고
2부 예배 설교는 부목사님께 맡긴 채
병원 응급실로 급히 실려 가게 되었다.
차량 이동 중에도 너무나 힘이 들어서
가냘픈 신음과 함께 반복하여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목사라서 그런지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뒤에 남겨진 성도들만 생각났다.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이런 사고가 없었는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드디어 응급실에 도착했다.
당장에 의사들은 혈압을 재고 피를 뺐다.
혈압은 200이 넘게 급상승되어 있었으며
혈당도 500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링거 주사를 맞으면서
조금씩 컨디션이 회복되었고
정신도 온전히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응급 치료만 받으면
금방 교회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CT 촬영 결과를 본 의사가 와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췌장에 혹이 보입니다."
결국은 건강 관리에 대한 무지가
엄청난 질병을 초래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병자가 되는 것을
미리 방지하려면
부지런히 건강을 도모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편 6:2)
병원에서의 처참했던 풍경
의사가 췌장에서 혹이 보인다고 했지만
처음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췌장암은 상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전 어느 크리스천 사상체질
전문가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목사님은 절대 암에 걸릴 분이 아니라는
말을 했고 난 이 말을 성경처럼 믿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의 말을
어떻게 다 신뢰할 수 있으랴.
요즘 난 요동하고 배신하는 인간들로 말미암아
'속이 상하신 하나님'이
자꾸만 머리에 떠오른다.
복을 주시면 충성을 다하겠다는 공언과 달리
경제적으로 조금 부유해지자
옛날의 열심을 잃어버린
우리의 자화상으로 인해서다.
의사는 당장 입원하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집에 가지도 못하고
곧바로 병실에 갇혀 링거 주사를 맞으며
혈액 검사, 조직 검사, MRI 검사 등
온갖 검사를 다했다.
특히 MRI 검사를 받으러
링거 걸이를 끌고 황량하게 보이는 복도를 지나
터덕터덕 지하 촬영실로 갈 때는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기가 막히기도 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구분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오랜 세월 견지해 왔던
기도 목회의 종착지가 여기란 말인가?
부끄럽지만 그렇게도 외쳐왔던
절대적인 믿음과 감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그럴 것이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늘 천국을 지향하고 준비하는 목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국'이란 단어의 사용 빈도를
기억해 보았을 때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성도들 역시 가끔 언급하는 현재적인 천국과
미래적인 천국에 대해서는
별 관심과 반응이 없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입원을 하여
환자복을 입고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심정이란
낯설어도 한참이나 낯설 만큼
이질적인 상황이었다.
병원에 가기를 그렇게도 싫어했건만
꼼짝하지 못하고 병실에 갇혀
결과를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다니
마치 현실과 다른 미지의 세계로 들어온 것 같았다.
마침 병원에서 내가 사는 아파트가 보여서
그곳을 주시하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라는 마음으로
안절부절하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의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아내에게 와서
담도가 모두 막혀있으며 혹까지 있어서
췌장암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아내는 이 말을 듣고 정신 줄을 놓은 사람처럼
멍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원래 성격이 낙천적이고 밝은 사람인데
남편의 중병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도 아내는 암환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내 역시 당뇨병을 앓았지만
몇 번의 성경 필사 과정에서
완전한 치유를 받았다.
지금은 환자들을 위해 기도해 줄 때마다
종종 신비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태복음 10:1)
평범해도 행복해야 하는 이유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검사를 위해 며칠 금식을 하게 되었다.
이때 속수무책으로 체중이 감소했다.
늘 과체중이 걱정이었는데
하염없이 살이 빠지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그로 인해 10여 kg의 몸무게가
줄어든 것 같다.
얼굴색은 점점 노랗게 변해가고...
침대는 왜 이리 딱딱한지 이리뒤척 저리뒤척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긴장과 더불어 낯선 환경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럴 줄을 몰랐는데, 이럴 수가 없는 건데
어떻게 하다가 내가 이런 환경에 처한 건가.
이미 나에겐 병원이 아니라
창살없는 감옥이었다.
우린 건강할 때 집에서의 편안함과
아늑함을 잘 모른다.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가 후회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감사해야 한다.
현재의 환경에 대해 만족하고
매사를 행복으로 승화해야 한다.
우리에겐 아직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볼 줄 아는 눈도 필요하나
이미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은
더욱 필요하다.
행불행이 여기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의사의 호출을 받았다.
진료실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의사가 내시경을 입 안으로 삽입하더니
마구 찔러넣기 시작했다.
너무 아파서 '컥컥'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며칠간 침을 삼키기 거북할 만큼
목이 많이 아팠다.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편 147:3)
왜 날 더 큰 병원으로 데려가려는 건 지...
의사는 아내에게만 비밀로 말했다고 한다.
조직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췌장암일 가능성이 많다고.
이것은 분명히 췌장암이란 말과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
쉬쉬하며 이 사실을 함구하고 있었다.
아니, 그 흔하던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이런 아내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고난의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내야 하는데...
내 소식을 들은 노회 목사님들과
지인 목사님들이 많이 찾아와서
위로와 기도를 해주셨다.
지금도 그 사랑을 잊지 못한다.
심지어 몇 번씩 병문안을 해주신 분들도 계신다.
그런데 아내가 몇몇 목사님들께
저명한 의사를 알고 계시면 소개해 달라고
조용히 부탁을 했는가 보다.
나의 심각한 상태를 알고 있었던
목사님들이시기에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고
어느 목사님께서 그래도 실력이 있다는
의사들이 포진해 있는
삼성 서울 병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신 모양이다.
삼성 병원은 진료를 받고 싶은
암 환자들이 많아
금방 예약을 할 수가 없는 병원이었지만
놀랍게도 누군가가 취소를 하여
빈자리 하나가 나온 상황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얼른 예약을 하신 후
속히 그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다.
훗날 집도의를 통해 나에게 해당되는
까다로운 췌담도 암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은
우리나라에서 불과 4, 5곳밖에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만큼 난이도가 높은 대수술이었다.
그런데 H 병원에서는
자기들도 수술을 할 수 있다며
더 큰 병원으로 이동하려는 것을 만류했고
나 역시 교회와 집이 가까운 병원에서
치료를 받겠노라고 하며
굳이 옮기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당시 내 마음은 속히 교회로 돌아가서
매일 3회 드리던 기도회를 회복해야 하고
성도들을 돌봐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기도와 기쁨의 눈물이 젖어있는 교회와
자식 같은 성도들이 너무나 그리웠으며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아픔을 더하게 했다.
그때야 생각해 보니 확보된 건강이
사명 감당의 지렛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만일 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을 경우
혹시 내가 실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찔한 상상을 해 보기도 한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태복음 8:17)
삼성 서울 병원에서의 암 병동
어쩔 수 없이 삼성 서울 병원으로 올라갔다.
역시 매머드급 병원으로 입추의 여지없이
환자들과 보호자들로 붐볐다.
내가 말로만 듣던 삼성 병원에
환자가 되어 실려 오다니
마치 다른 세계로 온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굴지의 삼성 병원은
크게 일반 병동과 암 병동으로 나뉜다.
그땐 일반 병동으로 온 환자들이
많이 부럽기도 했다.
암이 아닌 병은 병도 아니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특히 암 병동 바로 옆에 있는 장례식장이
눈에 많이 거슬렸다.
사실 같은 암이라도 위암이나
간암에 걸릴 것이지
하필이면 죽음을 상징하는 췌장암에 걸리다니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하는
절망감이 크게 다가왔다.
그런데 지금은 췌장암에 걸렸던 것이
감사하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놀라는 췌장암 치유 간증만이
설득력 있는 전도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위암이나 간암, 그리고 기타 암은
그래도 생존율이 높아
불신자 전도를 위한 간증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난 췌장암 간증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물맷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면에서 질병은
우리를 더 높은 영적 차원으로 올려주는
하나님의 마차가 될 수도 있다.
이 병원에서 췌장암의 권위자로 일컬어지는
최00 교수를 만났다.
H대학 병원에서 가져온 진료 자료 중
MRI 영상을 보더니 이것저것 설명을 하면서
조직 검사 결과가 없어도
분명히 암이라고 단정했다.
역시 임상 경험이 많은 의사의
정확한 판단이 놀라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은근히 암이 아니라는 말을
기대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최 박사는 2주 후에 수술을 하자고 했다.
그것도 감사한 것이 췌장암 환자 가운데
15~20%만 수술이 가능하단다.
하지만 수술을 받아도 80% 이상 재발을 해서
췌장암이 암 중에 제일 높은 사망율을
기록하기도 한다.
내가 살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치유의 은혜였다.
이 내용은 순서상 다음에 밝히기로 하겠다.
이보다 한참이나 지나서 받게 된
신비한 증표들이 있기 때문이다.
수술을 위한 온갖 검사를 받은 후
일단 가족과 성도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집과 교회로 내려왔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누가복음 7:13, 14)
그곳이 전도의 명소가 된 사연
병원에서 집으로 왔을 때만 해도
그렇게 마음이 힘들지는 않았다.
의사의 말에 비추어 보아
수술을 받으면
쉽게 회복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컨디션은 여전히 안 좋았다
밥맛도 없었고 몸이 많이 피곤했다.
그리고 수술 자국 없는 배는
이것으로 마지막이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아쉬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까지 운동을 하려고 아내와 함께
오산 세마대 독산성 중턱에 있는 평상에 앉아
좋은 공기를 마시며 누워 있기도 했다.
암 환자에게는 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가
좋다는 말도 들었던 터였다.
교회 근교에 이렇게 좋은 산이 있는 것도
감사했다.
그래서 암이 나으면 종종 올라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암에서 살아난 몇 년 후
매주 토요일마다 이 산에 가서
등산객들을 전도할 줄이야.
특히 아내와 함께 암을 묵상하던 평상 자리는
치유 간증 전도의 명소가 되었다.
등산객들에게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라고 하면
마치 한 편의 드라마틱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실감 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반응이 너무나 좋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그리고 이 산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수양관과는
더 가까워서 하나님이 전도를 위한 환경으로
조성해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이 펜션 같은 수양관은
우리 교회 성도들과
목회자 가족들이 다년간 사용했던 곳이다.
그것도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다.
이제는 코로나19를 기점으로
하나님이 나와 아내를 거주하게 하셔서
등산이나 나들이를 나온 많은 사람을 만나
천국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이 지역의 독산성과 서랑 호수는
전도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산상 전도는
벌써 60회가 넘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누가복음 6:19)
췌장암으로 판명 되고...
드디어 삼성 서울 병원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2주 전 검사했던 결과가 나왔는데
결국 예상하던 대로 췌장암이었다.
진료실에 들어가서 췌장암의 권위자인
최00 교수님을 만났다.
그분은 췌장과 십이지장,
담도 촬영 영상을 보면서
장기가 모두 막혀있어 절제를 해야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대수술을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어두운 마음을 품고 입원실로 올라왔는데
맞은편 산이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 번이라도 가보신 분은 알겠지만
삼성 병원은 주변 경관이 수려한 편이다.
한쪽으로는 녹음이 우거진 산이 아름답고
다른 쪽으로는 서울 시내 경관이 아름답다.
그러나 병든 나에겐 조금도 좋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속히 치료를 마치고
암 병동을 탈출(?)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이것은 환경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암 병동에는 많은 환자가 입원해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야위고 창백했으며
별말도 하지 않고 한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암 병동 전체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던 것이다.
병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크게 웃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교회에서 늘 성도들과 함께
오랜 세월 역동적인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매우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그만큼 우리 교회는 예배이든, 기도이든,
전도이든, 심지어 탁구이든
'열심'이 대명사였는데
기본적인 예배 외에는
모든 것이 멈춰지고 말았다.
생기로 가득했던 교회의 분위기가
점점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두가 건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내 탓이리라.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병원에서 불쌍한 암환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소망을 공급해 줬어야 하는데
우선 나하나 살아야 한다는 일념에
전도는 전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비록 목회자였지만 얼마나 부족했던가.
환자들 역시 예수 믿는 목사인 당신이
나보다 더한 췌장암에 걸렸는데
무슨 전도를 하느냐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암이 완치된 지 6년을 넘겨
암병동에 가서 환자들을 전도하는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췌장암 치유 간증과 함께
생명의 복음을 전하면
힘이 없어 자꾸 감겨가는 듯한 눈이
번쩍 뜨이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편 103:3)
주치의의 말 한 마디에서 얻은 교훈
다음 날 아침 일찍 주치의를 비롯하여
여러 의사가 회진을 왔다.
그런데 주치의의 얼굴 표정이 밝은 것 아닌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부드럽고 상냥했다.
환자인 나는 이 모습을 보고
조금 안심하게 되었다.
'아, 괜찮은가 보다. 크게 걱정할 것은
없는가 보다.'
자신의 질병 상태에 대해
극도로 예민해진 환자들은
의사의 태도에 따라
일희일비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암환자가 그렇다.
영혼의 의사인 나도 환경과는 상관없이
항상 밝은 얼굴로 성도들을 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으로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는 목회자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암을 앓은 뒤로는 아픈 이들을 볼 때마다
동변상련의 눈물이 많아지긴 했다.
주치의의 말이 췌장은 마치 순두부처럼
말랑말랑하단다.
그래서 수술도 까다롭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번 수술을 해 보자고 한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마저 묻어있었다.
난 이 말을 듣고 발달한 현대 의학에
적지 않게 감탄했다.
병원에서는 계속 간호사가 들어와
이런 검사, 저런 검사를 많이 했다.
그것은 한밤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밤이고 낮이고 교대로 일하는
간호사들의 노동 강도가 무척 높은 것 같았다.
의사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래도 병원에서 며칠간
꼼짝 못 하고 묶여있는 것이
답답하고 처량하기만 했다.
건강할 때는 외출을 하지 않은 채
단 하루만 집에 머물러 있어도
집 멀미가 날 정도였는데
이런 신세가 되어 병실에 갇혀있다니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건강하게 두 발로 걸어 다니며
맘껏 활보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가.
하지만 현재에 주어진 환경을 잘못 해석하고
낙심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또 다른 비극 아닐까?.
내게 없는 것으로 인하여 불평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매우 필요하다.
난 암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후
작은 일에도 더욱 감사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숨이 붙어있는 지금
내게 있는 모든 것이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의사가 아내에게 만나자고 했단다.
이는 좋은 소식이 아니라
이상 소견이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아내는 이 말을 듣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107:20)
혈관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다.
내가 병실에 누워 있을 때
여의사가 조용히 아내를 불러내어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췌장을 지나는 굵은 혈관이
비정상으로 나왔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의료진도 혈관 영상을 놓고
회의를 하는 가운데
고민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최악의 경우에는
수술마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나같은 경우의 췌장암은
수술 하나도 고난도라고 하건만
혈관까지 이상이 생겼으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경우를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인가?
아내는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신데...
사실 우리 부부는 없는 것마저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여러 번 체험했다.
가난했던 신혼 시절,
서울 방이동에서 단칸방 생활을 할 때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이
88올림픽 공원으로 조성되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온 보상금으로 인해
두 개의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일,
큰딸이 원인균을 알 수 없는 폐렴에 걸려
백약이 무효인 가운데
죽음마저 각오해야 하는 위경의 상태에서
간절한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이
응답의 싸인(sign)을 주신 후
급속한 치유 역사로 살아난 일,
내가 부목사로 사역하던 교회 집사님 부부가
수원 영통 지구에 근린상가 빌딩을 지었는데
한 층을 무료로 제공해 주어
기적같이 교회가 개척된 일,
부동산 업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턱없이 낮은 가격에
거의 줍다시피 냄새나는 하수가 흘러
쓸모없이 버려진 맹지를 샀지만
아파트회사에서 농로를 만들기 위해
70여 미터의 하수구를 모두 덮어주어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건축이 가능했던 일,
아파트 근린공원과 교회로 연결되는 계단을
합법적으로 설치할 수 있었던 일,
개척 3년 만에 자신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물질의 복을 주시면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장로님을 만나
자금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
그분을 통해 수월하게 예배당이 건축되어
교회가 부흥한 일.
또한 모 장로님으로부터
설계도를 무상으로 받게 된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새벽기도 중
하나님께서 주신 시편 81:10 말씀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약속이
성취된 결과였다.
사람의 능력은 전혀 없었고
오로지 하나님께서만
일방적으로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가셨다.
그리고 이조차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불철주야 부르짖어 기도하게 하시면서
진행하신 결과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내가 아파서 죽어갈 때도
의지할 분은 우리 부부와 성도들,
그리고 지인들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췌장암은
곧 사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 간절한 기도로 매달려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쌓아놓은 기도를
받으시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 날 아침 회진 시간에
주치의가 병실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힘들어요? 내가 더 힘들어요.
지금 수술이 아니라 혈관 이상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29)
정상으로 바뀌어 있었던 혈관
혈관에 심각한 이상은 발견되었으나
의료진은 일단 개복 수술을 해 보자는 쪽으로
결정했다.
나는 수술 당일 아침 일찍이
휠체어에 태워져 대기실로 갔다.
그곳에는 10여 명의 암 환자가
와 있는 것 같았다.
큰 병원이라서 그런지
그만큼 수술방이 많았다.
수술을 앞둔 환자들이
얼마나 긴장되고 힘들었을까?
그런데 감사하게도 나에겐
그리 두려운 마음은 없었다.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리면서
담담하게 수술실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여러 명의 간호사가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나에게 수술대로
올라가라고 했다.
작고 딱딱한 의료용 침대였다.
천장에는 큰 조명등만 보였다.
어느 간호사가 내 입에 전신 마취용 마스크를
씌웠고 난 그 즉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7시간 30분가량이 소요되는
대수술이었다고 한다.
깨어보니 중환자실이었다.
아직 온몸이 마취 상태여서
그랬는지 통증은 없었다.
그러나 내 몸에는 여러 가지 호스가
삽입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내와 딸은 수술실밖에서
눈물로 기도했다고 한다.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심히 애타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으리라.
그리고 이것은 다른 것도 아니고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슬픔을 못 이겨 펑펑 울고 있는 아내에게
여의사가 와서 수술이 잘 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하더란다.
특히 이상이 있던 굵은 혈관도
정상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의사로부터 이 말을 듣고
그 사이에 혈관을 만져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남편을 살려주신다는 확신까지 갖게 되었다.
아내 역시 당뇨병을 앓을 때
갓피플 성경 필사 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성경을 몇 번에 걸쳐
쓰고 쓰기를 거듭하다가
완전히 치유를 받았다.
지금 아내는 건강하게 병자들을 위해
치유 기도와 치유 찬양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열왕기하 20:5)
수술 후에 잠깐 안심했던 시간
수술 후 곧 입원실로 옮겨졌다.
삼성 서울 병원은 워낙 환자들이 많아
다른 병원에 비해 속히 자리를 내줘야 한다.
이 점은 큰 병원의 단점 같기도 하다.
지금도 수술실 앞에서 날 기다리던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가장 절박했던 인생의 끄트머리에
바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술 다음 날부터 간호사는
링거대를 붙잡고 자꾸 복도를 걸으며
운동을 하라고 종용했다.
그래야만 수술 부위가 빨리 아물게 된단다.
그리고 건물 자체도 환자들의 걷기 운동을
위해 육상 경기장처럼 타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도 아내의 재촉에 따라
부지런히 돌고 돌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아파서 운동을 하지 말고
건강할 때 했어야 했는데
불철주야 기도만 한답시고
자리에 앉아있었으니
그사이에 큰 병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고 하던가?
그래서 지금은 거의 매일 30분
실내 자전거 운동이라도 하며
건강을 다지고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걸으면서
기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사료된다.
수술 후에 금식은 계속 되었다.
그러니 얼마나 체중이 급속하게 줄었겠는가?
일단 수술을 하면 비만이나 과체중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시에 난 15kg 이상이 줄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지금도 전도를 할 때마다
사람들이 살 오른 내 얼굴을 보며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한다.
그럴 줄 알았으면 해골같이 마른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놓았어야 하는데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는 정신적으로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훗날 사진관에 가서
장례할 때 사용할 영정 사진만큼은
찍어 놓은 적이 있다.
수술 환자들 가운데는 사진 촬영 결과
잘못된 곳이 발견되어
재수술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한 번 암 수술을 받기도 힘이 드는데
또 수술을 받아야 하니
참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짐작을 했다.
수술을 한다 해도 반드시 산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바라기는 암에 걸리지 않도록
극히 조심하여 건강을 도모하시길 바란다.
다행히도 난 1차 수술에서 괜찮았는지
다시 부르지 않았다.
조금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회진 시간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주치의의 표정을 보니
많이 어둡게 보였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태복음 11:5)
이미 전이된 암세포
"암세포가 이미 임파선에 전이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암 치료만 받아도 되는데
방사선 치료까지 받아야 합니다."
난 주치의의 이 말 한 마디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초기 췌장암이라서
수술을 받기만 하면
별문제가 없이 회복될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췌장암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조금 후 다시 레지던트로 보이는
의사 두 명이 들어와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수술은 했지만 생존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주치의보다 더 충격적인 이들의 냉정한
말 앞에서 머리 속은 하얗게 변했고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심장마저 쿵쾅거리며
정신을 못 차리게 했는데
이는 곧 사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와 아내는 생애 처음으로
조금의 잠도 못 이루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때는 천국도 전혀 생각나질 않았다.
그대신 음산한 죽음의 공포만이
병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누가복음 4:40)
방사선 치료를 포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 병원에서는
수술한 지 2일 만에
속히 퇴원할 것을 종용했다.
수술 부위 상처는 다른 동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란다.
하지만 췌장암 환자인 나를
환영해 주는 병원은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삼성 병원은 치료를
다 못 해줄 정도였으나
많은 암 환자가 자기 입원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선망의 병원이었다.
그래도 병원 현관 벽에 걸려있는
큰 게시판을 보니
우리나라 암 환자 10명 가운데 1명은
이 병원을 이용했다는 문구가 있었다.
명성만큼은 자부심이 강한 병원으로
비추어졌다.
하지만 난 기독교 병원으로 옮기고 싶었다.
어려운 수술을 해준 것은 고마웠지만
환자에게 필요한 위로와 격려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정신적으로 삭막함을 느끼는
마치 공장형의 병원 같았다.
그러니 정서적으로 불안한 암 환자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며 치료를 받겠는가?
물론 넘치는 환자들로 인해
의사들에게도 적지 않은 고충은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을 앞둔 나는
그래도 예수님의 사랑이 깃들어있는
기독교 병원으로의 이동을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크리스천 의사와 간호사로부터
신앙적인 위로를 얻으며
치료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포에 소재한 모 병원에
문의를 한 적도 있었지만
친구 의사가 이 사실을 알고
그냥 시설과 치료 환경이 좋은 삼성 병원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다.
결국 이마저도 포기하고
다시 삼성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
영혼을 치료하는 병원인 교회도
'따뜻한 관심'이 최고인 것 같다.
사실 큰 교회나 대형교회는
이런 면이 많이 부족한데도
사람들이 허상에 사로잡혀
그곳으로 몰려드는 것을 보면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담임 목사님이
자기를 기억조차 하지 못 할 텐데
제대로 기도를 해줄 수 있겠는가?
이는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와 반면에 작은 교회는 성도들이
얼마나 목회자의 사랑과 기도를
많이 받겠는가?
우선 부담스럽다는 선입견을 거두고
좀 더 내 주변의 지체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겠다는
믿음의 거룩한 욕심이 있었으면 좋겠다.
퇴원을 하기 전 방사선 치료실로 내려갔다.
의사는 매일 1회 36회의 방사선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그때 내가 살던 집은
기흥 삼성 반도체 회사 부근
신영통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 일원동에 있는 병원으로
통원 치료를 하러 다니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결국 어차피 생존 가능성이 많지 않은데
고생스런 방사선 치료는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의사들로부터
적지 않은 핀잔을 받기도 했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
높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것은 아닐까?
아뭏든 인간적으로는
무척 어리석은 결정이었으리라.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로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예레미야 31:25~26)
잘 아물지 않던 수술 부위
겨우 동네 병원을 찾아서 수술 부위가
아물 수 있도록 치료를 받았지만
잘 낫지 않고 계속 진물이 흘러나왔다.
항암 치료를 하려면
상처가 모두 아물어야 가능하다는데
이것도 큰 고민거리였다.
그럴 때마다 삼성 병원에서
이 부분을 충분히 치료 받고 나왔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더 깊은 한 숨을 쉬게 했다.
하지만 병원의 조기 퇴원 조치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게 환자 많은 큰 병원의 숨겨진
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고용량 비타민C 링거 주사를
맞고 있었던 판교 사랑의 병원의 외과 의사
박 원장님이 이를 알고 자신의 수술 경험을
살려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진물이
관을 통해 흘러나오도록 치료를 해주셨다.
놀랍게도 그때부터 진물이 마르기 시작했고
수술 부위가 아물어 갔다.
그분은 외과학 박사로서
의료 선교 사역을 위해
외국에 나가 헌신하신 바도 있으시다.
박 원장님은 내가 한창 힘들어할 때
정신적으로 큰 위로와 격려를 해주신
고마운 분이었다.
나에게 절대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며
병이 낫는다고 큰 소리로 공언까지 하셨다.
다른 병원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이 말에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기독교 병원을
더욱 선호하게 된 이유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라기 4:2)
내가 죽음을 묵상하며 힘들어했던 이유
수술 부위가 아물고 드디어 4차에 걸쳐
12회의 항암 치료가 결정되었다.
매주 1회씩 3회를 받고
한 주 쉬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항암 치료에 들어가기 전
간호사의 이 한마디가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항암 치료를 받아도
췌장암에는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설령 죽을 때는 죽더라도
왜 미리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난 이때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정신적으로도 긍정의 사고가
질병을 이기는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은가.
이후로 병원에서 듣게 된 의사와 간호사의
무서운 통고(?)로 인해 삶의 의욕을 잃은 채
한동안 계속 죽음을 묵상하며
힘든 기간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극복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기울이며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영혼의 의사라고 할 수 있는 목회자도
절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은 신이 나야
모든 활동이 가능한데
이런 영적 에너지가 소멸되면
아무것도 하기 싫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직장생활이 아니다.
그만큼 타율성보다는 자율성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난 항암 치료의 무용론에 빠진 후부터
밤마다 암에 걸려 헤매는 꿈을
하루도 거르지를 못했고
거의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열왕기하 13:21)
병원의 작은 교회
대개 항암 치료가 환자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구토가 나고, 밥맛이 없고,
머리털이 빠지는 것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난 너무나 수월하게
항암 치료를 받았다.
구토도 나지 않았고,
머리털도 빠지지 않았다.
단지 몸이 조금 피곤하다는 것과
밥맛이 없는 정도였다.
그러나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는
매우 역겹게 느껴져서
그쪽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내가 짐작하기에 항암 치료의 고통을
조금 덜게 된 이유는
정기적으로 고용량 비타민C 정맥 주사를 맞고
생식을 통해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거의 냄새가 없는 생식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항암 치료는 예상외로
쉽게 받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삼성 서울 병원 지하에는
10평 미만의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성당과 법당도 있었다.
난 병원에 갈 때마다
진료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긴장하며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예배당으로 가서 기도부터 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겠는가.
내 육신은 중병으로 인해 지쳐 있었지만
예배당에서의 기도를 통해
밀려오는 불안감을 많이 해소할 수가 있었다.
기도하는 그곳이 바로 내 마음의 피난처요,
내 몸이 포근히 안길 수 있는
따스한 주님의 품이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이사야 30:26)
갖가지 일로 어려웠던 투병 생활
그런데 자꾸 빈혈이 발생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노란색 하늘이 빙빙 돌아가면서
힘없이 쓰러지려 했다.
참으로 한심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났다.
이는 단순한 빈혈이 아니라
암으로 인해 몸의 균형이 깨져
점점 발생 빈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서
많이 불안했다.
또한 무릎에 통증이 생겨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
119 구급차에 실려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다.
진통제를 맞고 날이 새기까지 응급실에
누워 있는데 처량한 생각만 들었다.
이것도 췌장암으로 인해
더 통증이 멈추질 않는 것 같아
파도처럼 덮쳐오는 절망에 떠밀려
깊은 한 숨을 내쉬며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췌장암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이때는 조금도 졸립지를 않았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사는 방법보다는
죽음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오히려 이로 인해 우울한 마음만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디에서 꿈의 암 치료라고 불리는
중입자 치료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 중입자 치료는 효과는 좋지만
막상 우리 나라에 이를 위한 기계가
한 대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불과 일본과 독일 등
몇 나라만 보유하고 있는데
실제로 중입자 치료를 받기 위해
해외로 발길을 돌리는 암 환자도 많았다.
지금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이 시설이 들어서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중입자 치료 한국 지부에 연락을 했더니
대뜸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는 않았느냐고 물었다.
임파선에 전이되었다고 하자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암세포 전이 환자는 중입자 치료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출애굽기 23:25, 26)
중입자 치료도 불가능하다
이젠 암을 고칠 길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내겐 중입자 치료가 마지막인 것 같았는데
전이된 췌장암은 그마저도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하니 더는 의학적인
가능성마저 굳게 닫힌 셈이었다.
물론 이 당시 이롬생식은 먹고 있었지만
생식으로 암을 고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게 느껴졌다.
그래도 밥맛이 없고 몸은 말라가는데
궁여지책으로 생식이라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늘 죽음의 늪에 빠져서 살았던
나로서는 하루하루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건강한 사람과는 생각이 달랐고
행동이 달랐다.
내가 언제 웃었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그리고 몇 개월째 TV도
시청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기독교 방송에서 목사님 한 분이
설교를 하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문득 저분은 건강하게 말씀을 전하시건만
나는 병이 들어 설교도 못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지 못하는 성도들 역시
불쌍하게 생각되었으나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주일 오전 예배는
부목사님이 설교를 하시고
주일 오후 예배는 명설교로 유명하신
목사님들의 영상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게 했다.
그러나 얼마나 답답하고 허전했으랴.
목사가 죽음을 앞두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절망에 빠지게 된다.
결국 가정도 놓고 가야 하고
이에 더해 교회마저 손을 떼고
영원히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으면 그만인데 우습게도 나는
내가 세상을 떠나면 가족과 성도들은
어떻게 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내게 너무 믿음이 없었을까?
하지만 이 심정은 죽음의 실존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조금도 짐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죽음은 이러니저러니를 논할 수 있는
감상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끌어가시겠지만
실제로 목사가 사망한 후 어려움을 겪는
교회를 적지 않게 보아오기도 했었다.
특히 목사의 청빙 문제가 그렇다.
우선 난 아내와 함께 사진관에 가서
장례식에 사용할 영정사진부터 찍어놓았다.
이때 마지막 사진을 담고 있는
야윈 얼굴의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쓰라렸을까.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마태복음 8:3)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슬픔 가운데 영정 사진 촬영을 마치고
병점 소재 늘 사랑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평상시에는 종종 들러 찬송가를 불러드리고
함께 기도하며 여기저기 몸을
주물러드리기도 했지만
내가 아픈 후에는 오랜만에 뵐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 무섭다는 췌장암에 걸린 아들로...
다행히(?) 이때는 어머님이 연로하셔서
정신이 맑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로 인해 어머님은 날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셨다.
나는 이런 어머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폭포수와 같은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의 품에 얼굴을 묻고 한없이 흐느끼며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가슴을 쥐어짜며 한탄해야만 했다.
"이 못난 불효자식이 어머니보다
더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하다니요."
호랑이라도 나올 법한 두메산골에서
땅을 파며 힘들게 생활을 하시던 어머니,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39세의 나이에 혼자 되셔서
5남매를 책임지고 먹여 살려야만 했던
우리 어머니,
작은 논밭을 팔아 서울로 올라와
단칸방에 터를 잡고 빌딩 청소를 하며
많이 고생하셨던 나의 어머니,
목회자가 된 아들로 인해
그렇게도 행복해 하셨던 믿음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놔두고
먼저 곁을 떠나야만 했던 난
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회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실 이때는 천국에 간다는 기쁨보다
곧 주변인과 이별을 할 수밖에 없다는
좌절감이 내 마음을 더욱 크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항암 치료 중이었는데
증상은 가벼웠지만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
수면제를 복용해야 했고
정신적으로도 안정적이지를 않아
중얼거리듯 의미 없는 말도 여러 번 반복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사도행전 19:11, 12)
죽음의 공간이 빚어낸 슬펐던 날의 추억
이렇게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로
집에 누워 있을 때 많은 고통을 겪었다.
전혀 목회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집 안에 머물러 있노라면
온갖 상념이 나를 한없이 가라앉게 했다.
특히 췌장암이라는 무서운 병이
정신을 지배하다시피 하여
숨이 막힐 듯한 공포까지 안겨주었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성경도 묵상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며
매일 두 번 예배를 드렸지만
우울한 마음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부활동을 좀 더 많이 했더라면
조금 나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그땐 완전히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사실 건강을 회복한 지금도
실내에만 머물러 있으면 잡념에 빠져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건강할 때는
하루만 집에 머물러 있어도
집 멀미가 날 정도로 활동적인 삶을 살았다.
거의 매일 기도 대원, 전도 대원과 함께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활발했던 과거의 나로
되돌아가게 해 주셨다.
단, 인생을 보는 눈과 살아가는 내 모습이
많이 달라졌을 뿐이다.
비록 거의 나홀로이지만
밖으로 나가 전도를 할 때가 많고
이로 인해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만큼
넘치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다.
요즘 따라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음을
절실히 느끼곤 한다.
말씀의 기쁨, 찬송의 기쁨, 기도의 기쁨,
봉사의 기쁨, 교제의 기쁨 등이 있겠으나
그 어떤 기쁨도 전도의 기쁨을
대신할 수는 없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노방 전도를 감당했던
몇 년간은 내 생애 최고의 날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감사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전도도 할 수가 없었고
오직 내게 찾아온 췌장암만 묵상하고 있느라
정신이 반쯤은 나간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만나기가 싫었고
전화 통화도 하기가 부담스러웠다.
또한 내 얼굴마저 전형적인 중병 환자의 몰골로
흉하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마른 몸에 갈비뼈는 튀어나왔으며
황달이 찾아온 눈은 노란 색깔을 띠고 있었다.
이에 더해 근육이 모두 소실되기까지
하루 종일 자리에 누워있기만 했다.
딸들은 이런 아빠를 보며
이젠 살아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가족들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겠는가?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도행전 3:6)
질병과 사람으로 인한 상처
난 이렇게 죽느냐 사느냐로
힘들어하고 있는데
같은 동네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위로의 전화인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고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내용이었다.
"목사님이 돌아가시면 우리 교회와
합병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땐 이미 내가 췌장암에 걸렸다는 소문이
주변 지역에 퍼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췌장암은 곧 죽음을 의미하므로
목사님이 속히 그런 연락을 하신 모양이다.
그래서 가끔 난 방정맞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겐 췌장암이 비극이었지만
어떤 사람에겐 희극이 되었을까?'
훗날 합병을 하자고 하는 교회는
깨어지고 말았는데
안타깝게도 목사님이 여성도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심지어 이상한 이야기도 들려왔다.
주변인 중에서 내가 살아난 것을
모두가 좋아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의 시기심과 질투심은
어디까지 가는 걸까?
지금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마음도
많이 아파 울컥하기까지 하다.
이런 일을 통해서 누가 어려움을 당하면
온갖 추측을 하여 빗나간 해석을 한다거나
다른 목적을 갖지 말고
진심으로 아픔을 함께하고
위로해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트라우마(trauma)로 인해
우리 교회가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억측에 빠지기도 한다.
이 역시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짐작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는
일언반구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에도 조건 없는 선행을 베푸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많이 필요하리라.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 교회는 아굴라 브리스길라와 같은
부부의 헌신을 통해 무료로 개척이 되었고
생각지 못하게 두 분의 장로님의 헌신으로
너무나 수월하게 성전이 건축되었으며
부흥이 되어 선교사님들을 위한 무료 선교관,
목회자 가족을 위한 무료 휴양관,
심지어 목회자를 위한 무료 교회 묘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개척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를 해주고 수고하시는 담임 목사님께는
조금의 선교비도 드렸다.
이 모두가 성도들이 아름답게 헌신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내게 약간의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
내가 무엇을 자랑하거나
누구를 탓할 수가 있으랴.
단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진정한 이웃 사랑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마가복음 5:41)
나의 선한 사마리아인
날이 갈수록 투병 생활의 고통은
점점 가중되어 갔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심정을
방불케 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천국을 소망하며 기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내 믿음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었는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건강할 때는 천국을 전제로 한 죽음 예찬론을
거리낌없이 펼쳤던 내가 아니었던가.
특히 장례 예배를 집례하면서
담대하게 천국을 강조했던 나 자신이었다.
실제로 내 마음도 이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죽음을 앞두고 보니
아직까지 천국 문은 전혀 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이 세상에서 살 길로 들어가는 문만
찾기 위해 애를 썼는데
그문이 전혀 보이질 않는 게 문제였다.
사실 하나님이 생명의 문이신데...
이렇게 무기력하게 헤매고 있을 때
온 힘 다해 나를 위로해주신
고마운 목사님 한 분이 계신다.
총신대학원 동기 이진규 목사님이시다.
그분은 거의 매일 전화와 메시지로
내가 삶의 끈을 놓지 않도록
강하게 독려해 주셨다.
나 역시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죽음의 늪을 벗어나
부활의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이때는 통화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길게 느껴지질 않았다.
외로웠던 난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목사님은 날 위해 기도와 격려의 사랑을
쏟아붓느라 얼마나 힘이 드셨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희생이다.
훗날 내가 완치 판정을 받은 후에 말씀하시는데
나를 향해 살아날 것이라고 말은 했지만
속으론 생존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주변인들의 환자를 향한
따뜻한 격려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독수리 5형제로 일컬어졌던
총신의 같은 반 출신 목사님들 역시
날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셨다.
난 그분들의 기도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우리는 한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애굽기 15:26)
보고 싶은 이정근 목사님
내가 암에 걸렸을 때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만나
가깝게 지내던 이정근 목사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곧 우리 집에 오셔서
기도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이 목사님이 그만 피부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비극적인 소식이 내 귓전을 때렸다.
난 이로 인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고인의 별세를 애도하는 마음도 컸지만
나 역시 얼마가지 않아
그분의 뒤를 따라가겠구나 하는 슬픔도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목사님은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나와
육군 군종 목사로 복무를 하신 뒤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경성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고 계셨다.
성격이 활달하셨고 지식도 깊어
사모님이 공부하신 동화고등학교에서
교목으로도 일하셨다.
나는 이보다 일찍 그분이
군목으로 근무하실 때부터 알게 되었는데
몇 년간 전혀 소재를 모르고 지내다가
교육대학원 입학 동기로
오랜 후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어쩌면 필연적인 만남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늘 함께 붙어 다녔다.
그러므로 나중에는 호형호제할 만큼
친밀한 사이가 되어
서로 조언을 구하며 격려하는
둘도 없을 만큼의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분은 개척 후 목회를 신실하게 잘하셔서
200여 평의 교회 부지를 매입하고
단층 규모로 작은 건물까지 짓는 등
행복하게 사명을 감당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나역시 이 교회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부지런히 왕래했고
심지어 부흥회까지 인도하기도 했다.
그분도 예장 통합교단에서
이름있는 부흥사로 활동하시던 터였다.
그런데 이 교회가 갑자기 남양주 신도시
개발 지구로 수용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분과 나는
경기도 토지 공사를 상대로
엄청난 투쟁(?)을 했다.
이런 상태로는 신도시에서
예배당을 건축할 수가 없으니
건물을 지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실제로 그 교회는 부채마저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시의원과 경기도지사를 찾아가
여러 번 부탁을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어
나중에는 각 기독교 방송과
신문사의 기자들을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 불러서
몇회에 걸쳐 기자 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 가운데 일부는
우리 교회에서 부담한 바 있다.
사실 그때까지 각지역마다
신도시로 개발되는 과정에서
12,000여 교회가 건축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
터무니없이 적은 보상금만 받고
쫓겨나다시피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만큼 땅과 건물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으면
자리 잡기가 어려운 곳이 신도시였다.
하지만 우리 둘은 한국 교회를 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추진해 갔다.
당시 우리에게는 신도시 개발 지역의 교회마다
정부의 충분한 보상을 받고
그 지역에 견고히 세워져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하자는 결의로 충천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이분이 피부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연락이 왔다.
그동안 건강을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해오셨는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결국 얼마 후에 더는 견디질 못하시고
먼저 천국으로 떠나가셨다.
그동안 교회 문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셨을까.
나는 어쩌면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려고 했던 우리 모두가
나란히 치명적인 암에 걸리는
비극을 맞았을까 하는 비통한 심정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우리가 한국 교회를 위해
온 힘을 다하기로 했는데
굳이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겪게 하시다니
그야말로 무조건 감사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난 그때를 기점으로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범사에 감사하려 애쓰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분은 지상에서의 신도시는 못가셨지민
천상에서의 신도시, 천국으로는 들어가
무거운 세상 짐을 모두 내려놓고
완전하고 영원한 평안을 누리게 되었으니
어쩌면 영적으로는
더 나은 축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전도를 하면서
전도 대상자에게 "천국!", "천국!" 하는 이유도
성경은 물론 이런 경험을 근거로 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우리 교회가
신도시 개발 예정 지구로 수용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이를 미리 짐작하고
어느 정도 종교 용지와 건물을
확보해 놓은 상태인데
충분히 건축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심히 전도하다가 천국에 가서
상급을 받는 것이다.
보고 싶은 이정근 목사님도 다시 만나
얼싸안고 춤을 추는 그 날이 반드시 오겠지.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예레미야 33:6)
잊을 수 없는 안종찬 목사님의 치유 기도
내가 췌장암으로 인하여
한창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오래 전 우리 교회에서
부 교역자로 사명을 감당했던
안종찬 목사님 부부의 방문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목사님은
우리 교회 개척 당시 총신대학원에 다니며
신실하게 사명을 감당해줘서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던 분이었다.
얼마 있다가 오산으로 개척을 떠났고
잠깐 선교비 협력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서 왕래가 뜸하던 차에
내가 아프다고 연락을 한 적도 없었으나
때를 맞춰 우리 집에 오시게 된 것도 신기했다.
그리고 당시 안 목사님은 치유의 은사를 받아
병자를 고치는 사역에 전념하고 있었다.
군포에서 개척 교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목사님과 사모님은 몇 개월에 걸쳐
매주 2회 지체하지 않고 달려와
질병으로 스러져가고 있는 나를 위해
온 힘을 다해 기도해 주셨다.
사실 내가 얼마 못 가서 죽을 가능성이 많아
이런 정성도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데
조건 없는 사랑과 사명이 아니면
있을 수가 없는 헌신이었다.
마침 안 목사님은 고향이 같았고
심지어 돌담 하나로 이웃하여
어릴 적 형 동생으로 자라 목회자가 된
막역한 관계이기도 했다.
이분들의 간절한 치유 기도는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당시는 투병 생활 중 가장 힘들고
연약할 때였기 때문이다.
특히 안 목사님은 강력한 방언 기도와
영몽을 통해 내게 새 힘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분은 1년 365일 교회 강단에서 기도하며
잠을 청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리 집에 와서
영몽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리 고향 집 지붕 위에
큰 칼을 찬 천사가 서 있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붉은 황토 흙으로
덮여있었고 무성한 소나무가
가득 심기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안 목사님은 이로 보아
분명히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이니
건강을 회복하시면
병자들을 위한 치유 기도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교회도
새롭게 단장을 해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 후 우리 교회가 신도시 개발 예정 지구로
수용되었으니 정말 맞는 내용이기는 할까?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 말이 도무지 믿겨지질 않았다.
우선 당장에 죽어가는 내가 어떻게 살아서
병자들을 위해 기도까지 해준단 말인가.
인간적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병이 낫고 난 후
성령께서 두 가지 사명을 주시는데
대면 전도와 비대면 SNS 전도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과
유튜브로 병자들을 위해
치유 기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3년이 넘도록 이 사명을 감당하고 있고
32개 언어를 번역 통역하여
췌장암 치유 간증 전도 영상을
70여 개 나라를 대상으로
각 나라 방송국 뉴스 영상 댓글란에
붙여넣기 전도를 한 결과
지금까지 87,000여 명의 세계인이 시청을 했고
좋아요 표시도 많이 보내왔다.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 수용 인원이
66,700여 명이라는데
가끔 전도 받은 인원을 생각해 보면
꿈같이 느껴져서 감사하기도 하다.
그 외 페이스북과 메시지로도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 왔다.
그리고 매주 4, 5회 길거리에서, 음식점에서,
병원에서, 마트에서, 학교에서,
자전거 도로에서, 산에서,
전철에서의 전도를 통해
2, 300여 명의 불신자들을 일일히 만나
예수 천국을 증언하기도 했다.
또한 하나님은 생각지 않게
<C채널 힐링 토크 회복 플러스> 방송에
출연하게 하셔서 치유 간증 전도의 사실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인도하셨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아플 때 환자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운지 뼈저리게 느낀 바
동변상련의 심정으로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며
매일 간절한 심정으로 치유 기도를 해주고 있다.
벌써 169 주차 연인원 3, 500여 명이 된 것 같다.
종종 불신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데
이조차 전도로 연결되는 것 같아 기쁘다.
현재 페이스북과 수만 명이 가입된
약 60개의 단톡방에도 전도 후기를 써서
발송하여 전도를 향한 주님의 대변자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전도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전도자가 되는 것은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피할 수가 없는 큰 과제이기도 하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오히려 육신적으로도 편하고
정신적으로도 평온할 텐데
예전과는 달리 워낙 역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요동치는 시험의 파고를 헤치고
전진하는 것 같아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을 정돈하고 제어하느라
매우 조심스러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실 이 두 가지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영적인 증표가 주어지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갈등과
흔들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행히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에게 확실하게 남는 것은
천국밖에 없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죽음의 심각한 고통을 맛보았던 나는
늘 죽음 준비를 하며 사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천국에 가고 싶은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고 있다.
오직 다시 오실 우리 주님께만
큰 영광을 올린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8:13)
정용식 목사님의 영몽 이야기
그 후 또 다른 치유의 싸인(sign)이 있었다.
내가 판교 사랑의 병원에서
고용량 비타민C 정맥 주사를 맞고 있을 때
김은자 사모님이 병문안을 오셔서
남편 되시는 정용식 목사님이
며칠 전 나에 대한 영몽을 꾸었는데
독수리 5형제 친구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계신 곳에
내 병이 다 나았다며 환한 얼굴을 하고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정용식 목사님은 총신대학원 동기이시고
독수리 5형제 역시 가까운 동기 목사님들의
가족 같은 모임이었다.
그러나 난 기분은 좋았지만
이 꿈 내용이 잘 믿어지질 않았다.
그만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헤매던
내 믿음이 많이 피폐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체중마저 대책 없이 감소하여
광대뼈가 튀어 나올 만큼
얼굴이 홀쭉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정 목사님은 매우 영성이 깊으셨고
영몽의 은사가 있으셔서
그분이 꾸신 꿈은 거의 모두가
들어맞는다고 하셨다.
결국 이 꿈대로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고
다시 독수리 5형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웃음으로 교제하며 기쁨의 교분을 나누고 있다.
당시 눈물의 기도로 애타게 부르짖으신
최상열 목사님과 한길환 목사님,
그리고 사모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또한 기도하는 다른 권사님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목사님을 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며 격려를 계속하셨다.
이를 보면 내가 가장 믿음이 약했던 던 것 같다.
20년이 다 되도록 거의 매일 3시간 이상
기도를 해왔다고 하면서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믿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을까?
지금 생각해도 죄송하기만 하다.
단지 건강할 때 노방 전도 시늉을 했던
그 모습과 우리 교회 전도가 아닌
개척 교회 순회 전도를 기억하시고
부족한 나를 췌장암 치유 간증 전도로
사용해 주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때 다리 질병으로
의사가 절단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통고를 했지만 교회는 안 다니면서도
약을 먹을 때마다 우리 집과 더 가까운
부처님이 아니고 그냥 기독교의 하나님께
오랜 날 기도했는데 통증이 극심했던 다리가
온전히 나았던 기억도 있다.
군인교회에서 사역할 때
곧 숨을 거두시는 할머니를 살려달라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도록 간구했고
놀랍게도 그분이 다시 회복되셨던 추억,
큰딸이 흔치 않은 종류의 폐렴으로
백약이 무효인 상황에서
간절한 눈물의 기도로 응답을 받은 후
건강이 급속히 좋아졌던 점 등,
하나님께서 병자들을 위한
치유 기도자로 사용하시려고
미리 준비시키지 않으셨나
막연한 짐작을 해 보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주제가 넘은 생각이 아닐까
겸연쩍어지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어쨌든 나보다 믿음이 좋은
주변인들의 기도를 통해 췌장암에서 살아나
전도와 치유 기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으니
넘치는 은혜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마가복음 5:34)
정상 판정을 받던 그날의 감격
드디어 정해진 그날,
삼성 서울 병원에 가서
검사 결과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의사가 지시했던
36회의 방사선 치료를 받지 않았으니
나를 향한 병원의 태도는
싸늘하기가 그지없었다.
유튜브 영상을 보았는데
방사선 치료의 장단점이 있었고
나 역시 생존 가능성이 별로 없는 췌장암에
방사선 치료가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까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내게 새로 개발된
췌장암 실험 약을
무료로 먹어볼 것도 제의했으나
이마저도 거부했다.
그대신 판교 사랑의 병원에서
고주파 온열 치료로 이를 대신했다.
비록 의학계의 표준 치료는 아니었지만
목사이면서 암 전문의인
황성주 박사의 지론을 따라
고용량 비타민C 정맥 주사, 미슬토 주사,
자닥신 주사, 고주파 온열 치료 등
통합 의학을 병행했다.
그날 나는 이미 심신이 지쳐 있어서
병원에 가질 못하고
아내와 여집사님들만 다녀왔다.
그중의 한 사람은 기도 시간에
어디선가 손이 나타나
나의 환부를 어루만지면서
치유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생식까지 먹게 하는 등
지극 정성 나를 돌봐주셨던 분이었다.
그런데 이들 앞에서 의사는
내 검사 결과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고 한다.
혈액 종양 수치가
지극히 정상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원래 정상은 36까지인데 12였으니
전혀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암세포가 전이되어 있었던
임파선(림프절)도
아주 깨끗하게 되어있었다.
이것을 본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내에게 자연식품을 먹고 있느냐는
질문을 했단다.
원래 삼성 병원에서는 생식과 같은
자연 식품은 간에 무리를 줄 수 있으니
절대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의사가 자연식품을 먹고 있느냐는
질문까지 하다니 참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결국 생식의 효능을 인정한단 말인가?
어쨌든 의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그런 반응을 보였는가 보다.
사실 난 췌장암을 앓기 시작하면서부터
부지런히 매일 두 끼 생식을 먹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반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질병,
생식으로는 고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가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
정말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집에 돌아온 아내와 성도들로부터
정상이라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우린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서로를 얼싸 안고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반복해서 외쳤다.
정말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아온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 간증 전도와 치유 기도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살려주신 것은 분명하며
특히 황성주 이롬생식을 먹게 하셔서
나쁜 음식으로 병들어 가는 현대인을
창세기 1:29에 근거한
성경의 식단으로 바꾸게 하는데
일익을 감당하라는 세 번째 사명을
더해 주신 것 같아
이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생식도 인간의 몸을 위한
'먹거리 복음'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주체할 수 없는
식도락에 빠져 생식에 무관심한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좋은 줄은 알면서도
굳이 먹지 않는 게 그 실태 중의 하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암이
먹는 것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인데...
요즘 잘 먹는 만큼
암과 기타 질병에 잘 걸린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내 권면에 귀를 기울여
생식을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생식은 암만이 아니라
인체의 손상된 DNA를 회복시켜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이있다는 것을
황성주 박사의 <생식 Life> 책을 통해서도
잘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주시고
만 6년이 넘도록 건강하게 하셔서
왕성하게 치유 간증 전도와 치유 기도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지금도 몸의 컨디션이 최고조인 상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마가복음 7:34, 35)
정상 판정 후의 전도와 갑작스런 장출혈
혈액 종양 내과 의사로부터
정상 판정을 받은 나는 너무나 감사 감격하여
이때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간증하며
적극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호도 재발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내 췌장암을 고쳐주셨으니
재발을 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당장 정상이 되었다고 해도
췌장암은 모든 암 가운데
최고의 재발률을 기록하는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인데
너무 배짱(?)이 좋았던가?
그래도 믿음의 힘인지
아무런 염려가 되지 않았다.
한창 아플 때는 들쭉날쭉했던 내 믿음이
이렇게 강해지다니
참으로 가늠할 수가 없는 게
인간의 믿음인가 보다.
사실 오래 전 거의 돈 한 푼 없이
성전 건축을 감행한 것을 보면
나는 무모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 같기도 하다.
이때는 교회 개척 3년째라서 성도 수도 적었고
건축 헌금을 기대하지도 않았으며
단지 기도 벽돌만 쌓으라고 주문했을 뿐이다.
그래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교회 밖의 좋은 헌신자들을 붙여주셔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거뜬하게 건물이 완공되도록
기적에 기적을 더하셨다.
그런데 정상 판정을 받은 뒤 1년이 조금 넘어
갑자기 다량의 붉은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지 않게 심한 하혈을 하게 된 것이다.
내 인생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피를 많이 쏟은 탓인지
그만 실신을 하게 되었고 앰블런스에 실려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가려고 했으나
췌장암 환자는 받아주질 않아
결국 삼성 서울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게 되었다.
이런 나를 본 의사는 아내에게
암세포가 온몸에 퍼졌으니
장례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36회의 방사선 치료를
받지 않아서 의사들에게 미운 털이
잔뜩 박힌 나였다.
그러나 온갖 정밀 검사를 다했지만
췌장암 세포는 전혀 보이질 않았고
임파선도 전이 현상이 없어서
지극히 정상이었으므로
의사도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후 나는 더 신이 나서
열심히 췌장암 치유 간증 전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성격상 무엇을 하든지 시작하기만 하면
앞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전진하는
일편단심의 스타일이다.
그리고 책임감과 성실성도 유별난 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과업 지향형이다.
그러면서도 한번 맺은 인연은 잘 끊지를 못해
많이 힘들어하기도 한다.
(이 글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불편하신 분이 있으시면
널리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다.)
가끔 아내는 나의 이런 성격때문에
하나님께서 전도자로 쓰시는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그만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내 숙명인가 보다.
이와 반면에 나와 많이 다른 아내는
매우 낙천적이고 여유로운 성격이어서
내게 큰 위로와 힘이 되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나는 이후로 전도에 날개를 달고
온 힘을 다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그러나 한참 후에 다시 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사도행전 28:8, 9)
믿음의 증거와 의학의 증거
그런데 첫 번째 장 출혈을
잊어버릴 만한 시점에서
또다시 두 번째 장 출혈이 재발했다.
결국 사이렌을 울리는
119구급대 차량에 실린 채
삼성 서울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췌장암 전력이 있는 환자는
아무리 작은 증상이라도
크게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동안 하나님이 내 병을 고쳐주셨다며
얼마나 열심히 천국 복음을 전하고 다녔는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췌장암 재발 여부를
다시 검사해야 하는
삼성 서울 병원에 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이번에는 심상치 않은 마음이 들어서
검사를 받기 전에
탈출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때는 영하의 한겨울이었고
급한 나머지 엉겁결에 잠옷만 입은 채
이송되었기 때문에 입원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솔직히 당시는 설령 재발이 되었다 해도
굳이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그냥 천국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많은 전도를 하면서 외친 결과가
완전히 뒤집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으로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
사람들 역시 재발한 나를
심히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병원에서 아무리 정밀 검사를 해도
장 출혈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입으로 삼키는
초소형 캡슐 카메라까지 동원하여
샅샅이 조사했지만
아무 데도 의심되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사이 저절로 출혈이 멈추고 말았다.
이로 인해 췌장암이 재발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정밀 검사를 시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감사하게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의사에게 출혈 원인이 뭐냐고 물으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췌장암이 사라진 이유도 몰랐고
장 출혈이 생긴 이유도 몰랐다.
결국 며칠 입원실에 있으면서
환자들만 전도하고 퇴원을 하게 되었다.
특히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암 환자들을 전도한 것은
아주 보람 있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치유의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완치 기간 5년이 되지 않았음에도
정상 판정을 받은 그날부터
부지런히 불신자들을 전도했다는 것이
너무 일렀던 것은 아닐까 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본다.
의학적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전도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정기 검진도 제대로 받질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절대 재발을 하면 안 되었다.
만일 재발을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가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몇 년 간격을 두고
두 번에 걸쳐 발생한
장 출혈로 인해 췌장암 완치가
의학적으로 증명되었고
지금도 몸의 체력과 건강이
청년 나이처럼 좋은 상태다.
이제 완치 만 6년이 지났으며
전도사역 역시 왕성하게 감당하고 있다.
그런데 왜 장 출혈이 발생했을까?
아무래도 변비 생약이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가 유추해 본다.
내가 먹었던 생약 설명서를 보니
사람에 따라 장 출혈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시 복약을 중단했고
그 후론 장 출혈이 일어나질 않았다.
변비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가 된 상태다.
난 이 사건이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전도자인 나를
더욱 확실하게 세우기 위한
은혜의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은 믿음의 증거와 의학의 증거를
동시에 갖추길 원하셨던 것이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누가복음 13:11-13)
치유의 이적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췌장암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를 굳이 살려주신 이유가 뭘까?
물론 전적인 그분의 뜻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무슨 공로를 자랑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은혜요,
쓰임을 받는 것도 은혜일 뿐이다.
그런데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성경 말씀을 근거해 볼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히 심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기 때문이다.
굳이 성경이 아니더라도
이는 만고불변의 법칙이 아니겠는가.
앞서 살짝 언급했지만
난 1997년 새벽 기도 시간에
신비한 은혜 체험을 했다.
갑자기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시편 81:10)
그리고 입이 크게 열려 있는 상태에서
몇 시간 동안 다물어지질 않았다.
이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입을 크게 열어 기도를 할 때
1년여 후 어느 집사님 부부의
무료 빌딩 헌신으로
교회가 개척되는 응답이 주어진 것이다.
그 후에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새벽, 낮, 밤, 매일 세 번의 기도회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개척 3년 만에 순조롭게 성전이 건축되어
부흥하는 은혜를 경험하기도 했다.
굳이 이 내용을 밝히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려 애썼기 때문이요,
둘째는 날마다 기도 생활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특히 췌장암을 치유 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늘 기도의 무릎을 꿇고 있는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비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기도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다른 근거는 전혀 생각 나지 않기 때문이다.
1997년에 "입을 크게 열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받았는데
2017년에 췌장암에 걸렸으니
정확히 20년 만에 발병을 하고
치유를 받았다.
그동안 오직 기도로 목회 사역을
감당해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교회가 성장할수록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어기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더 확대해 갔다.
그리고 변함없는 기도 생활이
순수성과 겸손함을 보존 유지하게 해준다.
실제로 불치병 치유의 이적은
기도 없이는 나타나기가 어렵다고 본다.
부디 질병에 걸린 후 기도하기 보다는
건강할 때도 유비무환의 기도를
쌓아놓길 바라는 이유이다.
그것도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기도보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적용의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한층 균형 있고
건강한 기도로 드려질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받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좋으신 분이시다.
난 췌장암을 치유 받은 후 지금까지
170 주차 연인원 3,500여 명의 병자들을 위해
매일 유튜브로 치유 기도를 드려왔다.
비록 대면 기도는 아니지만
이것도 중요한 사명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은혜를 갚는 자세로 헌신하고 있다.
중병을 앓아봤던 사람이
중병 환자의 심정이 어떤 지를 잘 알아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해 줄 수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치유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도
여러 가지 영적 사인(spiritual sign)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를 속이지 않는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에게 기적을 선물한다.
그리고 기도해야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그분이 보시기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며
올바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누가복음 5:24, 25)
전도는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췌장암에서 살아난 나는
전도에 온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때가 2018년도이다.
그렇지만 평생을 전도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전도 계획은
어린 시절부터 주어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고향 교회 부흥회 기간 중
강사 목사님의 안수 기도 시 받은
마태복음 4:19 말씀이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이 말씀은 방언 통변으로 받았다.
'너희를'은 복수 2인칭 대명사인데
이 약속의 말씀에 따라
앞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할 전도자를
많이 붙여주실 것을 믿는다.
또한 내가 초등학생 시절,
조금 몸이 아파 누워 있을 때
달력에 있는 푸른 초원의 양떼가
평화롭게 풀밭을 걷고 있는 환상을 보았다.
이 환상은 한 번이 아니고
거의 온 종일 지속되었다.
어떻게 정지 사진이
동영상으로 바뀔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오랜 세월 후
나는 췌장암에 걸리게 되었고
아직 체력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잃은 양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코로나 19 당시의 노방 전도 역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가락동 소재 새벽 교회 교육 전도사로
있을 때는 서울 청계산 기도원에 올라
나의 무능함을 내어놓고
이래서 목회자가 되기 싫다고 떼를 쓸 때
하나님은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라는 누가복음 22:44 말씀과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는
출애굽기 4:12 말씀을 주시면서
나를 하산시키셨다.
내가 오늘날 매일 성경 묵상에 진력하는 이유도
하나님은 거의 모든 응답을
말씀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도에 힘쓰던 날 어느 새벽,
주님께서 말씀으로 내게 다시 찾아오셔서
격려해 주셨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5)
이에 더해 4주간 노방 전도를 받은 인원이
92명이었는데 매주 23명으로
정확히 맞춰지는 일도 있었다.
전도한 숫자가 하나도 틀림이 없이
들어맞은 것도 내겐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은 더욱 증가하여
매주 약 50명을 전도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도를 시키시기 전에
기도 훈련부터 받게 하셨다.
결국 기도가 전도로 승화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보면 기도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전도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
만일 전도 없는 기도를 하고 있다면
속히 기도하면서 전도까지 하길 권면한다.
그리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전도하시는 예수님이셨지 않은가.
내가 오랜 세월 힘들게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내게 전도의 물맷돌을
손에 쥐어주셔서
비교적 쉬운 전도를 하게 하신다.
그래서 불신자 골리앗을
췌장암 치유 간증 물맷돌로
한순간에 쓰러뜨리는 전도자가
될 수 있었는가 보다.
굳이 이런 표현을 하는 이유는
불신자들이 췌장암 치유 간증을 매개로 하는
천국 복음을 너무나 잘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는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심지어 실추된 교회 이미지와도 별 상관없이
흡인력이 높은 전도를 하고 있다.
점점 주님 오실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복음 전파일 것이다.
전도가 쉽든, 어렵든 이에 개의치 말고
주님의 지상명령
(The greatest commandment)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전도에 목숨을 건 이들이 많다.
이제 내 췌장암 완치 간증을 마치려한다.
앞으로 내가 언제까지 복음을 전하며
맡겨진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병들어 자리에 눕기까지는
지옥 심판을 앞두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천국 복음을 배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아니, 더는 걸을 수가 없어도
손가락을 움직여서 온 세계인을 대상으로
SNS 전도를 지속하면 된다.
우리 다시 천국에서 만날 때까지
충성을 다하며 신실한 증인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동안 페이스북에서, 단톡방에서
부족한 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도
감사드리며 늘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으로 행복하게 사시길 소망한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만 영광 받으소서."